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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암 표영삼님께서 환원하셨습니다.
삼암 표영삼(표응삼) 선도사께서
포덕 149년 2월 13일(화) 오전 0시 10분에 환원하셨습니다.(향년 84세)
건국대학교 병원에서 환원하신 후
당신의 시신을 기증하신 서울대병원에서 영결식을 마치셨답니다.
평소에 '주위사람들을 번거롭게 하지 말고, 일절 아무에게도 알리지말라'는 말씀에 따라
유족들은
교회와 친지등 주변에 일절 알리지 않으셨습니다.
유족으로는 오미경 사모님, 아들 진현씨가 있습니다.
삼암장님의 환원소식은 2월 14일 오후 5시 10분경
오미경 사모님과의 통화로 확인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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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정암 (sunwon27@hanmail.net)
2008(포덕149년)/2/14(목)
이 무슨 비보입니까
삼암 표영삼(표응삼)선생님의 환원 소식입니다.
삼암어른께서 유언 하시기를
내가 환원하거든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고
시신을 서울대학 병원에 기증하라
이에따라
어제 (2월13일) 환원 즉시
시신이 병원에 기증되어
아무도 모르게 장례절차를 마쳐버렸다는 것입니다
아~ 아~
좀 더 살아계셔서
우리 교중의 중심을 잡아 주셔야 할
그 어른 마져 가시다니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요
내일 아침 일찍
총부로 나아가
대책을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조용히 머리를 조아려
삼암 어른의 성령전에 심고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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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재 (podeok@naver.com)
2008(포덕149년)/2/14(목)
삼암선생님! 님의 뜻 우리가 잇겠습니다.
삼암선생님의 성령이시어! 감응하시옵소서.
대도발전을 위하여 님께서 흘리신 그 고귀한 뜻 이 불초한 후학들이 이어나가겠습니다.
천도화를 피울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도록 더욱 더 정성을 다할 것을 맹세합니다.
후손들과 저희들의 심령속에 살아계시면서 장생하시옵소서.
슬픈소식을 접한 저희들의 비통한 심정 어떻게 표현하오리이까!
성령으로 출세하시어 저희들의 앞길을 소소히 밝혀 주시고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대도중흥의 기틀을 마련하도록 간섭하여 주시옵소서.
부암 정덕재 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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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기 (jong22@nate.com)
2008(포덕149년)/2/14(목)
그 위대한 정신 후학의 몸에 되살아 나소서
아직은 배울 공부가 한없이 남았는데
아무 말씀도 남기지 않으시고 가시니
억장이 무너집니다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저희들은
여기 남아서 이제 누구에게 배우리오까
가신님 영전에
눈물만 뿌리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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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영
2008(포덕149년)/2/14(목)
삼암 표영삼 선생님 말씀을 전합니다.
삼암 표영삼 선생님 말씀을 전합니다.
(포덕149년 1월 17일) 천도게시판에 올렸던 글입니다.
오늘 약 30분간 통화 했습니다.
전화통화도 조금은 힘들어 하시며 건강이 안 좋다고 하시더군요.
저와 삼암장님과는 사제지간이나 다름없습니다.
천도교 연원관계가 아닌, 공부하는 사이에서 오랫동안 제가 모시고 배워왔던 분이기에 스승과 제자처럼 지낸지도 벌써 많은 세월이 흘렀군요.
전주에 있는 동학혁명기념관 관장직의 삼암 선생님과 사무총장의 저와의 관계는 강산도 변한다는 십여 년의 세월이 훌쩍 뛰어 넘으면서, 언제 건강이 악화될지 모르는, 삼암장님의 건강이 몹시 걱정되는 시간입니다.
작년, 동학혁명기념관 개관 기념식 행사에 초청 강사로 모셨던 일도, 조금이라도 건강하실 때 소중한 자리를 함께 하고 배우는 자세로 그리 했던 일이었습니다.
