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오래된 미래 / 라다크로부터 배운다
- 헬레나 노르베리 - 호지 지음
- 서문 / 달라이라마
- 녹색평론사 / 개정증보판
따져보면, 하나로 통합된, 균질화된 지구촌에 대한 꿈은 근원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생명권에서 다양성은 강점이 되듯이, 인간문화에서도 다양성과 차이의 수용은 평화롭고, 번창하며, 조화로운 발전의 진정한 기초가 된다. 만약 새로운 천년에 우리가 우리를 위협하는 환경재앙과 사회적 붕괴를 피하려면, 우리는 지구촌을 포기하고, 세계화애 대한 대안으로 지역중심의 경제를 껴안지 않으면 안된다.
도시화가 장려됨에 따라, 농업체제가 붕괴되고, 농사일이 존경받는 일일 수 있다는 생각이 사라지고 있다. 이러한 자기부정은 심각한 수준에 이르러, ...
라다크 전통사회로부터 배울 수 있는 교훈은 가장 중요한 것들, 즉 자립, 검소, 사회적 조화, 환경적 지속성 및 내면적 풍요와 평화이다.
농장에 직접 신선한 농작물을 주문하면 일주일에 한번 농민들은 그것들을 상자에 넣어 보내는 것이다.
점점더 많은 사람들이 식품의 안전성과 영양가를 확보하는 최선의 방법이자 환경훼손을 줄이는 가장 좋은 방법이 유기농산물, 그것도 지역에서 생산된 유기농산물을 사서 먹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다,
궁극적으로 대중매체를 통한 선전이 아무리 광범위하게, 아무리 끈질기게 끊임없는 경제성장을 우리들에게 밀어붙인다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와 우리 아이들이 온전한 정신으로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하여 진실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우리 자신의 본능적인 이해를 꺾어버릴 만큼 강력한 것이 되지는 못한다.
지역적인 것, 작은 것, 친밀한 것, 자연적인 것, 인간적인 것을 지향하는 추세는 결국 자연이 승리할 것이라는 사실, 세계를 정말 돌아가게 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이와 같은 보다 깊은 가슴속의 힘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오늘날의 정복자들은 개발/광고/대중매체/, 그리고 관광이다.
올해에 나는 거의 똑같은 장난감 가게가 라다크와 스페인의 산골마을에 생겨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모두 푸른 눈에 금발을 한 바비인형과 기관총을 든 람보를 팔고 있었다.
인간이 오랜 세월에 걸쳐 두발로 걷기 시작하고, 언어를 사용하고, 도구를 사용하면서 진화해온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원자폭탄과 생며공학을 발명했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는 유럽이 산업화를 통해 변화하는 동안 세계의 대다수 사람들은 계속하여 다른 원칙과 다른 가치관에 따라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진화와 산업혁명이 초래한 변화를 구별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는 서구인들이 전통적인 민족들보다 더욱 고도로 진화했다고 말한다.
우리의 파괴력의 규모와 속도가 이렇게 컸던 적은 일짂이 없었다. 역사적 선례가 없다. 우리가 처한 상황은 유례가 없는 것이며, 시간은 우리편이 아니다.
나는 라다크에서 낭비도 오염도 없는 사회, 범죄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고, 공동체는 건강하고 튼튼하며, 십대 소년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어머니나 할머니에게 유순하고 다정하게 대하는 사회를 알게 되었다.
라다크에서 나는 진보로 인하여 사람이 땅에서, 서로서로에게서 그리고 궁극적으로 자기자신에게서 분리되는 것을 보았다. 나는 원래 행복했던 사람들이 서구적 규범에 따라 살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평온함을 잃어버리는 것을 보았다.
서구문화는 보다 넓고 장기적인 관점을 잃어버리고 점점더 전문화되고 당장 눈앞의 것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전문가들에게 의존하고 있다.
우리는 긴급히 지속가능한 균형 - 도시와 농촌, 남성과 여성, 문화와 자연 사이의 균형 - 을 향해 방향을 돌려야 한다.
사방이 산이고 황갈색에서 연초록까지 다양하고 따뜻한 색조를 띤 거대한 산정들의 고원이다. 위쪽에는 눈덮인 산꼭대기들이 조용한 푸른 하늘을 향해 솟아있고, 아래로는 포도줏빛의 가파른 돌담들이 황량한, 반달모양의 골짜기로 이어져 있다.
이 황량한 곳에서 어떻게 생명이 유지될 수 있는가? 모든 것이 헐벗었다. 한걸음 디딜 때마다 모래와 먼지의 구름이 일어난다. 그러나 눈에 들어오는 것을 제대로 알아보기 시작하면 거대한 코끼리의 가죽 같은 황무지에 눈부신 초록색 에메랄드처럼 박혀있는 오아시스가 시선에 잡힌다.
