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어 달 전, 화란에서 유학중인 친구 목사로부터 안부 전화를 받았다. 타향살이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시작된 우리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교회 개혁과 관련된 주제로 옮아갔다. 이것저것 대화를 나누던 중에 그가 경험하고 있는 화란 개혁교회의 실상이 어떠한지를 물었다. 친구는 자신의 사견(私見)임을 밝히면서 매우 조심스럽게 직접 경험한 한가지 사례를 들려주었다.
작년은 세계 칼빈주의 3대 신학자중 한 사람으로 일컬어지는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1854-1921)의 탄생 150주년이 되는 해였단다. 이 일을 기념하여 오래 전부터 화란 개혁교회와 성도들이 성대한 종교개혁 세미나를 기획하였다는 소식을 접한 터에 설레는 마음으로 행사장으로 향했다고 하였다.
몇 일에 걸쳐 진행된 세미나는 매우 알차고 유익한 프로그램들로 가득하였다. 하지만 행사 기간 내내 무언가 석연치 않은 부담과 아쉬움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고 하였다. 이유인즉, 바빙크라는 개혁신학의 거목과도 같은 이의 이름을 내세운 특별 행사였음에도 참석한 사람들의 수가 극히 적은데다, 젊은이들의 모습은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친구를 정말 당황스럽게 하였던 것은 애써 참석해 준(?) 사람들 중에는 바빙크가 누구인지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다고 하였다. 개혁신학의 본고장이라는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아니면 화란 사람들의 바빙크에 대한 무관심이 못내 섭섭했던 탓일까? 화란 교회의 풍경을 전하는 친구의 목소리에는 짙은 아쉬움이 배어 있었다.
하지만 이런 감상은 친구만의 것이 아니었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듣는 순간, 바빙크의 '개혁주의 교의학'에서 읽었던 몇 구절들이 마치 비수처럼 나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대략 1750년대에 개혁주의 신학의 몰락은 어디서나 확인되었다. (중략) 엄밀한 칼빈주의는 땅에서 날마다 잃어가고 있다. (중략) 미국에서도 개혁주의 교회와 신학은 진지한 위기에 들어선 것이다. (중략) 칼빈주의에 대한 미래는 낙관적이지 않다."
바빙크는 1세기 이후에 펼쳐질 오늘날의 칼빈주의의 현실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바빙크 개인과 그의 신학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에 대해 예견하고 있었던 것일까? 불행하게도 한 세기 전, 그가 내어놓은 칼빈주의 운명에 관한 예언은 너무나 정확하게 적중되고 있는 듯하다.
올해로 제488주년 종교개혁 주간을 맞이하였다. 매년 그랬던 것처럼 이곳저곳에서 종교개혁과 관련된 행사들이 기획되고 진행될 것이다.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데 교파와 교단의 구별은 없어 보인다. 많은 교회들이 종교개혁 주간을 맞아 기념예배와 특별집회를 갖는가 하면 신학교와 연구 단체는 종교개혁과 관련된 학술토론회와 심포지엄을 개최할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종교개혁 기념 체육대회라도 열릴 판이다. 이러한 행사들을 통해 종교개혁의 의미를 조금이라도 나눌 수 있다면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종교개혁 주간을 대하는 나의 마음은 그리 편치 않다. 좀더 정직하게 말한다면, 장로교회 목사로 부름을 받은 이후 한 번도 만족할 만한 종교개혁 주간을 보낸 적이 없다. 종교개혁 주간이 되면 더욱 명료해지는 "과연 우리는 종교개혁의 진정한 상속자들인가? 과연 우리는 종교개혁의 명실상부한 후예인가?" 하는 근원적 물음 앞에 여전히 궁색해지는 내 자신과 갈수록 착잡해지는 작금의 교회 현실 때문이다.
