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안
글쓴이 수리양
내가 이상해졌다. 생명력 없는 꽃들을 조우하거나 대답없는 식물들을 지켜보는 것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지만, 즐거워졌다. 감독관이 독설을 퍼붓고 참을 수 없는 모욕을 안겨주어도 시간이 가면 즐거웠다. 내가 일을 마치고 마굿간에서 휴식을 취할 때마다 찾아오는 아이크 덕분이었다. 하늘하늘 거리는 원피스를 입고 나를 찾아오는 그녀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쌓여있는 모든 울분을 녹여버리기에 충분했다. 그녀는 매일 같이 나를 찾아왔고, 우리는 행여나 목소리가 새어나갈까 은밀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더위로 찌든 시간이 지나도, 낙엽으로 스러지는 가을이 와도, 펑펑 함박눈이 쏟아지는 겨울이 와도, 아이크는 나를 만나러 와주었다.
아이크 역시 나처럼 인간들에게 마을을 습격당하고 여기저기 팔려다닌 엘프였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녀가 겪었을 수많은 고초들이 눈에 선히 보였다.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들의 행동을 몸으로 겪으며 우리 둘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우리 둘이 서로를 사랑하게 된 것은 필연적일지도 몰랐다. 실로 100년만에 만나는 엘프이기에 형언할 수 없는 반가움과 애틋한 감정이 피어올랐기에 아이크를 향한 애정은 더욱 강했다.
“있잖아, 아이크...”
“응?”
난 그녀의 빨간 머리카락이 마음에 들었다. 바라보면 내 얼굴만 또렷하게 비추고 있는 아이크의 맑은 눈망울이 좋았다. 나보다 가는 그녀의 목소리가 예뻤다.
“조... 좋아해...”
나는 그녀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 수줍게 물들어 있는 내 얼굴을, 아이크는 동그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가슴에서 미어져나오는 뜨거운 감정은, 도무지 주체가 할 수가 없다. 아이크가 무슨 말을 할까 너무나 기대되고 두려워서 나는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이 순간, 모든 사물의 시간은 멈춰있었다.
“좋아해.”
“응?”
“나도, 나도 시드 좋아해.”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아이크를 세게 껴안아주었다. 엉망진창이었던 내 일상들이, 하나씩 자리를 잡아가는 느낌이었다.
“야 쓰레기, 오늘은 집청소 좀 해야하니까 빨리 나와.”
한겨울인데도 눈은 내리지 않고 어설픈 진눈깨비만 기분 나쁘게 흩날리는 어느 날이었다. 그다지 반갑지 않은 얼굴의 감독관이 내가 쉬고 있는 마굿간에 와서 난데없이 집청소를 시켰다. 정원을 가꾸는 나로서는 확실히 겨울에는 일거리가 없다. 게다가 집청소를 하러가면, 집에서 살고 있는 아이크를 볼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얼른 옷을 챙겨입었다. 몇 년동안이나 이 저택에서 일을 했어도 집이 더러워진다는 이유 때문에 나는 단 한번도 안으로 들어가보지 못했다. 감독관은 내게 도서관 청소를 시켰다. 조만간 누군지 몰라도 높은 분이 온다는 말을 하며 깨끗이 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나는 아직 한 번도 주인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주인이 소장하고 있는 너무나 넓은 도서관으로 미루어 볼 때 굉장히 학식이 풍부한 학자의 얼굴이 연상된다. 물론 그것도 주인이 책을 좋아한다는 전제가 깔려있지만. 도서관은 너무나 넓어서 혼자서 청소하기에는 무리였다. 도서관 전체를 훑어보기 위해 걸어다니기만 해도 몇시간은 걸릴 것 같았다. 게다가 오랫동안 청소를 하지 않아 먼지도 뿌옇게 가라앉아있었다.
한숨을 한 번 푹 내쉬고 물걸레를 집어들었다. 언제 끝날지는 감조차 잡을 수 없었지만, 트집 잡히지 않기 위해 나는 열심히 청소했다. 하지만 도서관은 역시나 너무 넓었다. 나는 혹시나 감독관이 나를 감시하고 있지는 않을까 싶어 주변을 둘러본 뒤 그대로 주저 앉았다. 집안 청소하는 것도 절대로 쉽지 않다는 사실을 체감하며 나는 아직 까마득하게 남아있는 일거리를 생각했다.
“라이...안?”
마침 내 눈에 엘프어로 적혀있는 책이 보였다. 책의 제목은 라이안이었다. 책장 가장 아래 모서리에 꽂혀있는 것으로 보아하니 그다지 자주 찾는 책은 아닌 모양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엘프어라 왠지 반가운 느낌이 들어서, 책에 가라앉은 먼지를 훨훨 털고 펼쳐 보았다.
한참 뒤, 나는 책을 덮고 다시 제자리에 꽂아넣었다.
“라이안이라니... 저런걸 누가 되고 싶겠어. 차라리 죽는게 낫지.”
