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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과 양반들 사이에 많이 쓰였다.
한자가 좋은 글자요 한자를 배우고 써야한다고 떠드는 학자들이 한문으로 된 조선왕조실록은 말할 거 없고, 한글로 번역한 왕조실록도 제대로 읽지 않고 학생과 국민들에게 거짓 지식과 정보를 가르치고 있음이 밝혀졌다. 더욱이 세종대왕의 창제정신을 살려 한글을 즐겨 써야 한다는 나를 “무식한 자, 사기 꾼” 등 온갖 욕설과 근거 없는 사실로 비난하며 내 명예를 짓밟고 있으니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오히려 자신들이 무식하고 거짓임을 알려주면서 내 명예를 짓밟은 것에 대해 책임을 물을 생각이다.
오늘날 한자혼용을 주장하고 한글만 쓰기를 반대하는 이들 가운데 “조선시대에 한글을 공문서로 쓴 일이 없다. 한글은 한문을 배우는 보조수단으로 쓰인 글이다.”라고 떠들고 있으니 일반 국민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2005년 8월 24일 상명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김슬옹님의 ‘조선왕조실록의 한글 관련 기사를 통해 본 문자생활 연구’라는 논문에 “조선시대에도 한글이 공문서에 많이 쓰이고, 양반들도 많이 썼다. 왕조실록에 한글이 언급된 문건이 947건이나 된다.”고 발표했다.
또 한자파들은 한글도 일본의 글자, ‘가타카나’처럼 한자나 또 다른 글자와 함께 썩어 써야 하는 모자라는 글자로 말하고 있다. 세종 때 한글을 처음 만들고 새 글자를 한문으로 설명을 하느라고 한자와 함께 썼던 것을 보고, 한글은 처음부터 한자를 섞어 쓰게 만든 글자이며 한자를 도와주는 토씨 정도로 쓰려고 만든 글자처럼 말하고 있다. 그것도 국어학자나 대학 교수란 이들이 그렇게 말하니 많은 일반 국민이 그런 줄 알고 있다.
그러나 한글은 일본 글자처럼 한자의 도움 없이는 완전한 글을 쓸 수 없는 글자가 아니다. 수 천년 동안 한문으로 말글살이를 하고, 일제 식민지 때 일본 한자말에 찌든 우리말과 우리의 말글살이가 좀 문제가 있을 뿐이지 한글은 세계 글자 가운데 으뜸가는 글자다. 한글이 좋은 글자란 건 유명한 세계 언어학자들이 인정하는 사실이다. 정부와 학자가 한자에 찌든 우리말을 다듬어 세계 으뜸가는 한글만으로 말글살이를 할 수 있도록 힘쓰지 않은 게 탓이고 문제다. 그런데 한자를 지나치게 숭배하는 학자들은 제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은, 자신들의 게으름과 잘못을 한글과 한글을 쓰자는 사람들에게 뒤집어 씌우고 있다.
조선시대에 한글이 한문만큼 교재나 공식 공문서로 쓰지 못한 것은 그만한 사정이 있다고 보고 안타깝다. 그러나 조선 500년 동안 최고 정부기관인 왕실에서, 양반과 부녀자들 사이에 꾸준히 쓰인 사실을 볼 수 있는 조선왕조실록에 문건에서 몇 가지 살펴보자
1. 법과 제도 측면에서 살펴보자.
먼저 세종대왕이 언문청과 정음청을, 세조는 간경도감이란 기관을 만들고 훈민정음을 보급하고 쓰게 했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반포한 해인 1446에 바로 언문을 공식문서에 쓰게 했을 뿐 아니라, 이과와 이전의 취재에 훈민정음을 시험하게 했고, 1447년에 함길도 자제의 관리 선발에 훈민정음을 시험하게 했다. 과거 시험과목으로 훈민정음을 넣은 것이다. 반포하자마자 이런 정책을 쓴 건 보통 일이 아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고 얼마 되지 않아 돌아가신 게 아쉽고 안타깝다.
