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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4 - 프랑스의 첫 나라 프랑크 왕국을 세운 메로빙거 왕조와 카롤링거 왕조!
프랑크 왕국(프랑스: Francs, 이탈리아: Franco, 독일: Fränkisches , 영어: Francia )은 서기 5세기말
게르만족의 프랑크족이 세운 나라니... 오늘날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을 형성한 왕조로 비잔티움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이탈리아의 동고트족과 아프리카의 반달족을 쳐부수고 아랍인이
이베리아 반도의 서고트 왕국을 몰락시킨 와중에 거의 유일하게 존속·확장한 게르만족 왕조 입니다.
영토는 제2차 세계대전후 유럽 경제공동체 지역(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베네룩스 3국)과 일치하니...
1950년대에 여기 속하는 나라들은 카롤루스 대제(샤를 마뉴)의 기독교화된 서구를 거론했으며,
카롤루스 대제 시대 프랑크 왕국의 수도였던 독일의 아헨에서 카롤루스 대제상(償)을 제정했습니다.
프랑크족은 451년에 갈리아(프랑스) 오를레앙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로마군 아이티우스와 연합해
훈족을 저지한 적도 있는데 왕국이 수립된 5세기 말은 서로마 제국이 476년에 게르만 용병
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멸망하고, 걸림돌이 사라진 서유럽으로 게르만족이 대거 이동하면서
국가를 수립하던 혼란의 시기로 게르만족이 갈리아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은 오래전 부터 였습니다.
게르만 서고트족 스페인의 서고트왕국은 711년 과달레테전투에서 아랍군에 망했고 , 이탈리아의
동고트족과 아프리카 튀니지의 반달족도 동로마군에 멸망하였으며 갈리아 동부 부르군트족의
부르군트 왕국은 백년전쟁 후에 프랑스로 통합되어 부르고뉴 지방이 되었으니... 후세에 까지
게르만족의 흔적을 남긴 것은 프랑크족의 프랑크 왕국과 앵글로색슨족의 영국 칠왕국 정도 입니다.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일으킨 훈족은 5세기 중엽에 세력을 떨쳐 아틸라의 지휘 아래 서쪽은 라인강
에서 동쪽은 카스피해에 이르는 대제국을 이루었지만, 453년 아틸라가 죽은후 왕자들의 분열과
게르만 부족들의 반란으로 훈 제국은 무너지고 다른 민족에 동화됨으로써 전통이 사라져 버립니다.
프랑크족은 근거지 라인강 하류를 유지하면서 인근인 갈리아와 독일 등지에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
했으니, 서고트족등이 기독교 아리우스파로 개종한데 비해 프랑크족은 게르만 전통을 지키면서
기존의 게르만계 중소부족을 통합하고 갈리아의 원주민인 로만~갈리아인들을 통치했는데, 훈족의
쇠퇴후 프랑크족은 클로비스 1세가 메로베우스 왕조를 개창하면서 481년에 왕국을 수립하게 됩니다.
이교도 프랑크족은 승자의 권리로 가톨릭파 기독교도 갈로~로마인의 재산과 땅을 빼앗았는데, 갈리아인
들에게 유리한 점은 승자는 소수고 패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다수이니 모두 노예가 될수는 없었으며
정주해 통치하려면 명령을 전달해야 하는데... 라틴어로 된 문장을 쓸 사람이 필요했고 또 세금을
거둘 사람도 필요했으며 로마제국 시대 행정기구를 유지해야 하는등 패자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톨릭등 일신교도들은 아리우스파 기독교도등 소위 이단에게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가혹한 박해 를
가했지만... 프랑크족과 갈로 로마인은 서로 종교가 다른 이교도 이니 종교문제로 박해를 받을 일은
없었다는 것이며, 마지막으로 지배자가 생겼으니 이제는 과거처럼 게르만 야만인들로 부터 습격과
약탈의 위험에서 벗어나 안전해졌다는 것이니 "정복당함으로써 평화가 도래" 했으니 이를 기뻐합니다.
프랑크족은 라인강 하류에서 용병등의 형태로 로마제국 영내에 침입하여 5세기에 들어서자 몇개
의 프랑크족 소왕국이 건설되었고 5세기 말에 프랑크 왕국이 성립되어 메로빙거 왕조가
군림했는데, 창시자 클로비스왕은 훈족의 격퇴에 공을 세워 라인강에서 피레네에 이르는
대영토를 수중에 넣었으니....... 동게르만 제족(諸族)과는 달리 클로비스가 가톨릭
아타나시우스파로 개종한게 동로마제국과 우애를 맺으면서 프랑크 왕국 발전의 열쇠가 됩니다.
