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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구도자의 길(The Tao of Spiritual Seekers) - 1
이 글은 불제자(佛弟子)님의 의식을 21세기 최첨단수행문화와 최신수행체계를 이해할 수 있도록 작성한 글입니다. 힌두교, 불교, 기독교, 유대교, 천주교, 유교, 도교 등등 각 종교와 주역, 도덕경, 장자 등을 포함한 동서양철학 및 신과학, 양자역학, 컴퓨터 이론 등을 포괄적으로 아우르며 심리학이나 자기계발에 대한 내용까지 아우릅니다. 부디 의식의 확장과 진화를 통해서 세상에 대한 통찰과 내성에 대한 성찰을 심화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제가 배운 바를 공유하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의 발로라고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럼 법우님들과 선생님들의 일독을 바라면서...
카오스 시스템에서는 나비효과라는 것이 있습니다. 북경에서 나비가 날갯짓을 하면 북미에서 비가 오게 된다는 학설이죠. 금세기 눈부신 과학기술문명, 특히 인터넷과 컴퓨터 문명의 발달에 기인하여 우리가 키보드에서 실시간으로 입력한 글자 하나하나가 전 세계로 퍼지게 되는 것이 가능한 일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영적 추구자들이 상념이라는 파장을 통해서 일파만파 자신의 사유를 타인의 사유에 영향을 미치는 것과도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과학문명의 발달로 존재의 외면인 현상계와 존재의 내면인 정신계가 동기화(Synchronization)되고 있는 속도가 현저히 빨라지고 있다는 것이며, 카오스 시스템에서만 이야기되던 나비효과 현상이 이제는 현상계 또는 현실계에서 그대로 투영되어 현현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Synchronization이라는 동기화의 용어는 두 개 이상의 존재성이 “시간”을 맞추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편 현실계에서 거짓말을 하는 것은 정신계를 속이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현실과 정신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여 인격적 결함을 갖게 되고 윤리성과 도덕성에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거짓말이나 망언 등에 의해서 심신일체가 되지 못하게 되면 자신의 생명성의 빛을 퇴색시킬 뿐만 아니라 지나친 현실계와 정신계 사이의 괴리감은 주변 가족들과 친구들에도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게 됩니다. 수련자가 정신적으로는 성욕을 금기해야 된다는 것을 실제로 현실적으로는 성적인 망상과 성적인 행위를 하게 되면 정신계와 현상계간의 이율배반(二律背反:antinomy:두 가지 법[정신계의 법과 현상계의 법]이 따로 등을 돌림)에 빠지게 됩니다. 칸트는 이러한 이율배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리의 인식 한계를 명확하게 통찰(Insight)하는 것이 요구된다고 하였습니다.
“위에 이루어지는 대로 아래에도 이루어지고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대로 위에서도 그러하다”고 고대의 현자가 말한 것처럼 아래라는 현실계와 위라는 정신계는 상호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조화를 이루도록 우리가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할 경우 인간은 다분히 정신분열증 현상을 경험하게 됩니다. 자신의 의지와 마음과는 달리 다른 행동과 다른 생각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영적 추구자가 수행의 길을 걷게 되면 자신의 정신적 가치관이 있는 그대로 영적 하이어아키를 타고 현실계에 반영되기 때문에 자신의 행위를 신중히 살펴서 조심스럽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일반 사람이 영성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게 되면 그 즉시 영성계, 즉 영적 하이어아키에 편입됩니다. 그리하여 만약 자신이 잘못된 생각을 하고 거짓말을 하거나 망언 등을 하게 되면 정신계에 파장으로 퍼져나가 영적 하이어아키의 다른 영혼들에게 알려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영적 하이어아키의 하위층에 속하는 영혼들은 특히 그를 본받아 거짓말을 일삼게 되고 상위층에 속하는 영혼들은 그를 못미더워 합니다. 이것은 현실계에 그대로 투영되고 반영되는데 그 사람이 만약 복(福)이 있다면 죄가 어느 정도 무마되지만 복이 없을 때에는 마음의 고통과 신벌(神罰)을 받게 됩니다. 거짓말을 안 하는 것은 자신에게 솔직한 것입니다. 그리고 남에게도 솔직한 것이고 말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순간에 실수를 하는 상황이 우리에게 빈번히 발생합니다. 즉, 우리가 마음으로 새겨놓았던 말을 하지 못하고 그냥 그 상황에 굴복하여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한 적합하지 못한 말을 하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우선적으로 시정하는 것이 영적추구자의 길(The Tao of Spiritual Seekers)이라고 생각합니다.
존재는 초월을 동반하여 현상계에 펼쳐져 있기 때문에, 현상계와 정신계를 둘로 나누어서 보는 것보다는 현실계를 부처님의 공(空)으로 관(觀:꿰뚫어 봄)함으로써 현상계와 정신계를 통틀어서 포용해서 통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노자께서 설파한 도덕경(道德經)의 가르침에 따르면 “고상무욕이관기묘(故常無欲以觀其妙) 상유욕이관기요(常有欲以觀其徼)”라는 글귀가 있습니다. 필자는 이를 “그러므로 묘함을 꿰뚫어 봄으로써 항상 무욕의 상태에 이르고 구함을 찾게 됨으로써 매사에 욕망이 있게 된다.”고 해석합니다. 여기서 묘(妙)라고 하는 것은 정신계가 투영된 현상계, 즉 정신계와 현상계와 합일되어 원융회통되고 무궁무진하게 하나로 구성되어 있는 존재계의 현묘(玄妙)함을 의미합니다. 이는 부처님께서 설파한 여래장, 또는 공(空)을 꿰뚫어 봄으로써 세계의 무상함을 통렬히 반성하고 성찰하게 되며 그럼으로써 존재계의 허망함을 넘어서 초월적인 세계, 즉 피안(彼岸)의 세계로 나아감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카발라에서는 이와 같은 공(空)과 노자의 묘(妙)의 세계를 아인 소프 오르(Ain Soph Aur), 즉 무한한 빛(The Limitless Light)으로 상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초월적인 세계는 “감각적 육신”과 “관념적 정신”을 초월하지만 그것이 현상계와 정신계 모두를 두루 포괄하고 있고 서로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료하게 인지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공존(共存)”의 의미는 “혼재(混在)”의 의미하고는 다릅니다. 공존은 서로 섞여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존재함을 의미합니다. 섞여 있다는 의미하고는 다릅니다. 현상계는 정신계의 반영이고 정신계는 빛의 현현으로서 생각하는 것이 필자의 증험적 수행세계입니다. 부도덕한 현상계와 도덕적인 현상계가 공존하되 섞여 있지는 않으며 부도덕한 정신계와 도덕적인 정신계 또한 공존하되 섞여있지는 않다는 것이 저의 소견입니다. 왜냐하면 사람 하나하나가 개개의 개별적 개체로서 각각 실재(Reality)의 독특한 반영이기 때문입니다. 중생이란 선악이라는 관념들이 무분별적으로 취산(聚散:모이고 흩어짐)되는 형태를 따르기 때문에 “무리 중”자와 “생명의 생”자를 사용해서 무리 속에서 살아가면서 윤회의 바퀴에 의해 변화하는 관념적 정신을 갖고 살아가는 “무리속의 생명존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정신계는 일반적인 신들의 세계, 신선들의 세계 그리고 화현된 부처님들의 세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정신세계를 타파하고 보다 근원적으로 들어가면 공(空)과의 만남이 있고,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경지에 이른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필자의 견해로는 여기서 색(色)이란 빛의 현현됨과 빛의 모습을 의미하며 공(空)이란 빛의 암장성(暗藏性: 어둡게 감추는 본성:노자의 현묘성[玄妙性]과 비슷한 맥락으로 보여짐)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공(空)은 빛이 현현되기 이전의 정성을 의미하며 요가에서는 쉬바(Shiva)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색(色)은 샥티(Shakti)로서 빛의 모습과 형상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색은 힘(Power)를 가지며 현상계에 두루 편재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적 추구자는 색(色)으로서의 샥티(Shakti)를 얻기 위해서는 본질적인 힘의 근원인 쉬바(Shiva)로서의 공(空)에 도달해야할 것입니다.