야생의 꽃들과 풀, 빙하가 녹아 흐르는 맑은 물이 가장자리를 두르고 있는 보리밭들이 나타난다. 밭 위편으로 하얗게 빛나는 삼층짜리 집들이 정교하게 새겨진 발코니를 달고 모여있다. 지붕 꼭대기에는 밝은 색깔의 기도깃발이 펄럭인다. 더 위쪽 산허리에 자리를 잡은 승원이 마을을 지켜보고 있다.
많은 것을 소유하고 소비할 수도 있고
부유함이 주는 즐거움이 넘칠 수도 있다.
위대한 명성과 권세도 누릴 수 있지만
죽음이 그 모든 것을 필경 빼앗아 가버린다.
죽음의 시간에는, 쌓아온 행적말고는
한조각의 부도 가져갈 수 없다.
나는 점점더 그 사람들과 그의 가치관, 그들의 세상을 보는 방식에 매료되었다. 왜 그들은 항상 미소를 띠고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그들은 그토록 험악한 환경에서 상당한 수준의 안락을 누리며 살 수 있는가?
꼭대기에 있는 해를 감싸고 있는 초생달은 생명의 단일성, 즉 이원성의 종식을 나타내고,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에게 굉장히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해와 달이 실은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음을 상기시킨다.
찻주전자는 아름다운 무늬가 새겨지고 은으로 상감이 된 청동제 물건이었다. 손잡이와 주둥이는 용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소남의 아저씨 푼촉은 어린 여자 아이를 흔들어 재우고 있었다. 그는 아기를 업고 앞뒤로 서성거리고 있었다. 할머니 아비-레는 무릎 위의 염주를 세면서 '옴마니반메홈, 옴마니반메홈.. ' 하고 진언을 외고 있었다. 나는 낯선 사람이 온 것을 조용하게, 별일이 아닌 듯이 받아들이는 이 사람들의 태도에 마음이 편안했다. 마치 내가 그 부엌에 전에도 여러 차례 앉아있었던 것처럼.
곡식이 무겁게 자라서 이랑까지 숙여지기를!
굵게 자라서 백명의 청년들도 벨 수 없기를!
너무나 무거워서 백명의 처녀들이 나를 수 없기를! / 라다크이 씨뿌리는 노래
그들은 부드러운 속도로 일을 하고, 놀라울 만큼 많은 여가를 누린다.
'어두워진 다음 잘 때까지'라는 뜻의 '공그로트', '해가 산꼭대기에'라는 뜻의 '니체', 해가 뜨기 전 새들이 노래하는 아침시간을 나타내는 '치페-치리트'(새노래) 등 모두 너그러운 말들이다.
사생아의 어머니는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지 않는다. 사실 그런 것보다도 화를 잘 내는 것이 더 경멸받는다. 라다크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심한 모욕은 '화 잘 내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늙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기있고 모든 일에 관여할 수 있는 주된 이유는 젊은 사람들과의 계속적인 접촉이다. 조부모와 아이들과의 관계는 아이들과 부모와의 관계와는 다르다. 가장 늙은 사람과 가장 젊은 사람은 특별한 결속을 이룬다. 그들은 흔히 제일 친한 친구이다.
'새가 날 수 있으려면 두 날개가 균형을 유지해야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혜가 자비심과 함께 하지 않으면 꺄달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라고 설명했다. 여성은 지혜를 상징하고 남성은 자비심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함께 종교의 본질을 이룬다.
문제가 되는 것은 내면이 어떤가예요. 여자의 성품이 더 중요해요. ㅇ기 아다크에는 이런 말이 있어요. '호랑이의 줄무늬는 밖에 있고, 인간의 줄무늬는 안에 있다.'
타시는 저명한 학자 나가르쥬나의 말을 인용하곤 했다. '존재를 믿는 사람은 소처럼 어리석다. 그러나 비존재를 믿는 사람은 더 어리석다. 사람은 존재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그 둘 다도 아니고 둘다가 아닌 것도 아니다.'
삶에 대한 - 그리고 죽음에 대한 - 라다크 사람들의 태도는 무상함에 대한 직관적인 이해와 그에 따른 집착의 부재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나의 라다크 친구들에게서 이런 태도를 되풀이해서 보아왔다. 사물이 어떠해야 된다는 생각에 매달리기보다 그들은 복되게도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능력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라다크 사람들의 실재개념은 순환, 즉 끊임없는 회귀이다. 이번의 삶이 유일한 기회라는 느낌은 없다. 죽음은 끝인 만큼 시작이기도 하다. 죽음은 하나의 태어남에서 다음의 태어남으로 가는 과정이며, 최종적인 해체가 아니다.
