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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돈 辛旽
신돈(辛旽)은 고려 말기의 승려로서, 공민왕(恭愍王)의 신임을 받아 정치계에 들어와 관작(官爵)을 받았고, 부패한 사회제도를 개혁하려 했던 승려 출신의 개혁 정치가이었다. 성은 신(辛), 자는 요공(耀空), 법명은 편조(遍照)이다. 이름 '돈(旽)'은 그가 집권 후에 정한 속명(俗名)이며, 왕이 내린 법호는 청한거사(淸閑居士)이다.
신돈(辛旽)은 득도(得道)하여 욕심이 없으며, 출신이 미천(微賤)하여 친척도 없으니, 대사로 임명하면 반드시 정실에 구애되지 않고 일을 마음먹은 뜻대로 할 수 있을 것이라 인정하고, 드디어 일개 무명(無名)의 승려인 그를 발탁하여 국정을 위임하고 의심하지 않았다... ' 고려사(高麗史) '
옥천사 여종의 아들
혁명가(革命家)와 요승(妖僧)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 인물인 신돈(辛旽. ? ~ 1371). 그를 이해하려면 출생부터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신돈의 어머니는 계성현(桂城縣 .. 현재의 경남 창녕) 화왕산 옥천사(玉川寺)의 여종(女從)이었다. 당시 노비(奴婢)가 승려가 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으나, 그의 아버지가 영산의 유력자였기 때문에 승려가 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없는 것으로 보아 편모슬하에서 자란 것으로 보인다. 다만, 신돈의 본관이 영산(靈山)이고, 묘(墓)가 영산에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신돈의 부친은 영산(靈山)의 유력자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아버지 없이 사찰에서 일하는 여종의 자식이었던 탓에 신돈은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중이 되었다. 또는 영산의 유력자였던 아버지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당시 법명은 신돈이 아니라 ' 편조(遍照) '이었다. 신돈(辛旽)은 훗날 공민왕을 만난 뒤에 만든 속명(俗名)이다.
사찰 여종의 아들이라는 신분 때문에 승려들 틈에도 끼지 못하고, 그저 산방으로 겉도는 신세로 어린 시절을 보넀다. 승려이기는 하였지만, 아웃사이더이었던 것이다. 기득권(旣得權) 세력과 결합한 불교세력에 반감(反感)을 품은 것도 이 시기의 경험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신돈이 개경(開京..개성)에 온 것이 언제인지, 또한 어떤 경위로 왕실과 접촉하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신돈이 공민왕을 처음 만나게 된 시기는 1358년(공민왕 7년)이었다. 이때는 노국공주(魯國公主)가 죽기 전인데다, 집권층의 견제로 정치 전면에 나서지 못했다. 그러나 공민왕은 귀족 집권층들에게 염증을 느끼고 새로운 인물을 통하여 제2의 개혁정치를 펼치려던 중이었다. 공민왕의 새로운 계획에 적합한 인물이 바로 신돈(辛旽)이었다.
공민왕의 전격적인 발탁
공민왕(恭愍王)이 신돈(辛旽)을 전격적으로 발탁한 것에 대해서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공민왕이 어느날 꿈을 꾸었는데, 그 꿈에 어떤 사람이 칼을 들고 자신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런데 때마침 한 스님이 달려와 자신을 구해주었다. 공민왕이 꿈을 꾸고 난 후 얼마 후 김원명(金元命)이 신돈(辛旽)을 데리고 와서 인사를 시켰다.
김원명(金元命)은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으로 공민왕이 경상북도 안동(安東)으로 피신하였을 때 호위한 인물이었다. 김원명의 소개로 만난 신돈은 바로 공민왕(恭愍王)이 꿈에서 본 그 승려이었다. 이후로 공민왕은 신돈을 자주 불렀고, 노국공주(魯國公主)가 죽은 뒤의 외로움을 신돈을 통해 위로받으려 했다. 공민왕 자신이 독실하게 불교를 받들었고, 신돈 또한 총명하여 왕에게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신돈은 1364년 두타승(頭陀僧. 머리는 길고 가사를 입고 있는 행각스님)이 되어 공민왕을 다시 찾아뵙고 비로소 궁안에 들어와 공민왕의 사부(師傅)가 된 것이다.