오늘 제가 전화 드렸던 이유를 설명하겠습니다.
어느 종단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천도교 종단에서도 ‘경전’만큼 중요한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런데, 최근에 삼부 경전 즉 ‘신성사법설’ 진위 공방은 교단의 정신을 뒤 흔들 주요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법설의 문제 있는 내용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상당한 시일이 경과 되면서 천도교단의 정통성 문제와 얽힐 만큼 분명한 시비를 가려야 한다는 취지에서 삼암 선생님께 자문을 구하기로 하였습니다.
삼암 선생님은, 전문 학자나 교내 연구자들의 논문을 기대한다며 한 발 뒤로 물 너 나시는 것을, 제가 신신당부 하며 ‘마지막, 후배들에게 선물 하나 주시기 바랍니다.’하며 통사정을 하였습니다.
천도교 바이블, 경전에 있어 그 옳고 그름이 오만 년 무극대도에 미치는 영향은 현재 가늠 할 수 없을 중대 사항이라고 끈질기게 건의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올 봄 즘 건강이 회복되고 날씨도 풀리면 한 번 모임을 갖고 ‘천도교 경전’ 신성사 법설에 대해 그동안 연구하고 고증하여 온 결과물을 내 놓겠다고 약속 하셨습니다.
‘법설’에서 현재, 검증하여 빼야할 부분이 분명 있다고 말씀 하시더군요.(자세히 들은 내용도 있지만 여기서는 생략하겠습니다)
해월신사, 의암성사 법설의 진위 공방에 있어 삼암장님 만큼 확실한 분별력 있는 대안을 제시할 분이 현재 학계나 교단 내에 안계시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것입니다.
삼암 선생님은 단 한 줄의 글을 쓰시더라도 철저한 고증과 학문적판단이 서지 않으면 결과를 내리지 않는 다는 것도 모두 아실 것입니다.
천도교단 내부보다 역사학계, 종교학계에서 더욱 인정받고 그에 대한 가치는 과히 동학 천도교의 ‘살아 있는 인간 문화제’라는 별명답게 우리 후학들에게 다시 없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천도교 삼부 경전, ‘신성사법설’ 무엇이 진짜고 가짜며 그 논란의 진실이 가려지는 뜻 깊은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천도교 젊은 교역자들은 물론 원로 학계 등 동학 천도교 교리 교사에 관심 있는 분들의 참여를 독려 하면서, 삼암 선생님 초청 강연회(좌담회)를 추진되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제가 삼암선생님께 드린 말씀은, 돌아오는 3월정도에 ‘법설강도회’를 갖자고 하였으니 선생님의 준비 과정과 천도교 사정을 봐가며 시일을 잡겠습니다.
[추신]- 고 삼암 표영삼 선생님의 역작 '동학'이 현재 2편까지 나왔으나, 끝편인 3편은 현재 탈고 마무리 하여 출판사(통나무)에 보내어져 있으나, 출판하지 못하는 이유는 도올 김용옥 선생의 책이 두 권이나 곧 출판되므로 삼암장님께서 양보 하시어 내년에 출판하게 되었다는 말씀을, 위 글을 쓰기 위해 통화 하면서 직접 들었습니다.
천도교 동덕숙덕 선생님들의 관심을 기대하오며 가능한 빨리 출판되도록 총부차원에서 노력해 주실것을 건의 드립니다.
송암 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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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이 본 삼암장님, [영원한 청년 표영삼]
동학연구가 표영삼/내 안에 하늘을 모시는 영원한 청년
글/ 김선미 기자· 사진/ 남영호 기자 (월간 마운틴, 2005년 1월)
◇ 동학연구가 표영삼
“생명은 생명으로부터 나와요. 처음 생명이 시작된 세포가 죽지 않고 아버지 어머니의 씨로 이어져 내 안에도 모셔져 있어요.
