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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9회 임란의사추모백일장 산문 부문 입상작품
▪ 산문 부문 대상 작품
박정후 (부산중앙여고 1/10)
길
우리의 길은 명확히 달랐다. 시작부터 달랐으며 목표로 향하는 종착점까지 모두 반대였다. 그럼에도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친구를 처음 만난 것은 5년 전, 같은 반이 되면서부터였다. 조용하고 혼자 있길 좋아하는 이 아이와 친해지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이 아이를 집에 초대하면서부터 우리는 단짝친구가 되었다. 몇 년 동안 서로에게 하나뿐인 단짝친구로 지내면 서, 우리는 서로에 대한 모든 것을 꿰고 있었다.
그래... ... 그런 줄로 생각했다. 얼마 전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 부끄러운 사실이지만 조금은, 아주 조금은 이 친구에게 질투심을 가지고 있었다. 공부를 잘하는 것은 기본이요, 교무실을 제 집처럼 들락날락할 정도로 많은 선생님과 친했다. 친구는 교무실에 불려가고 교실에 나 혼자 남아서 느껴야 했던 그 쓸쓸함, 그것이 너무 싫었다.
하늘이 푸르렀던 어느 날, 함께 하교하며 친구는 내게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수학 여행비를 지원받지 못할 것 같아 불안하다 했다. 내가 지원이라고? 라고 되물었더니 그렇다고 했다. 전부터 학교생활에 모든 것을 지원받고 있었다고, 우리 집은 사회적 배려 계층이라고도 했다.
사실... ... 조금은 충격이었다. 이리 맑고 착한 아이에게 그런 걱정이 있었구나... ... 왜 나는 진작 친구의 마음을 헤아려주지 못했을까, 내가 무턱대고 놀러가자며 조를 때마다 너는 곤란했겠구나... ...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보니 교무실을 자주 들락거리고, 많은 선생님들과 친했던 이유도, 학교에서 지원하는 장학금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미안함과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졌다. 그래놓고 질투라니... ...
이 친구에게는 확고한 꿈이 있다. 너무나도 견고하여 부서지지 않을 그런 꿈, 바로 정의를 해부하는 법의학자가 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친구가 얼마나 열심히 꿈을 향해 달리는지 나는 안다.
그러나 친구는, 법의학자로 걷는 그 길을 걱정하고 있다. 분명, 어렵고 현실이란 벽이 높이 가로막고 있는 길이리라.
내가 걸을 길은 이 친구가 걸을 길과 전혀 다름에도 나는 마음속으로 한 가지 약속을 했다.
너의 길을 걷는 그 시간동안, 네가 현실이란 벽과 마주치지 않게 가로수가 되고 빛이 되고 망치가 되리라.
친구를 위해서는 기꺼이 망치가 되리라.
초등,저학년부 산문
▪ 장원 조민서 (황성초등 1/1)
장난감
우리 할아버지는 농사꾼이다. 새벽부터 밤늦 게 까지 논에서, 밭에서 열심히 땀 흘리시는 우리 할아버지는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에 새하얀 이만 보이신다.
할아버지의 농장에는 지렁이, 달팽이, 무당벌레, 개미 등 많은 장난감들이 날 기다리고 있다. 주말이면 나는 할아버지의 농장에서 옥수수도 심고, 감자도 캐고, 풀도 뽑는다. 하지만 내 동생은 터닝메카드만 좋아한다. 세상에서 터닝메카드가 제일 좋다고 한다. 나는 할아버지 농장의 장난감이 예쁜 공주인형보다 변신 로봇보다 정말정말 좋다. 온 몸에 흙이 묻고 얼굴이 새까맣게 그을려도 할아버지의 장난감 농장은 가을이 되면 나에게 맛있는 음식을 정말정말 많이 주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의 장난감 농장이 최고다.
▪ 우수상 송수진 (황성초등 1/5)
장난감
나는 나보다 열한 살 많은 오빠가 있습니다. 나와 항상 놀아주지 못해 미안하다면서 나의 생일날 토끼인형을 선물해 주었습니다. 생각하지 않았던 토끼인형 선물이 너무 고마웠습니다.
오빠가 선물해준 토끼인형을 소중히 간직하려고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어떤 이름을 지어줄지 생각하다가 눈이 이쁘고 귀여워 착하게 생겨서 착착 이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착착 이를 안고 자면 꿈 속 에서 나쁜 괴물이 나타나도 오빠가 지켜주는 것 같아 무섭지 않습니다.
나는 오빠에게 고집쟁이 동생이지만 오빠는 내가 소중한 가 봅니다. 나를 소중히 생각해 주는 오빠에게 나도 멋지고 자랑스러운 동생이 되어야겠다고 마음이 들었습니다.
▪ 우수상 임수진 (나원초등 3/2)
장난감
“여기 와 봐.” 토요일이 되면 나는 저걸로 엄마와 아빠의 장난감이 된다. “여기 와서 수저 좀 들고 가라” “저기 파스 들고 와 어깨에 파스 좀 부처라” 하루 종일 내 이름이 오르락 내린다. 엄마가 내게 와서 머리를 묶어준다. 이번에는 내가 엄마의 장난감 인형이 된 느낌이다. 이제 옷을 입고 나갈 준비를 한다. 하는데도 계속 나는 장난감이다.
주황색 가방을 들고 가서 아빠 차에 탄다. 이때도 난 장난감이다. 도착한 다음 돗자리 펴는 것도 엄마가 시켜 다시 장난감이 된다. 이제는 나는 장난감 저주에 풀려나서 그림을 그리고 운문, 산문을 적는 데는 다른 장난감이 된다. 드디어 다 했는데 가자고 해서 또 다시 장난감이 된다. 장난감이 되는 게 힘들지만 그래도 나는 장난감 되는 게 좋다.
▪ 가작 조현정 (유림초등 3/8)
장난감
내가 가장 갖고 싶은 장난감은 휴대폰이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전화를 할 수 있다. 게임을 할 수 있다. 카톡을 할 수 있다. 등등, 근데요 몇 달 전 최상의 기회가 굴러 들어왔다. 바로 30일 간 엄마 말을 잘 들으면 휴대폰을 사준다고. 처음에 엄마는 내가 성공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근데 막상 성공하니까 엄마는 나를 꾀기 시작했다. 자전거를 싸줄게 하고 나는 그 속임수에 넘어갔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휴대폰 가게가 아니라 자전거 가게에서 자전거를 고르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왜 그 좋은 기회를 걷어찼는지 모르겠지만 자전거도 충분한 내 최고의 장난감이 될 자격이 있다 라 고 내 머릿속에서 판정을 내렸다. 나는 처음 타 보는 그 큰 자전거 타는 법을 1일 만에 터득했고 지금 그 노란 자전거는 내 최고의 장난감이다.
▪ 가작 박수빈 (입실초등 3/3)
장난감
내 장난감 중에는 컴퓨터, 인형, 게임기, 블록 등 많이 있지만 1등 장난감은 책이다. 왜냐하면 책을 읽을 때 마다 글쓰기 실력이 나무처럼 조금씩 자라기 때문이다. 심심할 때, 짜증날 때, 기쁠 때, 여러 기분들이 섞여 도 책 한권이면 모두 풀어진다. 책은 항상 궁금해 하는 ‘궁금이’를 풀어주는 마법 장난감인가 보다. 상품권이 생길 때 마다 “영화 볼래?” “책 볼래?” 물으면 나는 나침반처럼 책 쪽으로 항상 기운다. 그래서 지금까지 모든 책장에 아파트처럼 쏙쏙 모여 있다. 요즘 ‘내가 가장 많이’ 놀아주는 책은 하루 동안 일어난 일을 일기처럼 쓴 ‘윔피키드 시리즈’이다. 항상 친구를 괴롭힌 점을 고쳐야 겠다고
다짐하게 도와준 책이기도 하다.
오늘도 ‘나랑 놀자!’ ‘나랑 놀래?’라며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나를 부른다.
▪ 가작 최지우 (용황초등 2/1)
장난감
나에겐 달콤한 사탕보다 더 좋은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말랑말랑한 내 장난감 인형이다. 잠이 안 올 때 안고 있으면 스르르 잠이 온다. 언니도 동생도 없는 나에게 둘도 없는 친구다. 밖에 나갈 때면 같이 가지고 말을 하는 것 같다. 엄마 한 테 혼날 때 에는 불쌍한 눈으로 나를 위로해 준다. 말도 못하는 장난감이지만 말 안 듣는 동생들보다 더 소중하다. 가족처럼 소중한 내 장난감 인형이 너무 좋아서 “몰랑이”라고 이름도 붙여 주었다. 꿈속에서 몰랑이와 말하고 싶다. 아마 꿈속에서는 몰랑이도 말을 잘 하지 않을까? 오늘은 내 소중한 몰랑이를 꼭 목욕을 시켜줘야겠다.
▪ 가작 김민혁 (유림초등 3/2)
장남감
며칠 전 아빠와 엄마, 누나, 동생과 장난감 백화점에 갔다. 먼저 서점에서 드래곤빌리즈 책을 샀다. 그리고 장난감을 사러 갔는데 산더미만큼 많은 레고와 인형들과 공룡모형으로 가득했다. 누나와 동생은 토끼 인형을 사고 그런데 난 마음에 드는 게 없어서 결국 포기 했다. 내가 사고 싶은 것은 커다란 배 모양 레고를 사려고 했는데 너무 크고 비싼 것 같아서 포기한 것이다. 그래서 다른 레고를 사려고 했는데 작은 건 마음에 안 들고 큰 것은 좋긴 한데 비싸고 계속 짜증이 났다.
갑자기 우주 왕복선 레고도 괜찮을 것 같아서 찾아보았는데 탱크나 헬기 등만 있었다. 더 짜증이 나고 속상하고 우울해 졌다. 그래서 아빠와 다른 도시까지 갔다. 결국 내가 갖고 싶던 우주 왕복선 스페이스 포트를 샀다. 크고 멋졌다. 누나랑 동생은 금방 사는데 나는 하루 종일 찾아서 간신히 샀다. 아빠는 운전도 하고 피곤하실 텐데 화도 안 내셨다. 엄마는 조금 짜증을 내고 아무거나 사라고 하셨다. 엄마는 내 마음을 잘 모르는 것 같다. 마음에 드는 장난감을 샀는데 얼마나 설레고 기분이 좋은지.
역시 아빠는 남자라서 나랑 통하는 무엇이 있는 것 같다. 집에 와서 한 시간 만에 완성했다. 난 장난감 고를 때 가 가장 행복하다. 우리 집이 장난감 백화점이면 좋겠다.
▪ 가작 유은비 (포항 효자초등 1/4)
장난감
옆집 아줌마는 나를 볼 때마다 “외동딸 이어서 심심하겠다. 엄마한테 동생 낳아 달라고 해라” 하신다. 하지만 난 전혀 외롭지 않다. 왜냐하면 내 친구 장난감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부모님은 내가 상을 받을 때나 생일날이나 특별한 날이면, 잊지 않고 선물을 사 주신다. 그럴 때 마다 내가 원하는 장난감을 많이 샀다.
장난감은 나의 제일 친한 친구이다. 엄마가 밥을 만들 때 난 혼자이지만 장난감과 같이 놀수 있어서 더 좋다. 아빠한테 혼나서 속상 할 때도 장난감은 나의 옆에서 내 애기를 다 들어준다. 화를 내도 나를 보고 웃고 있다. 난 장난감과 여행도 같이 간다.
나와 떨어질 수 없는 정말 소중한 친구들아, 너무 너무 사랑해!
▪ 장려상 이윤호 (흥무초등 1/1)
장난감
나는 장난감 친구들이 많아요. 레고 영웅들이 매일 매일 나를 지켜줘요. 카봇들이 우리 집도 지켜주고 우리 동네도 지켜주는 것 같아요. 내가 변신 벨트를 허리에 차고 가면라이더로 변신하면 세상의 악당들을 다 물리 칠 수 있을 것 같아요. 힘이 정말 세지고 기분이 좋아요. 재미있는 장난감들이랑 매일 신나게 놀아서 너무 좋아요.
초등,고학년부 산문
▪ 장원 김재혁 (계림초등 5/1)
아버지
6시30분 어김없이 휴대폰 알람이 울리고 아버지는 뒤척뒤척 피곤에 지친 몸을 추스르며 매일같이 가족을 위해 집을 나서신다. 하루 종일 고된 일을 하시고 지친 몸을 이끌고 밤 열시가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오시면 어머니가 정성스럽게 차려주신 저녁 밥상을 마주하고 그제 서야 미소를 지으신다.
늦은 저녁 식사시간 식사를 마치시면 잠시 후 쇼파에서 들려오는 소리 “아이 구 허리야 다리야” 이제는 내가 아버지를 웃게 해줄 시간이다.
어깨며 다리며 있는 힘을 다해 주무르고 두드리면 아버지는 “내가 이 맛에 산 다” 하시며 베란다 창밖으로 환하게 떠있는 둥근 보름달보다 더 크고 환하게 웃으시며 사랑의 하트 뽀뽀를 해주신다.
나는 가족을 위해 아무리 힘들어도 지치지 않고 열심히 일하시는 우리 아버지가 자랑스럽고 누구보다 존경한다. 나도 먼 훗날 시간이 흘러서 아버지가 되면 우리 아버지처럼 내 자식을 위해 내 가족을 위해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께도 사계절 푸른 든든한 소나무가 되어 친구도 되어주고 더운 여름날 시원하게 쉴 수 있는 쉼터가 되어주고 싶다.
▪ 우수상 김상은 (포항 포항초등 6/1)
아버지
우리 아빠는 참 좋다. 뚱뚱하고 날개도 없지만 나한테는 천사 같다. 먹고 싶은 것도 잘 사주고 내가 하고 싶거나 바라는 게 있으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다 해주신다.
수호천사처럼 내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어디에선가 나타나 금방 해결해 주시는 멋진 분이다. 우리 아빠는 달하고도 참 닮았다. 보름달처럼 빵빵하게 나온 배도 닮았고 다이어트 한다고 살을 뺏다가도 얼마 못가서 다시 살이 찌는 것도 달이랑 꼭 닮았다.