공(空)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세계를 공허하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영적 추구자의 몸과 정신 속의 에너지를 청정한 빛의 에너지로 채워야 합니다. 그 빛의 에너지가 바로 쉬바-샥티(Shiva-Shakti)이며 그 빛의 에너지를 통해서 공성(空性)을 꿰뚫어 볼 수 있습니다. 진공묘유(眞空妙有)는 부처님의 공사상과 노자 할아버지의 현묘(玄妙)사상이 결합된 용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적 추구자가 자신의 심신을 쇄신하여 깨끗하고 맑고 명료한 의식을 얻어 자신의 존재성에 빛(아인 소프 오르)이 스며들고 세계의 공(空)함을 꿰뚫어 볼 수 있을 때 세계는 성철 스님 말씀대로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이다.”는 있는 그대로의 여여한 모습이 우리의 지혜의 눈에 드러나게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세계의 본질을 꿰뚫어 보기 위해서는 자신의 에너지 시스템을 정화(Purification)하고 차크라 시스템을 꾸준히 활성화시키고 단련시켜 에너지(氣)를 하나의 청정한 빛의 에너지로 변환시켜야 합니다. 특히 의식(Consciousness)의 각성과 영성의 개화(開化)를 위해서는 아즈나 차크라의 각성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하지만 마니퓨라 차크라(하단전)의 개발이 덜 되어 있을때 아즈나 차크라만 유독 계발되면 쿤달리니 부작용과 같은 의식의 부적절한 변형이 이루어지게 되며 정신분열증과 같은 형태의 증상이 일어나게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반드시 의식의 각성과 차크라 에너지 수련을 위해서는 스승(Guru)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현상계 안에서 존재계의 이원적 카테고리(범주), 즉 현실세계와 정신세계로부터 초월하기 위해서는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 進一步)라는 선어(禪語)와 같이 죽음의 강을 건너야 합니다. 이는 죽음 고개를 한 번쯤 넘어야 된다는 것이며 그를 통해서 과거 탁한 에너지 체계로부터의 환골탈태를 얻게 됩니다. 감각적 현실세계와 관념적 정신세계의 타파가 요구되며 그것은 쿤달리니 의식의 뇌관을 폭발시키는 것과 같은 강렬한 수행이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눈밝은 선사(Zen Master)나 스승(Guru)의 도움이 없이 혼자서 수행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어느 스님께서도 촛불을 키기 위해서는 성냥을 힘차게 그어 불을 붙일 수 있는 발화력(發火力)이 필요하다는 비유를 들어 수행에 있어서 한 번쯤의 폭발적인 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뇌로부터의 혁명”이 일어나야 합니다. 폭발적인 순간이라고 해서 무슨 강한 폭발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단순히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측면에서 일대 혁신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계를 바라보는 세계관이 에너지(氣) 차원에서 일대 혁명(革命)이 일어나야 합니다. 혁명(革命)이란 뜻 그대로가 명(命)을 고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새로운 명(命:목숨)을 하늘로부터 부여받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설파하신대로 죄로서의 영혼을 사하고 하늘의 영혼으로 다시 태어남을 의미합니다.
"죽어야 산다는 것"은 분명히 역설(Paradox)적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역설의 실재를 터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공(空)이라는 세계가 진리(Truth)이며 실재(Reality)라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 에너지 차원에서 일대 변환이 일어나야 합니다. 즉 선도내공(仙道內功)에서 말하는 후천기(後天氣)의 에너지 체계가 뒤바뀌어 선천기(先天氣)의 에너지 체계로 변환되어야 합니다. 이는 시공을 초월하는 비약하는 시도가 영적 추구자에게 한 번쯤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즉, 과거 죄로 인해 탁하게 세속에 묶여서 혼돈된 상태의 에너지 시스템에서 벗어나서 깨끗하고 청정한 에너지 시스템으로의 변형(Transformation)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 순수한 마음을 가지며 어렸을때 동심의 세계를 갖고 자랍니다. 하지만 자라면서 세속에 물들과 잡다한 욕망들과 감각적 세계에 빠지게 되어 이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러한 초발심이 무르익게 되면 동심의 세계로 복귀하게 되는데, 이를 유가(儒家)에서는 복명(復命)이라고 합니다. 탄허 대선사께서 말씀하신 바대로 진실된 정(正)에 이르기 위해서는 정(正)이 부정(不正)을 거처야 한다는 가르침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누구나가 어렸을 때 동심의 세계가 있고 이러한 동심의 세계가 정(正)의 세계이며 이를 잃어버린 것이 아담과 이브가 낙원으로부터 쫒겨난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낙원으로 되돌아가는 방법은 성적인 쾌락과 물질적 도착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발심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발심이 극대화되어 지극한 경지에 이르게 되면 두뇌에서 폭발적인 일대 혁명이 일어나고 결국 환골탈태하여 영혼은 재생(Resurrection:부활)되게 됩니다. 따라서, 부정(不正)의 세계인 탐, 진, 치에 얽히고 물려 있는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감각세계와 에고에 의해 물들어 있는 관념적 정신세계를 일대 바꾸게 되면 다시 절대 긍정이라는 완벽한 정(正)의 세계에 도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깨달음은 Enlightenment라고 하여 “내면세계에 빛을 가져옴”을 의미합니다. 연금술처럼 탁한 에너지가 있을 때 그 에너지를 정화하고 통합시켜 하나의 황금빛(Golden Light) 에너지로 바꾸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수행 기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적 성장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탁한 의식을 좋은 의식(에너지)로 바꾸어나가면서 통합시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내적인 성찰과 반성이 필요하며 또한 외면세계에 대한 통찰이 요구됩니다.
