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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어둠 속에 갇힌 불꽃 원문보기 글쓴이: 정중규
다중지성의 정원에 대해 말하다
『공공도큐멘트』와의 인터뷰
* 미디어버스가 발행하는『공공도큐멘트』는 자기생산출판운동의 한 생산물로, 이들은 사적인 생산과 유통의 방식을 취하는 zine 문화운동을 전개한다. 이들은 이러한 비주류적이고 비정형화된 소규모 출판물을 만드는 활동을 통해서 모든 것을 상업화 안으로 밀어넣는 현대 자본주의 속에서 예술의 자율성을 지키고 실천하는 활동을 벌이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사회적 연대활동임과 동시에 누구나 예술가나 출판인이 될 수 있다는 관념에 기반해 풀뿌리 정치활동을 벌인다.
* 아래는 이들이 이메일로 보내온 질문에 <다중지성의 정원> 사무국이 집단적으로 응답한 것으로, 『공공도큐멘트』66~81쪽에 실려 있다.
* 응답자 - 승준(Linio), 서현(Kaomo), 은혜(Graco), 석종(Bluecam), 루드(Lud)
1. 저는 다중네트워크를 통해 다지원(다중지성의 정원), 갈무리 출판사 등의 서교동 공동체(?)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또 세부적으로 보면 맑스코뮤날레, 에스페란토 공동체(레토), 다지원 강좌 등의 활동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것들을 마디(node)로 표현하신 것 같은데 이 지적인 공동체의 전체적인 그림과 세부 조직들의 실질적인 작동 방법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해주실 수 있을지요?
- ‘서교동 공동체’로 언급하신 우리들의 이 네트워크는 ‘현재까지’는 다섯 개의 세부모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갈무리 출판사>, <자율평론>, <다중네트워크센터>(<센터>), <에스페란토 레토>(<레토>), <다중지성의 정원>(<다지원>)이 그것입니다. 각각의 마디(node)들은 자기 나름의 독특한 체계·목적·역사·공간을 가지면서도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네트워크의 구성원들은 각자 하나 이상의 모임에 참여하면서, 그 모임들에서 민주적·자율적으로 도출한 특수한 운영원칙을 따르고 있는 것이죠. <갈무리>는 도서출판활동을, <자율평론>은 자율주의적 맑스주의와 공명하면서 웹저널 활동을, <센터>는 철학·미학 세미나나 각종 학습 및 연구모임들을, <다지원>은 문학·철학·언어·과학 등에 대한 대안적이고 실험적인 강좌들을, <레토>는 언어를 사용하고 유통하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운동이기도 한 에스페란토 모임을 구성합니다. 사실 우리가 처음 출발할 때를 떠올려보면 예상조차 못했던 모임들이 생겨나고 활성화된 것인 만큼 이 모임들 속에서 또 어떤 모임과 질서가 새롭게 탄생되어 다시금 이 네트워크와 접속될지는 가늠하기 조차 힘듭니다. 우리 자신의 능력들과 그 힘에 계속해서 새로운 힘들이 결합됨으로써 발생한 모임들, 이것이 우리의 공통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 이야기를 연결시켜 우리의 발생, 즉 우리는 언제, 어떻게 출발했는가?를 얘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언급해야 할 것은 사실 우리들은 전 인류가 걸어간 투쟁의 삶 속에서 태어난 것이라는 점입니다. 즉 새로운 삶을 살고자 했던 모든 혁신적 노력들이 우리의 전사(前史)이자 계보인 것이죠. 너무 거창한 출발점을 상정하는 것 아니냐고 되묻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기원전(BC 3세기) 에피쿠로스의 정원이 보여줬던 서로 간의 우정과 존경에 기반한 지혜의 교류를 우리 자신의 모습으로 간직하고, 성 프란체스코가 그랬듯 자연, 동물, 달 자매, 해 형제, 들판의 새, 가난하고 착취당하는 사람들이 포함된 즐거운 삶을 추구하고, 나아가 중국과 쿠바, 멕시코 혁명 등으로 확인되는 중앙집권적이지 않은 분산된 게릴라 투쟁을 전유하며, 유럽의 1968년의 욕망의 반란들과도 공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자신의 계보를 혁신적 노력들에 두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문학과 예술적 표현양식 속에, 또 때로는 정밀한 기하학적 증명 속에, 또 때로는 우리의 세미나 중간에 모습을 드러낸 저 흩뿌려진 이념들과 언어들 속에 우리 자신이 반복되어 나타났었다는 것을 우리는 지난 몇 년간의 집단 학습으로 확인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그들 당대에 미리 고착되어 있던 기존의 지배 체제 및 지배적 관념들과 갈등하고, 또 끝없는 전투를 벌이면서 비로소 어떤 역사적 장면으로 등장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들은 우리가 현재 반복하고 있는 그 ‘투쟁적 삶’을 우리 이전에 그려보이고 있는 것이죠.