초승달이 보름달 되듯이 우리 아빠도 보름달처럼 다시 동글동글해 진다. 우리 아빠는 쉬어갈 곳 없으면 내가 쉴 수 있게 그늘 되어주고 내가 기댈 곳이 없으면 나무가 되어주는 나의 듬직한 친구다.
그래서 난 우리아빠가 참 좋다.
▪ 우수상 박서정 (광주 용두초등 5/5)
아버지
아버지와 나는 의리로 똘똘 뭉쳐진 사이이다. 내가 어릴 적, 목에 주름은 보톡스도, 성형도 할 수 없다며 항상 거울을 보고 팽팽한 목을 보며 흐뭇해 함박웃음을 지으시던 멋쟁이 우리엄마 10센티 되는 뾰족구두 피도 통하지 않을 만큼 꽉 쪼이는 쫄티에 스키니 진 만 고집하시던 패셔 니 스타 우리 엄마. 함께 길을 가면 이모일거라고 엄마는 아닐 거라고 사람들이 다들 나를 조카 취급했었다.
1학년 가을이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엄마는 매일 걸어오던 길을 몇 번씩이고 주저앉아 쉬었다 걷고 쉬었다. 걷고를 반복하셨다. “서정아, 여기서 조금만 쉬었다 가자꾸나!” 쉽게 힘들어 하시고 쉽게 지치시던 엄마... ...
그러던 어느 날 주위 사람들이 병원에서 검사를 받아보라는 말에 검사를 받아본 결과 “갑상선 암” 이라고 하셨다. 수술 날짜를 잡으시고 수술 전까지 무척이나 힘들어하고 슬퍼하던 우리 가족... ...“엄마, 오늘도 그때 생각하면 눈물이 나시나요?” 의사 선생님께서는 엄마 목에 수술 전날 볼펜으로 수술 부위를 표시하러 오셨는데 주름이 없는 환자분은 드물다며 힘내라고 하셨다.
언제나 밝고 자신감 넘치시고 긍정적이시던 엄마는 수술 후 까칠해지시고 모든 일에 짜증을 내시며 불편한 표정과 호르몬제를 먹지 않으면 힘이 없어서 활동도 못하시고 누워만 계셨다. 무엇보다도 수술 하시고 나서 목에 크게 남으신 상처를 볼 때마다 한숨을 쉬고 계신다. “서정아, 엄마 심부름 좀 해줄래?” 에 휴, 엄마의 심부름 소리... ... 이제는 일상생활이 되어 버린 지 벌써 2년 째 이다. 가끔은 아버지와 난 서로 엄마께서 부르시면 자연스럽게 마치 로봇처럼 움직이신다. 가끔은 아버지와 난 서로 엄마의 심부름을 기꺼이 서로에게 양보하겠다며 발가락으로 서로 가보라면서 떠밀어도 보지만, 결국은 엄마의 화난 큰소리에 서로 엄청난 스피드로 후다닥 심부름을 실행하며 엄마께 아버지와 난 애써 밝은 거짓웃음을 기꺼이 선사한다. 버튼을 누르지 않아도 되는 신기한 엄마의 “음성 심부름 리모컨” 밧데리도 필요 없는 고장도 나지 않는 명품 리모컨이다.
비록 지금은 뚱뚱한 엄마지만, 까칠하고 힘이 없는 엄마지만 세상에서 단 하나 뿐인 우리 엄마가 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아버지와 나는 참 행복하다.
앞으로 10년, 20년, 100년 후에도 나와 우리 아버지는 영원히 엄마의 “명품 리모컨”이 되리라고 서로 굳은 약속을 했다. 의리로 약속된 사이 그 이름은 바로 “아버지와 나” “엄마, 아빠! 사랑해요.”
▪ 가작 박채윤 (용황초등 4/3)
아버지
세상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아버지를 나는 아빠라고 부른다. 사람들이 붕어빵이라고 할 만큼 많이 닮았다. 그런 애기를 들을 때마다 기분이 좋다. 아빠의 아버지는 시골 할머니 댁 안방에 걸려 있는 사진 속 모습으로 처음 보았다. 돌아가신 지 30년이 다 되어간다고 했다. 그때 듣게 된 아빠의 아버지... 힘든 전쟁 통에 깊은 산골 할아버지 동네는 살기위해 숨어 들어오는 사람들이 많았었단다. 너무 굶주려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아 보였던 사람들에게 감자도 삶아주고 배부르게 먹이진 못했지만 그렇게 정을 나누던 분이셨다. 그 사람들이 떠나간 후 이유조차 제대로 알지도 못한 체 할아버지는 감금이 되기도 하고 고통을 받으셨단다. 가족을 위해 살아보겠노라고 일본까지 가셨다는데... 힘든 일본 생활에서도 이 악물고 고생하셨다고 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때는 혹시라도 뺏길까봐 꽁꽁 숨겨서 챙겨온 일본 돈이 휴지 가 휴지가 되었다니 이야기를 들으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렇게 다시 돌아온 고향은 여전히 전쟁 통에 서로 할퀴고 남이 되어 가고 있었단다. 하지만 누구보다 의지가 강했던 할아버지는 빨치산이라 부르며 쳐다보지도 않던 사람들에게 큰 바위처럼 보호막이 되셨다. 마을 사람들의 눈을 속여 가며 방패막이 되어주셨던 것이다. 비록 전쟁은 하고 있지만 모습만 봐도 내 형제고 내 가족인데 외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휴전이 되고 전쟁의 아픔이 가시기전에 고인이 되신 할아버지...아빠의 아버지는 이렇게 훌륭한 분이셨다. 하늘나라에 계신 할아버지 아직도 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는 대한민국을 보시면 얼마나 가슴 아파 하실지 죄송스런 마음이 든다.
▪ 가작 김유경 (황성초등 6/1)
아버지
아버지라는 것은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이다. 우리 아버지는 가족을 위해서 맨날 새벽2시나 3시에 일을 하러 가신다. 그리고는 저녁 늦게 들어오셔서 바로 주무신다. 어떨 때는 들어와서 나와 이야기 하면서 주무실 때도 있다.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 나를 업어주시고 놀아주시고 많이 아껴주셔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많이 남는다. 아버지는 항상 다정다감하신 분이다. 내가 숙제를 도와달라고 하면 숙제를 도와주신다. 나는 그런 아버지가 참 좋다. 그리고 위험한 상황이 생기면 바로 달려와서 도와주신다. 내가 어렸을 때 휴게소에서 납치될 뻔 한 적이 있는데 아버지께서 슈퍼맨처럼 오셔서 도와주었다. 나에게 아버지는 슈퍼맨과 같은 존재이시다.
아버지는 항상 날 감싸주시고, 응원해 주신다. 나는 춤을 춘다. 그런데 엄마께서는 춤을 못추게 하시고, 아빠께서는 정말 많이 날 응원해 주신다. 엄마께서 나를 혼내시면 아버지께서 하지 말라고 타이르시고 상황을 정리한다.
나는 우리 아버지처럼 좋은 아버지는 없다고 생각한다. 난 우리 아버지가 세상에서 제일 좋다. 아버지가 없었다면 난 태어날 수 없고, 태어났더라도 살아갈 수 있을까? 나는 잘생기고, 듬직하고, 용감한 우리 아버지가 세상에서 제일 좋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 가작 장해림 (경산 삼성현초등 5/1)
아버지
이 사건은 어린이날의 일이다. 5월5일 이모야 가족과 같이 이마트를 갔다. 어린이날 이니 당연히 선물을 받겠지... 하는 생각으로 미소 지으며 이마트 입구로 갔다. 우선 아빠의 옷을 사고... 내가 원하는 소라게와 어항 그리고 인형을 사달라고 하니 내가 알레르기가 있다고 안 된다고 했다. 결국 나는 나 혼자 화가 나서 쌍코피가 났다. 주위 사람들은 엄마가 날 때린 줄로 안다. 이마트 화장실에 아빠랑 갔다. 아빠께서 지혈을 제대로 못해서 응급실로 가게 되었다. 아빠 때문에, 우리아빠 때문에, 치료를 마치고 아빠에 대한 원망이 밀려왔다. 다음날 잠에서 일어나보니 편지가 한 장 있었다. 이 편지를 읽고 아빠를 애타게 찾았지만 아빠는 어디에도 없었다. 아빠, 아빠! 우리 아빠는... ... 목이 순간 잠겼다. 그 후로 아빠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 아빠의 마음 하나에 담긴 사랑이 날 깨우시네.
▪ 가작 선해나 (황성초등 6/4)
아버지
우리에게는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계신다. 우리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계셔서 행복하게 생활할 수 있다. 그리고 항상 뒤에서 우리를 묵묵히 응원해 주시고, 우리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 주시는 아버지가 계시기에 우리가 더 행복하게 생활할 수 있는 게 아닐까요? 그런데 만약 우리 아버지가 전쟁을 하시다가 전사하시 게 된다면 어떨까?
1500년대 후반, 우리는 2차에 걸쳐 우리나라에 침입한 일본과 싸우게 된다. 우리나라의 남자는 전쟁에 참여하여 일본과 맛서 싸워야 한다. 물론 나의 오빠와 아버지께서도 전쟁터에 나가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아버지, 안 가시면 안 될까요?” “걱정 마, 아빠는 강하니까 꼭 이겨서 돌아올게.” 나는 아빠께 가지 말라고, 안 가시면 안 되냐고 매달렸지만, 아버지는 꼭 돌아오겠다며 손가락까지 걸고 약속하셨다. 나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아버지는 나라를 위한 일이라며 뒤도 돌아보시지 않고 전쟁터로 나가셨다. 어머니와 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단 한 번도 집에 돌아오지 않으셨다. 드디어 6년 동안 2번에 걸친 오랜 싸움이 우리나라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승리의 기쁨도 잠시, 아버지가 돌아 가셨다 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처음엔 거짓말인 줄 알았다. 분명 새끼손가락까지 걸고 약속했는데, 꼭 이겨서 돌아오겠다고 했는데 그 약속을 어긴 아버지가 너무 원망스러웠다. 항상 웃으시며 힘든 기색 내지 않으시고 뒤에서 항상 응원해주시던 아버지가 곁에서 멀어지게 되니 너무 어색하고, 자꾸만 생각이 났다. 아직도 이 상황이 꿈만 같다. 이 순간도 아버지가 옆에 계실 것만 같은데, 이제 곁에 없으시다는 걸 생각하면 너무 마음이 아프다. 한 번만 다시 아빠가 살아난다면 정말 잘해줄 자신이 있는데, 살아계실 때 못해드린 게 너무 많아 후회가 된다.
이렇게, 임진왜란으로 인해 정말 많으신 분들이 전사 하셨다. 만약, 우리의 아버지도 전쟁으로 인하여 목숨을 잃으신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전쟁이란 것을 더 싫어하게 되고, 그 동안 아버지께 못해드린 것이 자꾸 생각이 나 후회하지 않을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지금 당장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하고, 고맙다고 표현을 해 보자. 언제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후회하지 않도록!
엄마, 아빠! 항상 고맙고 사랑합니다. 저를 낳아 주시 것도, 제 부모님이 되어 주신 것도, 항상 저를 위해 응원해 주시는 것도 고맙고, 정말 사랑합니다.
▪ 가작 변서영 (금장초등 4/2)
아버지
“아빠는 꿈이 뭐야?”
“음... ... 아빠 꿈은 서영이가 예쁘게 잘 자라는 거지.”
“아니, 아빠 꿈이 뭐냐고?”
대답은 하지 않고 빙그레 웃기만 하십니다. 아이 시시해. “나도 예전에는 꿈이 있었는데, 이젠 꿈을 꿀 여유가 없구나.” 방으로 들어가시는 아빠 뒷모습이 왠지 슬퍼 보입니다. 생각해보면 아빠가 조금은 불쌍합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회사가면 저녁 늦게 돌아오십니다. 내가 놀자고 해도 “나중에‘라고 하실 때 면 밉기조차 합니다.
그래도 내가 학교에 가서 하루 종일 있다가 밤늦게 돌아와야 한다면 정말 싫을 것 같습니다. 내 꿈을 이루어 주기 위해 자기의 꿈을 포기하신 아빠를 위해서라도 열심히 공부하여 멋진 의사 선생님이 되겠습니다.
▪ 장려상 정혜영 (유림초등 6/1)
아버지
제가 이 글을 쓰게 된 까닭은 임란의사추모 백일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저의 경험과 그에 따른 결과를 설명 드리겠습니다.
저의 경험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요즘 어머니께서 나가시는 때에 늦게 자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빨리 자라고 하십니다. 또한, 감기가 걸렸을 때는 목수건을 해주시고, 따뜻한 물도 주십니다. 이렇듯 나라의 모든 아버지는 자신의 자녀를 위한 교육을 열심히 하십니다. 이 경험들을 바탕으로 제가 느낀 아버지의 사랑도 있습니다. 요즘 아버지들은 옛날보다 더 육아에 힘쓰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이 사랑에 다른 결과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제가 늦게 잘 때 자라고 하신 것은 이제 제가 스스로 일찍 자고 있습니다. 이로써 제가 바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해주셨습니다. 두 번째, 감기가 걸렸을 때 도와주신 것은 이제 이 부분도 스스로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것 도 병을 물리치는 방법 또한 알 수 있었습니다. 세 번째, 요즘 아버지들께서 육아를 담당하시고 계시는 점에서 우리나라 아버지들께서 발전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직장을 다니는 어머니들의 부담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느낀 점 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저는 자녀 교육을 위해 힘써 주시는 아버지들을 존경합니다. 그리고 묵묵히 자신의 일도 하시는 점이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만 줄이겠습니다.
▪ 장려상 이시훈 (산대초등 4/4)
아버지
아버지의 발에는 굳은살이 많다. 할머니는 아버지의 발을 보고 문디 발이라고 하신다. 상처투성이인데다, 발톱이 성할 날이 없어서이다. 우리 아버지께서는 운동을 하신다. 나는 남에게 아버지의 발을 보여주기 싫다. 남들 아버지의 발은 다 하나같이 깨끗한데, 왜 그럴까?
