禹史簡介(‘우’ 성씨 역사 소개)
기원전 2065년 大禹(중국에서 하나라 우왕을 일컫는 말)가 天子로 位하시니 이분이 바로 禹王이다.
4세 165년을 내려와서 5세 小帝(소제)가 기원전 1911년에 제위에 올랐고 少康(소강)의 다섯아들 중 장자 豫封(예봉)은 태자로 봉해지고 차자 无余(무여)는 越(월나라)의 군주로 봉해서 禹廟(우묘;우왕의 신주를 모시는 사당)의 제사를 지내게 했고 셋째아들 曲列(곡열)은 方城(방성)의 군주로 봉해졌는데 이분이 曾參(증참)의 선조이며 비단의 원조가 되었다. 넷째아들 龍에게는 성을 두(竇;중국발음은 “도우”라고하며 구멍, 물길이란 뜻) 賜姓(사성;성씨를 하사함)했는데 그의 어머니가 궁전의 담을 뚫고 도망해서 친가에 와서 소강을 낳은 것을 기념해서 주어진 이름인데 후일에 <竇>씨성의 시조가 되었다하며 다섯째 婁(루)는 杞(기나라) 왕으로 봉해졌으며 東婁(동루) 樓(루)씨로 불리다가 <婁>씨의 시조가 되었다.
둘째 아들 无余(무여)가 越(월나라)에가서(기원전 1910년) 대우의 제사를 주관했으며 越(월나라)의 城을 축성하고 월나라를 개국케 했고(지금의 절강성 소흥시) 이로부터 줄곧 東歐王(동구왕) 閩君搖(민군요)까지 이르는 동안 그 후손이 대우의 제사를 지내게 됐으며 그후 漢高祖元年(기원전 206년)까지 1704년간을 48世의 代가 이어왔다. 그뒤 기원전 192년 漢(한나라) 孝帝3년에 搖佐漢(요좌한)이 泰(태나라)를 평정하는데 공이 많아서 東歐王(동구왕)으로 봉하고 대우제사를 주관케 하였다. 기원전 133년 (한무제원광2년) 司馬遷(사마천)이 20세때에 움집(禹穴)을 찾아갔는데 움집 안에 있는 물건을 내어다가 세상에다 알리니 너무 검소해서 의아해 하면서 온 세상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대우의 후예중 적자는 이미 그당시 似(사)씨성을 쓰고 있었기에 제외하고 모두가 우씨성을 가짐을 더욱 감명받았다. 다음해 동구왕 廣武候(광무후)는 백성을 이끌고 江淮間(강회간)으로 이전했는데(안휘 호강에 거주) 그 일대는 온통 閩(민나라) 민씨가 번성하여 우씨가족은 일부는 타향으로 떠나가고 일부는 內地(내지)로 이동했으므로 우씨의 공허상태가 되었다.
비양우씨의 선조는 원래 浙江(절강) 余唋(여도)에서 살았다. 1360년(元 至正20년 漢宋龍鳳 5년) 일가형제 4(一, 十, 千, 萬)명이 상의하여 일, 십은 본토에 남고 천, 만은 지금의 河南省(하남성) 駐馬店地區(주마점지구) 泌陽縣(비양현)으로 왔다. 8대를 지나다가 失傳이 되어 다시 여도로부터 사람을 오게 하였다. 두 번째로 온 조상이 禹遷(천)이다. 그는 비양에 온 후로 1525년(明가정 4년) 7월에 石碑山(석비산) 정상에 神廟(신묘;조상신의 신주를 모시는 사당)를 하나 짓고 淸(청나라) 때까지 이어가며 사람들에게 적선하였다. 그곳에는 지금도 山神堂(산신당)이 하나 있으며 사람들이 참배를 하고 있다.
1570년(명봉경4년) 7월 禹世鶴(우세학) 世榮(세영) 世高(세고) 世杰(세걸) 世美(세미) 5형제(제9대임)가 부 우천을 위하여 묘비를 세우고 후대에 전했는데 지금도 墓碑(묘비)가 있다.
제10대 禹文講(우문강;우세미의 子)은 1577년 정축년(明萬曆 5년) 生인데, 그(문강)에게는 아들 4명이 있었다. 孟蛟(맹교) 孟吉(맹길) 孟龍(맹용) 孟舜(맹순)이다. 이들이 제 11대이다. 이들은 淸(청나라)초 族譜(족보)를 만들때 <始祖>가 되었다. 孟자 始祖(시조)로부터 지금까지 17대 이어지고 있는 우씨 후손이 20,000명에 이르고 全縣(전현)의 23개 鄕鎭(향진)에 걸쳐서 거주한다. 외부로 나간사람이 5,000명이며 이들은 전국 34개 省市(성시) 自治區(자치구)에 거주한다. 축하하고 기뻐할 일이다. 카나다 미국 일본에도 우씨가 거주하고 있다.
중한양국의 우호관계가 더욱 좋아지기를 바라며 同一姓氏의 우리가 비록 다른나라에 살고 있으나 조상이 같고 뿌리가 하나임을 인식해야할 것이다. 오늘 비양에 오신 귀국의 종친을 마지하는 우리는 충심으로 여러분을 환영한다. 금후 왕래가 더욱 잦아지고 華夏禹氏(세계우씨의 뜻)의 공동 발전을 위하여 같이 노력합시다.
2001. 10. 30
泌陽禹史硏究會 禹甸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