법에서도 언문사용에 관한 조항이 있다. 법률 책인 경국대전에 “사채의 증서를 언문으로 썼거나 또는 증인 및 필자의 서명이 없으면 청송(聽訟)하지 않는다.”는 법이 한글 사용을 가로막았으나, “삼강행실을 언문으로 번역하여 서울과 지방 사족(士族)의 가장(家長), 부로(夫老) 혹은 선생으로 하여금 부녀자와 어린이를 가르쳐 이해하게 하고, 만약 대의(大義)에 능통하고 몸가짐과 행실이 뛰어난 백성이 있으면 서울은 한성부가, 지방은 관찰사가 왕에게 보고하여 상을 준다.”는 법을 만들어 언문 번역을 통한 백성 교육에 힘쓰게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정음청은 단종 때(한글 반포 7년), 간경도감은 성종 때(한글 반포 25년),언문청은 중종 때(한글 반포 60년)에 기관이 페지되고 한글을 살려 쓰려는 연구와 노력이 부족했으나 왕실과 백성들 사이에 꾸준히 쓰였다. 세종대왕 정신으로 언문청을 100년만 유지하면서 한글을 빛낼 연구를 하고 살려 썼더라면 우리말글살이와 문화는 몰라보게 발전했을 것이고, 임진왜란이나 일제 식민지 난리도 겪지 안 했을 것이다.
다행히 왕실과 부녀자들 사이에 한글은 꾸준히 쓰여서 죽지 않았다. 실록에 “1539년 중종 37년, 한어에 능통한 최세진이 죽었는데 그의 저서에는 언해효경, 훈몽자회, 이문집람 등이 있다. 1668년 헌종 09년에 좌참찬 송준길 등이 자음의 고저와 말소리의 청탁, 고문의 구두법과 우리 언문의 법칙을 갖추어 논했다.”다는 한글을 연구한 기록이 있다. 그러다가 1832년 순조 32년엔 “법령 시행하기 전에 법령 취지문(교지)을 미리 한문과 언문으로 써서 방방곡곡에 함께 알리라.”는 전교가 내린다. 한문만 쓰던 교지를 한글로도 써서 한문을 모르는 백성들이 볼 수 있게 한 것이다. 1866년 고종 03년에 “대왕대비가 천주교를 금하는 교서를 한문과 언문으로 반포하도록 지시하다.”처럼 국민에게 알리는 포고문을 한글로도 많이 쓰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1894년 고종32년에 고종 칙령 1호 공문식 제14조에서 “ 법률과 칙령은 국문을 기본으로 하고 한문으로 번역을 붙이거나 혹은 국한문을 섞어 쓴다.”고 규정했다. 한자만 쓰는 말글살이에서 우리 글자인 한글을 쓰는 말글살이로 바뀌고 있는 규정이다. 1896년엔 한글만 쓰는 독립신문도 창간된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지 안 했다면 우리말글살이가 많이 좋아졌을 것이다. 이 때 ‘한글 쓰기 고종 칙령’은 1948년에 나라를 새로 세우면서 ‘한글전용법’으로 되살아난다. 1905년 고종 42년에 의학 교장 지석영이 우리나라의 글 언문은 세종이 만든 훌륭한 글인데 혼탁해져 국문을 정리하고 성인들의 가르침을 번역해서 가르쳐야 한다고 건의하다. 지석영이 제의한 대로 국문을 고치다.
2. 왕실과 관공서에서 쓴 공문서 측면에서 살펴보자.
임금이나 왕비가 내린 교지나 언간, 상소문과 그 답변, 포고문, 관공서나 관리 사이에 주고받은 문서와 편지도 공용문서다. 조선왕조실록에 한글을 쓴 문건이 수 백 건에 이르지만 몇 개를 소개한다.
“세종 28년인 1446년 10월 10일에 대간의 죄를 언문으로 써서 의금부와 승정원에 보이다. 1446년 10월 13일 한 연 김종서 등이 정창손, 조 욱 등의 용서를 청하자 그들의 죄를 적은 언문서를 수양대군을 통해 가져와 보이다. 세조 03년, 중궁이 임금에게 감형을 언문으로 청하다. 1469년 예종 01년, 신미가 언문으로 상소하여 벌하다. 1492년 성종 23년, 대비의 언간을 대간과 홍문관에게 보이게 하다. 1513년 중종 08년, 임금이 의정부에 검소를 권장하는 교지를 언문으로 번역하여 부녀자와 어린이도 모두 읽게 하라고 지시하다. 1565년 명종 20년, 대왕대비가 언서 유교를 내리다. 1592년 선조 25년, 칙서를 반포하되 언문으로 써서 함경도에 많이 보내라고 전교하다. 1594년 선조 27년, 비변사가 왜적을 이간 시칠 계책을 아뢰면서 관련 문서를 일본 정탐을 우려하여 언서로 한다고 하다. 1627년 인조 05년, 인목대비가 농우의 죽음을 염려하여 쇠고기를 올리지 말라고 언문교지를 내리다. 1728년 영조 04년, 난역을 평정한 후 비망기를 대제학 윤순에게 언문으로 번역해 널리 선포하라고 명하다. 1734년 영조 10년, 경국대전의 사치를 금하는 조항을 언문으로 번역해서 방방곡곡에 퍼트리게 하다. 1801년 순조 01년, 대왕대비가 홍낙임을 사사하는 언문교지를 내리다. 1832년 순조 32년, 법령의 시행 전에 법령취지문(교지)을 미리 한문과 언문으로 방방곡곡에 널리 펴게 하다. 1865년 고종 02년, 대왕대비가 경복궁 공사에 나오지 말고 농사를 짓는 일에 힘쓰라고 한문과 언문으로 반포할 것을 지시하다.“ 등 한글(언문)을 실제 공용문서에 쓴 일이 수 없이 많다.