머릿속에서 라이안과 관련된 상상이 떠오르자 나는 몸서리치며 지우려고 애썼다. 재수 없는 내용들 뿐, 쓸모없는 책이 분명했다. 그리고 나는 그때, 라이안이 되느니 죽음을 택하겠다고 결심했다.
그 때, 나는 흘리듯이 분명히 그렇게 결심했다.
겨울이 지나 봄이 왔다. 여느 날처럼 아이크는 예쁘게 차려입고 내가 쉬는 곳으로 찾아왔다. 만나는 시간은 하루에 몇시간도 되지 않아서, 나는 아이크와 조금이라도 더 있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아이크의 얼굴을 보고 싶고 만지고 싶었다. 하루종일 일을 하면서도 아이크의 웃음소리는 귀에서 어른거리고 머릿속은 아이크에 대한 생각으로 미어터질 것 같다. 이미 내 삶의 전부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그녀였다. 나는 소중한 그녀의 온기를 기억하며, 처음으로 그녀와 입을 맞추었다. 처음이라 서툴고 어색했지만 내 입술에 전해지는 아이크는 따뜻했다.
“걸렸군.”
우리는 갑자기 들려오는 말소리에 깜짝 놀라서 얼른 몸을 떼었다. 감독관이 비릿하게 웃으며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이봐 이봐 엘프년. 네가 밤마다 여기로 오면 아무도 모를 것 같더냐?”
감독관은 작대기를 주워들더니 경직되 있는 아이크를 사정없이 때렸다. 나는 얼른 달려들어 아이크를 감쌌고, 감독관이 들고 있는 둔기는 나의 허리와 엉덩이를 강타했다. 살갗이 찢어질 듯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입을 악물고 새어나오는 신음을 밀어넣었다.
“장난감 주제에, 어디서 싸돌아다녀?”
너무 맞아서 몸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아팠다. 미치도록 아팠다. 감독관은 양손에 아이크와 내 머리를 붙잡은채 저택 안으로 질질 끌고 갔다. 짙은 통증이 내 시야를 흐려놓아서 정신을 잃어버릴 것 같았지만, 아이크가 걱정이 되어 나는 실낱같은 의식의 끈을 붙잡고 있었다. 감독관은 남자 하인을 시켜서 나의 상체를 일으켰다.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저택을 울리고 어떤 남자가 등장한다. 휘황찬란한 옷이 나의 의식을 더욱 엉망으로 만든다. 내가 짐작하기에 저 남자가 우리들의 주인일 것이다.
“하하하, 그동안 정말 재미있었어. 노예로 잡혀있는 엘프들끼리 사랑하는 사이가 되다니 말이야. 매일매일 얼굴이라도 보겠다고 도둑 고양이마냥 빠져나가는걸 누가 모를줄 알았어? 도저히 웃겨서 견딜 수가 없단 말이지. 이봐 너, 너는 네가 좋아하는 아이크가 뭐하는 애인줄은 알아?”
“말하지.... 마요... 제발... 말하지 마요...”
“아아 걱정 마. 말은 하지 않을테니까. 말하는 것보다 보는게 더 빠르지.”
지이익하고 그 남자는 아이크의 옷을 찢는다.
“별거 없어. 그냥 노예일 뿐이야. 너랑은 다른 일을 하는 노예.”
아이크는 울고 있었다. 하지만 원망스럽게도 나는 의식이 끊겨져가고 있었다. 죽여버리고 싶은 저 인간, 제대로 보지도 못한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치욕에 젖어서 나는 분노했지만 그래도 저항하지 못했다. 나는 너무도 무력했다. 사랑하고 있는 여자를 내 손으로 지키지도 못했다는 사실은 더욱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주인은 실컷 아이크의 육체를 유린하고 일어섰다. 그러자 이번에는 감독관이 아이크의 가녀린 육체를 어루만진다.
“믿겨져? 이런 여자야. 네가 사랑한 아이크는 이런 일을 해온 여자라고.”
기억들이 갈갈이 찢겨져서 불길 속으로 의미없이 타올랐다. 설명할 수가 없다. 좌절 따위와는 비교도 안될 불길이었다. 미처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분노는 아니었고 허무는 더더욱 아니었다. 전신을 전율케하는 그 감각은 분명, 살의였다.
내 뒤에 하인의 머리를 붙잡고 바닥으로 내리쳤다. 내 의지는 전혀 없었다. 내 기억 깊은 곳에서 어렸을 때 배웠던 마법 수식들을 끄집어 내어 그대로 마법을 시전했다. 재수없게 웃고 있는 감독관의 가슴에 에너지 볼이 통과한 자국이 생겨났다. 하지만 주인만은 허리춤에서 칼을 빼들고 내가 날린 모든 마법을 쳐냈다. 그리고는 사뿐히 내 배에 칼을 찔러넣는다. 흐릿해져가는 의식 속에서, 아이크의 비명소리가 귀를 멍멍하게 울릴 뿐이었다. 결국 나는 또다시 패배해버린 것이다.
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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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일은??
헉...............핑크빛분위기다가 갑자기 ㄱ-
그러게. 또 분위기 험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