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첫 번째 신부로서 거룩하게 순교한 성 김대건 안드레아는 신앙과
활동력으로 빛나는 일생을 보냈고 죽음 또한 빛나고 장렬한 것이었다.
1821년 충청도 솔뫼, 구 교우 집안에서 태어난 김 대건은 어려서부터 비상한
재주와 굳센 성격과 진실한 신심을 드러내 나(모방) 신부는 마침내 그를
다른 소년 두 명과 함께 신학생으로 뽑아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는데 그 때는
1836년, 그의 나이 15세일 때였다.
그는 그곳에서 최 양업 (崔良業, 토마스), 최 방제 (崔方濟, 프란치스코: 수학
중 병사) 등 두 소년과 함께 6년간이나 신학 공부를 하였으며 현지에서 발생한
민란 때문에 두 차례나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고역을
치르기도 했다.
어쨌든 신학 공부를 하던 그는 기회가 오자 귀국 길에 오르게 되어 우선 요동
지방에 와서 대기 중이던 고(페레올) 주교를 모시고 입국을 시도했다.그리하여
그는 1743년 음력 11월, 변문에 이르렀으며, 그곳에서 때마침 북경으로 가던
김 프란치스꼬를 만나 고국의 박해 소식을 듣는다.
그의 말인즉 국내에는 아직 박해 위험이 남아있을 뿐더러 선교사의 거처도 마련
되어 있지 않은 만큼 그들의 입국은 불가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단독으로
라도 입국할 것을 결심하고 혼자서 국경을 넘어 의주까지 잠입했다.
김 대건은 의주에서 하룻밤 묵는 동안 포졸에게 발각되어 하는 수 없이 그들을
피해 요동으로 되돌아왔으며 한편 북경으로 갔던 김 프란치스코는 국경에서
그 이듬해 김 대건과 다시 만나고 주교의 입국 시기를 음력 11월로 잡고 헤어
졌다.
그러는 동안 김 대건은 부제품을 받았고 약속 시기에 마중 나온 김프란치스꼬
일행과 같이 서울로 들어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때에도 국내 사정을
고려하여 고 주교는 동반치 않았다.
김 부제는 서울에 들어오자 수 개월에 걸쳐 오직 주교와 외국인 선교사들을
입국시키기 위한 만반 준비를 갖추는 데 진력했고 마침내는 10여명의 사공을
거느리고 해로를 통해 중국으로 건너가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신품을 받아 드디어 한국인 최초의 신부가 되었으며 그후 갖은
고난을 겪어가며 고 주교와 안(다블뤼) 신부를 배로 모시고 황해를 건너 조선
땅인 강경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고국에 돌아온 김 신부는 약 2개월 간 휴식
후 곧 교우들에게 성사를 주기 시작했다.
김신부가 성사를 집전한 곳은 서울과 용인지방이었으며 당시의 교우들 증언에
따르면 김 신부는 활발한 성격에 얼굴은 고아하고 허위대가 좋았다고 한다.
그는 모친과도 상봉하여 얼마간 같이 머무를 수 있었으나 1846년 음력 4월이
되자 주효의 명에 따라 황해도지방으로 떠나지 않으면 안되었다.
구라파로 보내는 선교사들의 편지를 중국 배에 전하고 선교사들의 입국하는
길을 새로 개척하기 위해서였다. 이 황해도 지방에의 항해길이 마지막 그의
순교길이 되고 말았다.그는 편지를 중국 배에 전하고 돌아오는 도중 순위도
에서 관헌에게 잡히는 몸이 되고 말았다.
그곳 관에서는 중국 배들을 쫓으려고 때마침 조선 배를 징발 중이었는데 김
신부의 "양반 배를 어찌 징발할 수 있느냐"는 항의가 도화선이 되어 결국
잡히는 몸이 되었던 것이다. 김 신부는 그곳에서 해주 감영으로 이송되었으
며 문초 끝에 교회 일이 드러나자 마침내 서울 좌포도청에 갇히게 되었다.
그는 중국 배에서 압수된 주교 편지가 "네 글씨와 다른데, 누구의 것이냐"
라는 문초에 "철필과 새털로 쓴 글씨는 다르기 마련이며 철필이 있으면
이렇게 쓸 수 있다"는 말로 위기를 넘기는 기지를 보이기도 했으며 그의
넓은 견식과 당당한 태도는 대관들로 하여금 죽이기에는 국가적으로도
아깝다는 말들을 하게끔 했으나 후환을 입을 것이라는 영의정 권 돈인의
주장대로 결국은 사형이 선고되고 말았다.
김 신부의 처형은 9월 16일 새날터에서 모든 것이 군문효수의 절차에따라
진행되었다.김 신부는 망나니들에게"너희들도 천주교인이 되어 내가 있을
곳에 오도록 하라"는 말을 남기고 태연하게 칼을 받았다.이 때 피의 나이
26세, 그의 목이 떨어지자 형장에는 큰 뇌성소리와 함께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고 전해진다. (41은 부친)
정하상은 한국 천주교회의 가장 훌륭한 순교자의 한 분인 정약종(丁若鐘)의 둘째
아들로, 외국 선교사의 영입을 위해 신명을 바쳐 일했고 유명한 「상재상서」
(上宰相書)를 지어 천주교의 교리를 당당하게 변호했던 주님의 참된 용사이다.
그는 또 덕행과 지혜와 능력이 뛰어나 범 (앵베르) 주교에 의해 이 신규(李身逵)
와 함께 신학생으로 뽑혀 라틴어와 신학 공부까지 했으나 박해로 인해서 신품을
받지는 못하였다.
정 하상은 7세 때인 1801년 신유박해(申酉迫害)로 전 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아버지
와 이복형인 정철상(丁哲祥, 가롤로)이 순교하자 가산을 몰수당한 채 나머지 가족
들과 함께 석방되었다. 몸붙일 곳이 없게 된 하상은 하는 수 없이 고향인 양근 땅
마재로 내려가 숙부인 정 약용(丁若鏞)의 집에 의지하여 어린 시절을 보냈다.
1813년 홀로 상경하여 조증이(趙曾伊,바르바라)의 집에서 기거하며 교리를 배우고
열심히 교회 일을 도왔고 그후 더욱깊게 교리를 배우기 위해 함경도 무산(茂山)에
유배 중인 조동섬(趙東暹, 유스티노)을 찾아가 교리와 한문을 배우고 다시 상경,
성직자 영입운동을 전개하였다.
1816년역관의 하인으로 들어가 동지사 일행과 함께 북경에 갔으며 그곳에서 북경
주교에게 신부 파견을 요청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그후에도 조신철(趙信喆,가롤로),
유진길(劉進吉,아우구스티노) 등과 함께 9차례나 북경을 왕래하여 나(모방) 신부
등 네 분의 외국 신부들을 영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1839년 7월 모친 유소사(柳召史,체칠리야), 동생 정정혜 (丁情惠,엘리사벳)와
함께 체포된 정 하상은 곧 그가 쓴 「상재상서」를 대신에게 올렸는데 이 글은
한국 최초의 호교문 일뿐더러 그후 홍콩에서 책으로 발간되어 중국에서도 널리
읽혀졌다.
정하상은 포청에서의 6차례 신문과 형벌을 받고 의금부로 이송되어 또 3차의
형문을 당한 후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9월 22일 그는 유진길과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그 때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49의 아들이며 54의 오빠,49,54,57과 함께 체포됨)
이 호영은 경기도 이천(利川) 출신으로 신유 박해 후 어머니와 과부가 된 누나
이 소사(아가타)와 함께 입교했다.아버지가 대세를 받고 세상을 떠나자 서울로
이사하여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으며 이 때문에 유방제 (柳方濟) 신부로부터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l815년 2월 (음력 정월) 한강변 무쇠막에서 누나와 함께 체포되어 포청과 형조
에서 매우 혹독한 고문을 당했으나 비명 한마디 지르지 않고 참아내어 결국
형조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는데 이때 결안(結案)의 사학죄인(邪學罪人)이라는
문구에 대해 천주교는 사학이 아니라 정도(正道)이며 거룩하고 참된 도(道)라
수결(手決)할 수가 없다고 버티자 포졸들이 강제로 수결시켰다.
그러나 사형 집행이 연기되어 4년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 누나 이 소사와
함께 한날 한시에 순교하자고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다가 1838년 11월 25일
(음력 10월 8일) 긴 옥살이 끝에 얻은 병과 옥고로 옥사(獄死)했다.
그때 그의 나이 36세였다. (7은 누나)
정 국보는 원래 개성(開城)의 유명한 양반 가문에서 출생했으나 벼슬을 하던
조부가 죄를 짓자 부친과 함께 상민으로 신분을 감추고 상경하여 선공감
(繕工監)에서 일하며 미천하게 살았다.
천성이 선량하고 겸허했으므로 30세경 천주교를 알게되자 곧 입교하여 유방제
신부에게 성세성사를 받았고, 그후로는 홍살문 근처에서 아내와 함께 성사를
받으러 상경하는 시골 교우들을 돌보았는데 자녀 14명을 가난과 병으로 잃어
버렸고. 자신 또한 가난과 병에 시달리면서도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
에게 헌신적으로 봉사하고 인내와 극기의 신앙자세를 잃지 않아 모든 교우들
의 귀감이 되었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 박해가 일어나자 그해 4월 (음력 3월) 밀고되어 아내
와 함에 체포되었는데 포청에서의 형벌과 고문은 참아냈으나 형조에서는
참아내지 못하고 배교하였다.
그러나 석방되자마자 배교한 것을 뉘우치고 형조에 들어가 배교를 취소하며
다시 체포해 달라고 간청했고, 그것이 거절당하자 5월 12일 (음력 3월 그믐)
고문의 여독과 염병으로 들것에 실린 채 형조판서가 다니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형조판서에게 직접 자신을 체포해 줄 것을 요구, 그날로 체포되어
5월20일(음력 4월7일) 포청에서 곤장 25도를 맞고 이튿날 새벽에 순교했다.
그때 그의 나이 41세였다.
김 아가타는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나 전혀 신앙을 모르고 살다가 친정언니의
열심한 권면으로 늦게 천주교를 알게 되어 교리를 배웠는데 기억력이 나빠
12단(十二端)도 제대로 외우지 못했지만 하느님을 알고 믿고자 하는 열의는
대단하였다.
이렇게 열과 성을 다해 교리를 배우던 중 1836년 10월 김 아가타는 김업이
막달레나,한 아기 바르바라 등과 함께 천주교 서적을 숨긴 죄로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교리에 대한 질문에 김 아가타는 "나는 오직 예수, 마리아밖에
모릅니다"라고 신앙을 고백했고,혹형과 고문을 이겨낸 후 형조로 이송되었다.
형조에 갇혀 있던 교우들은 예수, 마리아밖에 모르는 김 아기가 왔다고 그녀를
반겨 맞아 주었다.그후 형조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김 아기는 형집행의 유예로
3년을 옥살이 한 끝에 옥중에서 대세를 받고 1839년 5월 24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니 그때 나이 53세였다.
(8, 10과 함께 체포됨)
강원도 강촌(江村) 출신의 박 안나는 서울의 한강변에 살면서 어머니와 함께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머리가 둔해 교리를 명확하게 알지는 못했으나 진심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게 해 달라고 매일 기도했다.
18세 때 비교적 부유한 교우 태문행(太文行)과 결혼하여 2남 3녀를 두었고 또
정성껏 그들을 교육시켰다.기해 박해 초인 1839년 4월 박 안나는 남편,큰아들
응천(應天)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포청에서의 고문으로 남편과 큰아들은 배교
하고 석방되었으나 박 안나만은 배교를 거부하고 혹형과 고문을 이겨냈다.
연일 계속되는 혹형으로 살이 터지고 뼈가 튀어 나왔으나 언제나 평온하였고
때때로 위문오는 가족들에게도 권면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형조로 이송되어
서도 형관이 배교하고 석방되어 가족들에게 돌아가라고 유혹하며 혹은 위협하
고 고문하였으나 박 아기는 끝까지 신앙을 지켜 1839년 5월 24일 8명의 교우
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그때 나이는 57세였다.
이 아가타는 경기도 이천(利川) 출신으로 17세 때 결혼했으나 남편을 여의고
친정으로 돌아와 어머니, 동생 이 호영과 함께 입교하였다. 아버지가 대세
(代洗)를 받고 사망하자 동생을 따라 서울로 이사하였다.
1835년 2월 (음력 정월) 한강변 무쇠막에서 동생 이 호영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에서 여인으로는 차마 견디기 어려운 형벌과 고문을 참아냈고 형조로
이송되어 동생과 함께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사형 집행이 연기되어
옥살이를 더 해야 했다.
고통스러운 옥중 생활 속에서도 동생과 함께 한날 한시에 순교하자고 위로
하고 격려하며 인내와 극기로써 생활하였다. 동생을 먼저 순교의 영광을
입게 하고 자신은 동생이 옥사한지 7개월 후인 1839년 5월 24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8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56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3은 동생)
김업이 막달레나는 어려서부터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며 본래 수정(守貞)을
원했었는데, 혼기에 이르러 어머니의 권유로 교우 청년과 결혼했다.중년이
되어 남편과 자식을 모두 잃고는 친정으로 돌아와 노모와 함께 애고개
(지금의 아현동)에서 망건을 만들어 팔며 살았다.
항상 노모에게 순종하는 좋은 표양과 밝은 교리지식으로 외교인들에게 전교
하며 순교할 결심으로 수계하던 김 업이 막달레나는 1836년 10월 김 아기
아가타,한 아기 바르바라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과 형조에서 김업이 막달레나는 천주교 서적을 숨긴 죄로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으나 모두 참아내고 형조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형집행이 유예되어 3년을 옥살이한 끝에 1839년 5월 24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자신의 소원대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그때 나이는 66세였다. (5, 10과 함께 체포됨)
일명 '치문'으로도 불리는 이 광헌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여러 순교자를 낸
광주 이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청년시절에는 매우 방탕한 생활을 했으나
30세 경 입교한 후로는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여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거듭되는 박해로 이 광헌은 가산을 전부 잃고 순교할 때까지 10여 년을 궁핍
하게 살면서 회장직에 충실하고 또 냉담자를 권면하고 병약자를 위로하며
외교인에게 전교했다. 그리고 범(앵베르)주교와 신부들을 자신의 집에 맞아
들여 교우들을 미사에 참여케 하고 강론을 듣게 했다.
1839년 기해박해 초 어떤 예비 교우가 체포된 자기의 아내를 석방시키는 조건
으로 이 광헌을 포함한 53명의 교우 명단을 포졸에게 건네주었다. 이로인해
이 광헌은 4월 7일 전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으로 끌려갔다. 포청에서
형문을 마친 후 4월 18일 형조로 이송되었다.