우리는 다시 종교개혁 주간을 맞이하고 있다. 만약 우리 스스로를 칼빈주의자나 칼빈주의의 후예라고 생각한다면 또 다시 종교개혁 주간을 맞이하고 있는 지금, 영적 책임감과 두려움을 갖고 이 때를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다시 묻는다. 이토록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여전히 종교개혁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종교개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할 때 누구에게로, 어떻게 돌아갈 것인가? 그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 없는 종교개혁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2. 루터의 종교개혁 의미와 한계
종교개혁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면 단연코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이다. 1517년 10월 31일, 그는 로마 천주교의 참람한 종교적 거짓과 부패에 맞서 '95개 반박문'을 비텐베르그 성문 앞에 게재하였다. 그날밤, 이 회심의 도전장을 내걸고자 두드렸던 망치소리는 천여 년 동안 어둠속에 방치되었던 진리의 빗장을 여는 울림이 되었다.
'95개 반박문'은 요원의 들불처럼 삽시간에 유럽 전지역에 퍼져나갔으며 종교개혁을 염원하는 이들의 마음을 불태우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의 낙후한 인쇄기술을 감안하면, 기적과도 같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95개 반박문'이 종교개혁의 서막을 알리는 전주곡이었다면, 그의 대담하고 소신 있는 종교적 열정과 행동은 종교개혁이라는 마차를 이끄는 용감한 근위병의 모습 자체였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세인들조차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류의 업적 중 하나라고 평가할 만큼 후세에 남긴 그의 업적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만큼 지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종교개혁을 논함에 있어서 루터와 분리할 수 없음에도 우리의 시선을 그에게만 고정시킬 수 없는 몇 가지 중대한 사실들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빛나는 영광의 순간도 많았지만 어두운 그림자 또한 길게 드리워져 있다. 종교개혁이라는 역사상 가장 엄청난 영적 다이너마이트의 발화점이 되었지만 엉성하고 거추장스러운 잔해들이 너무 많이 산재해 있었다.
루터는 로마 천주교를 향해 비판의 날을 세웠지만 그들의 잘못된 진리체계를 허물 만큼 결정적이지 못하였으며, 이신칭의와 만인제사장주의 같은 로마 천주교와 차별되는 개신교 신학의 금자탑을 세웠지만 로마 천주교의 가르침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였다. 또한 교회와 세상을 향한 종교개혁의 남다른 애착과 의지를 가지고 있었지만 오히려 후대로 접어들면서 세상 세력들의 타협과 절충속에 그의 개혁의지는 현저하게 약화되고 말았다.
그러나 루터의 종교개혁을 '미완(未完)의 개혁'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는 진정한 이유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보다 정밀하고 완성도 있는 이해가 부족하였던 점이다. 루터 개인의 의지는 아니었을지라도 보다 덜 엄밀했던 그의 신학적 이해는 언약론과 성찬론과 국가론을 해석함에 있어서 중대한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결국 그의 과도하거나 부족했던 성경해석 방식은 그의 사상적 계보를 잇는 루터주의자들에게 이르러 "성경에서 허락하지 않은 것은 언급할 필요가 없다"는 식의 보편과 관용의 해석적 틀로써 성경 전체를 이해하려는 신학적 변질의 단초가 되고 말았다. 루터주의자들은 모든 세상 사람을 위한 루터를 요청하기 위해 종교개혁자 루터를 희생시켰다. 역사적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3. 루터와 루터주의를 넘어선 종교개혁
이러한 내용은 역사적 사실이지만 모든 이들에게서 환영받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종교개혁이 시작되는 단계에서 루터와 칼빈의 꿈과 목적이 공유될 수 있는 그 무엇이었을지라도 루터주의와 칼빈주의는 많은 차이점을 가졌으며, 다른 결과를 낳았다는 사실 또한 부정할 수 없다. 루터주의와 칼빈주의라는 용어가 그것을 대변해주고 있다.
