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구로사와 아키라(黒澤明) 감독의 영화 '라쇼몽(羅生門)' (1950년 제작)은 1951년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1952년 미국 아카데미상 명예상(최우수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한 일본 영화의 지존이다.
# 줄거리
나무하러 가던 나무꾼이 한 무사의 사체를 발견해 관가에 신고한다. 나무꾼은 무사가 부인과 함께 여행하는 것을 봤다고 증언한다. 무사의 살인 용의자로 악명 높은 도둑 타죠마루와, 도망쳤던 무사의 부인이 체포되었다. 이들은 각자 다른 진술을 한다.
타죠마루는 무사의 부인이, 자신과 무사가 힘을 겨루어 살아남은 사람과 살겠다고 했기 때문에 무사를 죽였다고 증언한다. 무사의 부인은, 타죠마루는 자신을 욕보인 뒤 도망쳤고, 자신은 자살하려고 했으나 죽지 않고 기절해 있었다. 그 사이 남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진술한다. 무당의 몸을 빌어 나타난 죽은 무사의 혼은 부인은 도둑과 정을 통한 뒤 도둑에게 마음이 끌렸다, 도둑이 무사에게 부인을 죽일지 말지를 결정하라고 하자 부인은 도망치고, 자신은 허무함을 견디지 못해 자살했다고 증언한다. 서로 엇갈리는 증언. 결국 사건의 진범은 미궁에 빠지고 나무꾼은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고 탄식한다.
# 이 영화의 주제
이 영화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의 소설『藪の中』(『야부노 나카』,덤불 속)를 각색한 것이다.
Ⅰ. 우리는 진실을 알 수 있는가?
소설 『야부노 나카』는 범죄 사건을 다룬 추리 소설로 읽을 수 있다. 만약 현실의 범죄 사건에서 시체가 하나, 칼에 찔린 상처도 하나라면, 범인은 반드시 하나여야 한다. 그러나 세 사람이 각자 자기가 살인범이라고 주장한다. 아쿠타가와는 이런 딜레마적 상황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아쿠타가와는 시종일관 객체(대상)의 실체를 다루는 리얼리즘 소설을 부정하고, 객체는 주체가 파악한 대상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관철시켰다.
과연 우리(주체)는 이 세계(객체)를 있는 그대로 파악할 수 있는가? 철학자들은 주체와 객체의 관계를 장님 코끼리 만지기에 비유한다. 코끼리의 다리를 만진 사람은 코끼리를 기둥 같다고 하고, 코를 만진 사람은 코끼리는 고무 같다고 하고, 귀를 만진 사람은 코끼리는 바나나 잎사귀 같다고 말한다. 같은 문장을 읽어도 '나'와 '다른 사람'은 받아들이는 바가 서로 다르다. 그 뿐이랴! 심지어 어제 읽은 느낌과 오늘 읽는 느낌이 다르다. 우리는 한 순간도 실체를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없다.
왜 일까? 우리가 객체(대상)을 인식할 때, 우리는 경험을 통해 축적된 다양한 정보망을 동원하여 객체의 실체를 재구성해낸다(구성설). 우리가 객체를 파악하고자 하면 할수록 객체의 실체는 왜곡된다. 칸트는 실체 그 자체(Ding An Sich)는 알 수 없다고 갈파했다.
아쿠타가와는 『야부노 나카』에서 철저하게 우리의 인식 구조에 내재되어 있는 허위성을 폭로했다. 『야부노 나카』는 모든 등장인물이 저마다 자신의 소우주 속에 갇혀 있다.
실체의 탐구는 서양 철학의 전통이다. 서약 철학은 만물의 근본 요소를 끊임없이 추구해 왔다. 일본에서 실체의 탐구는 아쿠타가와의 스승이자 일본의 대문호인 나츠메 소세키(夏目漱石)로부터 시작되었다. 영국 유학을 통해 서양의 개인주의를 경험한 소세키가 주체인 '나', 국가의 이념이나 가족 이데올로기로부터 독립된 '자아'를 탐구했다면, 아쿠타가와는 그 기반 위에서 주체의 항구적인 정체성을 파악하고자 했다. 소세키가 모더니즘(객관주의)의 대표자라면, 아쿠타가와는 실체의 모호함(ambiguity)에 눈 뜬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다.