신돈이 공민왕의 신임을 받아 청한거사(淸閑居士)라는 호(號)를 하사받고, 왕의 사부(師傅)로서 국정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된 시기는 1365년(공민왕 14년)이었다. 공민왕은 그가 ' 도(道)를 얻어 욕심이 없으며, 또 미천하여 친당(親黨)이 없으므로 큰 일을 맡길 만하다 '면서 신뢰하였다. 이에 대해 신돈도 ' 세상을 목되고 이롭게 '할 뜻이 있음을 아뢰고, 비록 참언이나 훼방이 있더라도 자신을 끝까지 믿어줄 것을 청하여, 공민왕으로부터 ' 사(師)는 나를 구하고, 나도 사(師)를 구하리라 '는 다짐을 받았다. 공민왕은 신돈이야말로 서로 이해관계로 얽혀 있는 권문세족의 영향에서 벗어나 소신껏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인식하여 많은 권력을 부여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 나라를 어지럽힐 자는 반드시 이 중놈일 것이다 '라는 비난도 있었고, 심지어 정세운(鄭世雲)은 그를 요승(妖僧)이라 해 죽이려고까 지 했으므로 공민왕이 피신시키기도 하였다. 따라서 그를 배척하던 인물들이 사라진 뒤에야 정치 표면에 나설 수 있게 되었다. 즉, 신돈은 1365년 5월에 치영(崔瑩) 등 무장세력을 비롯하여 이인복(李仁復), 이구수(李龜壽) 등 많은 권문세족을 물러나게 했고, 인사권(人事權)을 포함한 광범위한 안팎의 권력을 총괄하였다. 이렇게 강력한 권력을 갖게 되자 중국에서는 신돈(辛旽)의 ' 권왕(權王) '으로 알려졌고, 관료들에게는 영공(令公)으로 불렸으며, 그가 출입할 때에는 왕(王)과 같은 의례(儀禮)가 행해졌으며, 공민왕을 대신하여 조하(朝賀 .. 조정에 나아가 임금에게 하례하는 것)를 받았다.
신돈의 등장은 그 해 2월 공민왕비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가 난산(難産) 끝에 세상을 떠났던 사실과 관련이 있었다. 공민왕은 14년 동안 끊임없이 반원정책(反元政策)을 펴고 내정개혁을 추진하였으나, 안팎으로 거센 반발과 도전을 받아야 했다. 그런 가운데 홍건적(홍巾賊)을 격퇴하고 부원(附元) 세력을 제거하여 한때 정치적 안정을 누리기도 했지만, 사랑하는 노국공주가 죽자,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져 버렸다. 때마침 신승(神僧) 처럼 보이는 신돈(辛旽)이 나타나자, 공민왕은 그를 절대적으로 신임하여 그에게 국정(國政)을 모두 맡겼던 것이다. 그러나 공민왕의 개혁 지향적인 판단에서 신돈을 중용한 것이지, 노국공주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는 견해는 너무 감상적일 수 있다.
신돈은 공민왕으로부터 청한거사(淸閑居士)라는 호(號)를 받고 사부(師傅)가 되어 국정을 자문했는데, 공민왕이 따르지 않는 일이 없었으며, 그로 인해 많은 추종자가 생기게 되었다. 마침내 1365년 5월 최영(崔瑩) 등을 거세하면서 세력을 쌓았으며, 같은 해 7월에는 진평후(眞平侯)에 봉해진 뒤, 守正履順論道燮理保世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 領都僉議使司事 判重房監察司事 鷲山府院君 提調僧錄司事 兼判書雲觀事 에 이르렀다.
신돈이 위와 같이 긴 이름의 영도첨의사사(領都僉議司事)가 된 뒤 강력한 권력을 장악하게 되자, 중국에서는 그를 '권왕(權王)'으로 불렀고, 백관들은 '영공(令公)'이라 불렀다. 그는 인사권을 포함한 광범위한 내외의 권력을 총관했을 뿐 아니라 공민왕을 대신하여 백관들의 조하(朝賀)를 받았으며, 그가 출입할 때는 의위(儀威)가 왕의 승여(乘輿)와 비슷할 정도의 권위를 가졌다.
국정을 담당하게 된 신돈(辛旽)은 귀족들에게는 요승(妖僧)이었으나, 백성에게는 문수보살(文秀菩薩)의 화신이었다. 신돈의 정치는 민생정치(民生政治)이었다. 기득권 세력을 개혁하여 민중들의 고통을 해방하는 일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였다.
