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으로 압송된 이규채(李圭彩)
경기도 북부 지역이면서 한반도의 가운데를 차지하는 포천과 가평은 산수가 빼어나서 생태 환경이 우수하다. 이 곳에도 의병 활동과 3·1운동과 관련된 항일 유적지가 많다. 포천의 경우 의병 활동과 관련한 유적지로 왕방산 의병전투지와 상송우시장 의병전투지가 있다.
3·1운동 만세시위지로는 송우리 헌병분견소 3·1운동 만세시위지, 무봉리 3·1운동 만세시위지, 옛 신북면사무소터 3·1운동 만세시위지 등이 있다. 이 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로는 누가 있을까? 포천의 이규채는 주목할만한 독립운동 인물이다.
이규채 선생의 삶과 독립운동은 ‘자술 연보’를 통해 비교적 상세하게 더듬어볼 수 있다. 총 32장, 내용 54쪽을 기록한 용지는 일반 종이가 아니라 1940년대 포천군 송우리에 소재한 ‘김수명 상점’의 계산서 용지다. 일반 종이를 구하기 어려워 상점의 계산지 묶음을 얻어서 기록한 것이다. 이규채는 이 계산서 묶음에 자신의 기록을 연대순으로 써 내려갔다.
▲이규채 선생의 자술연보
"2천만 민중의 마음을 귀순시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2천만 민중이 한 사람도 남지 않고 죽임을 당하기 전까지는 독립운동은 종식되지 않을 것이다." 독립운동가 이규채(1890∼1947)는 1934년 12월 8일 중국 상하이 일본총영사관 사법경찰관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는 그해 9월 25일 상하이에서 한약을 사러 갔다가 한약방 앞에서 경관에게 붙잡혔다.
이규채(李圭彩)는 자신이 직접 기록한 연보에 따르면 1890년 경기도 포천군 가산면 방축리에서 태어났다.
포천 청성학교 교사로 2년간 봉직하였고, 1921년에는 경성 창신서화연구회를 창설하여 서예의 대중화에 기여하였으며 학생층을 상대로 비밀 운동을 전개하던 중 일본 경찰에 발각되자 독립운동을 자유로이 할 수 있는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1924년 12월 대한민국 임시 정부 임시 의정원의 충청도 의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다가 이듬해인 1925년에 사임하였다.
그 이유는 임시정부의 체제로는 독립운동을 이끌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후 서성구·후경소·이회영·서경석·김좌진·이장녕·홍만호·황학수·여시당·박일만·윤상갑·이진구 등 독립운동가 및 현지인들과 교류하면서 서로 일을 도모하거나 혹은 도움을 받으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에 1930년 7월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여하여 한국독립당의 정치부위원 겸 군사부참모장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한국독립당은 1930년 7월에 한족자치연합회를 모체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홍진·신숙·남대관·이청천 등이 창설한 독립운동 단체였다. 이와 더불어 각부에 소속되었던 독립군 중에서 정예 대원을 뽑아 한국 독립당군을 편성하고, 당에는 6개의 위원회를 두는 한편 중앙 당부, 지당부, 구당부를 설치하고 만주 전역 독립 단체를 총망라하여 진영을 강화하였다.
1932년 3월 이규채는 조지한·이종선 등과 함께 중국 아성현 영발둔에 있는 중국군 사령관 고봉림과 참모장 조린을 찾아 공동 항일전 합작을 협의했으며, 이때 한국독립당의 총무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본부를 만주에서 베이징으로 옮기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왼쪽 손에 총을 맞아 부상을 당하였다는 것을 알았다. 곁에 있던 사람이 먼저 보고서는 깜짝 놀랐다."
1932년 9월 하얼빈 남쪽의 쌍성보에서 한·중 연합군과 일본군이 교전을 벌였다.
쌍성보는 만주의 경제적 요충지로, 1년 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제가 호시탐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이규채 선생은 당시 만주의 한국독립당 총무위원장이자 한국독립군 참모장으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전투에서 왼손에 총상을 입었지만, 전투가 끝난 뒤에야 비로소 알았던 것이다.
1933년에는 중국 지린 육군 제3군 상교참모로 활약하였다.
1934년 중국 난징에 본부를 두고 있던 한국혁명당의 신익희·윤기섭 등과 손을 잡고 신한독립당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34년 일본 경찰에 체포된 이규채는 그후 상해를 거쳐 청도로 이송되었고 이곳에서 독방에 수감되었다.
청도에서 다시 인천으로 압송되었고, 서울 서대문형무소를 거쳐 경성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35년 2월 26일 공판에서 "나는 총독정치의 부당한 압박에 자극받아 조선의 독립운동에 몸을 던졌고, 독립이 되지 않은 동안은 다시 조선 땅을 밟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부모와 처자를 버리고 해외로 나갔다"고 말했다. 법원에서도 소신을 꺾지 않은 이규채는 결국 치안유지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고, 1940년 가석방됐다.
이규채 선생은 해방 후 잠시 언론계에 관여하였고 정계에 투신하여 미소공동위원회대책 국민연맹대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회장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1948년 2월 사망하였다. 포천시 가산면 방축리에는 이규채 선생의 생가가 있으며 근처에 이규채 선생의 행적비가 1982년에 건립되었다.
출처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