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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7일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 주일 설교
제목 : ‘말씀이 전부다!’ - 3. 수문 앞 광장으로 초대합니다.
본문 : 느헤미야 8장 5절
학자 에스라는 높은 단 위에 서 있었으므로, 백성들은 모두, 그가 책 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에스라가 책을 펴면, 백성들은 모두 일어섰다. <새번역>
예전에 이런 글이 그리스도인 사이에서 꽤 유행했던 적이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도, 최근에도 이 글을 보신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위, ‘이럴 땐 이 말씀’ 이라는 글이었습니다.
아무에게도 도움을 얻지 못할 것만 같을 때 그럴 때가 있지 않나요?
그럴 땐 시편 121편을 읽어보세요. “내가 눈을 들어 산을 본다. 내 도움이 어디에서 오는가?”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이해할 수 없을 때도 있죠?
그럴 땐 시편 139편 17절을 읽어보세요. “주님, 주님께서 나를 샅샅이 살펴보셨으니, 나를 환히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까지도 나를 버리신 것처럼 혼자라고 느껴질 때도 있지요?
그럴 땐 이사야 49장 16절을 읽어보세요. “보아라, 예루살렘아, 내가 네 이름을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네 성벽을 늘 지켜 보고 있다.”
불안감이 몰려올 때 가장 좋은 약은 바로 시편 23편입니다. 특별히 자기 이름을 넣어서 시편 23편을 암송해 보세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나에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저는 이렇게 성경을 읽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 중에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 중에 특정 구절을, 어떤 사람의 특정한 상황에 맞게 가지고 와서, 그 상황에만 맞게 해석해 주고 있는, 어쩌면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 해석이 될 수 있는 상황이, 또한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조금도 큰 문제가 아니라며 책으로도 만들기도 하는 것에 너무도 두렵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을 주셨던 그 상황을 비추어 보아서, 왜 그런 말씀을 주셨는지 하나님의 뜻을 찾아, Text와 Context를 바르게 이해하고, 바르게 해석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감정과 기분과 문제 해결의 도구로 사용하는 아주 안타까운 일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성경을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마법의 고민 해결책’ 으로 전락시켜 버리는 행동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이런 글들에 반문하며 이렇게 소위 흑화(黑化)시킨 글들도 있습니다.
아무에게도 도움을 얻지 못할 것만 같을 때 그럴 때가 있지 않나요?
그럴 땐 예레미야 51장 13절로 가보세요. “많은 물 가에 살면서 재물이 많은 자여 네 재물의 한계 곧 네 끝이 왔도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이해할 수 없을 때도 있죠?
그럴 땐 욥기 8장 2절을 읽어보세요. “언제까지 네가 그런 투로 말을 계속할 테냐? 네 입에서 나오는 말 거센 바람과도 같아서 걷잡을 수 없구나.”
하나님까지도 나를 버리신 것처럼 혼자라고 느껴질 때도 있지요?
그럴 땐 욥기 7장 16절을 읽어보세요. “나는 사는 게 싫습니다. 영원히 살 것도 아닌데 나를 혼자 내버려 두소서. 내 인생이 허무하기 짝이 없습니다.”
불안감이 몰려올 때 가장 좋은 약은 바로 고린도후서 11장입니다. 특별히 자기 이름을 넣어서 고린도후서 11장 23절부터 27절을 암송해 보세요. “나는 수고도 더 많이 하고, 감옥살이도 더 많이 하고, 매도 더 많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습니다. 유대 사람들에게서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맞은 것이 다섯 번이요,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이요, 돌로 맞은 것이 한 번이요,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이요, 밤낮 꼬박 하루를 망망한 바다를 떠다녔습니다. 자주 여행하는 동안에는, 강물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 사람의 위험과 도시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의 위험을 당하였습니다. 수고와 고역에 시달리고, 여러 번 밤을 지새우고, 주리고,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추위에 떨고, 헐벗었습니다.”
이렇게 웃픈 상황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게 바로 ‘이럴 땐 이 말씀’이라는 글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저런 말씀들은 나를 위로할 말씀들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 상황에 맞지 않는 것 같은 말씀들을 연관시키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어느 순간부터 말씀이 가벼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책도 점점 가벼워지고, 그 성경 안에 든 하나님의 말씀도 너무도 가벼워지기 시작해서, 우리의 입술에 담긴 말씀도 가볍고, 우리가 말씀을 대하는 태도마저도 가벼워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말씀을 어떻게 대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에게 말씀은 어느 정도의 중요도를 가지고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말씀은 어떤 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의미입니까?