라다크 사람들은 아무것에도 우리처럼 집착을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들 대부분은 물론 우리의 삶에 그토록 영향을 미치는 집착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다. 친구가 떠나는 것을 보거나 어떤 값진 것을 잃어버리면 불행할 수는 있다. 그러나 굉장히 불행하지는 않을 수 있다.
만일 라다크 사람에게 "레에 가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마을에 머물러 있는 것이 더 좋으시겠어요?"라고 물으면 대답은 필경 "레에 가면 좋지요. 그리고 가지 않아도 역시 좋습니다."일 것이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정말로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만족감은 자신이 삶의 흐름의 일부임을 느끼고 이해하면서, 긴장을 풀고 그 흐름과 함께 움직이는 데서 온다. 당신이 먼길을 막 떠나려 하는데 비가 쏟아진다고 해서 비참한 기분이 될 게 뭐 있는가? 아마도 더 좋을 것은 없겠지만, 라다크 사람들의 태도는 그렇다고 해서 "불행할 게 무냐?"이다.
오만한 말을 타고
왕처럼 날으며
온갖 것을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자들.
새들도 날아다닌다는 것을 그들은 깨닫지 못하는가?
-타시 랍기아스, 여행자들에 화가 나서, 1980년
젊은 라다크 친구들에게서 그런 변화를 보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물론 모두가 난폭해지지는 않지만 화를 내고 안정감을 잃는다. 나는 한 온화한 문화 - 남자들, 젊은 남자들까지도 아기를 품에 안고, 할머니들께 정답고 부드럽게 대하면서 행복해하는 - 가 변화하는 과정을 본 것이다.
전통적인 경제에서 시간은 넉넉했고 오직 계절의 변화에 의해서만 제한을 받았다. 할 일이 아무리 많더라도 생활은 인간의 속도로 진행되었고, 누구든지 인내심을 가질 여유가 있었다.
기술의 변화는 또한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의 간격을 증대시킨다. 자동차를 타고 휙 달려가는 사람은 걸어가는 사람들을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먼지 속에 남겨 둔다. 또 사람들이 사는 장소와 일하는 곳이 달라지기 시작하자 새로운 사회문제가 일어난다. 여자들은 집에 남아있게 되고, 공동체는 깨어진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주변에 있다고 느끼지 않았다. 그들이 있는 곳이 곧 중심이었다. 거실의 텔레비젼을 통해서 세계의 다른 부분을 경험한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듯이 우리를 그다지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경험이 아니다. 실제로는 바로 그 반대의 효과가 있을 수도 있다. 이상화된 대중매체의 스타들을 통해 사람들은 자기를 열등하고 수동적인 존재로 느낀다. 그리고 '여기 이곳'은 먼곳의 화려함에 대조되어 빛을 잃는다.
현대의학이 더 오래 사는 데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사람이 나중에 자녀나 손자녀와 떨어져 살고, 어쩌면 불구가 되거나 장애인으로 살게 된다면 장수를 누린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큰 의미가 있지 않을 것이다.
라다크 사람들은 나이를 겁내며 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삶의 각 단계는 그 나름의 이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불교의 세게관은 변화를 강조했ㄷ. 그러나 그 변화는 자비심과 모든 현상의 상호연관성에 대한 심오한 이해의 틀 안에서의 변화였다.
전통사회에서의 유대관계와 책임이 부담이기는 커녕 내면의 평화와 만족감을 위한 전제조건인 깊은 안정감을 제공했다는 사실에 확신을 갖는다.
현대문화는 여러가지 환경문제를 만들어내고 있고 그것을 통제하지 않으면 회복할 수 없는 파멸로 치달을 것이다. 사회적으로도 현대문화는 공동체의 붕괴와 개인의 정체성의 파괴를 가져온다.
과학적 탐구가 쓸모가 없다거나 기술이 유용하게 될 수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그 두가지가 단기적인 이익과 편의주의라는 좁은 목표에 연결되어 있고, 우리 사회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부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우리는 윤리와 가치를 송두리째 잃어버릴 위험에 처해 있다.
세계 인구의 삼분의 일이 세계 자원의 삼분의 이를 소비하면서 나머지 사람들을 돌아보고 자기들이 하는 대로 따라하라고 말하는 것은 사기와 별로 다를 게 없다. 개발은 흔히 착취, 즉 새로운 식민주의의 그럴듯한 이름일 뿐이다. 개발과 현대화를 추진하는 세력은 대다수 민중을 종래의자급경제로부터 끌어내어, 환상을 좇게 만들고, 결국 물질적으로는 궁핍해지고 심리적으로는 방향을 잃게 만들었다. 대다수는 빈민가의 주민이 되어버렸다. 땅과 지역경제를 떠난 결과 결코 실현될 수 없는 도시의 꿈의 그늘 속에 주저앉게 되어버린 것이다.
