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아시가루(足軽)들의 창은 사무라이들의 창과 비슷한 길이였으며 (3 - 4미터) 오닌(應仁)의 난 당시에는 전투 시 자유롭게 휘두르며 싸울 수 있었다. 1530년경부터 아시가루의 창 자루는 눈에 띄게 길어지기 시작했고 파이크와 유사한 나가에야리(長炳創)가 만들어지게 된다. 1587년경 호조 우지마사(北條氏政)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병사들은 다음과 같은 무기를 가지고 전장으로 향해야 한다, 활이나 창, 총. 그러나 자루를 대나무나 나무로 만든 창은 길이가 두 칸(약 4미터)보다 짧으면 소용이 없다.”
자루가 길어짐으로써 사무라이들과는 매우 구별되는 아시가루들의 창술이 발전하게 된다. 사무라이들은 전장에서 휴대한 무기를 사용해 개인적으로 싸우는 창수(創手)로서 존중받았다. 아시가루들은 2 - 3열로 구성된 대열을 만든 후 창끝을 나란히 한 후 적과 싸우는 훈련을 받았으며 이런 점에서 유럽 파이크병과도 유사한 점이 있다. 나가에야리의 창 자루는 참나무같이 단단한 나무를 중심에 놓고 대나무 조각들로 주위를 둘러싸는 복합적인 구조로 만들었다. 활과 마찬가지로 자루 전체에 방수를 위한 옻칠을 했다. 나가에야리의 자루 길이는 다이묘들의 선호도에 따라 가문과 가문마다 차이가 났으며 일반적이 자루길이는 세 칸이었다.
전국시대 초창기에 한 칸은 약 1.6미터였으며 (나중에 한 칸은 1.8미터로 바뀐다.) 일반적인 창 자루의 길이는 오늘날의 단위로 4.8미터다.
다케다 가문은 세 칸 길이의 나가에야리를 사용했다. 우에스기 겐신은 두 칸 반짜리 자루를 사용했으며, 그의 후계자 카게카츠(1555 - 1623)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그러했듯이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세 칸짜리 창을 운용했다. 도쿠가와 가문도 역시 세 칸짜리 자루를 사용했다.
오다 노부나가는 세 칸 반(5.6미터)짜리 자루를 사용함으로서 모든 다이묘들을 통털어 가장 긴 창을 운용했다. 신장공기의 1553년 4월 기록에는 ‘500개의 세 칸 반짜리 장창’에 대한 구절이 나온다. 오다의 장인인 사이토 도산(斎藤道三)은 노부나가의 병사들이 철포병 만큼이나 많은 훈련을 해야하는 길다란 창으로 무장한 걸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첫댓글 결국 사리사 수준으로 공격 리치가 긴 오다의 팔랑스가 승리 ㄱ-;? (농담)
근데요~ 일본 사람들 체구가 너무 너무 작았던 것으로 아는데 5.6m나 되는 창을 어떻게 다루나요...? -ㅁ- 정말 그리스 방진 팔랑크스?
창이 길어봤자 근병접전에는 개떡입니다. 로마군이 방패들고 그리스군과 마케도니아 군의 창 사이로 들어가 팔랑크스 박살냈습니다. 기병도 별로 없는 이놈들이 장창을 쓴것은 산악전때 밀려 내려오는 적군을 저지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피로스가 처음 왔을때 로마&연합국 장병들이 "칼로 창끝썰기" "방패로 막고 기어가기" "창아래로 구르기" 등등등을 시도하였으나 결과는 "캐발살" 이었습니다 -_-;;; (사리사에 모두 꼬챙이형)
평지에 위치한 팔랑스를 정면에서 갑빠로 뚫고 들어가는 검병들은 RTW 에만 존재합니다 ㅇㅅㅇ;
그리고 창을 휘두를필요가 없을테고 재질은 가벼운 대나무로 만들었을 테니깐 일본 사람들이 들기에는 큰 문제가 없을것 같습니다(대신 장창가지고 무술을 한다는 것은 무리일듯....)
팔랑스도 알렉산더 시절의 팔랑과 로마와 전쟁시의 팔랑도 차이가있는데 (같의 팔랑과의 전투를위해 중무장강화로 기동력이 더떨어짐) 같이 일반화시키는것은 그렇다면 스위스군(초기 가난해서 무장이 가벼워 장창병임에도 기동력이 좋았음)등장이유 서유럽군의 보병주력이 장창병으로 바뀐 이유가 설명되지 않습니다
-ㅅ-;;;; 쿨럭... ROK Commander님, 그러면 제가 알던건 구라였단 말입니까아!!!(덜덜덜덜...)
<(ㅇㅁㅇ)> ... (ㄴ-_-ㄱ 님의 록커맨더 이후로 두번째 쇼크) ROK_CompanionOfficer 라고 "컴패니언" 이야요 ;ㅁ;
푸훗. 그럼 이 놈들이랑 싸우는 군대는 방패로 밀고 들어왔답니까? 어짜피 일본의 내전인데, 손방패가 등한시 되기는 마찬가지. 산악전 운운은 도대체 어디서 본 건지 의문이지만... ROK님이 이미 논파했으니... 어디서 구라 보고 와서는 당당하게 단정하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