- 이제 우리들이 그동안 걸어왔던 ‘현실의 운동’을 말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들의 집단 활동이 처음 출발한 것은 1994년 갈무리 출판사의 첫 활동에서였지만, 지적인 교류가 활성화될 수 있었던 것은 99년에서 2002년 초까지 유지되었던 ‘다중문화공간 왑’(wab)이라는 모임에서였죠. 당시 우리는 맑스의 ꡔ요강ꡕ, ꡔ자본론ꡕ과 함께, 그 자체가 이미 협업의 산물이었던 ꡔ제국ꡕ과 ꡔ천개의 고원ꡕ을 강독하면서,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1960~70년을 기점으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지배질서를 구축하게 되었고, 그래서 그 안에서의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양식이나 주체성의 구성방식도 바뀌어 가고 있다는 인식에 도달했습니다. 이전까지는 주로 레닌의 중앙집중적인 전위정당모델을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적 대안으로 사고했던 방식에 일정한 변화가 시작되었던 것이죠. 우리는 멕시코 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의 투쟁이나 이탈리아 아우또노미스트들의 빈집점거 운동, 대항지구화 운동들을 참조하면서 우리 자신의 구성에 대해 고민했지만, 당시의 ‘왑’은 몇몇 세미나 모임들의 연합 이상으로 발전하진 못했습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왑’의 해체 배경에는 월세비도 내지 못할 정도로 집단의 내적 결속력이 약해서였기도 했지만 지금과 같은 형태의 네트워크가 아직까지는 활성화되지 않았던 사회적 조건도 무시할 수 없었던 듯 합니다. 당시의 우리는 비록 여러 사람이 참여하긴 했지만, 자발적으로 생겨나는 네트워크들과 쉽게 접속하지 못하고 고립된 채 있었던 것이죠.
- <자율평론>은 ‘왑’의 문제로 드러났던 이러한 고립된 활동을 네트워크 망으로 완전히 개방하고, 나아가 이전에는 학습모임에 한정되었던 우리 자신의 활동을 보다 구체적인 정치 투쟁으로 연결시키는 작업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기획되었습니다. 이전 ‘왑’ 활동이 공간을 유지하는데 많은 시간과 돈을 요구함으로써 우리의 힘을 약화시켰던 반면, ‘웹저널’ 형태의 자율평론은 돈에 크게 의존하지 않으면서 구성원들(우리는 이 구성원들을 ‘만드는 사람들’을 줄여 ‘만사’라고 부릅니다)이 서로 협동할 수 있는 웹공간을 구축했던 것이죠. 온라인에서는 채팅과 번개모임을, 오프라인에서는 각자의 소속대학을 순회하는 방식으로 말이죠. 그동안 자율평론은 영어권과 프랑스에서 유통되던 정치철학적 문서들이나, 매 시기 등장하는 지구적 투쟁들(예컨대, 멕시코 사빠띠스따, 아르헨티나 뻬께떼로 운동, 프랑스 벙리유 시위, 시애틀·로마 등지에서 있었던 신자유주의 반대운동들)의 문헌들을 번역소개하고, 또 한국사회에서의 다중들의 투쟁들(예컨대, 장애인 이동권투쟁, 부안의 핵폐기장유치반대 시위, 반전평화 시위, 이주노동자 운동)을 지지하고, 그 흐름을 읽어내는 분석적 틀을 제시해왔습니다. 때로는 새로운 방식의 쟁점적 입장을(예컨대, 영화 오아시스를 둘러싼 논쟁, 성매매/성노동을 둘러싼 입장전개), 또 때로는 지난 3차례의 맑스코뮤날레 행사기간동안 ‘제국인가 제국주의인가’, ‘당인가 네트워크인가’, ‘민중, 다중, 시민’과 같은 타이틀 아래에서 ‘현대 자본주의와 대안적 주체성’을 논의하는 토론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기도 했었습니다. 지금까지의 이런 기획주제들은 일주일에 한번 발간을 위한 회의에서 논의되고 그에 대해 각자가 제시한 아이디어들을 모으는 과정에서 그 세부목록이 나열됩니다. 어떤 이는 글을 수집하거나 작성자를 섭외하고 어떤 이는 번역을 하고 또 어떤 이는 주장글을 생산하는 방식으로 하나의 기획이 세분화되어 완성되는 것이죠. 그렇게 현재까지 1년에 4호씩 22호가 발행되었습니다.