여기 하나님의 말씀을 전심과 최선으로 대하고 있는 믿음의 선배가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자리에 말씀을 두었으며, 그 말씀의 능력이 모든 것을 변화시킬 것을 믿는 이가 있습니다. 바로, 느헤미야입니다. 정말로 우리가 닮아가야 할 믿음의 선배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했던,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도했던 ‘평신도’ 느헤미야의 추진력은 실로 어마무시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도한 느헤미야를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신을 드러내셔야 했습니다. 자신의 언약을 기억하는 자신의 백성을 위해 ‘살아계신’ 하나님임을 만천하에 공개하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성벽 재건 공사는 하나님의 은혜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시간에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성벽 공사는 오십이 일 만인 엘룰월 이십오일에 끝났다. <느헤미야 6장 15절, 새번역>
단 52일 만에 성벽을 재건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도 산발랏과 도비야와 게셈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온전히 의지했던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쾌거였습니다. 한 손엔 창을 한 손엔 삽을 들고 거의 매일 최선을 다했던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진 놀라운 축복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금 이스라엘을 터전으로 삼아 정착을 하게 됩니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성전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사람들과 백성 가운데 일부와 성전 막일꾼들과 나머지 이스라엘 사람들은, 저마다 고향에 자리를 잡았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렇게 여러 마을에 흩어져서 살고 있었다. 일곱째 달이 되었을 때에, <느헤미야 7장 73절, 새번역>
그리고 이제 어느 정도 정비가 된 것으로 판단이 되자 느헤미야는 더 이상 미룰 것도 없이 학자 에스라에게 모세의 율법책을 가지고 오라고 명하였고, 모든 백성이 수문 앞 광장에 모이게 됩니다. 그리고는 에스라가 새벽부터 정오까지 큰소리로 율법책을 읽어 주기 시작했습니다. 백성들은 한 글자라도 놓칠세라 모두 율법책 읽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아마 숨소리만 겨우 들리고, 오직 말씀 소리만 울려 펴졌을 현장입니다. 정말 타임머신이 생긴다면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현장입니다. 그 현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그 하나님의 말씀 앞에 너무도 오랜 만에 서고 싶습니다. 다 포기했었고, 꿈도 꾸지 못했던 일들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음에 감사와 감격과 감탄의 느낌표로 고백하고 싶은 현장입니다. 오늘 이 자리가 그 현장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꿈을 꾸고 싶습니다.
그 현장에서도 가장 인상 깊은 일은 바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일이었습니다.
학자 에스라는 높은 단 위에 서 있었으므로, 백성들은 모두, 그가 책 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에스라가 책을 펴면, 백성들은 모두 일어섰다. <느헤미야 8장 5절, 새번역>
이 구절은 절대로 단순화시켜서는 안 되는 구절입니다. 백성들은 모두, 한 사람도 빠짐없이, 에스라가 단 위에서 책을 펴기만 해도, 자리에서 모두 일어서게 됩니다. 느헤미야 7장에서 돌아온 회중의 수를 42,360명으로 기록하고 있으니, 기존에 있던 사람들을 포함해 거의 5만명이 되는 인원이 일사불란하게 책을 펴기만 해도 자리에서 모두 일어섰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그 누구도 시킨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에스라가 읽어주는 모세의 율법책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생각하고, 도저히 가만히 앉아서 말씀을 받을 수 없어 자리에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말씀을 귀히 생각하는지 엿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첫 번째로 말씀에 대해서 회복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바로, ‘말씀에 대한 경외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도 가벼이 여기던 우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의 자리로 끌어올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말씀을 경외함으로 받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야말로 세상 모든 것 중에 가장 귀하고 중요한 것이라는 고백으로 받는 태도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리에서 일어섰던 그 때 그들의 마음과 같이, 비록 지금은 그렇게까지 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중심이 말씀에 대해서 반응하는 태도는 그 때 그들의 마음 못지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설교 하는 내내 일어서서 말씀을 들으라고 한다면 얼마나 큰 반발이 있겠습니까? 그렇게까지 요구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저 성경 봉독 시간에 일어서서 말씀을 받는 노력만으로도 행동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마음은 오늘 느헤미야 8장 5절에 등장하는 이들을 넘어서야 합니다. 경외를 회복해야 합니다. 말씀을 대하는 우리의 중심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어떤 것이 아닌,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정말 하나님이 우리 앞에 서신 후에 우리를 향해 말씀을 주시는 것처럼, 그 상황이듯이 말씀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말씀을 가벼이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말로 받으니, 중심에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하니, 아무리 많은 말씀을 들어도 조금의 경외감도 생기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니 말씀대로 사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에 대해서 멀어지고, 말씀은 어느덧 잔소리로 전락하고, 특정 목회자의 설교가 자리 잡고, 특정 목회자의 해석이 자리 잡고, 그럴 듯한 ‘이럴 땐 이 말씀’의 성경 구절들만이 내 주변에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인상 깊은 일이 이어집니다.