481년부터 511년까지 프랑크 왕인 클로도베크(클로비스)는 493년 부르군트족의 공주와 결혼 했는데,
이 여인이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 왕은 두 아들이 세례받는 것을 허락했으며 라인강을 건너 독일
알라만족과 싸울 때...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와 똑 같은 기적이 일어나니 왕은 3천명의 부하와 함께
세례를 받는데, 두 이야기는 부여 동명왕과 고구려 주몽의 신화가 똑같은 것처럼 닮은게 인상적입니다?
클로비스는 로마 황제의 관리라는 지위를 벗어나지 못했으며, 왕국도 분할 상속제나 왕위의
공동세습제 등에 의해서 분열과 내란에 시달렸으나.... 후의 카롤링거 왕조의 동향에
비추어서 볼 때, 프랑크 왕국의 성립은 서유럽 세계의 형성과 그리스 교회에 대한 로마
교황의 지위 확립 그리고 봉건제의 성립 등과 밀접하게 관련되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프랑크족은 살리족·리부아리족·상프랑크족의 3부족으로 나뉘었고 각각 군소부족을 포함하고 있었으니
각 부족은 많은 파구스로 갈라졌고 파구스는 각각 수장(首長)을 가지고 있었는데, 용병이나
콜로누스로서 로마 영내에 정착한 살리족의 수장 가문에서 훗날 왕국을 세우는 메로비스가 탄생합니다.
메로베우스 왕조는 프랑크 왕국 최초의 왕가로 5세기 중엽 살리족(族) 프랑크를 지배한 메로비스
에서 유래하는데, 그 손자 클로비스에 의하여 기초가 확립되고 아들 클로타르 1세(511∼561)
때에 거의 갈리아 전체에 걸쳐서 번영했으며... 시리아인, 유대인 등 오리엔트 상인의 내왕이
많아, 고대적 상업으로 부터의 관세(關稅) 수입에 의존하는 로마양식의 관료제 국가로 발전합니다.
그러나 게르만 고유의 재산 균분(均分) 상속의 원칙 때문에 왕국은 항상 분열의 위기에 놓여, 그후
지중해 상업이 쇠퇴하는 한편 각 분국왕(分國王)들이 서로 싸우자 대토지 소유에 바탕을 둔
귀족 세력이 대두하여 클로타르 2세, 다고베르트 1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치상 실권은
귀족 중 제일 세력이 강한 분국의 궁재(宮宰)의 손으로 넘어가니, 분국 아우스트라시아
에 이어서 프랑크 왕국 전체의 궁재가 된 카롤링거가(家) 의 쿠데타로 751년에 단절 됩니다.
클로비스 1세(재위 481∼511)는 메로빙거 왕조의 프랑크 왕이니 힐데리히 1세의 아들로 16세에
즉위했으니, 486년 수아송전투에서 갈리아 총독 수아송 왕국의 군주 로마인 시아그리우스군
을 격파하고 솜(Somme) 강에서 르와르 강에 이르는 지역을 얻은후 알라만(Allamanni)인과
서고트족을 격파하고, 마인 강에서 알프스에 이르는 지역을 획득해 프랑크족의 통일을 완성
했으며.... 아내의 감화로 기독교로 개종해 교황의 지지를 얻음과 동시에 로마문화를 수입합니다.
프랑크왕 클로비스는 507년 서고트족을 부이예 에서 격파해 르와르강에서 가론강까지 서고트 왕국
영토를 획득하게 되는데..... 이탈리아를 한바퀴 돌며 로마를 검탈했던 서고트족은 갈리아 남부에
정착해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과 서로마가 맞붙은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서로마 측으로 참전했으며,
에우리코왕은 수에비족과 반달족을 몰아내면서 갈리아 남부와 이베리아를 아우르는 강국을 건설합니다.
서기 507년 프랑크 왕국의 국왕 클로도베쿠스(클로비스) 1세의 군대와 서고트 왕국의 국왕 알라리크
2세가 아키텐의 푸아티에 부근 부이예에서 전투를 벌이는데, 그전인 서기 486년 프랑크의
클로도베쿠스 1세는 수아송 전투에서 시아그리우스를 격파해 프랑크 왕국은 2배로 늘어났고
갈리아의 로마군 잔여병이 그의 수중으로 들어갔으며 491년 갈리아 북동부 튀링겐족을 복종시킵니다.
클로도베쿠스 1세는 라인강에 거주하던 부르군트족과 알레만니족을 공격했고 496년 톨비악 전투에서
알레만니족을 격파했으며(파리 세느강 상류에서 2번째 다리 이름이 이 전투를 기념하는 톨비악다리),
이후 클로도베쿠스는 부르군트 왕국 일부를 공략했는데 그 결과 프랑크 왕국의 영향력은 아키텐과
히스파니아에 걸친 서고트 왕국의 경계를 살 정도로 강력해졌으니 양국 간 마찰이 표면 위에 떠오릅니다.