형조로 이송된 이 광헌은 배교하면 가족들과 함께 석방시켜 주겠다는 형관의
유혹을 뿌리치고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아 다리가 부러지고 살이 터져 온
몸이 피범벅이 되었으나 끝까지 배교하지 않고 신앙을 지켜냈다.
형조에서의 혹독한 3차례의 혹형과 고문을 이겨낸 후 5월 24일 남명혁(다미
아노)등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53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26은 처, 58은 딸, 21은 동생, 20, 21, 26. 58과함께 체포됨)
한 바르바라는 어려서 교우인 어머니에게 교리를 배웠으나 성장하면서 세속의
일에 마음이 빠져 어머니의 모범과 권면을 무시하고 외교인과 결혼했다.그러나
우연히 친정에서 만난 김업이(막달레나)로부터 교리를 다시 배우게 되었고,
30세에 남편과 세 자녀를 모두 여의고는 친정으로 돌아와 신앙생활에 전념했다.
그러던 중 1836년 10월 김아기(아가타), 김업이(막달레나) 등과 함께 천주교
서적을 숨긴 죄로 체포되었다. 포청과 형조에서 혹형과 고문을 당하면서도
형관에게 천주십계를 강론하고 의연히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형집행의
유예로 3년을 옥살이한 후 1839년 5월 24일 7명의 교우와 할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그때 나이 48세였다.(5. 8과 할께 체포됨)
동정녀인 동시에 순교자인 박희순 루치아는 뛰어난 미모와 재주로 인해 어려서
궁녀로 뽑혀 궁궐에 들어갔다.15세경 어린 순조(純祖)의 유혹을 용기와 덕으로
물리쳐 그 명성이 세간에 널리 퍼졌었다.
30세경 천주교를 알게 되어 입교한후 궁녀의 신분으로는 천주교 봉행이 어렵게
되자 병을 핑계로 궁궐을 나와 조카의 집에 살면서 언니 박 큰아기와 조카의
식구들을 권면하여 입교시켰다.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고 3월말 박 희순은
조카의 가족들과 함께 천주교인으로 밀고되자 전경협(아가타)의 집으로 피신
했다.
그러나 4월 15일 전경협의 집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포청과 형조
에서 혹형과 고문으로 함께 체포된 많은 사람들은 배교했으나 박 희순만은
언니, 전 경협과 함께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또한 다리가 부러지고 골수가
흐르는 만신창이의 몸으로 교우들에게 권면의 편지를 써 보내 교우들을
감동시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열정적인 신앙으로 모든 고통을 이겨낸 박희순은 '드디어 5월 24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39세의 나이로 순교
했다. (25는 언니, 25. 39와 함께 체포됨)
'문화'로도 불리는 남명혁은 서울에서 태어났다. 젊어서 무뢰배들과 어울리며
매우 난폭하고 방탕한 생활을 했으나 30세 경 입교한 후로 모든 세속의 나쁜
일과 손을 끊고 오직 신앙생활에만 전념했다.
유방제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는 열심을 더해 이광헌과 함께 회장으로 임명되어
예비자를 모아 가르치고 병약자들을 찾아 위로하고 격려했으며 또 '성의회'
(聖衣會)라는 신심단체에 가입하여 신부를 도와 열심히 교회 일을 했다.
그는 1839년 기해박해 초 한 예비 교우의 밀고로 4월 7일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이때 그의 집에서 제의류(祭衣類), 경본(經本), 주교관(主敎冠)
등이 발견되어 서양 신부를 체포하기에 혈안이 된 포청과 형조의 관원들에게
매우 혹독한 형벌을 당해야 했다.
그러나 남명혁은 모든 고통을 참아냈고, 함께 체포된 아내에게 "이 세상은 잠시
머무는 곳이고 우리의 본향은 천국이니 주를 위하여 죽어서 광명한 곳에서 영원
히 다시 만나기를 바란다"고 격려의 편지를 써 보낸 뒤 5월 24일 이 광헌 등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평소 '성의회의
치명자 남 다미아노'로 불려지길 원했던 성의회원 남명혁은 자신의 원대로 한창
나이인 38세로 순교하였다. (29는 처)
서울에서 태중 교우로 태어난 권득인 베드로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16세
되던 해에 어머니마저 여윈 후 결혼했다. 얼마 동안은 약장사를 하는 형과
함께 살다가 분가하여 성패(聖牌)와 성물을 만들어 팔며 어렵게 생계를 꾸려
나갔는데 항상 새벽닭이 울 때 일어나 촛불을 켜놓고 날이 밝을 때까지 기도
하는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깊은 신앙으로 인해 권 득인은 1839년 1월 16일 처남,아내,어린 자녀
등 4명와 가족 그리고 김로사와 함께 체포되어 포청과 형조에서 매우 흑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해야 했으나 요지부동이었다. 가족들이 배교하고 석방되자
가족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순교를 권하는 편지를 써 보냈다.
그후 권득인은 5개월 동안 옥중에서 굶주림과 추위를 이겨내고 드디어 5월
24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그때 나이는 35세였다. (17과 함께 체포됨)
서울에서 태어나 한강변 서강(西江)에서 살았던 장성집은 30세경에 교리를
배우고 열심한 예비 교우로 생활했다. 그러나 점차 교리에 대해 회의를
품어 신앙생활을 중지하고 세속 향락과 재산 모으는 일에 몰두했다.
교우 친구들의 권면과 가르침으로 회개한 이후로는 자신의 죄를 보속하고
세속의 유혹을 피하기 위해 방에 틀어박혀 추위와 굶주림을 무릅쓰고
기도와 성서연구에만 몰두했다.
이러한 태도에 집안 어른들이 "예전처럼 자유롭게 드나들며 생활하는 것이
너의 신앙생활에 무엇이 그렇게 방해되느냐?"고 만류하자 장성집은 "제가
전에 지은 죄는 모두 넉넉한 의식(衣食)을 얻어보려는 욕심에서 나온 것
입니다.
다시 그런 죄를 짓는 것보다는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는 것이 더 낫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뜻이 변할 수 없음을 밝혔고 마침내 1838년 4월 세례와
견진성사를 받았다.
이렇게 굳은 결심으로 신앙에 귀의한 장 성집은 l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순교할 목적으로 자수를 결심했다가 대부의 만류로 자수하지 않았지만 몇일
후인 4월 7일 체포되었다.
중병이 들어 포졸들이 가마에 태우려 했으나 장성집은 포청까지 걸어서 갔다.
포청에서도 신문하는 형관에게 맑은 정신으로 교리를 자세히 설명하고 혹형
과 고문을 참아냈다. 그후 장성집은 5월 26일 마지막으로 치도곤 25도를
맞고 옥사함으로써 순교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 54세였다.
시골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김 바르바라는 13세 경 상경하여 부유한 교우인
황 마리아의 집에 식모로 들어가 그때부터 교리를 배워 열심한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원래 수정(守貞)을 결심했으나 혼기에 이르러 부모의 강요로
외교인과 결혼하여 남매를 두었다.
결혼한 지 15년 만에 남편을 여의고 딸 하나만을 데리고 신앙생활에만 전념했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이해 3월 김 바르바라는 몸 붙여 살던
집에서 집주인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으로 끌려가 거기서 심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으나 용감히 신앙을 고백하였다.3개월간의 옥살이 끝에 5월 27일 굶주림,
기갈, 염병 등으로 옥사함으로써 순교했다. 그때 나이는 35세였다.
이 바르바라는 독실한 구교우 가정에서 태어나 서울의 청파동에서 자랐다.
어려서 부모를 여읜 후로는 서울의 이 영희, 이 정희 두 이모에게 의탁하고
살았다.
1839년 기해 박해가 일어나자 이해 4월, 15세의 어린 나이로 체포되어 포청
에서 신문을 받은 후 형조고 이송되었다 형조에서 어린 것이 요물이라 하여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했으나 끝까지 배교하지 않자 다시 포청으로
송환되었다.
포청에서 이 바르바라는 전보다 훨씬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해야 했으나
꿋꿋이 참고 인내하며 함께 갇혀있는 어린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다가 5월
27일 기갈과 염병 그리고 고문의 여독으로 옥사함으로써 15세의 어린 나이
로 순교했다.(22,27의 조카)
과부가 된 후 입교하여 열심한 신앙생활로 친정식구들을 입교시킨 김 로사는
1839년 1월 16일 권득인(베드로)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과 형조에서의
신문 중 "하느님은 신인만물(神人萬物)의 큰 주인이시라 배반할 수 없읍니다"
하고 자신의 뜻을 밝히고, 여러 차례의 혹형과 고문을 이겨낸 후 1839년 7월
20일 예수, 마리아를 부르면서 7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이때 나이는 56세였다.(1,7과 함께 체포됨)
인천 부평에서 태어난 김 성임은 결혼에 한번 실패한 후 상경하여 장님 점장이
와 재혼했다. 이때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고, 남편이 죽은 후 신앙생활을
위해 집을 나와 교우들의 집을 전전하였다 천한 일을 하면서도 항상 밝은
얼굴로 생활했다.
1839년 4월 11일 김 성임은 자신이 몸붙이고 있던 이매임의 집에서 이매임,
허계임,이정희와 영희 자매, 김 루치아 등과 순교를 결심한 후 이미 체포된
남명혁(南明赫)의 집을 파수하던 포졸들에게 자수하였다.
포청과 형조에서의 혹형과 고문을 이겨내고 7월 20일 7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50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17,22,23,28,36과 함께 자수)
외교인 시절에 결혼한 이 매임은 20세에 과부가 되어 경기도 봉천의 친정으로
돌아와서 한 동네에 사는 여교우의 전교로 천주교에 입교했다. 입교 후
이 매임은 조카 이정희(李貞喜)와 영희(英喜)를 신앙으로 인도했다. 이어 조카
이영희가 수정(守貞)할 결심으로 외교인과의 결혼을 뿌리치고 서울로 피신하자
함께 따라가 살며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다.
1839년 4월초 이 매임은 허계임, 이정희, 이영희 그리고 그들과 함께 살고 있던
김성임,김 루치아 등과 함께 남명혁과 이광헌의 어린 자녀들이 혹형을 이겨내고
신앙을 지켰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감동하여 이들 5명의 여교우와 함께 순교
할 것을 결심하고,
마침내 4월 11일 남명혁의 집을 파수하던 포졸에게 묵주를 내보이며 천주교인
임을 밝히면서 자헌하였다. 이어 7월 20일 7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그때 나이 52세였다.
(36은 올케, 22, 28은 조카, 18, 22. 23, 28, 36과 함께 자수)
서울에서 태중 교우고 태어난 김장금은 어려서부터 독실한 신앙생활을 했고,
중년에 이르러 과부가 되자 노모와 함께 이광렬 (李光烈)과 이웃하여 살았다.
두 집은 사이가 좋고 화목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김장금은
1839년 4월 이광렬, 이광헌 일가와 함께 체포되어 포청과 형조에서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해야 했으나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였고 마침내 7월 20일
7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51세의 나이로 순교
했다. (9, 21, 26. 58과 함께 체포됨)
'경삼'으로도 불렸던 이광렬은 명문 양반인 광주 이씨의 후예로 태어났다.
22세경 형 이광헌과 함께 입교한 후 헌신적으로 교회 일에 참여하였으며,
정하상, 조신철, 유진길 등과 함께 북경(北京)을 왕래하며 나(모방) 신부,
정(샤스땅)신부 등을 맞아들였다.
북경에서 성세성사를 받고 귀국한 후로는 육식을 끊고, 극기와 인내로
세상의 모든 것을 끊어버리고 동정을 지키며 수계하였다. 1839년 기해
박해가 일어나자 이광렬은 4월 7일 형의 가족들 그리고 김장금과 함께
체포되어 회장인 형 이광헌과 똑같은 혹형과 고문을 받았으나 모두
이겨냈다. 7월 20일 7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45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9, 20, 26, 58과 함께 체포됨)
동정녀인 동시에 순교자인 이 영희 막달레나는 경기도 봉천(奉天)에서
태어났다.과부가 되어 친정에 돌아온 고모 이매임(李梅任)의 권면으로
어려서 어머니 허계임(許季任). 언니 이정희(李貞喜)와 함께 입교했다.
성장하면서 수정(守貞)할 것을 결심하여 혼기에 이르자 혼담을 피해
호랑이에게 물려간 것처럼 꾸미고 상경하여, 고모 이 매임의 집에
기거하면 수계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 초, 체포된 남명혁과 이광헌의 어린 자녀들이 혹형과
고문을 이겨내고 신앙을 지켰다는 이야기를 교우들로부터 전해 듣고
감동하여 당시 고모에게 의탁하고 있던 김성임, 김루치아 그리고
어머니, 언니 이정희와 함께 4월 11일 남명혁의 집을 지키고 있던
포졸들에게 묵주를 내보이며 자헌했다.
그후 포청과 형조에서 7차의 형문을 받고 드디어 사형을 선고받아 7월
20일 고모 이 매임을 포함한 7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호 순교했다 . 그때 나이 31세였다.(36은 모친,28은 언니,
19는 고모, 16은 조카. 18, 19, 23, 28, 36과 함께 자수)
동정녀인 동시에 순교자인 김 루치아는 강원도 강촌(江村)에서 태어나
9세 때 어머니로부터 천주교를 배워 입교하였다. 14세 때 수정(守貞)을
결심했고, 부모를 여읜 후로는 자신을 받아주는 교우들의 집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살았다.
1839년 기해박해 때에는 서울의 이매임의 집에서 이매임, 이정희와 영희
자매,김 성임 등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이때 남 명혁과 이 광헌의 어린
자녀들이 고문과 혹형을 이겨내고 신앙을 지켰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함께 살고 있는 여인들과 함께 순교를 결심하고 4원 11일 남명혁의
집을 파수하던 포졸들에게 묵주를 내보이며 자헌했다.
포청과 형조에서 김 루치아는 천진한 태도와 한결같은 신앙으로 모든
형벌과 고문과 유혹을 참아냈고, 교리에 대한 심문 중에도 기막힌
비유와 논리정연한 대답으로 형관을 감동시켰다. 드디어 7월 20일 7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22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18, 19, 22, 28, 36과 함께 자수)
동정녀이며 순교자인 원귀임은 경기도 고양군 용머리(龍頭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여기저기를 떠돌며 살다가 9세 때 서울의 친척집에
들어가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이때 수정(守貞)을 결심하고는 항상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였다. 1839년
3월 29일 원귀임이 있던 친척집이 포졸들의 습격을 받게 되자 원귀임은
재빨리 피신했으나 길거리에서 원귀임을 아는 사람에게 들켜 체포되었다.