내재추제 內宰樞制
신돈이 실시한 첫 번째 개혁으로 내재추제(內宰樞制)의 신설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선발된 일부 재신(宰臣)과 추밀(樞密)이 궁중에서 나라의 중대한 일을 처리하도록 한 변칙적인 제도이었는데, 권문세족(權門世族)이 중심이 된 '도평의사사'의 확대에 따른 왕권의 약화를 만회할 수 있는 기구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전민변정도감 田民辨正都監
성균관의 중영 成均館의 重營
신돈은 국학인 성균관을 중영(重營)하였다. 그는 1367년 5월에 숭문관(崇文館) 옛 터에 성균관을 중영(重營)할 때, 직접 그 터를 살펴보고, ' 문선왕(文宣王 ..공자를 말함)은 천하만세(天下萬歲)의 스승) '이라고 하면서 이 사업에 적극성을 보였다. 문신들이 품질에 따라 포(布)를 내 추진하는 이 사업에 그는 적극적이었으며 마침내 성균관이 완성됨으로써 유술(儒術)을 중흥시키려는 공민왕의 의욕에 부응하였다.
이 사업은 뒤이어 시행되는 5경4서제(五經四書制)의 분리 및 과거3층법(科擧3層法)의 채택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으로, 성리학(性理學)의 전래, 확산 및 신진사류(新進士類)의 성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성균관의 중영을 전후하여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 이숭인(李崇仁), 정도전(鄭道傳), 권근(權近) 등 신진 문신세력이 등장하고 있었다. 신돈에 대하여 이들은 대체로 현실을 인정하고 참여하여 자기 성장을 이루어 나갔고, 신돈(辛旽)도 그들과의 적극적인 협조를 모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신돈의 개혁정치는 공민왕의 절대적인 신임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신돈은 ' 다른 사람의 참소(讒訴)를 믿지 않아야 세상을 복되게 할 것입니다 '라며 절대적인 신임을 요구하였고, 공민왕은 ' 스승이 나를 구하고, 내가 스승을 구하여 어떤 일이 있어도 남의 말을 듣고 의혹을 품지 않을 것이니 오늘의 이 맹세는 불천이 증명하리라 '라는 서약하며 신뢰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굳은 맹세는 오래 가지못 했다.
고려사(高麗史)는 신돈을 요승(妖僧)으로 평가했다. 당시 항간에 ' 진사(辰巳)에 성인(聖人)이 나온다 '라는 참설(讒說)이돌고 있었는데, 신돈은 자기가 개경에 다시 나타난 1364년이 갑진년(甲辰年)이고, 이듬해인 1365년이 을사년(乙巳年)이니 ' 참설(讒說)에서 말한 성인(聖人)이라는 것이 내가 이니면 또 누구겠느냐 ? '며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녔다는 것이다.
입으로는 성인(聖人)인 척하면서 남을 중상모략하고 양가(良家)의 부녀자들을 갖은 구실로 유인하여 음행(淫行)을 하는 인물로 보았다. 주지육림(酒池肉林) 속에 지내다가도 공민왕(恭愍王)을 만나면 갑자기 돌변하여 좋은 말만 하고, 채소나 과일만먹으며 술 대신 차(茶)를 마시는 이중인격자(二重人格者)로 묘사하였다.
신돈의 안하무인격인 행동이 계속되자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어 왔던 권문세족들은 신돈(辛旽)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먼저 간관(諫官)들이 일어나 신돈을 탄핵하였고, 엄부흥(嚴復興)과 이존오(李存吾)는 신돈을 이상한 사람인냥 소문을 내었다. 신돈은 양기(陽氣)를 붇돋우기 위해 백마(白馬)의 신장을 회 쳐 먹는다 혹은 지렁이도 산 채로 먹는다 ..라는 소문을 퍼트렸고, 결국에는 ' 늙은 여우가 사람으로 변신하였을 것 '이라는 말도 흘렸다.
이러한 소문에 힘 입어 이존오(李存吾)는 죽을 각오로 공민왕에게 상소를 올렷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무렵 신돈은 공민왕과 마치 허물 없는 친구처럼 행동하였으며, 선왕(先王)이나 왕후(王后)의 능(陵)에 배알(拜謁)할 때, 문무백관(文武百官)이 모두 왕을 따라 무릎을 꿇고 절을 해도 신돈(辛旽)만은 홀로 우뚝 서 있을 정도이었다. 원로 중신인 이제현(李齊賢)이 나서서 ' 신돈의 골상(骨相)은 옛날의 흉인(凶人)과 유사하니 후환을 끼칠 것이니 가까이 하지 마십시요 ' 라고 간청까지 할 정도이었다.