- <다중네트워크센터>는 기존의 갈무리 출판사와 자율평론 활동이 결합되고 활성화됨으로써 형성되었습니다. <자율평론>이 번역이나 주장을 통해 정치적 활동을 벌여냈다면, <센터>는 그런 활동을 가능케 하는 지적기반을 형성할 교류의 장이 되었던 것이죠. 이전에 ‘왑’이 겪었던 재정마련의 문제는 수적으로 늘어난 구성원들(우리는 이 구성원들을 ‘넷터’라고 부릅니다)의 회비로서 해결되었고, 또 ‘왑’을 반성하면서 구성원들의 운영 및 참여 방식도 보다 합리적인 형태로 공유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공간을 책임있게 운영할 참여자들은 ‘구성넷터’로서 센터의 실무를 담당하면서, 센터의 구체적 활동인 ‘세미나’에서 일종의 간사나 총무(우리는 이들을 ‘길잡이’라고 부릅니다)를 맡고, ‘이용넷터’나 ‘후원넷터’ 제도를 도입하는 운영의 원칙이 세워지게 된 것이죠. ‘구성넷터’는 일주일에 한번 갖는 ‘다모임’이라는 실무회의를 통해 센터의 운영, 재정, 인터넷 관리, 향후 일정을 짜는 일 등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구성넷터’는 자신이 학습하길 원하는 주제나 텍스트를 (그가 원하는 어떤 것이라도) 선정하고 모임을 구성할 자격을 부여받게 되는 것이죠. 각자 독립적인 세미나 모임 간의 교류는 ‘다모임’을 통해 연결되고, 그것은 심포지움이나 집단토의(우리는 이것을 ‘다중광장’이라고 부릅니다)의 형식으로 서로 모여서 서로의 학습을 공유하는 만남의 장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동안 개별적인 학습으로서만 충족되었던 여러 가지 사상적 조류에 대한 세밀한 학습이 가능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들뢰즈의 초·중기 저작들을 중심으로 꾸준한 토론이 이루어졌고, 이후에는 칸트, 베르그송, 하이데거, 메를로-뽕띠 같은 고전적 철학자들, 맑스와 맑스주의의 역사적 저자들, 푸코, 바디우, 아감벤의 저술들이 세미나의 대상으로 다뤄지면서 참여자들이 폭이 점차 다양화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다양한 사람들과의 접촉 속에서 에스페란토와의 만남도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죠. 에스페란토는 기존의 영미소설 강독이나 일본어 강독모임, 불어 학습 모임 등과 함께 구성원들의 언어 독해실력을 상승시키기는 효과를 낳았으며, 나아가 우리가 구축하는 네트워크를 좀더 확장시킬 계기를 마련해 주기도 했습니다. 일정한 학습과 교육의 기간이 지나고, 프랑스, 일본, 호주, 독일 등지의 에스페란티스토들(에스페란토 사용자들)의 방문이 이어졌는데, 그들과 함께 가졌던 토론모임들은 에스페란토 모임을 활성화시키는 계기로 작동하기도 했었습니다.
- ‘에스페란토 네트워크’라는 의미를 가진 <에스페란토 레토(reto)>는 기존의 한국사회에 있던 에스페란토의 여러 조직들과의 만남과 교류 과정을 거쳐 2006년 처음 형성되었고, 제 3회 맑스코뮤날레에서 ‘에스페란토와 맑스주의’라는 주제의 발표를 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2개의 에스페란토 모임(rondo)과 ‘호코모코노 방송’을 포괄해 ‘호코모코노(HKMKN)’(Homaranisma Komunlingva Movado Kontraû Novliberalismo,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인류인주의 공통어 운동)라는 조직으로 새롭게 태어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에스페란토 교육과 에스페란티스토들의 연결접속하는 네트워크 모임으로 기능할 이 조직은 12월 15~16일 동안 강화도에서 창립식을 가질 계획입니다. 에스페란토 모임(혹은 활동)은 세계화된 자본의 신자유주의적 질서에 대항할 다중들의 직접적인 소통과 인류인·지구인들의 문화적·정서적 교류를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마디를 구축하게 됩니다. 각종의 민족어들, 소수자들의 언어를 직·간접적으로 말살하는 영어지배문화에 맞서 소수어로서의 에스페란토를 사용하고 그 언어를 통해 지구인들과의 협력의 교류를 해내는 것은 다중들의 전지구적인 소통(이주노동 및 정보·정서·지식·예술·문화의 구성형태들)에 의존해 잉여이윤을 창출하는(그리고 그 잉여가치를 극소수의 경영자들의 수익으로 흡수해가는) 오늘날의 자본주의에 맞서는 다중의 투쟁의 한 양상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 하지만 오늘날 다중들의 지성은 ‘대학’과 ‘학교’라는 제도교육의 틀 속에서 그 자유의 날개짓을 마음껏 펼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대학은 ‘학술진흥재단’에게 얼마나 많은 돈을 받느냐에 자신의 사활을 걸면서, 더 좋은(더 많은 돈을 주는) 직장에 얼마나 많은 학생들을 배출하느냐를 자신의 실질적인 교육이념으로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산업적 테크닉을 가르쳐주고,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지식을 전수하는 것이 마치 대학의 과업인양 학생들을 몰고가지 않습니까? 