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는 늦더라도 옳다.
마 5장 21~26절
인생은 참 복잡합니다.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것들이 너무 복잡하고
우리 교회 속에 있는 생각들이 너무 복잡합니다.
이런 복잡한 것이 사회를 이루다 보니
이 사회가 얼마나 복잡한지 모릅니다.
그렇다 보니 우리가 사는 것도 너무 복잡합니다.
복잡하다 보니 스트레스도 많이 받습니다.
이것 저것 골치 아픈 것을 챙기다 보니
받는 스트레스가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이 복잡한 것을 쉽게 푸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갈수록 꼬여져 가는 것이 많을수록
그것들을 더 쉽게 푸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과하는 것입니다.
사과는 자기가 잘못한 것이 있다고 해서 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상대방에게 불편함을 주었다면 사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잘못한 것이 없는 것을 가지고
나쁜 상황을 더 악화 시킬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사과를 했는데
다음에 보니 그 분이 잘못해서 사과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잘못 듣고 큰 실례를 범한 것입니다.
실례만이 아니라
무식할 정도로 상대에게 잘못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늦더라도 반드시 사과를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제목처럼
“사과는 늦더라도 옳다”고 했는데
늦더라도 반드시 사과를 해야
자신이 좋아지고 자신이 성장하는 것이고
다음엔 그런 실수를 범하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제가 보니까
그런 사과는 거의 돌아오지 않는 것을 봅니다.
잘못한 것이 없는데 뭐라 그러면
대부분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느냐며
오히려 따져들고 면박을 줍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인격적으로 풀고자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해서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사과를 했으면
그 분에게 정중히 사과하고
인격적으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그냥 넘어가버리면
윽박지른 사람이 이중의 짐을 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 짐의 부끄러움과 창피가 너무 커서
빨리 자신이 잘못했다고 하면
서로가 더 가까워지고 더 친밀해 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절대로 사과하지 않습니다.
대통령 욕해 놓고
절대로 사과하지 않는 것처럼
사과하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마음의 밭만
더 황폐해 지는 것입니다.
복잡한 세상을 더 복잡하게 살고
골치 아픈 세상을 더 골치 아프게 사는 것입니다.
인생의 짐이 무겁고, 마음의 짐이 무겁고
사는 것이 더 아프고 더 골치 아프다면
그것은 사과를 너무 안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향하여
자신에게로 오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짐을 가볍게 하고 편히 쉬게 하리라 했습니다.
그 편히 쉬게 하는 것은 바로 사죄입니다.
누군가로부터 용서를 받는 일입니다.
내가 용서도 해주어야 하겠지만
용서를 받기도 해야 합니다
용서받는 것이 바로 사과입니다.
큰 잘못만 사과를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마음에 부담을 주는 것만 있어도
내가 사과하는 것입니다.
사과하면 내 주가가 올라갑니다.
사과하는 사람에게 쉽게 비난을 하지 못합니다.
더구나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사과를 하면
그 사람의 인격을 훌륭하다고 칭송을 받습니다.
절대로 손해 보지 않는 것이 바로 사과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부터 사과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항상 내가 옳은 것처럼
내가 하는 것은 항상 틀림이 없는 것처럼
교만에 빠져서 목이 뻣뻣하게
남만 지적하고 남만 비판하고 그런 사람이 아니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사과하는 것이 쉽고 편안하다고 생각하고
사과를 잘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사과를 잘하는 사람은
세상에 나가서도 사과를 잘합니다.
사과를 잘 할 때
그의 인생이 풀리는 것입니다.
자동차도 짐을 잔뜩 실으면
차가 잘 나가지 않습니다. 힘만 듭니다.
반면에 짐이 가벼워지면
차는 쌩쌩 잘 나가게 됩니다.
사과를 잘하면 복잡한 관계가 풀리고
복잡한 생각이 풀리기 때문에
무슨 일이든지 잘 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쉬운 인생을 사시기 바랍니다.
편한 인생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바로 사과하는 것입니다.
사과를 할 때에 방법도 중요합니다.
