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 산줄기 백지도♤
1대간.1정간.13정맥.10대강
산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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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암 신경준의 "산경표"에서는 우리나라의 산줄기를 1대간 1정간 13정맥으로 분류하였다. 백두산에서 시작되어 갈라진 산줄기는 모든 강의 유역을 경계 지었다. 동해안, 서해안으로 흘러 드는 강을 양분하는 큰 산줄기를 대간, 정간이라 하고, 그로부터 갈라져 각각의 강을 경계 짓는 분수산맥을 정맥이라 하였다. 이는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 :산이 곧 분수령이다. 따라서 산은 물을 넘지 못하고, 물은 산을 건너지 않는다.)이라는 원리를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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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간, 1정간, 13정맥 |
1대간 : 백두대간(백두산~지리산) |
1정간 : 장백정간(원산~서수라곶산) |
13정맥 : 청북정맥(낭림산~미곶산) 청남정맥(낭림산~광량진) 해서정맥(개연산~장산곶) 임진북예성남정맥(개연산~풍덕치) 한북정맥(추가령~장명산) 한남정맥(칠장산~문수산) 한남금북정맥(속리산~칠장산) 금북정맥(칠장산~안흥진) 금남정맥(조약봉~조룡산) 호남정맥(조약봉~백운산) 금남호남정맥(영취산~조약봉) 낙동정맥(매봉산~몰운대) 낙남정맥(지리산~분산) | |
'왜 산에 오르는가' 묻거들랑....
왜 산에 오르느냐 묻거들랑... 그냥 자비로운 미소로 대신하라.
왜 산에 오르느냐 묻거들랑... 마음에 가득한 욕심덩이를 녹이기 위해서라 대답하라.
왜 산에 오르느냐 묻거들랑.. 거기에는 언제나 변치않는 친구들이 많기 때문이라 대답하라.
왜 산에 오르느냐 묻거들랑~ 산이 주는 무한한 배려,감사,포옹이 있어서라 대답하라.
산에 오르거나 내려 오거나
혹시 산에 대해서 말을 할 때...
'어느 어느 산을 정복했다.' 라고 절대 말하지 말라!
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며
정복될 나약한 존재도 아니니....
산은 우리 사람이 꺾어 이기려 하거나 경거망동할 대상이 아니라
늘... 경외(敬畏)하고, 겸손(謙遜)하고, 하심(下心)하고,
진심으로 안긴다는 마음으로 오르고 내려야 한다.
산에 들면...
언제나 내가 막내이다.
거대한 바위.. 암벽.. 아름드리 나무.. 바위가 녹아 부서진 흙덩이.. 작은 돌하나
풀 한 포기, 졸졸 흐르는 맑은 계곡물... 산새..뭇생명들..
나보다 어린 것은 하나도 없다.
막내로서
예의를 지키고, 함부로 훼손 파손하지 말며
한걸을 한걸음 감사하는 마음으로 산을 대하여야 한다.
버리지 말고... 꺾지 말고.. 뽑지 말며 가슴으로 품고 눈으로 느끼돼
절대 흔적을 남기지 말라.
이름모를 산꾼이.........
백두대간 상식
현재 국내산악계는 산악전문잡지사에서 백두대간 산행안내 책자를 부록으로 출간하고
인터넷 웹사이트까지 생길 정도로 백두대간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은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증명하는 사례로 안내산행단체까지 가세하여 백두대간종주 전문산행 안내라는
문구까지 내건 안내산악회까지 출현하고 맥주와 같은 공산품에까지 이름을 붙이는 현상이 벌어졌다.
백두대간이 우리에게 갑자기 인기를 끌게된 것은 우리가 그동안 학교에서 배워 왔던
일제시대 때 광물수탈을 위해 1900년과 1902년에 실시된 지질조사자료를 가지고
고토 분지로(小藤文次郞,1856-1935)라는 일본지질학자가 15개의 산맥으로
조각 낸 산맥체계와는 전혀 다른 우리고유의 인문지리이기 때문이다.
잊고 있었던 백두대간이 다시 우리 눈앞에 펼쳐진 것은 1980년 겨울 지도연구가
이우형씨가 인사동의 고서점에서 조선조 영조때의 실학자 여암 신경준(1712-1781)이 쓴
산경표(山經表,1769년/영조45년 발행)라는 책을 발견한 순간 부터이다.