자동차에 의존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기차나 자전거를 이용하거나 걷는 쪽을 더 좋아한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다. 산업화된 국가에서 의료도 자연적인 방법을 점점더 많이 차용하고 있으며, 실재에 대한 기계적인 해석에서 보다 정신적인 해석 쪽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것도 주요 뉴스로 다루어지지 않는다.
궁극적으로는 자기 존중과 자립을 증진시키고, 그렇게 함으로써 생명을 떠받치는 다양성을 보호하고, 지역중심의 진정으로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조건들을 만들어내야 한다.
우리는 지역적인 것과 세게적인 것 사이의 균형을 되찾을 필요가 있다. "세계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라는 말이 오늘날 흔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만, 현대화의 추진력은 전적으로 세계화의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자연과학을 포함해서 교육의 모든 분야에서도 지역적 지식을 후원해야 한다.
탈 중심화된 개방방식은 소규모 농업에 막대한 이익을 줄 것이다. 수출용 작물보다 지역소비용 식량생산이 강조된다면, 그들의 생산물이 보조금을 바은 수송체계를 통해 멀리에서 실려온 생산불들과 경쟁하지 않아도 되나면, 그리고 대규모 농장과 기업농에 맞는 자본집약적인 농업시설이 아니라 지역의 조건에 적합한 농업기술의 개발이 지원을 받는다면, 소규모 농민들의 형편이 더 좋아질 것이다. 그리고 살충제와 화학비료의 사용이 아니라 행태적으로 더 건전한 방법이 권장된다면 역시 농민들에게 혜택이 돌아갈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이미 많이 진행되고 있다 생산자와 소비자의 거리를 줄이는 농민시장이 생겨나고 있고, 전세계적으로 수많은 개인과 단체들이 이미 증명된 전통적인 농업체계의 성공에 고무되어 지역에 기초를 둔 지속가능한 대안들을 탐구하고 있다. 그러나 공식적인 지원은 아직 크게 뒤떨어져 있다. 유기농업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을 정부들이 인정하고 있다는 고무적인 징후가 있기는 하지만 경제적 인센티브는 여전히 생명공학과 대규모 기업농쪽에 주어지고 있다. 우리는 소규모의 다품종 농업에 대한 국가적 지원을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긴급히 시행하지 안으면 안된다.
탈중심화된 개바방식으니 필경 여성의 지위를 강화할 것이고, 남성적 가치와 여성적 가치 사이의 균형을 회복시키는 데 기여할 것이다. 산업문화에서 권력은 거의 배타적으로 남자들에게 부여된다. 산업문화의 초석이라고 할 수 있는 과학, 기술, 경제학은 그 발단에서부터 남성들이 주도해왔다. 남자들이 임금을 받는 일잘.를 찾아 도시로 떠나버림에 따라, 개발을 통해 여자들은 - 비유적으로나 문자 그대로나 - 뒤쳐지는 결과가 되었다.
오늘날 제3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가족은 아직 온전하고 강력하다. 어린아이들과 노인들이 서로 부양하고 안정감을 주면서 함께 살고 자란다. 그러나 이러한 가족간의 유대도 강력한 서구식 진보세력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다. 그 세력을 세대간ㅇ 갈수록 분열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추세를 역전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정서적으로 건강한 가족들과 개인이 존재할 수 있는 강한 공동체의 유대를 지원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강력한 지역경ㅈ를 지원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고려들은 일반적인 개발의 사고범위 밖에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말할 것도 없이 인간의 복지에 근원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다. 우리가 잊어서는 안될 것은 인간복지야말로 혹실히 개발의 궁극저인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탄의 국와이 말한 것처럼, 한 사회의 복지의 진정한 지표는 국민총생산이 아니라 '국민총행복'인 것이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 / 경제학자 E.F.슈마허 지음, 개발이 반드시 파괴를 뜻할 필요는 없다는 나의 확신을 강화시켜주었다.