그 씨 속에는 온천지 생명체계가 압축돼 있지요.” 소나무는 소나무 되게 하고 사람은 사람 되게 하는 씨. 그 씨는 우주와 하나요,
동학이 말하는 하늘님이다. 그 믿음에 대한 연구와 실천으로 평생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살아온 표영삼(80세)씨. 그는 산도 그런 마음으로 오르고 본다.
청년, 때 되면 저절로 나이테가 느는 자연의 나이가 아니라 정신의 나이가 청신한 사람.
그런 사람은 일정한 굵기에서 비대성장을 멈추고 그 속이 단단하게 굳어지기만 하는 대나무를 닮았다. 모진 바람에도 부러지지 않고 바람이 불면 오히려 온몸으로 격렬한 교향악을 연주하는 푸른 댓잎 같은 사람. 청년은 새것에 민감하고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많아 낯선 곳을 향해 걷고 오르기를 좋아한다. 그런 사람은 드러내고 말하지 않아도 산사람이 많다.
산길을 걷는 것, 산을 오르는 행위. 이것 자체가 종교는 아니다. 그러나 오래도록 산에 다닌 사람들 중에는 마치 오랜 영적 수련을 한 사람 같은 기품이 느껴질 때가 있다. 산마루를 타고 넘는 바람 속에서 단련된 큰 나무들처럼.
표영삼씨는 올해로 팔십을 바라보는 청년이다. 더 이상의 새로운 희망도 없이 왜소하게 생을 소진하고 있는 듯한 심약한 노인이 아니다. 그가 나이 어린 사람들을 어려운 어른 대하듯 깍듯하게 존대하는 것부터 다르게 느껴진다.
단지 말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공경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진다. 그것은 평생 ‘동학을 하며’ 살아온 이의 삶을 보여주는 작은 단면이다. 하늘님인 내가 하늘님인 당신을 공경한다는 아름다운 자부심이 느껴지는 모습. 청년의 정신을 간직한 이의 당당함이다.
사람을 하늘처럼 섬긴다는 것
지난해 그가 펴낸 책 <동학1>은 적잖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수운의 삶과 생각’이란 부제를 단 이 책은 평생을 동학의 실천과 연구에 바친 삶의 집대성이다. 이해를 돕자면 그는 도올 김용옥이 20년 넘게 사상의 스승으로 모셔온 사람이다. 김용옥씨는 그를 이렇게 소개한다.
“어려서부터 동학운동에 몸 바친 조부의 인도로 동학에 입도해, 평생을 동학조직 속에서 활동하면서 자신을 끊임없이 계발하고 수운과 해월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는 삶을 살아왔다.
그의 삶은 동학을 이론 혹은 종교 체계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수운과 해월 두 역사적 인간의 삶과 행동의 자취를 따라 맨발로 뛰어다니며 느껴온 인생이다. 따라서 동학의 두 세기 역사에 있어서 그만큼 신앙과 신화와 신비의 모든 가면을 벗어버리고 동학의 역사적 진실을 있는 그대로 밝히려고 노력한 인물을 만나기 어렵다.”
그의 책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핍진한 세상에 희망과 용기를 줄 진정한 스승을 찾고자 목이 마른 사람들이 조촐하게 ‘동학공부모임’이란 걸 꾸려 그를 모신 자리가 있었다. 내가 첫 만남에서 단박에 그가 산사람이란 걸 알아차린 것은 양복 차림에도 비브람 창이 달린 묵직한 신발을 신고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눈빛과 몸짓 그리고 진중한 말투에 배어 있는 정취는 모두 산이 만든 것이라 느껴졌다.
동학은 흔히들 생각하는 대로 서학에 반대 개념으로 만들어진 종교가 아니다. 동학을 ‘믿는다’ 하지 않고 반드시 ‘동학 한다’고 말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표영삼 선생이 말하는 동학은 모든 사람이 하늘처럼 대접 받는 세상을 만드는 실천이고, 철학이자 삶의 방식이다. 그는 “사람은 저마다 가슴 속에 하늘을 모시고 있다.