어느 날 어머니가 아버지께 하시는 말씀을 들었다. 운동을 그만하라는 말씀이었다. 그래도 아버지는 운동을 하신다고 하셨다.
그제 서야 깨달았다. 아버지는 굳은살만큼 고생하셨던 것이다. 오늘은 아버지의 발을 씻어드려야겠다.
▪ 장려상 이강은 (산대초등 6/1)
아버지
우리 아버지는 개그맨. 우리 아버지는 아재개그의 달인. 아버지가 개그를 할 때면 마음속의 스트레스가 다 날아가는 것 같다. 가끔 설렁한 개그를 할 때면 안타깝다. 이젠 매일 듣지 않으면 썰렁한 아버지의 개그. 우리 집에 힘든 일이 있을 때 아버지의 개그 하나로 웃음가득.
그런 아재개그를 생각하려면 머리가 아플 텐데 우리 가족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이 감사하다. 나도 커서 우리가족을 비추어 주는 우리 아버지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 장려상 이상윤 (흥무초등 4/1)
아버지
우리 아버지는 만능 재주꾼이시다.
“아빠, 이 조종차가 안돼요” 나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말한다. “그래, 어디 한번 보자” 조금만 있으면 아버지는 뚝딱 바로 고쳐주신다. 부러진 장난감이나 고장 난 것들을 아버지에게 고쳐달라고 하면 짜잔! 새 것이 된다. “우와, 아빠 최고야!” 나는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아서 눈이 커지고 가슴이 두근거린다. 우리 아버지 손은 마법사의 손 인 것 같아서 신기하다. 우리아버지는 무엇이든 해결하는 척척박사, 슈퍼맨이시다.
▪ 장려상 최성혁 (용황초등 6/1)
아버지
자신을 희생하시고 우리들의 편리만 생각하시는 아버지 고민상담사처럼 우리의 고민을 들어주시고 해결해주시는 아버지. 우리에게는 구급차 같고 보디가드 같은 아버지. 우리가 하고 싶다는 것은 무엇이든지 허락해주시는 자랑스럽고 멋진 아버지. 항상 바쁘신 데도 우리를 생각하시는 아버지. 누구와 싸우면 ‘괜찮나’ ‘잘했어’ 라고 해주시는 아버지.
나도 크면 자상하신 우리 아버지처럼 되어 아이들과 친구 같은 아버지, 부모님에게는 듬직한 아버지, 친구들에게는 믿음직스러운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자랑스럽고 본받고 싶습니다.
중등부 산문
▪ 장원 김규민 (칠곡 신동중 1/1)
그늘
하늘하늘 흩날리는 나뭇잎 아래에 그늘은 언제나 자리를 지킨다. 아주 옛날 조국을 위해 자리를 지킨 영웅들처럼 이젠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따가운 햇살 아래 우리를 지킨다.
나무그늘, 더운 날 앉아 있으면 평온해지는 곳, 사람들이 세운 인공그늘 막 아래보다 더 시원하고 익숙한 곳이다. 흙냄새 풀냄새 산뜻한 숲속에는 이름 모를 하얀 들꽃에 흰나비가 앉아있고 나뭇가지에 달린 나뭇잎은 손수 한 땀 한 땀 수놓은 밤하늘의 별처럼 푸른 하늘에서 흩날린다.
아직 아물어지지 않은 상처처럼 그 옛날의 아픔은 여전히 슬픔으로 우리에게 남아 있지만, 힘들었던 전쟁터는 평화로운 숲이 되었다. 나라를 위해 고통 받던 영웅들은 나무 밑 흙이 되어 돌아가고 그들의 한은 들꽃이 되어 피었다.
지금은 숲이 되신 그분들은 잘 계십니까? 내가 물으면 나무는 말없이 나뭇잎을 흔들어 끄덕인다. 이제 슬픔 없이, 아픔 없이 우리가 즐거운 모습만 보여줄게 라고 하니 나무는 미소 짓는다.
내가 초등학생 일 때 체력단련으로 힘들어할 때도, 소풍 갔다가 너무 더워서 힘들었을 때도 내 곁을 지켜주는 나무들이 더운 날에도 일하시는 아버지께 가서 지켜주지 않을까? 생각이 들고, 매일 투정부리고 화내면서도 밖에 나가서 나무만 보면 이런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푸르른 나무아래 틈틈이 비춰오는 햇살 사이로 보인다. 사람들의 웃음이.
보았다 나무의 미소를, 호국 영웅들에겐 평화를, 우리에겐 바쁜 삶의 쉼터를 선물해 주는 그늘. 어둡지만 햇빛 아래에서 어두워 우리를 지켜주는 푸른 숲의 나무 그늘이다.
아름다운 숲은 평화롭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나무처럼 그들도 우리를 위해 기다리고 있다.
▪ 우수상 신윤서 (근화여중 2/2)
그늘
당신에게 있어서 그늘이란 어떤 존재인가? 36~7도를 육박하는 무더운 날씨에 눈 앞 이 아른거려 점점 이성을 잃어갈 그 때, 큰 나무 그늘 아래 몸을 숨기면 바람이 불어와 땀을 말려준다. 이렇게 지치고 힘이 들면 우리가 잠시 쉬어가는 쉼터가 바로 그늘이다.
그럼 1592년, 뜨거운 태양과 바다 건너 적과 맞서 싸우던 그 수많은 병사들. 그 병사들은 과연 아수라장인 전쟁터 속에서 조금이라도 머리를 기댈 수 있는 그늘이 있었을까? 아니, 그런 상황이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전쟁에서 승리한 소식을 듣고 무사히 살아 돌아가서 다시 집의 맏이, 가장으로써 가족의 그늘이 되어주겠다는 일념으로, 앞으로 다가올 조선의 미래를 위해서 그들은 그렇게 힘을 냈을 것이다. 만약 나라를 지킨다는 마음이 없었으면 우리는 평생 일본의 노예가 되어 그렇게 살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들은 하루하루를 평화로이 살고 있다.
이 또한 자신의 목숨을 다하여 나라를 지켜낸 병사들이 손수 만들어 준 거대한 그늘이다. 마냥 찾기 쉬운 나무그늘? 그와는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보물이다. 무언가를 배워서 깨달음을 얻기 전은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의로운 마음을 갖춘 호국정신은 이미 몸 속 깊숙이 자리 잡고 있어야한다. 이로운 그늘이 아닌, 의로운 그늘. 이러한 큰 쉼터를 앞으로도 영영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 후손들은... ...
▪ 우수상 선다윗 (신라중 2/4)
그늘
다음 행선지까지는 거리가 먼데 태양은 땅을 태우려는지 너무 덥다. 어! 저기 나무그늘이 있다 잠시 쉬었다 갈까? 그늘 아래에 앉아 시원한 바람을 쐬며 땀을 식히면서 생각해 본다. 이 나무는 누구의 것일까? 누가 심었을까? 아아 수백 년은 족히 되 보이는 큰 나무이다. 우리는 그 그늘에서 다음 행선지로 힘차게 나아갈 동력을 얻는다. 그늘 아래에 쉬니 더없이 시원하고 편안하다. 나는 쉬는 겸, 이 그늘을 만들기 위해 나무가 겪어온 일을 잠시 생각해 보기로 한다. 수백 년은 되 보이는 나무. 이 나무는 험한 세상에서 오랜 시간 꿋꿋이 자기 자리를 지켰다. 비바람을 견뎌내고 땅이 갈리고 번개가 내려치는 험한 곳에서. 뭐 지진은 없었을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을 하다 문득 이 그늘이 선조들의 땀과 피로 세운 대한민국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무는 선조의 애국, 충효 그늘은 그들이 땀과 피로 일궈낸 지금으로부터 424년 전, 1592년에 우리는 나무그늘을 통째로 잃을 번 한 위기에 처했다. 그늘은 물론이고 나무가 사라질 위기 속에서 우리 조상들은 애국의 전신 갑주로 무장했다. 그들은 결코 물러설 수 없었다. 아니 물러설 수 없었다. 그들은 싸웠다. 이 땅의 아버지로서 가정을 지키기 위해, 이 땅의 학도로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이 땅의 농민으로서 농토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이 나라의 백성으로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그 이후 나무는 점점 커졌다. 새들이 짹짹거리며 날아와 둥지를 틀었고 매미가 맴맴 우는 아름다운 나무가 되었다. 그늘 역시 넓어졌다. 전보다 많은 이들이 그늘에서 쉰다. 흠, 시원한 그늘에서 깜빡 잠이 들었다. 이제는 바지에 흙을 훌훌 털고 다음 목적지로 갈 채비를 한다. 그늘에서 더 쉬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다. 우리는 나아가야 할 분명한 목표가 있다. 그러나 그늘을 잊지는 않을 것이다. 때로 지치고 힘들 때, 우리는 종종 이 그늘을 찾을 것이다. 그때쯤이면 그늘은 더 커져있겠지. 이제 이 그늘을 만든 선조의 애국정신으로 만들어진 이 그늘에서 힘을 얻어 다음 목적지로 힘차게 나간다. 더 좋은 세상, 행복한 미래를 향하여.
▪ 가작 김규현 (월성중 2/2)
그늘
오늘도 헉헉거리며 아버지와 함께 뒷산을 오르고 있었다. 운동기구들이 놓여 진 곳까지 가기도 전에 나는 턱까지 차올랐다. 나에겐 햇빛을 막아줄 그늘이 필요했다.
“벌써 지쳤어? 그늘은 저위에 있어. 빨리 와!” 라고 아버지께서 재촉하셨다. 할 수 없이 더 올라갈 수 밖에 없었다. 몸과 마음도 지쳤지만 열심히 올라갔다.
“다 왔다, 다 왔어, 장하다 우리 아들” 나도 모르게 아버지의 말에 피식 미소를 지었다. 마침 내 옆에 엄청 굵고 큰 나무가 서 있었다. 딱 봐도 오래된 나무였다. 나무 옆에 걸 터 앉아 아껴둔 음료수를 마셨다, 정상까지 올라왔다는 성취감과 다시 내려가야 한다는 부담감이 교차했다.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그냥 보기만 해도 시원한 그늘을 보면서 어쩌면 우리가 그늘 안에서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것은 누군가의 희생이 있었지 않았을까? 이 넓디넓은 땅에 나무를 심고 정성스럽게 가꾸고 말이다.
이 생각에 푹 빠져있을 때 쯤, 아버지께서 집에 가자고 하셨다. 조금씩 힘들어 지고 있을 때 아버지께서 내 머리 위로 손을 내 미시면서 나에게 그늘을 만들어 주셨다. 그 그늘은 나의 눈만 가려주었지만 내 마음에도 쉴 수 있는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 가작 박지우 (근화여중 1/1)
그늘
지금쯤 시골 할아버지 댁 앞마당에는 아름드리 감나무에 감꽃이 만발했을 것이다. “아이고, 우리 강아지 왔나.” 하시며 감꽃보다 더 밝은 표정으로 반겨주시던 할아버지가 생각난다. 할아버지 댁 벽에는 할아버지 얼굴만큼 빛나는 훈장도 걸려있다. 나는 그 훈장을 볼 때 마다 서글퍼하시는 할아버지께 여쭈어 보았다.
“할아버지, 이 훈장이 뭐예요?” 그러자 할아버지께서는 “이 훈장은 내가 젊은 시절 월남전에서 받은 훈장이란다. 그때 함께 전쟁에 참여했던 전우들의 희생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단다.”
말하시면서 차디찬 눈물을 훔치시고는 애서 아무 일 없듯이 돌아가자고 목 메인 목소리로 말씀하시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감나무의 그늘 같았다. 나는 항상 감나무 그늘 밑에서 잠을 자거나 책을 읽기도 하고 마을 아이들과 놀기도 했다. 어릴 적의 소중하고 행복한 추억이 감나무 밑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내 어린 시절을 꾸며주는 감나무의 그늘은 월남전에서 열심히 싸우시고 전사하신 군인들의 모습과 같다.
월남전에서 자유와 민주를 펴나가기 위해 열심히 싸우신 군인들의 희생이 지금의 베트남이 되었듯이 감나무의 그늘이 없었다면 푸른 잎처럼 반짝반짝 빛나던 내 어린 시절의 추억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감나무의 그늘이 짙어 보였다.
마치 월남전에서 희생한 군인들의 투철한 정신이 담겨있듯이 감나무의 품은 깊고 푸르다. 할아버지의 훈장처럼 빛나던 감꽃도 나를 지켜주고 있는 것 같다.
감나무 그늘에 앉아 내가 힘들 때마다 쉼터처럼 기꺼이 그늘이 되어주셨던 할아버지를 그려본다.
▪ 가작 이은우 (무산중 2/1)
그늘
우리는 흔히 뛰어난 사람을 보고 ‘후광이 비친 다’ 라고 한다. 하지만 그 어떤 빛도 혼자서는 빛이 될 수 없다. 그늘과 같이 있을 때, 그것은 빛이라고 말한다. 그늘은 빛의 또 다른 이름이다. 과연 우리가 뛰어나다고 칭송하는 이순신 장군께서는 어떤 그늘이었을까.
이순신 장군. 조선 최고의 장수이자 백성들의 영웅이다. 그는 나가는 전투마다 승리의 외침만 남았고 적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임진왜란은 그를 영웅으로 만든 전쟁이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들의 시선에서 보았을 때다. 과연 이순신 장군에게 임진왜란이란 어떤 의미였을까?
덕수 이씨와 초계 변씨 집안에서 셋째로 태어난 이순신, 이순신의 아버지는 덕수 이씨 집안으로 뼈대 있는 가문이다. 고려 때부터 시작 되었다고, 조선 시대에 들어오면서 많은 관리들을 배출하였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의 할아버지 때에 좋지 않은 일에 연루되어 관직으로 가는 길이 막히었고, 아버지 때에는 상황이 더 안 좋아 졌다. 이순신의 어머니는 초계 변씨 집안으로 이 또한 아버지 가문처럼 뼈대 있는 가문이다.