미국에서 가장 현대적인 사람들은 돌로 빻은 통밀 빵을 먹지요. 그건 우리의 전통적인 빵과 비슷한데, 거기서는 흰빵보다 훨씬 비쌉니다. 그곳 사람들은 집을 우리처럼 천연재료료 짓고 있어요. 콘크리트 건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보통 가난한 사람들이지요. 그리고 옷도 '100퍼센트 천연섬유'와 '순모'라고 쓰인 상표가 붙은 걸 입는 추세지요. 가난한 사람들은 폴리에스텔 옷을 입고요,
우리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자기가 살고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회에서 제기된 문제들에 대하여 훨씬 더 쉽게 마음을 연다는 것을 발견했다. 내가 미국이나 영국에서 강의를 할 때, 라다크 사람들의 미소띈 얼굴과 자족한 표정을 본 서구인들은 도대체 진보가 무엇인지 재평가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세계 전역에 걸쳐 서구적 이해관계는 비산업화 사회를 포위하고, 진정으로 토착적인 개발을 거의 불가능하게 하고 있다.
라다크 내부에서 이제 개발은 아주 다른 관점으로 비쳐지고 있고, 바깥세계에서 라다크 이야기 - 그 전통문화의 성공과 생태적 개발의 모델로서의 그 잠재력 - 는 우리 모두의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해 필요한 토대가 무엇인지를 밝혀주는 데 도움을 준다.
나에게는 오늘날 서구사회가 뚜렷이 상반되는 두개의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 정부와 산업체들이 주도하는 주류문화이르기까지 압박하고 그본적인 인간욕구를 무시하면서 계속하여 경제성장과 기술개발을 향하여 무자비하게 나아가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광범위한 집단과 생각들로 이루어진 반주류의 흐름이 모든 생명은 뗄 수 없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오래된 지혜를 되살려왔다. 현재로서는 이것은 오직 소수의 목소리일 뿐이다. 그러나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진보의 개념 전체에 대하여 의문을 갖기 시작함에 따라 그 목소리는 힘이 커지고 있다. 녹색정당들의 결성과 환경단체들의 회원수의 증가는 환경보호에 대한 참여가 확산되고 있음을 가리킨다. 개개 소비자들은 경제체제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자기들의 힘을 깨닫기 시작하고 있고, 기업들은 '환경에 대하여 우호적'으로 보이려고 서로 경쟁하고 있다. 정부오 주요 국제기관들은 환경을 정치의제 중에서 높은 위치에 놓도록 압력을 받고 있다.
깊이 들어가보면, 인종적 폭력, 물과 공기의 오염, 가족의 와해, 문화적 해체 등 겉보기에 관련이 없는 듯한 문제들이 긴밀히 상호 연결되어 있다. 그런 문제들이 서로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면, 그러한 문제가 너무나 어마어마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 문제들의 접점을 발견한다면 그것들과 맞싸우려는 우리의 시도가 훨씬 더 효과적인 것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각 문제를 개별적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전체 그물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어떤 가닥을 잡아당기면 되느냐 하는 문제로 된다.
산업혁명 이래로 정치와 경제의 단위는 커진 반면에 개인의 시각은 더욱 제한되었다. 나는 우리가 균형잡히고 건전한 사회로 가는 길을 발견하려면 우리의 저치적/경제적 구조를 탈중심화하고 지식을 향한 우리의 접근방식을 더 넓힐 필요가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라다크에서 나는 인간적인 규모의 구조들이 땅과의 긴밀한 유대를 키우고, 활발하고 참여적인 민주주의를 키우며, 다른 한편으로 튼튼하고 생명력있는 공동체, 건강한 가족, 그리고 남성과 여성간의 보다 큰 균형을 어떻게 유지해주는가를 보았다. 이러한 구조들은 개인의 안녕에 필요한, 그리고 역설적으로 자유의 느낌에 필요한 안전성을 제공한다.
우리는 끝없는 경제성장과 물질적인 번영이 정신적/사회적 빈곤, 심리적인 불안정 그리고 문화적 생명력의 상실을 대가로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다.
아마도 라다크가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행복과 관련된 것일 것이다. 그것은 내가 더디게 배운 교훈이다. 여러 해가 걸려서 선입견의 여러 층을 벗겨내고 나서야 나는 라다크 사람들의 기쁨과 웃음을 제대로 보기 시작했다. 그것은 삶 자체를 순수하고 구김없이 받아들이는 일이었다. 라다크에서 나는 마음의 평화와 삶의 기쁨을 누리는 것을 타고난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알게 되었다. 나는 공동체와 땅과의 긴밀한 관계가 물질적인 부나 고급기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인간의 삶을 풍부하게 만들 수 있음을 보았다. 나는 삶의 다른 길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현재 세계경제의 출현과 과학/기술의 점증하는 지배력은 자연에 대한 우리의 관계와 우리들 상호간의 관계를 단절시킬 뿐만 아니라 자연 및 문화적 다양성을 파괴하고 있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 자연의 세계에서 다양성은 불가피한 생명의 현실이다. 우리는 아주 '하찮은' 곤충이나 풀도 우리의 생존에 중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 막 발견하기 시작하고 있다. 우리가 식물과 동물의 종을 놀랄 만한 속도로 말살시키고 있는 사실은 실제로 중차대한 문제가 되었다. 생물학자들은 지금 종의 다양성이 생명의 유지에 갖는 중요성을 입증하고 있고, 어떤 생물학자들은 단기적 이익을 위해 종의 다양성을 말살시키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큰소리로 말하고 있다. 세계 전역에서 사람들은 멸종위기에 처한 동식물들을 보호하기 위한 단체를 조직하고 있다. 야생동물의 장래를 보장하는 일 이외에 사람들은 염소, 양, 조랑말 그리고 그밖의 가 중 멸종위협을 받는 혈통들의 인위적 번식에 힘쓰고 있다. 어떤 사과재배농은 모든 사과나무가 '골든 딜리셔스' 같은 단일 품종의 교배종으로 대체되어버리기 전에 그 지역에 본래 있던 전통품종을 퍼뜨리려고 한다.