영적 추구자 에게 있어서 수행이란 어둠의 강을 건너는 것과 같습니다. 그 어둠의 강을 건넜을 때 덧없고 허망한 세계는 망각되고 밝은 실존의 세계, 즉 부처님의 광명세계와 하느님의 천상세계가 지상에 도래합니다. 그리고 과거에 자신이 경험했던 모든 영적 경험들이 하나로 통합됩니다. 이러한 통합을 위해서는 누구나 불확실성의 시기를 경험합니다. 하지만 공(空)을 항시 꿰뚫어 보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면 이러한 불확실성의 시기는 “창조적 불확실성의 시기”로 다가오게 됩니다. 즉,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과 번뇌들은 불확실성의 시기에서 비롯되지만 그것이 깨달음이라는 열매를 맺는 거름이 되어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가에서 말하는 쉬바(Shiva)의식의 창조성을 얻게 해 줍니다. 화이트헤드의 “과정(Process)이 실재(Reality)라는 말”은 바로 거름이 곧 열매로 이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처님의 수명이 수백억겁이라고 할때 그 억겁이 다하면 공간계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하지만 그 부처님의 종자(씨앗)이 다시 사람의 몸에 심어지게 되면 또 다시 영원성을 위해 발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순환 구조는 전형적인 우주모델(Cosmic Model)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것은 사실 누구나에게 존재하는 불성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입니다. 즉, 우주적으로 중생들은 모두 부처님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우주적 순환구조에 의해 그리고 우주의 변화에 의해 더 나아가 우주적 시간에 의해 부처님의 무한한 생명도 끝나게 됩니다. 부처님 더 나아가 고차원적인 우주인들도 무한히 영원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존재를 통해서 모든 초월적 존재들도 다시 태어나 영원성을 향해 경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 추구자들(Spiritual Seekers)에게 있어서 “고독”은 매우 중요한 실존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자신의 실재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혼자서 고독한 삶을 어느 정도 경험해 봐야합니다. 영적 추구자들은 처음에는 어렸을 때 또래아이들과 함께 자라나면서 “관계”를 맺는데 이러한 관계에 식상해 하거나 피해를 입거나 무의미함을 느끼게 되면 여기서 벗어나 고독의 공간을 통과하게 됩니다. 그리고 공(空)의 세계를 투철하게 꿰뚫어 보게 되면 현존재계가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고 관계도 새로운 인연으로 이어져 나갑니다. 마틴 부버 역시 “개인의 삶에서관계가 가장 중요하다고 하였으나 친밀한 관계가 더 깊어지고 더 진솔해 지려면 때로는 혼자 뚝 떨어져서 외로움을 느껴보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영적 추구자들(Spiritual Seekers)은 자신이 걸어온 길이나 걸어가는 길이나 걸어가야 할 길이 모두 무수히 많은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해야 합니다. 그러한 메시지로부터 “자신의 존재성과 의미”를 확철히 깨닫고 현재의 순간순간으로부터 무엇을 배워야하는지 그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영적 추구자들(Spiritual Seekers)는 현실계와 정신계 사이의 괴리감을 제거하고 둘 사이의 다리를 놓고 상호 세계로부터 “배움”을 얻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계율을 지키고 법을 배우고 끊임없는 내적 성찰이 수반되어야 할 것입니다. 계율을 어기면 자신의 실존성이 와해되고 과거의 업연으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잡념이 일게 되고 번뇌에 빠지게 됩니다. 깨달음, 즉 내면세계에 빛을 가져오기 전까지는 현실계와 정신계 사이의 균형감각을 익히는 것이 필요합니다. 즉, 어느 정도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욕망을 누려보기도 하고 정신적 관념세계를 즐기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균형이 미래에 도래할 깨달음의 광명을 창조하는데 도움이 되어야할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사회학 교수는 일반사람에게 있어서 “창조적 균형”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영적 추구자들(Spiritual Seekers)은 이러한 창조적 균형을 깨고 그 현실계와 정신계를 비월(飛越)하여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실상을 통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모두는 새로운 사유의 지평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보다 젊어진 영혼을 얻습니다. 이를 도가(道家)에서는 반로환동(返老還童)이라고 합니다. 즉, 늙음을 되돌려 젊은 영혼으로 메타모포시스(환골탈태)를 가져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체성(正體性)이란 것이 있습니다. 즉 변하지 아니하는 존재의 본질을 깨닫는 성질을 의미합니다.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이라는 분은 “개인의 정체성 형성은 끊임없이 계속해서 진행되는 과정이어야 한다”고 말씀했다고 이야기 합니다. 즉, 우주(Macro Cosmos)는 부단히 변화하고 생성, 소멸, 유지를 지속하기 때문에 소우주(Micro Cosmos)로서 인간 또한 자신의 존재 본질에 대한 깨달음을 영속적으로 알아가야 할 것입니다. 돈오(頓悟) 다음에 점수(漸修)가 있다는 선가(禪家)의 가르침을 놓고 볼 때 우리는 깨달음 이후에도 끊임없이 배워야 합니다. 따라서, 깨닫고 못깨닫고가 중요한 것이라기보다는(물론 이 차이는 엄청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배워나가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변화 속에서 변화하지 않는 정체성을 회복하고 그 정체성을 통해서 새로운 사유의 지평을 탐색하고 그곳으로부터 영적인 진화를 끊임없이 해나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영적인 진화라는 의미는 실존하는 그 정체성 자체에 함유 및 함장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내면의 지혜로부터 발현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을지 모릅니다. 노자 할아버지의 도덕경 철학에 의하면 “암컷”의 중요성을 설파합니다. 그것은 숨어지내거나 은닉해서 살아가는 지혜를 의미한다고도 보여집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숨겨져 있고 드러나지 않는 내면의 빛이며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나서거나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설파하신대로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사실,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걸림없는 자유와 공간계를 통해서 정신계와 현실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하튼, 변화 속에서 영적 진화를 추구를 하는 것과 변화 없음 속에서 영적 진화를 추구하는 것은 차이가 있다는 점을 우리는 염두에 두어야할 것입니다.
한편 심리학자 로버트 키건과 리사 라헤이는 인생의 후반을 걷는 사람들에게 “제도를 초월한 정체성”을 이야기했으며 이는 인간관계 속에 자신의 자아를 상실하지 않도록 하고 사회적 역할에서 벗어나 자율성을 가지고 동시에 자아를 실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자아실현의 극치는 깨달음입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후에도 보임(保任)기간을 통해서 부단한 정진이 필요합니다. 또한, 깨달음을 통해서 청춘미과 성숙함을 통합하고 합일시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실, 깨달음이라는 빛의 세계, 즉 광명(光明)의 세계에는 음양이 조화롭게 통합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성에 대한 성적 욕구인 성욕이라는 이원성(Duality)은 사라지고 오직 일원성(禪語로는 일원상[一圓相])만이 남게 됩니다. 깨달음이란 젊어지는 것이며 동시에 성숙함을 그대로 지속시키는 것입니다. 젊은 마음을 얻으면서 동시에 완숙함의 의식세계도 구비하고 있는 것이 의식의 각성이자 계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적 추구자들(Spiritual Seekers)은 과거 세계를 완전히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장자 할아버지의 말씀대로 올바른 의식과 청량한 정신 에너지는 유지하고 덧없고 소멸되어버릴 정신 에너지만을 버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영적 추구자들(Spiritual Seekers)의 길은 과거의 좋은 경험과 교훈을 끊임없이 누적 및 축적 시켜 가면서 새로운 길로 정진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의 존재를 충일케하고 충만케하기 위해서 과거의 정신적 경험으로서의 보물을 통해서 반성하고 그것을 부단히 현재의 깨달음의 의식과 통합시켜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모든 순간순간들에서 발생하는 경험들을 하나하나 새롭게 의식화하고 그것을 통해서 변화지 않은 존재성 속에서 영적 진화를 추구하는 것. 그것은 덧없는 중생심의 에너지가 아닌 영원한 청정심의 에너지의 흐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적 추구자들(Spiritual Seekers)은 이러한 깨끗하고 맑은 에너지의 흐름 속으로 영유할 때 영적인 법열(法悅)과 희열(Bliss)을 향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편, 깨달음은 음양이 조화로운 상태를 유지하고 음양과의 균형을 이루기 때문에 내면에 존재하는 여성적 요인과 남성적 요인이 대통합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적 추구자들(Spiritual Seekers)은 지속적인 영혼의 성장에 목표를 두어야 하며 건강한 자아상을 추구해야 합니다. 젊게 사는 것, 건강하게 사는 것, 그리고 맑고 즐겁게 사는 것 이 모든 것은 깨달음의 빛이 현현하는 것이요 중생들이 부처라는 가르침 또한 이러한 빛의 모습을 중생들에게도 다소의 차이뿐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모든 영적 추구자들(Spiritual Seekers)분께서 의식을 우주적으로 확장하고 보다 명료하게 하여 걸림 없는 대자유를 누리면서 보살행을 닦아 나가시기 발원합니다.
