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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은 한국 민족과 국가의 거룩한 기념일입니다. 이런 소중한 날에 저 같이 코 큰 서양인에게 기념법석을 열어주셔서 정말 감격스럽습니다. 고맙습니다.
저에게 3·1절은 스승이신 숭산 스님을 떠오르게 합니다. 제가 아는 3·1절은 바로 숭산 스님을 통해서입니다. 따라서 스님을 통해 3·1절의 의미에 대해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스님은 평양 출신입니다. 남한 땅에서 실향민의 삶이 그렇듯 스님은 어려운 일을 많이 겪었습니다. 생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참혹한 시절이었다고나 할까요. 가끔 당신의 옛 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했는데 그때를 반추하면 가슴이 먹먹해지곤 합니다. 스님은 어린 시절, 한국말도 한글도 쓸 수 없었습니다. 일본 사람의 눈치를 보아가며 일본의 글과 말을 써야 했습니다. 가슴 아픈 일이지요.
‘호국’엔 ‘대승’녹아있어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스님은 미국에 계실 때 일본말을 많이 쓰셨습니다. 미국에는 일본 선원이 아주 많았고, 스님은 한국을 대표해서 법회에 자주 참석하셨습니다. 일본 사람들과 만나니 어쩔 수 없이 일본어로 대화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정을 모르는 제자들은 감탄사를 연발했습니다. “우리 스님은 참 머리가 좋으셔. 영어도 잘하고, 한국어도 잘하고, 한문에, 일본어까지, 아! 정말 대단하다. 스님 어떻게 그렇게 일본말을 잘 하세요”
그러면 스님은 언제나 짧게 “예”하십니다. 저는 당시의 스님의 모습을 떠 올릴 때마다 가슴이 아픕니다. 스님은 가끔 그런 말을 들으실 때마다 “이것은 나에게 결코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스님은 망국민으로 어쩔 수 없이 일본어를 배워야 했던 슬픈 경험을 잊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스님은 도인답게 상황에 따라 일본말을 하셨습니다. 커다란 아픔이지만 한국불교의 포교를 위해 걸림이 없으셨던 것입니다.
스님의 출가 동기는 공교롭게도 3·1절과 관련이 있습니다. 1948년 3·1절 행사가 좌우익이 나뉜 싸움판이 되는 것을 보고 민족을 구할 방안을 찾아보자는 마음으로 출가를 하신 것입니다. “내가 나의 마음을 찾아야 나라를 살리고 세계를 평화롭게 할 수 있다.” 이것이 출가 당시 스님의 생각이셨습니다. 스님에게 출가는 나의 문제가 아니라 민족, 그리고 세계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호국이라는 한국불교의 독특한 문화에 대한 이해도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팔만대장경을 판각하는 일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무슨 의미가 있느냐. 스님이 전쟁에 참여해 다른 민족이나 사람을 해치면 안 되는 것 아니냐?” 외국인 스님들은 이런 질문을 자주 합니다.
이에 대해 스님은 “민족과 나라도 소중하지만 무엇보다 한국의 불교 전통이 중요하다. 당나라, 송나라에 걸쳐 이룩된 불교의 전통은 정작 그 땅에서는 사라지고, 다만 한국에 남아있을 뿐이다. 나라가 망하면 불교도 없으며, 불법승 삼보도 없다. 따라서 전쟁에 참여하는 스님들은 속인의 마음이 아닌, 대보살의 원력으로 참여 한 것이다. 조선의 서산대사, 사명대사는 대보살이다.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망하면, 결국 부처님의 가르침도, 아름다운 한국의 불교전통도 사라지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호국에 대한 정확한 표현입니다. 또 불교도들이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하는지 잘 드러나 있습니다. 서양인들은 개인적인 목적으로 불교를 배우고 믿습니다. 그러나 한국불교를 알게 되면 세상을 위해, 그리고 중생을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됩니다. 만해 스님과 용성 스님 같이 목숨을 내놓고 나라를 지킨 선각자들이 없었다면 이 자리도 없었다는 것을. 그리고 오늘의 이 청정한 도량 또한 존재할 수 없었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日 선원과는 인연 안 닿아
저는 일본의 책을 통해 불교를 알게 됐습니다. 그러다 직접 참선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뉴욕에 있는 한 선원을 알아내, 그곳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선원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길을 건너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선원인데, 발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마치 시멘트로 발을 고정시켜 놓은 것 같았습니다. 제가 망설이고 있는 동안에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선원에 들어갔습니다. 정말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저는 자괴감에 빠졌습니다. 스스로 용기 없음을 한탄하며 한동안 우울증에 걸린 것처럼 모든 의욕을 상실했습니다.