또한 지성의 교류는 분과학문 체계 안에 묶여 있으며, 다른 학문적 체계와 연결되는 경우에도 그것이 이른바 ‘돈 되는’ 지식에만 한정되면서, 그 자신이 스스로 ‘돈 먹는 기계’를 자처하고 있지 않습니까? 1년에 천만원에 가까운 등록금을 내지 않으면 대학을 다닐 수 없다는 것은 말해주는 것은 바로 그 점이 아닐까요? ‘대학’이 이처럼 기업을 위해 봉사하면서 스스로 돈을 벌어들이는 기업이 되는 상황에 처해있다면, ‘(중·고등)학교’는 입시만이 자신의 존재이유인양 움직이고 있습니다. 학원이 학교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학교가 입시를 최대목표로 삼는 한에서 학교는 학원의 다른 종류의 경쟁상대에 불과합니다. 학교가 지성을 통해 돈을 버는 기관인 입시학원으로 학생들을 내몰면서 학교 자신을 죽이고 있는 것이죠. <다중지성의 정원>은 대학과 학교, 그리고 학원에 의해 죽어가는 다중들의 지성을 다시 활성화시키기 위해 기획된 새로운 형태의 교육기관입니다. 우리는 <센터>나 <레토>에서 서로 간의 교류를 통해 성장한 지성이 교육에 참여하고, 다시 그 교육 속에서 성장한 사람들이 타인을 가르키는 상호협동적 교육을 대안으로 생각하면서 <다지원>을 만들었습니다. 누구나 원하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 교육에 참여할 수 있고, 어쨌든 수강료를 통해 벌이들인 수익으로 최소한의 생계비를 보장받아 다시 학생이나 강사로 참여할 재원을 마련하는 방식의 교육기관 말이죠. 결국 이윤은 오로지 우리들의 집단적 지성을 서로가 살찌우는 방식으로만 사용되도록 말이죠. 따라서 그것의 교육형태도 특정한 분과학문에 가둬지지 않고 서로를 넘나들게끔 다양화를 꾀하고 상호 접속시키는 방식이 되게 하는데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올해 처음 개원해서 아직은 출발단계에 있기는 하지만 말이죠. 그 운영은 그 자신들이 또한 강사로도 참여하는, ‘상근담당자’와 각각의 요일별로 관리를 분담하는 ‘자원활동가’에 의해 이뤄집니다. 갈무리 출판활동가, 대학(원)생, 에스페란티스토가 참여하는 ‘상근담당자’와 ‘자원활동가’는 강좌의 개설, 강사섭외, 재정, 공간운영, 홍보 등을 책임집니다.
2. 현재 수유너머, 철학 아카데미, 문지 사이 등 일종의 지적인 공동체들이 점점 더 많아 지고 그것에 대한 요구도 더욱 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움직임이 활발해지는 이유가 뭘까요? 그리고 이들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성과 다지원의 활동이 이들과 차별되는 지점도 궁금합니다. (다지원 취지문에 이 부분이 설명되어 있지만, 다른 단체와의 실질적인 관계나 연결에 대해서도 궁금합니다)
- 다지원과 더불어 수유 너머, 철학 아카데미, 문지 사이 등과 같은 제도권 외부의 지적 공간이 생겨나는 이유로 제도권 내부의 지적 공간, 무엇보다도 대학에서의 지적 활동의 위기를 들 수 있습니다. 대학에서 이루어지는 지적 활동이 민중에서 다중으로 성장한 사람들의 지적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점이 제도권 외부의 지적 공간의 탄생을 추동한 이유입니다. 따라서 제도권 외부의 지적 공간의 존립 근거는 그것들이 다중들의 지적 욕망에 충실할 때에만 충족될 수 있으며, 나아가 그것들의 방향성도 오직 다중들의 욕망을 통해서만 규정될 수 있습니다. 다른 제도권 외부의 지적 공간과 다지원의 차이는, 다지원이 다중들의 지적 욕망에 충실하고자 하면서 동시에 그 욕망 안에 살아 숨쉬는 정치성을 읽어내고 그것들을 현실화하는 정치적 실천의 장이고자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다지원은 이론의 타당성이 검토되는 강좌 공간일 뿐만 아니라, 실천이 점화하는 우리 실재적 삶의 실험실이기도 합니다.
3. 00도큐멘트라는 프로젝트는 서울이라는 공간 안에서 생존하는 자율적 움직임에 대한 보고서입니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느꼈던 가장 큰 어려움은 공동체들의 활동 그 자체보다 이들이 활동을 지속할 수 있는 생존 조건에 있었습니다. 서울의 비싼 땅 값, 높은 생활비, 공동체 구성원들의 개인적인 생존 문제, 활동을 지속하는데 필요한 자금 조달 등이 그것일 겁니다. 혹시 이것에 대한 자신들만의 요령(?), 전술 같은 것이 있으신지요?
