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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8월 22일 수요일, 신라의 고도 남산 금오봉을 찾았다. 수원역에서 6시 25분에 출발하는 경주행 새마을호에 올랐다.
10시 25분경, 새마을호 열차는 경주역에 도착하였다. 4시간이 걸렸으나 열차의 의자가 안락한데다가 냉방이 잘되어 편안하였다.
경주역에 내려 길 건너 정류장에서 불국사행 시내버스를 탔다. 수학여행 숙박시설 사전답사를 겸한 출장이어서 먼저 불국사 앞의 동양유스호스텔을 찾았다. 불국사 앞에는 수학여행 손님을 받는 대규모의 숙박시설이 조성되었다. 대부분 초․중․고등학생을 수용하는 시설이어서 그 규모도 크다. 신라유스호스텔, 불국사유스호스텔, 경주유스호스텔 등의 이름을 간판으로 내걸었다.
동양유스호스텔의 시설을 둘러보았다. 우리 아이들이 2박 3일 동안 묵을 방의 크기와 청결함을 살펴보고 소방 시설, 비상계단 등의 안전시설을 살펴보았다. 그 다음에는 마당으로 나와 야외 시설을 살펴보았다. 전통 한옥의 문양을 딴 건물에 너른 잔디밭이 인상적이었다. 마당이 넓어서 아이들이 머물기에 편안할 것이다. 이어 지하 1층 식당으로 내려가 식당의 청결도와 식단표를 살펴보았다.
동양유스호스텔의 주방장은 나이 60이 넘었을 듯하다. 후덕한 인상의 아저씨여서 마음이 놓인다. 수십 년간 식당의 주방 일을 도맡아 하였을 터이니 식중독이나 배탈 설사 등의 음식 안전에 유리하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11시 40분경, 오늘의 식단이 준비되어 나왔다. 미안한 일이지만 오늘의 첫 손님으로 점심식사를 하였다. 햇감자를 깎아 넣어 찐 감자밥에 배추된장국이 나왔고 탕수육, 콩조림, 김치, 깍두기, 부추김치, 돈육볶음, 상추 등이 놓였다. 소박하고 평범한 식단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12시경, 동양유스호스텔을 나와 신라 제 38대 왕의 능묘인 괘릉으로 향하였다. 경주를 여러 차례 다녀오면서도 괘릉을 둘러볼 기회가 없었다.
신라 제38대 왕위에 오른 원성왕은 AD 785~798년간 재위하였다. 원성왕의 이름은 경신(敬信)이며 내물왕의 12대손이다. 아버지는 일길찬 효양(孝讓)이며, 어머니는 계오부인 박씨(繼烏夫人朴氏 또는 知烏夫人朴氏)이다. 비(妃)는 각간 김신술(金神述)의 딸이다.
AD 780년, 왕위에 오르기 전, 형 김양상(金良相)과 함께 김지정(金志貞)의 난을 평정하였다. 혜공왕(혜공왕 16년)을 제거 한 뒤, 형 김양상을 선덕왕으로 추대하였다. 이어 선덕왕에 의해 상대등에 임명되었다. 그 뒤 선덕왕이 자식 없이 죽자, 상재 김주원(金周元)과 왕위 다툼을 하게 되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상재 김주원의 집은 월성 북쪽 20리에 있었다. 선덕왕이 죽어 국상을 치르게 되었는데, 마침 큰 비가 내려 상재 김주원이 알천을 건너오지 못했다. 그 때, 차재 김경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였다.
"인군(人君)의 큰 자리는 본래 인모(人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오늘의 폭우는 하늘이 혹시 주원을 내세우지 못하게 함이 아닌가? 지금 상대등 경신은 전왕의 동생으로 본래 덕망이 높고 인군의 자격이 있다."
김경신을 따르는 무리들이 만장일치로 그를 추대하여 왕위를 계승하니 곧 비가 그치고 백성들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삼국유사는 이와 조금 다른 이야기를 전한다. 당시 화백회의에서 차재 김경신보다 서열이 높은 상재 김주원이 왕위에 추대되었다. 그런데 상주 노릇을 해야 할 상재 김주원이 알천의 물이 불어서 건너오지 못하였다. 이에 선덕왕의 아우인 김경신이 상주가 되어 국상을 치렀다. 그러자 김경신을 따르는 무리들이 이는 하늘의 뜻이라고 하며 김경신을 왕으로 재추대 하였다고 한다.