한양의 건천동, 그 시절 누구도 몰랐지만 먼 훗날 나라를 지킬 뛰어난 장수가 이곳에서 태어났다. 그는 위로는 2명의 형과 아래로는 1명의 동생을 가졌다. 큰형은 희신, 둘째 형은 요신, 동생은 우신이었다. 그는 동네에서 장난기 가득한 개구쟁이였으며 최고의 전사였다. 아이들과의 병정놀이에서 이순신은 항상 이겼으며 아무도 그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는 어릴 적 활기차고 힘이 세었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영웅이었다.
이순신 장군의 아내는 상주 방 씨로 아주 영민하고 민첩하였다. 그에게는 하나의 일화가 있다. 화적들이 집을 공격하여 아버지가 화살을 쏘며 한창 싸울 때쯤 화살이 다 떨어졌다. 그 때 그는 대나무를 들고 와 바닥에 떨어뜨리며 “여기 화살이 많아 요” 하고 외쳤는데 그 소리를 들은 화적들은 겁을 먹고 달아났다. 이 일화만 보더라도 이순신 장군의 아내는 참으로 영민하다. 그는 항상 자신의 남편을 뒤에서 밀어주고 힘을 실어주면서 내조와 외조를 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그들을 사랑하였고, 그들 또한 이순신 장군을 사랑하였다. 과연 이순신 장군에게 임진왜란이란 어떤 의미였을까. 자신의 나라를 지켜야하는 무거운 짐이고 의무였을 것이다. 아무리 그가 뛰어나다고 하지만 혼자서 일본군을 상대하기는 힘들고 지쳤을 것이다. 그리고 외로웠을 것이다. 우리는 이순신 장군을 위대하고 뛰어난 영웅으로 생각하지만, 그도 혼자 바다에서 일본군을 상대하며 가족을 생각하는 한 사람이었다. 김훈의 칼의 노래에 이런 말이 나온다. ‘보편적 죽음이 개별적 죽음을 설명하거나 위로하지는 못한다.’ 이 말의 의미는 군사들이 전쟁에 참전 할 때는 군대로 오지만, 죽을 때는 누군가의 아들, 누군가의 남편으로 죽는다. 이순신도 이와 같다. 우리는 그를 영웅으로 생각하지만 그 또한 가족을 사랑하는 평범한 사람이다. 나는 이순신을 영웅으로 생각하는 것도 좋지만, 이순신을 한 인간으로, 가족을 사랑하는 하나의 가장으로 삶을 마감하신 분으로 기억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된다. 그 또한 바다 위 홀로 외롭게 서서 죽은 한명의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그늘은 가족이다. 가족은 전쟁에서 벗어나는 휴식처이자 피난처였다. 그는 그늘에 있고 싶고, 그늘을 사랑하였지만 시대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그도 슬픈 인생을 살다간 비극적 영웅이다.
▪ 가작 김진주 (포항 포항여중 3/8)
그늘
환함만이 좋은 것은 아니다. 현대엔 밝은 것, 오직 1등, 잘하는 것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늘도 그늘대로 좋다. 삶에 지치고 힘든 우리에게 쉼터가 되어 준다. 어둡고 칙칙한 의미의 그늘이 아니라 쉼 없이 앞만 보고 달리는 우리에게 여유를 갖고 잠깐 쉬어가라며 조건 없이 자리를 내어주는 좋은 친구다.
그늘은 더운 날 땀을 식혀주는 모자도 되어주고 애써 만든 눈사람과 조금이라도 오래 만나도록 도와준다. 햇볕 쨍쨍한 날은 쨍쨍한 대로 좋고 비가 오는 날은 그 나름에 운치가 있듯이 밝은 것은 밝은 되로 어두운 것은 어두운대로 그냥 좋은 것이다.
그늘도 밝음 뒤에 있어서 눈에 띄진 않지만 그 나름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난 그늘의 의미를 아빠 엄마처럼 눈에 띄진 않지만 우리를 늘 바라보고 위해주는 든든한 부모님 같다고 생각한다.
▪ 가작 박하빈 (근화여중 2/6)
그늘
어떤 힘든 일을 하고 쉬는 시간에는, 나무 그늘 밑에 앉아 그동안 흘린 땀방울들을 말리며, 날 기다리는 사람을 위해, 오늘도 나무그늘과 함께하는 조금의 휴식, 무더운 여름에는 더욱 반갑기도 하다. 바람이 지나갈 땐 나무그늘도 사락사락 춤을 춘다. 나무 그늘이던, 건물 그늘이던 상관없다. 그늘은 땀으로 적셔진 내 몸을 식혀주는 것이다. 한 사람 두 사람 한 그루 두 그루 일을 하고 쉬는 시간이 오면 주변에 있는 그늘은 가득 차 있고 길거리에는 온통 바쁜 직장인이 걸어 다닌다. 좀처럼 요즘에는 볼 수 없는 것이겠지만 나무그늘엔 시원한 바람이 부는 것을 요즘사람들은 모른다. 건물 안에는 에어컨이 틀어져서 사람들은 기계에 의지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사람들에게 그늘아래의 시원함을 깨닫게 해주고 싶다.
나무그늘, 건물그늘 원랜 그림자지만 어떠한 사람들에겐 보잘 것 없는 것, 또 어떤 사람들에겐 아주 좋은 쉼터가 될 수 있는 그늘. 자연이 만들어낸 에어컨과 이다. 나무그늘 아래엔 잠시 날다가도 지쳐서 쉬고 가는 새와 곤충 그리고 자식들을 위해 일을 하시는 부모님들이 쉬고 가는 공간. 어쩌면 나에게도 나무그늘이 나만의 쉼터가 될 수 있을 날이 올까.
▪ 장려상 정서린 (서라벌여중 1/3)
그늘
월요일 6교시 체육시간, 40분 동안 운동장을 뛰어다니다보면 마침종과 함께 모두 그늘로 쏜살같이 달려간다. 작은 바위에 앉아 서로 물을 나눠 먹는 5분은 마치 천국에 온 기분이다. 겨울엔 그 존재조차 잊고 지내다가 볕이 뜨거워지는 봄가을이나 여름 날 체육시간에는 인기 만점인 그늘, 한 번 앉으면 일어나기 싫게 만드는 마력이 있는 듯하다.
문득 임진왜란 때 일어난 의병이 그늘 같은 존재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평소엔 고마움도 모르고 티도 나지 않지만 되돌아보면 그 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는 것이 아닐까.
임금도 피난을 가고 없는 나라를 지키겠다고 용감하게 일어선, 이름 없는 의병들에게 새삼 감사함을 느낀다. 한 분 한 분 의롭게 일어선 그 의병들의 이름마저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것도 안타깝다. 우거진 숲의 그늘처럼 안락한 대한민국을 만들어주신, 이름 없는 의병들을 기억하는 6월을 보내야겠다.
▪ 장려상 이윤주 (칠곡 신동중 3/1)
그늘
“엄마”
생글생글 웃으며 엄마품속으로 달려가는 나, 그때 엄마의 품속은 나의 그늘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그늘은 엄마의 품속이 아닌 아빠 품속의 그늘이었다.
시계바늘처럼 멈추지 않는 시간, 벌써 5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러갔다. 하지만 난 오랜 시간 동안 엄마의 품속을 잊은 채 지내왔다. 엄마의 그늘은 따뜻하고, 새들과 나무가 속삭이듯이 노래했다. 반면에 아빠의 그늘은 돌처럼 딱딱했다. 백년이라는 세월 속, 나무에게 기대어보고, 물어보았다. 그 나무는 자연스럽게 나에게 다가와 그늘이 되어주고, 바람도 같이 나의 눈물에 담긴 그리움을 가지고 점점 멀어져 갔다. 덕분에 난 마음이 조금 더 가벼워 졌다. ‘아빠도 과연 나처럼 엄마의 품속이 그리울까?’ 라는 생각도 가끔 들지만 묻기가 어려웠다. 혹시나 아빠의 서글픔이 묻어날까봐... 또한 우뚝 선 오뚝이처럼 금방 흔들려 질까봐.
“아빠, 있잖아... ... 아니야.”
라며 항상 말을 끝낸다. 나도 엄마의 그늘 앞에서 해를 바라는 해바라기처럼 바라본다. 나무 그늘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우리 엄마의 모습을 상상한다.
“엄마랑 싸웠어! 짜증나.”
학교에서 자주 듣는 이야기 중 하나이다. 한편으로는 그 친구의 마음을 이해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하다. 그 평범한 다툼이 나에게는 행복한 마음과 메아리이다.
내가 점점 성장하듯이 6월의 나뭇잎들이 나를 향한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다. 이처럼 엄마도 나를 향한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그늘 속 에서 엄마의 숨결을 느끼고 싶다.
항상 햇빛 곁 에 그늘이 있듯이 엄마의 생각은 나를 향해 있을 것이다.
▪ 장려상 이나경 (경주여중 2/2)
그늘
우리 주변에는 많은 그늘이 존재하고 있다. 예를 들면 단순하고 우리가 쉽게 접하는 자연의 그늘, 내 또래 친구들이 공감할 수 있는 청소년들의 학업그늘, 그리고 한국인으로서 꼭 알아야하고 다시는 반복해서는 안 될 역사적 그늘 등이 있다. 난 한국의 역사에 관심이 많은 대한민국의 한 학생으로 지금부터는 역사적 그늘과 함께 ‘그늘’이라는 주제를 해석하려고 한다.
먼저, 요즘 내가 관심 있게 보고 있는 역사적 그늘은 군함도이다. 얼마 전 이 군함도 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서 난 정말 황당했다. 난 어찌하여 조선인들이 강제 징용된 그곳을 유네스코에 등재할 수 있단 말인가. 왜 일본과 유네스코는 이면을 보지 않는 것일까. 난 정말 화가 나고 그것을 무덤덤히 받아들이는 일본을 보고 또 한 번 더 분노했다. 여기서 잠깐 이르자면, 나의 장래희망은 국제법관이다. 그 이유는 바로 이런 역사의 왜곡 때문이다. 우리는 한국인이다. 우리가 우리의 역사적 그늘을 외면하고 모른 체하면 누가 우리의 역사를 존중하겠냐는 말이다. 현재 독도의 영토분쟁도 그렇다. 이런 역사적 그늘이 외면당할 때마다 내 꿈은 더욱 확실해진다. 나는 꼭 국제 법관이 되어서 우리의 역사적 그늘을 하나, 둘씩 해결할 것이다. 언젠가는 역사적 그늘이 해결 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언젠가가 기약이 없다면, 내가 앞장서서 꼭 우리의 역사를 되찾을 것이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살면서 마주하게 되는 그늘은 많다. 하지만 그 그늘은 언젠가 없어질 것이다. 태양이 움직이면 그늘이 없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난 꼭 그 어두운 그늘에 갇혀 살지 않고 그늘이 없어지도록 태양을 움직이는, 그런 존재가 되고 싶다.
▪ 장려상 전형도 (경주중 3/2)
그늘
우리는 흔히 그늘을 휴식처의 의미로 사용한다. 예전에 내가 아버지와 운동을 할 때 그늘을 발견하고 쉬어가기도 하였다. 쉬는 동안 한일전 축구 경기를 보고 있었다. 먼저 일본에게 선제골을 허용하였다. 그렇게 패배 위기에 있었으나 우리나라 선수가 골을 넣어 1대1 동점이 되었다. 점점 열기가 타 올라서인지 더워지고 있었다. 그 후에 일본의 공격이 계속되었으나 다행 이 겨우겨우 막아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일본은 무리한 반칙으로 한 명이 퇴장 당했다. 이윽고 우리나라 선수가 골을 넣어 2대1이 되었다. 너무 흥분 되서 열기 때문인지 너무 더워졌다. 그 후에 흥분을 가라 앉혔는데도 불구하고 더워서 앞을 보니 우리를 덮고 있던 그늘이 반대쪽으로 넘어 가고 태양과 마주하고 있었다. 그제 서야 내가 더웠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 일을 통해 나는 그늘이 항상 그늘이 아니라 그늘 뒤에는 밝은 태양이 떠오른다는 것을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흔히 일제강점기를 우리 민족의 암흑기, 그늘이라고 한다. 일본에게 1905년에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겼다. 이어서 1910년, 한일병합조약으로 우리나라의 국권을 완전히 빼앗기게 되었다. 그때부터 우리는 일본의 그늘 아래 인권마저 탄압 받았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으로 일본의 기세가 꺾였었다. 점점 그늘을 벗기고 태양이 다가가고 있었다. 그 후 일본은 우리 말,우리 이름의 사용마저 금지하며 우리를 지배하기 위해 무리한 시도를 하였지만 우리 국민의 저항과 일본의 태평양 전쟁 패배로 우리나라는 태양과 마주 할 수 있었다.
영원한 그늘은 없다. 그늘이 휴식의 공간이든 어두컴컴한 공간이든 그늘 뒤에는 밝은 태양이 우리를 비춘다.
▪ 장려상 임수정 (화랑중 3/5)
그늘
뜨거운 태양의 입김은 그칠 줄 모르고 무작정 남쪽으로 길을 잡았다. 창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얼굴을 맡기고 푸른 햇살은 무척이나 반짝이며 길 위를 비추고 있다. 거가대교를 지나 도착한 곳은 바로 통영이었다. 중앙시장에 둘러 간단히 요기를 하고 강구 안에 정박해 있는 거북선에 몸을 실었다. 무척이나 견고하고 과학적인 설계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임진왜란 때 병사가 된 듯 노를 힘차게 잡아보았다. 무수한 이름 모를 병사와 민초들이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하나로 목숨을 다해 저었을 노를 보니 괜한 마음 한 곳에서 뜨거움이 가시기 전에 다시 발길을 옮겨 이순신공원에 도착했다. 뜨뜻한 땀방울이 흘러내려 올라간 언덕위로 검푸른 바다가 보이는, 저 끝에 전쟁 당시 천하를 호령하듯 우리의 바다를 바라보며 장군님께서 우뚝 서 계셨다. 그리고 바로 눈에 들어온 글귀가 보였다. ‘필생즉사 필사즉생’ 죽고자 하면 반듯이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반듯이 죽을 것이다. 장군님 동상 아래 잠시 눈을 감고 쉬어본다. 뜨거운 햇볕을 가려주는 시원한 이 그늘은 우리 선조들의 피와 넋으로 지금 우리가 누리는 것임을 다시금 깨달으며 장군의 시선이 닿는 곳에 내 시선을 함께 던져 보았다. 맑고 푸른 우리의 바다가 반짝이며 미소 짓는다.
