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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사발, 아직도 내게는 너무 먼 당신
차를 마시는 것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차의 품질을 유별나게 따지며 ‘세상에 차는 많아도
정작 먹을 만한 차가 드물다’는 선인先人들의 말을 염불처럼 되뇌다가 주변사람들 특히 제다인製茶人들에게 밉보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장시간에 걸쳐서 많은 양의 차를 마시는 것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운지라 다인들 사이에서 ‘물고문’이라 불리는 찻자리를 결코 마다하는 법이 없다. 그런데 아직도 차생활에서 기를 펴지 못하는 두어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다례라 불리는 것이요 또 하나는 찻사발에 관해서다. 특히 찻사발은 오랜 차생활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내게는 너무 먼 당신’이다.
1. 일본 다도茶道가 뭐기에
찻사발과 인연을 맺지 못한 데에는 그럴만한 연유가 있다. 우선은 가루차를 즐기지 않기 때문이다. 품질 좋은 국내산 가루차가 드믄 현실에서 굳이 일본산 가루차를 사서 마시는 것보다 우리 녹차를 마시는 것이 여러모로 좋다. 그러나 가루차를 거의 마시지 않는 사람들 중에도 찻사발에 관심을 가진 이가 많으니 이것만으로는 충분한 이유가 되지는 않겠다.
사실 더 큰 이유는 다른 데에 있다. 일본 다도를 지나치게 추종하는 일부 다인들의 행태가 찻사발을 외면하게 했다. 찻사발이 일본 차문화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 아닌가! 다인들에 대한 반감을 애꿎게도 찻사발이 뒤집어썼다.
일본의 다도는 정치적으로 이용되며 발전했다. 다도는 영주領主들과 무사계급을 아우르기 위한 방편이었다. 지배자들은 다도를 통해서 영주들과의 단합을 이뤄내고 무사들의 광폭함을 순화시키며 충성심을 이끌어 냈다.
정치적으로 이용되며 발전한 일본 다도에는 민족지상주의와 복종의 정신이 배어 있다. 지금도 일본의 정치입문자들에게 있어서 다도는 필수 과정이다. 따라서 일본이 우리나라를 식민통치하며 문화정책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하에 여학교에서 일본다도를 가르쳤다는 사실은 결코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거기에는 우리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고 한반도를 영구 지배겠다는 기막힌 저의가 숨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다도를 배워야만 차문화의 경지에 오르는 것처럼 여기고 심지어 자격증까지 들먹이며 우쭐거리는 꼴을 보면 부아가 치밀어서 견딜 수가 없다. 남의 것도 알아야한다는 차원이라면 몰라도 이건 아니다. 현실이 이 같을진대, 민족적 자긍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일본 다인들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는 찻사발에 호감을 갖기 어렵다.
도예가들의 ‘일본 따라잡기’ 행태도 크게 한 몫 거들었다. 다인들이 일본 다도를 향해서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엎어지는 것을 보며 뒤틀린 심사가, 일본 다인들의 눈에 드는 찻사발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광분하는 일부 도예가들의 행태로 말미암아 아예 뒤집어졌다. 우리에게도 가루차 문화의 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찌 저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싶다. 범인凡人의 눈에는 그냥 일상의 생활용기로밖에 보이지 않는, 그것도 형태가 지극히 거칠어서 작금에는 거의 쓸모가 없을 것 같은 그릇을, 일본식 용어를 써가며 찬양하는 것에 정나미가 떨어졌다.
2. 일본 다도와 조선의 사발
차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차문화에 관련된 책을 한 권이라도 읽은 사람이라면 일본인들이 열광하는 찻사발이 무엇인지 웬만큼은 안다. ‘그 옛날 일본인들에게 약탈되어 이제는 저들의 국보가 되고 문화재가 된 조선의 사발’ 그것은 이름 없는 도공들이 만든 일상의 그릇이었다.
‘본래는 조선의 생활 잡기였다’고 주장한 일본의 민예연구가인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 년)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그것은 누가 보아도 귀하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것은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그것은 서민들의 생활용기로 사용되며 하나 둘 씩 사라져갔고 귀한 것이 아니었기에 고이 간직하거나 자손에게 물려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일본 차문화의 독특한 역사 속에서 대물림되며 저들이 추앙하는 소위 대명물大名物이 되었다.
