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문학의 해에 이어령 선생님이 ‘다시 읽는 한국詩’라는 시리즈를 조선일보에 연재했었다. 이 때 청마의 ‘깃발’에 대해서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는데, 그 때 실린 내용을 간추려 소개해본다.
<깃발>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청마의 ‘깃발’과 함께 떠오르는 것은 바다다. 푸르고 투명한 바다를 향해 나부끼는 한 폭의 깃발 - 그것이 지금까지 그 시를 읽어온 사람들의 가슴속에 박혀있는 인상이다.
청마의 고향이 바닷가에 있는 통영이고, 여러 참고서에도 그렇게 풀이되어 있고, ‘부산도’(釜山圖)라는 그의 시에도 바닷가 산허리에 나부끼는 기(旗)에 대해 쓴 적이 있으므로 그럴 듯하기도 하다. 그러나 꼼꼼히 읽으면 읽을수록 정말 그것이 바닷가의 기를 묘사한 것이 맞는지 의문이 든다.
청마의 깃발은 특정한 장소에 꽂혀있는 특별한 기의 모습을 묘사한 시가 아니다. 시의 구조를 분석해보면 깃발의 일반적 특성들을 여러 가지 메타포(은유)로 기술해놓은 관념 형태의 시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래서 시 전체의 언술을 하나의 통사구문으로 요약하면 ‘누가 깃발을 맨처음 공중에 매달았는가’ 라는 수사적 의문문이 된다. 그리고 깃발이라는 말 대신 ‘소리없는 아우성’에서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에 이르기까지 총 여섯 개의 은유를 상감해놓은 것이 바로 이 시의 형태이다. 그리고 동시에 ‘해원을 향해 흔드는…’이라는 구절은 그 여섯 개의 은유 가운데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러므로 그 구절 하나를 가지고 ‘바다를 향해 나부끼는 깃발’을 그린 시라고 말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독해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앞서 밝힌 대로 시 전체를 결정짓는 것은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이라고 한 마지막 시행이다. 그가 묻고 있는 기의 의미는 ‘바다’가 아니라, ‘공중’에 매달린 깃발 이다. 바다든 산이든 상관없이 하늘을 향해 나부끼는 원초적인 그 깃발의 의미요, 이미지이다. 그 깃발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있는 그것이 반드시 바다를 향해 나부끼고 있어서가 아니다. 시인 자신의 표현대로 그것이 공중에 매달려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이렇게 ‘공중에 매달린 기’를 ‘바다로 향한 기’로 한정해버리면 깃발의 ‘보편성’은 ‘개별성’으로, 그 ‘수직성’은 그 ‘수평성’으로, 그리고 ‘상승적’ 높이를 지닌 나부낌은 ‘확산적’ 넓이를 지닌 나부낌으로 변하고 만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푸른 해원’에 대한 풀이 자체도 달라져야 한다. 그것은 바다가 아니라, 하늘을 뜻하는 은유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이다. ‘손수건’만이 아니라, 해원(바다)까지도 은유구조로 읽으면 ‘바다를 향해서 흔드는 손수건’의 시행 전체가 ‘하늘을 향해 나부끼는 깃발’을 비유하는 것이 된다. 말하자면 바다→하늘, 깃발→손수건의 병렬적 구조를 지닌 비유가 되는 셈이다.
그렇게 읽으면 그동안 많은 사람을 괴롭혀 온 ‘영원한 노스탤지어’라는 수식도 그 뜻이 명확해진다. 바다 너머로 영원히 떠나는 사람이 육지를 향해 흔드는 손수건이라면 몰라도 뭍에서 바다를 향해 흔드는 손수건이 ‘영원한 노스탤지어’가 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러나 바다-손수건을 하늘-깃발의 관계로 바꾸어 보면 ‘영원’이라는 말, ‘노스탤지어’라는 말이 실감있게 가슴을 친다. 동서를 가릴 것 없이 시인들은 자신의 고향을 지상 아닌 하늘로 생각해오지 않았는가. 땅(現實)에 살고 있으면서도 영원하고 무한한 하늘(理想)을 그리워하는 시인의 마음을 가시화하면 바로 공중에 매달려서 펄럭이는 그 깃발이 될 것이다. 그래서 ‘영원한 노스탤지어’는 ‘슬프고 애달픈 마음’으로 자연스레 이어지고 맨처음 그러한 마음(깃발)을 공중에 매 단 사람은 원초의 시인, 시인의 원조가 되는 것이다.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하늘(天國)을 꿈꾸며 살아가는 것은 인간 본래의 근원적인 감정이다. 세속의 중력에서 벗어나 한치라도 하늘을 향해 높아지려는 발버둥과 그 처절한 초월의 의지… 그것이 바로 ‘소리없는 아우성’이고, 물결처럼 흐르는 ‘순정’이고, 푯대처럼 곧은 ‘이념’이고, 백로처럼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는 ‘애수’이다.