체포될 때 정신을 잃을 정도로 당황했던 원귀임은 정신을 가다듬고 포청으로
끌려갔다. 포청에서 배교를 강요하며 고문하는 형리에게 "내 영혼을 이미
하느님께 맡긴 지 오래니 더 이상 묻지 마십시오. 오직 죽을 뿐입니다"하고
배교를 거부하니 형조로 이송되었다. 형조에서도 가혹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
으나 원귀임은 굴하지 않았고 드디어 7월 20일 7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그때 나이 22세였다.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난 박 큰아기는 궁녀인 동생 박희순의 권면으로 입교했다.
1839년 4월 17일 동생과 함께, 피신해 있던 전경협의 집에서 체포되어 포청과
형조에서 혹형과 고문을 견디어 냈다. 동생 박희순이 순교한 지 100여 일 후인
9월 3일 5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그때 나이는 74세였다. (11은 동생, 11, 39와 함께 체포됨)
이광헌의 부인이며 이 아가타의 어머니인 권희 바르바라는 1817년경 남편과
함께 입교하였다. 박해 때문에 궁핍한 생활을 하면서도 회장의 직무를 맡은
남편을 도와 주교와 신부들을 맞아들였고 또 교우들로 하여금 미사에 참여
하게 하고 강론을 듣게 하였다.
1839년 4월 7일 권희는 전 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과 형조에서 수차의
형벌과 고문을 당했다. 특히 열두 살밖에 안된 어린 아들이 고문당하는
처참한 광경을 지켜보면서도 끝내 모정을 억제하고 온갖 유혹과 형벌을
견디어냈다.
이러한 처참한 5개월 동안의 옥살이 끝에 9월 3일 5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46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9는 남편, 58은 딸, 9, 20, 21, 58과 함께 체포됨)
일명 ‘명관’으로도 불리던 박후재 요한은 경기도 용인지방 교우 가정에서
태어났다. 1801년 신유박해로 아버지를 여읜 후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성장하면서 물장사를 하는 노모를 도와 짚신과 미투리를 팔아 생활했고,
36세 때 교우 처녀와 결혼했다.
1839년 5월 아내를 피신시키고 혼자 체포된 박후재는 포청에서 치도곤 40도를
맞는 가혹한 형벌을 당했다. 살이 떨어져 나가고 뼈가 드러나 피가 낭자하게
흘렀으나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을 뿐더러 함께 갇힌 교우들을 권면하고 또
흉악한 죄수들에게는 천주교의 바른 도리를 강론했다.
이어 형조로 이송되어 4개월간의 옥살이를 한 박후재는 1839년 9월 3일 5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41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경기도 봉천에서 태어난 이정희 바르바라는 과부가 되어 돌아온 고모 이 매임
(데레사)의 권면으로 어려서 어머니 허계임, 동생 영희와 함께 입교했다.
입교 이후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며 수정할 것을 결심했다. 혼기에 이르러
아버지가 외교인 청년과의 결혼을 강요하자 병을 핑계삼아 3년을 버턴 후
교우 청년과 결혼했다.
그러나 결혼한지 2년만에 남편을 잃은 후 잠시 친정에 있다가 신앙생활을
위해 집을 떠나 서울의 고모 이 매임의 집에 와서 살았다.
1839년 기해박해 시초에 남명혁과 이광헌의 어린 자녀들이 혹형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켰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고 감동하여 당시 이 매임의
집에 머물고 있던 김성임, 김 루치아 그리고 어머니, 동생, 고모 등과 함께
순교를 결심한 후 4월11일 남명혁의 집을 지키고 있던 포졸에게 자헌하였다.
9월 3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5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되어 순교했다. 그때
나이는 41세였다. (36은 모친, 22는 동생, 19는 고모, 16은 조카, 18,19,
22, 23. 36과 함께 자수)
이연희는 남명혁의 부인으로 성품이 강직하고 사리에 밝았다. 회장인 남편을
도와 공소(公所)를 세워 주교와 신부를 맞아들이고 또 교우들을 가르쳐 성사
를 준비시키며 항상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였다.
기해박해 초인 1839년 4월 7일 전 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에서 12살 된
어린 아들의 고문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이는 주님의 영광입니다"고
하며 모정을 억누르고 자신도 혹형과 고문을 감수하였다.
형조로 이송되어 다시 3차의 형문을 받았으나 역시 굴하지 않았다. 드디어
사형을 선고 받아 9월 3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5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
형을 받고 36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12는 남편)
언니 김효임과 같이 동정녀인 동시에 순교자인 김효주는 서울 근교 밤섬의
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그후 경기도 고양군 용머리로 이사해 살았다.
아버지를 여읜 후 온 가족과 함께 입교하여 중국인 유방제 신부에게
성세성사를 받았다.
언니 김효임, 동생 김 글라라와 함께 수정(守貞)을 결심하고는 아름다운
덕행과 극기로써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했다.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5월 3일 김효주는 언니 김효임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에서 매우 혹독한
형벌과 잔인한 고문을 받았으나 끝까지 신앙을 지켰으며 형조에서도
굴하지 않았다.
언니보다 20여 일 먼저 즉 1839년 9월 3일 5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24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44는 언니 )
‘영눌’ 또는 ‘치운’으로도 불리던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충청도 홍주
(洪州)지방 다랫골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그의 집안은 한국
교회의 창설시대 때부터 천주교를 믿어온 집안이었다.
어려서부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고 성장해서는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
곳을 찾아 다니다가 가족들을 설득하는데 성공,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사
했다. 그러나 외교인들의 탄압 때문에 서울을 떠나 강원도 금성(金城),
경기도 부천을 거쳐 과천(果川)의 수리산에 정착하여 교우촌을 건설했다.
1836년 아들 최양업(崔良業)을 나(모방) 신부에게 보내어 마카오에서 신학
공부를 하게했다. 그는 1839년 초에 회장으로 임명되었고,이어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순교자의 유해를 거두어 안장하고 교우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돌보던 중 7월 31일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교우촌 교우와 가족
도합 40여 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수리산에서 서울의 포청까지 끌려간 최경환은 2개월 동안 하루 걸러 형벌과
고문을 당해 태장 340도, 곤장 110도를 맞았다. 9월 11일 최후로 곤장 25도
를 맞고는 그 이튿날 옥사, 순교했다. 그때 그의 나이 35세였다.
한국명은 범세형(范世亨), 조선교구 제 2대 교구장. 주교로서는 처음 한국
땅을 밟은 그는 같이 선교에 종사하던 나(모방),정(샤스탕) 두 신부와 함께
1839년 기해박해 때 한강변 새남터에서 목을 잘려 순교하였다.
그는 조정에 의해 대박해가 일어나 더 이상 전교할 수 없게 되자 자신은
물론 나중에는 두 동료 신부들에게까지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해
목숨을 바칩니다"라는 말로 자헌을 권유하였다.
범 라우렌시오 주교는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인 소(브뤼기에르)주교가 입국도
못한 채 병사하자 교황청에 의해 제2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1837년 5월,
주교로 성성되었으며 그 해 말 조선 입국에 성공하였다.
그의 입국으로 조선교구는 그보다 앞서 입국한 나, 정 두 신부와 더불어
교구 설정 6년만에,그리고 교회 창설 53년만에 비로소 전교 체제를 갖추
었으며 모든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복음전파에 힘쓴 결과 신자수는
1839년 초 9천 명을 넘게 되었다.
그는 또 한국인 성직자의 양성에도 뜻을 두어 정하상 등 네 명의 열심한
신자들을 뽑아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쳐 신부로 키우고자 하였으나 때마침
불어닥친 박해로 말미암아 성공하지 는 못하였다.
범 주교는 1797년 4월 프랑스에서 태어나 1819년 12월 빠리외방전교회의
신부가 되었으며 다음해 3월 파리를 떠나 조선에 입국하기까지 중국
사천(四川)교구에서 10여 년간 사목활동에 종사하였다.
1839년 대 박해가 일어났을 때 지방을 돌아보고 있던 범 주교는 조정에
의해 외국 선교사들의 입국 사실이 알려져 포졸들의 추적이 심해지고
교우들에 대한 박해가 가열되자 하는 수 없이 수원에서 가까운 바닷가
어느 교우집에 몸을 숨기었다.
여기서 그는 나, 정 양신부를 불러 두 사람에게는 중국으로 피신할 것을
권하였으나 사정이 여의치않아 단념하고,몸조심을 당부하며 두 사람을
각기 소임지로 돌려보냈다.
바로 이즈음 한 배교자의 책략으로 그의 거처가 알려지게 되자 그는 화가
여러 교우들에게 미칠 것을 염려하여 스스로 나아가 포졸들에게 잡히는
몸이 되었으며 나 신부와 정 신부에게도 인편으로 자수할 것을 권유하여
다같이 1839년 9월 21일 군문효수형에 처해졌다 이때 그의 나이는 43세,
조선에 입국한 지 불과 2년 만이었다.
한국명은 나 백다록(羅伯多祿). 서양인으로서 최초로 조선에 입국하여
순교한 신부. 그는 1836년 1월 입국하여 1839년 새남터에서 순교하기
까지 3년 9개월 간 헌신적인 포교활동을 폈으며 특히 한국인 최초의
신부가 된 김 대건과 최 양업, 최 방제 등 세 소년을 뽑아 마카오에
유학시킨 것으로노 유명하다.
프랑스 베시에서 태어난 나(모방) 신부는 1831년 파리외방전교회
신부가 되어 그 이듬해 동양에 진출, 중국을 거쳐 1836년 1월
의주의 변문을 통해 조선 입국에 성공했다.
그는 서울에서 정하상의 집에 머물며 경기 충청 등 지방까지 순회,
전교하였다.또한 그는 이 땅에 들어오자 곧 전교회의 방침에 따라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 마음을 두고 1836년 2월에 최 양업을, 3월
에는 최방제를, 7월에는 김대건을 서울로 불러 이들 세 소년에게
직접 라틴어를 가르치고 장차 성직자가 되는 데 필요한 덕행을
쌓게 하던 중 때마침 귀국하는 중국인 신부 유방제와 함께
이들을 비밀리에 마카오로 유학시켰다.
그후 나 신부는 이들 세 소년을 전송한 교우들과 만나 1837년 1월
무사히 서울에 들어온 정(샤스탕) 신부와 함께 손을 나눠 각 도의
흩어진 교우촌을 찾아 밤낮으로 모든 고난을 이겨가며 전교에 힘쓴
결과 입국 당시 불과 4천 명이었던 신자수는 제 2대 교구장 범
주교가 입국한 1837년 말에는 갑절이 넘는 9천 명에 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1839년 기해 대박해가 일어나고 서양인 성직자가 3명이나
입국한 사실이 점차 소문으로 퍼져 당국에 알려지게 되자 마침내
순교의 날이 닥쳐온다.
범 주교는 박해가 일어나 신변이 위험하게 되자 처음에는 자신만이
자수하고 두 신부(나 신부, 정 신부)에게는 중국으로 피신할 것을
권고했으나 형편이 그렇게 못되었고 결국은 범 주교에 이어
두 신부도 자진하여 포졸에게 몸을 맡겨 관가에 자수하였다.
그는 1839년 9월, 홍주에서 정 신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으며
모진 형벌을 받은 끝에 범 주교, 정 신부와 함께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는 35세, 한국에 입국한 지 3년
9개월 만이었다.
한국명은 정 아각백(鄭牙各伯), 이 땅에 두 번째로 입국한 서양인
선교사로 1839년 기해박해 때 범 주교,나 신부와 함께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정 (샤스탕) 신부는 1803년 10월, 프랑스 태생으로 1827년 1월 빠리
외방전교회 신부가 되었으며 같은 해 4월 동양 포교지의 하나인
페낭 섬으로 떠났다. 그는 그곳 신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중
마침 소(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임지로 떠나게 되자 함께 동행하기를 자원,1833년 5월 그곳을 떠났다.
그후 3년간을 중국 대륙과 몽고, 만주 등지를 전전하며 조선 입국의
기회를 기다렸으나 쉽게 뜻을 이를 수가 없었다. 그 동안 소 주교는
입국도 못한 채 만주 땅에서 병을 얻어 목숨을 잃었으며 1836년 1월
조선 입국에 성공한 동료 나 신부로부터의 기별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마침내 1836년 12월 나신부의 기별을 받고 의주 변문으로 간 정신부는
마카오로 유학가는 김대건 등 세 소년 신학생을 전송하던 교우들을
만날 수 있었으며 그들과 함께 무사히 국경을 넘어 이듬해인 1월
서울에 도착했다.
정 신부는 서울에 도착하자 곧 한국말을 배우는 한편 나 신부와 손을
나누어 각 지방에 산재해 있는 교우들을 찾아 성사를 집행했다. 정
신부 등 당시의 서양인 성직자들은 상제 옷으로 변장하고 험한 산길을
헤매야 했고 먹을 것도 여의치 않아 소금에 절인 야채 따위로 공복을
채워야 했으며 밤새도록 고해를 듣고 미사를 드린 다음날 새벽에는
또 다른 마을로 길을 재촉해안만 했다.
그들은 이러한 고난을 감수해 가며 오직 복음전파에만 힘썼던 것이다.
정 신부는 한때 중병을 앓게 된 나 신부를 서울까지 올라와 간호해야
하는 어려운 일도 겪었으나 다행히 무사했으며 1837년 12월에는 제 2대
교구장 범 주교가 입국에 성공하여 전교활동은 차츰 본격화되어갔다.
그러나 1839년 몰아닥친 기해 대 박해는 이 땅을 수많은 천주교인의
피로 물들였고, 정신부도 범 주교, 나 신부와 함께 그해 9월 21일
새남터에서 마침내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되었다. 정 신부의 나이는
35세요, 이 땅에 들어온 지 2년 9개월 남짓이었다.
‘용심’으로도 불렸고 또 순교 당시 정3품 당상역관(堂上譯官)의 높은
벼슬에 있었던 유진길 아우구스티노는 서울의 유명한 역관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고 특히 철학과 종교 문제에 관심을 갖고
세상만물의 기원과 종말에 대해 명확히 알고자 10년 동안 불교와
도교를 깊이 연구했다.
그러나 ‘만 권의 책과 동서고금의 학문이 가슴에 가득한 사람’이라는
세상 사람들의 칭찬과는 달리 유진길은 오히려 진리를 찾지 못해 방황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823년 우연히 「천주실의」의 일부분을 구해
읽고는 사방에 수소문한 끝에 한 교우를 만나 천주교 진리를 터득하고
곧 입교했다.
1824년 동지사(冬至使)의 수석 역관으로 북경에 가서 성세성사를 받았다.
그 후 유 진길은 북경교회와의 연락을 담당하며 전후 8차에 걸쳐 북경을
왕래하면서 정하상 바오로, 조신철 가롤로와 함께 성직자영입운동을
전개하였다.