문화적 또는 경제적 고립주의로 후퇴하지 않고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지역 전통을 북돋울 수 있다. 문화적 다양성을 진정으로 존중한다는 것은 우리의 문화를 남들에게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이국적인 문화를 우리의 소비를 위해 꾸러미로 만들어 이용하고 상업화하는 것도 아니다.
대도시는 같은 수의 인구가 조그만 공동체를 이루고 흩어져 있는 경우보다 물리적인 공간은 덜 차지하지만 에너지 사슬에서 더 높이 살고 있고, 도시에서의 일인당 소비는 역시 더 높다.
사람이 하나의 집단에 속해 있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인간적 규모의 사회단위를 정당화시키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가족의 규모는 크지만 공동체는 작은 라다크로부터 직법 배울 수가 있다. 아이들은 다른 세대에 속한 사람들 특히 조부모와의 유대를 통하여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한다. 이 대가족 속의 인간관계는 긴밀하지만 핵가족에서처럼 격렬하지는 않다. 각 개인은 긴밀한 관계의 그물에 의해 부양을 받고, 어느 하나의 관계가 지나치게 많은 무게를 감당하지 않는다. 나는 핵가족에서 그토록 특지적으로 나타나는 애착이나 죄책감과 거부감 같은 것을 라다크에서 본 일이 없다.
분명히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대가족은 일반적으로 더 큰 공간과 유연성을 제공하며, 개인 각자에게 정서적으로나 책임의 문제에 있어서 훨씬 적은 압력을 준다. 대가족은 노인들과 여자들과 아이들에게 특히 유리하다. 대가족 안에서는 나이든 사람들은 그들의 경험과 지혜로 인해 존경을 받고, 그들의 느린 움직임이 공동체에 중요한 기여를 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그에 비해서 우리 사회에서는 기술적인 변화가 너무 빨라서 경험은 점점더 가치가 없어진다. 우리는 우리 주위의 세상을 너무나 극적으로 변형시켜버렸기 때문에 늙은 사람들은 그들의 살아온 경험에서 제공할 것이 별로 없다. 서구를 여행해본 라다크 사람들은 말을 건넬 사람도 없이 혼자 사는 노인들이 받는 홀대를 보고 경악했던 이야기를 한다.
핵가족은 늙은 사람들을 배제하는 것과 동시에 여자들을 가둔다. 전통사회에서 여자들은 가정과 일 사이에서 선택을 할 필요가 없었다. 가정은 경제의 중심이고, 두 영역은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서 현대세계에서 가족이 있는 여자들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데 어느 쪽도 쉬운 선택이 아니다.
여러 가지 징후로 보아 핵가족ㅈ도는 제대로 기능하고 있지 않다. 이혼율, 청소년과 부모 사이의 불화, 충격적일 만큼의 가정내 폭력과 성적 추행 등은 핵가족제의 붕괴를 보여주는 예들이다. 심리학자들은 이제 '장애 가족'을 전형적인 가족이라고 묘사한다.
우리 사회가 조직되어 있는 방식 때문에 늙어가는 부모와 한 집에서 사는 것은 짐스러운 일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기본적인 인간욕구를 더 중시하도록 우리의 정치적 우선순위를 변화시킨다면 사태는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외부세계로부터 자신을 차단시키는 경향이 있는 핵가족과는 현저한 대조를 이루는 라다크의 가족내 인간관계는 자연스럽게 더 넓은 공동체로 확장된다. 때로는 어디까지가 가족이고 어디서부터가 공동체인지 말하기가 어렵다. 자기 어머니만큼 나이든 여자는 누구나 '어머니'라고 부르고, 자신의 형제가 될 만한 나이의 사람들은 모두 '형제'라고 부른다.