감사합니다.
모든 법우님들과 선생님들의 성불을 기원합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신영호 두손모음
참고문헌) 1. 노자의 도덕경
2. The Third Age, 서드 에이지, 마흔 이후 30년 윌리엄 새들러 지음, 김경숙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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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구도자의 길(The Tao of Spiritual Seekers) - 2
영적 추구자들(Spiritual Seekers)로서 우리는 무한한 세계에 대해 동경을 갖고 밤하늘의 별들에 대해서 감성적 환희심을 가지며 항상 새로운 세계를 꿈꾸어 나갑니다. 의식의 진화(Evolution of Consciousness)라는 것은 의식의 계단을 밟아 자신의 의식을 고양시키고 상승시키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로움이 없다면 의식의 고양과 상승은 불가능합니다. 이러한 새로움을 향한 진화의 도정을 걸어갈 때 영적 추구자들(Spiritual Seekers)의 의식은 각성되고 광활한 대우주의 섭리(Providence:攝理) 속에 자신의 영혼이 통합됩니다. 이러한 대우주의 섭리 속으로 영적 추구자들(Spiritual Seekers)의 영혼이 통합되는 과정을 과거에는 범아일여(梵我一如)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우주적인 합일이며 ‘나’라는 관념적 존재와 ‘에고’라는 자아상을 녹여서 우주적인 의식과 백그라운드적인 공(空)의 세계에 흡수되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될 때 신아일체(神我一體)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현들께서는 ‘신(God)’과 우리는 하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속에 불종자(佛種子)가 심어져 있다고 하였습니다. 영적 추구자들(Spiritual Seekers)은 이러한 내면에 숨겨진 불종자(佛種子)라는 보물을 발아시키고 자라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불종자(佛種子)를 키우는 연료가 있어야 합니다. 그 연료는 바로 우리의 탁한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탁한 마음을 흡수 통합시켜가면서 먹고 자랄 때 불종자(佛種子)는 커지고 성숙되게 되는 것입니다. 불종자(佛種子)가 커지면 아라한을 이루고 부처를 이룹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만나는 인연들에 반연하는 마음을 정밀하게 성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인연을 하나하나 제거해 가는 것은 고통이며 슬픔을 수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인연을 제거해 나갈 때 우리는 영적으로 성숙하게 되고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혼의 성장이란 이 숨겨진 본성, 즉 불종자(佛種子)의 성숙과 성장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네 안에 있는 것을 열매 맺으면 네게 있는 것이 너를 구원할 것이요. 만약 네 안에 있는 것을 갖지 못하면 네 안에 갖지 못한 것이 너를 사망케 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불종자(佛種子)의 숨겨진 내막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써드 에이지라는 책에서는 “내면의 진실”을 알아내고 우리에게 성장 잠재력(Growth Potential)이 있다는 것을 깨닫아야한다고 이르고 있습니다.
진리(Truth)는 어디에나 존재합니다. 삼라만상은 설법하고 있다고 고승께서는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모든 곳곳에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물론 주의(Atention)를 기울이고 자각(Awareness)을 하고 인식을 해야 합니다. 러셀이 이야기한데로 우리에게 인식되지 않는 존재는 없는거나 다름없습니다. 이러한 인식론은 양자역학의 이론과도 매칭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존재의 실상이란 우리의 인식 속에 들어올 때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진리(Truth)라는 것도 우리가 사과를 깨물어 먹듯 맛을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맛을 본적이 없는 진리란 단순한 궤변에 지나지 않습니다.
필자가 요즘 생각하고 있는 것은 “통합”이라는 화두입니다. 세계질서는 통합의 구조를 형성하기 위해서 흘러가고 있고 진리의 거대한 담론적 세계를 구성하기 위해서 수많은 수행자, 학인, 과학자, 심리학자, 자기계발자, 영적 전문가들이 합세하고 있습니다. 세계는 변화의 시대를 맞이했으며 거대한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서 준비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유례없고 전례없는 역사가 드라마틱하게 파로라마처럼 펼쳐질 듯 보입니다. 많은 이들이 영성(Spirituality)에 관심을 갖고 있고, 자기계발서가 붐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것이 한때의 순간적인 붐일지 모르지만 이러한 파장과 여파가 새로운 형태로나마 계속 이어지면 우리 인간들의 의식은 자연스럽게 성장하게 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예수님의 가르침 그리고 공자님의 가르침 모두가 인류 의식의 대통합을 위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류 의식의 대통합”이라는 것은 존재의 최고에 이르는 길이며 신(God)의 왕국의 지상재림을 의미합니다. 우주가 질서를 찾아가고 우주의 힘이 신(God)의 손으로 넘어가는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조화와 불화가 사라지고 타협과 조화(Harmony) 그리고 균형(Balance)이 자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부정적으로 들리더라도 이러한 사유를 가지고 긍정적으로 매사 더 좋은 시대를 향해 부단히 역사는 흐르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희망이라는 것은 자신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개창(開創:새롭게 열어서 세움)하도록 해줍니다. 영적 추구자들(Spiritual Seekers)은 꿈을 갖고 비전(Vision)을 가져야 합니다. 막연한 상상과 공상으로서의 비전이 아니라 현실과 융합되는 정신적인 든든한 전망(展望:넓고 먼 곳을 멀리 바라봄)이라는 기둥이 필요한 것입니다. 땅과 하늘을 융합하고 현상계와 정신계를 융합해서 하나로 아울러서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합니다. 몸을 통해서 마음을 단련시키고 마음의 단련을 통해서 몸의 정화(Purification)을 이루는 것이 무엇보다 절실히 요구됩니다. 누군가가 말한 것처럼 “앞으로 더 좋아질 것이다.”라는 긍정적 마인드가 우리 영적 추구자들(Spiritual Seekers)은 관심을 갖고 마음속에 새겨둘 필요가 있는 구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적 추구자들(Spiritual Seekers)로서 우리는 영적 수행을 통해서 한 껍질 한 껍질 차근차근 우리의 중생심을 벗겨나갑니다. 그리하여 중생심이 탈각되어 사라질 때 우리의 본성품이 밝게 드러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껍질 벗겨나갈 때 우리는 아픔을 느끼고 괴로움과 고통을 느끼지만 그러한 고뇌와 고통이 없이는 성장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인내(忍耐, Endurance)의 힘(Power)이 무엇보다도 수행자에게 요구됩니다. 또한 많은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앎이라는 것은 카발라에서 영지(靈智:Gnosis)라고 하는데 이는 로고스(Logos: 우주의 이법(理法), 이성, 그리스도,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과 동일합니다. 수행자는 앎, 영지, 로고스라는 것을 통해서 삶을 성찰해 나가야 합니다. 따라서 지식이라는 것은 지혜를 얻기 위한 거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식이라는 것은 일반적인 잡다한 학문이 아니라 통찰(Insight)과 섭리(Providence)가 들어있는, 다시 말해서 진리(Truth)의 세계가 녹아있는 글이나 말씀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말씀이나 글은 힘(Power)을 가지고 있으며 청정한 의식과 청정한 에너지를 내재하고 있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갈파했던 베이컨이라는 사상가의 이야기는 바로 카발라에서 말하는 영지(靈智)로서의 “앎”이 인도의 요가에서 말하는 Shakti로서의 “힘”과 동일함을 의미합니다. 즉, “Knowledge is Power”라는 공식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이러한 단순성(Simplicity)속에 우주적 함의가 들어있고 진리(Truth)의 세계가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또한 영적 추구자들(Spiritual Seekers)에게는 시간(Time)이라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시간은 우리를 업연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줍니다. 