마침내는 교황에게 성직자의 파견을 간청하는 편지를 북경주교에게 전달
했고 그 결과 유방제 신부, 나(모방) 신부,정(샤스땅) 신부, 범(앵베르)
주교 등이 입국하게 되었다. 유진길은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7월
17일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주교와 신부들의 은신처를 대라는 관헌으로부터 매우 가혹한
형벌을 받았으나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주교와 신부들이 체포되자
의금부에서 그들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았다.마침내 유진길은 9월 22일
정하상과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49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고 순교
했다. (48은 아들)
경기도 용인(龍仁)에서 태어난 허계임 막달레나는 과부가 되어 친정으로
돌아 온 시누이 이매임 데레사로부터 천주교를 알게 되자 이정희와 영희
두 딸과 함께 천주교에 입교했다. 1839년 3월, 허계임은 성사를 받으러
당시 시흥지방 봉천(奉天)에서 상경하여 시누이와 두 딸이 살고 있는
집에 머물게 되었다.
남명혁과 이광헌의 어린 자녀들이 혹형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켰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시누이와 두 딸 그리고 김성임,김 루치아
등과 순교를 결심하고 4월 11일 남명혁의 집을 파수하던 포졸에게
묵주를 내보이며 자헌했다.
포청과 형조에서 허계임은 배교를 강요하는 수차의 형문을 당했으나 다
이겨내고, 9월 26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어
순교하니 그의 나이 67세였다. (19는 시누이, 22, 28은 딸, 18, 19,
22, 23, 28과 함께 자수)
서울의 양반 교우 가정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남이관은 18세 때
교우인 조증이 바르바라와 결혼했다.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아버지와
함께 체포되었다.
아버지 남필용(南必容)은 전라도 강진(康津)으로 귀양가 그곳에서 죽었고,
남 이관은 경상도 단성(丹城)으로 귀양갔다가 30년만인 1832년 풀려 나와
처가인 이천(利川)에서 살았다. 그후 상경하여 처가가 정하상 바오로와
인척인 관계로 그의 신부영입운동을 도와 1833년 중국인 유방제 신부를
맞아들이게 했고,
그에게서 성세와 견진성사를 받은 후 회장으로 임명되어 열심히 교회 일을
도왔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남이관은 자신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에 처가인 이천으로 내려가 숨었다. 그러나 9원 16일에 체포되어
서울 포청으로 압송되었다.
포청에서 간단한 신문을 받은 후 김제준과 함께 국사범으로 간주되어 의금
부로 이송되어 여기에서 유진길, 정하상과 함께 신문을 받고, 다시 형조로
이송되어 거기서 사형을 선고받았다.9월 26일 남이관은 8명의 교우와 함께
60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어 순교했다. (51은 아내)
동정녀인 동시에 순교자. 김 율리에타는 시골에서 태중 교우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 부모를 따라 서울로 이사했다. 17세 때 혼담이 있었으나 수정할
결심을 하고 스스로 머리칼을 다 뽑아 버렸다. 1801년의 신유박해로 인해
부모는 냉담하여 낙향했다.
하지만 김 율리에타는 혼자 서울에 남아 있다가 궁녀로 뽑히게 되었다.
그후 10년 동안 궁녀 생활을 했는데 궁에서는 천주교를 믿을 수가 없어서
결국 궁에서 나와 교우들의 집에서 일해주며 살았다.
품삯을 모아 집 한 칸을 마련하고 거기서 혼자 살면서 열심히 수계하였다.
성품이 강직하고 또 늘 언행에 조심하였으며 그래서 교우들로부터 '절대로
나쁜 짓 하지 않을 여인'이라고 불렸다. 1839년의 기해박해가 점점 치열해
지자 김 율리에타는 7월에 체포되었다. 포청과 형조에서의 혹형과 고문을
이겨낸 끝에 9월 26일 8명의 교우와 함께 56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 형장
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동정녀인 동시에 순교자. 전경협은 서울의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대궐로 들어가 궁녀가 되었다. 그후 평소 친교가 있던 궁녀
박희순(루치아)을 따라 입교했다. 박희순이 자유스럽게 천주교를 실천하고자
궁을 나오게 되자 박희순을 따라 그녀도 궁을 나와 교우들의 집에 머물면서
신앙생활에 전념했다.
1839넌 4월 15일 전경협은 포졸들의 습격을 받아, 자기 집에 숨어 있던 박희순,
박큰아기(마리아)와 함께 체포되었다. 궁녀였다는 이유로 건 경협은 포청과
형조에서 더욱 가혹한 형벌과 고문을 당했으나 참아냈다. 이때 조그만 관직을
잃을까 두려워한 오빠는 관리를 매수하여 누이를 독살시키려했으나 전경협은
독이 든 음식을 먹지 않았다.
이렇게 힘든 옥살이를 5개월 동안 참아낸 후 9월 26일 전경협은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그때 나이는 51세였다
(11, 25와 함께 체포됨)
‘덕철(德喆)’로도 불리던 조신철 가롤로는 천민 출신으로 강원도 회양(淮陽)
의 상민 집안에서 태어났다. 5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또 아버지가 얼마 안되는
재산을 탕진하자 한때 중이 되었다. 23세 때 동지사(冬至使)의 마부가 되었다.
30세 쯤에 유진길, 정하상 등과 알게되어 입교했고, 북경에서 성세․견진․
고백․성체성사를 받고 계속 동지사의 마부로 일하면서 북경교회와의 연락을
취하며 성직자영입을 도와 나(모방) 신부, 정(샤스땅) 신부, 범(앵베르)
주교 등을 입국시켰다.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조신철은 처가로 피신했다.
그러나 6월 어느날 외출했다가 처가로 돌아가던 중 처가를 습격한 포졸들이
어린 젖먹이까지 잡아가는 것을 보고,포청까지 따라가 자헌했다.포청에서의
신문 중 그가 처가집에 숨긴 성물과 성서 때문에 매우 혹독한 형벌을 당해야
했고,
곧이어 체포된 유진길, 정하상과 함께 주교와 신부들의 은신처를 대라고 형리
들에게 더욱 가혹한 형벌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어떠한 형벌과 고문에도 굴
하지 않았고 마침내 9월 26일 45세의 나이로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어 순교했다. (70은 아내, 50은 장인, 64는 장모)
김대건 신부의 아버지, '시명'으로도 불리는 김제준은 충청도 면천 땅 솔뫼
에서 태어났다. 1814년 순교한 할아버지 김진후(金震厚)와 큰아버지의 권면
으로 입교한 후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경기도 용인(龍仁)으로 이사하여
농사를 짓고 살았다.
이 무렵 나(모방) 신부를 찾아가 성세와 견진성사를 받고 용인으로 돌아와
회장으로 활약했다. 1836년 15세 된 아들 김대건을 모방 신부에게 맡겨
마카오의 신학교로 유학 보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이 해 8월 김제준은 사위 곽씨를 앞세운 밀고자
김순성 (金順性, 일명 여상) 일당에 의해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김제준은
아들을 외국으로 보낸 국사범으로 간주되어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고
한때 배교하는 허약을 보였다.
그러나 형조로 이송된 후 배교를 취소하고 9월 26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이때 그의 나이는 44세였다.
(1은 아들)
서울의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난 박봉손은 15세쯤에 시골로 출가하여 딸 하나를
두었으나 남편과 시부모를 차례로 여의고 친정으로 돌아와 계모 김 체칠리아의
권고와 가르침으로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친정은 원래 계모의 오빠인 김사문의 집이었다. 그런데 이 집에는 가난한 여러
가구의 교우들이 모여 살고 있어 늘 번잡했으나 박 봉손은 그런 가운데도 솔선
하여 궂은 일과 천한 일을 도맡아 하였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 박해가 일어나자 함께 살던 교우들은 모두 피신하고
혼자 남아 집을 지키고 있던 중 7월초 마침 집에 들렸던 외삼촌과 함께 체포
되었다. 포청과 형조에서 박봉손은 매우 흑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지만
끝까지 신앙을 지켜냈다.
그는 형관에게 "여기까지 온 것은 위주치명(爲主致命)하기 위해 온 것이니
국법대로 죽여 주십시오"하고 말하기까지 했다. 마침내 9월 26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니 그의 나이 44세였다.
홍금주 페르페투아는 서울 변두리에서 태어났다. 약 10세 때 입교하였고,
15세 때 외교인과 결혼한 후 냉담했다. 그러나 남편을 잃은 후 교우들의
권면으로 신앙을 다시 찾았을 뿐더러 집을 나와 교우들의 집에 얹혀 살면서
가장 천한 일을 맡아하고 또 병약자들을 돌보았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홍금주는 최 필립보라는 교우의 집에 있다가
이해 4월 최 필립보의 제수와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과 형조에서 고문과
형벌을 받았고, 형조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형조 옥에서 홍금주는 서너 차례 염병에 걸려 고생했으나 조금이라도 낫기만
하면 다른 교우들의 상처를 닦아주고 처매주며 필요한 모든 도움을 주었고
이로인해 함께 갇힌 교우들은 홍금주를 친누이처럼 생각했다.
이렇게 옥중에서도 사랑과 봉사로써 일관하던 홍금주는 옥살이 6개월 만인
9월 26일 36세의 나이로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동정녀인 동시에 순교자. 김효임 골룸바는 서울 근교 밤섬이란 곳의 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를 여읜 후 전가족이 다 함께 입교하고 유방제 신부
에게 성세성사를 받았다. 두 여동생 김 효주(아녜스), 김 글라라와 함께
수정을 결심하고 독실한 신앙생활을 했다.
매주 두 차례의 재(齋)를 지키고, 가난한 이들을 도우니 그 덕행과 아름다운
모범에 감탄하지 않는 교우들이 없었다. 그러던 중 1839년 4월 김효임은
그간 이사한 경기도 고양군 용머리에서 동생 김효주와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김효임은 남동생 김 안토니오의 피신처와 교회서적을 감춘 곳을
대라는 관헌에 의해 동생과 함께 매우 혹독한 형벌을 받았다.
두 자매는 소위 학춤이라는 혹형 외에도 달군 쇠붙이로 몸의 열세 군데나
지져대는 혹형을 받았고, 또 옷을 벗긴 채 남자 죄수의 방에 넣어졌다.
그러나 갑자기 두 자매의 몸에 신비스런 힘이 생겨 흉악한 죄수들이 두
자매를 범할 수 없었다.
이렇게 포청에서의 혹형과 고문을 이겨낸 김효임은 형조로 이송되어 형조
판서의 신문에 영리하고 겸손하게 대답하여 형조판서를 감동시켰다. 신문이
끝나자 효임은 포청에서 겪은 법외의 고문과 능욕에 항의했다. 이 때문에
포청에서 능욕을 가한 포졸들은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후 5개월 동안 옥에서 병과 고통과 싸우며 지내던 김효임은 9월 26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26세의 꽃다운
나이로 자신보다 20여 일 먼저 순교한 동생의 뒤를 따라갔다.(30은 동생)
김 루치아는 서울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태어날 때부터 몸이 불구
였다.그래서 '꼽추 루치아'로 불렸다.1801년의 신유박해 이전부터 천주교를
믿었으나 남편과 가족들이 모두 외교인이라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못했다.
결국 집을 나와 교우들의 집에 얹혀 살면서 병자들을 돌보며 어떠한 천한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박해로 체포되어 포청으로
끌려갔다.71세의 고령이라 형벌은 받지 않았으나 온갖 교활한 신문을 받았다.
그러나 김 루치아는 한결같이 배교를 거부하고, 마침내 7월 어느날 포청에서
기력이 쇠하여 숨을 거둠으로써 옥사, 순교하였다.
시골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와 함께 입교한 이 가타리나는 교리에 밝지 못한
부모 때문에 14세 때 조(趙)씨란 성을 가진 외교인과 결혼하여 3남매를 두었다.
가타리나의 권고로 남편은 대세를 받고 사망하였다. 1838년 말 고향에 사사로운
박해가 일어나자 가타리나는 가산을 버리고 자녀들과 함께 상경하여 조 바르바라
의 집에서 같이 살았다. 1839년 6월 주인집 세 모녀, 큰딸 조 막달레나와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딸과 함께 문초를 받고 한 차례의 주뢰질을 당한 후 옥에 갇혔으나
옥이 워낙 비좁고 불결하여 체포된 지 3개월 후인 9월 어느 날 57세의 나이로
염병을 얻어 옥사. 순교했다. (47은 딸, 47, 56, 66과 함께 체포됨)
어려서 어머니 이 가타리나에게 천주교를 배워 입교한 조 막달레나는 외교인
친척들의 반대로 7, 8세경부터 교우 집안인 외가에 가서 살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18세 때 혼담이 오가자 수정을 결심하고는 혼담을 피해 서울로 와 5, 6년
을 지냈다.
그후 다시 고향으로 내려와 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외교인 아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죽어가는 아이들에게 대세를 주는 등 열심히 교회일을 도왔다. 그러던
중 1838년 말 고향에서 사사로운 박해가 일어나자 어머니, 두 동생과 함께 가산
을 버리고 서울의 조 바르바라의 집으로 피신했다.
1839년 6월 주인집 세 모녀, 어머니 이 카타리나와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한 차례의 신문과 주뢰질을 당한 후 옥으로 끌려간 조 막달레나는 3개월 동안
비좁고 불결한 옥살이 끝에 33세의 동정녀로 염병을 얻어 옥사, 순교했다.
(46은 모친, 46, 56. 66과 함께 체포됨)
유진길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난 유대철은 어려서 아버지의 모범을 따라 입교한
후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다. 천주교를 미워하는 어머니와 누나에게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했으나 그때마다 항상 어머니와 누나의 회개를 위해 기도했다.
1839년 기해박해로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어 감동적인 순교를 하자 유대철은
순교를 결심하고 자헌했다. 포청에서 13세의 어린 나이로는 견디기 힘든 형벌과
고문을 받았다.
허벅지의 살을 뜯어내며 "이래도 천주교를 믿겠느냐?"하고 으름장을 놓는 형리
에게 "믿고 말고요.그렇게 한다고 제가 하느님을 버릴 줄 아세요?" 하고 대답
하자 화가 난 형리는 다시 시뻘겋게 단 숯덩이를 입에 넣으려하니 "자요"하고
입을 크게 벌려 형리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포청에서 총 14회의 신문을 받고 100여 대의 매와 40여 대의 치도곤을 맞아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었으나 유대철은 항상 만족스럽고 평화롭고 기쁜 표정을
지었다. 형리들은 유대철을 배교시킬 수 없게 되자 10월 31일 포청옥에서
몰래 목을 졸라 죽였다. 그는 103위 성인 중 가장 어린 순교자이다.(35는 부친)
명도회장 정약종(丁若鍾)의 부인이며 정하상 바오로의 어머니인 유 체칠리아는
시골에서 태어나 2O세 때 상처한 정약종과 결혼했다.남편의 권면으로 결혼한 지
3년만에 입교했고 주문모(周文謨) 신부에게서 세례성사를 받았다.