일본인들이 조선의 서민적 일상용기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6 세기에 들어서 ‘와비’ 즉 ‘간소하고 차분한 아취’를 내세운 다풍茶風이 정립되면서부터였다. 그 시대의 주역이었던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다도 스승이었던 센리큐(千利休, 1522 - 1951년)는 사치와 무질서로 치닫던 이 전까지의 차문화를 개혁하여 와비차을 완성했다.
내면 혹은 정신을 중시하며 부족하면서도 진중하고 은근한 멋을 추구하는 이 다풍과 어울리는 찻그릇은 무기교無技巧, 무작위無作爲, 자연미自然美라는 조건에 부합해야 했다. 당시 도자기 후진국이었던 일본의 다인들은 조선의 사발에 주목했다. 자연 그대로 소박미素朴美를 지닌 조선의 사발은, 저들이 추구하는 바를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준비되어 있었다.
3. 찻사발에 대한 약속 사항, 일본인들의 속내
저들이 선택한 조선의 사발은 서민들의 생활용기였다. 가난한 도공이 생계를 위해 쉼 없이 빚어낸 사발은 모양이 고르지 못하고 거칠기까지 했다. 여기에는 기교나 작위성이 있을 수 없었다. 일본의 다인들은 이것들 중에서 자기들의 눈에 드는 것을 골라냈고 자기들의 관점에 따라서 이른 바 ‘약속 사항’을 만들어냈다.
예컨대 이도찻사발[井戶茶碗]의 경우, 찻사발 안쪽 한가운데 바닥에 움푹 들어간 차 고임자리, 대나무 마디 같은 죽절竹節이 있는 굽, 굽 안쪽 중앙에 배꼽처럼 솟아난 두건, 유약이 녹아 엉겨 붙은 매화피, 선명한 물레손자국, 흙살과 유약을 감상할 수 있는 흙맛, 굽과 허리 사이의 예리하고 힘찬 각도 등이 그것이다. 이는 지금까지도 분명하게 지켜지고 있다.
일본 다인들이 만들어낸 이 대단한(?) ‘약속사항’은 우습게도 어렸을 적에 가지고 놀던 구슬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의 유리구슬에는 형형색색의 입체감 있는 문양이 들어있었다. 유리에 색소가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가며 만들어진 문양은 같은 것이 있을 수 없었다. 아이들은 구슬에 대한 약속사항을 만들었다. 특이하고 보기 좋은 문양의 형태를 정해놓고 그에 부합하는 구슬의 가치를 높게 평가했다. 그 중에서 이른바 사방 문양을 가장 귀하게 여겼다. 구슬 속에 강낭콩 꽃잎 같은 문양이 십자형을 이루며 세로로 세워져 있는 것인데 아이들은 그것을 보물로 여겼다.
구슬은 아이들의 약속 사항보다 먼저 존재했다. 조선의 사발도 역시 일본다인들의 약속 사항보다 먼저 존재했다. 따라서 약속 사항이라는 것은, 이미 존재하는 대상에 대하여, 여러 사람들이 필요에 따라 합의하여 만들어낸 공통의 기준일 뿐이다. 따라서 이런 유의 약속 사항은 또 다른 사람에 의해서 다양하게 만들어질 수 있다. 결코 절대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저들의 약속 사항에 끌려가고 있다. 왜? 어째서? ‘우리의 관점은 다르다’라고 말하지 못하는가!
저들은 남의 것에 미적美的 상징적 가치를 부여하고 귀중하게 여김으로써 자기들의 안목을 아주 광장한 것으로 치켜세우고 있다. 마치 쓰레기 더미에서 진주를 골라낸 것처럼 우쭐거린다. 우리는 내 것의 귀중함도 모르는데 비하여 저들은 남의 것을 가져다가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고 제 것처럼 만들어 버렸다.