물론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 노력이 선험적 자아에 의해 계획되어지고 주도되어질지라도 우리는 우리가 하는 노력에 대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깨어있는 의식으로 상황과 사건을 주시하여 그 상황과 사건으로부터 메시지를 얻어야 합니다. 메시지를 얻어서 우리가 무엇을 현 단계와 시점에서 알아야 하는지를 파악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시간의 흐름은 우리 자신에게 배움이라는 틀을 만들어 주고 우리는 그 틀 속에서 사유를 다듬고, 말을 다듬고, 행위를 다듬어 우주적 격률(格率)에 맞는 존재로서 거듭나게 됩니다. 필자는 이러한 시간의 흐름에 의해 우리가 새롭게 만들어지는 통과 과정(Process)을 하나의 시간구조(Time Frame)속에서의 경험으로 생각합니다. 이 시간구조(Time Frame)는 과거, 현재, 미래가 동시에 존재하며 영적 추구자들(Spiritual Seekers)은 과거, 현재, 미래를 넘나들면서 자신의 카르마(Karma)를 제거해 나갑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수행의 요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윤회(Samsara)의 수레바퀴라는 것은 결국 과거, 현재, 미래의 중생심에 의해 가리워진 에너지 시스템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에너지 체계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시간구조(Time Frame)속에서 자신을 변형시키고 환골탈태시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즉, 새로운 참나(True Self)를 발견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을 성장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서드 에이지라는 책에서는 “자신에게 충실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되찾아야 하고 또 그것을 현재의 자기 자신과 통합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과거로부터의 경험을 현재의 경험으로 통합, 합입시켜 새로운 나(New Self)로 거듭남을 의미합니다. 이는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에 숨겨진 본성을 알아가는 과정으로부터 출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적 추구자들(Spiritual Seekers)에게 있어서 슬럼프가 존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막연한 기다림이나 과거의 업연에 얽매여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타성을 타파할 때 우리는 진실된 본성과 참다운 본면목을 찾아 나아가게 됩니다. 과거에 집착하는 것은 수행자의 가장 큰 걸림돌입니다. 집착 자체가 탁한 에너지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이를 정화하기 위한 각고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주변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다양한 에너지를 얻게 되기도 하고 나누게 되기도 합니다. 자신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내면을 고요하게 하고 자신의 마음을 견고하게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마음을 오픈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보호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역설 속에서 바로 깨달음으로의 길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오픈하게 되면 남들의 의식이 쉽게 들어오게 됩니다. 물론 아집(Ego)에 단단히 묶여서 자신의 마음을 닫는 것은 옳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정체성(Identity)이 확실히 인식되지 않는 상태에서 자신의 마음을 함부로 남에게 오픈하게 되면 문제의 소지가 발생합니다. 이것은 필자의 경험이므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즉, 남들의 의식으로부터 자신의 마음을 보호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수행자에게는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존재의 본질이라는 것은 실로 충만함과 가득참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비어있기 때문에 충만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을 비우지 않고서는 세계를 포용할 수 없는 것처럼, 존재를 깨닫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내주어야 합니다. 옛날 중국의 방거사께서는 도(道)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재산을 강물에 버렸다고 나옵니다. 이와 같이 전 재산을 걸고 전 목숨을 걸 때 우리는 존재의 본질을 마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신(God)과의 독대(獨對)”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절실히 원해야 하고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것이 수행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인지하는 것이 영적 추구자들(Spiritual Seekers)의 두뇌와 마음에 각인되어야할 사항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사명감(使命感:Mission)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즉, 존재의 개체성으로서 우리는 몸을 지님으로써 지상에서 특별한 역할을 하도록 창조된 것입니다. 이러한 몸은 지구를 배회하고 경주하면서 우리가 역사적으로 부여받은 임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그 임무라는 것은 바로 "전체의식의 정화(The Purification of Global Consciousness)“에 일조하는 것입니다. 전체의식이라는 것은 인류의 의식이며 우리는 그러한 인류의식을 건강하고 건전하게 바꾸는데 일대 혁신적 사명을 갖고 살아가야 합니다. 진실로 도(道:깨달음)를 갈구하고 존재의 본질을 꿰뚫어 알게 되면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영적 파장이 영적 하이어아키(Spiritual Hierarchy)를 타고 흘러 지구의 전체의식을 진화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깨달음의 의식은 무한한 에너지의 보고이며 많은 능력과 천재성(Genius)까지 함유하고 있습니다. 천재성이란 것은 고피 크리쉬나가 쿤달리니(Kundalini) 각성에 대한 글에서 논의한 이야기입니다. 쿤달리니가 각성되면 의식의 개화 및 도약과 전진을 이룹니다. 새로운 의식을 얻게 되고 차크라라는 꽃잎이 깨어나게 되고 피어나게 됩니다. 내면의 의식세계의 풍요로움을 맞보고 그것을 통해서 많은 좋은 의식을 얻게 됩니다. 이러한 좋은 영양분을 지닌 의식을 통해서 영적 추구자들(Spiritual Seekers)의 의식은 진화하고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깨달음은 바로 이러한 영적 진화, 즉 의식의 성장의 최고점(Zen) 상태에 이름을 의미합니다. 물론 고수, 중수, 하수에 따라 그 천재성의 발현이 제각각 다르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물론 필자는 절대로 고수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어느 정도 쿤달리니 각성과 의식의 확장을 통해서 다양하고도 참신한 의식세계를 경험했고 그것을 통해서 수행을 계속해 나간 결과 그 과거의 좋았던 의식들을 내포하는 빛의 세계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 빛의 세계라는 것은 바로 헤겔이 말한 절대정신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필자의 사변적 이야기가 얼마나 유기적으로 의미 있게 독자제현님들께 전달되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러한 사변적 글들이 어떤 면에서는 간접적으로 의식을 개화시키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깨달음(Enlightenment)은 존재의 개체성을 통합해 나가는 과정(Process)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재(Reality)라는 것은 본성이요 본면목이요 참자아이며 아트만입니다. 이 실재는 현상계에 두루 펼쳐지고 두루 널려있어 우리가 깨닫기만 하면 인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과정이 실재”라는 가르침대로 과정을 중요시할 때 실재(Reality)를 증득하게 됩니다. 실재(Reality)를 증험적으로 체득해야 의미가 있습니다. 과정 속에 실재가 여여하게 존재합니다. 그 과정이라는 것은 영적 추구자들(Spiritual Seekers)에게 있어서는 영적 수행이고 수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자아성찰과 자아탐구 그리고 자아발견 등의 과정들을 의미합니다.