3. 한문을 언문으로 바꾸는 언해와 백성 교육 측면에서 살펴보자.
한글(언문)을 만든 세종대왕부터 세조, 성종, 중종, 영조, 정조를 거쳐 조선 말 고종 때까지 삼강행실 같은 한문책과 사서 삼경까지 언문으로 바꾸는 일을 꾸준히 했다. 1444년 세종26년, 집현전 교리 최항, 부교리 박팽년 들에게 언문으로 운회를 번역하게 하다. 1461년 세조 07년, 최항, 한계희 등 30여 인에게 명령해 한글을 사용해 누에치기 책(蠶書)을 번역하게 하다. 1464년 세조 10년에 김수온, 한계희, 노사신 들에게 금강경을 번역하게 하다. 1481년 성종 07년에 임금이 언문으로 된 삼강행실열녀도를 박아서 부녀에게 강습하도록 예조에 교지를 내리다. 1506년 연산군 12년에 대비의 탄일 전문을 언문으로 번역해 분포하게 하다. 1514년 중종 9년에 한글로 번역한 의학 책을 정원에 내리고 약을 만들어 군사들에게 나누어주게 하다. 1546년 명종 01년에 백성의 교화를 얘기하며 중종 때 언문으로 번역한 소학, 삼강행실을 반포했으나 풍속을 문란하게 하는 이가 간혹 있으니 거듭 반포해야 함을 아뢰다. 1596년 선조 29년에 포수와 살수의 교육방법으로 기효신서 언문번역 문제를 훈련도감이 아뢰다. 1613년 광해 05년에 홍문관이 효자, 충신, 열녀의 자료를 모아 간행하는 방법으로 시종조 때의 시찬 언해를 언급하다. 1658년 효종 09년에 완남부원군 이후원은, 김정국이 해서 관찰사로 있을 때 펴낸 강민 편을 언해하여 시골 백성들을 교화한 경험을 얘기하여 이 책의 간행을 허락 받다. 1668년 현종 9년에 중부시가 소학언해를 종친의 교육용으로 인쇄하기를 청하다. 1734년 영조 10년에 경국대전의 사치를 금하는 조항을 언문으로 번역하게 해서 방방곡곡에 배포하게 하다. 1784년 정조 18년에 운관으로 하여금 무원록언해를 인쇄 반포하게 하다.
4. 백성들의 편지와 상소문, 투서와 방(대자보) 측면에서 살펴보자.
양반도 아녀자에게 쓰는 편지는 한글로 썼으며 백성들이 올린 상소문과 이름을 숨긴 투서를 한글로 많이 썼다. 또한 외국인이 모르게 외교나 군사 비밀 편지에 한글을 쓴 일이 있다.