클로도베쿠스 1세는 서고트 왕국을 상대하기 전에, 이탈리아의 동고트 왕국의 군주 테오도리쿠스 대왕
과 화친을 맺기로 하고, 자신의 누이 아우도프레다를 테오도리쿠스 대왕과 결혼시켰으며 서기 506년
에 클로도베쿠스는 루아르강 중류의 섬에서 서고트 국왕 알라리크 2세와 만나 불가침 조약을 맺었습니다.
알라리크는 이때 클로도베쿠스에게 낭트, 앙제, 투르, 오를레앙을 넘겨준 것으로 보이는데
이 도시들은 루아르강 하류 주요 도시였으며, 주민들은 가톨릭 신자들로 아리우스파
기독교를 신봉하는 서고트 족에게는 지극히 적대적이라 알라리크 2세는 아마도 통제
가 안 되는 이 땅을 프랑크 왕국에게 넘겨주면서 전쟁을 모면하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한번 밀리면 계속 밀리는 것이니 클로도베쿠스(클로비스)는 불가침 조약을
지킬 생각이 없었으니 부르고뉴 왕 군도바트와 군사 동맹을 주선했는데.... 이는
동고크왕 테오도리쿠스 대왕이 서고트왕 알라리크 2세를 지원하기 위해 달려오는
걸 사전에 차단하는 역할을 부르고뉴 왕국에게 맡기려는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507년 2월 프랑크 왕국 전역에 군대 동원 명령을 내렸고, 이른 봄에 루아르강
을 건너 아키텐으로 진격했으니 가능한 한 빨리 아키텐으로 남하해 요새화된
도시들로 부터 민병대를 지원받기를 희망했는데 한편, 알라리크 2세는 프랑크
군이 조약을 깨고 남하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푸아티에에 군대를 집결합니다.
클로도베쿠스(클로비스) 1세는 비엔느 강을 건넌뒤 푸아티에 시에서 9마일 떨어진
부이예에 이르러 정찰병으로부 터 서고트 왕국군이 근방에 있다는 정보가
들어오자, 즉시 부이예 평원에 전투 대형을 형성하고 적을 기다리게 했으니
이리하여 갈리아 서남부 아키텐 일대의 패권을 둘러싼 양측의 대결이 임박 합니다.
알라리크의 군대는 서고트족과 로마 징집병으로 구성됐고, 클로도베쿠스 군대는 프랑크족과 로마계
갈리아 엘리트 전사들에 이웃나라들에서 온 외국인 용병들로 구성되었으니 투르의 그레고리에
따르면, 양측이 서로 화살을 쏘고 창을 던진 뒤 돌격하였다고 하며 서고트 기병대가 프랑크 보병
대열에 돌격했으나 실패했다면서 "클로도베쿠스 왕은 신의 도움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고 언급합니다.
클로도베쿠스 1세는 전투 도중 알라리크 2세에게 직접 돌격하여 수급을 베었다고 하는데 사실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알라리크 2세가 전투 도중에 전사한건 확실하며 서고트 군은 왕의 전사를
확인하자마자 패주하면서 부이예 전투는 프랑크군의 완승으로 끝났으며, 여세를 몰아 보르도를
포함한 아키텐 전역을 휩쓸었고 서고트 왕국 수도 툴루즈도 함락하여 왕실의 숱한 보물을 노획합니다.
클로비스와 연합한 부르군트 왕국군도 나르본느를 공략했는데..... 프랑크의 클로도베쿠스 1세는
내친김에 서고트 왕국 전체를 정복하려 했지만, 이탈리아 동고트왕국의 테오도리쿠스
대왕이 사절을 보내 그러지 말라고 권하자 아키텐만 얻는 선에서 마무리지었으며... 이후
테오도리쿠스 대왕은 서고트의 섭정을 맡았고 511년 클로도베쿠스가 죽자 섭정왕이 되었습니다.
클로비스는 수도를 스와송에서 파리로 옮기고 성(聖) 아포스톨 성당을 건립해 동로마 황제로
부터 명예 콘술(Consul) 의 칭호를 받았으며 살리족의 관습법을 살리카 법전으로 성문화
하였고, 특히 성직자를 등용하여 적극적으로 로마의 행정조직을 도입함으로써 국가통치의
기초를 견고하게 하는 데에도 진력하여 장차 프랑크 왕국이 발전할 터전을 굳건히 다진 후
에 파리에서 사망하였고 그가 죽은후 왕국은 게르만의 관습에 따라 네 아들에 의해 분할됩니다.