영적 추구자들(Spiritual Seekers)도 행복을 추구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행복이란 몸과 마음의 평안입니다. 그리고 몸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의 평온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러한 마음의 평온과 평화는 바로 내면의식을 개화시켜 우주적인 의식과의 합일(Unification)을 이룰 때 가능합니다. 요가에서도 영원한 행복(Permanent Happiness)란 무조건적인 실재(Unconditional Reality) 자체에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바로 “무조건”적이라는 것입니다. 이 무조건이라는 것은 조건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무한히 법우(法雨)로서 감로수와 같이 우리의 케테르(Kether)를 통해서 쏟아져 내려오는 영적인 빛의 에너지에 해당합니다. 필자가 다소 복합적으로 서술하고 있어 다소 혼란이 있을 수 있는데, 다양한 세계의 명상과 성현들의 가르침을 종합해서 고찰해 보면 분명 통일되는 가르침이 보입니다. 그러한 가르침을 찾아나가는 것이 하나의 배움의 과정이며 영적 성숙의 여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Love)라는 것은 존재의 현현된 특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존재가 갖고 있는 성질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존재는 바로 빛입니다. 빛이 강렬하면 불이 발생하는 것처럼, 존재가 강렬하면 사랑이 발생합니다. 사랑이 먼저고 존재가 나중이 아닙니다. 촛불에서 빛과 불은 불가분의 관계라는 사실을 명료하게 인지해야 합니다. 즉, 우리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깨달음의 빛으로서의 본질은 바로 사랑(Love)과 하나입니다. 그 사랑은 바로 원수를 사랑하고 아낄 수 있는 마음입니다. 그 사랑은 바로 포용력입니다.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을 포용하는 능력인데, 그를 포용하기 위해서는 우주적인 의식세계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즉, 그들의 중생심에게 집착하거나 그들에 대한 원망심에 집착하게 되면 안 됩니다. 그들을 있는 그대로 포용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열심히 망각의 에너지를 찾아 나서야합니다. 그들을 잊을 수 있는 에너지 그것이 바로 청정한 에너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법을 배울 때 그것이 결국 타인을 사랑하는 능력으로 확장된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혼의 성장이란 바로 존재의 정체성을 깨닫고, 그 정체성을 송두리째 재설계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존재의 재설계 과정(Redesigning Process)은 자신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과 탐구정신을 갖고 매사에 자기성찰과 반성을 통해서 자신의 본성을 바로 보는데 있습니다. 그리하여 내면세계와 외면세계가 하나로 통합되어 통일되어 현현할 때 우리는 “나”라는 존재성과 “남”이라는 존재성과의 경계(Boundary)를 허물고 하나의 새롭고도 광대하고 무한한 지평을 창출하게 됩니다. 영혼의 성장이란 바로 자신의 영혼을 무한대로 확장하여 우주와 하나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주의식과의 합일을 요구합니다. 그러면 삼라만상이 우주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나”라는 관념적 존재성은 사라지고 “무아(無我)”는 현실적 실재(Reality)만이 현존하게 됩니다. 즉, “나”라는 에고(Ego)는 사라지게 되고 우주의식만이 존재하게 됩니다. 이러한 우주의식을 명료하게 목도하면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수행자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청정한 무한의식으로서의 우주의식은 평상심(平常心)을 갖게 해줍니다. 그 무한한 우주의식 속에서의 수행자의 행위는 평상심에 부합되는 행위가 되며 노자께서 그토록 강조하신 “무위(無爲)”의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사라지고 없어지면 영원성만이 존재하고 이 영원성은 바로 영혼의 재설계 과정(Redesigning Process)의 궁극적 단계이자 경지를 이릅니다. 신(God)과의 감통(感通)을 통해서 영적 추구자는 재설계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영혼을 정화하고 궁극적으로는 무화시켜 우주의식으로서의 신(God)의 의식과 합일하게 됩니다.
이러한 영혼의 재설계 과정은 “나”라는 관념적 정신을 타파하는데서 시작하며, 이는 물질적 욕구와 성적인 욕망을 탈각시키는데 기반을 둡니다. 육체적 욕망이 일어나면 그로인하여 정신적 관념이 일어나고 그러한 관념의 에너지와 육체적 욕망의 에너지는 탁한 에너지 시스템을 구성하게 됩니다. 물론 이러한 탁한 에너지 시스템은 영혼의 버그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청정한 마음으로 이러한 버그 시스템을 고쳐나가고 제거해야 합니다. 프로그래머가 프로그래밍을 통해서 버그를 고쳐나가듯이 영적 수행자는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명료하게 목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떤 잡념이 일어나면 이 잡념의 근원적 의미와 메시지를 인식하고 그 잡념으로부터 배움을 얻거나 악업(Bad Karma)을 청산해야 합니다. 계율을 지키기 않으면 탁한 에너지가 자꾸 생기고 영혼에 버그가 발생하여 괴로움과 번뇌가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성경(Bible)에 이르길 “여호와(God)는 너희들을 치료하는 하나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인도에서 말하는 브라만(Brahman)과 동일한 의미로 알고 있으며 영적 추구자들이 자신의 영적 버그를 치료하기 위해서 우주의식, 신의식(God-Consciousness:Pure Consciousness)으로 자신의 영혼을 통합시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과정은 바로 삼매(Samadhi)라고 하는 과정과 선정(禪定)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얻어집니다. 흔히 몰입(Finding The Flow)을 통해 신의 경이적인 의식 흐름 속으로 따라 들어가는 것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신(God)의 다양성을 목도하고 그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전세계의 학문과 종교를 통해서 올바르고 신의 에너지를 공부하고 자신의 영혼을 닦아 나간다면 자신을 깨닫고 세계를 이해하며 신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이해는 한 순간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공부의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의 의식이라는 것은 보편타당한 정신이요 절대정신이며 순수의식입니다. 그러한 의식에는 진실성이 담겨있습니다. 진실성은 바로 진리이며 이러한 진리는 거짓됨이 없는 참다운 세계를 의미합니다. 영성의 궁극적 단계는 진실성과 마주하며 이러한 진실성은 자신에게 솔직해 지고 자신의 마음을 정말로 잘 성찰하는데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신영호 두손모음