개신교(Protestant)란 로마 천주교와의 구별을 둘 때 사용하는 낱말이듯이 칼빈주의는 루터주의에 대한 변별적(辨別的) 용어이다. 사실 후자는 반종교개혁적 세력들에 의해 붙여진 이름이다. 적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이미 두 그룹 사이에는 내용상 현격한 차이가 있었음을 반증해 주는 대목이다. 세상의 모든 개신교도들이 루터로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을 말하지만, 우리 스스로를 루터주의자라 하지 않고 칼빈주의자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종교개혁의 본질적인 성격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할 때에 루터와 루터주의에게서 머물 수 없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진술은 내용을 떠나서 루터교회나 타 교단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리 반길 만한 주장은 아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처한 보다 심각한 딜레마는 타 교단에 속한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스스로를 장로교회 교인이요, 개혁교회 교인이라고 자처하면서도 칼빈과 칼빈주의에 대해 냉소적이고 심지어 부정적인 명목상의 칼빈주의자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이다.
최근에 '보수' 혹은 '보수주의'라는 말이 새로운 시대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수구꼴통'이라는 낱말로 묘사되듯이 '칼빈주의자' 혹은 '칼빈주의'는 시대와 타협할 줄 모르는 오만하고 독선적인 신앙과 신학쯤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이쯤 되다보니 칼빈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교단과 교회 심지어 신학교에서까지도 종교개혁은 언급하더라도 칼빈과 칼빈주의는 너무 강조하지 말자는 의견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종교개혁을 간절히 염원한다고 하면서도 칼빈주의식의 종교개혁에는 고개를 절래저래 흔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가장 참된 종교개혁를 향한 꿈과 의지가 있다면 루터와 루터주의를 넘어서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있음을 함께 기억해야 한다. 그런데 이 목적지에 정확하게 도달하기 위해서는 많은 장애물을 넘어야 한다. 그중에서도 칼빈주의자로서 극복해야 할 가장 시급한 내적 장애는 칼빈과 칼빈주의에 대한 구체적인 배움과 확신이 없다는 것이다.
칼빈주의를 표방하는 신학교에서 가장 홀대받는 것이 칼빈이라는 소리가 있을 만큼 칼빈과 칼빈주의는 별로 인기가 없다. 칼빈주의를 신학이념으로 표방하는 역사적 칼빈주의 신학을 교회와 목회에 제대로 적용하는 교회를 찾아보기가 더욱 힘들어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안팎에서 칼빈주의는 하나님보다 칼빈을, 하나님 말씀보다는 교리를 더 신봉하기 때문에 부담스럽다는 부정적인 인식이 확산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그야말로 칼빈주의 실체를 교란하려는 적들이 꾸며낸 궤계에 불과하다. 칼빈이나 칼빈주의라는 용어가 부담스럽다면 사용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두 용어에 대한 부정적인 루머가 있다고 해서 그 내용까지 포기하는 것은 몸이 더러운 아이를 방에 들이려고 씻긴 후 더러워진 물과 함께 아이를 내다버리는 격이다. 바르게 앎이 없는 사람일수록 주변적인 영향에 동요되듯이 칼빈과 칼빈주의에 대한 바른 이해가 부족한 사람일수록 이것들과 관련된 왜곡된 정보에 쉽게 흥분하고 쉽게 체념한다.
한가지 되짚고 넘어가자. 우리가 칼빈을 말하려는 것은 그 개인의 인격이나 능력에 관한 것이 아니다. 영적 진리가 감추어졌던 암매한 역사 속에서 칼빈이라는 한 인물과 그와 뜻을 함께 했던 수많은 종교개혁자들을 방편 삼아 진리의 정직성과 풍성함을 유감없이 드러내신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를 주목하자는 것이다. 만약 누구든지 칼빈 개인을 우상화하거나 칼빈주의의 교리를 성경보다 우위에 두는 자가 있다면 칼빈과 칼빈주의라는 낱말의 사용 여부와 상관없이 사악한 이단임에 틀림없다.
4. 칼빈주의의 종교개혁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
그렇다면 우리가 루터와 루터주의를 넘어서 칼빈과 칼빈주의로 나아가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왜 종교개혁의 의미를 논할 때에 이 칼빈과 칼빈주의를 회피해서는 안 되는가? 오늘날 복음주의를 대변하는 루터주의와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칼빈주의가 어떤 차이점을 지니고 있는지 다시 한번 바빙크의 진술에 귀를 기울여보자.