고등부 산문
▪ 장원 장채은 (선덕여고 2/5)
길
작년 이맘 때 였을 거야. 낮에는 여름답게 무더운 날씨에 입이 바짝바짝 마르고 또 밤에는 차가운 공기가 내 뺨을 스치며 지나가곤 했지. 그 날에 난 그날의 날씨처럼 많이도 울고 울었지.
“너, 지금이 몇 시야!”
또 시작. 엄마의 고함소리가 어김없이 들려오고 난 두 귀를 있는 힘껏 틀어막았다.
“요새 왜이래. 자꾸 이럴 거야? 너 이제 중학생 아냐. 정신 차려.”
고등학생이 되고 첫 시험을 치룬 후, 절망 아닌 절망에 빠진 난 뒤늦게 반항기로 접어들었다. 중학교 시절, 어떤 시험이던 곧 잘 해내었던 나 인터라 엄마의 기대는 하늘을 치솟았고 그 부푼 기대는 첫 시험이라는 벽에 부딪쳐 좌절하였다.
“제발, 제발 나 좀 가만히 둬.”
고등학교는 내게 너무나도 멀게 느껴졌고, 부담감에 못이긴 난 날개 다친 새 마냥 땅으로 곤두박질 쳤다. 그 날도 난 독서실을 뒤로하고 밤늦도록 밖을 다니다 거리가 캄캄 해 지고서야 집에 돌아왔다. 아니나 다를까. 엄마는 눈에 시퍼런 독기를 뿜어내며 날 기다렸고 구속당한다는 답답함에 엄마의 두 눈을 처다 보며 말했다. 처음이었다. 엄마에게 그리도 큰소리를 낸 것은. 놀람과 동시에 찾아온 당혹감에 내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랐고 목 끝부터 정수리까지 뜨거워짐을 느낀 나는 그대로 집을 뛰쳐나왔다. 무작정 걸었다. 익숙한 길이 보였다. ‘가로수 길’ 집 앞을 환히 비추어주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 보였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은은한 달빛아래 끝없이 펼쳐진 그 길은 나를 보듬어 주듯이 더 환하게 더 눈부시게 빛났다. 빨간색 흰색 노란색, 색색갈의 보도블록을 밟으며, 여름바람 살랑살랑 불어오는 그 곳에서, 아무도 없이 오로지 나만을 위한 그 길에서 한참을 걸었다.
“여기 있을 줄 알았어.”
익숙한 목소리에 뒤를 돌았다.
“걱정했잖아 딸.”
엄마다.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을 매달고 얼굴은 나 못지않게 시 뻘게진 엄마였다.
“어떻게 알았어?”생각지도 못한 퉁명스러운 말투에 나조차 놀라버렸고 또 싸우겠다. 싶은 마음에 두둔을 질끈 감았다.
“여기 오랜만이네. 예전엔 자주 왔었는데. 그치?”엄마의 목소린 여전히 나긋했고 조심스레 떠본 두 눈엔 작은 미소를 머금은 엄마가 보였다.
“여전히 예쁘구나. 우린 이렇게 나 달라졌는데 이 길은 여전히 예뻐.”
“엄마 나 있잖아...”
“알아, 미안해 내가. 너 마음을 미처 생각 못했어. 네가 더 힘 들 텐데.”
그 때 알았다. 엄마가 건네는 미안하다는 말이 그렇게 슬픈지. 눈을 감은 채 달을 향한 얼굴로 내게 연신 미안하다는 엄말 보는 것이 그렇게 슬프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난 우리 딸이 나중에 더 커서 고생 안하고 지금처럼 밝게 웃으며 살았으면 좋겠어. 엄마가 바라는 건 그것 뿐 이야. 욕심 부려서 미안해 딸.”
그냥 투정부리고 싶었다. 엄마가 나에게 원하는 길이 내겐 너무 가혹하고 고된 길이었다고, 그저 내가 가는 길을 믿고 맡겨두면 안되냐고 말하고 싶었다. 내심 엄마가 먼저 손 내밀어 주기를 바란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서로에게 원했던 길이 너무나 컸고 그 커다란 길에 가려진 서로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아무도 없는 길에서 많이 울었지만 그 길엔 엄마가 있었다. 말없이 묵묵히 같이 걸으며 위로해주는 엄마가 있었다. 차오르는 달빛을 맞으며 끝없이 펼쳐진 그 길을 아직도 난 걸어간다. 누구보다 든든한 영원한 나의 친구 엄마와 함께.
▪ 우수상 박민규 (경주고 1/8)
길
어느 주말 친구들과 함께 시내에서 모여 길거리를 돌아다녔다. 영화도 보고 맛있는 것들도 싸먹으며 오전에서 오후까지 꼬박 반나절을 길에서 보냈다. 이처럼, 길은 우리가 쉴 수 있게 하는 장소이고, 다른 곳으로 이어 주는 통로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런 길은 누가 만들어 주었을까? 길은 아주 오래 전부터 만들어지고 있었다. 옛 선조들이 걸어 다니고 수레나 가마를 타고 끌고 다니며 다져지고 또 평탄해져서, 그렇게 여러 방법으로 닦고 또 닦여져 우리가 지금 걸어 다니는 이 길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한 그런 길을 지키기 위한 수많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조상님들의 수고가 있었을 것이다. 옛날부터 우리 민족은 수많은 외세의 침략과 분란을 겪어왔고, 전부 우리 자신의 힘으로 극복해왔다. 일제의 강점, 6.25 전쟁, 수. 명. 몽골의 침략, 임진왜란까지 우리 민족은 피땀을 흘려가며 이겨내 온 것이다. 그 중에서 임진왜란은 가장 외세의 도움을 받지 않고 당시의 일본과 사워 이겨낸, 자랑스러운 우리 역사 중 한 내용이다. 일본을 통일하고, 대륙을 향해 침략의 야욕을 불태우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막아내고 우리의 민족과 땅을 지켜낸 충신과 애국자들, 당시의 열악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버텨낸 우리 민족의 혼이 정말로 존경스럽다. 그들은 우리 민족이 앞을 나아갈 길을 열기 위해 한 몸을 희생하신 것이다. 바닷길을 지키신 충무공 이순신, 왜군 장군과 함께 물에 뛰어든 논개, 행주산성에서 백성들과 함께 왜에 맞서 싸운 권율, 그들이 지키고 닦아온 길을 우리가 밟고 살아가는 것이다. 정말이지 멋지고 감사할만한 이야기가 아닌가? 그렇다면 우린 그들이 지켜온 우리 민족의 길을 더욱더 닦아내어 우리의 후손들도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게 해야 하지 않을까?
▪ 우수상 신채연 (서울 잠실여고 3/7)
길
푸르스름한 측백나무 잎이 밤하늘에 팔을 뻗고 있다. 뜰채 같은 이파리 사이에 손톱만 한 상현달이 걸려 있다. 아버지는 허름한 가방을 짊어지고 산길을 오르고 있다. 말라빠진 지팡이가 푹푹 박힌다. 나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손전등을 고처 쥔다. 어젯밤 한바탕 멧돼지가 나타나, 겨우 일궈낸 곡식들을 망처 놓았다. 아버지는 멧돼지 발자국을 찾아 흙바닥을 살핀다. 축축한 흙 위에 멧돼지 발자국이 움푹 패어 있다. 아버지는 들고 있던 삽으로 구덩이를 파낸다. 발목이 빠질 만큼 구덩이를 파내자, 비릿한 흙냄새가 코끝에 엉긴다.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메아리치듯 울려 퍼진다. 아버지는 구덩이에다 손때 탄 새끼줄을 설치한다. 말려 올라간 윗도리 아래로 살이 축 늘어진 아버지의 등짝이 보인다.
아버지는 마을의 유일한 함정사냥꾼이다. 멧돼지나 노루가 나타나면 산에 올라 구덩이를 팠다. 나는 숨을 고르는 아버지 옆에 쪼그려 앉는다. 아버지에게서 풀내음 섞인 알코올 냄새가 난다. 니는 꼭 서울로 올라가가 하고 싶은 거해라. 아버지는 퍼석한 입술을 핥으며 웅얼거린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도 없어서 미안타. 아버지는 고개를 푹 숙인다. 귀뚜라미는 더 섧게 울어댄다. 가슴께에 파도가 치는 것처럼 일렁인다.
나는 아버지의 굽은 등만 보며 산을 내려간다. 오늘 따라 아버지의 등이 유난히도 좁아 보인다. 울퉁불퉁한 자갈이 발바닥 아래에서 갈린다. 아버지는 지팡이를 꽉 쥐고 천천히 내리막을 내려간다. 나는 고개를 들고 새카만 밤하늘을 바라본다. 밤하늘에 가을밤의 길잡이별, 페가수스자리가 반짝인다. 한평생 캄캄한 길을 밝히던 아버지처럼 나는 길을 잃지 않도록 손전등으로 아버지의 등을 비춘다. 가을 밤 하늘이 밝게 빛나는 길잡이별에 녹녹히 젖어든다.
▪ 가작 강가은 (선덕여고 1/1)
길
그 길에 쓰레기 버리지 말아 라 네가 걷는 그 길이 우리 선조들 흙먼지 뒤집어쓰고 피땀 흘려 지켜낸 그 길이다.
사랑하는 가족을 뒤로 두고 차마 돌아보지 못한 채 묵묵히 걸었던 그 길이다. 내 나라 위해 내 한 몸 희생하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아하던 당신의 선조들이 목숨 걸고 지켜냈던 그 길이다.
그런 길에 쓰레기 버리지 말아 라.
너는 마음의 길도 잘 관리해야 한다.
선조들의 우리나라 지켜내던 그 굳건한 의지와 충성 가득한 그들 마음의 길을 따라야 한다. 마음의 길은 갈림길도 많고 골목길도 많다. 우리는 샛길로 빠지기 십상이다. 그럴 때에 선조들이 꿋꿋이 보고 걷던 마음의 길을 떠올려야 한다.
아름다운 강산, 계절계절 돌아 오르는 생명들을 지켜내던 선조들의 올곧던 마음의 길, 우리는 그 모습을 닮아야 한다. 잊을 새 없이 끊임없이 떠올리고 되새기며 올바른 길을 걸어야 한다.
또한, 너는 마음의 길에도 쓰레기를 버리지 말아 라. 그들 본받아 걷는 길인데 흠집 내면 안 된다.
우리는 선조들이 지켜냈던 길도, 선조들 충성 가득 찬 마음의 길도 눈 감고 고개 숙여 감사함과 존경을 표해야 한다. 그들 영혼 숨 쉬는 길 위에 우리는 서 있고, 우린 그들의 찬란하게 빛나는 눈부신 희생을 가슴 깊이 기리며 이 길을 우리가 지켜나가야 한다.
▪ 가작 김중권 (경주고 2/1)
길
길, 세상엔 수많은 종류의 길이 있다. 우리가 흔히 아는 등산로, 도로, 산책로 같은 이런 종류의 길도 있지만, 길을 걷는 자가 어떤 의미를 부여 하느냐에 따라 학교 가는 길이 될 수도 있고 병문안 가는 길이 될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이 세상엔 최소한, 인간관계의 수만큼의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길이 생긴다. 그중에서 의사의 길, 혹은 국가를 지키려 가는 길에 대해 이야기 해 보려한다.
사실 이 길은 목적지가 보이지 않는 아주아주 길고, 또 아주아주 힘든, 조금 특이한 길이다. 그런 길을 건너가겠다고 마음먹은 분들을 우린 아주 잘 알고 있다. 독립운동가 부터해서 6.25 참전용사들, 그리고 임란의사 분들까지... ... 하지만 우린 그분들의 업적에만 집중하지 그분들의 마음가짐, 두려움 같은 것들은 잘 알지 못한다. 그분들이 국가를 지키기 위해 사랑하는 가족, 친구를 지키기 위해 걸어갔을 그 길. 그 길을 걸어가며 어떤 생각이 어떤 걱정이, 어떤 두려움이 들었을지 지금의 우리들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모두가 한가지의 목표를 품고 길을 나서지만 그중 누군가는 도중에 쓰러져 뒷사람의 몸통을 밟고 지나 또 다른 뒷사람을 위한 길이 된다. 자신이 그 길이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어제까지 함께 웃고 떠들던 동료를 밟고 지나가야 한다는 그 슬픔의 길을 과연 지금의 우리는 건널 수 있는 지, 과연 나는 건널 수 있는지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지금의 우리들은 그 위대하신 분들의 정신을 열심히 보고 듣고는 있다. 하지만 감히 말하는데 그 누구도 배우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세월이 지나면서 그 정신은 깎이고 깎여 이제는 껍데기 밖에 남지 않았고 그분들을 기리기 위한 제사는 이젠 지루하고 다리 아픈 행사 정도로 밖에 인식되지 않는다. 이런 자들을 볼 때 마다 난 말해주고 싶다. 당신이 그분들 보다 나은 게 있냐고. 그분들 면전에서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냐고. 난 도저히 그럴 수 없다. 그분들을 본다면 감사합니다. 하며 큰절을 해 드리고 싶다.
그렇기에 난 당당히 말할 수 있다. 만약 국가에 위기가 닥친다면 설사 내가 뒷사람을 위한 길이 될지라도 나를 밟고 앞으로 나아갈 그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길이 되겠다 라고.