허공 속에서 펄럭이고 있을 뿐 언제나 높은 하늘이 아쉬움으로 남는 깃발의 마음… 끝없이 비상하면서도 끝없이 깃대에 묶여 있는 그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 그것을 가시화한 것이 다름아닌 청마의 깃발이다.
깃발만이 아니다. 공중에 매달려 나부끼고 있는 모든 형태 모든 생물, 그리고 모든 운동과 그 몽상이야말로 청마의 시를 꿰뚫고 흐르는 중요한 시의 모티브이다. 그래서 우리는 왜 기회주의자인 박쥐가 청마의 시 ‘박쥐’에 오면 갑자기 슬프고 아름다운 시인의 상징이 되는지, 그리고 왜 장대에 매달아놓은 생선이 바다 밑에서 헤엄치고 있을 때보다도 더 생명적인 물고기로 묘사되어 있는지 그 비밀을 알 수 있다. 땅바닥에서 척추를 세우고 꼿꼿이 일어서는 것, 그리고 수직의 그리움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면 그것이 연이었든 소리개였든, 혹은 담장을 기어오르는 덩굴이나 담배 연기라 할지라도 모두 아름답고 슬프게 나부끼는 청마의 깃발이 된다.
그러므로 ‘과연 바다를 향해 나부끼고 있는 깃발인가’ 라는 그 질문은 청마의 시 전체를 따지는 본질적인 물음인 것이다. 그리고 그 물음에서 해답을 얻게 되면 시인과 깃발과 박쥐가 왜 청마의 시에서는 같은 혈통을 지닌 족보에 올라 있는지도 밝힐 수 있게 된다. 파리한 환상과 몸부림과 그 안타까운 울음 속에서 날개를 키우기 위해 시인은 시를 쓰고, 깃발은 퍼럭이고, 본래 박쥐는 밤마다 서러운 춤을 추며 새처럼 난다. 그것들은 모두 땅이 아니라 지붕 위의 공중, 하늘을 향해 매달려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조선일보, 1996. 4 28)
내가 동시라는 어린이 시를 벗어나 본격적으로 처음 접한 우리 시인은 청마 유치환이었다. 중학교 1학년이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반 아이들이 수군수군 말하기를, 옆 반에 전혜린씨 딸이 있다는 것이었다. 키가 아담하고 속눈썹이 유난히 긴 아이였다. 당시만 해도 초등학교를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았던 때라 나는 그 유명한 전혜린이 누군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 얼마 후 학교 교지에 정화의 글이 실렸다. 그 글에서 정화는 자기는 '청마'의 시들이 너무 좋다고 하였다. 또 사라사테의 ‘찌고이네르바이젠’의 바이올린 선율도 너무 아름답다고 하였다. 나는 그 때 '청마'라는 호를 처음 들었었다. 곧바로 나는 청마 유치환의 시집을 사서 읽었다. 그리고 '사라사테’라는 이름과, 길어서 어려운 ‘찌고이네르바이젠’의 곡목도 유식하려면 알아두어야 하는 항목으로 머리 속에 집어넣었다. 그 후 나는 한동안 청마의 시에 심취했었다. 가장 좋아했던 시는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로 시작되는 '행복'이었고, '깃발', '그리움', '새' 등도 참 좋아했었다.
예전에 미국에서 불문학 교수로 있다고 하는 소식을 들었는데, 정화는 자기가 중1 때 그런 글을 썼던 것을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첫댓글 교과서적인 해설을 뚫으셨군요. 교과서에 실리는 해설 권력은 누구에게 있는지 궁금합니다. 중학교 시절이 생각나네요. 이 시를 열심히 외우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