선덕왕 김양상이 죽기 전인 어느 날, 아우 김경신이 기이한 꿈을 꾸었다. 신하가 쓰는 복두를 벗고 흰 갓을 쓴 뒤 십이현금(十二絃琴)을 들고 천관사 우물 속으로 들어가는 꿈이었다. 김경신이 이 꿈을 꾸고 두려워하여 두문불출하였다. 감옥에 갇혀 칼을 쓰고 죽을 꿈이라는 해몽 때문이었다. 이때, 아찬 여삼(餘三)이 찾아와 꿈을 달리 해몽하므로 그의 말을 따라 북천신(北川神)에게 은밀히 제사를 올렸다. 그랬더니 선덕왕이 죽고 나서 알천의 물이 불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는 설화가 전한다.
왕위에 오른 경신은 고조부 법선(法宣)을 현성대왕(玄聖大王), 증조부 의관(義寬)을 신영대왕(神英大王), 할아버지 위문(魏文)을 흥평대왕(興平大王), 아버지 효양을 명덕대왕(明德大王), 어머니를 소문태후(昭文太后)로 추봉하고, 아들 인겸을 왕태자로 삼았다. 그리고 시조대왕(始祖大王:味鄒尼師今), 태종대왕(太宗大王:武烈王), 문무대왕(文武大王), 흥평대왕(興平大王), 명덕대왕(明德大王)을 5묘(五廟)로 했다. AD 785년(원성왕 1년) 총관(摠管)을 도독(都督)으로 바꾸었고, AD 788년 독서3품과(讀書三品科)를 설치해 관리를 등용했다.
AD 790년, 왕은 김제의 벽골제(碧骨堤)를 증축하고 발해와 통교했다. 원성왕 때에 들어와서 신라 하대 권력구조의 특징인 왕실 친족 집단에 의한 권력 장악의 틀이 확립되었다. 왕과 왕자를 중심으로 좁은 범위의 근친 왕족들이 상대등, 병부령, 재상 등의 요직을 장악했으며, 이들이 그 뒤 왕위를 이어서 신라 하대 원성왕계로 불린다.
AD 785년, 왕은 불교에도 관심을 쏟아 승관(僧官)을 두었으며, AD 795년에는 봉은사(奉恩寺:또는 報恩寺)를 창건하고 망덕루(望德樓)를 세웠다. AD 798년 12월, 왕이 죽으니 시호를 원성(元聖)이라 하고, 유명(遺命)에 따라 시신을 봉덕사(奉德寺) 남쪽에서 화장했다.
원성왕 김경신의 능묘는 경주시 남쪽에 위치한다. 태종 무열왕이 묻힌 경주의 북쪽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이는 어쩌면 무열왕계의 상대등 김주원에게 돌아갈 왕위를 빼앗은 일이 마음에 걸린 것이리라.
괘릉은 특이하다. 신라 여타 왕릉에 비하여 독특하다. 왕묘의 앞에는 능묘의 입구를 알리는 두 개의 화표(華表)를 세웠다. 이어 서역인 모습의 무신상(武臣像)을 세웠다. 무신상은 둥근 모자를 썼으며 왼손을 불끈 쥐고 오른 손에 도깨비 방망이 문양의 철퇴를 들었다. 이어 홀을 들고 소매가 넓은 복장과 두건을 쓴 문신상(文臣像)을 세웠다. 그 다음에는 4개의 사자상(獅子像)을 동서남북으로 세웠다. 그 중, 남방을 지키는 사자상의 모습이 독특하다. 귀를 쫑긋 세운 모습이다. 남으로 왜구의 침략을 막으려는 의도일까? 아니면 남해 바다를 건너오는 아라비아 서역인들의 소식을 기다리는 것일까? 문화재 해설사가 유독 이 사자상에 애착을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었다. 여타 사자상보다 조각 솜씨가 뛰어나다. 한 명의 스승과 세 명의 제자가 각기 하나씩 만들어 세운 듯 하다.
괘릉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괘릉도 흥무대왕으로 추존된 김유신장군 이후의 능묘 축성 방식을 고수한다. 능묘의 사방에는 십이지신상(十二地神像)을 빙 둘러 세웠다.
괘릉을 둘러보고 걸어 나와 남산으로 향하였다. 시내버스를 타고 경주 시내로 들어가는 데 천둥번개가 치고 폭우가 쏟아졌다. 안압지 어귀에서 내려 소나기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안압지 뒤편의 일만여 평의 너른 공터에는 연꽃을 기르고 있었다. 홍련꽃과 백련꽃을 가꿔 신라 천년의 고도 경주를 찾는 이들의 눈을 즐겁게 한다.