산경표는 신경준이 정의한 우리 산의 족보로 백두대간과 백두대간에 속한 산들의 위치에 대한 기록이다.
그 개념은 '산은 강을 넘지 못하고 강은 산을 뚫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개념으로 보면 국내 어떤 산에서든 백두산까지 물줄기에 의해 끊이지 않고
모두 능선으로 연결되어 물을 건너지 않고 백두산까지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중 가장 큰 산줄기가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뻗어나간 백두대간이다.
이 백두대간에서 다시 뻗어나간 산줄기를 정맥(正脈)과 정간(正幹)이라고 하며
정맥에서 다시 뻗어나간 산줄기를 지맥(支脈)이라고 한다.
더 쉽게 설명하면 대간과 정간은 한반도의 물줄기를 동서로 흐르게 하는 분수령이며
정맥은 그 강을 울타리처럼 둘러 싼 산줄기다. 이런 개념으로 보면 한
반도의 산줄기는 1대간 1정간 13정맥으로 되어있다.
이렇게 백두대간을 포함한 15개의 산줄기 이름 중 산이름에서 따온 것은
백두대간과 장백정간이며 나머지 13개의 정맥은 10개의 강이름에서 따왔다.
백두대간은 지도상 거리로 1천625킬로미터(1천572킬로미터라는 설도 있음)이며
이중 남한에서 종주 가능한 지리산 천왕봉(1,915.4m)에서 진부령까지의 지도상 거리는 690킬로미터가 된다.
북한쪽 총길이(삼재령에서 백두산 장군봉까지)는 약910킬로미터라고 한다.
천왕봉과 진부령간의 실제거리는 대락 1천500킬로 미터쯤 된다고 한다.
높이는 100미터에서 2천750미터까지 다양하지만 함경남도 흥남과 위도가 비슷한
북위40도 부근에 위치한 마유령 북쪽부터는 전부 1천미터 이상이다.
백두대간 종주가 일반인들의 관심을 끈 것은 지난 1988년부터 시작되었다.
한국대학산악연맹에서 발행하는 연감 엑셀시오에 백두대간 특집이 실리면서
각 대학산악부가 백두대간 종주에 뛰어들었다.
이어서 일반산악단체들이 뒤따라 백두대간 종주대열에 끼어 들었고,
우리 산하를 좋아하는 이들 모두에게 백두대간이 알려지게 되었다.
백두대간을 하루 15Km씩 걷는다해도 40여 일이 넘게 걸린다.
겨울에는 70여일 이상이 소요된다.
구간을 나누어 주말에만 종주해도 40회 이상산행을 해야하기 때문에 짧게는 1년 길게는 2년이 소요된다.
지난 94년 4월5일부터 5월21일까지 장금씨가,
이어 7월 17일부터 9월 25일까지 길춘일씨는 지원없이 단독으로 종주를 완료한 것을
시작으로 많은 사람들이 단독종주에 나섰다.
(93년 수원 그린피아산악회의 권동현씨가 무지원 단독산행을 했으며 동시에 그린피아 산악회는
생식으로만 종주했다는 기록도 있다)
아들과 아버지가 형제끼리 혹은 최연소자(당시13세)와 최고령자(당시75세)가 종주하기도 했다.
우리 민족 고유의 심신수련법인 국선도회원 5명은 지난 98년 8월15일부터 10월18일까지 65일동안 현미,
생콩,솔잎,칡,마 등 12가지를 가루로 만든 것을 생식하며 종주한 이색적인 기록도 세웠다.
이러한 우리의 보물 백두대간도 현재 개발이라는 미명과 입산자들에게는 속수무책이다.
동.식물의 보고인 백두대간의 생태계가 포장도로와 과도한 입산자들 때문에 심하게 훼손되고 있기 때문이다.
포장도로뿐만 아니라 골프장과 스키장 또는 기타 다른 개발용도로 인해 많은 부분이
훼손되고 있으며 이에 못지 않게 이미 많은 이들이 주말마다 구간 종주를 해 지도 없이도
종주가 가능할 정도로 길이 훤하게 난 것이 현실이다.