- 생존 조건은 정말 중요한 문제이지요. 실제로 만사(만드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수업노동자(대학생, 대학원생)여서 제도권 연구기관(대학, 연구소 등)이나 사교육시장에 몸을 담고 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다지원이 대항하고자 하는 곳에서 생활비를 마련하고 있는 셈이지요. 동시에 이것은 다지원의 밑바탕에 우리의 생존 조건에 대한 문제의식이 자리하고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지원은 팍팍한 삶(요즘 유행하는 표현으로는 88만원의 삶)으로부터 탈주하여 자신의 삶을 새롭게 구성하는 공간입니다. 열악한 생존 조건을 해결하기 위한 실천들도 구성하고 있습니다. 작지만 함께 밥을 해먹는 것도 그 중 하나겠지요. 가장 고무적인 시도라면, 역시 다지원 상근활동가를 후원하는 움직임일 것입니다. 다지원이 아직 운영 초기인데다 수익보다 다중지성과 네트워킹에 주력하기 때문에, 재정구조상 상근활동가들에게 제대로 된 월급을 줄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회의 중에 상근활동가들을 후원하자는 의견이 나와서 다지원 홈페이지에 공지를 하게 되었는데, 댓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함께 활동하는 만사들뿐만 아니라 만난지 몇 달 되지 않은 수강회원들까지도 동참하고 있습니다. 비록 큰 액수도 아니고 월급처럼 고정적이지도 않지만 고용-피고용 관계를 뛰어넘어섰다는 것, 그리고 서로에 대한 감사와 지지가 담겨있다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큰 기쁨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게 협력이고 사랑이겠지요.
4. 다중네트워크는 말 그대로 네트워크로서 연대와 연결에 집중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연대는 아무래도 지역적인 부분과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긴 힘든 것 같고요. 서교동은 주택지이긴 하지만 근처에 많은 출판사를 비롯해, 홍대 언더그라운드 문화 등의 문화적 역량을 가지고 있는 지역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지역 공동체로서 다중네트워크, 다지원의 활동이 드러나거나 계획하고 계신 부분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 "네트워크는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간에 수직이 되지 않는 방향에서 만들어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바탕에서 현재 다중지성의 정원(이하 다지원)이 위치해 있는 마포/홍대지역에서 다양한 사람과 문화들이 모여 공통의 생성을 해나가는 공간으로 만들어가고자 합니다. 우선, 지역민들에게 다지원의 모습과 취지를 홍보하여 모두의 공간으로서 스스로 만들어 나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여러 강좌와 세미나등의 참여를 통해, 지역민들과 현 참여자들이 다지원이 모두의 공통 공간임을 인식하고 서로 이끌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나가고자 합니다. 이번의 경우, 지역도서관등 공공기관과 상상마당(독립영화등 문화센터), SBI(출판교육기관) 등 사설기관등에 홍보를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홍보를 기초로 하여, 지역의 문화들과 서로 결합하는 형태인 다양한 스스로 기획하고 이끌고 참여하는 열린 강좌와 세미나, 워크숍, 대화의 공간으로 발전시켜나가려 합니다. 한가지 예로 봄학기에 '요가, 들꽃차, 대안생리대, Diy, 기타연주'등의 워크숍등을 계획하고 있는데, 이러한 기획들은 대부분 다지원 참여자이자 지역에서의 자발적 제안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시작이라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이러한 자발적 형태를 확대하여 공통의 즐거운 지식/행동들을 생성하는 공간으로 발전해 나가고자 합니다.
5. 그리고 한때 홍대 언더그라운드 문화에는 서울에서 유일하게 아나키즘이나 상황주의적인 움직임이 발견되었던 곳이기도 합니다(개인적으로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이것에 대한 요구는 사라진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제가 봤을 때 다중네트워크, 다지원의 여러 활동 가운데에는 아나키즘이나 상황주의에 대한 애정 없이는 불가능한 것들이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주실 수 있을런지요?
- 다중네트워크센터(이하 센터), 다지원은 아나키즘과 친합니다. 일단 센터, 다지원을 드나들고 만들어 가는 사람들 중 자신을 아나키스트로 정체화하는 사람들이 다수 존재하고, 다지원에선 지난 가을 학기 조약골 님의 아나키즘 강의를 개설하기도 했습죠. 김원식 할아버지, 아나키-인류학을 하는 데이비드 그레이버, G8 반대행동을 소개하며 조직하는 Dissent Network의 두 친구들 등 센터에 방문하여 이야기하는 자리를 가졌던 몇몇 아나키스트들도 기억이 납니다. 이렇듯 아나키즘적 흐름들이 존재하는 것은 탈권위적, 수평적, 분권적인 모임 형태에 대한 지향, 국가, 대학, 자본 등에 대항하며 체제와 목적간의 괴리를 거부하는 노력 등 여러 지점에서 다지원, 센터 및 그 마디 조직들의 활동방식이 아나키즘과 만나기 때문일 것입니다.