▪ 가작 이시영 (경주여고 2/4)
길
짧다면 짧기만 한 인생을 살아오면서 내가 느낀 건 세상이 움직이고 발전하는 그 장엄한 규모와 힘에 비해 인간에게 주어진 삶의 초시계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세상을 경험할수록, 몸소 더 깊숙이 느껴볼수록 더욱더 그 아름다움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각자 독특한 색을 가진 개개인의 소중한 인권체가 모여 이루어진 사회 속에서 태어나 생활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른다. 물론 삶을 살아오면서 때로는 너무 독특한 누군가의 개성 넘치는 색, 혹은 나의 독특한 색 때문에 함께 이루어가는 세상에서 무력감과 외로움을 느낄 때도 많았다. 사회라는 거대한 도화지 속에서 각자의 색깔을 빛내는 것은 때론 아름답지만 때론 조화롭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름답지만 늘 상 아름답지만은 않은 이런 역설적인 사회를 살아가면서 인생이라는 길은 늘 순탄치만은 않다는 것을 매 순간 느꼈다. 우리는 이런 삶 속에서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어느 누구도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짜여 진 스스로만의 ‘인생 시간표’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삶은 늘 고민과 반복적인 실수를 겸한 선택의 연속이다.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살아가며 겪는, 아니 겪을 수밖에 없는 실수의 순간은 견디기 힘든 순간일 것이다. 그런 누군가는 나에게 “인생이 내가 하고 싶은 대로만, 살고 싶은 대로만 살 수 있는 것이었으면 좋겠어”라고 농담 아닌 농담을 하기도 했다. 우리가 살아갈 시간, 이 넓은 세상의 나이와 대비했을 때 사회 속에 살아가는 작은 새싹의 뿌리조차 안 되는 시간을 살아가는 인간의 처지를 생각할 때 잘 짜여 진 탄탄대로의 인생을 걷는다는 것이 결코 이상하게 여길 발상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한 치의 틈도 용납하지 않는 깔끔한 포장길을 원치 않는다. 나에게 있어서 인생은 얼마 안 되는 삶을 살아가면서 느낄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다. 대부분 추구하는 오차 한 점 없는 삶보다는 때론 삐뚤한 계산으로 오차를 보이며 살아가는 게 더 의미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 오차는 경험적인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해주고 세상을 살아간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느끼게 해줄 것이다. 실수를 하지 않고 완벽하기만한 사람은 없다. 경험해보지 않은 것을 마치 전지전능한 시점에서 바라보고 싶어 하는 것은 욕심에 불과할 뿐이다. 연장자가 젊은이보다 좀 더 성숙하고 노련하다는 점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들이 살아온 삶의 길 또한 구부정하고 때로는 구덩이 속에 발이 빠져 크게 넘어지기도 했지만 그런 삶의 순간들이 지금의 그들을 만들어준 것이다. 나는 믿는다. 잘 다듬어진 탄탄대로보다는 인생의 굴곡을 느낄 수 있는 비탈길로 향하겠다. 종착점가지 단 한 번의 빈틈도 내어주지 않는 지름길보다 그 옆에서 빙 둘러가며 삶의 순간들을 몸소 경험하겠다. 세상과 소통하며 나만의 길을 만들어가겠다.
▪ 가작 임지윤 (선덕여고 1/5)
길
아버지가 떠났다. 봄이면 민들레 홀씨 날리고 여름이면 개구리가 노래하고 가을이면 나락이 내게 인사하고 겨울이면 소담스레 눈이 쌓이는 그 길 위를 아버지는 걸어갔다. 언제나 나를 지켜줄 것 같던 아버지의 그 넓은 등이 나를 뒤로한 채 자꾸만 작아져갔다.
아버지가 꽃이라는 아름다움에 사로잡혀 잠시 멈추어 주면 좋으련만 뭐가 그리 바쁜지 한 번도 뒤돌지 않았다. 아버지의 소매 끝자락을 끝내 붙잡지 못해 나는 그리 아픈 길 위로 아버지를 걸어가게 했다. 아버지 가는 길 외로울세라 나는 힘겹게 따라갔다. 아버지를 아프게 하는 그 모든 것들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이 길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그 끝에 닿으려 하면 술래잡기 하듯 나를 두고 도망가 버렸다.
어느 순간 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나 홀로 아픔들을 이겨내고 있었다. 나는 그제 서야 알았다. 아버지는 뒤 따라 오는 나를 알고 있었다. 내가 다치는 것이 싫었던 아버지는 내게 날아오는 화살들을 힘겹게 막아냈다. 가슴이 아파왔다. 새하얀 저고리 위로 베어 나오던 피의 의미를 깨달았다. 어떤 길인지도 모른 채 그저 아버지 뒤만 졸졸 따라오던 나를 아버지는 어떤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었을까. 나는 길 위에서 어른이 되어갔다. 좀 더 성숙하고 좀 더 강인한 어른으로.
끝이 보이지 않던 길의 종착점에서 나는 내게 팔을 벌리며 웃고 있는 아버지를 힘껏 껴안았다. 어린 아이였던 나와 산처럼 큰 아버지는 마침내 성숙한 어른이 된 나와 여전히 큰 아버지로 만났다.
▪ 가작 손 윤 (선덕여고 1/5)
길
나는 지금 녹음이 하늘을 덮고 있는 평화로운 숲길 위에 누워있습니다. 바로 옆을 보니 박무의공비가 덩그러니 있습니다. 그 비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내 의식은 어느새 아련히 들려오는 함성소리를 따라 400여 년 전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합니다.
나는 지금 핏빛으로 물든 들판 길을 앞만 보고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습니다. 오직 이 땅을 지키겠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떠나온 길. 어머니가 그 투박한 손으로 내 손을 꼬옥 붙잡고 하염없이 눈물만 훔치며 쉽사리 손을 놓지 못하던 때가 엊그제만 같습니다.
내 비록 농사만 짓던 손으로 낯선 무기를 잡고 의병으로 나서지만 반드시 살아 돌아오리라 어머니께 약속을 하고 왔었습니다. 그런데 이 길의 끝은 아직도 보이지 않는 듯합니다.
우리는 농사만 짓던 몸들이라 특별히 군사훈련을 받은 적도 없어서 무기를 잘 다루지도 못하지만 유일한 장점이 고향지리에 능숙하다는 것 뿐 이었습니다.
엊그제 우리를 이끌던 장수마저도 장렬히 우리의 곁을 떠나갔습니다. 저 멀리 저승사자 같은 검은 왜구 떼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아 - 아 - 어머니... 어머니... ...
아마도 저는 이 길의 끝에서 세상에서 제일 깊은 잠에 빠져들 것 같습니다. 그래도 내 혼 만은 어머니의 품 같은 이 대지위에 영원히 남아야겠습니다. 이제 서야 이 길의 끝을 겨우 찾았건만 어머니께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아닌 것 같습니다. 반드시 살아 돌아오리라는 약속을 지켜드리지 못해 너무나 마음이 아파옵니다.
어머니 이 길 위에 풀 한포기 꽃 한 송이 나무 한그루를 볼 때마다 저를 마음속에 그려 주십시오... ... 오늘 나의 영혼은 이 길 위에 고이 잠들겠습니다.
▪ 장려상 하바름 (선덕여고 3/4)
길
길은 참 많다. 평소에 학교를 가고 집으로 오고 친구와 어울려 걸으면서도 길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었다. 언제나 당연한 듯 있는 것이었으니까. 이제야 생각하고 바라보니 길은 참 많다. 길을 따라 걷다보면 모르던 어떤 길과 만나기도 하고 새로운 길로 들어가기도 한다. 어떤 길이던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것 같아 새삼 길이 달리 느껴진다. 6월의 싱그러운 숲은 활기차게 생명의 기운을 북돋아 주고 있다. 하지만 6월의 숲은 그 푸르름으로 우리의 아픈 역사를 보면 오랫동안 외세의 침략을 많이 받았었다. 임진왜란이 그 대표적인 난이라 할 수 있다.
1592년 지금으로부터 434년 전에 일어났었다. 임진왜란을 떠올리면 제일 먼저 이순신장군이 생각난다. 이순신장군의 업적이야말로 존경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지만 임진왜란을 어떤 한사람의 힘으로 극복해낸 것은 아니다. 내가 사는 경주에서도 임란 때 나라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 있었다. 나라의 위기를 외면하지 않고 미약한 백성의 힘을 모아 지켜내고자 반월성 남천에 모여 문천회맹을 결의하였다고 한다. 12고을의 대표들이 모여 왜구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의병을 결성하였다. 우리나라가 6년이 넘는 시간동안의 긴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지역마다 몸 바쳐 싸워 준 의병들의 힘을 무시할 수 없다. 경주의 의병정신은 그 바탕이 아마도 신라의 화랑도의 기상을 이어받은 것 같다. 길은 많지만 처음부터 어느 곳에도 그냥 생겨나지는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어떤 곳을 다니고 다녀서 다져진 곳이 길이 된다. 우리나라가 그 많은 외세의 침략 속에서도 지금의 굳건한 나라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나라와 나를 따로 보지 않고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는 민족정신에서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경주의 의병활동의 시작으로 전국 곳곳에 의병이 일어났고 의병들이야 말로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낸 사람들이다. 그 이후의 독립운동으로 맥이 이어져서 그때에도 많은 의병들이 나라를 지켰다. 역사속의 의병이란 큰 힘이 없는 존재 같지만 그 시작이 길이 없던 곳에 새로운 길을 만들었고 지금까지 우리의 가슴에 이어지는 것 같다. 길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시간이 가면서 더 많은 길이 생기기도하고 변하기도 한다. 옛 조상으로부터 민족정신이란 길이 이어져오고 있고 지금의 우리는 그 길을 더 아름답고 경고하게 만들어 가야한다. 6월은 아픔이 많은 달이다. 그 시절 푸르른 잎 새처럼 찬란하던 청춘의 혈기를 나라에 바친 그들을 잊어선 안 된다. 또 우리가 이어가야 할 길은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며 내가 사는 이 나라가 있어 나의 꿈과 이상을 펼칠 수 있음에 감사하며 다음 세대에도 이 얼이 이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민족정신의 길을 단단히 다질 수 있도록...
▪ 장려상 윤정현 (경주여고 1/1)
길
한 굽이친 길을 걸으며 먼 곳을 바라는 사람이 있었다. 길은 울퉁불퉁하고 그 사람의 발은 상처입기 쉬운 맨발이라서 나는 그를 눈여겨 볼 수밖엔 도리가 없었다.
그 길이 우리를 위한 고난의 길임을 알았을 때는 내가 너무 철이 들어버렸을 때였다.
발 언저리에 발목 복사뼈 부근에 풀잎이 부석여 물이 든다. 예전, 한 몇 백여 년 전 즈음에 이 풀물이 참 시뻘건 색이었을 것이다. 딱 요맘때쯤, 이 곳 사람들은 성긴 비명을 질러가며 스러져 갔겠지. 칼과 창이 그렇게 무섭다. 그 무서운 것을 몰아내고자 그 사람은 그리도 험한 길을 맨발로 걷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람이 도대체 누구냐, 하시면 아마도 나는 ‘모른다’ 할 것이다. 이름도 없이 역사 속으로 꼬꾸라져 들어간, 우리 모두의 조상들. 그것이 우리가 그 사람을 부를 수 있는 명칭이겠지. 아틀라스처럼 이 풀밭을 떠받치고 있을, 피 칠갑한 모습이 눈에 선연하다. 선선한 바람, 서녘 하늘의 우짓는 새의 울음소리, 아해들의 흥 넘치는 웃음소리, 그것이 그 사람이 피를 토하고 울음을 토하고 울분을 삭히면서도 지키고자 했던 것이었을 테고 지금도 그 사람의 뒤를 이어 누군가는 계속 걷고 있겠지.
그 길 위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그 사람이 지키고자 했던 것들을 잔뜩 누리며 길 아래로 고꾸라져 스러진 그이를 우리는 그럼에도 기억하지 못하고 아주 당연한 일인 듯 즐기고 있다. 그래선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참 외로운 이들이었다. 가족을 제대로 안아 본 적도 없이 아까운 그 목숨을 기꺼이 바친 그 사람에게 고작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눈을 감고 풀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 뿐, 그리고 발아래에 넓게 펼쳐진 풀내음이 아주 오래 전 피로 가득 찬 황무지였음을 기억하여, 그저 오래오래 그 길을 하염없이 바라 뿐.
▪ 장려상 엄광호 (신라공고 3/1)
길
길은 서로 다른 장소를 연결해주는 통로를 뜻하기도 하며 추상적인 의미로는 정신적인 수련 또는 수도의 여정이라는 뜻이 있다.
윤동주 선생님의 시 ‘길’에서는 단순히 보면 일제강점기의 현실에 번뇌하는 지식인의 심경을 표현한 작품이지만 이상세계를 바라는 인간의 심정을 담은 자아 성찰의 글로도 볼 수 있다.
또 김소월 선생님의 동명의 시 ‘길’에서는 일제강점기 시절 고향을 떠난 유랑인의 비애를 노래하고 날아다니는 까마귀와 기러기를 자신과 비유해 자신의 상황을 더욱 극대화시켰다.
위와 같이 사람마다 길이 뜻하는 바는 여러 가지가 있다. 내가 생각하는 ‘길’ 이란,
첫째로, 자유로움이라고 생각한다. 차가 막혔을 때나 공사 중일 때 다른 길로 우회해서 자유롭게 목적지로 향해 갈 수 있다.
둘째로, 길은 어떤 자격이나 신분으로서 주어진 도리나 임무라고 생각한다. 학생의 길, 학생으로서 그 본분과 도리에 맞는 일을 행하여야 한다.
셋째로, 길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개인의 삶이나 사회적, 역사적 발전이 전개되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나는 이제까지 우리 선조가 이뤄낸 값진 길 덕분에 이렇게 좋은 환경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
마지막으로, 길은 사람이 삶을 살아가거나 사회가 발전해 가는 데에 지향하는 방향, 지침,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배움의 길을 걸어왔고 앞으로도 그 길을 계속해서 나아가 조국을 위한 훌륭한 일꾼이 되도록 힘써 노력해야겠다.
여기까지가 내가 생각한 ‘길’에 대한 생각이다.