98년 녹색연합 백두대간 탐사팀이 답사한 결과 90년 백두대간에 23개에 불과하던
포장도로가 98년 3월현재 47개가 늘어난 72개(비포장,임업도로 포함)의 도로가 난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렇게 개설된 도로가 종주의 중요한 구간의 교차점(출발과 종착)
즉 중간보급지원 장소 등으로 중요하게 이용되고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훼손때문에 환경부는 2천년부터 남한측 백두대간 전 구간에 산림훼손방지용
생태축(生態軸)을 지정하여 지자체나 민간업체가 새로운 시설이나 도로를 건설 할 수 없게 했다.
백두대간 종주지도
구 분 |
탐 방 코 스 |
도상 거리 |
실제 거리 |
|
합 계 |
672㎞ |
1,240㎞ |
지리산권 |
소 계 |
77.1 |
142.2 |
지리산(천황봉)→장터목산장→촛대봉→세석산장 |
4.4 |
8.1 |
세석산장→선비샘→벽소령→연하천산장→총각샘→토끼봉 |
11.5 |
21.2 |
토기봉→뱀사골산장→임걸령→노고단→고리봉 →헬기장 |
12.8 |
23.6 |
헬기장→만복대→정령치→수정봉→입망치 |
13.5 |
24.9 |
입망치→여원재→고남산→상사바위→매요마을 |
11.5 |
21.2 |
매요마을→이실재→새맥이재→시리봉→복성이뒤재→꼬부랑재 |
11.6 |
21.4 |
꼬부랑재→봉화산→광대치→월경산→중고개재 |
11.8 |
21.8 |
덕유산권 |
소 계 |
119.1 |
219.4 |
중고개재→백운산→깃대봉→육십령 |
15.4 |
28.4 |
육십령→바위지대→서봉→남덕유산→삿갓봉→삿갓골재 |
11.1 |
20.5 |
삿갓골재→두룡산→동엽령→중봉→헬기장→빼재 |
19.5 |
35.5 |
빼재→삼봉산→지경내→초점산→대덕산→덕산재→쑥병이 |
16.6 |
30.6 |
쑥병이→삼도봉 |
8.1 |
13.7 |
삼도봉→질매재→바람재 |
15.8 |
29.2 |
바람재→황학산(비로봉)→여시골산→궤방령→모리골→ 가성산→눌의산→당마루 |
15.8 |
29.2 |
당마루→사기점→갈현고개→국수봉→큰재 |
17.5 |
32.3 |
속리산권 |
소 계 |
100.9 |
185.6 |
큰재→백학산→선유골→지기재 |
17.9 |
33.3 |
지기재→신의터고개→화령산→봉항산 |
17.9 |
33.3 |
봉화산→비재→828고지 |
7.1 |
13.1 |
828고지→형제봉→속리산(천황봉)→문장대→눌재 |
14.8 |
27.3 |
눌재→청화산→갓바위재→조항산→고모치 |
7.5 |
13.8 |
고모치→대야산→분란치재→장성봉→헬기장 |
13.5 |
24.9 |
헬기장→은치재→구왕봉→희양산→시루봉→이만봉→981고지 |
11.8 |
21.8 |
981고지→백화산→황학산→조봉→이화령 |
9.8 |
18.1 |
소백산권 |
소 계 |
106.6 |
196.7 |
이화령→조령산→마패봉→조령3관문→부봉 →하늘재 |
16.3 |
30.1 |
하늘재→포함산→대미산 |
13.5 |
24.9 |
대미산→황장봉산→벌재→저수재 |
15.6 |
28.8 |
저수재→배재→싸리재→뱀재→묘적령→도솔봉→죽령 |
20.1 |
37.1 |
죽령→연화봉→소백산(비로봉)→국망봉→상월산→1272고지 |
15.0 |
27.7 |
1272고지→마당치→고치령→미내리→마구령 |
14.7 |
27.1 |
마구령→늦은목이→석달산→박달령 |
11.4 |
21.0 |
태백산권 |
소 계 |
97.8 |
181.6 |
박달령→옥돌봉→도래기재 |
6.1 |
11.3 |
도래기재→구룡산→고부령→장바위 |
14.4 |
26.5 |
장바위→태백산→화방재 |
10.1 |
18.6 |
화방재→함백산→싸리재→1233.1고지 |
14.5 |
26.8 |
1233.1고지→매봉산→피재→한의령→새맥이 |
17.1 |
32.7 |
새맥이→덕항산→큰재→댓재 |
11.1 |
20.5 |
댓재→두타산→청옥산→고적대 |
13.0 |
24.0 |
고적대→이기령→상월산→987.2고지 |
11.5 |
21.2 |
오대산권 |
소 계 |
72.1 |
133.0 |
987.2고지→백봉령→지병산→생계령 |
12.1 |
22.3 |
생계령→석병산→두리봉→삽당령 |
12.2 |
22.5 |
삽당령→석두봉→화란봉→닭목재 |
12.9 |
23.8 |
닭목재→고루포기산→능경목→대관령 |