1시간을 기다려 택시를 탔다. 남산을 둘러보려고 택시기사에게 산행 입구를 물으니 삼릉으로 오르는 길이 무난하다고 한다.
오후 2시 10분경, 산행 입구인 삼릉에 이르렀다. 삼릉은 신라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의 능묘이다. 신라 초기와 신라 후기 세 왕의 무덤이 모여 있어 삼릉이라 칭한다. 어머니의 젖가슴처럼 붕긋이 솟은 둥근 젖무덤이 소나무 숲에 둘러 싸여 아름답다.
신라 초기 제8대 아달라왕의 이름은 박대선(朴大宣)이다. 아달라왕 박대선은 둘째 아우인 박길선(朴吉宣)과 왕위를 두고 다투었다. 이때 셋째 아우 박흥선(朴興宣)이 맏형 박대선의 편에 서자, 박길선은 백제로 달아났다. 박길선의 소환 문제로 백제와 신라가 싸움게 되자 박길선은 배를 타고 도망하였다. 이어 박길선을 도왔던 것으로 추정되는 영일만의 대장장이 연오랑과 세오녀도 배를 타고 열도로 망명하였다. 박씨 형제들의 왕위 다툼의 내란으로 신라의 국력은 급격하게 쇠퇴하였다. 영일만의 대장장이 연오랑과 비단을 잘 짜는 세오녀를 잃었기 때문이었다. 박씨 형제들의 왕권 다툼 이후, 신라 화백회의의 원로들은 박씨 대신 김씨를 왕위에 옹립하였다. 그가 바로 김알지의 후손인 내물왕이다. 이와 유사한 일은 근자에도 벌어졌다. 포항제철의 신화적 존재인 박태준 회장이 그러하다. 포철맨으로 불렸던 박태준 회장도 대권 도전을 꿈꾸었다. 그러다가 김영삼 대통령에게 지자 열도로 정치적인 망명을 선택하였다. 김영삼 대통령의 임기가 끝난 후에야 그는 한반도로 다시 돌아 올 수 있었다.
신라 말기 제53대 신덕왕의 이름은 박경휘(朴景暉)이다. 지금의 경주 남산 서쪽의 삼릉(三陵) 중 하나가 신덕왕릉으로 전한다. 경주 김씨들이 신라의 정치를 어지럽히자 다시 박씨가 왕위에 들어섰다.
신라 말기 제54대 경명왕의 이름은 박승영(朴昇英)이다. 아버지 신덕왕(神德王)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당시 신라는 궁예와 견훤 등 지방 세력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왕경(王京)인 금성을 중심으로 일부지역을 다스리는 데 불과했다. AD 918년 경명왕 2년에는 현승(玄昇)의 반란이 일어나 신라의 몰락은 가속화되었다.
삼릉을 지나 냉골을 따라 금오산에 올랐다. 석조여래좌상-마애관음보살상-선각육존불-선각여래좌상-석불좌상-상선암-마애불상-금오봉-남산일주도로-금오정-해목령-남산성터-상서장을 따라 남산을 한 바퀴 돌았다.
냉골로 오르는 길에 여러 개의 불상을 만났다. 두상이 없는 석조여래좌상을 먼저 만났다. 머리 없는 석조여래좌상을 보는 나그네의 마음이 아쉽다. 마애관음보살상 앞에는 등산객이 공양한 매실음료가 놓여 있다. 이어 선으로만 그린 선각육존불의 그림이 신선하였다. 두 개의 바위에 새겨진 삼존불과 삼존불을 더하여 육존불이다. 선각여래좌상을 지나 석불좌상에 이르렀다. 석불좌상의 얼굴 일부가 훼손되어 시멘트로 보수하였다. 그러나 보수한 모습이 오히려 어색하다. 깨진 채로 그냥 두는 것만 못하였다. 훼손 된 부분은 보는 이의 눈으로 상상하여 채우는 것만 못하였다. 석불좌상을 지나자 거북바위가 나타났다. 바위 표면에 거북의 6각형 등껍질 무늬가 선명하다. 자연적인 것인지 인위적인 것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3시경, 상선암을 지나니 수려한 눈매의 마애불상이 나그네를 맞이한다. 내 나이 또래의 불교 신자 하나가 배낭과 등산화를 벗어놓고 마애불상 앞에 엎드려 절을 한다. 한두 번이 아닌 수십 차례의 절을 한다. 아마도 서른 세 번의 절을 하는가 보다. 부모의 건강을 기원하는 것일까? 자녀의 취직을 기원하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문제를 소문하는 것일까?