살리카 법전은 살리족(族) 프랑크 부족법전(部族法典)인데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을 거쳐 고전
문화의 세례를 받은 결과 편찬된 라틴어의 이른바 만인법(蠻人法)· 부족법(部族法) 중의
하나이니, 다른 게르만의 부족법전에 비해 게르만 고래의 전통이 강하며 5~ 6세기에
성립된 것으로... 살리족이 프랑크 왕국의 중심세력이 되었기 때문에 리부아리아 법전
이나 프랑크 제국법에 영향을 주었을뿐만 아니라 후대의 유럽 제법(諸法)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프랑크족 고래의 분할 상속의 원리 및 왕위 공동 세습제의 원리가 메로빙거 왕조의 클로비스왕
후 부터 이 왕국의 분열과 내분에 의한 국내 혼란과 쇠퇴의 원인이 되었으니, 대토지 소유자
(귀족)의 권력이 강화되고 왕국 내에는 메츠, 오를레앙, 파리, 수아송의 4 수도가 생기고
7세기초 클로타르 2세 후에 부르군트, 아우스트라시아, 네우스트리아의 3지역으로 나뉘게 됩니다.
프랑크 왕국의 첫 번째 왕조인 메로베우스 왕조는 481년에 클로비스왕에 의해 시작되었으니
훈족이 쇠퇴하고 기존에 강력한 경쟁자들이 머나먼 땅으로 이동한 공백기를 이용하여
수립한 것인데, 클로비스 1세는 왕국 수립후 갈리아를 침략했으니 이전에
게르만족의 침략은 약탈이 위주였지만 클로비스는 갈리아(프랑스) 정복을 목표로 했습니다.
수아송 전투에서 로마 제국의 마지막 남은 세력을 분쇄해 갈리아를 장악하였고 이후 방향
을 돌려 라인강 동쪽 지역을 침략하여 알레마니족을 정복하던 중인 496년에 로마
가톨릭(아타나시우스파)으로 개종하는데.... 이로써 기존에 정복했고 지금은 후방
병참기지 역할을 해야 할 갈리아의 협조를 종교가 같으니 손쉽게 획득할 수 있게 됩니다.
클로비스는 군사적인 승리를 통해 기존 로마 세력, 경쟁적인 게르만계 왕국, 중소 게르만부족의
통합을 통해 갈리아의 패권을 장악하였으나 이후 메로빙거 왕조의 국왕들은 볼게 없었으니,
가장 문제가 된 것은 게르만족의 관습인 분할 상속이었는데 나중에 서프랑크와 동프랑크,
중프랑크로 갈리게 된 원인이 되는 이 원칙은 자식들에게 재산을 똑같이 분할한다는 것 입니다.
문제는 하나의 왕국을 개인의 재산 내지는 사유물 정도로 생각하여 똑같이 이 원칙을 적용한
결과 왕국은 왕의 아들들과 그 아들들 사이에 계속 분열하게 되었다는 것인데.... 이
와중에 국왕의 권력과 권위는 점점 떨어졌고 모든 실권은 궁재대신이 차지하니,
마침내 751년 궁재대신 피핀이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메로빙거 왕조의 마지막 국왕
힐데리히 3세를 몰아내고 그 자신이 왕위에 오르면서 새로운 카롤링거 왕조를 세우게 됩니다.
왕으로서의 실권을 행사한 최후의 메로빙거왕 다고베르트 1세(629년~ 639년)이후 왕권
은 유명무실해지고 분할된 프랑크 왕국의 각 지역에서 우세한 실력을 장악한 귀족
가문의 대표가 궁재(宮宰, Major domus)로서 사실상 왕권을 대행했으니, 이들
중 프랑크 왕국의 동북부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 가문이 비약적으로 세력을 확장합니다.
이 가문은 한때 그 출신으로서 두드러진 인물이었던 메츠의 주교 아르눌프(Arnulf) 의
이름에 따라 "아프눌핑거(Arnulfings)" 로 불렸으나, 나중에 이 가문 출신의
인물 중 가장 걸출한 카롤루스 마그누스(Carolus Magnus, 프랑스어
Charlemagne, 독일어 Karl der Große)의 이름에 따라 "카롤링거 가문" 으로 불립니다.