12.1 |
22.3 |
대관령→선자령→곤신봉→매봉 |
11.3 |
20.9 |
매봉→소황벽산→노인봉→진고개 |
11.5 |
21.2 |
설악산권 |
소 계 |
98.4 |
181.5 |
진고개→동대산→두로봉 |
8.1 |
14.9 |
두로봉→신배령→만월봉→응복산→약수산 →구룡령 |
14.0 |
25.8 |
구룡령→갈전곡봉→쇠나드리 |
17.5 |
32.3 |
쇠나드리→조침령→북암령→단목령→4거리 |
13.1 |
24.2 |
4거리→점봉산→망대암산→한계령→샘터 |
13.5 |
24.9 |
샘터→끝청→대청봉→희운각→산장→마등령 |
11.7 |
21.6 |
마등령→저항력→미시령 |
7.8 |
14.4 |
미시령→삼봉→신선봉→마산→진부령 |
12.7 |
23.4 |
마지막 종점
정감록이 예언한 십승지 마을
노스트라다무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서처럼, 우리나라에도 조선
시대 이래 민간에 널리 유포되어 내려온 대표적인 예언 서로 '정감록'이 있다.
이 예언서는 이(異本)이 40~60권에 이를 정도로 많은 것이 특징인데, 저자나 성립시기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있을 뿐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고, 반 왕조적인 내용이 많아 조선시대에는 주로 금서에 속했다.
하지만 이런 예언서는 민간에 은밀히 전승되어 조선시대 민간 사회를 평가하는데 꼭 필요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렇게 전해 내려오는 ‘정감록’에는 '십승지'라고 하는 땅이 기록되어 있는데, 십승지는 전쟁이나 천재가 일어나도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열 곳의 피난처를 의미한다.
당시 왜구나 오랑캐의 잦은 침략으로 지쳐있던 백성들에게 이와 같은 십승지의 존재는 살고 싶은 명소였고, 실제로 십승지를 찾아 떠나는 이들도 많았다.
근래에는 6. 25 전쟁 때 북쪽에 살던 이들이 십승지를 찾아와
정감록촌을 이루고 살기 시작해 지금까지 살고 있는 이들도 있다.
현재 이 십승지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지로 꼽히고 있다.
이본(異本)마다 조금씩 다른 십승지가 기록되기도 했지만, 남사고가 남긴 '남격암산수십승보길지지'에 나타난 십승지를 만나보자.
[목차]
1.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 (금계마을)
2. 경상북도 봉화시 춘양
3. 충청남도 보은 속리산
4. 전라북도 남원 운봉
5. 경상북도 예천 금당실
6. 충천남도 공주시 유구읍, 마곡
7. 강원도 영월 정동쪽 상류
8.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
9.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
10.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산
1.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금계마을)
"풍기 차암 금계촌으로, 소백산 두 물길 사이다"
경북 영주의 풍기는 십승지 중 1번지라고 불린다.
그 중에서도 금계(금이 박힌 닭 모습)바위가 있는 금계리는 안좋은 일이 일어난 적이 없다고 한다.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도 '살기(殺氣)가 없어서 사람 살기에 가장 좋다'고 한 소백산의 줄기에 위치한 이 금계마을은 유난히 정감록촌이 잘 형성되어 있다.
지금도 마을 곳곳에 장승을 세워 '정감록 십승지 마을'임을 알리고 있다.
실제로 이곳에는 한국전쟁 중에 정감록 책 하나만 믿고 이북에서 피란온 이들이 아직도 살고 있다.
이제 노인이 된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인민군이 소백산 죽령을 넘지 못해 풍기 주민들은 전쟁통에도 평온하게 지냈다고 한다.
경북 영주 근방에 함께 다녀오면 좋을 곳으로 우선 소백산이 있다.
