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싸움이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
제게 상담을 받으러 오시는 부부 중에 달리 아기를 맡길 곳이 없다면서 데리고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이의 행동을 보면 두 부부의 삶의 현장이 그대로 반영됨을 알 수 있습니다. 기본적인 신뢰감이 있는 아이는 낯선 사람을 봐도 표정이 밝습니다. 말을 걸면 웃으면서 반응하고 엄마와도 잘 떨어져 주위에 있는 놀이감에 호기심을 보이며 안심하고 놉니다. 하지만 유독 엄마와 떨어지지 않으려는 아이들은 너무 일찍부터 여러 양육자의 손을 거쳐서 키워졌거나 현재 부부 사이가 매우 좋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부부 사이가 안 좋으면 아이들이 대개 정서불안을 보입니다. 가트맨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부부 싸움을 할 때 아이의 소변에서는 스트레스 호르몬이 평상시보다 높게 검출된다고 합니다. 부모의 언성이 높아지면 아이는 위기 상황으로 인식한다는 것이지요. 또 영국의 심리학자들은 부부 불화가 심한 가정의 자녀가 화목한 가정의 자녀보다 키가 작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스트레스 호르몬 때문에 성장이 억제된다는 것입니다.
아기가 이제 젖먹이에 불과하니까, 아직 말도 못하니까, 부부 싸움 후에도 밥 잘 먹고 잠 잘 자니까 별 문제 없을 거라 흔히들 생각하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가트맨 치료 방식을 사용하는 저는 부부의 대화를 비디오에 담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의 음성이 격해지거나 엄마가 울면 한두 살 정도의 아기도 놀던 것을 멈추고 엄마와 아빠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봅니다. 엄마의 얼굴을 만지려고도 하고 아빠의 입을 막아보려고 애를 쓰기도 합니다. 대여섯살 된 아이의 표정은 매우 복잡해집니다. 어떻게 이 상황을 해결해야 할지 난감해 하면서 자신이 아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엄마 앞에서 웃어 보기도 하고, 뭘 갖다 보여 주기도 하고, 떼를 쓰며 매달리는 것 등은 스트레스 상황에 대한 아이 나름의 대응책입니다.
싸우기 바쁜 부부들은 이런 아이들의 엄청난 ‘화해시도’ 노력을 못 보고 지나칩니다. 아이는 이러저런 시도를 해보다 안 되면 울기 시작합니다. 이 때 이미 감정의 홍수 (흥분에 빠진) 상태에 있는 부부는 아이에게 고함을 치거나 화를 냅니다. “시끄러워! 저리 좀 가 있어!!” 부모는 별 생각 없이 감정풀이를 할지 모르지만 아이는 그렇잖아도 두려운 상황에 뭔가 자기가 크게 잘못한 것 같은 죄책감이 듭니다. 야단맞을까 무서워서 울지도 못하지만 이럴 때의 상처는 기억 깊은 곳에 저장이 됩니다.
아이들은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표현할 어휘력이 아직 발달되지 않았습니다. 왜 부모가 격하게 싸우는지 이해할 지적 능력도 미숙합니다. 어떻게 평화를 얻을 수 있는지 효과적인 방법을 아직 터득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울거나 고함치거나 떼쓰거나 귀를 막거나 못 들은 척 하거나 숨는 것 외에는 더 좋은 방법을 모릅니다.
뇌 안의 감정을 주관하는 변연계에는 해마(히포캄퍼스)라고 불리우는 기억저장소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태어난 이후 죽을 때까지 우리가 경험한 모든 것이 저장됩니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어릴 때 감정적으로 크게 놀라거나 화나거나 즐거웠거나 슬펐거나 두렵거나 고통스러웠던 기억은 그대로 입력되어 있다가 이 기억을 연상시키는 유사한 상황이 벌어지면 어릴 때 느꼈던 극도의 공포와 고통이 반응합니다.
부부 싸움을 자녀 앞에서 한다면 자녀들은 앞으로 살면서 싸우게 되는 상황, 흥분하는 상황, 큰소리로 치고 받는 상황...이와 비슷한 분위기만 되어도 자동적으로 감정의 홍수 사태를 일으키게 됩니다. 현대 뇌과학은 폭력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의 아미그달라(변연계의 위험감지장치)가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아동에 비해 더 크고 민감하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쉽게 말해 자녀 앞에서 큰 소리로 격하게 다투는 것은 자녀의 기억 저장소에 시한폭탄을 심어주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이 시한 폭탄은 빠르면 사춘기 무렵, 늦으면 결혼 후에 터집니다. 부부 싸움을 대물림하는 것이지요. 엄마와 아빠가 격하게 싸울 때 자녀가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것이 아닐까요.
“엄마, 아빠 누가 옳고 그른지 난 몰라요. 누가 잘 나고 못 났는지도 상관 안 해요. 제발 큰 소리로 다투지 말아주세요. 저의 마음과 영혼은 평화로움 속에서 자라고 싶단 말이에요.”
월간 <가족 이야기>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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