이도자완이 조선의 일상 잡기였다는 점을 유난히 강조하며 일본인의 미의식을 찬양하는 야나기 무네요시의 주장에는 이러한 저의가 숨겨져 있다. 하지만 이는, 일본인의 미의식을 찬양함으로써 일본을 대표하는 찻사발이 조선의 서민용 그릇이었다는 사실에 대한 열등감을 극복하고 문화적으로 승화시키려는 처절하고도 안타까운 노력이다.
약속사항에 따른 조선사발 예찬은 일본인들의 민족성에서 기인했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일본인의 미의식은 ‘그들의 민족주의적이며 집단주의적인 광기狂氣’와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은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부르짖으며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민족 전체가 전쟁에 뛰어든 광기인데 이는 우리나라의 오두막을 닮은 다옥茶屋을 짓고 ‘와비’ 즉 ‘간소하고 차분한 아취’를 연출하는 광기와도 통한다. 』(월간 Tea & people 2006. 9 「차생활 속박이냐? 자유냐?」
찻사발도 예외일 수 없다. 저들은 ‘와비’에 걸맞는 찻그릇으로 조선의 사발을 선택했고, 약속 사항을 만들었으며, 그 가치를 드높였다. 일본인들의 집단적 광기는 서민의 생활용기로 태어난 조선의 사발을 국보와 문화재로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 위에 자기들의 ‘미의식美意識(?)’을 얹어놓았다.
일본 정부가 우리나라의 도예가에게 문화훈장을 수여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의 서민적 사발을 재현하는 도예가에게 훈장을 수여함으로써 자기들의 높은(?) 안목을 과시하는 것이다.
4. 조선의 사발과 미학적 가치
일본인들이 찻사발에 열광하는 것을 보며 일부 다인들과 도예가들이 조선의 사발에 대한 명예회복(?)에 나섰다. 이도찻사발을 비롯한 상당수의 조선의 사발이 본래 일상의 잡기가 아니었다는 반론을 펴기 시작한 것이다. 예컨대 높은 굽을 들어서 ‘제기’祭器였다거나, 형태나 크기로 미루어 사찰에서 사용하던 ‘흙발우’였다는 견해가 등장했다. 그러나 이는 견해일 뿐 이를 뒷받침할만한 확실한 근거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뭐가 그리 중요하랴! 그 같은 주장을 하는 것은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일본 다인들이 찻사발로 선택하고 극찬하고 있는 그릇이, 이 땅의 도공들에 의해 빚진 무수히 많은 것들 중에 지극히 작은 부분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 사실에 대하여 자랑스러워하면 그 것으로 그만이다. 지금 우리가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은, 우리 차문화의 뿌리를 찾아서 우리의 정신과 미의식이 담긴 찻사발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다기 ‧ 작은 공간의 미학」의 저자 김동현 선생은 조선의 사발을 ‘엔트로피의 미학’으로 설명하며 ‘소멸의 과정을 존재의 자유로 인식하고 수용하는 자각의 미美’라고 피력했다.
『찻사발의 이런 모습들은 찻사발의 원래 고향인 자연 상태의 야성의 흙을 떠올리게 하고 이런 느낌을 우리는 흙맛이라고 말한다. 달리 말하면 질서의 형태인 찻사발로 부터 무질서 상태였던 야성의 흙을 연상케 하는 감성이고 무질서의 원형原形에서 느껴지는 ‘불완전에 대한 미의식’이다. 찻사발의 흙맛과 사발의 몸의 변화에서 느끼는 미학적 호감은 항상 ‘본디 모습’[原形]을 지향하는 시물의 본질에 대한 무의식적 이해이며 본질회귀의 향수이기도 하다.』(김동현.「다기 ‧ 작은 공간의 미학」월간 Tea & people)
기교와 작위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조선의 사발은 어머니의 뱃속이요 장차 돌아갈 흙무덤이다. 자연스런 심성정心性情을 잃어버리지 않은 사람이라면 조선의 사발에서 이 같은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어머니의 뱃속과 흙무덤은 안식安息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정한 오직 하나의 약속 사항이 ‘편안함’이다. 편안함은 자기들의 정서와 안목에 따라서 만들어진 일본의 전통적인 약속 사항들보다 우위에 있다. 특히 ‘사무라이’를 연상케 하는 것들을 철저히 배제한다.