참고문헌) 1. The Third Age, 서드 에이지, 마흔 이후 30년 윌리엄 새들러 지음, 김경숙 옮김
2. The Deeper Dimension of Yoga, Georg Feuerstein 저
영적 구도자들의 길 (The Tao of Spiritual Seekers) - 3
세상의 모든 근원은 신(God)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모든 세상만사와 삼라만상이 서로 연관되어 있고 관계되어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사유를 형성하고 세상을 표현하는 언어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언어는 관념의 도구로서 세상에 대한 관념적 이해를 얻기 위해서 도움이 됩니다. 영적 구도자들은 처음에 감각상의 육체적 쾌락의 세계를 지나 관념상의 정신의 쾌락을 지나 영적인 즐거움에 도달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감각, 관념, 영적인 것들이 서로 다르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혼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이러한 세 가지 세계, 즉 감각세계, 관념세계, 그리고 영적세계 모두를 경험합니다. 그러다가 성장하면서 감각세계의 덧없음을 인식하고 관념세계를 탐구합니다. 관념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언어인데, 언어라는 도구를 사용해서 사유를 다듬고 정리해가면서 관념 자체마저도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여기서 비약(飛躍)이 이루어집니다. 비약이 없이는 영적인 성장은 불가능합니다. 이러한 감각세계에서 한 번 관념적 정신세계로 비약하고 다시 한 번 관념적 정신세계에서 영적인 깨달음의 세계로 비약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마조 선사께서 마음이 부처(즉심시불)라고 하다가도 얼마 지나서 구도자들이 모두 중생심마저도 부처인지 알고 착각하니까 그 후로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비심비불)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구도자들이 심(心)에 대해 갖는 잘못된 신념을 타파하고자 하는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생심에 물든 심(心)은 영원한 심(心)이 아니며 이 때를 일컬어서 비심비불(非心非佛)이라고 하고, 청정심에 근거를 둔 심(心)은 영원한 심으로서 일컬어서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말이나 언어가 중요한 것도 그리고 관념적 이해가 중요한 것도 아니고 직접 영적인 깨달음의 맛을 보아야한다는 것이 중요함을 말해줍니다.
언어는 존재의 현현일뿐 존재 자체가 될 수 없으며 존재의 모습일 뿐입니다. 물론 언어에 의해서 사회가 영위되므로 언어는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존재는 무아(無我)이며 무아(無我)가 부처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무아에서 현현된 것이 언어이며 언어에 의해서 관념의 집, 즉 사유의 체계가 정립되는 것입니다. 무아는 신(God), 부처(Buddha), 무한자(the Infinite)라고 불리며 “존재론:ontology”의 세계를 건립합니다. 이러한 무아는 주관과 객관이 조화롭게 통합된 상태로서 영적 통일장(Spiritual Unified Field) 개념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객관성은 모든 삼라만상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하고 주관성은 주시자로서 세계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객관적 포용과 주관적 인식이 정묘하게 결합되어 있는 것이 선도내공에서는 원신(原神)이라고 말하고 그리스어로는 아르케(Arche:그리스 초기 자연 철학에서, 만물을 지배하는 우주의 근본 원리. 만물이 나오고 다시 되돌아가는 만물의 근원이 되는 물질로, 후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존재론의 제일 원리의 의미로 사용하였음)라고 합니다. 신학에서는 섭리(攝理:Providence) 라고 하며 흔히 진리(Truth)를 의미합니다. 영혼의 핵으로서 컴퓨터 운영체제의 커널(Kernel)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원신이요 원질(原質)이며 본체이자 도(道)요 근원의식이며 우주의식이며 신의 아들(Son of God)입니다. 이를 불교에서는 부처라고 말합니다. 또한 일부 현대적 용어로는 명심(明心)이라고도 말합니다. 카발라에서는 영혼의 빛이라고 말하고 말입니다. 그리스어(Greek)로는 테우스(theos)라고 하며 즉, 신(God)이라고도 말합니다. 뉴에이지에서는 우주의식이라고 하며 헤겔은 절대정신이라고 하며 칸트는 순수이성이라고 하며 상식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보편타당한 정신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영혼의 빛이 공간으로 확장됨을 불가에서는 여래장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깨달음의 영혼들은 몸을 벗어난 뒤 신(God)의 세계로 돌아갑니다. 만법귀일(萬法歸一)이라고 하여 모든 법은 하나로 돌아간다고 하였습니다. 즉, 삼라만상의 모든 이치와 깨달음 자체도 하나로 돌아간다고 하는데 그 하나는 바로 부처님 또는 하느님 그리고 하나님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의 말씀에 의하면 성서(Bible)에는 “신은 농부”라는 표현이 많이 나온다고 합니다. 이는 영혼들을 가꾸고 키우는 신의 손길에 대한 은유적(Metaphor)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신은 몸이라는 곳에 영혼을 심어 넣고 키웁니다. 그래서 성장하여 영혼이 익어서(깨달음을 얻으면) 그 영혼을 자신의 세계로 귀입(歸入)시킵니다. 이럼으로써 신의 세계를 확장하고 신은 더 새로운 경험과 배움을 얻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유를 통해서 좀 억울하다고 느끼는데 전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신과 우리 깨어있는 영혼은 일체이기 때문에 우리가 경험하는 의식적 희열과 환희심이 바로 신의 희열이요 환희이며 신이 느끼는 희열과 환희가 바로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희열과 환희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아일체(神我一體)의 경지에 이르면 ‘나’라는 관념적 실체가 타파되고 와해됨으로서 존재 자체는 충만함과 충일성을 회복하고 삼라만상의 품안에 들어옵니다. 즉, 존재 자체가 무한히 확장하여 삼라만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곳에서는 선사(Zen Master)님 말씀대로 신(God)도 없고 ‘나’라는 것도 없으며 그냥 여여(如如)할 뿐입니다. 노자 선생님의 가르침대로 하면 자연과 같을 뿐이고 무위의 세계일뿐입니다.