이 가문은 동부 아우스트리아(Austria)의 궁재(宮宰)직을 세습하였고 게르만족의 방식
대로 comitatus 에 의거하여 자신만의 무장 세력을 보유했으며, 나아가 헤리스탈의
피핀(대 피핀)은 687년 서부 네우스트리아 지방을 군사적으로 제압하고 688년에는
동남부 부르군트(부르고뉴) 를 포함하여 사실상 프랑크 왕국의 전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아들인 카를 마르텔 (프랑스어: Charles Martel, 독일어: Karl Martel, 714년 - 741년)은 732년 피레네
산맥을 넘어 서유럽으로 쳐들어온 우마이야왕조 이슬람의 침입을 파리 서남쪽 투르 푸아티에
전투(Battle of Tours)에서 물리쳤으며, 특히 이슬람의 기병에 맞서 단행한 일련의 군제 개혁은
서유럽에서 기사 제도와 봉건 제도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한 계기를 이루는 의미심장한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우마이야 왕조의 이슬람 세력은 북아프리카를 넘어 서남부 유럽 쪽으로 확장되고 있었
는데 이슬람 세력은 스페인 지방을 정복하고 서유럽을 노렸으니... 서유럽을 지배하고
있는 프랑크왕국의 메로빙거 왕조에서는 재상 카를 마르텔이 권력을 장악하고 기병을
활발히 훈련시켰는데, 732년 스페인 코르도바 총독 아브드 알 라만은 프랑스 아키텐
을 침공하여..... 아키텐 공작 에우도를 무찔렀고 에우도는 카를 마르텔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갈리아를 원하던 아브드 알 라흐만은 코르도바군과 베르나르인들로 편성된 기병과 투창병
부대를 이끌고 이베리아 반도의 북서쪽으로 올라왔으니... 아키텐 공작 에우도의
사위이자 갈리아 남서부의 총독인 무슬림 오트만 벤 아비네는 프랑크 족과의
동맹을 믿고 안이하게 방어하던 중에 우마이야 아브드 알 라흐만 군사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아브드 알 라흐만은 오트만 벤 아비네를 반역자로 규정했고, 후일 롤랑이 전사한 곳이기도 한 론케발레스
언덕에서 크게 패배하고 전사했으니, 이슬람 군대는 갈리아 남서부를 공략하고 프랑크 왕국 아키텐
과의 접경인 보르도로 북상하자 보르도의 프랑크 군대는 아브드 알 라흐만의 무어 군대의 경기병단
과 투창병에게 대패하였으니 보르도의 성벽과 도시는 파괴되고 약탈과 방화, 살육의 현장이 되었습니다.
카를 마르텔은 투르시를 방어하기 위해 훈련시킨 기병대를 주둔시킨후 에우도의 잔류군을 수습하여 규합
한뒤, 추가로 군사를 모집해 왕국의 남서부 프로방스로 내려갔는데... 그러나 무슬림군은 푸아티에
를 건너서 이미 투르를 약탈, 방화한 뒤 다시 푸아티에를 거쳐서 이베리아 반도로 되돌아가려고 했습니다.
카를 마르텔은 급히 이들을 추격했으니 푸아티에에 도착할 무렵 아브드 알 라흐만은 카를 마르텔
군대가 추격해온다는 것을 알고 행군을 중단, 군사를 정비한후 아브드 알 라흐만 군대는
푸아티에와 투르의 중간 지점에 매복하여 카를 마르텔군을 기다렸으니 급히 달려온
카를 마르텔군은 우미야드 군사를 추격하는 길가에 있던 프랑크인들의 사체를 보고는 경악합니다.
교전 초반에 갓 도착한 프랑크 군대는 기습공격한 우미야드 군대의 기병들의 창과 투창병
들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으니... 아브드 알 라흐만의 군대는 기병과 투창병
중심의 군대였고, 화살과 칼을 소지하고 있었는데 기병의 창에 상대 군사를 부상
입힌 뒤 투창병이나 칼과 화살을 쏘는 보병, 궁병을 이용해 목표를 타격하는 것이었습니다.
카를 마르텔의 군대는 프란키스카 라고 부르는 무거운 대형 도끼를 든 보병과 기타 도끼를 든
보병이고 철제 투구와 미늘갑옷 차림이었으니, 카를 마르텔은 중간에 프랑크인들
이외에도 아키텐인, 슈바벤인, 바이에른인, 그밖에 프랑크왕국 동부의 부족상태에 머무른
야만인 군대 및 노르만 족까지 동원해 왔으니 이들은 주로 창이나 도끼를 소지하고 있었습니다.
아브드 알 라흐만은 카를 마르텔의 프랑크족 및 게르만 연합군이 밀집해 있자, 좌우 양쪽에서
기병대를 보내 카를 마르텔의 프랑크-게르만 군을 공격했는데, 투창과 화살, 칼이 날아왔고
전사자가 발생했지만 프랑크 족의 갑옷은 단단하였으므로 틈을 보이지 않은 이들은
상대적으로 적은 부상을 입었으며, 사망자와 부상자가 속출하자 이들은 한곳으로 똘똘 뭉칩니다.