1449년 세종 31년에 세종이 의정부 하연 등에게 언문으로 20여 장 기록하여 사대부들의 불교 태도와 집현전 학사들의 그릇된 점을 비판했는데 어떤 사람이 하정승을 비난하는 글을 벽위에 쓰다. 1453년 단종 01년에 별감 부귀가 시녀 월계에게 언문으로 서신을 중비에게 써 주도록 청하다. 1458년 세조 04년에 중궁이 임금에게 김분, 김인의 감형을 언문으로 청하다. 1466년 세조 12년에 대사헌 양성지가 군사기밀 보호를 위해 총통등록 등 문적을 언문으로 베껴 쓰고 태워없애자는 상소문 올리다. 1469년 예종 01년에 금강경과 법화경에 능하지 못한 자를 환속시킨다는 말을 듣고, 신미가 언문으로 상소하여 벌받다. 1485년 성종 16년에 호조판서 이덕량 등이 저자 사람들의 익명 투서 두 장을 바치다. 저자 사람들이 언문으로 호조 당상을 욕한 것은 용서할 수 없다고 하다. 1504년 연산 10년에 신수영이 언문으로 된 익명 언문투서를 비밀히 아뢰다. 1527년 중종 22년에 대신들을 불러 세자에 대한 양법 범인을 찾는 문제를 의논하며 “자수하는 자는 죄를 면해주고 알면서도 고하지 않는 자는 죄준다고 포고문을 언문으로 바꿔 써서 내외에 방을 붙이기로 하다. 1545년 명종 00년에 윤임이 언서로 비밀하게 통하다. 1610년 광해 01년에 의금부에서 이홍로의 처 기씨가 언문으로 쓴 단자를 상언하다. 1624년 인조 02년에 황정욱 탄원서에 언서로 밀통한 왕자의 밀찰이 언급되다. 1629년 인조 07년에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왜차에 대한 실정을 묻다. 왜차가 중국을 도와 오랑캐를 토벌하고 언문과 악장을 배우러 왔다고 하다. 1684년 숙종 10년에 경안군 부인 허씨가 보낸 혼사에 관한 언서 청원을 해결하다. 1743년 영조 19년 정몽주 후손 중 늙은 부인이 언단을 올려 제사 지낼 것을 청하다. 1752년 영조 28년에 익명시가 나돈다는 대신의 말에 영조가 온천에 갔을 때 익명 언서로 수령을 비방한 사건을 언급하다. 1787년 정조 11년 김동익 등 여러 역적들의 역모에 대해 이유적이 언서로 아비 유학 이복운에게 보내오다. 1801년 순조 01년 이만수 천주교 비난 상소에, 이가환은 이승훈이 구입해 온 사서(邪書)를 언문으로 변역 하여 널리 전파하였다고 한다.
5. 마무리 말
이렇게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조선 500년 동안 한글은 왕실의 부녀자와 평민 사이에 꾸준히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나라에서 정책으로 그 사용을 깊게 연구하고 사용하는 환경을 만들지 안 했으며, 나라 글자로 인정하고 가르치지 안은 게 문제였다. 아마 중국 때문에 ‘언문’이라고 하고 우리가 우리 글자를 쓰는 걸 꺼린 거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에 1539년 중종 39년에 “주양우가 중국인에게 언문을 가르쳐 준 사건이 있어 사신에게 누설하지 말 것을 당부하다. 중국인에게 언문을 가르쳐 준 주양우를 추국하여 처벌하다.”는 내용이 그런 짐작을 하게 한다. 19세기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중국이 패하면서 우리는 그들의 지배를 벗어났고 국호를 ‘대한제국’이라고 하고 우리 글자를 처음으로 나랏글(國文)이라고 한 것을 보면 그렇게 보인다.
또 조선왕조실록에는 “1809년 순조 09년 도해 역관 현의순 등이 아뢰기를, 일본에서는 남녀 막론하고 6,7세부터 언문(가나)을 배운다고 한다.”는 내용이 있다. 일본 글자도 언문이라고 한 것이 한문이 아닌 글자는 모두 언문이라고 한 거 같다. 여기서 일본은 우리보다 수백년 전부터 제 나라의 글자를 어린 아이에게도 가르치고 쓰게 했음을 알 수 있다. 한글기계화 선구자 공병우 박사는 “일본은 비록 한자를 혼용했지만 우리보다 500년이나 앞서서 제 나라의 글자을 가르치고 쓰게 했기에 우리보다 먼저 자주문화가 꽃피고 발전했다. 일본의 글자인 가나보다 더 훌륭한 한글을 이제라도 잘 부려쓰면 우리가 일본보다 더 발전할 것이다.” 라며 타자기와 셈틀을 통한 한글세상을 만들기에 힘써서 그의 품안에서 ‘글’도 나와 정보통신 강국으로 가는 밑거름이 되었다.