이 일로 이제현(李齊賢)은 간신히 죽음을 모면하였으나, 그의 문도(門徒)들이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는 화(禍)를 당했다. 당시 신돈(辛旽)은 이제현(李齊賢)의 문도(門徒)들이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과거(科擧) 시험 자체를 아예 폐지해 버렸는데, 이 때문에 제사를 주관하는 관청에서는 소지(燒紙)나 축문(祝文) 한 장 제대로 쓸 줄 아는 사람을 찾기 어려울 정도이었다고 한다.
천도 遷都
고려 왕조에서 대표적인 천도론자(遷都論者)는 묘청(妙淸)이었다. 묘청의 난(妙淸의 亂)에서 보듯 역사상 천도(遷都)를 주장한 인물은 기득권의 강력한 저항을 받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천도론(遷都論)이라는 문제에서 기득권 세력은 항상 승리하였다. 묘청(妙淸)에 이어 신돈도 마찬가지였다.
신돈은 자신을 배척하려는 구 귀족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불안감과 불쾌감에 사로잡힌 신돈은 음양설(陰陽說) 또는 도선비기(道詵秘記)를 내세워 공민왕에게 자주 천도(遷都)를 권유하였다. 공민왕이 난색을 표하자 개경(開京)의 위치가 바다 가까이 있으므로 외적(外敵)의 침입이 용이하기 때문에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후로 허물없는 사이 이었던 공민왕과 신돈도 점차 사이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이 천도론을 계기로 1367년 10월에 신돈에 의해 밀려난 전(前) 시중 경천흥(慶千興)과 지도첨의 오인택(吳仁澤)을 비롯해 신돈을 공민왕에게 소개하였던 감원명(金元命) 등 전직, 현직 고위관료들이 밀의하다가 발각되었고, 1368년 10월에는 김정(金精), 김흥조(金興祖), 김제안(金齊顔) 등이 신돈을 살해할 것으로 모의하다가 계획이 누설되어 실패했으며, 그 후에도 신돈을 제거하려는 권문세족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신돈의 몰락
1369년경부터 국내외 정세가 여러모로 그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즉, 개혁정치(改革政治)의 부작용(副作用)이 격화된 데다가 심한 가뭄으로 흉년(凶年)이 들어 신돈의 존재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원(元), 명(明) 교체기에 즈음하여, 만주(滿州)에 있던 동녕부(東寧府)의 정벌 단행으로 무장(武將)들의 세력이 강화되었다.
또한 불교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였던 신진사류(新進士流)와 승려인 신돈(辛旽)과의 융화에 한계가 뚜렷이 나타났으며, 집권 말기에 그가 처첩(妻妾)을 거느려 자식을 낳고 주색(酒色)에 빠지자 비난이 높아졌다.
그리고 공민왕은 왕위에 오른 이후로 권력이 한 곳에 몰려 있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다. 부원(附元)세력 뿐 아니라 자기의 심복이라 할지라도 그 권세가 너무 강해지면 제거해 버리는 성향이 있었다. 신돈(辛旽)이 사심관제(事審官제)를 부활시켜 5도(道) 사심관(事審官)이 되려는 야망을 키우자 그를 절대적으로 신임하던 공민왕의 생각도 달라지기 시작하였다.이러한 일련의 사태에 1370년말부터 그동안 정치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공민왕이 친정(親政)을 시작하였다. 특히 태후(太后)와 사이가 나빴던 신돈은 마침내 태후 및 그와 연결된 권문세족(權門世族)의 공격을 받아 반역(反逆)의 혐의로 수원(水原)으로 유배되었다가, 1371년 7월 그곳에서 처형되었다.