"칼빈주의 그리스도인은 신론적으로 생각하고, 반면 루터주의 그리스도인은 인간론적으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칼빈주의자는 역사 안에 서서 머물지 아니하고 이념 즉 영원한 하나님의 결정에까지 끌어 올라간다는 것이요, 루터주의자는 그 입장들을 구원사의 중심에서 취하고 더 깊이 하나님의 성장에까지 꿰뚫고 들어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칼빈주의자들의 경우 선택이 교회의 핵심이고, 루터주의자들의 경우 칭의가 교회의 항존적이고 항상 출발하는 조항이다. 칼빈주의의 경우 첫째 되고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어떻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에 이르시느냐에 있고, 그와 대조적으로 후자의 경우 어떻게 인간이 축복에 이르느냐에 있다. 전자의 경우 이교도주의, 우상에 반대하는 싸움이고 후자의 경우 유대주의, 행위 거룩에 반대하는 싸움이다. 칼빈주의자는 그가 모든 것을 하나님의 결정에 되돌리고 물(物)의 원인을 추적하며 앞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에 유익되게 하기 전에는 쉬지 않는 반면에, 루터주의자는 현상에 만족하고 그가 신앙을 통하여 부여받은 축복에 안락하는 자들이다"(「개혁교의학」 중에서).
바빙크의 이 같은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 것은 루터주의와 칼빈주의에 대한 한 시대 속에 머문 평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바빙크는 이 진술을 하기 앞서 매우 정교한 필치로 초대교회로부터 20세기 초까지 교회가 처한 역사적 정황과 교리를 구체적으로 더듬은 이후의 결론이다. 즉 칼빈주의의 신학은 사도들의 성경이해에 충실하였던 초대 교부들의 신학이요, 교부들의 해석을 총망라했던 어거스틴의 신학이요, 종교적 거짓과 부패에 맞서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의 성경적 사상을 가장 적확하게 드러낸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에 대한 총체적인 신앙고백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가장 엄밀한 이해와 적용이 역사적 칼빈주의의 신학과 신앙속에 담보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루터와 루터주의를 비롯하여 다른 교단의 신학과 신앙에 어느 정도의 진정성과 경건성이 보장된다고 할지라도 그곳에 진리의 닻을 내릴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칼빈이나 칼빈주의에 대한 막연한 환상도 금물이지만 밀도 있는 확신의 결핍 또한 문제이다. 칼빈과 칼빈주의에 대한 무수한 오해와 편견은 더 이상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이 진리를 향해 걸었던 정도(正道)로 나아가는 데 장애나 핑계가 될 수 없다.
만약 바빙크와 필자의 견해에 동조할 수 없다면 도서관에 가보라. 인터넷 검색창을 두드려 보라. 종교개혁과 관련하여 칼빈과 칼빈주의에 관한 수많은 자료와 책들이 이 사실을 증명해 줄 것이다. 칼빈으로부터 개혁교회 3대 신앙고백(하이델베르그, 벨직, 도르트)의 작성자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작성에 참여한 많은 신학자와 목회자 그룹, 청교도들, 바빙크와 박윤선 그리고 일일이 이름을 열거할 수 없지만 오직 하나님께 영광만을 위해 전 삶을 드린 진리의 파수꾼들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칼빈주의라는 보석을 캐어내었고, 칼빈주의 안에서 하나님 말씀을 지켜내었다.
그리고 칼빈주의에 대한 그들의 확신과 헌신으로 말미암아 칼빈주의는 종교개혁의 핵심이요, 진리 체계의 최고봉으로서의 신학으로서 오대양 육대주로 퍼져나갔으며 지금 우리에게까지 전수되어오고 있다. 하지만 칼빈주의 영향은 교회와 성도에게만 국한될 만큼 협소하고 제한된 것이 아니었다. 세상의 전 영역(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역사 등)에 걸쳐 가장 고상하면서도 근본적인 생의 원리를 제공하였으며 우주와 자연 그리고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관조와 통찰을 제시해 주었다.