조선시대 한글 훼방꾼 들
한글(훈민정음)은 태어나기도 힘들었지만 세상에 펴고 쓰게 하기도 쉽지 않았다. 우리 새 글자를 만들고도 제대로 된 글자 이름을 지어주지 못하고, 떳떳하게 ‘조선글’이라 하지 못했다. 한문은 진서, 참글이라고 하고 한글은 ‘언문’이나 ‘암클’, 반절이라고 까지 불렸다. 이 모든 배경에는 중국과 한문, 그리고 그를 숭상하는 사대근성과 중국문화 숭배 때문이라고 본다. 한글이 태어나는 게 가장 큰 걸림돌이 바로 중국문화 숭배자와 사대주의자들이었다. 그리고 한글이 훌륭함과 중요함을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정치인과 학자들이었다. 중요한 사건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1. 한글 창제를 반대한 최만리, 신석조 들 집현전 학자들
한글의 첫 번째 걸림돌은 집현전 학자들이었다. 한글을 반포하기 2년 전인 1444년에 최만리, 신석조, 김문, 정창손, 하위지, 송처검, 조근등 언문창제 반대상소문을 올리고 세차게 한글은 만든 것이 잘못이고 쓰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우리 글자를 만드는 것은 중국을 떠받드는 시대상황과 정신에 크게 어긋난다고 했다. 세종은 이해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김문은 훈민정음을 만드는 게 괜찮다고 하다가 말을 바꾸어 반대한다. 정찬손은 삼강행실 들을 한글로 번역해봤자 효과가 없다며 세종과 논쟁을 한다.
그러나 세종은 이들에 굽히지 않고 잘못임을 타이르고 벌까지 준다. 그리고 한글을 세상에 알리고 편다. 한글을 다 만들고 쓰게 하려고 할 때도 반대가 거셌는데 만약에 한글을 만들려는 걸 알았다면 이들이 가만히 있었을까, 세종대왕이 이들보다 학식이 높고, 우리 글자인 한글을 써야한다는 믿음이 강해서 다행이지, 이들보다 신념이 약하고 이론이 모자라서 이들과 논쟁에서 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면 앞이 캄캄하다.
2. 한글 펴는 일을 훼방 놓은 이들
1447년 세종 29년에 세자의 서연관은 서연에만 사진仕進해야 하는데 언문 관련 일을 하게 되니 힘들다고 상소한다. 1450년 문종 00년에 간언이 문종 정음청을 혁파할 걸 상소하다. 1451년 문종 01년에 대사헌 정창손, 예조 참판 정척, 좌승지 정이한 등이 주자소가 글자를 전담하니 책방, 정음청은 없어도 된다고 아뢰다. 1452년 단증 00년에 사약 가운수가 세조를 헐뜯고 정음청을 비난하니 국문하여 벌하다. 단종 02년 정음청을 혁파하다. 1471년 성종 02년 간경도감을 파하게 하다
1482년 성종 13년에 대사헌 채수가 승지일 때 폐비사건을 언문으로 내린 적이 있는데 한문으로 번역해야 후세 사람들이 제대로 알 수 있다고 건의하다. 1482년에 대사헌 채수가 윤씨 죄를 언문으로 적고 한문으로 옮기게 한 일에 대죄를 청하다. 1492년 성종 23년에 성균관 생원 박신원 등이 중을 금하는 법을 빨리 회복시키기를 아뢰면서 양전의 언서를 통한 정치간여를 비판하다. 부제학 안침등이 대비의 언서를 통한 정치 간여가 부당함을 아뢰었으나 임금이 양전을 옹호하다. 1684년 숙종 10년에 남구만이 젊은이들이 어려서 언문을 해득하여 구송만 하고 문의해득을 못하는 현실을 탓하다.
백성들 삶 속에서 목숨을 이어온 우리 글,
훈민정음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한 때 연산군이 훈민정음을 가르치지도 못하게 하고 쓰지도 못하게 했지만 훈민정음 불씨는 꺼지지 않고 살아있었다. 연산군도 한 때 감정으로 한글을 못쓰게 했지만 언해사업도 하고 익명투서같은 것이 아니면 쓰게 했다. 임금이 터놓고 한글을 쓸 것을 장려하고 가르친 기록이 없으나 아녀자들이 많이 공부하고 씀으로서 조금씩 자라나게 되었다.