병사들이 서로 달라붙어서 진격한 프랑크군은 부상당해도 참고 행진했고, 동료 군사가 맞아
죽어도 개의치 않고 시신을 밟고 행진했으니... 기병대와 궁수들이 창과 화살로 사격을
계속했지만 한데 뭉친 프랑크-게르만 군은 그대로 행진했고, 아브드 알 라흐만은 투창병
과 칼, 화살을 다루는 보병, 용병단인 투레아크를 보내 돌격시키니 프랑크-게르만 군과
몇보 앞으로 가까워지자 이들은 투창과 화살을 날리고 칼로 프랑크-게르만 군을 공격합니다.
프랑크-게르만군은 프란키스카 도끼로 공격했으니 우미야드군과 베르나르인들은 큰 부상을
당했는데 특히 프랑크 족의 도끼 프란키스카는 다른 게르만 이민족과 브리튼의 켈트족
의 갑옷도 뚧는 도끼였으니, 프랑크족의 사상자는 증가했지만 투창, 화살이 떨어져
감에 따라 도끼를 든 프랑크-게르만 족의 군대에게 밀리기 시작했는데 경기병들로
얇은 갑옷과 방패를 지녔거나 방패가 없던 우마미야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시작합니다.
창과 투창, 화살이 거의 바닥나자 우마미야의 경기병들과 투창병, 보병들은 옆으로 돌아서
회군했고, 이어 무어군의 기병대와 궁수들이 돌격을 시도했는데 보통 투창공격과
화살공격후 전열이 무너진 상대 군사를 보병대와 칼을 다루는 병사들, 그리고
중기병대가 상대해서 궤멸시키는 전술이 통하지 않자 아브드 알 라흐만은 당황합니다.
전사자를 많이 냈지만 프랑크-게르만 연합군은 전열을 흐뜨러뜨리지 않고 단단하게 뭉쳐
행군하자 우마미야 기병대와 베르나르기병대 및 칼을 든 보병들은 프랑크-게르만
군을 상대했고, 처음에는 기병대가 빠른 속도로 움직여 우세했지만 점차 갑옷과
프란키스카를 비롯한 도끼로 중무장한 프랑크-게르만 군대에게 점차 밀리기 시작합니다.
다급한 아브르 알 라흐만의 나팔수들은 뿔나팔을 불고 투창 경기병대들과 보병대는 재빨리
퇴각했다가는 다시 투창으로 재무장하고 돌격했지만.... 갑옷, 방패가 가벼운 경기병대
는 오히려 프랑크-게르만 족의 무거운 도끼에 쉽게 당했고 이슬람 군대는 사상자가 속출
했으며 노예 용병들은 대부분 도망치자 이어 북아프리카에서 데려온 무어인들도 도망칩니다.
아브드 알 라만은 베르나르인과 투아레크인들을 정렬시켜 공격했고 남은 무어인들과 중기병대
와 함께 프랑크군을 공격했지만, 사상자를 내면서도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고 계속 행진해
오니 남아있던 무어인들은 공포감을 느끼고 도주하니... 이에 아우스트라시아 사람들과
슈바벤인들은 남은 무어인 군대를 도끼로 베고 계속 아브드 알 라흐만의 진영으로 돌격합니다.
무어인들은 프랑크-게르만 군대에게 쓰러졌으며 화살과 투창이 바닥난 아브드 알 라흐만의 군대는
우왕좌왕했고 통제권을 상실했으며... 무어 기병이 던지는 창은 프랑크-게르만인들의 방패를 뚫지
못하고 튕겨나갔으며, 무어인들은 프랑크-게르만인들이 던지는 프랑키스카와 도끼에 맞아 죽었고
마지막날에 아우스트라시아-바이에른의 군대는 무어인들의 본진으로 쳐들어가 도끼로 쳐 죽입니다.
아브드 알 라흐만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공격했지만 무어군과 코르도바군은 패주하여 달아
났으니 아브드 알 라흐만은 그날 저녁 혹은 옴미야드군이 대부분 도주하는 그 다음날
아침에 전사했다고 하는데... 이들은 보르도를 넘어 이베리아반도로 도주했으며, 보르도,
투르, 푸아티에, 아키텐 등지에서 약탈한 보물들 중 대부분을 놔두거나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카를 마르텔의 기병대는 푸아티에에서 옴미아드군을 격파했고 사령관 코르도바 총독 아브드 알
라만은 전사했으나 732년의 전투가 갈리아에서의 이슬람 세력의 소멸로 이어진 것은 아니니,
이후에도 우미야드군은 737년까지 프랑크 왕국 남부와 남서부 해안가를 약탈했고 카를
마르텔은 출진하는데... 메로빙거 왕조가 몰락하고 등장한 카롤링거 왕조의 피핀 3세가
759년 나르본을 수복할 때까지 무슬림들은 프로방스 해안 및 티레니아 해에서 세력을 떨칩니다.