눈치 빠르 신돈은 왕이 자기를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죽지 않으려면 죽여야 한다는 명분이 찾아졌다. 하지만 이 일은 곧 발각이 되었고, 신돈은 체포되어 수원(水原)으로 유배되었다가 곧 참살(斬殺) 당하고 말았다. 신돈은 ' 전에 대왕께서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소승(小僧)을 버리지 않으시겠다고 세서 (誓書 .. 어떠한 일이 있어도 신돈을 구하겠다는 왕의 약속을 써 놓은 글)까지 써 주신 일을 벌써 잊으셨습니까 ? 오늘 소승(小僧)을 닦달하시니 대왕의 맹세가 부끄럽지 않으신지요 ? '라며 죽기 직전까지도 역모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신돈(辛旽)의 지위는 전적으로 왕권의 비호 아래 얻어진 것이고 집권 기간도 6년 정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유력한 권문세족(權門世族)을 제거하면서 개혁정책을 추진하였고, 이 기간에 추진된 개혁을 통하여 다음 시대를 이끌어갈 목은 이색(牧隱 李穡), 정몽주(鄭夢周), 정도전(鄭道傳), 권근(權近) 등 신진사류(新進士類)들이 성장할 수 있었다는 점에 큰의의가 있다. 즉, 조선 건국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신진 문신 세력이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정치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공민왕의 개혁정치 전반과 관련해 각별히 유의할 점이다.
또한 공민왕을 계승한 우왕(禑王)과 그의 아들 창왕(昌王)이 신돈의 자손이라 하여 뒷날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을 내세워 폐가입진(廢假立眞)의 명분 아래 창왕을 내쫒고 공양왕(恭讓王)을 추대한 정변과도 간접적인 관련을 갖게 된다. 이로써 조선의 건국과정을 통하여 그의 집권은 부정적인 측면에서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우창비왕설 禑昌非王說
결국 반역자로 참살되다
고려사 .. 신돈의 기록
공민왕과이 갈등 끝에 신돈이 자신들의 당과 모의하다가 고변자(告變者)의 밀고(密告)로 탄로가 나 몰락하는 과정을 고려사(高麗史)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곧 공민왕이 자신을 몰아내고 친정(親政)할 움직임으로 보이게 되자 이에 신돈이 반발하여 일당들과 음모, 공민왕을 죽이려다 미수(未遂)에 그쳤다는 내용이다.... 고려사 열전 반역 '신돈' 편
기현(奇顯)은 신돈의 심복 중 핵심인물이었다. 관직을 갖지 않았으나, 신돈이 한창 권세를 누릴 무렵 그의 집에서 거처하면서, 왕궁에 출입하여 조석(朝夕)으로 신돈의 곁을 떠나지 않고 섬겼다. 신돈이 그들 부부를 가장 가까이함에 벼슬을 구하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기현(奇顯)의 처(妻)를 통하여 뇌물을 바쳤으며, 그 자신은 횡포를 부리고 권세를 누렸다. 뒤에 신돈 일당이 처형될 때 아들 셋도 함께 죽었다.
공민왕이 헌릉(憲陵 ..광종의 능)과 경릉(景陵.. 문종의 능)에 배알할 때, 신돈(辛旽)이 그 무리를 나누어 보내 길 옆에 숨겨 두었다가, 공민왕을 살해하기로 약속하였다. 왕이 무사히 환궁하게 되자 신돈이 그 무리에게 ' 어찌 약속과 같이 하지 않았느냐 ? '라고 하니, 그 무리가 ' 왕이 거동할 때의 호위가 워낙 성대하여 차마 범하지 못하였습니다 '라고 했다.
신돈이 노하여 꾸짖기를, ' 너희들은 진실로 겁쟁이 나약자라 쓸모가 없구나 ' 하고 이로부터 밤낮으로 모아 모의하여 다시 날을 정해 거사(擧事 .. 공민왕 살해)하도록 하였다. 이때 벼슬을 구하는 자는 모두 신돈에게 붙었다. 선부의랑 이인(李仁)도 신돈의 문객으로 있으면서 흉모(凶謨 ..신돈의 공민왕 살해 계획)를 자세히 알고 몰래 이를 기록하였다가, 일이 긴박해지자 이에 성명을 숨겨 '한림거사'라 칭하고 밤에 김속명의 집에 던지고, 곧 미복(微服)으로 도망하였다.
김속명이 그 글로써 아뢰니, 왕이 순위부에 명하여 신돈의 당(黨)인 기현(奇顯), 최사원, 고인기 등을 잡아들여 이를 국문하게 하였다. 처음에 왕이 이인(李仁)에게 죄가 없는 사람을 죄가 있는 것 처럼 꾸며 속인 것이라 하여 믿지 앟다가 그 당을 심문하매, 모두 자복(自服)하는지라 곧, 기현, 최시원 등을 죽이고, 이운목, 신귀, 신수 등을 유배하였다. 이틀 뒤 신돈을 수원(水原)에 유배하였는데 이성림과 왕인덕에게 명하여 압송하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