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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16일자 한겨레신문에서 읽었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430786.html
[시대의 갈망이 부른 '정의' 열풍]이라는 기사로, 베스트셀러읽기 꼭지였다. 시대의 갈망? 부정한/불공정한 시대가 정의를 부른다? 지난 5월 책이 나온 뒤 심심찮게 기사글들을 본 뒤인지라, 한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는 유행을 만들고, 누군가는 또 그 유행을 따라가는 삶이다.
한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책을 읽고 있는데 한 분이 묻는다.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고 계시네요, 이 책 어때요, 라고. 나의 대답, 그 당시 나는 1/3 정도 읽고 있었는데, 다 읽어봐야 알겠지,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내가 이렇게 대답하는 이유는, 딜레마 상황, 판단내리기 어려운 상황에 대한 정의 개념을 얼마나 더 생각해보게 하는 책일까에 대한 의구심때문이었다. 딜레마, 정작 상황이 닥치지 않고서는 실제 상황을 말할 수 없는 문제, 그러나 사실 문제는 발생되고, 그 문제에 대한 대응책도 이미 나온 상태에서 나의 생각이 중요할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정의에 대한 판단을 누군가 내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은 까닭이었다. 다수가 옳다고 해서, 시장이 압도적이라고 해서, 그에 쉬 동의하지 않는 나는 사실상 공공의 선이라고 할 수 있는 정의 개념이 사실은 누구도 저울질 할 수 없는 저울을 손에 들고 있는 형국이라는 생각이 강해서인지 모르겠다. 물론 마이클 샌델의 원제처럼, (이 상황에서 내가/네가/우리가/그들이 해야할) 옳은 일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는 사람들인지라, 누구도 전혀 무관한 책은 아니지만.
초반부 마이클 샌델은 판단하기 어려운 질문을 여럿 던지면서 시작한다. 태풍 허리케인이 지나간 뒤 물건 가격이 폭등하게 된다. 이로부터 생활재의 가격폭리처벌법에 대한 찬반양론, 이라크전 참전 용사에 대한 상이군인훈장 수여 대상 자격논란( 신체손상을 입었을 때만이 상인군인훈장에 포함되는가?), 2008~2009년 구제금융 당시 AIG 임원진의 상여금에 관한 논란(그들은 왜 호황에 받은 돈 중 일부를 사회에 되돌려주지 않으면서 구제금융상황에서 국민 세금에서 나온 돈으로부터 상여금을 받는가?), 거기에 트롤리 딜레마까지.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는 문제들, 그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이편에서 생각해보면 이편의 말이 타당한 것이 같고, 저편에서 생각해보면 저편의 말이 타당한 것 같은 문제들을 독자에게 질문한다.
이 책은 하버드대 강의에서 가져왔다고 하니, 아마도 학생들에게 먼저 질문을 했으리라. 그 학생들 역시 이쪽과 저쪽에 대한 찬반에 대한 변론과 주장이 있을 뿐이었을테다. 물론 어떤이는 자신의 발표에 대해 공감한다/지지한다는 박수를 받았을 것이다. 이 책의 미덕은 바로 그것이다. 무슨 문제가 발생했을 때, 자기의견을 말할 수 있어야하지 않겠는가, 혹은 상대편의 말을 들어봐야하지 않겠는가 하는 공론화 장의 필요성에 대한 미덕. 마이클 샌델이 지난 20년동안 강의하면서 학생이 아닌 일반독자에게 전달하고 싶은 바도 이것일테다. 남북전쟁 당시 남부연합군 사령관이었던 로버트 리의 사례에서 말하는 바이다. 로버트 리는 남부 주들의 연방 탈퇴에 반대했으면서도, 남부 버지니아에 대한 의무에서 연방군을 이끌어달라는 링컨 대통령의 요구를 거절했다.