약속 사항은 대상을 평가하는 절대적인 잣대가 될 수 없다. 약속 사항은 또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다르게 정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약속 사항이 먼저 정해지고 그에 맞추어 대상물이 만들어졌다면 그것은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있겠다.
5. 한국적 찻사발, 우리의 찻사발
우리의 찻사발은 질박하게 만들어진 조선의 사발에 ‘편안함’을 보태면 충분할 것 같다. 그것은 ‘일본 다인들이 자기들의 정신과 다풍을 따라서 다분히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약속 사항’과 비교할 수 없다. 편안함은 모든 사람이 본디 타고난 마음에 기초한 것이요 거기에는 어떠한 의도意圖도 담겨 있지 않다. 그것은 아무 것에도 매이지 않고 아무 것도 구하지 않는 아름다운 약속이다. ‘보기에 편하고 쓰기에 편한 무위자연의 사발’이라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그 옛날에 바다를 건너가서 일본의 국보와 문화재가 된 조선의 사발은 재현할 수 없다. 왜냐하면 조선의 도공들이 사발을 빚을 당시에는 약속 사항이 존재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찻사발로 쓰일 것이라는 사실조차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직 생존을 위해서 하염없이 사발을 빚었다. 따라서 약속 사항에 부합하는 조선의 사발을 빚으려면 전 생애에 걸쳐서 끊임없이 그릇을 빚던 그 옛날 조선의 도공이 되어 수많은 그릇을 만들어낸 후에 거기에서 골라내야한다. 결국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약속 사항을 염두에 두고 만든 것은 아무리 똑같이 만들어도 기교와 작위와 인공미로 치장한 모작일 뿐이다. 차라리 정교하고 화려하게 만들어진 그릇을 재현해냈다면 기술력이라도 인정을 받겠지만 이는 모작에 대한 어떤 가치도 부여받을 수 없다.
선다일여茶禪一如라 했다. 茶와 선禪은 따로 떼어놓을 수 없다는 뜻이다. 선종禪宗의 가르침은 ‘조작을 삼가라’는 것이다. 조선의 도공들이 만든 사발은 無心無作하다. 이는 선종의 가르침과 통하며 차의 정신과 통한다. 그러나 재현은 有心有作하다. 의식적으로는 결코 무심무작을 재현할 수 없다. 아무리 일그러뜨리고 거칠게 만들어도 작위의 흔적은 지울 수 없다. 특정 지역의 흙으로 이도찻사발을 재현했다는 어느 도예가의 전시회에 다녀온 어떤 사람이 이런 소견을 내놓았다. 『재현되었다고 하는 이도자완, 하동찻사발이 내 눈에는 무심무작의 것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도예가의 재현再現 추구라는 유심유작의 긴장이 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사물을 보고 미추美醜를 구분하려는 나의 매너리즘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 때문인지…….』http://www.mediamob.co.kr/nobori/frmListBlog.aspx?cate=4670&page=5
우리의 차문화가 겨우 명맥만을 유지하던 시절에 일본의 대명물이 된 조선의 사발에 관심을 갖고 그것을 재현하기 위해서 애쓴 도예가들의 공로를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언제까지나 그 일에만 매달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지독한 가난 속에서도 우리 그릇에 녹아 있는 조상의 숨결을 찾으려고 애쓴 저들이 있었기에 우리의 찻사발이 오늘의 위치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차피 본질적으로 재현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그들의 노력에 감사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야나기 무네요시가 의미 있는 말을 남겼다. 『차는 모름지기 앞으로 나아가야 하고 한 군데 머물만한 것이 아니다. 다실도 발전이 있어야 한다. 이에 따라 기물의 척도나 형태에 변화가 있어도 좋다. 좀 더 나아갈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창작력이 없는 자의 생각에 불과하다. 초기의 다인들은 그 창조에 있어서 뛰어났다. 이 세상에는 받아들여도 좋고 또한 살려도 좋은 무수한 다기가 있다. 원래 ‘대명물’은 결코 다기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는 전통의 개념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 ‘전통은 살아있는 생물체와 같이 진화하고 발전해야 한다.’ 그렇다. 그 시대의 주관적인 가치판단에 따라 진화하고 발전하지 않는 전통은 단지 문화유산에 불과하다. 일본인들이 추앙하는 이도찻사발은 보존가치가 있는 유물일 뿐이다. 이는 재현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유물에 대한 모작은 기념품에 불과하다. 애초에는 일상의 용기로 만들어졌던 것이기 때문에 모작은 더욱 가치가 없다. - 따라서 그는 일본전통문화의 계승 발전을 추구하는 한편 진화되고 변화된 새로운 대명물의 탄생을 강력하게 희망했다.