- 상황주의는 예술/정치의 기초와 가능성을 삶, 일상과 개인들의 요구에서 찾는다, 전위주의적 사고를 거부한다, 문화적이고 예술적인 활동들을 계속해서 구성하고 그러한 사회적 흐름을 파악하려 애쓴다는 점에서 센터, 다지원이 지향하는 바와 일맥상통합니다. 홍대 언더그라운드에서 소수로 존재하는 아나키하고 상황주의적 움직임들과는 가능한한 잦은 만남을 이어갈 생각입니다. 아나키나 상황주의에 대한 애정으로 가능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기 보다는 삶정치의 차원에서 공간 구성과 조직, 운영, 그리고 활동을 고민하다보니 어떠한 담론에도 기대기를 거부한 아나키즘이나 상황주의와 통하는 부분들이 있는게 아닌가 생각이 드는군요.
6. 제가 다중네트워크를 처음 접하게 된 이유는 다중(multitude)이라는 개념 때문이었습니다. 아직 저는 이 개념을 숙지하지 못했지만 다지원을 비롯한 여러 활동들의 근저에는 다중이라는 개념이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활동의 모티브로서 다중이라는 개념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물론 이 활동이 어느 시점에 완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앞으로의 활동 계획이나 구상에 대해 짧막하게 이야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다중’은 흔히 다양하고, 무질서하며, 체계를 부여하기 힘든 행동패턴을 보이는 인간들을 부정적으로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어온 개념입니다. 하지만 ‘다중’을 ‘괴물스러운 인간들’로 만들어주는 저 부정성은 오늘날의 ‘다양성과 차이’의 시대 안에서 살아가는 새로운 긍정적 주체성의 이름으로 역전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다양성과 정해진 질서 없음(즉 무질서)’ 그것은 진정 국가가 강제하는 명령에 따르지 않는 즉 ‘우리는 모두 한민족이야, 우리는 모두 대한민국 국민이야’와 같은 하나된 이름을 부여받은 자인 국민이길 거부하는 다중들의 특징입니다. 다중은 국가적 주권질서에 따르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다양성을 간직하며, 한 가지의 민족적 정체성을 부여하기 힘들 정도로 국경을 넘나들면서 상호간의 교류를 확립하면서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중’이 군중이나 대중, 폭도와 동일한 형태로 파악되어서는 안 됩니다. 무리지어져 있는 사람들이라는 뜻의 군중에게서는 차이를 읽을 수는 있지만, 어떤 독특한 성질이나 공통성을 부여할 수는 없으며 대체로는 수동적인 사람들을 지칭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다중’은 또한 ‘대중’과도 다릅니다. 대중은 ‘대중문화’나 ‘대중강연’처럼 외부로부터 부여되는 이데올로기에 취약하게 노출되어 있는 사람들을 지칭하는데 사용되니까요. ‘폭도’라는 이름은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어쨌든 파괴하는 자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점에서 다중 개념과는 다릅니다.
- 다중은 단지 그냥 그렇게 저기 어딘가에 우연히 집단적으로 서있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도 아닙니다. 다중은 어떤 행위과정 속에서만 등장하는 ‘실천’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다양해지려는 사람들,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새로운 질서를 만들기 위해 협력하는 사람들이 다중을 구성하는 것이죠. 우리는 그런 점에서 ‘다중’을 하나로 체제로 포괄하려는 국가나 자본에 대항해서 투쟁하거나 실천하는 사람들, 다양해지려는 사람들을 지칭하기 위해 이 개념을 사용합니다. 따라서 다중은 하나의 체계 안에서 권력을 행사하려는 중앙집권적 질서와 싸우면서 분권화된 자치적 흐름을 창출하려는 사람들에게 부여되는 이름이기도 합니다.
- 국가가 중앙집권적 통치형태를 갖고 있고, 국민이 투표나 납세, 병역의 행위를 통해 그러한 통치형태를 지탱하는 원동력으로 기능한다면, 다중은 그러한 투표행위를 의문에 붙이면서 권력을 다시 소환하는 운동을 벌이고, 국가에 낸 세금이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는다는 항의를 하며, 전쟁이나 무력행위에 동원되는 군대를 양심적으로 거부함으로써 자신의 모습을 등장시킵니다. 하지만 이들 그리고 우리들은 그렇다고 정치적 의사를 포기하는 것이거나 타인과 함께 살아갈 책임을 방기하거나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파편화된 개인들인 것은 아닙니다. 다중은 누군가에게 권력(힘)을 이전시키거나 양도하는 행위에 맞서 자기 자신들이 스스로를 통치할 힘을 자신 안에서 행사하는 것, 즉 자율적이고 자치적인 질서를 창출하는 흐름 속에서만 비로소 등장합니다. 우리들의 네트워크 모임이 ‘다중’과 ‘자율’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것은 실제로 그 참여하는 사람들 자신이 다중으로서의 실천활동을 벌여내고 있으며, 그 운영이나 작동원리의 가장 기본적인 취지가 ‘자율성’에 입각해 있기 때문입니다.