그 하늘님은 이 세상과 별개의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다. 나와 분리된 존재도 아니고, 내 안에 모셔져 있는 온 천지 생명체계의 씨앗이다”고 설명한다.
“사람을 하늘님처럼 섬겨야 하는데 가장 가까운 아내한테는 그게 참 힘들었어요. ‘밥 잡숴요’까지는 했지만 ‘진지 드세요’라고 말하기까지는 한참 세월이 걸렸어요.”
그는 단지 말만 높이는 게 아니었다.
아내는 청소와 빨래를 하고 자신은 30년 넘게 식사당번을 맡아 가사를 분담한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던 여자들은 귀가 솔깃해졌고, 자신을 꽤나 진보적입네 생각하던 젊은 남자들은 벼락을 맞는 기분이었다. 나는 순간 그가 손수 차린 밥상을 한번 받아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팔십의 사내가 아내를 위해 공양하듯 차린 밥상이란 어떤 것일까. 인터뷰를 위해 굳이 용문산 근처 그의 집까지 찾아 간 것도 그런 생활을 들여다보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식사 시간을 피해 갔기 때문에 밥상은 구경하지 못했다. 그러나 홍삼차 한 잔을 대접하는 선생의 손길에서도 그가 오랜 부엌살림의 주인이라는 것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또 저녁을 먹고 가라고 붙잡는 것을 어쩔 수 없이 거절하고 떠나야 하는 내게 대접을 제대로 못해 미안하다고 안타까워하는 모습이 어머니의 마음 그대로였다.
그가 식사당번을 맡게 된 것은 아들이 고등학생일 때부터였다.
아침 준비에 새벽잠을 설치는 아내가 안쓰러워 간소하게 먹자고 제안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밥 대신 우리 밀과 이스트를 사다 빵을 만들어 놓아요. 빵은 굽지 않고 전기밥통에 넣어두면 부드러워서 먹기가 좋아요.
야채샐러드를 같이 먹는데 양상추, 양배추, 노란 피망, 홍당무, 샐러리, 양파 그리고 사과를 꼭 넣어야 맛이 좋아요. 모두 날로 채를 써는데 당근에 든 비타민B는 기름에 볶아 먹어야지 그냥 먹으면 소용이 없어요. 그래서 당근을 기름에 살짝만 볶아 불을 끈 다음 그 위에 양파를 얹으면 남은 열로 맛 좋게 양파가 익어요….”
숙련된 그리고 분명한 철학이 담겨 있는 요리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말이다. 그가 설명하는 아침 식사는 자연주의자 헬렌 니어링의 <소박한 밥상>을 꼭 닮았다. 복잡하고 세련된 사람들을 위한 복잡한 음식이 아닌 소박한 삶을 영위하는 이들을 위한 소박한 음식, 조리와 가공을 간소화 해 주부의 노동을 덜고 남은 시간에 보다 만족스러운 일에 열정을 쏟아 붓도록 하자는 것.
여자가 아닌 남자가 아내를 공경하는 마음에서 그런 결단을 했다는 것부터가 놀라운 일이었다. 그는 가사 분담은 ‘여자에 대한 양보나 도와주는 게 아니라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했다.
어떤 청년이 이보다도 더 진취적으로 열려 있는가.
산행은 일상에서 비일상의 공간으로 이동하는 것
“수운과 해월 선생이 다닌 곳이 모두 산이에요.
그걸 찾아다니는데 둘이서 가면 대화를 하게 되니까 느낌이 없어져요. 혼자 걷는 심정을 알 재간이 없어요.”그는 52세인 1977년부터 20여 년간 동학의 사적지를 직접 찾아다녔다. 높은 산은 아니어도 모두가 잃어버린 길을 찾아 헤매는 고독한 여로였다. 그는 혼자 걷는 산행을 풍경화처럼 묘사했다.