충북 단양, 강원 영월, 봉화 등에 걸쳐 위치한 소백산 국립공원은 사시사철 언제 찾아도 좋은 산이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선정한 문화생태탐방로 중에 하나인 소백산 자락길 12자락 코스로 등산할 수 있다.
또,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 중 하나인 무량수전이 있는 부석사도 있다. 11자락길과 연계하여 찾아가면 좋다.
그 외에도 죽령 옛길, 희방사, 소수서원과 선비촌, 무섬마을 등은 영주 풍기와 함께 다녀가면 좋은 곳이다.
특산물로는 풍기인삼과 영주사과가 유명하며 영주한우도 부드러운 육질로 큰 호평을 받고 있다.
외부에서 정착한 이들이 생업을 위해 만들기 시작했다고 하는 풍기 인견(천연 섬유)도 유명하다.
2. 경상북도 봉화시 춘양면
"화산 소령 고기로 청양현이 있는데, 봉화 동쪽 마을로 넘어 들어간다"
서애 류성룡 선생의 일가가 은둔했던 땅으로 유명한 경북 봉화 춘양에 위치한 도심촌은 이순신 장군이 은둔했다는 설도 있는 곳이다.
임란 당시 선조에 의해 극형을 당할 뻔하기도 했던 이순신 장군이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승리한 후 정치적 역풍을 우려해 전사한 것으로 위장한 다음 이 곳에 은둔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설일 뿐이고, 실제로는 서애 류성용 선생의 친형인 겸암 류운용 선생이 난리 중에 어머님을 모시고 은둔한 곳이라고 한다.
태백산 아래에 자리잡은 도심촌 주위로는 청량산 도립공원, 청옥산 자연휴양림이 자리 잡고 있어 산을 좋아하는 이들이 즐겨 찾는다.
특히, 내년(2015년) 동양 최대의 국립 백두대간 수목원이 준공 예정이다.
또, 전통 한옥 탐방을 할 수 있는 닭실마을, 계서당도 근처에 위치해 있다.
봉화 특산물로는 송이버섯이 있는데 매년 9월이면 봉화 송이 축제가 열린다.
봉화 닭실마을에 있는 청암정
3. 충청남도 보은 속리산
"보은 속리산 사증항 근처로,
난리를 만나 몸을 숨기면 하나도 다치지 않을 것이다"
속리산에는 은신처로 숨을만한 자리가 많다.
고려 공민왕은 홍건적의 난을 피해 도망왔다가 홍건적 소탕 뒤에 연이어 일어난 반란 때문에 환도하지 못하고 보은에 몸을 숨겼다고 한다.
속리산 깊이 자리 잡은 법주사에는 고려 공민왕 뿐 아니라 세조도 거쳐간 사찰로 유명하다.
경북 영주가 사람 살기에 좋다고 했던 이중환의 택리지는 속리산 일대도 '난리를 피할 수 있는 곳'이라고 쓰고 있는데, 실제로 이곳에도 십승지를 찾아와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구병산에는 6.25 한국전쟁 때 이북에서 내려온 주민들이 지금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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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리산 법주사의 가을 풍경
보은에는 세조가 벼슬을 내린 소나무로 유명한 정이품송이 600년 넘게 살고 있다.
속리산, 구병산, 법주사와 함께 꼭 들려봐야 할 곳이다.
보은은 대추의 고장으로 유명한데 매년 10월이면 대추 축제가 열린다.
4. 전라북도 남원 운봉
"남원 운봉 동점촌 부근 100여리이다."
남원 운봉 지역은 일대가 고산 분지로 이루어져 있어서 피신처로 삼기에 적합하다.
한국지명총람에는 한 여인이 이성계를 운봉의 황산으로 안내해 왜장 아지발도를 죽이고 왜적을 물리치게 했다고 한다.
이성계는 그 여인을 산신령이라 생각해 여상(女像)을 새겼고, 그 고개를 산신령이 사는 고개라 하여 '여원치(女院峙)'라 부르고 있다.
이성계가 적장 아지발도를 무찌른 전투가 바로 고려사에 길이 남은 '황산대첩'인데, 이를 기념하여 황산대첩비를 세웠다.
또, 남원은 판소리의 양대 산맥인 동편제의 태자리이다.