- 또한 육체·물질·산업노동의 헤게모니 하에서 그것의 생산적 지주였던 사람들에 부여된 이름이 (산업)노동자계급이었다면, 다중은 지성·비물질(생산되는 생산물이 비물질적인 정서나 정보, 언어적이라는 점에서)·서비스노동의 헤게모니 하에서 그 생산적 원천에 부여되는 이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중이 육체노동을 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육체노동 활동이 어떤 일정한 새로운 생산의 흐름 안에서 진행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물론 그 새로운 생산의 흐름은 예술가들이나 연예인들, 첨단 산업의 아이디어 생산자들을 포함해, 고용되지 않은 사람들인 주부나 학생, 어린이들의 여가활동이나 협동활동 속에서 더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센터나 레토, 다지원, 자율평론에 참여하는 이들이 수행하는 그 활동이 또한 ‘비물질적 노동’이기도 하구요. 우리들은 주로 지성의 교류나 지식생산에 보다 많은 초점을 두긴 하지만, 그 속에는 항상 따뜻함, 보살핌, 배려가 동반되는 정서 생산 역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지식의 교류라는 일견 차가워 보이는 관계는 사랑과 정서의 교류라는 따뜻함의 관계 속에서 함께 이루어지는 법이니까요.
- 앞으로 우리들의 계획보다는 지금 현재 우리에게는 아직까지는 어린아이에 불과한 <다중지성의 정원>을 세심히 돌보고 가꾸어나가는데 좀더 힘을 기울여야 하는 과제가 주어져 있습니다. 좀더 다양한 강좌를 개설하고 또 우리 자신이 그 강좌 속에서 지적으로 단련됨으로써 이 모임을 더 풍부하게 성장시키는 것 역시 우리들의 중요한 앞으로의 계획이기도 합니다. 물론 기존의 모임들은 각자의 작동형태 속에서 강화되긴 하겠지만 말이죠. 이 네트워크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고, 또 누구나 자신의 능력을 더해 그 힘을 강화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오로지 이 힘의 자율적·자치적·민주적 상승작용을 통해 매번 새롭게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인 만큼 또 다른 새로움의 탄생은 그 힘의 줄기에 어떤 사람들이 다시 접속하느냐에 달려있는 듯 합니다. 여러분과 함께 할 우리들은 그렇게 여러분이 함께 뛰어놀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준비할 뿐이니까요. ^^.
다중지성의 정원[다지원] 취지문
오늘날 지성의 영역에 두 개의 그림이 뚜렷해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대학의 부패와 붕괴이고 또 하나는 새로운 지성 주체들의 등장입니다.
대학은 지난 날 성장했던 다양한 지성기관들을 흡수하면서 엄청나게 비대해졌습니다. 과거의 저항적 지식기관들의 많은 부분도 대학 속에 흡수되거나 대학과 공조하며 움직일 정도입니다. 대학은 독점적 지성기관으로 자리잡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독점적 지위를 차지하면 할수록 오히려 그것의 부패가 뚜렷해져가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는 부패를 체제화합니다. 대학은 기업과 손잡는 수준을 넘어서 그 자체가 이윤을 추구하는 크고 작은 기업들로 탈바꿈했습니다. 대학 속에서 학생들과 교수들은 제자와 스승으로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기능을 담당하는 수익원천으로서 만납니다. 수익을 기준으로 한 새로운 서열화가 나타나고 교수체제는 비정규직 강사를 중심으로 재편되었습니다. 대학에서 교육을 담당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생활고에 허덕이면서 연구할 수 있는 어떠한 조건도 갖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비정규직 강사들은 학문과 교육의 열정에 불타기는커녕 모자라는 수입을 보충하기 위해 입시학원과 과외에 눈을 돌려야 하는 실정입니다. 바로 이러한 토양 위에서 학진체제가 성장하고 있습니다. 학진은 대학의 서열화, 학생들의 서열화, 교수들의 서열화를 공고화하면서 그 서열화를 통해 지성을 통제하는 권력기관으로 기능합니다. 국가의 지적 필요가 대학들에 직접적으로 강요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대학은 신자유주의적 기업이나 국가를 위해 일하는 일종의 외주하청기업체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지식인이야말로 우리시대가 필요로 하는 지식인이라는 이른바 '신지식인론'은 이러한 상황을 정당화하는 구호입니다. 학생들은 기업이나 국가가 소비할 노동력으로 자신을 키우기 위해 값비싼 등록금을 내고 있습니다. 한 학기에 약 4~500만원에 상당하는 거액의 등록금을 내면서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대학생들은 수업노동 외의 과외노동(아르바이트)에 시달리고 대학원생들은 연구는커녕 학진 프로젝트의 실무노동자로 뛰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과로노동과 부실한 영양섭취로 학생들의 건강상태는 점점 나빠져 가고 있습니다. 게다가 대학에서 충족되지 않는 지적 욕구나 필요를 채우기 위해 학원이나 비제도 교육기관에서 과외수업을 받아야 합니다. 요컨대 오늘날 대학은 지성의 성장과 소통 및 전파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지성 발전의 걸림돌로 되고 있습니다.