“산에서 한 열흘 정도 지내면 고절감이 느껴져요. 골짜기에 벌이 날아와 앵앵거리는 소리가 긴 여운을 남기며 사라져 가고, 아궁이에 불을 때면 연기가 땅을 핥아나가는 그런 저녁엔 가슴이 뒤집어질 정도로 내 존재가 고절해요.”
그때가 바로 산사람에게 새로운 눈과 귀가 열리는 시간 아닌가.
“나는 시골 살아서 음악에 귀가 열리지 못했어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산에서는 음악이 들려와요. 혼자 듣기 아까운 지경으로 귀가 열리지요. 산에서도 감성이 가장 많이 열리는 때는 적막감이 밀려오는 늦가을이에요.”
그는 이렇듯 산행을 통해 ‘일상에서 비일상적인 공간’으로 이동하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서울에 전차가 다니던 시절 유리병에 반찬을 담은 ‘륙쌕’을 메고 산을 오르던 때, 당시는 그런 모습을 보고 “배때지가 불러 소화가 안 되는 사람들이 있구먼”하고 비꼬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배고픈 시절이었다. 사람들처럼 산도 헐벗어서 대부분 민둥산이었다.
그러나 나무가 우거지지 않아 오히려 멀리 내다보기는 좋았다. 항상 어디든 새로운 곳을 찾아 가면 가까운 산에 올라가 그 지역을 한 눈에 읽어 보는 것이 그의 취미였다.
“도시의 색깔과 공기도 산에 들어가면 맛이 달고 싱싱해지잖아요. 정신을 목욕하는 즐거움이 있어요. 건강을 생각해서 산에 다닌 게 아닌데 다니다 보니 건강도 저절로 왔어요.”
“나는 잘 모르는데….” 그는 항상 이렇게 말을 꺼낸다. 그러나 정작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자연과학에서 철학·신학·역사까지 그 해박한 지식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다리가 제일 먼저 노쇠해져요. 그런데 산행을 많이 한 사람은 내려올 때 달고 편안하고 기분이 좋아지잖아요.
산에서 다리심이 생기면 늙는 걸 방지해요. 다리가 심장의 펌프질을 도와 심장에 무리가 적고, 땀을 많이 흘리니까 신장도 쉬는 시간을 갖게 돼 좋대요.”
그도 처음 산에 오를 때는 쓸데없는 경쟁심에 사로잡혀 허겁지겁 올랐다고 한다. 그러나 이제는 힘닿는 대로 굼벵이 기어가듯이 산길을 오른다.
그러면 오히려 숨도 덜 차고 산의 빛깔과 소리가 생생하게 전해진다고 했다. 그는 이런 ‘굼벵이식 산행’으로 지금도 북한산 백운대까지 쉬지 않고 한번에 오를 수 있다고 했다. 천도교 기관지인 <신인간>의 주간으로 일할 때 사람들을 이끌고 사적지 탐방을 다니면서 항상 앞장을 선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내가 앞장 서 산을 올라야 다른 사람들이 빨리 못가요. 그래야 어린애나 여자들까지 모두 끝까지 함께 갈 수 있어요.”
우리나라에서 어린이와 여자의 인권 문제를 가장 먼저, 가장 치열하게 역사의 전면에 내걸고 싸운 것이 동학이었음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말이었다.
“산도 종교와 같아요. 자꾸 꾸준히 가면 그냥 산이 아닐 수 있어요. 경건한 마음을 느끼면 자연과 내가 둘이 아니란 생각에서 일상적으로 보고 느끼던 것과 다른 세계를 볼 수 있어요.”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은 먼저 자기가 딛고 서 있는 세상을 바로 볼 줄 알아야 한다.