판소리 다섯 마당 중의 하나인 흥부전의 배경이 된 남원시 아영면 성리마을이 있다.
이 곳은 흥부가 정착하여 부자가 된 발복지(發福地)라 한다.
춘향전의 주인공인 춘향과 이도령이 처음 만난 광한루원도 남원에 있다.
이러한 판소리 소재의 발원지가 된 것은 십승지로 알려져 각지에서 많은 사람이 찾아와 살았다는 것과 결코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흥부마을, 발복지
남원에는 앞서 말한 광한루원와 춘향테마파크, 황산대첩비, 지리산 일대와 지리산 허브밸리 등을 방문해 보면 좋다.
가왕 송흥록 선생의 생가, 최명하 작가의 소설 '혼불'을 기념하기 위한 혼불문학관 등도 있다.
먹을거리로는 남원추어탕이 유명하다.
5. 경상북도 예천 금당실
"예천 금당실에는 난의 해가 미치지 않는다.
병란이 미치지 않지만 임금의 수레가
다다르면 그렇지 못하다."
조선말기 이유인은 명성황후의 단골무당으로 신임을 받았던 신령군의 치맛바람으로 벼락출세를 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대한제국 법부대신이었던 이유인은 어느날 갑자기 금당실에 찾아와 99칸 행궁을 지었다.
금당실 마을에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이유인 대감이 명성황후의 도피처로 금당실로 결정하고 행궁을 지었다는 설이 있다.
정감록에 의하면 십승지의 조건으로 '임금의 수레가 닿으면 안된다'는 조건이 있었는데 그 금기가 어겨질 뻔한 것이다.
금당실은 실제로는 별다른 전란의 화를 입지 않았다.
마을 주민들은 이를 십승지 마을로써의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조선의 도읍 후보지로 거론됐을 만큼 명당으로 알려진 금당실 마을이 금당(金塘)인 것은 마을 지형이 '물에 떠있는 연꽃'을 닮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고택들에 대한 복원공사가 잘 되어 있어서 '생활문화체험마을'로 선정된 금당실 전통마을은 한옥탐방 여행을 하기에 적격이다.
주위에는 학가산 자연휴양림, 예천 용문사, 예천 온천, 회룡포 등 가볼만한 명소가 많다.
예천 금당실 마을
6. 공주 계룡산으로
유구와 마곡의 두 물길 사이 둘레가 200리나
되므로 피란할 만 하다"
마곡사는 주변 산세가 겹겹이 에워싸 난리를 피할 수 있는 십승지로 꼽혔다.
백범 김구 선생과 매월당 김시습이 이 곳에 은신한 것으로 유명하다.
김구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격분하여 일본 장교를 죽이고 이곳 마곡사까지 내려와 은신했다.
약 3년간 숨어지내던 김구는 이후 조국 광복 운동을 하게 된다.
또, 김시습은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자 이곳에 은신했다.
세조는 김시습에게 벼슬을 내리고자 이 곳 마곡사까지 찾아왔지만 그를 찾지 못했다.
마곡사 영산전의 현판은 이 때 세조가 남긴 것이라고 한다.
김구 선생이 마곡사에 심은 향나무
다른 십승지처럼 이 곳도 나라의 난리가 있을 때 마다 십승지를 찾아온 사람들로 정감록촌을 이루었다.
1800년대 이후에는 전국의 유생들이 이 곳으로 몰려와 자손을 보존하려 했다.
한국전쟁 때는 이북 주민들도 많이 모여들었다.
계룡산이 가까이에 있고, 공주산성, 무령왕릉, 공주 한옥마을 등이 가볼만한 곳이다.
공주는 밤으로 유명하다.
7. 강원도 영월 정동쪽 상류
"영월 정동쪽 상류는 난리를 피해 몸을 감출만하나, 수염이 없는 자가 먼저 들어가면 그렇지 못하다"
영월의 십승지 역시도 한국전쟁 때 이북 주민들이 많이 몰려왔다.
기묘사화 때 중종에게 숙청을 당한 조광조의 후손들도 영월의 미사리에 숨어들었다고 한다.
영월은 또 김삿갓면으로 유명하다.
방랑시인 김삿갓의 할아버지가 홍경래의 난에 휩쓸리면서 멸문지화를 당한 김삿갓은 어머니와 함께 간신히 이 곳 영월땅으로 숨어들었다.