1800년 살고 있던 경기도 양근(楊根) 지방에 박해가 일어나자 남편을 따라 서울로
이사했으나 이듬해 신유박해로 가족이 모두 체포되었다. 남편과 전실 아들 정철상
(丁哲祥)의 순교 후 재산을 몰수당하고 석방되어 마재의 시동생 정약용(요한)의
집에서 냉대와 구박을 받으며 몹시 궁핍하게 지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유 체칠리아는 서울에 살고 있었는데 조카의
피신 권유에 "나는 항상 순교를 원했으니 내 아들 바오로와 함께 순교하고 싶네"
하고 거절하고 7월 11일, 아들 정하상(바오로), 딸 정정혜(엘리사벳)와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유 체칠리아는 72세의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태장 230대를 맞는 혹형을
받았으나 용감히 참아냈다. 노인을 사형시키는 것이 국법에 금지되어 있어서
여러 달 동안 옥에 갇혀 있다가 11월 23일 고문과 형벌의 여독으로 옥사,
순교했다. 그녀는 103위 가운데 최고령의 순교자이다. (2, 54의 어머니)
일명 '여칠'. 최창흡은 서울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교리를 배워
1801년 신유박해로 형 최창현(崔昌顯)이 순교한 후로는 외교인과 다름없는
냉담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30세경 교우인 손소벽(막달레나)과 결혼한 후로는 새로 교리를 배우고
또 1821년 전국에 콜레라가 퍼졌을 때 아내와 함께 대세를 받았고 이때부터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1839년에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최창흡은 순교를 결심했다. 이해 6월 친정으로
피신해 온 딸 최영이(바르바라)의 가족과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사위
조신철(가롤로)이 맡겨둔 교회서적과 성물 때문에 7차례의 신문, 주뢰질,
주장 외에도 태장 150도를 맞았으나 입을 열지 않았다.
형조에서도 여러 차례의 혹형과 고문을 이겨내고 결국 자신의 소원대로 12월
29일 6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53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64는 아내, 70은 딸, 40은 사위 )
조증이는 경기도 이천의 양반 교우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좋은 가정교육
을 받고 자라면서 매우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다. 16세 때 남이관(세바스티아노)
과 결혼했으나 1801년 신유박해로 아버지 조 프란치스코와 시부모가 순교하게
되고 남편도 경상도 단성(丹城)으로 유배되자 이천의 친정으로 내려가 10여년
을 고생하며 살았다.
그후 30세 경 다시 상경하여 먼 친척이 되는 정하상을 도우며 선교사 영입에
필요한 자금 마련을 위해 노력했다. 1832년 남편이 유배에서 풀려나자 남편과
함께 이듬해 입국한 중국인 유방제 신부를 돌보며 공소를 세워 교회와 교우들을
위해 열심히 봉사했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남편을 이천으로 피신시킨 후 자신은
어린 딸과 함께 집을 지키고 있다가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남이관을 잡으려고
혈안이 된 형리들로부터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고, 형조에서도 가혹한
형벌을 당했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마침내 12월 29일 6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니 그때 나이 58세였다. (37은 남편)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난 한영이 막달레나는 혼기에 이르러 권 진사라는 양반의
후처로 들어가 딸 권진이(아가타)를 두었고 남편이 임종 대세를 받고 죽으면서
천주교를 믿으라는 유언에 따라 딸과 함께 입교했다.
그후 신앙생활을 위해 딸과 함께 집을 나와 교우들 집에 몸붙여 살다가 1839년
7월 17일 딸과 딸의 친구인 이경이(아가타)와 함께 체포되었다. 12월 29일
6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56세로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67은 딸, 65, 67과 함께 체포됨)
서울의 역관 집안에서 태어난 현경련은 어려서 주문모 신부에게 성세성사를
받았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아버지 현계흠이 황사영의 백서사건과 관련되어
순교한 후 어머니를 따라 자주 이사다니며 살았다.
17세 때 최창현(崔昌顯)의 아들과 결혼했으나 3년만에 남편을 여의고는 친정
으로 돌아와 삯바느질로 친정 식구들의 생계를 도왔다. 항상 규칙적인 독서와
묵상, 그리고 기도생활을 했고 뛰어난 교리지식과 열정적인 신앙으로 여회장
직을 맡아보며 무지한 교우와 외교인을 가르치고 냉담자를 권면하며 외교인
자녀들에게 대세를 주는 등 교회 일에 적극 헌신했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현경련은 잠시 피신했었으나 6월에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동생 현석문(玄錫文)과 주교의 피신처를 알아내려는
형리들로부터 주뢰 2차, 300여 대의 장(77)을 맞는 혹형을 당했고, 형조에
서도 매우 가혹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으나 모두 참아냈다.
옥중에서 동생에게 신망애(信望愛) 삼덕에 관한 편지를 써 보내 많은 교우
들을 감동시켰다. 12월 29일 현경련은 6명의 교우와 함께 46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72는 동생)
동정녀이며 순교자인 정정혜는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의 딸로, 4세 때 주문모
신부에게 성세(세례)성사를 받았다. 다섯 살 되던 해인 1801년의 신유박해로
전가족과 함께 체포되었다.
아버지와 이복 오빠 정철상은 순교하였으나 정혜는 어머니 유 체칠리아,오빠
정하상(바오로)과 함께 석방되었다. 그후 마재의 삼촌 정약용(요한)의 집에서
살면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길쌀과 바느질로 가족들의 생계를 꾸려나갔다.
한편 친척들의 구박과 냉대를 아름다운 덕행과 인내로 극복하고 박대하던 몇몇
친척들까지 입교시켰다. 1839년 기해 박해가 일어났을 때 정정혜는 서울에서
7월 11일 어머니, 오빠와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7회의 신문을 받으면서 320도의 곤장을 맞았고, 형조에서도 6회의
신문과 함께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나 정정혜는 끝까지 신앙을 지킨 끝에
12월 29일 6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때 나이 43세였다. (49는 어머니, 2는 오빠, 2, 49, 57과 함께 체포됨)
고순이 바르바라는 1801년 신유박해로 순교한 고광성(高光晟)의 딸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18세 때 교우인 박종원과 결혼하여 3남매를 두었고,가정을 잘 돌보아
교우들로부터 모범 가정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또한 가정 뿐만 아니라 회장인 남편을 도와 냉담자를 권면하고 무지한 이들을
가르치며 병약자를 간호하는 등 교회 일에도 적극적으로 봉사했다. 1839년 기해
박해가 일어나자 10월 26일 남편이 먼저 체포되고, 그 이튿날 고순이도 체포됨
으로써 포청에서 남편과 만나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순교를 준비했다.
형조에서도 남편과 함께 고문을 당해 살이 터지고 뼈가 드러나 유혈이 낭자했으
나 굴복하지 않았다. 이렇게 남편과 함께 모든 혹형과 고문을 이겨낸 고 순이는
12월 29일 남편 박종원(아우구스티노) 보다 한 달 먼저 6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42세로 순교했다. (62는 남편)
동정녀인 동시에 순교자인 이영덕은 외교인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외할머니의 권면으로 어머니 조 바르바라,동생 이인덕(마리아)과 함께 천주교
를 믿게 되었는데 아버지가 천주교를 몹시 싫어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지방으로
여행간 틈을 타서 나머지 식구들과 함께 성세(세례)성사를 받았다.
혼기에 이르러 아버지가 외교인과의 결혼을 강요하자 수정을 결심한 후 꾀병을
앓기도 하고,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아버지에게 써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완고한 아버지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범 라우렌시오 주교에게 가출할 수
있도록 청원했다.
그러나 주교가 허락하지 않으므로 어머니, 동생과 함께 집을 나와 교우들의
집에서 숨어살았다. 이 사실을 안 주교는 처음에는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령
했으나 조선 풍습에 가출했던 부녀자가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절대 용서
받을 수 없음을 알고는 세 모녀가 살 수 있도록 집 한 채를 마련해 주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이영덕은 어머니와 동생 그리고 함께 살던 조
막달레나와 이 가타리나 모녀 등과 서고 위로하고 격려하며 순교를 각오하고,
주교가 체포되면 자헌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미처 자헌 할 겨를도 없이 6월 어느 날 이영덕은 습격한 포졸들에게
집에 있던 나머지 사람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마침내 12월 29일 6명의 교우
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28세의 나이로 참수되어 순교했다.
(66은 동생, 46, 47, 66과 함께 체포됨)
김 데레사는 1816년 대구에서 순교한 김종한(金宗漢)의 딸로 충청도 솔뫼에서
태어났으며 김대건의 당고모가 된다. 17세 때 교우인 손연욱(요셉)과 결혼했
으나, 1824년 남편이 해미(海美)에서 순교하자 혼자 살면서 가난한 생활에서
오는 고통 중에서도 매주 두 차례의 대재를 지키는 등 신앙생활에 전념했다.
정정혜 엘리사벳과 함께 유방제 신부와 범 라우렌시오 주교의 살림을 돌보던
중 1839년 기해 박해가 일어나자 김 데레사는 7월 11일 범 주교의 집에서
정하상 바오로 일가와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주교의 은신처를 알아내려는 형리들에게 여러 차례의 혹형과 고문을
받았으나 김 데레사는 순교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신앙을 본받아 꿋꿋이
참아내고, 포청옥에서 만난 이 광헌(아우구스티노)의 딸 이 아가타와 함께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신앙을 굳게 지켰다.
6개월 동안 6차례의 신문을 받고, 태장 280도를 맞은 김 데레사는 드디어
1840년 1월 9일 포청에서 이 아가타와 함께 44세의 나이로 교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1의 당고모, 2, 49, 54와 함께 체포됨)
17세의 꽃다운 나이로 순교한 동정녀 이 아가타는 이광헌(아우구스티노)과
권희(바르바라)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부모의 거룩한 모범을 따라 독실한
신앙생활을 했고, 또 일찍부터 동정을 지킬 결심으로 수계범절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
기해박해 초인 1839년 4월 7일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에서 혹형과
고문을 당한 후 형조로 이송되었으나, 형조에서는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포청으로 환송하였다.
포청에서는 다시 혹형과 고문을 했고 또 부모가 배교한 것처럼 속여 배교를
강요했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옥에서 만난 김 데레사와 함께 서로 위로
하고 격려하며 신앙을 지켜나갔다. 9개월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 곤장
300도, 대곤 90도를 맞고 드디어 1840년 1월 9일 김 데레사와 함께 포청
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9,26의 딸, 9, 20, 21, 26과 함께 체포됨)
민극가 스테파노는 인천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가족이 모두 외교인
이었으나 어머니가 사망한 후 아버지가 중년에 이르렀을 때 온 가족과
함께 입교했다.
20세 때 아내를 잃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재혼하여 딸 하나를 두었으나
6, 7년 후 재혼한 아내와 딸마저 잃게 되자 집을 나와 서울, 인천, 부평,
수원 등지를 전전하며 교리서적을 팔아 생활해 나갔다.
또 어디서나 냉담자를 권면하고 외교인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입교시키고
또 자선사업에도 많은 힘을 기울였다.그 결과 회장에 임명되었다.1839년
기해박해로 주교와 신부들이 체포되자 민 극가는 서울과 지방의 교우들을
찾아 위로하고 격려하며 회장의 직무를 열심히 이행하던 중 그해 12월
서울 근교에서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온갖 수단으로 배교를 강요당했으나 민극가는 모든 위협과 유혹
을 물리쳤다. 또 옥에서 배교했거나 마음이 약한 교우들을 권면함으로써
배교자 중 여럿이 다시 신앙을 찾게 되었다. 이렇게 옥중 생활에서도
회장의 본분을 다하던 민극가는 1840년 1월 30일 포청에서 교수형을 밭고
53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충청도 정산(定山)의 부유한 교우 가정에서 태어난 정화경 안드레아는
어려서부터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을 뿐더러 장성해서는 더욱 자유스러운
신앙생활을 위해 고향을 떠나 수원 근처로 이사해 살았다.
거기서 회장 일을 맡아보며 자기 집을 공소로 내놓았고 또 서울을 왕래
하며 힘 자라는 데까지 교회 일을 도왔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정화경은 매일같이 교우들을 찾아 위로하고 격려하며 순교를 준비시켰고,
박해를 피해 내려온 범 라우렌시오 주교를 위해 은신처를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그해 8월 주교를 찾고 있던 밀고자 김순성 (일명 여상)에게 속아
주교의 은신처를 알려주었다. 서양 신부를 잡으려던 김순성 일당은
정화경을 이용하여 신부들을 체포하려고 하였으나 그들의 계략을 눈치챈
정화경은 도망하여 신부를 찾아가 자신의 어리석음을 뉘우치고 고해성사
를 보았다.
그러나 9월 체포된 정화경은 혹형과 고문을 이겨내고 1840년 1월 23일
포청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33세였다.
독실한 교우 가정에서 태어난 허협 바오로는 1839년 기해 박해로 체포될
때 도감(都監)의 병정이었다. 1839년 8월경 체포되어 포청에서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처음엔 잘 참았으나 하루는 형벌을 이겨내지 못하고 배교의
표시를 하였다.
그러나 곧 배교를 취소했다. 형리가 배교 취소의 표시로 인분 한 사발을
마시라고 하자 아무 거리낌없이 인분 한 사발을 다 마심으로써 자신의
배교 취소를 증명해 보였다. 그후 허협 바오로는 여러 달 동안 포청옥에서
치도곤 130도 이상을 맞는 형벌과 고문을 받았으나 끝까지 신앙을 지켜내고,
1840년 1월 30일 45세의 나이로 포청에서 옥사, 순교했다.
‘이선’으로도 불리던 박종원 아우구스티노는 서울 중인 계급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매우 궁핍한 생활을 하면서도 어머니와
함께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범 라우렌시오 주교의 입국 후, 회장직을 맡아보며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교회 일에 헌신했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어서 피신했다.
피신해 있으면서도 체포의 위험을 무릅쓰고 옥에 갇힌 교우들과 연락하며
위로와 용기를 북돋아주다가 피신한 지 8개월 만인 10월 26일 잠시 집에
들렀다가 체포되었다.
이튿날 그의 아내 고순이 바르바라도 체포되어 같은 옥에 갇히게 되었다.