이렇게 얼마쯤 지났을까? 어느 날 예일대 옆에 있던 선원이 불현듯 떠올랐습니다.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고 왔다 갔다 하던 사람들. 저는 곧장 그곳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아주 쉽게. 그러나 분위기는 마치 어머님의 품에 안긴 것처럼 편안했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처음 발길을 돌린 선원은 일본 선원이고, 문을 열고 들어섰던 선원은 스승이신 숭산 스님이 세우신 한국 선원이었습니다. 참 이상한 인연이지요. 저는 1990년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당시 계룡산 선방에서 한철을 났는데 참으로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무사히 한철을 보내고 저는 한동안 큰스님을 모시고 화계사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평생 잊지 못할 충격적인 경험을 했습니다. 어느 스님의 방에서 음악이 흘러나오는데 복받치는 슬픔에 울음을 터트린 것입니다. “댄대에댄, 댄댄댄댄, 댄대대 대에댄” 저는 울었습니다. 울고 또 울었습니다. 깊게 아픈, 그러면서도 자랑스러운, 도무지 딱히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온 몸을 휘감았습니다. 이게 무슨 노래일까, 민속 노래일까, 미국 노래는 아닌데 무슨 노래일까.
그러나 저는 의문을 풀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으로 건너가 남은 공부를 마치고 스님이 됐습니다.
그로부터 5년 후, 1995년 저는 한국에 다시 왔습니다.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쳐 달라는 동대 총장님의 부탁 때문이었습니다.
학생들과 한국에서 보낸 날들은 즐거움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마 8월 15일 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학교 식당의 TV에서 광복 50주년을 기념해 경복궁 내에 있는 일본의 구총독부 건물 철거 장면이 방영됐습니다. 물론 외국인인 저에게는 아무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습니다. 다만 저는 한국에 오면 먼저 박물관을 찾는 외국 스님들과 달리 구총독부 안의 박물관을 한 번도 가지 않았습니다. 이상하게 가기가 싫었습니다. 어쨌든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있던 저는 TV에서 들려오는 음악에 또 다시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댄대에댄, 댄댄댄댄, 댄대대 대에댄” 울었습니다. 엄청나게 울었습니다. 6년 전 화계사에 들었던 그 노래라는 것도 알지 못하고 그냥 복받쳐 울었습니다.
“너는 전생에 독립운동가”
이상한 음악과의 이해할 수 없는 인연은 경주 남산에서도 재연됐습니다. 학기를 마치고 경주 남산 천룡사지 토굴에서 100일 기도에 전념하던 도중 절터를 지키며 밥을 해주시던 노 보살님의 방에서 흘러나오는 그 음악에 또 복받치는 감정을 다스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묵언을 했던 저는 100일 기도를 회향한 후 남산에 계시던 한 노스님께 물었습니다. “점심 때마다 TV에서 노래가 나오는데, 그 노래 제목이 무엇입니까?” 제목도 모르고, 한국말도 서툰 저의 질문에 스님은 당황하셨지만, 제가 멜로디를 더듬더듬 읊조리자 스님은 무릎을 치면서 말했습니다.
“그것은 애국가야.”
“서양인인 제가 왜 한국의 애국가를 들으면 울음이 복받치는 것일까요.”
의문은 꼬리를 물었습니다. 2~3년 의문을 품던 저는 어느 날 숭산 스님께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스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너는 전생에 한국의 독립운동가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본 선원도, 구총독부 청사도 들어가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짐작하고 있었다. 너는 전생에 일본군의 총에 맞아 죽었는데, 다음 생에 강한 나라에 태어나서 다시 한국에 오고 싶다는 서원을 세웠기 때문에 지금의 네가 있다.” 스님께서 제가 들려주신 이야기입니다.
물론 저는 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 길이 없습니다. 어찌됐든 3·1절인 오늘 저는 이 자리에 있습니다. 내일이 있을지, 그리고 과거가 있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오늘이 있기 때문에 과거가 있었음을 알 수 있고 내일이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3·1절 거룩한 날, 부족한 외국인 저의 이야기를 경청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세세생생 중생제도하시고 구국하시기 바랍니다.
김형규 기자 kimh@beopbo.com
이 내용은 현각 스님이 3월 1일 안성 도피안사(주지 송암 스님)에서 열린 3·1절 기념법회에 참석, 법문한 내용을 요약 게재한 것이다.
현각 스님은
1964년 미국 뉴저지에서 출생해 하버드대학 대학원 종교철학과를 졸업했다. 하버드대학원 종교철학과 재학 중 숭산 스님의 강의를 듣고 1991년 출가해 스님이 됐다. 현재 화계사 국제선원장으로 있으며, 저서로『선학강의』『선의 나침반』『만행』등 다수가 있다. |
첫댓글 스님...애국가에 감동 받으신 스님...늘 건강하십시요..._()()()_
2월 초하루 대각사 주지 이.취임식에서도 축사를 해주셨지요. 도피안사의 송암스님의 광덕스님의 상좌이시지요. 그 곳에서 3.1절 기념법회를 하시는데 법문을 하셨으니 참 잘되었습니다.
감동적입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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