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없음에 대하여
2024.05.19.(성령강림절)
선한목자교회 김 명 현 목사
14/ 그들이 무리에게 오니, 한 사람이 예수께 다가와서 무릎을 꿇고 말하였다. 15/ “주님, 내 아들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간질병으로 몹시 고통 받고 있습니다. 자주 불 속에 빠지기도 하고, 물 속에 빠지기도 합니다. 16/ 그래서 아이를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그들은 고치지 못하였습니다.” 17/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여,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같이 있어야 하겠느냐? 아이를 내게 데려오너라.” 18/ 그리고 예수께서 귀신을 꾸짖으셨다. 그러자 귀신이 아이에게서 나가고, 아이는 그 순간에 나았다. 19/ 그 때에 제자들이 따로 예수께 다가가서 물었다. “우리는 어찌하여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20/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의 믿음이 적기 때문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에서 저기로 옮겨가라!’하면 그대로 될 것이요, 너희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마태 17:14-20)
들어가는 말
이 이야기에 앞서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변모 사건을 다룹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따로 데리고서 높은 산에 올라가셨다.’(1) 세 명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모습이 변하는 것을 봅니다. ‘그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게 되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에게 나타나더니, 예수와 더불어 말을 나누었다.’(2-3) 이스라엘의 위대한 예언자들을 목격하고 감격한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합니다. “선생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여기에다가 초막을 셋 지어서, 하나에는 선생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도록 하겠습니다.”(4)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나는 그를 좋아한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5) 제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산이나 교회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일어나거라. 두려워하지 말아라.”(7) 예수님과 제자들은 일어나 산에서 내려가야 하며,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에서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아래에는 많은 무리들이 그들이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무릎을 꿇고 자비를 구합니다. 그는 먼저 아들의 상태를 말합니다. “주님, 내 아들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간질병으로 몹시 고통 받고 있습니다. 자주 불 속에 빠지기도 하고, 물속에 빠지기도 합니다.”(15)
간질병
우리는 예수님 앞으로 데려 온 아이가 걸린 병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히브리말로 간질병은 ‘달밤에 일어나는 발작 증세’를 말합니다. 많은 고대인들이 달을 저주나 재앙의 근원으로 이해했는데, 유대인들도 달이 사람들에게 발작 증세를 일으킨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아무런 과학적 근거도 없는 것이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게 말해 줍니다. 발작은 가끔 일어나는 증상이라는 것입니다. 간질병은 하루 종일 지속되는 증상이 아닌 것이죠. 하루에 한 번쯤 있을 수도 있고, 혹은 한 달에 한두 번 있을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정해진 시간과 일정한 간격으로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이 아버지는 아이의 증상을 말하는데, 자주 불 속이나 물속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이러한 증상이 자주 일어난다고 말하지만, 분명한 것은 열병처럼 낫기 전까지 계속되는 증상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 증세는 나았다는 증거를 확인하는 데 시간이 걸립니다. 하루에 한 번 꼴로 그런 증상이 일어났었다면, 한 주간은 지켜보아야 나았다고 확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였다면 한 달은, 더 뜸한 경우였다면 1년은 지켜보아야 완전히 회복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일부 제자들과 산에서 돌아오기 전, 남아있는 제자들과 아이의 아버지 사이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아버지는 아들을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아이를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그들은 고치지 못하였습니다.”(16) 여기에는 짐작해 볼 수 있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남아 있던 제자들이 그 아이를 치유하고자 시도했을 경우이며, 다른 하나는 아이의 아버지에게 예수님이 곧 돌아오시니 기다리자고 말했을 경우입니다. 먼저 제자들이 아이를 치유하고자 시도했을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치유와 귀신을 내쫓는 것을 이미 보고 배웠기에 그들은 치유행위를 하고선 나았다고 선포했을 것입니다. 이 경우 믿음은 아이의 아버지의 문제가 됩니다.