박종원은 포청에서 아내와 함께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순교를 준비했고
또 아내와 함께 혹형과 고문을 견디어냈다.1840년 1월 31일 5명의 교우와
함께 당고개(堂峴)에서 48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55는 아내)
명문 양반의 후예로 서울에서 태어난 홍병주 베드로는 1801년 신유박해로
할아버지 홍낙민(洪樂敏)이 순교하자 아버지를 따라 충청도 서산(瑞山)
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자랐고, 대대로 이어온 신앙을 물려받아 독실한
신앙생활을 함으로써 동생 홍영주 바오로와 함께 충청도 내포(內浦)지방의
회장이 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그해 9월 말 홍병주는 동생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에서 몇 차례의 형문을 당한 후 형조로 이송되었는데, 친척인 형조
판서는 인정상 직접 신문하지 않고 하관(7출)에게 모든 수단을 다 써서
홍병주, 홍영주 형제를 배교시키라고 명하여 홍병주는 가장 지독한
형벌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홍병주는 끝까지 버터냈고, 결국 1840년 1월 31일 5명의 교우와
함께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아 42세의 나이로 동생보다 하루 먼저
순교했다. (68은 동생)
서울의 교우 가정에서 태어난 손소벽 막달레나는 1801년 신유박해로
아버지가 순교하고 또 어머니마저 일찍 세상을 떠나 외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17세 때 최창흡 베드로와 결혼하면서 냉담했던 생활을 떠나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려고 노력했고, 1821년 전국에 콜레라가 퍼지자 남편과
함께 대세와 성체성사를 받고부터는 더욱 더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이해 6월 손소벽은 가족과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사위 조신철(가롤로)이 북경에서 가져온 교회 물건의 출처
때문에 주뢰 3차, 태장 260도를 맞는 혹형을 당해야 했고, 형조에서도
3차의 형문을 당해야 했다. 마침내 1840년 1월 31일 5명의 교우와 함께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아 39세로 순교했다.
(50은 남편, 70은 딸, 40은 사위, 50, 70과 함께 체포됨)
동정녀인 동시에 순교자인 이경이 아가타는 시골에서 교우가정에서 태어
났다. 혼기에 이르러 어떤 내시에게 속아 결혼했으나 곧 집으로 돌아왔다.
범 라우렌시오 주교는 그 결혼을 무효화시켰다.
그후 아버지를 여의고 생계가 막연해지자 어머니를 시골에 사는 외삼촌
에게 맡기고 상경하여 한영이(막달레나), 권진이(아가타) 모녀의 집에서
살며 열심히 수계하였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 7월 17일 한영이, 권진이 모녀와
함께 체포되었다. 평소 권진이의 아름다움을 탐내던 밀고자 김순성의
간교로 한영이만 포청에 갇히고 이경이는 권진이와 사관청(仕官廳)에
갇히게 되었다.
사관청에서 포졸 하나가 권진이를 납치하려 하자 이경이는 권진이와
사관청을 탈출했으나 얼마 안되어 숨어 있던 교우의 집에서 다시 체포
되었고 마침내 1840년 1일 31일 5명의 교우와 함께 27세의 나이로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52, 67과 함께 체포됨)
언니 이영덕 막달레나와 함께 동정녀인 동시에 순교자인 이인덕 마리아는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그해 6월 어머니, 언니와 함께 체포되어
이듬해 1월 31일 ‘당고개’에서 5명의 교우와 함께 22세의 꽃다운
나이로 참수되어 순교했다. (56은 언니, 46. 47. 56과 함께 체포됨)
서울에서 태어난 권진이 아가타는 어려서 아버지 권 진사가 임종 대세를
받고 죽으면서 남긴 유언을 따라 어머니 한영이 막달레나와 함께 입교했다.
13세 경 결혼했으나 남편의 집이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남편의 친척인 정하상
바오로의 집에서 살았다. 1833년 중국인 유방제 신부가 입국한 후부터 신부의
시중을 들었다.
그후 유방제 신부가 조선을 떠나게 되자 어머니에게 돌아가, 한 집에 살게 된
이경이 아가타와 함께 열심히 수계하였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
7월 17일 한영이, 이경이와 함께 체포되었다.
평소 권진이의 아름다움을 탐내던 밀고자 김순성(일명 여상)의 간교로 어머니
한영이만 포청으로 끌려가고, 권진이는 이경이와 사관청(仕官廳)에 갇히게
되었다. 사관청에서 한 포졸이 권진이를 납치하려 하자 권진이는 이경이와
함께 사관청을 탈출하였으나 얼마 안되어 숨어 있던 교우의 집에서 다시
체포되었다.
도망쳤던 죄로 포청과 형조에서 매우 가혹한 형벌을 받아야 했으나 권진이는
끝까지 신앙을 지켜 1840년 1 월 31일 5명의 교우와 함께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아 21세의 아까운 나이로 순교했다.
(52는 어머니, 52, 65와 함께 체포됨)
명문 양반의 후예로 서울에서 태어난 홍영주 바오로는 충청도 내포(內浦)
지방의 여사울에서 자랐다. 대대로 이어온 신앙을 이어받아 독실한 신앙생활을
했고,형 홍병주 베드로와 함께 충청도 내포지방의 회장으로 교회 일에 헌신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고 서양 신부들이 체포된 후 9월말에 이르러 홍영주는
형과 함께 서양 신부들의 은신처를 제공한 죄로 체포되었다. 마침내 1840년 2월
1일, 하루 먼저 순교한 형의 뒤를 따라 2명의 교우와 함께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때 나이 39세였다. (63은 형)
일명 ‘경천’으로도 불리는 이문우 요한은 경기도 이천의 양반 교우 가정에서
태어나 5세 때 양친을 여의고 서울의 오 바르바라라는 여 교우에게 입양되어
성장했다.
독신생활을 원하였으나 양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효성과 순종으로 양어머니의
뜻에 따라 결혼했고, 몇 년 후 아내와 두 어린 자녀가 사망하자 주위에서의
재혼 권유를 거절하고 독신으로 살면서 범 라우렌시오 주교에 의해 회장으로
임명되어 전교에 힘쓰는 한편 주교를 보좌하며 지방을 순회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로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어 옥에 갇히자 사방에서 희사를
모아 체포된 교우들을 돕고, 박해 상황을 주교와 신부들에게 보고하였다.
그러던 중 11월 11일 자신도 체포되었다.
이때 "주님께서 특별한 은총으로 나를 부르시니 어찌 그분의 부르심에 대답
하지 않을 수 있는가?"하고 의연한 모습을 보였고, 오히려 당황해 하는 포졸
들을 재촉해서 포청으로 끌려갔다. 포청과 형조에서의 혹형과 고문을 참아낸
끝에 사형을 선고받고, 1840년 2월 1일 ‘당고개’에서 2명의 교우와 함께
31세의 나이로 참수되어 순교했다.
서울에서 태어난 최영이 바르바라는 어려서 아버지 최창흡 베드로와 어머니
손소벽 막달레나의 모범을 따라 입교하여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다. 20세 때,
상처한 조신철(가롤로)과 결혼하여 아들 하나를 두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최영이는 친정으로 피신해 있다가 6월에 친정
식구들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체포될 때 어린 아들을 생각하는 모정으로
인해 배교할까 두려워 아들을 친척에게 맡겼다.
남편이 중국에서 가져온 교회서적과 성물 때문에 포청에서 두 차례의 주뢰와
태장 260도를 맞는 혹형을 당했으나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고 형조에서도
3차의 형문을 이겨내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1840년 2월 1일 2명의 교우와
함께 ‘당고개’에서 22세의 몸으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40은 남편, 50은 아버지, 64는 어머니, 50, 64와 함께 체포됨)
경기도 광주 구산에서 부유한 외교인 가정의 3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김성우
안토니오는 성품이 강직하고 도량이 넓어 입교차기 전부터 모든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천주교를 알게 되자 즉시 두 동생과 함께 입교하여 열렬한 신앙으로 친척과
이웃에게 전교하여,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을 교우촌으로 만들었다. 그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도 중년에 이르러 입교하고 세상을 떠나자
김성우는 유방제 신부에게 직접 성세(세례)성사를 받고는 서울로 이사하여
사신의 집에 공소를 만들어 신부들을 도왔다.
1839년 기해 박해가 일어나자 김성우는 천주교인으로 밀고되었으나 미리 피신
했었다. 고향 구산에 남아 있던 두 동생만이 체포되어 큰 동생 김덕심은 2년
후인 1841년 1월 28일 광주 옥에서 옥사했고,작은 동생은 여러 해 동안 옥살이
를 해야 했다.
그러나 피신해 있던 김성우도 1840년 1월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김성우는 매우 가혹한 형벌을 받았으나 참아냈다. 옥을 자기 집처럼 생각하며
외교인 죄수들에게 전교하고 그중 2명을 신앙으로 인도했다.
이렇게 옥중에서도 열렬한 신앙으로 무수한 고초를 견뎌낸 김성우는 옥중 생활
15개월 만인 1841년 4월 28일 마지막으로 치도곤 60도를 맞고 그 다음 날
47세를 일기로 교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현석문 가롤로는 서울 중인 계급의 독실한 교우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가족이
모두 순교자가 되었다. 아버지 현계흠은 1801년 신유박해때 순교했고, 1839년
기해 박해 때에는 그의 아내와 아들, 그리고 누나 현경련 베네딕타가 순교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현석문은 범 라우렌시오 주교가 순교할 즈음에
회장으로 임명되어 박해가 끝난 후, 신부 없는 조선교회의 지도자로서 순교
자들의 기록을 정리하여 「기해일기」를 편집했고, 포졸들에게 쫓기면서도
이름을 바꾸어 모면하고 각지에 흩어져 있는 교우들을 찾아가 격려했으며
또 중국교회에 밀사를 보내고, 1845년에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동행하여
상해에 다녀오기도 했다. 이렇게 활동하던 현석문은 1846년 김대건 신부가
체포되자 신부집에 남아있던 여교우들을 새로 마련한 집에 피신시키고
자신도 그 집에 숨어 있다가 7월 11일 함께 있던 정철염(가타리나), 이간난
(아가타), 김임이(데레사)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체포된 후 현석문은 함께
갇힌 교우들을 위로하고 권면하며 끝까지 회장의 직분을 다했다.
마침내 9월 19일 50세의 나이로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53은 누님, 77, 78. 79와 함께 체포됨)
서울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난 남경문 베드로는 20세 때 교우 처녀 허 바르
바라와 결혼했는데 이때 중병이 들어 대세를 받고 그 즉시로 수계하기 시작
했다. 그후 서양 신부들이 입국하자 회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했다.
그러나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되었다가 배교하고 석방된 후로는 냉담하기
시작하여 첩까지 거느리고 8년 동안 방탕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다시 교회로
돌아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에게 고해와 성체성사를 받고 과거의 죄를 보속
하기 위해 극기와 인내로 생활하며 교우들에게 순교하고 싶다는 말을자주
하곤했다.
1846년 병오박해가 일어나자 7월에 김대건 신부와 함께 체포된 임성룡의 밀고
로 남경문도 체포되었다. 체포될 때 남경문은 금위영(禁衛營)의 군인의 신분
이었으므로 매우 혹독한 형벌과 유혹을 받았으나 모두 이겨내고 마침내 9월
20일 6명의 교우와 함께 포청옥에서 교수형을 받고 자신의 소원대로 순교했다.
충청도 덕산(德山)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한이형 라우렌시오는 14세 때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21세 때 결혼하고 나서 경기도 양지(陽智)의 은이
마을로 이사했고, 원래 정직하고 헌신적인 성격에다 뛰어난 덕행과 모범적인
신앙생활로 인해 범 라우렌시오 주교에 의해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1846년 7월 말 한이형은 포졸들이 은이 마을을 습격하리라는 소문을 듣고
가족들을 피신시킨 후 혼자 집을 지키다가 체포되어, 그 자리에서 포졸들의
심한 매를 맞고 서울로 압송되었다.
압송될 때 이미 상처투성이의 몸이어서 포졸들은 한이형을 말에 태워 가려
했으나 그는 거절하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산을 올랐던 예수를 본받기
위해 백 리가 넘는 길을 맨발로 끌려갔다.
이렇게 압송된 한이형은 포청에서도 심한 형벌을 받았으나 이겨내고, 드디어
9월 20일 마지막으로 곤장 70도를 맞은 후 6명의 교우와 함께 교수형을 받고
48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경기도 양주(楊州)에서 태어난 우술임 수산나는 15세 때 인천의 한 교우와
결혼하여 남편의 권면으로 입교했다. 1828년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을
뻔했으나 해산이 임박하여 2개월 간의 옥살이 끝에 풀려나왔는데, 그때
당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평생 육체적 고통을 받아야 했다.
그후 남편을 여의고 1841년 상경하여 교우들의 집에서 몸붙여 살다가 역시
과부인 이간난(아가타)과 함께 살며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1846년 5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체포되고 병오박해가 일어
나자 김 신부의 집에 있던 여교우들은 이 간난의 집을 거쳐 새 집으로
피신하였는데 이때 이 간난도 여교우들을 따라 새 집으로 피신하였다.
결국 우술임만이 남아 혼자서 이간난의 집을 지키고 있다가 7월 11일에
체포되었다. 9월 20일 매를 맞아 반죽음이 된 몸으로 포청에서 6명의
교우와 함께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때 성녀의 나이는 44세였다.
‘군집(君執)’으로도 불리던 임치백 요셉은 한강변의 한 부유한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이미 1830년에 천주교를 알게 되었으나 입교하지는
않았고, 호의적으로 천주교와 천주교인을 대하기만 했다.
1846년 5월 선주(船主)인 아들 임성룡이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함께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이 갇혀 있는 옹진 수영으로 가서 아들을
만나기 위해 천주교인이라 속이고 자수했다.
며칠 후 서울로 이송되어 포청에서 처음으로 김 대건 신부를 만나 천주교
교리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즉시 세례성사를 받고, 순교를 결심했다.
드디어 9월 20일 정오부터 해가 질 때까지 매를 맞은 후 포청 옥에서
6명의 교우와 함께 43세의 나이로 교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동정녀이며 순교자인 김임이 데레사는 서울의 교우 가정에서 태어나 일곱
살 때 이미 수정할 결심을 하고 그후로 신앙생활에만 전념했다. 20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오빠 베드로와 함께 친척들의 집을 전전했고,
1839년 기해박해 후에는 이문우 요한의 양어머니 오 바르바라의 집에서
5년 동안 살았으며, 1845년부터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집에 가정부로
들어갔다.
1846년 5월 김대건 신부가 체포되자 당시 회장이던 현석문 가롤로는 김
신부의 집에 남아 있던 여교우들을 새 집으로 피신시켰는데, 7월 11일
포졸들이 새 집에 들이닥쳤다. 이렇게 해서 현석문, 정철염, 이간난
등과 함께 체포된 김임이는 9월 20일 매를 맞아 거의 반죽음이 된
상태로 포청에서 6명의 교우와 함께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니
나이는 36세였다. (72, 78. 79와 함께 체포됨)
서울의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난 이간난 아가타는 18세 때 결혼하여 3년만에
과부가 되어 친정으로 돌아왔다. 이때 외할머니의 권유로 입교하고 유방제
신부로부터 성세(세례)성사를 받았다.