"우리가 존경하는 것은 자신의 삶을 더 큰 삶의 일부로 이해하고 감당하는 기질이다. 그것은 시대의 요구다. 나를 특별한 삶으로 끌어들이면서 그 특별함을 인식하게 하고, 다른 여러 요구와 더 넓은 지평에도 눈을 뜨라는 요구다. 인격을 갖춘다는 것은 (때로는 서로 상충하는) 여러 부담을 인식하며 산다는 뜻이다."( 330쪽)
공공선을 위해서 노력해야한다는 시대정신을 그는 말하고 싶은 듯하다. 진화심리학자들의 책이 잘 읽히는 시대이다. 그 이유란 어쩌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지 하는 것이 궁금하기도 하고, 내가 아무리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해도 다수의 보편적인 생각은 이렇구나는 알고자 하는 심리라고 생각한다. 별 수 없이 되어지는 상황에 대한 관찰이기도 하다. 트롤리 딜레마를 마주하면서, 문득, 진화심리학이 생각되었다. 진화심리학자들 역시 트롤리 딜레마에 대해서 설문조사를 했다. 그때의 답변은 첫번째의 경우 레버를 돌려 다섯을 살릴 수 있다면 한 명이 죽을지 알면서도 레버를 돌리겠다는 대답이 나왔고, 두번째의 경우, 등치 큰 사람을 철로에 밀어뜨려 다섯을 구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해서 등치 큰 사람을 밀지는 않겠다는 답변이었다. 이를 통해 종교의 유무를 떠나 인류는 보편적인 도덕감정이 있다는 걸 심리학자들은 주장하는데, 마이클 샌델은 왜 이런 문제(딜레마)가 발생되는지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제공한다. 다섯명을 살리고 한 명을 희생한다는 건 공리주의가 작용함이고, 다섯이 아닌 한명에게 눈을 돌리는 건 인간의 생명을 숫자화할 수 없다는 의식이 작용함이라는 걸 말하고 있다. 이런 질문을 통해서 사람들이 한꺼번에 달라지지는 않을테다. 공공선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 있고, 인정할 수 없는 사람도 있다.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다는 데 있지 않을까. 다 볼 수 없는 인간의 미덕이란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데 있다는 낮은 설득이 아닐까 싶다.
무엇이 올바른 일인가, 당신이 할 수 있는 올바른 일은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책이 바로 <정의란 무엇인가>인데, 지금 시대는 사실 어떤 사례를 든 뒤 무엇이 올바른가 대한 대답이 적어도 두 가지 이상 들리는 시대가 됐다고 할 수 있다. 무엇이 올바른가에 대한 사람들의 판단은 마이클 샌델이 사례로서 들듯이, 행복, 자유 그리고 미덕에서 결정된다. 우선적으로 누군가를 행복하게 하는가의 문제가 그것이다. 두번째는 선택에 있어 자유로운가의 문제, 그리고 세번째로 문화적 보수주의, 종교적으로 우파와 동일시되는 미덕이 바로 그것이다. 행복의 요건에서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원칙인 공리주의자 벤담과 자유주의자로 대변되는 밀을 거론하는데, 벤담이 옳으냐 밀이 옳으냐는 대답에 단답형의 질문이 될 수 없음을 전개하는 글들이라고 할 수 있다. 답은 하나가 아니라는 말, 답은 하나에 또 다른 하나가 더해진 하나일 경우가 많다는 말.
책에서는 이후 더 묻는다. 소유의 문제를 다룬다. 내가 나의 소유인가 하고. 내 몸이라고 내 소유인가를 묻는다. 미국의 상위 1퍼센트 부자가 미국 전체 부의 3분의 1을 소유한다는 것으로 시작하여, 부의 재분배가 이뤄져야만 하는 당위성을 얘기하는 장이다. 마이클 조던의 연봉이 다른 선수들보다 높은 것에 대해 누진세를 부과하는 것이 타당할까를 묻는다.
마이클 조던이라는 선수가 없으면 관중 수가 적어드는 게 당연한 일, 하여 마이클 조던의 연봉은 다른 선수들과 차이나게 많을 수 있다. 그 상황에서 마이클 조던이 재분배를 위해서 세금을 내는 것이 부당한 일인가를 따지는데, 그에 대해서 마이클 조던이 혼자서 경기를 치를 수는 없다는 데서, 그의 성공이 기여한 사람들에게 빚을 졌다고 말한다. 물론 여기에서 재능의 덕, 행운을 말하면서, 과연 마이클 조던의 몸이 마이클 조던의 소유인가를 묻는다. 여기에서 점점 더 몸의 소유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신장이식, 안락사, 굶주림이라는 비상사태시 합의하에 발생된 식인행위등에 대해서 과연 인간의 몸이 나라고 하는 자기 자신의 것인지를 묻는다. 나의 것이라고 하면 내 맘대로 하면 될테지만, 사실상 그에 대해서 옳다고 느끼는 건 그리 간단하지 않다.