▪ 장려상 이충기 (창원 진해고 2/2)
길
손으로 셀 수 없을 만큼 무수한 시간이 흘러갔다. 숨 쉬고 있는 동안 주어진 인생 속에서 우여곡절한 일들을 겪고 추후 한 줌의 재가 되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갈을 건너 멀리 떠나간 사람들의 혼이 쉽게 접할 수 있는 길목에서 차츰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내가 지금 가야할 길은 아직 정확한 정착지를 알 수 없다. 나라를 위한다면 무엇이던 바칠 수 있다는 그들의 확고한 신념이자 정확히 가늠할 수 있는 방향처럼 가깝지만, 멀게 만 느껴지는 나 자신만의 미래를 위해서
‘나는 지금 어디로 가야 하는가?’
‘ 나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에 대해 진지하게 검토해 본 적이 사실로 없었기 때문이다.
요즘 현대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의 ‘길’은 희귀적 존재보다는 쉽게 접해 들어갈 수 있는 곳, 즉 가려고 하는 곳으로 찾아가기 위해 짚고 넘겨야 할 특정한 존재로 인식되어가고 있다. 어느 곳으로 가기 위한 하나의 공간을 뜻하는 길의 사전적 의미처럼 우리들은 자기 자신에게 각각 주어진 어떤 하나의 도착 지점을 두고 그 곳을 향하여 자기도 모르게 몇 걸음씩 건너가고 있을 것이다.
단지 그 곳이 어디인지에 대해서 정확히 가늠할 수 없을 뿐, 하지만 저만치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하여 힘찬 발걸음을 내던지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 장려상 김미희 (진해세화여고 2/7)
길
사람들은 제각기 가고자 하는 길이 다르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였다. 길이라 고 하면 평범한 인도나 차도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진로나 삶을 살면서 가고자 하는 길을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 중에 나는 내가 앞으로 살아가면서 내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쓰고자 한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나는 우연히 공부방을 다니게 되면서 풍물을 접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들었던 그 풍물 악기 소리는 나에게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그 이후로 나는 일주일에 두 시간밖에 들지 않은 풍물 시간을 손꼽아 간절히 기다릴 만큼 좋아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3년이 지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더 이상 풍물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중학교를 입학하고 나서는 더 큰 범위의 국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가야금과 해금 등 현악기를 배우고자 했지만 그마저도 현실에 부딪혀 시도조차도 해보지 못하고 마음을 접어야 했다. 하지만 그 뒤로도 좋아하는 마음만큼은 그만두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중학교3학년 때 경기민요 동영상을 보게 되었고 그때 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큰 감동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주변 분들이 소리는 제일 힘들다는 말씀과 충고에도 나는 결국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을 걷게 되었다.
절대 비교할 수는 없지만 임진왜란 때 의병들께서 나라를 지키시고자 했던 마음을 본받아서 나도 우리나라의 전통 음악을 지키는 한 사람으로서의 길을 가고 싶다.
대학,일반부 산문
▪ 장원 양지영 (부산시 해운대구 대천로)
충혼
가끔씩 부산 대연동에 있는 유엔공원묘지를 찾아간다. 장미가 꽃대를 세우고 묘지 전체에 향기를 풀어놓았다.
입구부터 숨이 턱 막힌다.
정문 앞에 서 있는 헌병의 얼굴은 비장함 마저 서려있다. 묘소 군데군데 장미는 능청스럽게 붉게 타올라 묘한 대비를 이룬다. 잘 정비된 공원길을 따라가다 보면 고국과 생명을 바꾼 젊은이들이 묻혀 있다는 걸 잊을 때가 있다.
안내 표지판에는 유엔 전몰 용사 2300위의 안식처라고 명시되어 있고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 고귀한 희생을 바친 분들을 위한 추모 공간이라고 여러 가지 주의를 일러놓은 문구도 보인다.
작년 12월, 아들은 육군 기술 병으로 자원입대 했다. 머리를 깍 고 모자를 눌러쓴 아이는 웃음기가 가신 걱정스런 눈빛이 되었다. 이 땅에 전쟁을 역사책으로만 배운 아이, 6.25의 참담함을 영화 속에서 만났으며 그나마 전쟁에 참전한 할아버지마저 이 세상에 없으니 아들에게 군대 입대는 당연히 두려운 넘지 못할 벽같이 느껴졌을 것이다.
남편은 입대 전에 아들에게 이 공간을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키 작은 향나무로 도열한 공원을 따라 세계 여러 나라 국기가 바람에 너울거렸다.
아들은 이 많은 무덤 앞에 할 말을 잊은 듯 했다. 무명용사의 묘 앞에서 발이 멈췄고, 급기야 잉어가 노니는 작은 수로 앞에 글귀를 읽어 내려가다가 눈가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이 수로는 유엔공원에 안장된 전사자 중 가장 최연소인 17살 도운트의 이름을 본 따서 도운트 수로라고 지었다. 우리나라 반대편 호주라는 먼 나라에서 겨우 17살 된 아들을 면식도 없는 나라에 보내면서 그의 어머니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 뒤 아들은 군대에 입대를 했고 우연히 뉴스에서 도운트 유족이 유엔공원묘원에 찾아온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도운트는 21살의 나이를 속이고 자원입대 했다고 한다. 가족들에게도 알리지도 않고 한국에 도착한지 13일째 죽었다고 했다. 백발의 여동생은 오빠의 이름을 딴 예쁜 수로를 마련해 준 한국 정부에게 무한한 감사를 느낀다고 했다.
나는 이제 아들을 군대에 보내면서 도운트의 어머니 마음을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추모하러 오는 이 공간은 과거의 삶과 현재의 삶이 만나는 공간이다. 외국병사가 되었던 한국병사가 되었던 이들은 치열한 전쟁 속에 뛰어 들어가 끝까지 투쟁으로 온 몸으로 막아낸 역사속의 증인들이다. 말없이 한 뼘의 작은 땅속에 묻힌 그들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과거를 기억하고,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아들은 편지에 입대 전에 유엔공원을 찾아간 일에 대해 아빠에게 감사하다고 했다. 휴가 나온 아들은 입대 전의 불안한 눈빛이 아닌 몸도 마음도 단단해져 남자가 되어 돌아왔다.
나는 요즘도 이 추모공간을 찾아간다. 가끔 삶이 지치고 너슨 해 질 때 이 세상에 없는 젊은 영혼을 찾아가면 나도 모르게 힘이 솟구친다. 이들은 다 내가 가슴에 품은 아들들이다.
▪ 우수상 오정란 (경주시 황성동)
충혼
회사에 휴가를 내고 모처럼 혼자서 작은 시골마을로 여행을 갔다. 내가 태어나서 자랐던 그곳은 임진왜란 때 마지막 전투에서 희생되었던 이순신 장군의 시체를 잠시 보관했던 전라도 완도 작은 섬 고금도 충무리. 그곳의 지명도 그분의 호를 따서 충무리로 바꿨다. 작은 사당과 비석뿐인... ...
아는 이가 없는 조용한 마을 우리나라에서는 인정을 못 받았던 그분의 칭송이 새겨진 비석은 명나라 대장군 진린 장군의 글이 비석에 새겨져있다. 초등학교 다닐 때 우리가 살고 있는 작은 학교에서는 매년 한 번씩 소풍을 가는 장소이다. 소풍을 갈 때면 선생님께서 항상 말씀하셨다.
“장군님, 도저히 저들을 그대로 보낼 수 없습니다.” 당시 대장군 이었던 진린 장군은 이순신의 충정을 알았기 때문에 흔쾌히 승낙했던 노량해전... ...
전쟁을 마친 장군의 유명한 말씀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 우리 마을의 전설 속 에는 그분은 충무리에서 홀연히 작은 섬 소완도로 떠났다고 전해지고 있다. ‘어차피 전쟁이 끝난 다음 동인, 서인 당파의 심판대위에 서게 되면 전쟁의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행의 마지막 날 나는 비석에 새겨진 글자 하나하나에 어린 그분의 충절을 생각하며 사당에 향을 피우며 묵념을 했다.
“그대여, 당신은 진정으로 우리들의 영웅입니다,”
“감사합니다.”
아이들과 함께 하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 남긴 채 집으로 향했다.
“ 다음 여행은 아이들과 함께 하면서 그분에 대한 충절을 다시 한 번 새겨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 우수상 이이자 (부산시 해운대구 해운대로)
충혼
며칠만 있으면 현충일이다.
나는 이때 만 되면 항상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교차한다. 나 어릴 적 그때는 초등학교라 칭하던 시절이었는데 학교에서 의례히 그에 맞춰 조회시간도 가지고 국경일에 대한 노래도 제창하고 그날을 기리는 교장선생님의 훈시도 항상 있었다. 3.1절, 현충일, 광복절, 한글날 등등... 방학 중 일 때는 꼭 그날만은 출석하여 기념행사를 가지고 교장선생님의 훈시를 듣고 하교하곤 했었다. 그리고 태극기게양은 무조건 기본이고~ 그러나 요즈음 우리 아이들은 학교에서 그다지 그러한 국경일을 기억하거나 가르치지 않는 것 같다. 3.1절이 뭐하는 날 인지 현충일, 광복절이 며칠인지, 또 그날의 기념노래들도 모르는 아이들 만해도 그날들이 무슨 날인지 언제인지 태극기는, 조기를 달아야 하는 건지, 나보다 도 더 모르는 것 같다. 온통 안팎으로 떠밀려 공부에 시달리는 요즈음의 우리 아이들. 공부도 중요하고, 공부 잘 하는 것도 너무 중요하지만, 적어도 한 달에 한번 정도도 안 되는 이러한 기념일들을 아이들에게 꼭 가르치며, 그날을 기리고 잊지 않는 애국 애족의 기본적인 생각들을 심어줬으면 한다. 적어도 3.1절이나 현충일, 광복절 같은 우리의 소중하고 고귀한 충혼의 넋들이 낙엽처럼 스러져간 날들엔, 적어도 경건한 마음과 더불어 태극기라도 반드시 게양할 수 있는 마음이 일수 있도록 우리 어른들이 앞서서 애기하고 이끌어 주어야 되지 않을까? 그러면 비로소 지하에서 잠든 우리 고귀한 충혼의 넋들도 맘 놓고 우리나라를 지켜보고 있지 않을까?
▪ 가작 최영희 (부산시 남구 용호동)
충혼
해마다 유월이면 붉은 철쭉처럼 가슴이 붉게 타오른다. 연두 빛 나무들이 초록으로 숲을 이루어가고 어디에선가 뜨거운 울림도 함께 피어나고 있다. 지금의 평화로운 세상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선열들의 심장이 붉은 철쭉 빛에 어리고 푸른 숲의 바람 안에는 희생의 눈물이 함께 숨 쉬고 있을 것만 같다. 나라를 위해 숭고한 생명을 바치신 선열들의 넋을 생각하면 저절로 마음이 숙연해진다. 지금의 평화로움이 그냥 만들어진 것은 아니기에 충성스럽고 의로운 넋으로 피 흘리신 그때를 되새겨본다.
자신의 땅을 멀쩡히 두고도 수많은 침략을 일삼은 왜적을 향해 이 나라를 지키고자 혼신을 바친 피 끓는 염원으로 인해 우리는 평화로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조국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가족도 내려놓고 오직 나라의 한 몸이 되어 붉은 피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힘차게 전진했으리라.
애국가를 부를 때 마다 무언가 뜨거운 것이 울컥 차오른다. 어버이날에 어머니의 은혜를 부를 때처럼 가슴이 뭉클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아마도 애국가 속에는 대한민국을 지켜낸 선조들의 넋이 노래를 따라 흐르고 있다. 비록 육신은 오래전 흙이 되었지만 영혼은 사랑하는 조국에 영원히 남아 모습은 보이지 않아도 마음만은 지금도 나라를 지켜주고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애국가를 제창할 때 더욱 더 가슴이 따뜻해지는가 보다.
세계를 향해 끝없이 올라가는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움을 느낄 때 마다 지금의 발판을 놓아주신 충혼을 떠 올린다 누군가의 희생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부모님의 희생과 사랑으로 자식들이 훌륭히 자라나고 나라를 위한 충성스러운 몸과 마음이 견고한 희망을 키우고 조국을 지키는 원동력이 된다. 늘 가져야 하는 고마움을 잊고 살 때 가 많다. 내가 아닌 우리가 되어 나라를 이루듯이 때로는 묻혀 지기도 하는 옛 선열들의 넋을 이제는 더 깊이 가슴속에 새겨야겠다. 따사로운 햇살 한 자락도 불어오는 바람 한 점에도 고귀한 희생과 사랑이 있음을 비로소 깨달아본다.
해마다 유월뿐만이 아니라 열심히 살아가는 하루하루마다 보이지 않아도 지켜봐주는 큰 사랑이 있음을 잊지 말고 감사하게 살아가겠다고 다짐한다. 마지막 붉은 꽃잎을 떨구는 철쭉에게서 오래전 흔적이 뜨겁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 가작 김나나 (경주시 현곡면)
충혼
나의 시댁은 구미 옆에 위치한 왜관이라는 곳이다. 부산이 고향이었던 나는 이 조그만 도시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시집에서 조금 걸어 나오면 바로 낙동강이 흐르는데 거기에는 전쟁 때 끊겼다가 다시 복구 된 낡은 다리가 하나 있다 다리 앞에 푯말을 보니 ‘호국의 다리’라고 적혀있었다. 6.25전쟁 때 최후의 저지선으로 정해져 북한 인민군이 낙동강을 건너는 것을 막기 위해 철교의 폭파가 불가피 했으리라. 북한군을 막고 낙동강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북진의 계기가 되었지만 치열하게 죽어 간 넋들이 산을 이루고 그 피가 강이 되어 흐르고 흘렀으리라. 저녁을 먹고 아이들과 함께 호국의 다리 위를 산책을 하였다. 100년이 넘은 이 다리위에서 바라보는 낙동강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푸르거늘 핏빛으로 물들던 그 충성스런 넋들은 오늘도 우리의 산천을 떠나지 못하고 우리 후손들을 위해 맑은 하늘과 푸른 강산을 지켜주고 있다. 손을 잡고 있는 아이들을 내려 다 보며 지켜주신 소중한 이 땅을 후손들에게 잘 전해주리라 가슴 속으로 생각하며 다시금 다리 위를 다 같이 걸어본다.