그가 낮은 곳 울타리 안에 안주하지 않고 자꾸 높은 곳에 올라가 탁 트인 세상을 보고 싶어 하는 것도 그런 열망 때문이다.
“나는 개혁이 좋아요. 인간의 존엄함을 보장하는 세상을 만들려면 새로운 틀을 만들어야 해요.
사회의 틀이 바뀌면 사람들이 지향하는 희망이 바뀌어요. 꿈이 달라지죠.” 그가 산에서 보고 싶은 세상이다.
표영삼 선생은 Y자 모양의 긴 나무 가지를 들고 산길을 걷는다. 그가 길을 내는 방식은 단순하다.
나뭇가지로 산을 덮은 마른 갈잎이나 솔가지들을 살살 쓸어주는 것뿐이다. 해거름 녘 그가 만든 오솔길을 따라 집 뒤 곰산에 함께 올랐다. 물론 그의 걸음걸이는 팔십이란 자연의 나이를 거역하진 못했다. 그러나 거기엔 여느 청년의 걸음이 도달하지 못하는 깊이와 울림이 있었다.
산길을 내려올 즈음 그는 다시금 긴 여운을 남기는 말을 보탰다.
‘세상에는 언제나 풀리지 않는 과제가 있다. 모든 문제가 풀리고 영원히 평화로워지는 것은 죽음뿐이다. 결국 새로운 문제를 꾸준히 해결하고 넘어가는 게 삶이다’라고. 어렵게 산을 넘으면 새로운 봉우리가 나타나고, 물을 건너면 다시 새로운 격랑을 만나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자신의 삶에도 여전히 많은 산이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팔십에도 말이다.
2005년 봄 <동학2,3>권이 출간되면 새롭게 길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동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자료를 CD롬으로 만들 생각으로 다시 사적지 답사에 나설 계획이다. 최신 기종의 디지털카메라를 사서 틈틈이 그 기능도 익히고 있다. 팔십의 청년이 다시 산으로 떠난다.
따뜻한 겨울날 저녁, 곰산 기슭에는 난데없이 쑥과 냉이가 돋고 있었다.
이 씨앗도 생명의 자기 원동력에 의해 피어난 것이리라. 봄은 그렇게 스스로의 의지로부터 온다. 청춘이란 인생의 봄날도 그렇게 자신의 의지로부터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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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암장님 영전에 바치는 글..
삼암장님,
수운 대신사님의 참 제자기 되시어
해월신사님 분신이 되시어
전국 방방곡곡 심신산천 동학과
천도교 성지를 찾아다니시고
교단 역사를 새롭게 조명 하셨으니
그 공로가 하늘에 이르렀고
땅에 스몄으니
과히 천도의 생명이라
아니 말 할 수 없나이다.
삼암장님,
오직 하나 밖에 없는 삶을
우리 교단에 바치셨으니
그 교리는 일월처럼 밝게 빛나고
지나간 발자취는
한울님의 흔적이 분명하게
남아 있으리라 짐작 하고도 남으며
님의 숨결은
우리 후학들에 만년 귀감이
되리라 확신 합니다.
삼암장님,
님은 진실로 천도교인 이었고
대신사님의 명교를 지켰고
해월신사님의 가르침을 체행하셨고
의암성사님의 실천을 몸으로
증명하셨으며
춘암상사님의 참에 살고 거짓에
죽는다는 만고불변의 말씀을
한치의 어긋남이 없게
수행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삼암장님,
저는 참으로 슬픔과 기쁨으로
님의 마지막 가시는 길에
동학천도 선열님의 명단에 올리고자
하나이다.
부디 성령 출세하시어
우리 교단의 방황을 바로 잡아 주시고
님이 그토록 원하던
보국안민 포덕천하의 세상을 위해
작은 힘이나마 보태겠습니다.
송암심고.
*************
삼암장님 영전에
길
― 삼암장님 영전에
윤 석 산
잃어버린 ‘우리’를 찾아 삼암장님께서는
늘 길을 떠나셨습니다.