4강 시장과 도덕에서는 대신 군대 가는 것과, 대신 일하는 것의 차이를 묻는다. 귀족 대신 노예가 군대에 가는 길이 옳은 일이 아니라고 자연스럽게 말한다. 그렇다면 모병제는 어떤가? 대리모 임신에 윤리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올바름에 있어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있지 않은가를 생각하게 한다.
그러면서, 중요한 것은 동기, 정언명령을 말하는 이마누엘 칸트를 데려와 집단적 동의라는 상상적 행위가 "모든 공공법의 정당성을 판가름하는 잣대"라고 결론짓는다. 마음이 동해서 무슨 일을 하기보다는, 해야만한다고 생각되는 의무화된 것처럼 하지 않으면 안되는 정언명령이 있다고 말해야할까. 그러나 이런 정의는 매순간 선택이라고 생각되는 문제에서 당위문제로 보여질 수 있다.
6강에서는 차등원칙을 내세우는 존 롤스와 더불어 평등옹호를 다룬다. 봉건 귀족 계급이나 카스트 제도에서 소득, 재산, 기회, 권력을 갖게 된다면, 그건 부당한 일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한다. 시장사회는 재능을 가진 사람에게 일할 기회를 주고 법 앞에서 평등을 보장한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실질적 평등일까?
"분배되는 몫은 타고난 운에 따라 결정된다. 그 운은 도덕적 관점에서 볼 때 임의성을 띤다. 소득과 부의 분배가 역사적ㆍ사회적 우연으로 결정되어서는 안 되듯이, 타고난 자산에 따라 결정되어서는 안 된다."( 216쪽)
가난한 집의 자식과 부잣집의 자식이 자라면서 겪게 되는 환경의 차이를 무시하는 사람은 없다. 출생(출신성분)에 따라 달라지는 계층이 있었다면, 지금 시대는 차등원칙이 적용된 평등한 사회가 아닐까 싶다. 이때 샌델은 커트 보네거트의 <해리슨 버거론>을 하나의 예로 들면서 차이가 있는 개인의(인간) 사회임을 말하고 있다.
"그해는 2081년이었다. 모든 사람이 마침내 평등해졌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보다 더 똑똑하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보다 더 잘생기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보다 더 강하거나 빠르지 않았다."( 217쪽)
정부는 차이를 방지하지 위해서 모든 사람들이 정신장애 수신기를 꽂고 다니도록 하여 20초마다 날카로운 잡음을 보내 두뇌를 이용한 불공정한 우위를 점하지 못하게 한다. 14살의 천재 해리슨 버거론은 누구보다 무거운 장비를 쓰고 다녔야 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해리슨은 모든 장비를 벗어던지고 평등주의 횡포에 맞서 영웅적으로 저항했다고 한다. 커트 보네거트에 의해 써진 2081년 해리슨 버거는 분명 평등주의라는 악몽의 시대에 탄생한 영웅 아닌가?
이 책을 통해서 들려지는 차등원칙을 인정하는 롤스의 정의론에서 무엇보다도 공감이 되는 건, "노력하고 도전해서 소위 자격을 갖춘 사람이 되려는 의지조차도 행복한 가정과 사회적 환경의 영향이다." , "성공의 다른 요소들처럼 노력 역시 스스로에게 공을 돌릴 수 없는 우연의 영향을 받는다."( 221쪽)라고 말하며, 다소 미신적이지만, 하버드에 들어온 학생 중 첫째가 많다(75~80%)라는 걸 예로 든다. 이는 "노력도 도덕적 자격을 획득하는 토대가 될 수 없다."( 222쪽)는 걸 말하고 싶어서이다.
7강에서 얘기되는 소수집단우대정책 논쟁도 또한 흥미로운데, 사실상 이런 논쟁은 누가 선택하는가에 관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입학허가는 뛰어난 능력이나 미덕을 포상하는 영광스러운 절차가 아니라는 것이다. 시험 점수가 높은 학생도, 불리한 처지에 놓인 소수집단 학생도 입학을 허가받을 도덕적 자격은 없다. 입학 허가가 정당한 경우는 학생의 능력이나 미덕을 포상할 때가 아니라 대학이 사명을 정한 뒤에야 신입생에게 강의실 자리가 공정하게 분배되려면 무엇이 중요한가를 판단할 수 있다. 학교의 사명이 관련 능력을 정하지, 학생의 능력이 학교의 사명을 정하지 않는다. 대학 입학의 정의에 관한 드워킨이 설명은 소득 분배의 정의에 관한 롤스의 설명과 같은 맥락이다. 즉 그것은 도덕적 자격의 문제가 아니다."( 244쪽)
아무리 뛰어난 학생이라고해도, 입학허가를 받을 도덕적 자격은 없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대학이 경매를 통해서 입학생을 뽑아도 되는걸까? 여기에서 샌델은 대학 존재에 관한 원론적인 문제를 질문한다. 대학이 경매를 통해 입학생을 받을 때, 왜 사람들은 문제라고 생각하는가? 대학이 다른 기관과 다른 근거는 무엇인가?