서구사회에서 공동체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탈중심화가 전제되어야 한다. 유동성은 공동체를 침식한다. 그러나 우리가 뿌리를 내리고 한 종소에 애착을 갖게 되면 우리의 인간관계는 깊어지고, 좀더 확고해지며 - 그것이 장시간 계속되면 - 좀더 의지할 수 있는 것으로 된다.
서구인들은 개인주의에 자부심을 느낀다. 그러나 때때로 개인주의란 고립의 듣기 좋은 이름일 뿐이다. 우리는 사람이 완전히 자기충족적이어야 한다고, 다른 누구도 필요하지 않아야 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긴밀하게 짜여진 라다크의 인간관계들은 억압적이기보다는 사람을 자유롭게 해주는 것으로 보이고, 나에게 자유에 대한 개념 전체를 다시 생각하게 했다. 이것은 겉보기처럼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심리학 연구는 긍정적인 자아 이미지 형성에 있어서 친밀하고 의존할 수 있고 오래 지속되는 타인과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우리는 또 그것이 건강한 인간발달에 기초가 된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고 있다. 라다크 사람들은 자아 이미지의 관점에서 아주 높은 점수를 기록한다. 그것은 의식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마도 자기회의가 전혀 없다는 것, 깊은 안정감에 더 가까운 것이다. 이러한 내면적 안정감이 관용을 낳고, 저마다 차이가 있는 타인들을 받아들이게 한다.
한세대 전에 어머니들은 버릇없는 아이가 되지 않도록 엄격한 시간표대로 젖을 먹이라는 말을 들었다. 내 친구 하나는 딸아이가 아기침대에서 배가 고파 울면 자기는 옆방에 앉아서 젖을 먹여도 되는 시간이 될 때까지 울고 있었다고 말했다.
상업적 대중문화에서 문화적인 이상은 젊은 백인 남자이다. 그 결과 여자들, 소수집단, 늙은이들은 불리한 처지에 놓여 있다. 우리는 스스로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만큼의 자유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살아있는 세계와 좀더 교감하는 관계로 돌아갈 필요가 있으며, 보다 넓은 패턴, 과정, 변화를 볼 줄 알아야 한다. 오늘날은 생물학자끼리도 두 사람이 같은 초파리를 연구하고 있지 않으면 말이 통하지 않는다. 생명을 조각조각으로 부수고 그것을 시간 속에 동결시킴으로써 어떻게 생명을 이해할 수 있는가? 우리의 정적이고 기계적인 세계관은 한계에 도달했고, 어떤 과학자들 - 특히 양자물리학자들 - 은 이제 세계를 구성하는 최소단위의 물질이 무엇이냐는 낡은 관심으로부터 보다 유기적인 관점으로 패러다임이 변화해야 할 필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더욱 심화된 전문화를 향해 가는 주류문화의 흐름에 정면으로 맞서서 우리는 비전문 지식인 - 관련성을 알아보고 각기 다른 분야 사이를 연결짓는 사람을 적극 장려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가장 가장 희망적인 추세의 하나는 보다 여성적인 가치관과 사고방식에 대한 존경심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성의 사고패턴에 대한 연구는 여성적인 관점이 감정의 면에서나 추상적 사고의 면에서나 관계와 연관성을 더 중시한다는 주장을 입증하고 있다. 그러한 관점은 분명히 여성들만의 자질은 아니다. 그리고 최근에 남자들도 더 의식적으로 자신들의 여성적인 면을 중요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수백년 동안 이처럼 관계를 중요시하는 사고와 존재방식은 무시되어왔을 뿐 아니라 산업문화에 의해 파괴되어왔다.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관점은 지금 균형을 잃고 있다. 여성적인 것으로의 전환은 오래 지체되었다.
이러한 전환에 수반하여 경험적 지식이 강조될 것이다.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훨씬 더 개인적인 경험으로부터 논리를 만들어낸다고 말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점은 라다크문화와 많은 전통적인 비서구문화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자연세계의 복잡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론은 경험에 근거해야 한다. 경험을 통한 학습은 역설적투성이이고 깔끔하지 못하고 변덕스러우며 우리의 기대를 뒤엎는 혼란스러운 현실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불가피하게 우리를 겸손하게 만든다. 만일 우리의 연구가 실험실보다는 현장에서 - 실제로 논밭에서 - 행해진다면 과학적 진보는 더 조심스럽게 진행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새로운 기술이 전체적 맥락 속에서 갖는 잠재적인 영향을 시간을 두고 검토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의도하지 않은 파괴적인 부작용을 덜 발생시킬 것이다.