이는 오늘 날 우리의 도예가들이 깊이 생각해야할 대목이다. 자기가 만든 찻사발을 이도[井戶] 혹은 이라보[伊羅保], 고모가이[熊川] 등으로 칭하는 것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다. 일본의 유물遺物을 닮은 복제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그리도 자랑스럽다는 말인가! 모작은 연습의 과정으로 혹은 오직 상업적으로 필요할 뿐이다.
약속 사항으로 규정된 일본인의 미의식은 오늘날 이 땅의 일부 다인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모작에 열광하며 특정 작가의 것에만 매달리는 행태가 바로 그것이다. 약속 사항에 얽매인 미의식의 집단화 현상이다. 집단적인 미의식은 미적가치를 획일화함으로 말미암아 미의 다양성을 추구하는데 걸림돌이 되며 풍부한 창의성에 의한 작품 활동을 위축시킨다.
찻사발을 포함하여 다구를 선택할 때에 중요한 것은 금전 보다 안목이다. 안목에는 ‘자유’가 필수적이다. 작가 이름이나 타인의 평가 혹은 시류에 얽매이지 말고 자유롭게 소신껏 줏대를 세우고 미적, 기능적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 이 같은 훈련의 과정을 통해서 안목을 높이면 경제적인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을 뿐 아니라 고액을 지불하고 ‘눈을 속이는 잡기雜器’를 구입하는 우愚를 범하지 않는다.
약속 사항에 유난히 얽매인 다인들이나 도예가들을 보면 그 속내가 의심스럽다. 남보다 먼저 모작을 만들어냄으로써 얻은 기득권이나 훅은 소장하고 있는 모작의 기치를 지키려는 것은 아닌지, 창작을 위한 산고産故를 겪는 것보다 오직 시류에 편승하여 약속 사항에 부합하는 모작을 만들어 돈을 벌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 것만큼은 사실이다.
김동현 선생은 ‘조선의 찻사발이 아닌 한국의 찻사발, 친숙하지만 낯선 찻사발의 출연’을 기대한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이제는 일본으로 건너가서 저들의 문화유산이 되어버린 조선의 찻사발이 아니라 한국인의 정서와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우리의 찻사발이 나와야 한다.
그러나 이는 도예가들의 함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우리의 가루차문화가 정립되고 품질 좋은 가루차 생산이 이루어져야 한다. 세계인의 이목이 찻사발보다 먼저 우리의 차문화를 주목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일본인들에게 약탈되어간 조선의 사발’이 저들의 국보와 문화재가 되고 세계적인 자랑거리가 된 이면에는 저들의 탄탄한 차문화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아마도, 일본인들이 이 글을 접한다면 몹시 자존심이 상할 것이다. 하지만 필자기 영향력 있는 유명인이 아니니 그럴 일은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누군가가 불만스러워할지라도 할 말이 있다. 일본의 일부 유명 인사들이 시도 때도 없이 우리나라를 비하하는 망언을 일삼는 것에 비하면 이 글은 매우 신사적이지 않은가! 그리고 우리의 다인들이나 도예가들이 이 글을 읽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그들의 민족적 자긍심’을 의심하련다. (월간 Tea & People 2010. 10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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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차생활을 하면서 매우 놀라웠던 것은 다기를 만드는 도예가들 중 차를 즐기는 이가 드물었다는 사실입니다. 차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 만든 다기가 많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었지요. 또 차를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에서 차의 본질을 도외시하고 형식에 치우친다거나 혹은, 배워서 안다는 것이 오히려 차의 본질에 다가서지 못하게 만드는 것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해서 상용가치가 떨어지는 다기가 너무 많습니다. 기능성에 문제가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저온에 구운 무유다기는 차맛을 변질시키는데 작가들이 이런 점을 일고나 있을까요? . 고맙습니다.