"대학은 어느 정도까지 학문의 우수성을 추구하고, 어느 정도까지 시민의 기대에 부응해야 하며, 이러한 목적들은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가? 대학은 학생들을 교육해 사회에 나가 훌륭히 이렇게 만들지만, 대학 교육의 일차 목적은 상업적인 거래가 아니다. 따라서 교육을 단지 상품처럼 파는 행위는 일종의 타락이다.
그렇다면 대학의 목적은 무엇인가?"( 254쪽)
"대학의 목적은 수입을 극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과 연구로 공동선에 기여하는 것이다. 사실 교육과 연구에는 돈이 많이 들기에 대학은 후원금 모금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돈벌이가 입학 정책을 좌우한다면 대학은 가장 중요한 존재 이유인 학문 추구와 시민의 기대 부응에서 멀어지고 만다. "( 255쪽)
현실이 어떠하다 하더라도, 무엇이 생기게 된 본래적인 취지나 목적이 있음을 인지하고 있기에, 시대 흐름이나 실용의 목적에만 따라가는 대학의 여정은 사람들에게 그건 아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일테다.
8강에는 (어디에/무엇에) 누가 어떤 자격을 가졌는가를 묻고 있다. 치어리더는 어떤 자질을 가져야하는가. 다리가 불편한 프로 골퍼 케이시 마틴이 제기한 카트를 이용하게 해달라는 요청에 관한 논란은 골프는 운동인가라는 원론적인 물음을 제기하였기에 그만큼 논란을 가중시켰다고 했다.
"골프가 운동경기로 인정받고 존중받기를 바라는 PGA와 최고 선수들의 욕구가 반영된 논란이다."( 288쪽)
개인적으로 마이클 샌델의 위 책에 어떤 의미를 부여한다면, 왜 사람들은 어떤 문제를 논쟁화하는가에 대한 팀구심이었다. 단지 찬반양론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게 아니라, 왜 찬성하고, 왜 반대하는가로 생각을 가져가는 면면들이,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읽는동안의 보람이었다.
이후 9강에서는 전후 보상과 책임문제를 다루면서, 조상의 죄를 후손이 사죄해야하는가의 문제를 건드리고 있다. 그 문제는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의 <덕의 상실>이라는 책을 통해서 문제를 생각해보게 한다.
"매킨타이어는 인간을 자발적 존재로 보는 시각의 대안으로 서사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인간은 이야기하는 존재다. 우리는 서사적 탐색으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답하려면 그전에 '나는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가?'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310쪽)
"삶이란 특정한 통합이나 일관성을 갈망하는 서사적 탐색을 규정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여러 갈림길에 마주쳤을 때 , 우리는 완전한 삶, 내가 관심을 갖는 삶으로 이끄는 길을 찾아내려 애쓴다. 도덕적 고민은 내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라기보다 내 삶의 이야기를 해석하는 것에 가깝다. 여기에는 선택이 끼어들지만, 그것은 해석에서 나오는 선택일 뿐, 의지에서 나오는 절대적 행위가 아니다. 내 앞에 놓인 어느 길이 내 삶의 궤적과 가장 잘 어울리는지는 나보다 남이 더 분명히 알 수도 있다. 도덕적 행위자를 서사로 설명하는 방식에는 이러한 가능성을 허용하는 미덕이 있다."( 310쪽)
나의 삶이 어디에 놓여있는지를 생각해보게 하면서, 선조의 죄는 후대인에게 아무런 보상책임 의무가 없다는 말에 대해 숙고해보게 한다. 여기에 롤스를 불러와, 자연적 의무와 합의하에서 생기는 의무가 아니라면, 도덕적 의무는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굳이 인간은 굳이 정치에 참여할 필요도 없는 존재라고 봐야한다. 애국심, 인종, 형제애 등의 연대가 과연 미덕인지, 공공선에 도달하는데 있어, 자기편만 편애하는 악덕인지를 차분히 살펴보는데, 이제까지 샌델의 글이 그렇듯이 향해가는 길은 명확하나 답변은 모호하다. 여기에서도 남북전쟁 당시 군인 로버트 리, 대학총장이라는 공직에 있으면서, 범죄자인 화이티 벌저를 숨겨준 벌저 형제의 예, 그리고 우편물 폭발사건을 일으켜 세 명을 숨지게 한 유나바머가 형일지 모른다며 제보한 경우를 들고 있는데, 어느 것 하나 전적으로 당신이 옳소라고 말할 수는 사안이 아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어떤 상황에 처해질 때, 그 상황에 맞서 결정을 내리고 행위를 하게 된다. 그 행위가 형제애나 애국심에 의한 도덕관에 의할 수도 있지만, 샌델이 하는 작업은 자기 생각을 표현해낸 사람들의 예이다. 그를 통해 무엇이 옳은 일인가를 고민해보게 한다. 생각해보게 한다.