5. 칼빈주의에 대한 오해와 편견과 칼빈주의의 몰락 원인
그러나 칼빈주의의 탁월한 진실성과 막강한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칼빈주의의 가장 핵심적인 주장(예를 들어 삼위일체, 예정론, 언약의 통일성, 도덕법과 주일성수 등)들은 언제나 다른 신학으로부터 경계의 대상이 되었으며 세상과의 은밀한 거래를 통해 세상의 권세를 누리려는 교회와 신앙으로부터 경멸의 대상이 되어 왔다. 칼빈주의가 꽃피우는 곳마다 성경적이면서도 진실한 신앙고백들이 작성되었고 경건의 삶으로 회복되는 놀라운 경험이 나타났음에도 칼빈주의는 박해와 억압의 그늘을 벗어난 적이 없으며, 진리를 위해 생명을 내어놓아야 하는 고난과 위기의 기로에 서 있어야만 했다. 칼빈주의는 성경의 주된 가르침을 벗어난 적이 없지만 세상의 주류 신학의 왕좌에 오르지 못했다. 아니, 오를 수 없었다.
칼빈주의의 역사를 진지하게 돌아보는 사람마다 깨닫게 되는 놀라운 사실 중 한 가지는 칼빈주의는 어느 때에도 보편적이거나 대중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첫째, 칼빈주의의 내용 자체가 세상에 대해 중립적이거나 세상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칼빈주의 5대 교리에서 볼 수 있듯이 칼빈주의는 인간의 전적부패,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선택, 제한적인 속죄, 저항할 수 없는 은혜 그리고 성도의 견인 사상을 주장한다. 한마디로 칼빈주의는 ① 인간의 경험보다 성경의 확실성을, ② 타협적인 인간 본성보다 변치 않는 하나님의 섭리를, ③ 현상적인 사색보다 계시의존 사색을, ④ 인간의 공로와 행위보다 오직 믿음과 은혜를 고집한다. 이러한 개혁주의의 강조점은 신학과 신앙과 교회가 좀더 인간적이고 좀더 세상적이기를 바라는 모든 이들의 양심과 행동을 불편하게 만든다.
둘째, 칼빈주의가 결코 대중적일 수 없는 또 한가지 이유는 칼빈주의에 대한 도전 세력들의 영향력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바빙크의 지적대로 칼빈주의 신학에 대한 부정적인 반향들은 17세기부터 칼빈주의가 몰락하기 시작하였으며 20세기에 이르러서는 몰락이 정착되는 현상이 구체적으로 목격되었다. 칼빈주의를 훼파하기 위한 도전은 수세기 동안 신앙의 영역에 제한됨 없이 거의 전방위적인 형태로 나타났다. 다음과 같은 것들이 칼빈주의를 훼파한 대표적인 사상과 원리들이다.
인간의 이성과 자율성을 강조하는 '계몽주의', 신적 권위와 확신으로부터 탈피를 시도한 '데카르트주의', 성경의 객관성보다 내적 주관과 경험을 신학의 원리로 삼은 '재세례파', 구원을 하나님과 인간의 공동의 작품으로 만든 '아르미니우스주의', 언약의 실체를 언약의 경륜의 흐름으로 전락시킨 '코케우스주의', 경건한 삶에 대한 추구와 의지를 진리의 핵심으로 대체한 '경건주의', 신이 지배하지 않는 사회를 위해 신을 영원의 시간 속 감옥에 가둔 '이신론', 인간을 신으로부터 독립적인 존재로 규정한 '민주주의', 신학과 교리를 포기하고 교회의 성공과 확장에 몰입한 '부흥주의'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러한 반칼빈주의적이거나 혹은 비칼빈주의적인 세력을 한데 규합하고 선동함으로써 칼빈주의의 몰락을 주도적으로 이끈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 운동'이 그것이다.