하고 싶던 말. 쓰고 싶던 글. 속이 다 시원해집니다. 뭔가에 끌려가는듯 다도를 배우고 찻사발에 대해 먼저 시작한 이들에게 배우면서도 작위적인 논조. 우리 사발인데 우리한테는 없는 정신이 다른 곳에서 만들어져 오고... '이것이 맞을까?' 그랬던 부분을 이렇게 시원하게..... 감사합니다.^^
공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기득권에 취한 차인들에게 돌맹이를 맞을 각오로 썼습니다. 하지만 이 글을 실어준 잡지사 대표가 더욱 용기 있는 사람이지요, 의식 있는 소수의 사람들로 인하여 차맛이 절로납니다. ^^
옛날 한 여인이 사람들로부터 돌팔매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그녀의 행동을 비난하면서 말입니다. 그 때 예수님이 한마디 합니다. "누구든 죄없는 사람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지시오." 그러자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아무도 돌을 던지지 못하였습니다. 둘로스님도 걱정하지 마세요^^
다도는 영주 밑에서 차회를 여는 사람들이 만들고 발전성립한 것이 아닐까요 요즘식으로 티케이터링일 것 같습니다 센리큐가 말이죠
일본의 다도는 매우 정치적이지요. 지금도 일본인들은 외국의 사절들에게 다도를 체험시키며, 그들이 무릎을 꿇고 두손으로 말차 한잔을 받아 마시는 모습을 보며 희열을 느낀답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맞습니다. 저는 다도가 성립을 나름으로 이야기 했습니다.
둘로스님의 생각이 잘 나타나 있는 글 잘 보았습니다.^^ 이곳에 글이 올라오니 읽는 즐거움이 있어서 좋습니다.
다만..조금은 저의 생각과 다른 부분들이 있어서 생각을 열어봅니다. 물론 저도 오랬동안 고민하던 부분들이고, 생각이 아직은 잘 정리되지 않은 부분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것인 이도다완을 보면 저 다완이 그냥 밥그릇이었다고 보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이도 다완에는 멋이 있기에... 한국의 멋이라고 생각됩니다.
사물은 보통은 자연 경관이 아름답다. 얼굴이 예쁘다.라고 단정적으로 얘기할 수 있지만,
어떤 전체적으로 풍기는 것은 인간의 감성과 연계되고 그것은 정신에서 느껴지는 것이기에 '멋'이라고 표현해야 말이 되는 것 같습니다.우리가 무엇을 보고 어떤 정신적인 느낌을 갖고 그것과 교감한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이도다완을 그저 밥그릇, 일상의 식기였다고(식기는 자주 사용하기에 재질이 튼튼해야함) 보기에는 우리의 안목이 너무나 낮은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도다완 류의 다완들은 조심히 다뤄야 하며, 쉽게 부서지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소리도 둔탁합니다. 입자가 백자나 청자처럼 고운 입자로 꽉 엉켜 있는 것이 아니라 입자가 성글다는 것이겠지요.
보통은 도자기에서 입자가 성근 흙은 좋은 것으로 치지 않지만, 이도다완은 그런 흙으로 만들었다고 봅니다.