이후 이슬람교도의 진출은 자기들의 내분과 북아프리카에서 일어난 베르베르인의 반란으로 중단
되는데..... 카를 마르텔은 푸아티에 전투를 통해 영예뿐만 아니라 실리도 얻었으니, 그는
에우도로 부터 충성을 서약받은 아키텐 지역에 대한 권한을 확보할 수 있었고 이후 카를
마르텔의 아들 피핀이 메로빙거 왕조를 무너뜨리고 카롤링거 왕조를 세우는 기반이 됩니다.
카롤링거 가문의 성장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대교회정책이니 추종자들은 주교등 고위급 성직
으로 보상받았으며, 카를 마르텔은 스스로가 로마 교황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니
카를 마르텔의 아들 피핀 3세 이후 서유럽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그 첫번째
가 단신왕 피핀을 메로베우스 왕가의 유명무실한 왕 대신에 프랑크 왕으로 추대하는 쿠데타를
승인한 일이니 왕의 정통성은 "교회의 허가"(santification) 에 근거를 두는 선례가 마련되었습니다.
메로베우스 왕조는 왕가 형제들의 골육상쟁으로 내부적으로 쇠약해졌으며 특히 말기에는 무능한
왕이 귀족의 세력을 제어하지 못하여 왕권은 유명무실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메로빙 가문의
왕권이 쇠퇴하는 데는 분할상속이 역할을 했는데 즉 국가는 왕, 또는 왕가의 사유재산 이었습니다.
프랑크 왕국은 사실상 3개의 단위로 분열되어 있었는데, 그 하나는 파리시 주변과 북서부 프랑스
를 포괄하는 네우스트리아, 또 하나는 라인강 중·하류의 이동지방을 포함하여 게르만적 요소
가 우세한 북동부 지역의 아우스트라시아, 그리고 끝으로 남동부의 부르고뉴 (부르군트) 였습니다.
왕권이 주민에 직접적으로 미치는 범위는 제한되었고 각 지역에 실재하는 귀족의 세력이 강화되었으며,
정부 보다 교회가 주민의 생활에 안정적인 질서를 제공했는데 서양 중세의 봉건 제도가 정착되어
가는 중이었으니... 왕권이 다시 강력한 지위를 갖게 되기 까지는 천년의 세월이 필요했는데 프랑스는
백년 전쟁 이후에나 가능했으며 절대주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왕권이 귀족세력을 확실하게 누르게 됩니다.
로마제국 말기에도 희박한 밀도로 존재했던 도시가 쇠퇴하여, 농촌적인 생활양식이 우세해졌고 노예
를 구사하는 로마제국의 대농장 체제가 소멸되고 주민의 대다수는 농민이되 이들의 신분적 처지는
노예의 경우보다 다소 상승했지만, 게르만족이 이전에 누렸던 자유로운 신분적 지위 역시 상실하여
예속적인 농민의 신분으로 서서히 변모했고 일부는 하급 기사 계급으로서 지배세력으로 흡수되었습니다.
약한 왕권과 강력한 귀족 및 지방 지배세력, 그리고 농노화는 서로마 제국 멸망이후 서유럽의
혼란상을 반영하는 것인데... 계속되는 게르만족의 이동과 그에 따른 약탈을 로마 제국이
지켜주지 못하자, 지방 농민들이 유력한 집안에 땅과 자신들을 제공하고 보호를 위탁
하면서 (또는 반대) 상호작용을 일으키며 점차 폐쇄적인 농촌중심의 사회를 형성하게 됩니다.
도시와 상공업은 쇠퇴하였으니 치안이 유지되지 않는 상태에서 마을과 마을, 도시와 도시를 잇는 상업
은 쇠퇴할 수밖에 없었으며, 메로빙거 왕조 치하에서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고 실제로
도시와 상공업은 명맥을 유지하면서 조금씩 다시 발전하게 되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을 필요로 했습니다.
사회의 지배층인 귀족 역시 두개의 계통에서 형성된 이질적인 구성을 취하고 있었으니..... 일부의
고(古)게르만 귀족 가문과 로마화된 갈리아의 귀족가문이 주요 성분이었는데, 그 위에
소수의 왕족이 더욱 두드러진 지위를 차지했으며... 이들에게는 나중의 귀족에게서 보이는
바와 같은 장자 상속의 확고한 관습도 존재하지 않았고 남성의 우월한 지위도 확립되지 않았습니다.