누가 믿음이 없는가
아버지에게 믿음이 있었다면 집으로 돌아가서 일주일이건 한 달이건 아들의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면 나았다는 증거를 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아들의 병은 다름 아닌 간질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상황에선 제자들에게 믿음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결국 아버지는 제자들을 믿지 않았기에 아들이 나았다는 것도 믿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난 아버지는 제자들이 자기 아들을 고치지 못했다고 했던 것입니다. 이번에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기다리자고 했을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이는 곧 제자들의 믿음이 문제가 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없는 상태에서 간질병을 치유할 자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예수님께서 곧 내려오실 테니 굳이 위험(?)을 무릅쓸 필요도 없었습니다. 이런 일은 스승에게 맡기면 될 일입니다. 마태복음을 통해 우리는 아버지와 제자들에게 믿음 없음의 가능성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이 문제를 어떻게 보시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탄식하십니다.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여,”(17) 구체적인 사건이 벌어진 현장 속에서 누군가는 믿음이 없는 것이 분명한데도, 그를 지적하는 대신 ‘믿음 없는 세대’라고 부르신 것은 각 사람의 문제가 아닌 ‘믿음 없음’ 자체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탄식 속에 드러난 ‘믿음 없음’이란 무엇일까요?
‘믿음 없음’이란 구체적인 증거의 유무에 따라 태도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아이의 병을 고치는 행위를 했을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그 증거는 지금 당장 확인될 수 없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예수님이 나타나시자 아이의 아버지는 곧바로 제자들이 아이의 병을 고치지 못했다고 하면서 고쳐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제자들 역시 병을 고쳤다는 확신을 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구체적인 증거를 보지 못했고, 제자들은 구체적인 증거를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세대의 그리스도인들도 늘 빠져드는 문제입니다. 보이는 증거가 있어야만 믿을 수 있다는 태도는 믿음이 적은 것이 아니라 ‘믿음 없음’입니다.
믿음 없음
한편 ‘믿음 없음’이란 예수님의 실재와 부재에서의 태도가 다른 것입니다. 제자들이 아이의 병을 고치는 대신 예수를 기다리자고 했을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이들은 예수님이 계시다면 치유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은 적은 것이 아니라 ‘믿음 없음’입니다. 산 아래에서 예수님을 기다리는 제자들의 태도는 산 위에 있는 것이 좋다며 초막을 지으려는 제자들의 태도와 다르지 않습니다. 무엇이든 예수님께 미루려는 태도는 믿음 없음을 드러낼 뿐입니다. 예수님의 탄식은 이어집니다.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같이 있어야 하겠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에게 참아야 하겠느냐?”(17)
그런 뒤 예수님께서는 아이의 아버지에게 말씀하십니다. “아이를 내게 데려오너라.”(17) 마태복음은 그 이후의 과정을 이렇게 보고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귀신을 꾸짖으셨다. 그러자 귀신이 아이에게서 나가고, 아이는 그 순간에 나았다.’(18)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귀신을 꾸짖어서 아이에게서 내 보내셨을까요? 마태와는 달리 마가복음 9장과 누가복음 9장의 병행 구절에서는 이 아이를 귀신들린 아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귀신이 자기 아들을 거꾸러뜨린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은 아이 아버지의 입을 빌려 자기 아들의 질병이 간질병이라고 했음을 상기해 봅시다.
이점에서 마태는 마가나 누가와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마가와 누가에서는 귀신이 일으킨 발작을 예수님께서 멈추게 하십니다. 발작을 일으킨 것은 귀신이며 멈추신 것은 예수님입니다. 하지만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아이에게 발작을 일으키신 후 멈추게 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은 ‘그러자 귀신이 아이에게서 나가고, 아이는 그 순간에 나았다.’는 기록으로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의 아버지는 보고자 했던 증거를 보았고, 제자들은 예수님의 뛰어난 능력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의 질병이 간질병이라면, 사실 발작이 일어났다가 곧 사라졌다고 해서 간질이 치유된 것은 아닙니다.
나가는 말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아이의 아버지가 바라던 증거를 눈앞에 보여준 것은 예수님의 치유 능력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그의 ‘믿음 없음’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는 제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은 이런 능력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겠지만 이는 믿음이 없을 뿐입니다. 본문에는 믿음에 대한 세 가지 표현이 나옵니다. 믿음 없음과 적은 믿음과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그것입니다. 이 차이는 무엇일까요? 믿음이 없다고 탄식한 세대들과 적은 믿음을 소유한 제자들은 예수님이 보실 때 거기서 거기라는 표현일까요? 한편, 적은 믿음과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산 위에서 하나님은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5) 산 위에서 제자들에게 놀라운 일들을 목격하게 하신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산 아래로 내려간 제자들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하기 위해서는 바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믿음의 상태는 제로에 가깝습니다. 산 아래, 즉 세상에서 드러난 제자들이나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은 언제나 이와 같습니다. 그것은 어느 시대나 ‘믿음 없는 세대여!’라는 탄식을 자아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있어야 할 ‘적은 믿음’은 무엇이고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은 무엇일까요? 이 문제는 다음 주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