켜켜이 쌓인 시간과 시간의 오랜 덕게를 들쳐내며
시간 속에 묻혀버린 ‘우리’를 찾아 세상의 곳곳을 떠도셨습니다.
촌부를 만나면, 촌부의 모습이 되어
촌부의 이야기를 듣고
바위를 만나면 바위의 마음을 열고
바위 안으로 들어가 앉으시며
숨겨진 이야기를 풀어내고, 잠겨진 역사의 빗장을 열어
오랜, 아주 오랜 시간 속 묻혀버린 ‘우리’를 문득 찾아내곤 하셨습니다.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경기도,
태백과 소백, 그리고 세상의 모든 산들이 어우러진
오지의 산간 마을 마을마다
삼암장님의 발길이 닿는 곳에서 우리는 잃어버린 ‘우리’를
다시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하신 삼암장님은 우리에겐 ‘길’이었습니다.
묵묵히 몸으로 알려주신 ‘길’이었습니다.
길은 늘 세상의 안에서 시작하여 세상의 안으로 벋어가고 있음을
삼암장님은 우리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벋어나간 그 길은 또 늘 새로운 길로 이어지고 있음도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오늘도 삼암장님은 당신이, 당신을, 당신의 길을 떠나셨습니다.
예의 그 행장을 차리시고, 잃어버린 ‘우리’를 찾아 길을 떠나셨습니다.
남루의 세상 몸 덩그마니 남겨두시고
바위를 만나면 바위의 마음을 열고,
바람을 만나면 바람의 자락을 다스리고
나무를 만나면, 나무의 잎새마다 반짝이는 이야기 귀기우리며
우리의 길을 찾아 오늘도 삼암장님께서는 또 길을 떠나셨습니다.
길이 길임을 우리에게 알려주신, 그 길로
오늘
삼암장님께서는 떠나셨습니다. 아, 아 떠나셨습니다.
포덕 149년 2월 14일 멀리 타국에서 현암 심고
*************
아~~삼암장님 !
삼암장님 영전에 삼가 옷깃을 여미고 머리숙여 명복을 비옵니다.
삼암장님은 저를 대하실 때 마다 언제나
잔잔한 미소를 지으시며
'설광, 공부해라. 부귀영화를 쫓는 것은 헛된 미망이며 자학이라' 하셨지요.
'나의 행불행은 결국 자신이 선택하는 길이라'고도 하셨고요
- 님이 걷는 길 앞에는 늘 바람과 구름과 비를 벗삼고
때론 풀벌레 날짐승도 함께 하셨지요
- 님의 해박한 교리 교사,
그리고 스승님의 행적지를 발로 뛰고 온 몸으로 느끼고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을 전해주셨던 님
- 이제 삼암장님의 가르침을 어디가서 본을보고 어디가서 배우리까
눈물이 앞을 가려 펜끝이 멈춥니다.
부디 성령출세하시어 우리들의 앞길을 소소히 밝혀주소서
삼암장님 존경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후학 김영백 삼가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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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하신 분
내 죽거든 시신은 기증하고
내 죽거든 장례도 지내지 말라.
그 유언을 지켜준 유가족님들도
그런 유언을 남긴 선생님도.
남은 천도교인인 우리가 무엇을 배워야할지를
가슴깊이 새겨 주시고 우리들의 곁을 떠나셨습니다.
아니 떠나신것이 아니라
영원한 사표로 다시 우리앞에 성령출세 하셨습니다.
크시고, 거룩하시고, 고귀한 몸짓으로
천도를 향하여, 우리들 동학인을 향하여
우리들의 못난 정신들을 향해 꿋꿋이
다시 살아 우리곁에 계십니다.
포덕 149년 2월 15일
경월당 김성자 심고.
