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파소(乙巴素)는 고구려 사람이다. 국천왕(‘고국천왕’을 줄인 말. 고국천왕은 서기 179년부터 서기 197년까지 고구려를 다스렸다 - 옮긴이) 때에 패자(沛者. 고구려의 벼슬. 고구려의 열 가지 관등[官等. 벼슬아치[官]의 등급[等]] 가운데 세 번째로 높은 벼슬이다. 왕을 보좌하며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맡았다 - 옮긴이) 어비류(於畀留)와 평자(評者. ‘비평하는/평가하는[評] 사람[者]’이라는 뜻. 고구려의 벼슬 이름 - 옮긴이) 좌가려(左可慮) 등이 모두 외척(왕비나 황비[皇妃]의 친척. 예컨대 임금의 외삼촌이 여기에 포함된다 - 옮긴이)으로서 권세를 마음대로 부려 옳지 못한 일을 많이 저지르니 나라 사람들이 원망하고 분개했다.
왕이 (두 사람에게 - 옮긴이) 노하여 그들을 목 베려 했더니, 좌가려 등이 반역을 꾀하므로 왕은 그들을 목 베고 귀양 보내고 마침내 4부(왕부[王部]를 뺀 나머지 4부. 고구려에는 다섯 개의 부[部]가 있었다 - 옮긴이)에 영을 내렸다.
“요사이 관직은 총애로써 주었고, 작위는 덕행으로 승진되지 않았으므로 그 해독이 씨알(백성[百姓]/민중[民衆]을 일컫는 순우리말 - 옮긴이)에게까지 미쳤고, 우리 왕실까지 어지럽혔으니, 이는 과인이 밝지 못한 까닭이다. 지금 그대들 4부는 각기 어질고 착한 이로서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뽑아서 (과인에게 - 옮긴이) 소개하라.”
(참고로『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 따르면 고구려 사람들이 어비류와 좌가려에게 화를 낸 해는 서기 190년이고, 그들이 반란을 일으킨 해는 서기 191년이며, 고국천왕이 반란을 평정한 해도 서기 191년이다 - 옮긴이) 이에 4부에서 동부의 안류(晏留)를 함께 뽑아서 소개하므로 왕이 그를 불러들여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맡기니, 안류는 왕에게 아뢰었다.
“저는 용렬(庸劣 : 어리석고[庸] 재주가 남만 못하다[劣]. 변변하지 못하다. - 옮긴이)하고 어리석기 때문에 진실로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서쪽 압록곡(鴨淥谷) 좌물촌(左勿村)에 있는 을파소란 사람은 유리왕(공식 시호 ‘유리명왕[瑠璃明王]’.『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 따르면 서기전 19년부터 서기 18년까지 고구려를 다스렸다. 10년 전, ‘김상’이라는 학자는 유리왕이 실제로는 서기 12년에 죽었고, 서기 12년부터 서기 18년까지는 유리왕의 맏아들인 여진[如津]이 고구려를 다스리다가 죽었으며, 그 뒤 대무신왕이 즉위했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 옮긴이) 때의 대신 을소(乙素)의 후손입니다(원문에는 ‘손孫’으로 나온다 - 옮긴이). 됨됨이가 굳세고 곧아 굽히지 않으며, 슬기롭고 생각이 깊습니다만, 세상에 쓰이지 않으므로 여름지이(농사[農事]를 일컫는 순우리말. 여름에 푸성귀 밭이나 과수원이나 논밭을 일구어 먹을거리를 만드는[짓는] 일이므로 이런 낱말이 나왔다 - 옮긴이)에 힘쓰면서 살고 있습니다.
만약 대왕(大王. 금석문 같은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고구려는 자기 나라의 임금을 ‘태왕太王’이라고 불렀다 - 옮긴이)께서 나라를 다스리고 싶으시다면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될 것입니다.”
왕이 사자를 보내어 말을 겸손하게 하고 예물을 후하게 주어 을파소를 초빙하여 중외대부(中畏大夫)로 삼고 작위를 더하여 우태(于台)로 삼고는 그에게 말했다.