1527년 4월 20일 중종 22년에 최 세진이 어린이를 위한 한자공부책 <훈몽자회> 편찬했는데 한글 자모의 이름을 처음 정하고 순서와 받침을 정리했다. 한글을 가다듬고 닦았다. 훈민정음 28자 가운데 `ᅙ`이 빠진 체계이고 닿소리와 홀소리의 이름과 순서가 오늘날과 같다. 그 때 앞뒤로 한 자책을 훈민정음으로 번역한 책이 많이 나온다. 모두 우리말과 글자가 살아나는데 중요한 일들이다. 최세진의 한글연구와 정비는 매우 큰 업적이었다. 두시언해, 노걸대, 명의록언해로 이어지다가 19세기엔 한문으로 된 성경까지 번역해 책으로 나오는 데 모두 한글이 이어오고 발전하는 바탕이 된다.
우리 글자로 문학작품도 쓰고 편지나 일기, 자서전도 쓴다. 정철(鄭澈:1536~93)은 사미인곡, 관동별곡 등 가사를 우리말글로 지었고, 그 뒤를 이어 윤선도(1587,선조 20~1671,현종 12)도 오우가, 어부사시사들을 우리말글로 가사를 지었다. 1600년 초엔 허 균(1569~1618)이 한글로 홍길동전이란 소설을 쓴다. 1636년(인조 14) 12월부터 1637년 1월까지 청(淸)나라가 조선을 침략하여 일어난 전쟁인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겪은 아픈 이야기를 일 기식으로 산성일기[山城日記]는 작가는 밝혀지지 않은 관리가 한글로 썼다. 허 균보다 50년쯤 뒤에 서포 김만중(1637˜1692)이 한글로 구운몽과 사시남정기이란 소설을 썼다. 또 그 시대 정 철도 우리말글로 시조를 썼다. 모두 개혁 성향을 가진 양반이고 관리들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1809년, 순조 09년에 도해 역관 현의순 등이 아뢴 대마도의 사정을 아뢰기를, 일본에서는 남녀 막론하고 6,7세부터 언문(가나)을 배운다고 한다.”는 구절이 있다. 중국 한문이 아닌 글자는 모두 ‘언문’이라고 한 거 같다. 여기 우리 글자인 한글을 ‘조선글자’라고 못하고 ‘언문’, ‘언서’라고 한 거 같다. 또 중국 한문 때문에 터놓고 가르치고 쓰지 도 못한 게 불행이었다고 본다.
그리고 일반 백성들과 여인들 삶 속에서 한글은 많이 쓰였다.
근래에 옛 무덤을 옮길 때 한글 편지가 나왔는데, 파평윤씨 무덤에서 나온 한글편지는 1556년에 쓴 것이란다. 그 시대에 산 이용태(1556~1586)의 부인의 무덤에서 나온 편지도 1586년에 쓴 한글편지였다. 서울 수락산 자락에 가면 1536년에 세운 한글비석도 있다. 1795년(정조 19) 사도세자의 비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 : 1737~1815)는 ‘한중록’이란 자서전을 우리말글로 썼고 1772년(영조 48)엔 신대손(申大孫)의 부인 의령 남씨(宜寧南氏) 의류당이 순한글로 기행문을 썼으며, 정조도 장모에게 한글 편지를 썼고, 효종도 장모에게 한글편지를 썼는데 아녀자는 한문은 모르고 한글만 알기 때문에 한글로 편지를 쓴 거로 보인다.
현종(1641-1674)이 어린 나이로 시집간 셋째딸 명안공주에게 보낸 한글 편지를 보자“ 새 집에 가서 밤에 잠이나 잘 잤느냐. 어제는 그리 덧없이 내어 보내고 섭섭 무료하기 가이없어 하노라. 너도 우리를 생각하느냐. 이 병풍은 오늘 보내마 하였던 것이라. 마침 아주 만든 것이 있으매 보내니 치고 놓아라. 날 춥기 심하니 몸 잘 조리하여 기운이 충실하면 장래 자주 들어올 것이니 밤에 나물 것 하여 잘 먹어라.” 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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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0년에 익종이 ‘학석집’이란 한글 문집을 냈으며 1800년대에 추사 김정희(1786~1856)가 그 부인에게 쓴 한글 편지가 30여 편이 남아있다. 철종 때 내(이대로)의 고조부께서 한글로 쓴 자서전도 지금 내집에 있다. 흥선군도 한글로 붓글씨를 썼고, 명성황후가 쓴 한글 편지도 여주 명성황후 생가터 박물관에 가면 볼 수 있다. 모두 한자혼용을 한 게 아니고 순 한글만을로 썼다. 여기에 소개하지 않은 한글편지나 글이 많이 있을 것이다. 위에 한글 편지를 보면 궁궐과 양반 집의 아녀자들이 한글을 많이 알고 썼음을 알 수 있다. 아녀자들 편지나 글에 한글을 많이 썼기에 훈민정음을 암클이라 부르기도 했다.