백성은 율법의 말씀을 들으면서, 모두 울었다. <느헤미야 8장 9절A, 새번역>
하나님의 말씀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녹아져 있습니다. 그 누구라도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한 이 말씀을 듣고 울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하시는, 사랑하셔서 출애굽까지 시켜 주셨건만 다시금 하나님을 떠난 자신들의 모습이 얼마나 안타깝게 느껴지고, 원망스러웠겠습니까? 그러니 말씀이 귀를 통해 마음에 닿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죄송한 마음, 감격, 은혜와 사랑, 부끄러움 등 수많은 감정들이 혼합되어 나오는 현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눈물만 기억하시면 절대 안 됩니다. 이어지는 이 부분이 중요합니다.
모든 백성은 배운 바를 밝히 깨달았으므로, 돌아가서 먹고 마시며, 없는 사람들에게는 먹을 것을 나누어 주면서, 크게 기뻐하였다. <느헤미야 8장 12절, 새번역>
그들은 눈물 속에서 배운 바를 밝히 깨닫게 됩니다. 회개의 시간을 거치니 기쁨을 회복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만난 이들의 특징입니다. 눈물로 시작하여 기쁨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재 대신 화관을! 슬픔 대신 찬송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의의 나무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시온에서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재 대신에 화관을 씌워 주시며, 슬픔 대신에 기쁨의 기름을 발라 주시며, 괴로운 마음 대신에 찬송이 마음에 가득 차게 하셨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의의 나무, 주님께서 스스로 영광을 나타내시려고 손수 심으신 나무라고 부른다. <이사야 61장 3절, 새번역>
말씀 앞에서 눈물과 기쁨의 세레모니를 펼치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을 울리고 있습니까? 통곡하게 만들고, 괴롭게 만들고, 애통하게 만듭니까? 골수를 쪼개시고 감찰하시니 감출 것 없이 적나라하게 다 드러나셨습니까? 그리고 그 말씀을 통해 회개의 시간으로 이어지고 계십니까? 결국에 눈물과 회개의 터널을 지나 마주할 기쁨의 시간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말씀으로 인하여 드러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을 울게도 하고, 춤추게도 합니까? 그렇다면 정말 여러분 안에 말씀이 살아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력을 가지고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예배자 여러분! 우리 이 시간 말씀 앞에 섰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여러분을 세워 보십시오. 말씀이 펼쳐질 때마다 그 말씀 한 구절을 놓치고 싶지 않아 전심으로 그 말씀을 사모하는 전력의 마음을 품어 보십시오! 그 어느 때보다 말씀 앞에서 최고의 집중력을 가져보시기 바랍니다. 영적인 잠을 깨우고, 깊은 겨울 잠에서 일어나 말씀 앞에서 완전히 180도 다른 삶을 살기 시작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말씀이 가장 귀하고 중요하다는 것을 새롭게 체험하게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으로 인하여 여러분의 삶이 다이나믹해지길 소망합니다. 말씀으로 인하여 울고, 말씀으로 인하여 깨닫고, 말씀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말씀과 함께 하는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말씀이 살아있다는 것을 바로 여러분의 삶을 통하여 발견할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들의 삶을 통해 이 땅에 마음껏 드러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그러기 위해서 간곡히 마지막 부탁을 드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셔야 합니다. 새벽부터 정오까지 읽게 되길 축복합니다. 읽는 게 힘들지 않기를 축복합니다. 읽는 족족 밝히 깨닫게 되길 축복합니다. 지겹지 않길 축복합니다. 매일 새롭길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가 언제나 새롭듯 사랑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 음성이, 아침마다 새로우시길 간절히 축복합니다.
결단 찬양 - 말씀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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