마애불상의 모습이 아름다워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다. 가로로 찍고 세로로 찍고 다가서서 찍고 떨어져서 찍었다.
상선암 마애불상은 남산 금오봉을 바라보고 있었다. 금오신화의 저자 매월당 김시습도 이곳에 올라 시대를 원망하였으리라. 삼촌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시해하고 왕위를 차지한 불의에 울분을 토하며 울었으리라.
상사바위에는 노송이 보금자리를 틀고 있다. 바위에 보금자리를 튼 억센 소나무의 기상이 대단하다. 상사바위를 지나 금오봉을 오르는 길에 아기 두꺼비를 만났다. 비 내린 오후를 틈타 먹이 사냥에 나선 듯하다. 쿵쿵 소리를 내는 급한 등산화의 발걸음에 깜짝 놀라 달아난다. 숲으로 도망가려다 나의 발길에 막혀 어쩔 줄을 모른다. 아기 두꺼비의 그 모습에 어린 김시습의 모습이 겹쳐 떠오른다.
김시습은 조선 초기의 문인이다. AD 1435년 세종 17년, 한성에서 태어나고 AD 1493년 성종 24년 충청 홍산에서 입적했다. 본관은 강릉.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동봉(東峰)·벽산청은(碧山淸隱)·췌세옹(贅世翁) 등이며 법호는 설잠(雪岑)이다. 강릉 김씨의 시조 김주원(金周元)의 후손이다. 조선 시대 무반 계통으로 충순위(忠順衛)를 지낸 김일성(金日省)의 아들이다.
그는 생후 8개월에 글을 알았고 3세에 능히 글을 지을 정도로 천재적인 재질을 타고 났다. 5세에는 세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후일 중용하리란 약속과 함께 비단을 하사받기도 했다.
그는 당시의 석학인 이계전(李季甸)·김반(金泮)·윤상(尹祥)에게서 수학하여 유교적 소양을 쌓기도 했다. 그의 이름인 시습(時習)도 논어(論語) 학이편(學而篇) 중 '때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과거 준비로 삼각산 중흥사(三角山 中興士)에서 수학하던 21세 때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대권을 잡았다는 소식을 듣자 그 길로 삭발하고 중이 되어 방랑의 길을 떠났다. 그는 관서·관동·삼남지방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백성들의 삶을 직접 체험했는데, 매월당시사유록(每月堂詩四遊錄)에 그때의 시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31세 되던 세조 11년 봄에 경주 남산(南山) 금오산(金鰲山)에서 성리학(性理學)과 불교에 대해서 연구하였다. 한편,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37세에 서울 성동(城東)에서 농사를 직접 짓고 환속하는 한편 결혼도 했다. 벼슬길로 나아갈 의도를 갖기도 했으나 현실의 모순에 불만을 품고 다시 관동지방으로 은둔, 방랑을 하다가 충청도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에서 59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쳤다.
김시습은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갈등 속에서 어느 곳에도 안주하지 못한 채 기구한 일생을 보냈다. 그의 사상과 문학은 이러한 고민에서 비롯되었다.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얻은 생활체험은 현실을 직시하는 비판력을 갖추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현실의 모순에 대한 비판은 불의한 위정자들에 대한 비판과 맞닿으면서 민중에 기초한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이상을 구가하는 사상으로 확립된다.
한편 당시의 사상적 혼란을 올곧게 하기 위한 노력은 유·불·도 삼교(三敎)를 원융적(圓融的) 입장에서 일치시키는 것으로 나타난다. 불교적 미신은 배척하면서도 조동종(漕洞宗)의 인식론에 입각하여, 불교의 종지(宗旨)는 자비로 만물을 이롭게 하고, 마음을 밝혀 탐욕을 없애는 것이라고 파악한다. 또 비합리적인 도교의 신선술(神仙術)을 부정하면서도 기(氣)를 다스림으로써 천명(天命)을 따르게 하는 데 가치가 있다고 한다. 즉 음양(陰陽)의 운동성을 중시하는 주기론적(主氣論的) 성리학의 입장에서 불교와 도교를 비판, 흡수하여 그의 철학을 완성시킨다. 이런 철학적 깨달음이 궁극적으로는 현실생활로 나타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저서로는 금오신화, 매월당집, 매월당시사유록 등이 있다.
김시습의 어린 시절 이야기 한편이다. 어느 날, 대신 허조가 일부러 틈을 내어 다섯 살짜리 신동 김시습을 찾아갔다.