그 흙의 특성을 훌륭하게 표현하여 놓은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일본에서 국보로 지정된 이도다완은 어쨌든 우리 것이었고, 그 이도다완에 스며있는 정신은 우리의 선차문화에서 찾아야 한다고 보기 때문에 그러한 맥을 연결하는 부분들에 대해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저 다완을 가져가서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정신을 심고 정치와 연관 지었지만 그것은 그들의 작위적인 행위였을 뿐이고,
우리는 우리의 정신을 있는 그 맥을 이어서 우리 정신을 회복하면 된다고 생각됩니다. 그런 우리의 흐름에서 우리의 정신이 표현되는 창의성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우리의 차문화의 정신을 찾을 수 있듯이...일본에 하청되다 시피하였던 다완 산업도 이제는 우리의 정신을 잇고 우리의 정체성을 찾는 방향성속에서 전개되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거기에서 새로운 작품들이 나올 것이고 한국적인 것이 세계로 뻗어가는 문화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차라리 일본에 국보로 지정된 이도다완을 반환해달라고 하는 것이 어떨까요...? 일본인이 자신들의 다도에 접목하여 자신들의 다도를 완성하였다고는 하나, 일본인이 이도다완의 진면목을 발견하였다고 얘기하지만, 사실은 우리의 정신이 배여 있는 것이고, 조선에서 밥사발로 사용하고 있었다.하는 것은 도공들이 자신들이 만든 것을 밥사발로 사용할 수도 있었을 수도 있고,(우리나라 도공들이 자신이 만든 도자기를 식기로 사용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일본인의 눈에 비춰져서 자신들이 그렇게 판단했던 것을 우리가 그것에 장단을 맞춰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됩니다.일본인들이 주장하는 것은 그들의 얘기일 뿐이라고 생각됩니다.()
좋은 말씀에 공감하며 우리 사발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일본인들의 모습과 그 이면에 가려진 웃음에 생각이 많아집니다. 더불어 그동안 우리 찻사발에 대한 생각과 가치에 대해 사발을 만드시는 분들과 차생활 하시는 분들 역사학자들의 진심어린 재조명이 필요할 듯 합니다. 낳은 정과 기른 정이 있겠지요.^^하지만 헤어짐에 있어 가슴아픈 역사의 질곡속에 이루어짐을 무어라 다 말 할 수 있을까? 그러한 사연을 알고 만드는 지 모르고 만드는 지 알고 사용하는 지 모르고 사용하는 지.^^도자기, 차 , 찻사발, 차인 사기장, 모든 곳에 욕심을 버리고 진심이 담겨질 때 사발도 그에 대한 대답을 하지 않을까요?
가난한 도공이 일인들을 위해서 찻사발을 만들며 사기장의 명맥을 이어온 것을 어찌 탓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제는 우리 차문화의 자존심을 회복해야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좋은글 깊이 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많은 부분에 공감합니다.^^
고맙습니다.
공감돼는 부분도 있지만 그래도 너무 한 나라의 문화를 개인적 잣대에서 해설한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조금 더 진실이나 왜곡된 부분은 없는지도 확인후에 글을 쓰는것도 나쁜지 않을거 같습니다. 저도 오랜 차생활을 해왔지만 분명 배울점이 더욱 많다고 생각하는 부분들도 많습니다. 소수의 모르는 분들의 의해서 왜곡돼어지는 경우도 많고요..
풍덩님 말도 맞겠지만 여기서 중요한건 우리건 우리가 지켜야 된다는 겁니다. 그럼 우리문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그만큼 힘이 있어야 됩니다. 그힘이 어디서 나오냐면 국민에게서 나오는거죠? 왜 일본인들의 다도문화가 발전했겠습니까? 그만큼 국민들이 사랑해서 입니다. 제 생각에는 왜 피카소니 로댕이니 등등 유명한 예술품들이 다 외국작품들이며 그런 작품들의 가격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렇게 우리나라에도 우리 사발문화에서도 정말 명품다운 아니 정말 전세계에 날릴수 있는 예술품도 나와야 된다고 생각됩니다 그런 힘이 국민들이 만들어줘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흔하고 흔하게 쓸수 있는 작품들이 과연 가치를 느낄수 있을까요
물론 가격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게 장인들의 정신이 어떠냐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요즈음 사기장들은 돈을 쫓다보면 정말 명품을 고르지 못하고 그냥 세상에 내어놓는 경우가 많은거 같습니다. 정말 오래전 만난 사기장은 자기가 마음에 드는 작품이 생길때까지 깨고 부수고 고르고 고르고 정말 한점이 나왔는것도 감사하게 생각하든 선생님이 있었는데 그런 작품에는 정말 작품의 가치뿐 아닌 가격에도 가치를 줘야 돼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저는 오히려 사기장들이 더욱더 욕심을 내서 전세계에 알릴수 있는 장인정신을 가지고 나날이 발전할수 있는 도공이 돼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