이렇게 해서 드디어 이르는 게, 10강의 정의와 공공선이다. 끝낼 수 없는 주제임을 알면서도, 이젠 끝내야한다는 저자의 봉합과정이 담긴 장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과 무관할 수 없는 도덕, 미덕으로 생각을 이끈다.
샌델은 이제까지 가톨릭 신자가 대통령이 된 전례가 없었던 1960년대로 독자를 데리고 가는데, 가는 곳은 종교의 자유란 순전히 개인의 문제일까를 묻고 있다. 케네디의 " 대통령이 되어도 종교적 견해는 사적인 문제로 머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341쪽)를 언급한 뒤, 2006년 버락 오바마의 경우로 넘어간다. 그는 2년전 상원의원에 출마할 때를 회고한다.
" 우리는 다원화 사회에 살고 있고, 내 종교적 견해를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수 없으며, 나는 일리노이 상원의원에 출마하는 것이지, 일리노이 성직에 출마하는 게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342쪽)
물론 여유있게 상원의원 선거에서 승리 했지만, 그는 그때의 반응이 적절하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나만의 가치와 나만의 믿음으로 인도하는 신앙의 역할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 "( 343쪽)
존 에프 케네디가 사적인 문제로 머물 수 있다고 생각한 반면, 버락 오바마는 종교와 정치가 무관하지 않다는 입장이다.
"비종교인이 종교인에게 공개 광장으로 들어가기 전에 종교를 문 앞에 내려놓으라고 요구한다면 잘못입니다."( 343쪽)
캐네디와 오바마는 둘 다 젊은 민주당 지도자인데, 그들의 입장은 다르게 달린다. 다르다. 이 책은 이렇듯 결국 모두가 다 같이 잘 사는 지향점을 향하지만, 길이 다른 사람들의 행로(의식)를 생각해보게 한다.
정의를 이해하는 세가지 방식으로, 행복 극대화, 선택의 자유, 그리고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고민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샌델은 마지막 방식을 좋아한다고 고백한다. 공리주의는 정의와 권리를 원칙이 아닌 계산의 문제로 만들며, 인간 행위를 도량형으로 환산하여 획일화하는 단점이 있다면, 자유에 기초한 이론은 사람들의 기호를 인정함으로써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의 도덕적 가치, 우리 삶의 의미와 중요성,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삶의 특성과 질은 하나 같이 정의의 영역을 벗어"( 361쪽)나게 한다. 그러면서 그는 말한다.
"정의로운 사회는 단순히 공리를 극대화하거나 선택의 자유를 확보하는 것만으로 만들 수 없다. 좋은 삶의 의미를 함께 고민하고, 으레 생기게 마련인 이견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문화를 가꾸어야 한다."( 361쪽)
정의에는 판단이 끼어드는데, 그 판단의 근거에는 " 올바른 분배"만인 아닌, "올바른 가치 측정"의 문제도 있다.
다 같이 잘 사는 올바른 분배를 진보주의가 지향한다면, 올바른 가치지향은 보수주의의 지향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좋은 삶이란 과연 어떤 삶일까? 그에 대해서 1968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선 로버트 케네디의 말을 옮긴다. 생태주의를 생각하게 하는 말이다. 분배만이 아닌 도덕적 목적과 연관있는 정의 개념을 말하고 있다.