귀족 지위는 여계(女係)를 통해서도 계승이 될수 있었으나 가톨릭이 자리를 잡으면서 점차 남성의 우월적
지위가 확고하게 자리잡게 되었으며, 일정한 귀족 가문명도 정비되지 않았으니 카롤링거 왕조 말까지
중세초기의 귀족들은 가문명(family name)이 없이 하나의 이름으로 불렸던 것이고(예: 카를(Karl),
외도(Odo), 우도(Udo) 등) 귀족들이 일정한 가문 이름을 갖게된 것은 11~12세기 이후의 경향이었습니다.
751년, 카를 마르텔의 지위를 계승한 피핀 3세는 메로빙거 왕조의 마지막 왕 힐데리히 3세를 폐위하고
새로운 왕이 되었는데.... 이 쿠데타는 교황과 제휴하여 무혈로 이루어졌고 폐위된 메로빙거 왕조의
마지막 왕은 수도원에 유폐되었는데, 왕이 되고자 했던 피핀은 권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귀족의
신분으로 전(前) 왕을 몰아내고 왕이 되면 다른 대귀족들이라고 그러지 말란 법이 없었기 때문 입니다.
이것은 정통성이 없이 힘으로 권력을 장악한 집단에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공통된 것이니
고려 무인정권 시대가 그러했으며, 로마 제국의 군인 황제 시대 (1년간 4명의 군인 황제
가 등장했다가 사라졌다) 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비록 교황과 제휴를 했다지만 보다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해줄 뭔가가 필요했고 이탈리아와 서로마 교회를 예의주시하였습니다.
이 당시 서로마 교회의 수장인 교황 스테파노 2세는 비잔티움 제국과 성상숭배 문제로 갈등
을 빚고 있었고, 군사적으로도 북쪽에서 롬바르드족의 위협을 받고 있었으니 피핀은 이
점에 주목했는데... 마침 교황 스테파노 2세가 롬바르드족과 비잔티움 제국으로 부터
군사적 보호를 요청하자 피핀은 자신이 프랑크 왕국 국왕임을 인정해달라는 제의를 합니다.
로마 교황청의 입장에서야 상관없는 문제였므로 두 권력자의 이해는 합치될 수 있었으니
751년, 피핀이 메로빙거 왕조의 마지막 국왕을 폐하자... 스테파노 3세는 사절을 통해
수아송에서 머리에 기름을 부어(성유의식) 그가 국왕임을 선언했으며 754년에는 교황
자신이 직접 방문하여.... 생드니 수도원에서 그의 두 아들들에게 역시 기름을 부었습니다.
이 의식은 성경에서 유래한 것인데, 이에 대한 보답으로 피핀은 롬바르드족을 격퇴하고 중부
이탈리아의 일부를 교황청에 헌납하였으니 이것이 “교황령” 의 시초이며... 이로써 새로운
카롤링거 왕조가 성립되었고, 교회와 야합을 통해 정권을 장악한 국왕은 영토를 기증한 대가
로 “주교직에 대한 임명권” 을 보유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훗날 서임권 분쟁의 원인이 됩니다.
카롤루스 대제(샤를 마뉴)는 피핀의 아들로 768년 왕이 된후 800년에 로마교황으로 부터 대관식을
거쳐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올랐는데, 유럽의 탄생과 통합을 상징하는 인물이니 아인하르트의
전기(Vita Caroli)로 상세한 프로필이 전해지고 있는데... 아인하르트는 전기에서 카롤루스의 외관,
일상, 궁정생활을 묘사하고, 기독교 군주이자 학문을 애호하는 군주로서 면모를 드러내려 애썼습니다.
카롤링거 왕조의 권력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인데 이름이 여러가지로 불리는 것도 카롤링거 왕조까지는
독일과 프랑스의 공통 역사라는 점을 보여주는데... 카롤루스 대제는 군사원정으로 보냈으니 치세
초기에 프랑크왕국은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라인강 서부를 포괄했으니 동쪽에는 작센족
(Sachsen)이 독립세력으로 존재했고 남동부 바이에른은 느슨한 종속적 유대로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카를 대제(샤를마뉴)의 아들인 루트비히 경건왕의 세 아들이 카롤링거 제국을
동 프랑크 왕국, 중 프랑크 왕국, 서프랑크 왕국으로 분할하였으니.... 이 조약으로 카를 대제가 세운
제국은 해체되기 시작했으며 서유럽의 세 근대국가인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모태가 탄생하였습니다.
870년에 루트비히 2세와 카를 2세는 메르센 조약을 체결하여 프랑크 왕국은 사실상 분리되는
데, 기독교 영향으로 일부일처제인지라 이탈리아계(系)는 875년에, 동프랑크계는 911년에,
서프랑크계는 987년에 각각 왕손이 단절되었으니..... 동프랑크에서는 콘라트 1세를 거쳐
작센 왕조 독일왕국이 성립되었고, 서프랑크에서는 카페 왕조 프랑크 왕국이 성립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