방랑을 하던 김삿갓은 죽어서 다시 고향 땅에 묻혔다고 한다.
김삿갓의 생가와 김삿갓 묘, 시비, 문학관 등이 조성되어 있다.
영월에는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어린 단종이 유배왔던 청령포와 단종의 능 장릉이 있고, 한반도면 옹정리의 한반도지형이 있다.
한반도 모양을 닮은 지형을 갖춘 한반도지형은 유명 관광지로 자리 잡았다.
8.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
"무주 무봉산 북쪽 동방 상동으로 피란 못할 곳이 없다"
오지의 대명사로 불렸던 '무주구천동'
이웃에 있는 무풍은 덕유산 직전에 있는 대덕산이 감싸 안고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무풍을 복지(福地)'라고 했다.
또, 택리지에 '충청, 전라, 경상 3도가 마주친 곳'에 있는 덕유산이 가까이에 있다.
그 중 '나제통문은 신라와 백제가 치열한 영토다툼을 벌이던 곳으로 '신라 사람이자 전라도 사람'으로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전라도 사람들이 살고 있기도 하다.
이런 지리적인 요인으로 무풍에는 고종과 명성황후가 피신할 곳으로 99칸짜리 별궁 '명례궁'을 지었었고 지금은 터가 남아있다.
을미사변으로 갑작스럽게 명성황후가 시해되어 이 곳으로 피신하지는 못했다.
덕유산의 향정봉에 오르면 충청, 전라, 경상 3도를 한눈에 볼 수 있고, 덕유산 자락에 있는 무주리조트는 최고의 휴양지로 꼽힌다.
구천동, 나제통문 등을 함께 둘러보는 것도 좋다.
9.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
"부안 호암 아래가 가장 기이하다"
부안 변산은 허균이 은거했던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가 거처한 곳은 부안 변산 우반동 골짜기에 있는 정사암이었다.
이 곳에서 허균은 '홍길동전'을 집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그는 조선 최고의 여류문인으로 꼽히는 이매창을 만나게 되는데 둘은 시를 통해 정신적인 교감을 하며 각별한 친구로 지냈다고 한다.
매창이 죽은 후 그는 그녀를 위해 시를 남기기도 했다.
매창공원에는 매창의 묘와 매창의 시비 등이 있다.
변산반도에는 붉게 타오르는 석양을 볼 수 있는 낙조대, 새만금방조제, 곰소항, 격포항, 채석강 등 둘러볼 곳이 많다.
10.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산
"합찬 가야산 만수봉으로 그 둘레가 200리나 되어 영원히 몸을 보전할 수 있다.
동북쪽 정선현 상원산 계룡봉 역시 난을 피할만하다."
만수봉은 '장수하는 마을'에 붙는 지명이다.
정감록에는 합천 가야 만수동이라고 쓰고 있지만 현재는 없는 지명이다.
유추해서 그 지역을 찾아내야 하는데 풍수지리학적으로 볼 때 해인사에서 바라보이는 맞은편 돼지골 일 확률이 높다고 한다.
가야산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운 최치원 선생이 있다.
반란을 일으킨 황소를 글로써 격퇴한 '토황소격문'으로 당나라에서 더 유명해진 인물이다.
후에 벼슬을 버리고 해인사 근처 홍류동 계곡으로 들어왔다.
해인사는 가야산 가장 깊은 곳에 있는 피신처다.
한국전쟁의 위기도 무사히 넘긴 해인사에는 팔만대장경이 있다.
한국전쟁 당시 해인사에 있는 빨치산을 몰아낼 때 폭탄을 쓰지 않고 기관총을 사용해 대장경의 파괴를 막았다고 한다.
21세기에 십승지는 '역사를 느끼며 쉬어갈 수 있는 곳'
정감록에서 말하고 있는 십승지는 하나 같이 깊은 산 속에 자리잡아 쉽게 접근할 수 없고, 풍수지리학적으로 좋은 곳??위치해 있으며 자급자족으로 살아갈 수 있는 곳들이다.
이제 21세기에 십승지는 더 이상 은신이나 도피처로써의 장소보다는 역사의 장소를 보며 쉬어갈 수 있는 곳이 되어 사람들의 발길을 이끌고 있다. (옮겨온 글)
※ 참고도서 : 정감록이 예언한 십승지 마을을 찾아 떠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