▪ 가작 조임경 (경주시 황성동)
충혼
파스텔톤 은근한 푸른 빛 그 아래 뽀오얀 실거머리 같은 것이 움찔한다. 일곱계단 무지개 언덕을 넘어 초록지붕 하늘이 되어주는 즈음인가. 발가락 틈 사이사이로 스멀거리며 간지럼 태우는 보드라운 잔디 한 웅큼 이던가. 살아있는 것인지 꿈결인지 헤아릴 수 없는 몽롱함이 괜한 울음을 삼키게 한다.
베갯잇이 흥건하도록 식은땀을 흘린 뒤에야 비몽사몽 꿈에서 깨어났다. 낮잠을 자지 않는 내가 웬일인지 깜빡하고 졸았던 모양이다.
“엄마, 엄마,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만들었어요? 누가 이긴 거야? 진짜 멋진 배 같아.”
참새가 지저귀듯 쫑알대는 아들 녀석에게서 금방이라도 거북선을 타고 바다를 항해할 장군의 모습이 보였다. 7살, 5살 아들, 딸에게 이순신 장구 위인전을 읽어주던 찰나에 깜빡 졸았던 것이다.
어지러운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진한 블랙커피 한잔을 마셨다. 무엇이었을까. 실 아지랑이처럼 몽롱하게 피어오르던 그 느낌들은 대체 무언지. 발아래 감싸 쥐던 보드랍던 들풀의 움직임이 여전히 생생하여 희한한 기분이 든다. 저 밑바닥에서부터 가슴 위까지 번지는 찡한 마음이 울음으로 터져 나올 것 같던... ... 비록 꿈결이긴 하였으나 분명 전해졌다. 소리 없는 아우성임이 틀림이 없다. 아이들에게 위인전 한권 읽어준 것뿐 인데 400여 년 전에 있었던 역사의 한 부분일 뿐인 것을. 그것이 꿈속에서 나를 조국에 대한 애국심 투철한 애국자로 만들어 놓은 것인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전쟁이란 비극과 조국을 위해 피 흘린 수많은 이들의 애달음이 그대로 전해졌다니. 울음을 토해낼 뻔한 꿈속에서의 경험이 위인전 겉 페이지에 그려진 만화 이순신 장군을 되돌아보게 한다.
역사는 흐르고 수많은 전쟁과 화해가 있을 것이며 나를 있게 해준 조국에 대한 보답으로 셀 수 없는 이들의 희생이 있을 것이다. 피와 눈물과 통곡으로 얼룩진 흔적이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인류가 존재한 이래 끊임없는 싸움이 있어왔고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서 서열정리는 어쩔 수 없는 본능이기도 하다. 나의 나라 나의 조국 대한민국에게 국민에게 토닥토닥 따뜻한 위로를 해 주고 싶다. 우리 조상들이 나라를 위해 충심을 다했던 그 마음하나가 지금의 우리를 있게 해 주었다. 역사의 한 귀퉁이를 돌아 거침없이 휘몰아치던 임진왜란 그 즈음에도 평온하기 그지없는 지금의 대한민국에도 우리는 알아야한다. 기억해야 한다. 위로해야 한다. 열렬했던 젊은이들의 고운 넋이 여전히 살아있음을, 역사의 한 페이지에서 그리고 우리 후손들의 피와 마음에 새겨져있음을.
▪ 가작 김경호 (경주시 용강동)
충혼
사람들은 누구나 살아가는 대에 목적과 의미를 두고 있다. 어떤 이는 자신을 위해 어떤 이는 가족을 위해 또 누군가는 사랑하는 이를 위해 살아간다. 하지만 나라를 위한 사람은 과연 그 수가 몇이나 될까.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자신을 지키지 않고 가족을 지키지 않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이 있다. 내가 그 시대에 살았다면 목숨을 던지기 힘들었을 것이다. 아니 하지 못했던 엄청난 결단이고 사건이다. 이 엄청난 일을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이름 모를 위인들의 마음에는 충이라는 글자를 가슴에 새겼을 것이다. 충이라는 한자를 풀어쓰면 가운데 중 마음심이 합쳐진 글자이다. 마음 한 가운데 품은 것은 분명 충일 것이다. 혼이라는 한자는 이를 운에 귀신 신이다. 목숨을 헛되이 버리지 않고 바친 목숨이 바로 혼일 것이다. 조국을 위해 바친 목숨이 바로 충혼이다. 충의를 위하여 죽은 사람의 넋. 충혼들의 고귀한 넋이 나를 지금 존재하게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너무 감사하고 감사하다. 충혼들의 고마움을 본받으며 이 글로서 충혼의 넋을 달랜다.
▪ 장려상 김창숙 (경주시 용담로)
충혼
하루하루 아무 일 없이 살아가는 게 기적 같은 요즘이다. 모처럼 선배들 만나 달콤한 시간을 보내던 스물 몇 아리따운 아가씨가 상가 공용 화장실에서 이유도 모른 채 칼에 찔려 죽었다. 지하철역 스크린 도어를 수리하던 열아홉 청년은 지하철이 들어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해 별안간 생을 달리 했다.
아직 채 꽃을 피워보지도, 꿈을 이뤄 보지도 못한 채 세상과 이별해야 한 젊음들을 위로하기 위해 어질고 의로운 몇몇이 국화꽃을 들었고, 아픈 마음을 포스트잇에 담았다. 누구 하나 ‘내 탓이다’ 선뜻 나서는 이 없지만 가여운 영혼을 위로 하겠다며 강남역을, 구의역을 추모의 공간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우리 역사는 늘 그렇게 이름 없는 민초들에 의해 이어져 왔고, 우리 산하 눈 닿는 곳마다 그들의 넋이 함께하고 있다.
전쟁 통에 임금과 고위 관리들은 저 혼자 살겠다고 백성들을 등졌지만, 사는 게 팍팍하고 지친 민초들은 이 땅을 외면하지 않고 의롭게 떨쳐 일어섰다.
그런 의로운 사람들의 넋이 4.19로, 5.18로, 6월 항쟁으로 이어왔고 오늘날 IT대국, 한류의 중심인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때마다 순국선열을 기리고 충혼 앞에 고개를 숙이는 위정자들이여!
촛불을 드는 자들을 가벼이 보지 말라
가로 세로 10Cm 남짓의 메모지에 분노를 담아내고, 안타까움을 표현하는 민초들을 두려워하라. 숫제 울음뿐이어도 깃발 하나 세우는 이 있거늘. 그 깃발 아래 의롭게 일어서는 우리 있거늘.
기억하라!
▪ 장려상 윤정혜 (경주시 백률로)
충혼
나는 충효초등학교 4학년 이조국이다. 친구들이나 형들이 나를 부를 때 “홀아비!” 라고 한다. 심지어 2~3학년 동생들조차 그렇게 부른 다
나는 월남 참전 용사이신 할아버지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소아마비를 앓아 항상 다리를 절룩이는 아빠와 그리고 나, 3명이 살고 있다. 할아버지는 고엽제 환자로 혼자 겨우 화장실에 가실 정도이며 항상 누워 계신다. 아빠는 음식물 재활용 업체에서 음식물 분리수거 일을 하신다.
할머니께서는 내가 태어난 지 5살 되었을 때,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할아버지의 병간호와 가난이 힘들었던 어머니는 견디다 못해 내가 초등하교 입학한 해, 들판에 보리가 누렇게 익어갈 무렵 어느 날 밤, 돈을 많이 벌어 오겠다며 할아버지, 아버지 말씀 잘 들어 라는 편지를 내 머리맡에 두고 집을 나가 버렸다.
할아버지의 방과 아빠의 방에는 항상 코리타분한 냄새가 났다. 할아버지와 아빠의 몸에도 항상 쾌쾌한 냄새가 나서 정말 싫다.
수업을 마치고도 나는 혼자 우두커니 운동장 느티나무 밑이나 빈 교실에 앉아 있다가 해가 저물고 땅거미가 질 무렵에야 집으로 온다.
홀아비라고 놀려서 참지 못해 싸움 박질 이 났는데도 항상 먼저 주먹을 휘둘렀다는 이유로 나 혼자 선생님께 꾸중을 듣거나 혼이 난다. 그럴 때면 엄마와 아빠가 모두 있는 친구들이 얄밉기도 하다.
아무도 없는 곳으로 무작정 떠나고 싶을 때도 있고, 그냥 죽어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는 왜 태어났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6월 어느 일요일 아침, 아빠가 김밥이랑 과자를 준비하셔서 황성공원에 가자고 하셨다. 아빠와 함께 다니는 것이 정말 싫었지만 아빠를 따라나섰다.
황성공원 앞 임란의사 추모비 앞에 차를 세우시고는 추모비 앞으로 가까이 가서 불편하신 몸을 숙여 큰 절을 올리신다. 그리고 나에게도 절을 올리라 하신다. 영문도 모른 채 절을 올린 나에게 두 손을 꼭 잡으시며, 말씀하셨다. 난생 처음으로 아빠의 엄숙한 모습을 보았다. 엄숙하다 못해 비장하다고 해야 할까... ...
지금으로부터 424년 전 1592년 음력 4월14일 중국정벌이라는 허황한 꿈을 꾼 일본이 이 강토를 침략한 일이 있었다. 잦은 만행과 살상을 저지르며 쳐들어오는 왜적 앞에 속수무책으로 밀려 도성이 함락되고 국왕조차 국경 의주로 몽진하여 국운이 위기에 처했다.
경주성이 함락되자 이웃 12개 고을 130여 의사들이 그 해 6월 9일 반월성 문천가에 모여 백마를 잡아 피를 돌려 마시며 죽음으로 나라를 지키자고 결의했다. 이것을 문천회맹이라고 한다. 너에게는 15대 조부가 되시는 당시 동천 마을 훈장이셨던 이, 언자 춘자께서 동네 사람들을 모아 결성했다. 이 때 여성도 30여명이 참여하여 의병들의 음식과 군수물자를 담당했다고 한다. 7년 동안의 전쟁의 중심에서 왜적을 물리친 전적지로 지역 의사들의 넋이 서린 곳을 불사한 충혼의 정신이 너의 가슴과 피 속에 요동쳐 흐르고 있다. 이것은 신라시대 화랑정신에서 시작되어 조선시대의 호국정신인 충으로 이어져 현재에 이르고 있단다.
미래로 나아가려면 현재의 좌표를 정확히 알아야 가능하고 지나온 과거를 알아야 만이 현재의 좌표를 알 수가 있다.
너는 훌륭한 과거인 조상님들이 계시므로 남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학벌이나 성별이나 나이나 직업이 귀중한 것이 아니다. 큰 꿈을 꾸어라. 그리고 최선을 다해라!
나라는 물론 세계의 평화와 민주주의의 수호를 위해 목숨을 건 할아버지와 조상님들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사람은 되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그 순간, 아빠에게서 구수한 땀 냄새가 나는 것 같았고. 그동안 미웠던 할아버지께 정말 죄송했으며 3대 홀아비라는 별명이 아주 자랑스럽고, 영광스럽게 느껴졌다.
그래! 나에게는 조상 대대로의 충혼(忠魂)이 깃들어있다.
아빠가 정성스레 준비하신 김밥이 꿀맛이었다.
▪ 장려상 조수영 (경주시 황성로).
충혼
아이가 입학하고서야 알았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 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가 아니라.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 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였 다
무언가 현대 세대에 더 어울리는듯하여 더 씁쓸한 기분이었다. 과거의 우리 선조들은 아니, 6.25를 겪은 우리 아버지세대만 하더라도 나라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치리란 믿음이 있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 세대 뿐 아니라 나만 하더라도 과연 나라를 위해 아니 타인을 위해 나의 조그만 희생을 감수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는 부분이다.
‘충혼’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신 분들의 넋?
이 단어에 걸 맞는 분들이 앞으로 나타나기나 할까 의구심이 들면서도 또한 이 ‘충혼’ 이라는 단어가 앞으로도 소중히 남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 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더욱 아쉬운 한 문장이다.
▪ 장려상 김태희 (경주시 현곡면)
충혼
황성공원에 자리 잡고 있는 충혼탑을 바라본다. 사람의 육체는 썩어 없어지고 그들이 지나간 흔적도 서서히 바람 따라 흩어진지 오래다. 사람이 살아 보고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은 길어야 백년이다. 하지만 그들이 우리에게 보여 주고자하는 마음은 아들에게 또 그 아들에게 전해져 지금 황성공원 곳곳에 흩어져 있는 아이들에게 전해질 것이다.
비록 그들의 얼굴은 모를지라도 그들이 이 나라를 위해, 이 유월 담장에 붉게 피우는 빨간 장미를 위해 얼마나 노력하셨는지 알 것이다.
나는 내 아이들에게 이 빛나는 충혼탑이 너희들에게 푸른 하늘을 주셨다는 것을 알려야겠지.
감사하는 마음이 서서히 사라져가는 이 아이들에게 그들의 마음을 생각하며 하늘을 바라보며, 이 공원에 자라고 있는 풀 한 포기에도 감사해야겠다.
▪ 장려상 공용순 (경주시 충효동)
충혼
벌써 더운 여름이 시작되어 햇볕이 뜨겁습니다. 나의 마음도 뜨거운 시절이 있었겠지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울 일은 없지만 나라를 위한 삶은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나라를 빼앗겼을 때 태어났다면, 나라가 전쟁이 났을 때 태어났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요? 유관순처럼 3.1운동을 할 수 있었을까요? 이순신처럼 전쟁에 나가 싸웠을까요? 힘들겠지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이기에 더 위대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지금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나라를 위한 삶은 무엇인 가? 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충혼탑을 보며 생각합니다. 옛 위인들에 대한 고마움과 그들의 정신을 생각하며 앞으로의 삶에 대해 고민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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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많은 자료를 키보드로 올리시느라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
다음번에는 저도 도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 원주님 감사 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