서구에서 우리는, 현실에서 한 단계 떨어진 채 이미지들과 개념들에 의존하여 삶을 사는 경향이 있다. 타시 랍기아스는 영국에서 두어달 지내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놀라울 정도로 간접적입니다. 사람들은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글을 쓰고 이야기하고, 어디에 가든지 화분에 담긴 식물과 플라스틱으로 만든 식물이 있고, 벽에는 나무들의 그림이 있습니다. 그리고 텔레베젼은 늘 자연에 대한 프로그램을 방영합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도대첼 실제의 자연과 접촉을 갖는 일은 없는 것 같습니다.
생태적 마을(에코빌리지)을 건설하려는 움직임이 스웨덴을 휩쓸고 있다.
(스웨덴) 정부는 자연자원의 파괴를 국민총생산에서 빼는 환경예산체제를 확립하기로 했다.
산업세계 전역에서 사람들은 자연과의 보다 나은 균형을 추구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전통적인 문화들을 모방하기 시작하고 있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살피는 호스피스 일에서 분쟁을 해결하는 방법으로서의 명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가장 오래된 문화들과 가장 현대적인 문화 사이에 놀라운 유사성이 나타나고 있다. 라다크이 마을사람들이 항상 해왔던 것처럼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부엌을 가정의 중심으로 삼고, 자연적으로 기른 음식을 통째로 먹으며, 건강문제에는 오래된 자연치료법을 이요하고 있다. 이야기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난 것이라든지 육체적인 일에 대한 새로운 평가, 의복과 건축에서의 천연재로의 이용 같은 보다 섬세한 면에서도 변화의 방향은 명백히 드러난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지구 사이에 본래부터 존재해온 오래된 유대관계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은 흔히 무의식적인 것이다. 우리의 주류문화는 진보에 대한 선형적 관점, 즉 우리의 과거 및 자연법칙을 무시하는 관점을 장려한다. 현대의 진언이라고 할 만한 "우리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돌아갈 수 없다"는 우리의 사고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물론 우리는 돌아가고 싶어도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러나 올바른 미래를 찾는 우리의 노력은 불가피하게 자연 - 인간본성을 포함하는 - 과의 더 큰 조화를 이루는 어떤 근본적인 패턴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의 내면에 더 가깝게 부합하는 삶의 방식을 찾고자 하는 시도에서 가장 커다란 진전은 육아 분야에서 이루어졌다. 이것은 이 분야가 여성적 관저이 가장 강하게 느껴지는 곳이기 때문일까? 고맙게도 우리는 자연적 본능을 더 존중하게 됨에 따라 시간표대로 젖을 먹이는 일은 그만두게 되었다 이제 어머니들과 아버지들은 모두 아기를 몸에 밀착시켜 안거나 업고 다닌다. 우리는 전통적인 라다크 사람들이 결코 잊어본 일이 없는 사실 - 인간은 누구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을 자격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아이들은 자신을 증며해보일 필요가 없고 자기나름으로 존재할 권리를 애써 쟁취해야 할 필요가 없는 가족체계 안에서만 참으로 잘 자랄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우기 시작하고 있다.
전세계를 통해 심리학에서 물리학에 이르기까지, 농사일에서 가정의 부엌에 이르기까지 삶의 온갖 영역에서 모든 생명의 상호연관성에 대한 깨달음이 커지고 있다. 인간적인 규모의 삶과 보다 여성적이고 영성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새로운 운동들이 일어나고 있다. 그 수효는 증가하고, 변화에 대한 갈망은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추세는 흔히 '새로운'이라는 딱지가 붙여지고 있지만, 라다크가 보여준 것처럼 그러한 추세는 중요한 의미에서 아주 오래된 것이다. 그것은 실상 수천년 동안 존재해왔던 가치 - 자연질서 속에서의 우리의 위치, 우리 서로서로의, 그리고 우리와 지구 사이의 뗄 수 없는 연관성을 알아보게 하는 가치를 재발견하는 일이다.
산업문명의 본질적인 파괴성을 깨달은 일부 라다크 사람들과 함께 노르베리-호지가 사회발전의 새로운 대안으로서 제시하는 것은 반개발(counterdevelopment)이라는 개념이다.
'반개발'의 구체적인 아이디어는 탈중심화와 적정기술로 제시되고 있다. 이것은 녹색운동의 고전인 슈마허의<작은 것이 아름답다>의기본 메시지이기도 하다.
@@@ 이 책을 읽고 내 영혼을 가득 채워주고 아흔 아홉 살에 돌아가신 할머니가 생각났다. 할머니 저는 할머니를 사랑합니다. 정계님(안나) 할머니 천국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소서. 할머니 저는 할머니를 지금도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