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성곽이라 함은 '성(城)'은 내성(內城)을, '곽(廓)'은 외성(外城)을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흔히 구분하지 않고 합쳐 부르거나 성이라고만 부르기도 합니다.
적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한 시설인 성곽은 세계 어디에서나 만들어졌으며, 성곽의 입지 조건이나 형태는 민족적 특성을 갖습니다. 중국에서는 평지에 벽돌로 쌓은 성이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지형적인 조건상 산성이 많이 만들어졌고, 성벽의 재료도 주로 돌을 사용하였습니다. 어디서나 석재를 쉽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우리 성곽은 자연지형을 잘 이용하여 경사가 가파른 곳의 성벽은 낮게 쌓아서 인력을 덜고, 경사가 원만한 곳은 성벽을 높게 쌓아서 수비효과를 높였습니다. 읍성은 지방의 주요 지역에 관부(官府)와 민거(民居)를 둘러쌓은 성으로 지방 군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 행정 기능을 담당하던 성입니다.
우리나라에는 한(漢)나라의 군현이 설치되었던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에 토성이 남아 있고, 이 시기의 현에도 작은 읍성들이 있었음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들은 넓은 평야를 낀 평지나 낮은 구릉에 위치하였습니다.
수도로서 나라의 중심이 도성(都城)이라면 군, 현의 주민들이 살면서 군사적이거나 행정적인 기능을 지닌 곳은 읍성입니다. 그러나 모든 행정 중심지가 성곽을 두루는 것은 아니고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에만 성곽이 설치되었습니다.
또 대개 군사방어 시설인 산성들이 산 정상이나 계곡을 끼고 설치되는 것에 견주어 행정중심지이고 주거지역인 읍성은 평지에 설치되었으니 해미읍성과 함게 낙안읍성, 고창읍성들이 그러합니다.
해미읍성은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성곽길이 1,800m이고 높이 5m이며 면적은 6만평입니다. 해미읍성은 조선시대에 해안지방에 출몰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혀온 왜구를 효과적으로 대처하고저 축성한 성으로 당시 덕산에 있던 충청도 군사 최고 사령부인 병마절도사영을 이곳으로 옮겨 충청도의 군사권은 물론 내란방지등 사회질서까지 담당했던 곳입니다.
1578년(선조 11년)에 이순신 장군이 군관으로 이 성에서 10개월간 근무하기도 했던 성입니다.
서산 간척사업이후 이곳까지 물이 들어오지는 않지만 예전에서 성앞까지 바닷물이 올라왔으며 지금은 사라진 해자까지 있었고 성곽만으로 보면 낙안읍성과 더불어 제일 보존이 잘된 성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해미읍성은 조선말 천주교도들의 순교 성지로도 유명합니다. 천주교 박해 당시 관아가 있던 해미읍성으로 충청도 각 지역에서 수 많은 신자들이 잡혀와 고문받고 죽음을 당했으며, 특히 1866년 박해때에는 1천여명이 이 곳에서 처형됐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많은수의 신자가 처형된 이유는 천주교가 서해 해상을 통해서 전파 되었기에 서산, 당진 지방에 신자가 많았고 병인양요시 길잡이 역할을 한 것이 드러나 분노를 촉발 시켰고 근처에 있는 덕산 소재 남연군묘를 프랑스인들이 도굴하는 과정에서 천주교가 개입된 것이 확인되면서 대대적인 체포, 처형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해미읍성에 있는 충청 절도사가 재판, 처형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18세기 말에는 동학군의 주둔과 진압등 수많은 선열들의 피와 땀이 빼어 있는곳 입니다. 1960년에 이 성을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읍성의 표본으로 삼아 사적으로 지정하고 보수공사를 하는 한편, 성 안팎에 무질서하게 자리잡은 민가를 철거·이전시키고 종합적인 보존계획을 세웠습니다. 1974년에 동문·서문이 복원되었으며 1981년에는 성 안의 일부를 발굴한 결과 관아 터가 확인되었습니다.
해미읍성 진남문 . 충청도의 군사권을 움직일수 있는 막강한 곳이였던 만큼 기품있으면서도 웅장하다. 아치형의 홍예식 양식이 참으로 멋지다. 진남문 앞이 주차장이고 진남문이 실질적인 입구이다.
입장료 및 주차료는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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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읍성 성벽 높이가 원래는 10m 정도 였으나 현재 5m 정도 밖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북문에서 동문, 남문에 이르기까지는 성벽 주변에는 인공 해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해자(垓字) 란 성벽의 주변(안과 밖)에 인공적으로 땅을 파서 고랑을 내거나 하천 등의 장애물을 이용하여 성의 방어력을 증진시키는 성곽시설의 하나입니다.
좌측에 보이는 구조물은 치(雉) 이다. 치(雉) 란 성벽에서 적의 접근을 빨리 관측하고 전투시 성벽에 접근한 적을 정면 또는 측면에서 격퇴시킬 수 있도록 성벽의 일부를 돌출시켜 장방형으로 내쌓은 구조물인데 치의 형태는 장방형이 많고 반원형의 형태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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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읍성 내부 토성 읍성의 내부는 적의 침입시 노약자 및 부녀자까지 효율적으로 방어에 참가할수 있도록 토성으로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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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읍성 안에서는 조선 말기 내포지역 민간건물 양식을 적용한 민속가옥 3채(총 116㎡)와 부속건물 1채(20㎡)가 한창 지어지고 있습니다.
민속가옥들은 9월 말까지 마루와 문틀 등 내부공사까지 마무리한 뒤 10월에 올해 첫 생산되는 볏짚을 지붕에 올리고 제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또 천주교 박해현장이었던 회화나무 주변에서는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엿볼 수 있는 감옥과 전시공간 등을 갖춘 55.62㎡ 규모의 옥사와 부속건물을 짓는 공사도 시작됐고 이와 함께 읍성 주변에서는 해자 복원을 위한 기초 발굴조사도 한창입니다. 2억2천만원을 들여 추진하는 이 발굴조사가 끝나면 총 673m 길이의 해자 시설이 옛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많은 성들은 주로 피난성으로 이용되었습니다. 즉 적군이 공격해오면 성 주변의 마을에 살던 주민들이 모두 성 안으로 피난하여 군사들과 함께 적군을 막았습니다. 이렇게 들판을 비워 적군이 먼 곳에서 식량을 운반하느라 지치게 하면서 성을 지키는 것을 '청야수성(淸野守城;들판을 비우고 성을 지킴)' 전술이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외적이 침입했을때 거의 대부분은 ‘청야수성’ 전술로 맞섰습니다.
우리나라를 침략했던 당나라도, 거란도, 여진족도 모두 이러한 청야수성에 결국 무릎을 꿇은것입니다. 청야수성은 검증된 우리 민족의 승리의 전략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현시기 '성곽'의 현대적 의미와 '청야수성'에 대해 고민해야 합니다.
미국과 중국 사이의 패권 전쟁과 그 과정에서 동북아의 맹주가 되려는 일본등 강대국의 이해에 따라 앞으로 더욱 긴장이 고조 될 가능성이 높은 한반도 정세속에서 현대적 의미의 성곽을 찾아 단단히 축성하여 우리 국토를 지키고 관민이 힘을 합쳐 강한 적에 맞서는 현대판 ‘청야수성’ 전술을 개발해야 할 것입니다.
현대판 ‘청야수성’의 제 1단계는 남북의 화해와 평화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겠습니다. 우리민족끼리 조차 힘과 지혜를 모으지 못하고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남북간의 평화정착은 생존의 문제이고, 한민족 번영의 전제이자, 통일을 향한 행진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