너무 가볍게, 너무 건성으로 사과하면 안됩니다.
옛날 말처럼 사과를 하려면
개처럼 해야 합니다.
개가 사람 앞에서 어떻게 합니까?
완전히 배를 땅 바닥에 대고 굽신거리지 않습니까?
자신의 잘못을 진정으로 사과하고자 한다면
바닥에 길 정도로 사과를 해야 합니다.
그러면 상대방의 마음이 풀리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마음이 풀려야 내 인생이 풀리는 것입니다.
속이 좁은 사람은 당장 그 사과를 받아주지 않더라도
점차 그 사과하는 모습에 마음이 풀리고
오히려 나를 돕는 자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결코 손해보지 않는 것이 사과입니다.
항우와의 싸움에서 승리해 한나라를 세운 유방이
바로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백수건달로 자란 사람이지만
누군가 자신의 실수를 지적하면
태도를 180도 돌변해 개처럼 사과했다고 합니다.
항우와의 전투가 잠시 휴전 상태에 접어들자
유방은 진류현이라는 한 마을에서 쉬어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 지역 사람인 역이기라는 자가 찾아왔습니다.
신하로부터 그 이야기를 들은 유방은
‘도대체 뭔 소리를 하려는지 들어나 보자’고 마음먹고
역이기를 군막 안으로 들어오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유방의 자세가 자못 거만했던 것입니다.
비스듬히 침상에 앉은 상태에서
두 명의 하녀들이 발을 씻기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역이기는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화를 버럭 냈습니다.
도대체 사람을 대하는 그딴 식의 태도가 뭐냐는 호통에
유방은 곧바로 표정과 자세를 바꾸며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사죄를 드리기 전에 먼저 옷을 갖춰 입고 예부터 갖추겠습니다.”
주섬주섬 옷을 갖춰 입고 하녀들을 내보낸 뒤
유방은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식견이 높은 선생님을 알아볼 능력이 없는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제 예를 갖춰 다시 이렇게 부탁드리오니
저를 야단치지 마시고 부디 항우를 물리칠 방법을 알려 주십시오.”
유방은 언제 거만하게 굴었냐는 듯 순식간에,
그리고 완전히 돌변을 한 것입니다.
이것이 한나라의 시황제가 된 유방의 사과 방법입니다.
자신이 사과할 때 이렇게 개처럼 빡빡 긴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요즘 사과하지 않는 모 장관과는
완전히 대조된다 할 수 있겠습니다.
아들 휴가 문제를 제기했던 당직 사병의 제보가
검찰조사를 통해 사실로 다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그런 적이 없다 하더니
이제는 생각이 나지 않았었다 하면서
전혀 사과하지 않는 오만한 태도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런 유형의 사람은
장관이든지 평범한 사람이든지 오래가지 못합니다.
내 모든 삶이 서툴긴 하지만
사과까지 서툴러야 되겠습니까?
인성의 기본이 안 된 사람은
사과조차도 너무 힘들어 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율법을 완전하게 하려고 오셨다고 하신 예수님이
그 율법의 완성은 형제 사랑에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를 어떻게 사랑합니까?
첫째는 살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형제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분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형제 살해는 폭력만이 아니라
욕설이나 분노만으로도 충분히 죽일 수 있습니다.
셋째는 사과하라는 것입니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으면
예물을 드리기 전에 먼저 화해하고 와서
예물을 드리라 하고 있습니다.
또한 고발한 자와 함께 같이 있으면
급히 사화하라 하고 있습니다.
빨리 사과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일로 법정에 까지 가면
자기 자신만 골치 아프기 때문입니다.
인생이란 그렇습니다.
26절의 말씀처럼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빠져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채무 관계도 그렇지만
감정이나 인격에 있어서도
내가 갚아야 할 것은 갚아야
내가 진정으로 자유 할 수 있고
내 무거운 인생이 가볍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결론 맺겠습니다.
혹시 아직도 사과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까?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사과는 개처럼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인격이 깎아 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존경 받을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25절의 말씀처럼
“급히 사화하라”는 말씀을 기억하고
실천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