위에 소개한 글 말고도 수많은 선비와 아녀자가 썼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암클’이라고 한 것은 나쁜 뜻만이 아니라 여인들이 많이 썼다는 토박이말로 이해하면 좋겠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대왕대비들이 섭정을 할 때 수 없이 한글로 교지를 내고, 공문서를 만들어 명령한 일이 있다. 형식과 권위를 내세우는 중국 유학을 숭상하는 남성 정치인들이 한문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경제란..
mgn373 (2004-06-07 21:49 작성) 이의제기 | 신고하기
질문자 평
감사합니다. 주제학습에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__)꾸벅(--)
경제란 생산수단과 노동으로써 자연에 작용하여 이러한 경제재를 획득(생산)하고, 그 생산물을 분배․소비하는 과정을 말한다
경제란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 분배, 유통 어쩌고 저쩌고….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무슨 말인지 얼른 이해가 되지 않지요? 쉽게 이야기하겠습니다. 경제란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약자입니다. 세상을 경영해 백성을 부유하게 한다는 뜻이죠. 즉, 경제란 인간의 물질적 부와 관련된 모든 것입니다. 더 쉽게 이야기하면 돈에 관련된 것이라면 시간과 장소를 따지지 않고 덤벼드는 것이 경제입니다.
경제에 대해서 많은 정보..
http://web2.gwangju.ac.kr/~invest/study/gy_s01.html
경제에 대하여
경제란 인간의 물질적인 활동이다.자신이 생명을 연장하기 위한 물질적인 활동을 말하는 것이다.사,농공상의 전통적인 계급사회에서 민주주의 사회는 학력으로 사회를 구분하게 하였다.학력은 어디서 오는 거인가? 약이다.좋은 약이 학력과 비례한다.
민주주의란 국민주권의 개념이다.국민이 국가의 주인이고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주인이라는 의미이다. 다수가 최선의 선택중의 하나이다.
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과학기술이다. 국가조직에서, 기업마다 연구소가 있고 신기술을 개발한다.생산공장이 자주 바뀐다.경쟁체제 때문이다.한국은 일본이나 선진국의 기계를 수입하여 생산라인을 조립하고 값싼 저임금정책으로 수출주도의 경제를 통해 국부를 축적가고 자본가를 자본을 재산을 축적했다.노동자와 땅을 잃은 농민 등 다수의 피와 착취에 기반한 더러운 경제발전이었다. 군사정부에 협력한 사람들만이 부정부패로 부를 축적했다.
중국에는 수백만개의 향진기업이 있다고 한다.농민이 일하는 농촌의 기업들이다.모택동이 만든 농민 기업이다. 인민공사이다.중국은 전국을 행정단위로 해서 대기업이상은 중앙에서 중소기업은 지방에서 관리했다. 기업에서 문제되는 것이 기술과 비대한 노동자의 고용이다.기업은 국제적인 경쟁에 의해 효율성과 합리성을 극단적으로 추구하게 된다.자동화시절과 공장가동율을 조정하고 그래서 생산을 조정한다.
거대한 도시와 군사시설, 공장...이에 필요한 거대한 노동력...국가는 그런 것을 만들어 낸다.
한국에서는 김대중정부에 들어와서 노동부에 취직알선부서를 두어 고용의 이동을 통제하였고 실업을 통제하려 하였다.이런 것도 사회주의 정책중의 하나이다.자유시장경제의 논리는 아니었다.
인간의 노동력은 그 국가의 의학수준의 발전과 비례한다.건강수준과 비례한다.경제는 인간성의 문제이기도 하다.인본주의 수준이 그 나라의 경제수준을 반영하는 것이다.
내용출처 : http://kr.blog.yahoo.com/modenhana/370733.html
답변들
re: 경제란 무엇일까요??
commio0 (2004-06-02 17:21 작성) 이의제기 | 신고하기
경제란 사람들이 돈을 가지고 물건을 사고 파는 기초적인 활동임니다.
돈이 오고 가는 것들이요... 모두를 포함함니다.
사고 파는것에 대해서 생산하는것도 경제임니다..
그럼 좋은 답변이 되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