6. 칼빈주의에 대한 비관과 낙관
만일 우리가 칼빈주의라는 신학적 배경 안에서 교회를 이루어가고 있으며 스스로를 칼빈주의자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이러한 사상들이 칼빈주의의 몰락에 얼마나 결정적인 기여를 했으며 우리의 신학과 신앙에 얼마나 치명적인 오류를 생산해 내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교회와 신앙은 역사적 상황과 분리될 수 없다. 칼빈주의의 발흥과 성장과 몰락의 과정은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그렇기에 칼빈주의자에게 있어서 역사를 바르게 조망하는 안목은 필수적이다. 하물며 칼빈주의 교회를 이끄는 목사들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끊임없는 역사적 반성과 통찰을 통해 칼빈주의의 정체성을 바르게 확보해 가는 일은 설교를 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일만큼 중요한 목회자의 책임인 동시에 사역이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칼빈주의의 몰락의 그림자가 오늘날 우리 시대에 길게 드리워져 있으며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매우 가파른 내리막길로 치닫고 있다는 사실이다. 안타까운 것은 그럼에도 종교개혁을 외치며 칼빈주의를 말하는 많은 이들이 이 상황을 그리 심각하게 여기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칼빈주의를 표방하는 신학교와 교단에서조차 칼빈주의 신학의 공동화(空洞化)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 역사의 굴곡속에서도 그토록 수많은 칼빈주의자들이 결코 타협하거나 양보할 수 없었던 신학주제들이 교단과 강단으로부터 밀려나고 있다. 칼빈주의 신학을 지탱하고 참된 교회의 연합을 도모해주던 역사적 신앙고백은 한낱 과거의 빛바랜 추억쯤으로 여겨지고 있다.
더 이상 신학과 교리를 말하지 않는 사이, 교단과 교회간의 실제적인 신학적 구별점은 사라지고 상호간의 관용과 화합이 교회를 평가하는 가치 기준으로 자리잡혀 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의 종교개혁이란 교단의 영향력 강화와 교회의 외적 성장과 확장 그리고 목회자 개인의 목회 비전과 성도 개인의 종교적 성취감을 고무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다. 우리가 처해 있는 이러한 상황에 대한 분명한 자각과 통렬한 반성과 뼈를 깎는 갱신의 노력 없이는 칼빈주의의 미래를 낙관하기 힘들다.
하지만 여전히 종교개혁이 우리에게 화두(話頭)로 주어진 이상 언제라도 참된 종교개혁에로의 적극적 가능성은 열려있다. 모든 시대의 종교개혁이 우리 주님의 주권가운데 있다는 사실은 이 땅에서 칼빈주의자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가장 확실한 희망이 된다. 참된 종교개혁의 역사를 돌아보는 사람마다 우리 안에 있는 잘못된 종교개혁의 환상을 포기하게 될 것이며 우리 안에 남겨진 종교개혁의 거룩한 과업을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는 한 종교개혁의 전통은 계속될 것이다. 왜냐하면 참된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교회를 향하신 변함 없는 바람이요 요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이 순간에도 종교개혁은 계속되고 있다. 말씀 안에서 죄악을 통회하며 자신을 부정하며 성실과 정직으로 말씀에 깃댄 삶 속에서, 거룩한 말씀의 선포가 있으며 성례와 권징의 정당하고 바른 시행을 통해 참되게 세워지는 교회 속에서, 역사적 칼빈주의의 신학적 유산을 소중히 여기며 말씀 앞에 부끄럼 없는 목회자를 배출하는 선지 동산에서 종교개혁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만나고 있다. 이 같은 곳에서 종교개혁의 생명이 살아 숨쉬는 한 칼빈주의는 결코 비관적이지 않다!
*본고에서 언급된 '칼빈주의'라는 표현은 곧 '개혁주의'라는 말과 동의어로 쓰인다. 독자들은 '칼빈주의'라는 용어를 대할 때마다 '개혁주의'라는 단어를 함께 떠올려 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