"우리 국민총생산은 한 해 8000억 달러가 넘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대기오염, 담배 광고, 시체가 즐비한 고속도로를 치우는 구급차도 포함됩니다. 우리 문을 잠그는 특수 자물쇠, 그리고 그것을 부수는 사람들을 가둘 교도소도 포함됩니다. 미국삼나무 숲이 파괴되고, 무섭게 뻗은 울창한 자연의 경이로움이 사라지는 것도 포함됩니다. 네이팜탄도 포함되고, 핵탄두와 도시 폭동 제압용 무장 경찰차량도 포함됩니다.(.....)우리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팔기 위해 폭력을 미화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도 포함됩니다. 그러나 국민총생산은 우리 아이들의 건강, 교육의 질, 놀이의 즐거움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국민총생산에는 우리 시의 아름다움, 결혼의 장점, 공개 토론에 나타나는 지성, 공무원의 청렴성이 포함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해학이나 용기도, 우리 지혜나 배움도, 국가에 대한 우리의 헌신이나 열정도 포함되지 않습니다. 간단히 말해, 그것은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을 측정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미국인이라는 사실이 왜 자랑스러운가를 제외하고 미국에 관한 모든 것을 말합니다. "(363쪽)
이 글에 대해서," 자기만족과 물질적 집착을 향한 도덕적 비난이 빈곤, 베트남전쟁, 인종차별의 부당함에 대한 그의 견해"와는 별개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터인데, 케네디는 서로 연관된다고 보았다. 석달 뒤 케네디는 암살당했기에, 그의 도덕적 이상이 미국 정치에 반영되지는 못했다. 40년이 지난 뒤 버락 오바마의 정치를 샌델은 "원대한 목적을 추구하는 공적인 삶에 목마른 미국인의 갈증을 이용해 도덕적, 영적 갈망이 담긴 정치를 역설"( 364쪽)했다고 말한다.
공동선을 추구하는 새로운 정치란 어떤 모습일까. 첫째, 시민의식, 희생, 봉사정신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두번째 시장의 도덕적 한계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심지어 목숨이나, 아이나, 장기마저도 시장에서 취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시장 친화적 사고는 문제 있다. 세번째로 불평등, 연대, 시민의 미덕 등 갈수록 심해지는 빈부 격차의 문제를 생각해보게 한다. "빈부 격차가 지나치면 민주 시민에게 요구되는 연대 의식을 약화시킨다"고 말하는데, 여기에서 보면 샌델이 공동체 주의자라는 걸 의식할 수 있다. 부자나 가난한 사람들 모두 아이를 보내고 싶어지는 공립학교를 만들자는데, 어째 한국의 MB 정권은 거꾸로 가고 있다. 그리고 네번째 도덕에 개입하는 정치를 말한다. 도덕에 개입하는 정치에 반대하는 이유는 강압과 배타성의 우려인데, 그렇다고 개입하지 않으면, 반발과 분노만이 야기된다고 한다. 하여 공개담론은 줄이고, 카더라 등의 추문이나 자극적인 기사에 매달린다고.
샌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앞서도 여러곳에서 드러나듯, 수면위에 드러나있다.
"동료 시민이 공적 삶에서 드러내는 도덕적ㆍ종교적 신념을 경청하고 학습하면서, 더욱 직접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어려운 도덕 질문을 공개적으로 고민한다고 해서 어느 상황에서든 합의를 끌어낼 수 있다거나, 심지어 타인의 도덕적 ㆍ종교적 견해를 평가할 수 있다고 장담하긴 어렵다. 도덕적, 종교적 교리를 더 많이 알수록 그것이 더 싫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일단 해보기 전까지는 어찌될 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도덕에 개입하는 정치는 회피하는 정치보다 시민의 사기 진작에 더 도움이 된다. 더불어 정의로운 사회 건설에 더 희망찬 기반을 제공한다. "( 370-371쪽)
센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책을 따라가면서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이제 정의란 무엇이고, 무엇때문에 정의로 눈을 돌리는가를 잠시 살펴보자. 사전적인 의미에서 정의는 법과 정의로 바로 연결된다. 사전에서 찾아보면, 정의(正義; Justice)는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기 위해 사회 구성원들이 공정하고 올바른 상태를 추구해야 한다는 가치로, 대부분의 법이 포함하는 이념이다. 정의는 실제로는 애매모호한 개념이며, 철학 영역에서는 정의의 올바른 뜻을 확립하고자 많은 고민을 해왔다, 라고 써있다. 이 책에 의하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의란 사람들에게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주는 것이다." 정의란 올바른? 아니, 보다 타당한 분배가 가능하도록 하는 가치관에서 가능한 무엇이 아닐까 싶다.