“내가 외람되이 선왕(先王. 먼저[先] 다스린 임금[王] - 옮긴이)의 대업을 이어 신하와 씨알들의 위에 있으나, 덕이 적고 재주가 모자라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를 알지 못하오. 선생은 재주를 감추고 초야(草野. 풀[草]이 우거진 들판[野]. -> 시골 : 옮긴이)에 숨어 있은 지가 오래인데, 이제 나를 버리지 않고 곧 와주니 (이는 - 옮긴이) 다만 나의 다행일 뿐 아니라 사직(社稷. ‘토지의 신[社]과 곡식의 신[稷]’이라는 뜻. 옛날에 임금이 나라의 안녕을 위해 이 두 신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나라’나 ‘나라의 기반’이라는 뜻으로 바뀌었다. 여기서는 ‘나라[정부]’라는 뜻으로 쓰였다 - 옮긴이)과 씨알들의 복이라 하겠소. 가르침받기를 요청하니 공(公)은 정성을 다해주기를 바라오.”
을파소는 비록 마음으로는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맡기로 (마음먹고 태왕의 요청을 - 옮긴이) 허락했으나, (태왕에게서 - 옮긴이) 받은 벼슬로는 일을 성취할 수 없다고 여겨 이렇게 대답했다.
“신(臣)은 둔하고 느려 감히 존엄한 명령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바라옵건대 대왕께서는 어질고 착한 이를 뽑아 높은 벼슬을 주어 큰 일을 이루소서.”
왕은 그 뜻을 알고 이에 (을파소를 - 옮긴이) 국상(國相. 고구려의 벼슬 이름. 정치와 군사를 맡은 대신[大臣]을 이렇게 불렀다. 가장 높은 벼슬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국무총리다 - 옮긴이)으로 삼아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맡게 했다.
이에 조정의 신하들과 왕의 인척들은 을파소가 새로 벼슬한 사람으로서 옛 신하들을 이간(이간질 - 옮긴이)한다고 하여 그를 미워하니, 왕은 명령을 내렸다.
“귀하고 천한 사람을 논할(가릴 - 옮긴이) 것 없이 국상의 영(명령 - 옮긴이)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일족을 없애버릴 것이다!”
을파소는 물러나서 다른 사람에게 말했다.
“때를 만나지 못하면 숨고, 때를 만나면 벼슬하는 것이 떳떳한 선비가 해야 할 일이오. 지금 임금님께서 나를 후의(厚意. 두텁게[厚] 생각해 주는 마음/뜻[意], 또는 남에게 두터이 인정을 베푸는 마음 - 옮긴이)로써 대우하시니 내 어찌 다시 그전처럼 숨겠다고 생각하겠소?”
이에 지성으로 나라를 받들어 정치와 교화를 밝히고 상과 벌을 신중히 내리니 인민(人民. 여기서는 ‘백성’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내가『삼국사기』에 실린 원문을 직접 읽어본 결과, 거기서도 이 대목은 “人民”이었다. 내가 다른 책에서 읽은 바에 따르면, ‘인민’은 삼국시대부터 쓰였던 말이라고 한다 - 옮긴이)이 편안해지고 서울(여기서는 고구려의 도읍 - 옮긴이)과 지방이 무사(無事. 아무 일[事]도 없다[無] -> 괜찮다, 평온하다 : 옮긴이)해졌다.
왕은 안류에게 말했다.
“만약 그대의 한 마디 말이 없었더라면 내가 을파소를 얻어 나라를 함께 다스리지 못했을 것이오. 지금 (을파소의 - 옮긴이) 여러 가지 공적이 성취된 것은 그대의 공이오.”
이에 그를 대사자(大使者. 고구려의 벼슬 이름 - 옮긴이)로 삼았다.
산상왕 7년(서기 203년) 8월에 을파소가 죽으니, 나라사람들이 매우 슬피 울었다.
-『삼국사기』제 45권「열전」제 5 <을파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