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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기독교역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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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기독교역사 자료 스크랩 강화읍구역과 박능일 전도사
이은용 추천 0 조회 150 10.07.18 20:1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경인열린신문에 <강화기독교역사 이야기 13회>에 올렸던 글입니다. 

 

강화읍구역과 박능일 전도사

행정학박사 이 은 용

강화기독교역사연구회 회장


1900년대에 들어 새로운 지평을 연 강화 교회는 이미 본토는 물론 교동, 삼산, 서도의 오지 섬까지 교회가 세워졌다. 이제까지 강화전체를 한 구역으로 편성하였던 강화구역을 잠두교회(잠두교회라는 이름은 교회가 위치한 지역이 누에머리와 같다고 해서 잠두부락이라고 불린데에서 연유한다)를 중심으로 한 강화읍구역, 섬 지역을 묶는 교동구역, 기타의 강화지역으로 하는 강화구역 등 3구역으로 재편했다.

강화읍구역은 현재의 강화중앙교회를 말하는데, 이때 담임자는 박능일(朴能一) 전도사였다.  그는 1900년 12월 평양에 신학회가 개설되자 초대 전도사 김상임과 함께 전도사 과정을 이수하여 1901년 정식으로 본처 전도인이 됐다.

박능일 전도사는 강화부 삼해면 상도동(현 송해면 상도리)출신으로 초창기 강화선교에 중심적 인물인 김상임의 제자로 서당을 경영하던 한학선생이었다. 1894년에 미국선교사 조원시(G. H. Jones; 趙元時)로부터 전도를 받고 입교하였다. 2년 후 1896년에 그의 자택인 송해면 홍의촌에 전도인 이명숙과 함께 종순일, 김경일, 권신일과 그의 제자 20여명을 중심으로 강화에서 두 번째 교회를 설립한 인물이다.  

1899년에 인천 내리교회에 조원시가 운영하던 소년매일학교(남학당)의 교사로 일하면서 학교운영 요령을 배웠다. 박능일 전도사는 잠두교회 담임자로 부임하자 곧바로(1901년 4월 1일) 교회 부설로 교육기관인 잠두의숙(蠶頭義塾)을 설립했다. 기독교식 신식교육을 통해 민중 계몽과 선교목적을 동시에 이루고자 했다. 교육운동이야 말로 쓰러져 가는 국권을 회복하는 길이며, 교회가 사회를 구원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어린 청소년들이 제대로 된 교육시설이 없던 시기여서 많은 학생들이 모였다. 교육 내용도 박 전도사의 한학과 선교사들의 새로운 서양학문을 병행하여 가르쳤으니 인기가 높았다. 이 잠두의숙은 후에 ‘강화제일합일학교’로 정부로부터 승인하면서 정규학교로 이어져 오다가 오늘의 ‘합일초등학교’로 발전했다.

초기의 강화교회를 이끌어 가던 김상임 전도사가 1902년 3월 별세하자 박 전도사가 그 뒤를 이어 나갔다. 박능일은 김상임의 한학 제자였지만, 김상임이 개종한 후에는 신학공부와 복음사업에 있어서도 스승의 길을 ?았다. 이때부터 강화의 기독교 지도자는 교항의 김상임 축에서, 자연스레 강화읍 잠두교회 박능일의 축으로 옮겨졌다.

박 전도사는 상(喪)을 당하였을 때 적당한 매장지가 없어 난감해 하는 교인들의 딱한 처지를 보고 토지를 교회매장지로 헌납하였다. 1938년 9월 16일자 《조선감리회보》에 의하면  그는 교회묘지로 당시 시가 100원 상당의 임야 3,163평을, 최봉현씨는 53원 상당의 임야 740평과 묘지지기 생활비명목으로 75원 상당의 밭 748평을 교회에 바쳤다고 전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뜨거운 선교열정은 20세기 초기 강화교회가 개인의 영적 구원은 물론 국가와 지역사회를 구원하는 신앙공동체의 역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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