1846년 김대건 신부가 체포되고 병오박해가 일어나자 이 간난은 현석문
가롤로 회장이 마련한 집에 피신해 있었으나 7월 11일 피신해 있던 집에서
현석문, 김임이, 정철염 등과 함께 체포되어 9월 20일 매를 맞아 반죽음이
된 상태로 6명의 교우와 함께 33세의 나이로 교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72, 77, 79와 함께 체포됨)
성녀 정철염 가타리나는 경기도 수원의 교우 가정에서 태어나 성장하여
포천의 김씨 성을 가진 한 양반집 하인으로 들어 갔는데, 주인집 가족의
한 교우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20세 되던 해 동지날 주인으로부터 미신행위에 참석하라는 지시를 받고
이를 거부함으로써 주인에게 혹독한 벌을 받았고, 이듬해 봄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자 그녀는 서울로 피신하여 교우들 집에 몸붙여 살았다.
그후 1845년 김대건 신부의 하녀로 들어갔고, 이듬해 5월 김 신부가 체포
되자 현석문 가롤로 회장이 새로 마련한 집에 피신해 있다가 7월 11일 현
회장, 이간난, 김임이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했으나 성녀 정철염은 용감히 이겨
냈다.9월 20일 매를 맞아 거의 반죽음이 된 상태로 포청에서 6명의 교우와
함께 교수형을 받아 30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72, 77, 78과 함께 체포됨)
성 유정률 베드로는 평남 대동군 율리면 답현리(畓峴里. 일명 논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일찍 부모를 여읜 후로 짚신을 엮어 팔아 어렵게 생활
했다.
1864년경 천주교를 알게 되자 교리를 배운 후 곧 상경하여 장 시므온 베르뇌
주교에게 성세성사를 받았다. 그후 고향으로 돌아온 성인은 지난날의 방탕했
던 생활과 아내를 난폭하게 학대한 죄를 속죄하기 위해 신 꼬리로 자신의 몸
을 매질하며 오직 극기와 인내로 생활했다.
그의 아내도 이렇게 변화된 모습에 감동하여 남편의 모범을 따라 입교하게
되었다. 1866년 초 천주교 박해에 대한 소문을 듣고 유정률은 친척들에게
세배하면서 자신의 순교를 예감이나 한 듯 "안녕히들 계십시오. 지금 헤어지
면 언제 다시 뵐 수 있을지 모르겠읍니다"하고 하직인사를 했는데,
과연 그날 저녁 이웃마을인 고둔리 공소에서 교우들과 모여 성서를 읽고 있던
중 들이닥친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이어 같이 체포된 집주인 정 빈첸시오
회장, 우세영 알렉시오 등 5명의 교우와 함께 평양 감영으로 끌려갔다.
평양 감영에서 그는 이미 체포된 100여 명의 교우와 할께 문초를 받았고 혹형과
고문으로 대부분의 교우들이 배교했으나 홀로 신앙을 지켰다. 이에 노한 감사
정지용(鄭芝溶)은 배교 한 교우 100여 명으로 하여금 한 사람이 세 대씩 때리게
했다.
결국 유정률은 체포된 다음날인 2월 17일 300여 대의 매를 맞고 30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이른바 장하치명(杖下致命)을 한 것이다. 유해는 대동강에
던져졌으나 그의 아내가 거두어 논재에 안장했다.
이러한 성 유정률 베드로의 순교 사실은 1876년 평양감사 이재청(李在淸)이 전임
감사 정지용의 천주교 탄압을 치하하기 위해 부벽루 영명사에 세운 척사기적비
(斥邪紀蹟碑)에 잘 기록되어 있다.
한국 이름은 장경일(張敬一), 조선교구 제 4대 교구장이다. 성 장 시므온 베르뇌
주교는 이 땅에서의 10년 간 사목활동 중 배론에 한국 최초의 신학교를 설립하고
서울에 두 개의 인쇄소를 설치하는 등 훌륭한 업적을 남겼으며 역사상 가장 혹독
했던 1866년의 병인 대박해로 순교하여 주님의 품에 안겼다.
프랑스의 ‘르망’ 교구 출신인 장 주교는 1837년 사제로 서품되어 동양 포교지의
하나인 월남으로 건너갔다. 그는 그곳에서 체포되어 2년간의 감옥생활을 치르고
사형선고까지 받았으나 다행히 석방되어 만주 요동지방에서 10여 년 간 활동하였으
며, 그곳에서 조선교구 제 4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1856년 3월 서울에 도착하였다.
천사적인 신심과 깊은 신학 지식을 겸비한 드문 능력가였던 그는 엄한 극기 생활과
당뇨병에서 오는 심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쉴 새 없이 사목에 주력했으며 바쁜 주교
직을 수행하면서도 신부 3, 4인이 맡아 볼 그런 넓은 지역을 직접 도맡아 보았다.
과연 한국교회는 그의 밑에서 놀라운 발전을 보았으며 교우들은 더 잘 교육되고
신자 수는 배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그는 1866년 2월 뜻밖에도 모진 박해가
일어나 2월 23일에 체포되었다.
장 주교는 신문을 받을 때 자기가 이 땅에 온 것은 오로지 한국인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따라서 강제로 끌려가기 전에는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을 뜻을
밝혔다. 그는 감옥에서 앞 무릎에 곤장 열 대를 맞았으나 얼굴에 고통의 빛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으며 3월 7일 백, 서, 김 세 신부와 함께 새남터 형장으로
향하였다.
당시 군인으로서 장 주교의 순교 장면을 목격한 박 베드로는 그의 순교 사실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형장에 이르자 주교와 세 신부의 옷을 벗겼다. 이어
사형선고문의 낭독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들은 형벌을
받는 동안 즐거워 보였다. 마침내 망나니의 두 번째 칼날에 당년 52세인
장 주교의 목은 땅에 떨어졌다.”
한국 성은 백(白), 1866년 병인 박해 때 순교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선교사.
프랑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1864년 사제가 된 백 신부는 서품되자 곧 동료
김, 민, 서 신부와 함께 고국을 떠나 이듬해인 1865년 5월, 조선에 입국하였다.
서울에 도착한 백 신부는 정의배 마르코 회장 집에 머물면서 한국어를 배워 박해가
시작될 무렵에는 교우들의 고백까지 듣게 되었다. 그는 정 회장이 잡힌 이튿날인
2월 26일 장 주교의 하인 이선이의 고발로 체포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은 끝에
3월 7일 새남터에서 장주교와 함께 처형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28세,
이 땅에 온 지 채 1년도 못되는 이 젊은 사도는 땀보다는 피로써
하느님의 영광을 드높이 현양하였다.
한국성은 김, 1866년 병인 박해 때 순교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선교사. 프랑스
‘뤼송’ 교구 출신인 그는 1864년 5월 21일에 사제로 서품되어 이듬해인1865년
5월 조선에 입국하여, 용인 손골에 배속되었다.
김 신부는 순교 때까지 운명을 같이 한 서 신부와 가깝게 지냈으며 천성이 온순
하고 친절하여 한국말은 아직 서툴렀으나 교우들의 많은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그는 손골에서 지낸 8개월 간 교우들이 자기를 ‘김 신부’라고 부르는 것을
자랑으로 여겨 기뻐하였는데 그것은 한국엔 ‘김’이라는 성을 가진 순교자가
많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과연 김 신부는 자기의 소원대로 입국한지 10개월 만인 1866년 2월 손골에서
잡혀 3월 7일 한강변 새남터에서 장 주교, 백, 서 신부에 뒤이어 네 번째로
참수되었다. 이 때 그의 나이 겨우 27세에 불과했다.
한국 이름은 서몰례(徐沒禮), 1866년 병인 박해 때 순교한 프랑스 선교사.
서 신부는 1840년 프랑스 ‘보르도’ 교구에서 태어나 1864년 파리외방전교회
사제로 서품되어 이듬해에 백, 김, 민 세 신부와 함께 충청도 내포에 도착
입국하였다.
그는 고백을 들을 만큼 한국말을 배운 후 공주지방 전교를 맡게 되었으나 임지
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펴볼 겨를도 없이 박해를 맞았다. 서 신부는 장 주교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경기도 광주 근처 교우집에 피해 있었으나 2월 27일
포졸에게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는 모진 고문에도 고통을 감수하였고 한국말이 서툴다는 핑계로 여러 질문에
일절 대답을 회피하였다. 마침내 3월 7일 서 신부는 장 주교를 선두로 동료인
백, 김 신부와 함께 새남터에서 참수되니 그때 나이 26세였다.
자는 증오(曾五), 본관은 의령(宜寧). 성 남종삼 요한은 충청도 충주에서
태어나 남상교(南尙敎)의 양자가 되었다. 1843년 문과에 급제하고 1846년
경상도 영해 군수가 된 성인은 항상 재물과 부녀자를 멀리하고 청백리
(淸白吏)로서 의덕과 겸손의 청빈한 생활을 하여 모든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나 동료 관리들에게는 시기와 경멸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관직에 따르는 미신행위로 인해 한때 교회를 떠난 적도 있었으나 다시 교회로
돌아와서는 신앙생활에만 전념했다. 프랑스인 선교사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고,
1863년 대원군의 명으로 정 3품 승지(承旨)가 되어 왕족 자제의 교육을 맡았다.
그러던 중 1866년초 러시아인들이 국경을 넘어와 통상을 요구하자 조정에서
문제거리로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때 남종삼은 홍봉주, 이유일 등과 의논하여
영․불(英․佛)과 동맹을 맺어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자는 소위
방어책을 대원군에게 건의했다.
대원군과 장 시므온 주교와의 면담이 이루어지는 듯 했으나 척신들의 압력,
장 주교와의 연락 지연, 중국에서의 천주교 박해 소문 등으로 실패했을 뿐더러
태도가 돌변한 대원군에 의해 병인 대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다.
1866년 2월 고향인 제천에서 서울로 올라오던 그는 중도에서 자신의 수배령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듣고 경기도 고양군 축베더리로 피신했으나 2월 25일 주교의
하인 이선이를 앞세운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국청에서 여섯 차례의
국문(鞠問)을 받고 3월 7일 50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홍봉주와 함께
참수형을 당해 순교했다.
일명 ‘승연’으로도 불리는 성 전장운 요한은 서울에서 태중 교우로 출생하여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어려운 생계를 농사와 분상(粉商)으로 꾸려나갔다.1839년
기해 박해 때 체포되어 구류간에 1개월 동안 갇힌 적이 있었으나 혹형과 고문을
참지 못해 배교하고 석방되었다.
그후 열심한 어머니의 권유로 배교한 것을 뉘우쳤다. 그러나 신부가 없어 고해
성사를 받을 수 없음을 한탄했다. 그러던 중 1845년 김대건 신부가 입국하자
고해성사를 받고 열심한 신앙생활로 교우들에게 모범을 보였고, 결혼하여
3남매를 두었다.
그후 1866년 초 장 주교의 명에 의해 교회서적 출판에 참여하게 되어 최형 베드로,
임치화를 도와 판각(板刻) 장만하는 일을 담당했으나 얼마 후 병인박해가 일어나
주교와 신부들이 체포되면서 많은 교회서적들이 적발되자 이로 인해 3월 1일 체포
되었다.
포청에서 1회의 신분, 의금부의 국청에서 9회의 신문과 2회의 형문, 그리고 신장
32도를 맞은 후 3월 6일 형조로 이송되어 3월 9일 사형을 선고받고 그날로 최형과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어 순교하니 나이는 56세였다. (87과 함께 체포됨)
일명 '치장'으로도 불리는 성 최형 베드로는 충청도 홍주(洪州)에서 출생하여 14세
때 부모의 권유로 입교했는데 가족이 모두 독실한 신자였다.1836년 마카오 유학길에
오른 3명의 신학생 중 병사한 최방제는 그의 동생이었다.
큰누나는 평생 동정으로 살았으며 형 최수는 병인박해로 절두산에서 참수되었다.
이러한 독실한 교우 가정에서 성장한 최형은 1836년 나 베드로 모방 신부의 복사로
교회 일에 헌신했다.
1839년 기해박해로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후로는 목수일과 묵주 만드는 일, 그리고
교회서적을 출판하는 일에 참여했다. 장 시므온 주교가 입국하자 교회서적 출판의
책임자가 되어 교회서적 출판에 큰 공로를 남겼다.
1866년 장 주교가 체포되면서 많은 교회서적이 적발되자 주교의 하인 이선이의
밀고로 전장운 요한과 함께 체포되어 3월 9일 사형선고를 받고 그날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전장운과 함께 참수되어 순교 하였다. 그 때 그의 나이는 53세였다.
(86과 함께 체포됨)
서울 창동에서 태어난 성 정의배 마르코는 유업(儒業)에 종사하다가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양 선교사의 순교 장면을 목격하고 감동하여 곧 교리를 배우고
입교했다.
1845년 3대 조선교구장 고 페레올 주교가 입국한 후로는 서울지역의 회장직을
맡아 순교할 때까지 20여 년을 헌신적으로 일했다. 또 1854년 성영회(聖嬰會)가
설립되었을 때 성영회를 맡아 고아들을 돌보았다.
1866년 장 시므온 베르뇌 주교의 체포를 시작으로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서울
지역의 회장으로 명망이 높은 정의배는 주교의 하인 이선이의 밀고로 2월 25일
체포되어 3월 11일 신 신부, 박 신부 그리고 그의 제자 우세영 알렉시오와 함께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72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일병 '세필'로도 불리는 성 우세영 알렉시오는 황해도 서흥 향교골에서 출생했다.
18세 때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우연히 알게 된 김요한이라는 회장의 권유로 관직의
뜻을 버리고 상경하여 정의배 마르코에게 교리를 배운 후 장 시므온 베르뇌 주교
에게 성세성사를 받았다.
그후 부모의 반대와 박해를 인내와 열정으로 참아내어 가족들을 입교시키고 신앙
생활을 위해 평안도 논재로 이사했다. 그러던 중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이해 2월 16일 이웃마을인 고둔리 공소에서 첨례를 보다가 유정률 등 5명의
교우와 함께 체포되었으나 평양 감영에서의 혹형에 배교하고 석방되었다.
석방되자 배교한 것을 후회하고 상경하여 스승 정의배를 만나러 갔다가 이미
체포된 정의배의 집을 파수하던 포졸들에게 자수,3월 11일 신 신부, 박 신부,
스승 정의배와 함께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22세의 젊은 나이로 순교했다.
한국 이름은 안돈이(安敦伊), 조선교구 제 5대 교구장. 성 안 안토니오 다블뤼
주교는 한불사전, 「신명초행」, 「영세대의」등 많은 번역과 저서를 남겼을
뿐만 아니라 10여년에 걸친 각고 끝에 자료를 수집하여 「조선순교자 비망기」
를 만들어내는 큰 업적을 이룩했다.
프랑스 '아미앙'의 상류 가정에서 자란 관계로 한국 풍속에 익숙해지기가 퍽
어려웠고 더더욱 위장병과 신경통으로 고통이 심하였으나 굳은 의지로써 이
모든 어려움을 잘 극복하였고 한국말을 잘하고 또 보신탕도 즐기는 등 가장
한국적이었다.