아쿠타가와는 『야부노 나카』,『歯車』(『하구루마』,톱니바퀴)등에서 객체를 인식하는 주체의 불확실성, 시시각각으로 생성변화하는 주체의 다양성에 심취했다. 대상의 파악은 고사하고 자기 자신의 정체성조차도 애매모호하다는 인식은 아쿠타가와를 신경쇄약으로 몰아 넣었다. 불확실성의 미궁 속에서 헤메던 아쿠타가와는 결국 35세의 젊은 나이에 절망한 채 자살하고 말았다. 이 영화에서 '모르겠다,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를 외치는 나무꾼은 실체를 찾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아쿠타가와 자신일지도 모른다.
시간과 공간은 객관적인 철학적 범주이다. 그러나 개인은 저마다 주관적인 시간과 공간 감각을 갖고 있다. 째깍째깍 초침을 움직이는, 숫자로 치환된 시간에 맞춰 살아가는, 남들과 공유하는 객관적 세계가 있는가 하면, 나의 느낌에 따라 시간이 길게 느껴지기도 하고 짧게 느껴지기도 하는, 내 의식 속에 존재하는 주관적 세계가 있다(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원리를 생각하라). 주관적 세계에서 내 의식과 다른 사람의 의식은 공유되지 않는다. 객관과 주관의 충돌은 끊임없이 되풀이 되는 철학의 화두이다. 모더니즘은 객관적 세계만 탐구한다. 이에 반발한 해체주의는 주관적 세계만 본다. 둘 다 세계의 일면만 보는 환원주의의 왜곡된 시각이다.
아쿠타가와는 일본 미학의 상징적 인물이다. 일본의 미학의 진면목은 무엇인가? 자기 일생에 하나의 대상을 향해 목숨을 걸고 추구하는 것(「一生懸命」), 죽음을 통해 자신의 소신을 완성하는 것이 일본인의 미학이라면 미학일 것이다. 실체의 추구는 이론 물리학의 대상이지 문학자의 몫이 아니다. 문학은 그것을 이해하고 윤색해서 이야기로 각색해 낼 뿐이다. 불가능한 목표를 추구하다 자기 생명까지 던진 아쿠타가와는 너무 높이 날아오른 나머지 태양열에 날개의 밀랍이 녹아 떨어져 죽은 이카루스 신화의 또 다른 모습이다.
Ⅱ.주관세계와 객관세계의 통합
영화 '라쇼몽'과 소설 『야부노 나카』의 결정적 차이는 영화 '라쇼몽'에는 없는 목격자 나무꾼의 존재와 남이 버린 아이를 거두는 그의 선행이다.
영화에서처럼 법정에 불려 나온 증인들의 증언이 서론 엇갈리기만 한다면 판사의 입장에서 판결을 어떻게 할까?
이런 딜레마에서 최후의 의지처는 '사회의 건강한 상식'이다. 법질서 혹은 여론이란 결국 상식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런데 건강한 상식은 어디에 있는가?
중세까지는 神이 현상 뒤에 숨어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조종했으나. 神이 죽어버린(니체) 근세 이후엔 실체는 보통 사람의 이성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다. 결국 나무꾼은 건강한 상식을 가진 우리 이웃의 평범한 사람이다.
한편, 구로사와 감독은 기아(棄兒)를 거두는 나무꾼의 따뜻한 마음씨를 통해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아기는 희망의 상징이다. 온갖 욕망이 날아가고 최후의 희망만 남은 판도라의 상자다.
인간 보편성을 거부하는 이기적 개인으로, 고양이 마을이 되어버린 오늘의 世界를 구원할 희망은 건강한 상식이요, 사람끼리의 온정 뿐이란 메시지다.
아쿠타가와는 주관세계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다 자살로 생을 마감했지만, 영화에 나무꾼이라는 객관적 세계를 통합한 구로사와는 자살미수를 극복하고 88세의 천수를 누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