마이클 샌델은 이 책에서 정의문제를 이런 때 얘기한다고 쓰고 있다.
"사회가 정의로운지 묻는 것은,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 이를테면 소득과 부, 의무와 권리, 권력과 기회, 공직과 영광 등을 어떻게 분배하는지 묻는 것이다. 정의로운 사회는 이것들을 올바르게 분배한다. 다시 말해, 각 개인에게 합당한 몫을 나누어 준다. 이때 누가, 왜 받을 자격이 있는가를 묻다 보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 33쪽)
정의란 공평한가, 부당하지 않은가의 분배 문제만이 아닌, 없지만 있길 바라는 공공선, 거기에 선택과 권리에 있어서의 자유관점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사람들은 왜 정의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일까? 이 책에서 묻고 있는 정의 개념은 법에 기본적으로 포함되는 부당함의 의미도 있지만, 그 보다는 다원화된 사회에서 독자 자신이 생각하는 올바름, 옳은 행동에 보다 의미부여한다. 그러한 올바름, 옳은 행동에 관한 숙고해보길 바라고, 성찰해보길 바라고, 쉽게 결정내릴 수 없는 상황에 대해서 상대에게 귀를 기우릴 공론장의 필요성을 얘기하는 책(강의)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강의와 함께, 아리스토텔레스, 제레미 벤담, 존 스튜어트 밀, 존 롤스, 로널드 드워킨, 이마누엘 칸트의 철학이 정의 개념을 사유케 하는 데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공부하게도 한다. 만약 학교 강의라면, 위 철학자들의 저서를 심도깊게 읽어보고 그것에 대해서 발표하고, 그것과 함께 토론하는 시간이 될 것 같기도 하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도리, 사람이 한 사람의 동시대인으로 시대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가치관을 생각해보게 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독자들에게 생각하고 따라주길 바라는 답은 미덕을 습관화하는 삶이다. 누구는 그걸 사회에서 이미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들의 강요된 선이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미덕이 습관화된다면 눈에 보이는 않는 공공선이 보다 가까이 있을지 모르겠다. 일견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누가 그걸 몰라서 못할까요 라고. 자유와 선택과 권리의 문제일 것 같은 문제들을 그것이 단 하나 별개의 무엇이 아니라, 서로 유관하다는 데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생각하게 한다는 데서, 선택에 있어서 자유로운 삶과 정의가 유관해진다. 어느 대학교에서 소수자 우대 정책을 펴는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일반인과 괴리될 정도의 고소득자들의 세금을 통한 재분배도 바로 정의의 문제로 접근할 수 있다. 마이클 샌델은 선택하기 어려운 어떤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를 물으면서 그와 더불어, 이 시대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또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를 묻는다. 100분토론에서 다루는 찬반양론의 문제가 사회이슈가 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왜? 이 시대를 사는 동시대인이라는 데서.
마이클 샌델의 이 책이 2010년 대한민국에서 잘 읽히는 이유는 아마도, 과거 어느때의 사례나 이론만이 아닌 지금 시대의 이슈를 다뤄서가 아닐까 싶다. 대운하정책에서 스리쓸쩍 이름을 바꾼 4대강살리기 사업에 대한 찬반양론에 대해 오래된 철학자들과 같이 대화를 나누게 해주며 생각하게 한다면, 그런 책은 잘 읽힐 것이다. 물론 한 사람의 개인에게 정치적인 견해가 없을 수 없다. 말하다보면 자기 견해가 보다 정확하게 드러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안과 사안에 대해서 필자의 견해를 드러내기보다는, 다른 입장을 생각해보게 하여 각기 표현할 수 있게 한다면, 그와 더불어 한정된 지구라는 곳에서 살아가는 인류라는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면, 답을 아는 누군가의 글을 읽는 게 아니라, 배움을 떠나, 자리를 떠나, 입장을 떠나, 답을 다같이 찾아봐야하지 않겠느냐는 누군가의 글이라면 읽힐 것이다.
미국 내 여러 문제거리들을 사례로 든 마이클 샌델의 이 책이 읽히는 건, 바로 이 시대의 문제를 같이 고민하는 학자/저술가를 기다리고 있음에 대한 예증인지도 모르겠다. 흥분하지 않으면서, 차분하게 생각하게 해주는. 너무 자기주장만을 말하지 않고, 정의가 다루는 개념인, 공평함, 자유, 미덕을 독자 스스로 생각해볼 수 있도록 하는 누군가를. 학계철학과 사회철학의 소통로를 열어놓은 누군가를 말이다. 특정 시대의 갈망이 부른 '정의'인 건 아닌 듯하다. 인류는 어느 시대나 정의문제에 관심이 없었던 적은 없었을거라고 본다. 다만 그에 대해서 다룬 이 책이 읽히는 건, 그 관심을 얼만큼 사유케 하느냐의 문제가 아닐까.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를 묻게 하면서, 나는 무엇을 하느냐를 묻는 책으로.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인지, 할 수 있는 걸 하지 않는 건 아닌지를 묻는 책으로.