그는 김대건 신부의 저 유명한 '라파엘'호를 타고 1845년 10월 조선에 입국
하여 전교 신부로 12년, 보좌주교로 9년, 그리고 제 5대 교구장으로 22일,
실로 20여 년 간 이 땅의 양떼를 위해 봉사하다 마침내는 순교의 영광까지
누렸다.
안 주교는 병인년 박해가 일어나자 3일 11일 홍주 ‘거더리’에서 체포되어
동반 순교자인 민 신부와 주교의 복사 황석두 루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
는테 유창한 한국말로 천주교에 대한 공격을 반박하여 다른 이들보다 더
포악한 형벌을 받았다.
때마침 왕이 병중이고 또 곧 결혼하게 되어 그의 처형은 서울 대신 충청도
수영 ‘갈매못’으로 결정되었다. 안 주교일행(민 신부, 오 신부, 황석두,
장주기)은 곧 서울을 떠나 3월 30일 수영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형리들은 주교 일행을 마을에 조리돌리며 형 집행을 지연시키려
했는데 마침 이날이 ‘예수 수난 축일’이었으므로 안 주교는 그들의
계획을 반대하고 당일 사형집행을 굳이 요구하여 청대로 실행되 었다.
형장인 ‘갈매못’은 수영에서 약 10리 떨어진 보령지방의 강가인데 순교
장면의 목격자인 이 힐라리오는 "포졸이 맨 먼저 주교를 칼로 쳤다. 목이
완전히 베어지지 않고 반만 잘렸다.
주교의 몸이 한 번 크게 경련을 일으켰다. 이렇게 망나니가 목을 반만 벤
다음 수사(◎샷)에게 자기의 수고 값으로 양 400꿰미를 요구했다. 수사는
주겠다고 승낙했다. 망나니는 다시 안 주교에게 다가가 한 번 더 목을
치니 안 주교의 목이 몸에서 완전히 떨어졌다"고 전했다. 안 주교의 그때
나이는 49세, 그는 예수께서 돌아가신 바로 그날 어쩌면 바로 그 시간에
순교의 영예를 차지하였다.
한국 성은 민(閔), 1866년 병인 박해 때 순교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프랑스 '랑그르'교구 출신인 민 신부는 1861년 사제가 된 후 1865년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로 백, 김, 서 신부와 함께 조선에 파견되었다.
그는 도착지인 충청도 내포에 머물면서 안 주교로부터 한국말을 배운 후
홍주 황무실에 부임하여 전교하였다. 1866년 3월 11일 안 주교가 체포되자
안 주교의 지시로 자수하여 안 주교, 오 신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어 갖은
악형을 겪은 후 사형이 선고되었다.
그는 형장이 충청도 수영으로 결정되어 안 주교, 오 신부와 함께 3월 30일
수영에 도착, 그곳 ‘갈매못’에서 당일로 군문효수되었다. 그는 30세의
나이로 이 땅에 신앙의 씨앗을 뿌리고 주님 품에 안겼다.
한국성은 오(吳),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으로 1866년 병인년에 순교한 프랑스인
선교사. 프랑스 ‘앙굴램’교구 출신인 성 오 베드로 오매트르 신부는 1862년
사제로 서품되어 이듬해인 1863년 6월 임지인 조선 땅을 밟았다.
그는 경기도 수원 근방 샘골에서 한국말을 익히고 곧 충청도 홍주의 ‘거더리’
에서 전교에 종사했다. 그러나 1866년 박해가 일어나고 동년 3월 안 주교가
체포되자 한때 피신코자 배를 탔으나 거센 역풍으로 뜻을 못이루고 다시
‘거더리’로 돌아와 즉시 체포되는 몸이 되었다.
그는 동반 순교자인 안 주교, 민 신부 등과 함께 일단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충청도 수영 ‘갈매못’에서 3월 30일 처형되었다. 오 신부는
안 주교 다음 두 번째 칼날에 29세의 젊은 나이로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하였다.
일명 '낙소'로도 불리는 성 장주기 요셉은 경기도 수원 느지지 (현재,경기도
화성군 양감련 육당리)에서 출생했다. 1826년 영세 입교한 후 박해와 친척들의
방해로 충청도 배론으로 이사하여 회장직을 맡아보며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했다.
1855년 배론에 신학교가 설립될 때 자신의 집을 신학교로 쓰게 하는 한편 자신은
신학교에 딸린 토지의 농사일과 잔일을 맡아 했다. 1866년 3월 1일 배론 신학교
에서 신 뿌르띠에 신부와 박 쁘띠니꼴라 신부가 체포될 때 그는 제천 부근의 ‘
노럴골’로 피신했으나 다른 교우들이 피해를 입을까 염려되어 자수하여 서울로
압송되었다.
서울의 포청에서 고문을 참아내며 끝까지 신앙을 지켜 때마침 홍주의 ‘거더리’
에서 압송되어온 안 주교, 민 신부, 오 신부, 황석두 루가 등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고 3월 30일 충남 보령군 ‘갈매못’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64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일명 '재건'으로도 불리는 성 황석두 루가는 충청도 연풍에서 양반집 3대 독자로
태어났다. 성장하여 부친의 뜻에 따라 과거보러 상경하던 중, 한 주막에서
천주교인과 사귀게 되어 입교했다.
그후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3년 동안이나 벙어리 행세를 해가면서 교리서적을
탐독하였고 그 결과 박대하던 부친과 가족들도 입교하였다. 이같이 뛰어난 덕행과
교리지식으로 그는 주교와 신부들의 복사로, 또 회장으로 활동했다.
또 고 페레올 주교에게 금욕과 절제를 위하여 아내와 별거할 것을 허락 받고 독신
생활을 하였다. 안 안토니오 다블뤼 주교를 도와 교리서를 번역하여 교회서적
출판에도 참여했다.
1866년 3월 충청도 홍주 거더리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는 안 주교를 몇
십리나 따라가 결국 체포되어 주교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다.3월 23일 사형
을 선고받고 3월 30일 충남 보령군‘갈매못’에서 안 주교,민 신부,오 신부,
장주기 등과 함께 군문효수형을 받고 54세로 순교했다.
성 손자선 토마스는 충청도 홍주 거더리 마을의 3대째 천주교를 믿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1866년 3월 거더리에서 안 안토니오 다블뤼 주교가 체포된 후 덕산
관아로부터 안 주교를 체포할 때 압수한 돈과 물건을 찾아가라고 기별을 받았
으나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어서 그는 혼자서 그 물건들을 찾으러 덕산 관아로
갔다가 체포되었다.
덕산 관장은 손자선이 천주교인임을 알고 옥에 가두어 고문하며 배교를 강요
했으나 굴하지 않자 해미로 보냈고, 해미에서 손자선은 두 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심한 고문과 심문을 받았으나 배교하지 않았다. 결국 공주 감영으로
이송된 손자선은 5월 18일 공주옥에서 23세의 나이로 교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일명 '계식'으로도 불리는 성 정문호 바르톨로메오는 충청도 임천 출신으로
임천에서 천주교를 알아 입교하여 독실한 신앙생활을 했다. 박해로 인해
고향을 버리고 여러 지방을 유랑하다가 병인박해 때에는 전주지방의 교우촌인
대성동 신리에 살고 있었다.
한때 고을의 원을 지내기도 하여 품행이 단정하고 성격이 강직해서 교우들뿐
아니라 외교인들에게까지 평판이 좋았다. 1866년 12월 초 사람을 시켜 박해에
대한 전주 감영의 동태를 살피러 보냈으나 그 소식을 듣기도 전에 12원 5일
대성동과 성지동을 급습한 포졸들에게 손선지, 한재권 등과 체포되어 12월
13일 5명의 교우와 함께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참수되어 66세로 순교했다.
순교하기 전 그는 옥중에서 항상 기도로써 순교를 준비했고 형장에 끌려가면
서도 "오늘 우리는 천국으로 과거보러 가는 날이다. 오늘은 정말 기뻐해야 할
날이다"고 하며 진심으로 자신의 순교를 기뻐했다. (98, 100과 함께 체포됨)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난 성 조화서 베드로는 1839년 기해박해로 아버지
조 안드레아가 순교하자 곧 충청도 신창으로 이사하여 한 막달레나와 결혼,
아들 윤호를 두었다.
한때 최양업 신부의 복사로 신부를 보좌했다. 그는 1864년 전주지방의 교우촌인
성지동으로 이사했고 아내가 사망하자 김 수산나와 재혼했다. 1866년 병인
박해가 지방으로 확산되어 전라 감사의 지시로 12월 5일 아들 윤호, 이명서,
정원지 등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 감영 전면옥에 갇히게 되었다.
옥에서 조화서는 "네 마음이 변할까 염려된다. 관장 앞에서 진리대로 말하여라"
하고 아들을 격려했고, 아들 윤호는 "저는 염려하지 마십시오, 아버님께서도
조심하십시오"하고 격려하며 부자가 서로 순교를 각오했다.
6, 7차의 신문을 아들과 함께 받은 조화서는 후손이 끊어지는 것을 염려하는
척하며 배교를 권유하는 관장의 유혹을 거부하고, 드디어 12월 13일 5명의
교우와 함께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참수형을 받아 52세의 나이로 순교했고,
아들 윤호도 10일 후인 12월 23일 같은 장소에서 순교하여 3대가 순교하는
영광을 얻었다. (102는 아들, 99, 101, 102와함께 체포됨)
일명 '승운'으로도 불리는 성 손선지 베드로는 충청도 임천의 ‘괴인돌’이라는
곳에서 태어나 어려서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성격이 온순하고 착해 16세 때
정 야고보 샤스탕 신부에 의해 회장으로 임명되어 순교할 때까지 회장의 직무를
충실히 이행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손선지는 전주지방의 교우촌인 대성동 신리에 살며 자신의
집을 공소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12월 5일 전라 감사의 체포령으로 대성동과
성지동을 급습한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정문호, 한재권 등과 함께 전주 감영
후면옥에 갇히게 되었다.
신문 중 회장의 신분이 탄로나 공소를 거쳐간 서양 신부와 교회서적의 출처를
대라는 관장에게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손선지는
회장답게 혹형과 고문을 이겨내며 함께 체포된 교우들을 위로하고 권면했다.
드디어 12월 13일 예수, 마리아를 부르면서 대성동과 성지동에서 체포된 5명의
교우와 함께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참수되어 47세로 순교했다.
(96, 100과 함께 체포됨)
일명 '재덕'으로도 불리는 성 이명서 베드로는 충청도 출신으로 박해를 피해
여러 지방을 유랑하다가 병인박해가 일어나기 몇 해 전부터 전주지방의
교우촌인 성지동에 정착했다.
1866년 병인박해의 여파가 지방으로 퍼지고 전라도 지방에서도 전라 감사의
지시로 전주 부근의 교우촌인 성지동과 대성동이 제일 먼저 피해를 입게
되었다. 12월 5일 포졸들이 성지동을 습격할 때 이명서는 조화서의 피신
권유를 뿌리치고 병든 몸으로 체포되어 전주 감영으로 끌려갔다.
전주 감영에서는 병자인 이명서를 배교시키기 쉬울 것으로 생각하고 제일
먼저 신문하고 혹형과 고문으로 배교를 강요했으나 이명서는 "내가 몇 번
죽는 한이 있어도 결코 나의 하느님을 버릴 수는 없읍니다"하고 배교를
거부하고 함께 체포된 교우들과 부지런히 기도하며 순교를 준비했다.
드디어 12월 13일 5명의 교우와 함께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참수형을
받아 46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97, 101, 102와 함께 체포됨)
성 한재권 요셉은 태중 교우로 충청도 ‘진잠’에서 태어나 부모의 착한
모범을 따라 독실한 신앙생활을 했고 또 진잠 지방의 회장으로 활동했다.
박해로 전주 대성동으로 이사한 후에는 아무 직책없이 교회 일에 충실했다.
1866년 12월 5일 한재권은 전라 감사의 명으로 대성동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손선지, 정문호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의 아버지가 친구를 통해 석방
교섭을 벌이는 한편 옥에까지 찾아와 배교 할 것을 간청했으나 한재권은
"아버님, 그 말씀은 따를 수가 없습니다"하고 아버지의 간청을 거절하고,
12월 13일 5명의 교우와 함께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참수형을 받고
31세로 순교했다. (96, 98과 함께 체포됨)
일명 '원조'로도 불리는 성 정원지 베드로는 충청도 진잠에서 태중 교우로
출생하여 전주 부근의 수널마루에서 살다가 금구지방으로 이사했고,1866년
병인박해 당시에는 전주 성지동 조화서의 집에 셋방을 얻어 노모, 형,
아내와 함께 살고 있었다.
조화서가 체포되던 날인 1866년 12월 5일 정원지는 산에 피신해 있었으나
동정을 살피러 내려 왔다가 조화서 일행을 끌고가는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전주 감영 전면옥에 갇혔다.
지극한 효성 때문에 노모를 생각하고 여러 번 눈물을 흘리다가 함께 체포
된 성지동 교우들의 위로와 권유로 끝까지 혹형과 고문을 참아냈다.
드디어 12월 13일 가족에게 "우리는 천국에서 서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제 죽음을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라는 편지를 남기고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5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21세의 젊은 나이로
순교했다. (97, 99, 102와 함께 체포됨)
아버지 조화서와 함께 순교한 조윤호는 충청도 신창에서 태중 교우로 태어
났다. 1864년 아버지를 따라 전주지방의 교우촌인 성지동으로 이사하여
교우 처녀인 이 루치아와 결혼했다.
1866년 12월 5일 아버지 조화서, 정원지, 이명서 등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
감영에서 아버지와 함께 6, 7차의 심문과 형벌을 받았으나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아버지가 순교한 지 10일 후인 12월 23일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곤장 16도를 맞은 후 19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97은 아버지, 97, 99, 101과 함께 체포됨)
일명 ‘제헌’으로도 불리는 성 이윤일 요한은 충청도 홍주 출신의 태중
교우로 경상도 문경의 ‘여호목골’에 살며 회장으로 활동했다. 1866년
병인박해의 여파가 경상도 지방에까지 미치게 되자 11월 가족, 마을의
교우 30여 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문경 관아에서 3일 간 혹형과 고문을 받은 후 배교하지 않은 교우들과
함께 상주로 이송되었고 상주에서 한 달에 세 번씩 석 달 동안 가혹한
형벌과 고문을 당한 후 소위 사학의 두목으로 지목되어 다시 김 회장
형제와 함께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대구 감영에서 김 회장 형제와 함께 사형 선고를 받았는데, 형이 집행
될 때까지 기쁨과 여유를 갖고 기도하며 1867년 1월 21일 대구 남문
밖 관덕정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니 그의 나이 45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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