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없는 시를 쓰기로 유명한 영랑의 생가는 강진군 강진읍 나즈막하고 소박한 시골동네에 위치해 있었다. 들어서는데 눈이 편안해지는 느낌, 곱게 비질된 흙마당이 기분좋다 싶은데 담밑, 꽃밭 할 것없이 모란꽃이 지천이다. 모란꽃을 처음 본 건 아닌데 새삼스럽게 그 탐스런 꽃송이가 똑 따먹게 생긴 서양화에 질린 눈에는 퍽이나 시원스럽다. 꽃상여를 장식하는 종이꽃이 바로 저 모란이로구나. 송이는 그만두고 꽃잎 하나가 서너살 아이 손바닥만 하니, 복스러운 것 좋아하는 옛어른들이 자기나 장롱에 모란을 그리고는 그것이 가정의 화목과 부귀를 가져다준다 하였겠다.
그곳에서 '영랑백일장'이 열렸다. 은빈이와 나진이라는 중3아이 둘이 참가했는데 줄이 둘러쳐진 안에서 아이들이 울상이다. 글제가 '골목길'이니 어쩔 것인가, 골목길이 뭔진 알아도 무엇을 얘기할 만큼 골목길을 경험해 본 적이 없음이니. '편히 되는대로' 라고 소리쳐주고 행사장 입구에서 보기에도 아까운 화전 사먹고 야생화 전시장 어술렁 거리다 아이들이 나오길래 점심을 먹기로 했다. 그런데 아이들이 무엇을 내민다. 세상에나, 식권이다. 무슨 결혼식도 아니고, 역시 쌀 흔한 곡창지대, 인심 한 번 그만이다. 국물 제대로 우려낸 갈비탕을 황석어젓갈에 곰삭은 김치 곁들여 먹으니 그저 그만이다. 강진군청 만만세!
둘 -- 다산 초당
영랑 생가에서 이십 분 거리에 다산 초당이 있다 하여 나섰다. 차를 주차하고 바로 앞에 초당이 있을 중 알았더니 웬 걸, 이제 한창 봄물 오른 연초록 나무들이 보기좋은 길을 한참 지나고 키 큰 낙엽송 뿌리가 황톳길 바닥에 힘줄처럼 불근불근 드러나 있는 산길을 오르다 아이구 주저앉으려는 찰라 내려오던 아저씨가 '바로 쩌-그요. 힘내소' 한다.
아 좋다. 눈 가는 저 쪽에 막히는 것 없이 바다가 있고 뒤란은 대나무숲. 그저 움막을 겨우 벗어난 초가정도려니 했는데 의외로 소박한 누각이 둘이다. 하긴 유배 생활 18년 중 10년을 이 곳에서 살았고 후학도 길렀다니 초가 한 칸은 무리겠다. 나를 가르치려는 좋은 책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터라 그 유명한 '목민 심서' 도 제대로 읽은 적 없으나 그를 존경한다.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박탈당한 천재의 고통을 회한의 나날로 보내기보다 백성을 위하는 마음을 구구절절 담아 글을 쓴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잘나가는 것도 아닌 그를 위해 초당을 지어주고 보살펴준 윤씨 문중 사람들 만세!
셋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름
백반으로 저녁을 먹었다. 갯가답게 모든 음식이 젓갈에 녹아들어 입맛을 사정없이 당긴다. 그만그만 하면서도 옹차게 담은 밥 한 그릇 다 먹었더니 위장나이가 내 나이의 곱절이라 걱정이 앞선다. 이렇게 달게 먹은 게 얼마만인가, 뿌듯한데 아주머니는 더 드시요, 밥은 많소 정겹게도 실피고 앞자리의 딸이 동그라미를 그려보인다. 음식맛이 좋거나 주인이 친절하면 우리끼리 하는 신호다.
돌아오는 길.
눈을 유혹하는 무엇 없어 마냥 여유로운 벌교벌판을 지나는데 키 작은 분홍꽃이 너른 밭 가득이다. 들풀 속에 한 두 송이 있으면 한참을 쳐다보며 귀여워하던 자운영이 아닌가. 차를 세우고 촌로에게 물어보니 거름이란다. 미처 무슨 농사지을 때 쓰는 거름이냐고 물어보지는 못했는데 고 앙증맞은 자운영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광안대교를 들어서며 나진이가 '이 질리는 조형미!' 소리치는 바람에 졸다 번쩍 눈을 떴는데 하루 반의 여행이 나를 사정없이 피곤속으로 몰아넣는다. 하나, 그 몇 곱절의 신선한 기운이 한참동안 내얼굴에 다소나마 화색을 선사할 것이므로 싫지 않다. 나는 다시 남도 갯벌의 평온함에서 해운대 요란한 파도 속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첫댓글 강진은 우리 어머니가 태어나고 자란곳이요 해운대는 이 머슴마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랍니다. 여전히 멋진 글솜씨... 나는 행여나 신춘문예에 이름이 있지않나 하고 찾았던 것이 여러번......
가보지 않았어도 마치 가본듯 하여이다. 질박하게 쏟아놓는 그대 글에 모두들 반했나보오. 어쩌네 저쩌네 하면서 부모노릇(?) 젤 잘하고 사시네. 지난번 중앙일보에 게제된 이야기 TV 동화로 나온다더니 언제 나오는지요. 한턱 내시게.
언감생심.. 신춘문예라니요. 재주도 재주려니와 병적인 게으름이 그렇잖아도 보잘것 없는 위인 더 아무것도 아니게 하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