이와는 다른 그림이 있습니다. 평택에서는 이른바 '매춘부들'이 자신을 성노동자로 선언하며 당당하게 일어섰고 장애인들은 이동권 보장을 요구하며 한강 다리를 건너는 시위를 벌였고 이주노동자들은 조합이나 단체를 결성하여 이주를 불법화하는 체제와 맞서 싸우고 있으며 여러 곳에서 주민들은 핵폐기물처리장 건설을 반대하며 싸우고 있습니다. KTX 여승무원들이나 이랜드 노동조합원들이 보여주듯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 역시 지속적이고 확산적입니다. 여성들이 독립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지는 오래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을 생태의 관점에서 바라보면서 생태를 지키려는 움직임들 역시 거셉니다. 새로운 주체성들이 형성되고 있고 여기서 새로운 지적 힘들이 솟구치고 있습니다. 이 새로운 주체성들의 등장은 그 자체로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감성, 새로운 생각, 새로운 태도를 갖도록 교육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사회주체들의 투쟁과 운동이야말로 대학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교육기관이고 교육제도입니다. 인터넷이 비록 상업적 흐름에 지배되고 있지만 그 속에서 이러한 주체들의 목소리 역시 점점 높아져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새로운 사회적 주체들을 다중이라고 부르면서 다중이 표현하는 정보적, 정동적, 행동적, 소통적 지성들을 다중지성이라고 부르고자 합니다. 대학이 그 부패 속에서 수익성 척도에 따라 서열화 되고 협소하게 격자화된 관심을 논리화한 전문지성을 양산한다면 다중지성은 삶의 존재론적 가치를 강조하는 협력적이고 창조적인 움직임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다중지성은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방식, 다양한 목소리로 자신의 특이함들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다중지성의 흐름은 분산적입니다. 다중지성의 발생적 분산성은 그것의 커다란 장점입니다. 집중과 대의라는 전통적 사회운동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광범한 토대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계이기도 합니다. 다중지성이 다양하지만 국지적인 것으로 머물 때 그것들은 서로 연결될 수 없고 서로 무관심하거나 심지어는 갈등적인 것으로 발전되곤 합니다. 갈등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새롭게 사유하고 행동할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잠재적으로 생산적입니다. 하지만 갈등을 넘는 연결을 통해 더 큰 탈주와 생성을 현실화하지 못한다면 그것들의 잠재력은 줄어들고 각각의 목소리들, 투쟁들은 일과적이고 국지적인 것으로 되고 맙니다.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국지적, 우발적, 특이적 투쟁들이 연결지점을 찾으면서 제3의 투쟁으로 변신해 나가는 생성의 소용돌이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들이 매순간 어떤 존재로 변화되고 있는지를 서로 확인하고 이 변화의 시간적 의미를 공동으로 생산하는 것이 지금 부족하며 그런 만큼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달성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투쟁 속에서 드물게라도 만나고 그것은 중요한 기능을 수행합니다. 그러나 그 만남은 공통의 의미를 창조하기에는 짧고 단편적이며 임시적입니다. 우리 시대의 삶의 특징들, 양상들, 필요들을 역사적으로 새로운 공통적 의미생산이라는 관점에서 조망하고 상호교육하고 토론할 상설적 자기교육기관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존의 대학과는 달리 위로부터 아래로 흐르는 한 방향의 흐름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자가 가르치고 가르치는 자가 배우는 다방향의 흐름이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세대와 세대가 합류하고 운동과 운동이 서로 가르치면서 전문가와 일반인, 전위와 대중의 구분이 사라지는 공간이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대학이되 현재의 대학에 대항하는 대항대학이며 학교이되 현재의 학교와는 다른 대항학교이고 학원이되 현재의 학원과는 구분되는 대항학원이어야 할 것입니다. 현재의 교육기관이 수행하는 기능을 수행하면서 전혀 비대칭적인 방식으로 그렇게 하는 곳을 우리는 정원이라고 부르고자 합니다. 지난 날 에피쿠로스의 정원에서 지식인은 물론이고 매춘부, 아이들, 거지들이 함께 대화하며 공통의 의미를 생산했습니다. 새로운 상황 속에서 이제 우리는 학생, 교사, 교수, 비정규직 노동자, 이주 노동자, 가사 노동자, 성노동자, 실업자, 사무직 노동자, 서비스직 노동자, 연구원들, 아이들, 주민들 … 등이 함께 모여 현재의 질서를 넘어설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꾸리고 그것을 새로운 의미평면 위에서 조직하기 위한 다중지성의 정원을 만드는 일에 나서고자 합니다. 뜻을 함께 하시는 분들의 많은 동참을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