*****
삼가 명복을 빕니다
삼암 선도사님
함께 자리하여 가까이에서 직접 말씀을 들은적은 없으나
경주박물관 동학예술제에서 영상으로 소개하시던 모습과 말씀이 귀에 맴돕니다
우리교의 뒤를 이을 후학이 잘 하고있어 안심하고 가실 수 있으셨는지요
활발히 움직이는 청년천도교를 보여드리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그러나 요즘 게시판이 시끄러운것이 필요한 과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삼암장님을 이어 공부하시고 준비하시는 분이 분명 계시겠지요
생전의 간절한 기도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성령으로 출세하시여 늘 우리와 함께 하소서
선수당 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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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존경하는 삼암 표영삼선생님의 성령이시어! 육신은 가시어도 성령님은 한울님과 저희 후학들과 영원히 살아 장생하시고 세세히 저희들의 앞길을 밝혀 주소서1
삼가 최동환 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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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김명세
2008(포덕149년)/2/14(목)
환원 하시다니요
영결식 까지 끝나고 게시판 에 올린 글을 보고야 환원 소식을 접한
후학 을 용서하십시요
삼암장 님
저는 어디가서 예 를 올려야 하나요
울고,울고 또울고......
부디 성령출세 하시옵소서
깊은 심고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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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순화 (tlatnekd@naver.com)
2008(포덕149년)/2/14(목)
삼암장님 영전에
지인들과 저녁을 들고 우연히 핸드폰 을 보니 삼암 선생님 환원 메시지, 끝까지 읽지도 못하고 달려간 서울대 영안실 그곳에 가서야 다시 연락하여 시신기증 사실 확인, 빈소도 차리지 않으시고 정말 선생님답게 가셨습니다.
처음 제가교회에 나갔을 때 반겨주셨던 선생님, 처음 여성회보 창간 제의에 동의해주시고 여성 회보가 나올 수 있도록 힘이 되 어 주셨던 선생님 해월신사님 유적지순례에 기자자격으로 함께 가자고 하셨던 삼암 선생님 그러나 이상한 천도교 풍토 때문에 전 그 순례 길 에 참여하지 못 했습니다.
그리고 추천해 주셨던 회보기자도 몇 년이 지나서 겨우 하게 됐지만 결국 그 자리도 빨갱이 “시‘를 썼다는 이유로 겨우 1년 남짓 지나서 그만 두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강북구청 명예기자로 벌써 5년입니다.
아마 이생에서 기자팔자 하나는 타고 났는가 봅니다.
천도를 닦는다는 천도교가 일반 공기업보다 더 바람과 줄서기가 심한 곳 이런 살벌한곳에서도 오직 학문적 열정과 곧은 품성으로 천도를 실천해 오신 선생님!
이제 가셨습니다. 살아생전 보람 있는 길을 걸으시다 이제 우주의 품속으로 훌훌히 떠나셨습니다.
삼암 선생님 안녕히 가세요. 다시는 그 모습 뵈올 수 없지만 저희들 가슴에 영원히 살아 계실 것입니다.
삼암선생님 모시고 직동으로 정선 싸내[米川]로 해월 신사님의 발자취를 더듬던 그때는 삼암선생님 참 건강하셨었는데 참 세월이 빠릅니다. 세월과 함께 어르신들은 자리를 뜨십니다.
님 들이 앉으셨던 그 자리는 아무도 채우는 이 없이 님 들이 가신 그 자리는 텅 비어 갑니다.
님들의 자리가 비어가듯이 우리들의 마음도 텅 빈 허공이 되어갑니다.
남을 번거롭게 하지 않으시고 땅이 실어주고 하늘이 덮어주신 은혜 이 세상으로부터 받은 은덕을 시신기증으로 보답 하시고 가신 선생님 영화로운 복된 자리 편히 쉬소서.
심수당 삼가 삼암선생님 영전에 애도의 듯을 표하며 응석을 부려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