누구나 정치가가 되어 정치를 하는 건 아니지만, 누구나 정책결정에 참여할 수는 없지만, 개인과 개인의 존재가 정치의 근간이라고 생각한다. 국가라는 덩어리가 굴러가는 길에 책임없는 국민(주체)는 없다고 할까. 불의에 침묵하는 데도 책임져야한다고 하지 않던가. 물론 개인(국민)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정책, 국민의 소리를 차단하는 정치라면, 그건 더 큰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이순간 한 사람의 올바름이 언제까지나의 올바름, 누구나의 올바름이라고 장담할 수 없기에, 명백한 답을 낼 수 없는 '정의' 강의는 20년동안이나 강의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20년이나 얘기해도, 얘기하고 또 얘기해도 끝없이 반복되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 그건 뭘까? 한 사람이 걷는 길은 하나의 길이 되는데 반해, 걸어야할(걸을 수 있는) 길은 하나가 아니라는 말?
첫댓글 하인츠의 딜레마가 떠오르는군요. 글 아주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한잔사 님이 잘 읽으셨다니, 오히려 제가 감사드립니다.
잘 읽었습니다. 어제 재미있게 읽던중 갑자기 모니터 글자가 깨지면서 다운되길래(사실 오타 몇개 발견하고 지적해드리려고 외우고 있었는데)새벽3시까지 바이러스치료한다 뭐한다 하다가 결국 실패하고 지금 다시 들어왔지만 오타 몇개 굳이 지적해야하나? 하는 회의도 들었지만 생각나는거 몇개만 올립니다. 마틴가 제기한->마틴이 제기한, 공동선에 기역하는-> 기여하는, 하버드에 들어간 학생중 첫째가 맞다->많다. 사실 님의 논평은 오늘 첨인데 왠만하면 화요논평 전부 읽어보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정모때 낯선 이들을 환대해주시던 님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못하고 한달이 흘러갔습니다. 한잔사세요.(쩝 왜 갑자기 이말이?)
아이쿠 이런, 컴이 말썽을 부렸군요? 지금쯤은 컴이 치료가 됐으면 좋겠군요. 더불어 오타 지적 감사드리고요. 꼼꼼하게도 읽으셨군요?^^ 환대는요, 겨우 인사 나누는 정도의 시간이었는걸요. 저도 위에 달린 한잔사님의 닉네임을 보고, 피식 웃었는데, 지크프리드님도 그러셨나봅니다. ^^모임 이후 여러회원분들의 글을 하나하나 읽으시는 지크프리드님을 눈치챘습니다. 지크프리드님이 다신 댓글을 통해서요. 그렇게 다른 회원분들의 글도 읽으시면서, 간간히는 지크프리드님의 글도 올려주세요. 그래야, 스스로 재미있는 비평고원에서의 시간이 되는 것 같더라고요. 한 발 담근 기분이랄까, 그렇더라고요...
꼬리말, 혹은 지크프리드님의 글을 통해 종종 뵙게 되길 바라겠습니다. 한 잔은 살다보면, 살 날 있겠지요? ^^
사실은 댓글 달다보니까 300자가 넘어가더라구요. 별 말도 아닌데 300자 넘어가서 댓글 두개까지 달거 없는데 어떡하지? 하는 순간 한잔사님의 댓글을 보고 그걸로 급마무리 했어요.ㅎㅎ 지금 서평두개 쓰려고 하고 있는데 그중 한권이 허클베리핀입니다.민음사판 완역본인데 거의 다 읽었습니다. 요즘은 날씨도 덥고, 월드컵기간동안 책도 안 읽어서 지금은 조금씩이라도 읽는데 치중하다 보니까 쓸 시간은 도통 나질 않는군요. 일단 이번주내로 허클베리핀 서평 올리면 인증해주세요. 댓글권한이 필요합니다.
등업은 카페지기인 소조님 할 일인지라, 제가 인증할 건 아닌데, 이를 어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