"너는 나이가 어려서 앞길이 창창하지만, 나는 늙어 쓸모가 없는 사람이다. '늙을 노(老)' 자를 넣어 시 한 수를 지어 보아라."
김시습은 곧 시를 읊었다.
"늙은 나무에 꽃이 피었으니 마음은 늙지 않았어요."
허조는 무릎을 탁 치며 감탄했다.
"과연, 소문 그대로 신동이구나!"
이 소문이 세종대왕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신동으로 소문난 김시습이 세종대왕에게 불리어 갔다. 대왕이 시제를 내어 신동의 재주를 살펴보았다.
'동자의 배움은 학이 푸른 소나무 위에서 춤추는 것과 같도다.'
대왕이 이런 글귀를 내놓고, 이와 짝을 맞춘 시구를 완성하라고 했다. 김시습은 서슴치 않고 맞받아 대답했다.
'임금님의 덕은 용이 푸른 바다에서 꿈틀거리는 것과 같습니다.'
세종대왕은 어린 김시습을 크게 칭찬했다. 그리고는 명주 5필을 그에게 하사하며 가져가라고 했다. 어린 아이가 가져가기는 매우 힘든 분량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김시습은 비단의 끝을 서로 묶어서 끌고 대전을 나갔다.
금오산에 기거하던 매월당 김시습이 지은 금오신화에는 모두 다섯 편의 한문 소설이 담겼다. 만복사에서 부처와 저포놀이 하는 이야기인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 이생이 담안의 아가씨를 엿보는 이야기인 이생규장전(李生窺墻傳), 홍서생이 술에 취하여 부벽정에서 노는 이야기인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 저승사자를 따라 남쪽 염부주라는 세계에 이르러 염라대왕과 사상적 담론을 벌이는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 용궁 잔치에 초대받는 이야기인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 등이다. 신선과 같은 마음에서 유불도의 삼교를 원융적으로 담은 이야기다.
3시 40분경, 해발 468m의 남산 금오봉에 올랐다. 한자로 쓴 금오산(金鰲山)이라 쓴 표석이 세워져 있다. 남산 금오봉이 신라의 도성 금성을 향하는 금자라(금거북)의 형상이라는 명칭이다.
금오봉에 올라 주변을 살피려는데 천둥소리가 났다. 또다시 먹구름이 서쪽에서 몰려온다. 잠시 비가 그친 틈에 남산에 올랐는데, 아무래도 소나기를 맞을 모양이다. 산 아래를 내려다보니 멀리 금오정과 오층탑이 바라다 보인다. 남산 일주도로를 따라 뛰어 내려갔다. 가까스로 금오정에 이르자 장대비가 쏟아져 내렸다. 소나기가 지나가기를 기다려 금오정에 머물렀다. 눈을 감고 앉아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를 떠올리며 금오정 기둥에 기대어 1시간을 졸며 쉬었다. 잠시 매월당의 마음으로 돌아가 쉬었다. 딴은 신선이 되어 금오산 자락 어딘가에 머물고 있을 매월당 김시습이 잠시 나의 발을 붙잡는 듯도 하였다.
소나기가 장대비로 내리는 지금 이 시각에 남산 금오정에 남은 사람은 고인돌과 신선 매월당 둘 뿐인 것이다.
4시 40분경, 비가 그쳤다. 금오산 봉우리에 흰 구름이 걸렸다. 금오정을 나섰다. 늠비봉에 위치한 오층석탑을 보고 포석정으로 이어지는 산길을 가려다가 그만 두었다. 해목령을 거쳐 남산성터를 지나 상서장으로 이어지는 긴 능선으로 들어섰다.
해목령을 지나면서 나이 일흔에 달한 등산객을 만났다. 경주 토박이인데 점심을 먹고 남산에 올랐다가 비를 맞았다. 그와 신라 천년의 고도에 관한 역사 문화를 이야기 하며 하산하였다. 산의 출구인 상서장은 신라의 석학 최치원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었다.
5시 30분 경, 상서장을 지나 남천을 건너 국립경주박물관과 안압지를 거쳐 경주역에 도착하였다. 5시 10분에 출발하는 새마을호 열차는 이미 떠났다. 경주역에 가까운 분식집에 들어가 뜨거운 칼국수를 먹었다. 이어 경주역 화장실에 들어가 대충 씻고 땀에 젖은 웃옷을 갈아입었다. 7시 15분 출발, 경주발 수원행 새마을호를 타고 귀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