사유체계를 혁파해서 깨달음의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단순성의 원리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물론 이해만 해서는 안되고 확철하게 꿰뚫어 보아야 합니다. 모든 삼라만상의 사사물물들은 단순성(Simplicity)로 감소될 수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깨닫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단순성은 바로 우리의 아즈나 차크라에 존재하는 원신(原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카발라에서 두뇌라고 할 수 있는 케테르(Kether)를 완전히 빛으로 충만케 했을때 깨달음이 옵니다. 이는 어느 한국의 고명한 선사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백색입니다. 우리나라가 백의민족이라고 한 것은 바로 깨달음의 민족이라는 뜻에서 전해진 것이기도 한다고 말합니다. 여하튼, 아무리 복잡한 사사물물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하고 근원적 이치를 탐구하는 자세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학(學)이 되었건 술(術)이 되었건 말입니다. 학(學)이 문이라면 술(術)은 무라고 할 수 있으며 도(道)는 학과 술을 모두 통괄하는 상위의 차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유체계를 얼마나 단순하게 이해하고 단순하게 꿰뚫어 보느냐가 바로 도(道), 즉 깨달음의 세계로 진입하는 관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존재계는 첫째, 감각적 현상계와 둘째, 정신적 관념계로 나뉘며 셋째 이 둘의 세계를 초월하면서도 그 속에 내재한 영적인 실재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의 추구라는 것, 즉 구도라는 것은 바로 영적인 실재를 “보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보는 것을 무척 중시합니다. 그 본다라는 것은 육안이나 영안(靈眼)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법안(法眼)으로 통찰(Insight)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감각적 현상계를 경험하는 오감에 대해서는 육안이, 그리고 정신적 관념계를 형성하는 사유에 대해서는 영안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깨달음의 세계를 형성하는 성스러운 마음(Holy Mind)에 대해서는 법안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감은 바로 5개의 하위 차크라를 의미하고 사유는 바로 아즈나 차크라를 그리고 성스러운 마음은 7개의 차크라의 통합을 의미합니다. 쿤달리니 요가에서 하위 차크라가 상위 차크라를 먹어 삼켜 상승진행함으로써 궁극적으로 7번째 차크라를 통합시켜 나가는 것처럼, 이러한 과정을 거쳐 깨달음은 완성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5개의 하위 차크라는 감각을 6번째 아즈나 차크라는 지식과 이성을 그리고 7번째 차크라는 지혜와 순수이성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7번째 차크라는 차크라라고 말하지 않으며 다만 존재할 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또한, 보는 사람을 일컬어서 “Seer”라고 하는데 이 Seer는 선각자, 예언자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즉, 삼라만상과 사사물물을 꿰뚫어 보는 사람을 의미하며, 법안을 구비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제부터는 의식상태의 변화패턴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공(空), 즉 인도의 샨스크리트어로 Sunya라고 하는 무극의 이치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항상 다양한 의식의 변화를 겪게 됩니다. 영적 구도자가 자신의 의식적 상태를 지켜보고 주시하는 것은 매우 요긴한 일입니다. 불가(佛家)에서는 이를 위빠사나(Vippasana) 수행이라고 합니다. 즉, 일어나는 일련의 생각들을 끊임없이 주도면밀하게 이완과 긴장을 반복하면서 관찰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어나는 사건들과 상황들 속에서 발생하는 생각들을 부단히 주시, 관찰 그리고 통찰하는 것은 영적 구도자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생각이 일어나면 그 생각을 있는 그대로 지켜볼 수 있는 여유로운 마음이 있어야 하고 그 생각에 자신의 의식이 집착되거나 따라붙는 것을 막기 위한 필사적인 각고의 노력이 요구됩니다.
인간의 의식은 깨닫기 전에는 무수히 많은 잡념과 상념 그리고 감정들과 희로애락에 의해 변화를 겪습니다. 그리하여 인과가 형성되고 인연이 맺어지며 불운과 호운이 발생하는 원인이 됩니다. 영적 구도자는 의식의 상태가 어떻게 변화되어 가는지 의식상태의 변화 패턴에 대해서 주목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의식상태의 변화패턴을 공부해야 합니다. 자신이 현재 침체된 의식상태에 있는지 아니면 활기찬 의식상태에 있는지 아니면 분노의 의식상태에 있는지 아니면 맑고 명료한 의식상태에 있는지 등등을 통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주역에서는 삼라만상의 변화상태를 64개의 괘상으로 표현합니다. 즉 64개의 괘상 패턴(Patterns)만으로 전체 우주모델을 구상해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세상은 비슷비슷한 현상들과 사건들이 발생합니다. 그 사건과 현상의 이치를 잘 정리하고 갈무리하면 결국 64괘의 괘상의 하나에 매핑(Mapping), 즉 사상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의식상태가 몇 가지 변화패턴을 가지고 있는지 잘 모르지만 오욕칠정과 같은 것도 결국은 인간의 감성적 의식상태를 대변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식상태의 변화패턴의 한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적 구도자는 자신이 현재 처한 의식상태가 어떤 변화의 패턴을 경험하고 있는지 간파해야 합니다. 인간의 의식상태는 깨어있는 상태, 즉 깨달음의 상태가 아닌 이상 감정과 이성의 몽매함에 의해서 어두워졌다 밝아졌다 합니다. 자신의 의식상태가 변화하여 지고(至高)한 의식 상태로 전이되는 것을 영적인 변형(Spiritual Transformation)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지고한 의식상태로의 변화는 궁극적 진리를 자신의 법안(法眼:지혜의 눈)에 현전시킵니다. 즉 태어나서 수많은 의식의 상태변화를 경험하게 되고 인고의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게 되면 더 이상의 의식상태변화가 없는 평정심, 부동심, 청정심의 의식상태를 얻게 됩니다. 그 무수히 많은 의식상태의 변화과정을 겪으면서 다양한 의식체계를 내면에 형성하게 됩니다. 또한 의식상태라는 것은 용기, 승리, 광명, 지혜, 자비 등등 다양한 양상을 띠며 유대신비주의인 카발라에서 전하는 생명의 나무를 구성하는 각각의 개별적인 세피라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카발라의 세피라는 인간 의식의 다양성을 지극히 간명하고 단순하게 함축적으로 축양해서 표현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실제로 현상계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무수히 많은 의식의 상태를 경험합니다. 다만 각각의 의식상태들은 보편화된 패턴을 갖고 있습니다. 그 패턴이 바로 인도의 요가에서는 차크라로, 유대의 카발라에서는 세피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차크라를 마스터하게 되면 깨달음에 이르는 것처럼 세피라들을 영적 구도자의 내면세계에 융합시키게 되면 깨달음에 도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외면적으로 현실계에서 증득되어지든 아니면 내면으로 심득되든 그것은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은 듯 합니다. 실제로 얻느냐 못얻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그 체득의 경로는 중요하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피라 10개의 경로는 의식의 전이를 나타내며 어떻게 의식이 바뀌는지에 대한 간명한 설명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인연 따라 맺어지는 세상은 현재 우리 자신의 의식상태의 반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또한 타아(Other Self)라는 것은 거울처럼 우리의 의식을 반사시켜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삶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우리와 깊은 인연이 되는 주변 사람들과 친구들 그리고 가족들을 살 살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와 인연이 된 사람들을 주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의식의 흐름은 모종의 패턴을 가지고 있다는 심오한 통찰을 통해서 지혜가 발현됩니다. 즉 유구한 역사적 시원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의식은 광대한 변전과 진화를 이루어왔습니다. 인간의식의 진화라는 것은 무수히 많은 안 좋은 의식상태들을 경험하면서 그러한 안 좋은 의식상태를 좋은 의식상태 그리고 상향된 의식상태 다시 말해서 긍정적 의식상태로 탈바꿈시켜 놓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수히 많은 전생을 살아왔다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설파한 것처럼 우리는 무수히 많은 전생을 통해서 영혼의 내면세계에 무수히 많은 다양한 의식상태의 경험들을 골고루 경험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식상태의 변화와 진화는 사람마다 다른 것이 아니고 모종의 보편적인 패턴(Universal Patterns)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A라는 영적 구도자의 영혼에 내재된 의식상태 변화의 과정과 B라는 영적 구도자의 영혼에 새겨진 의식상태 변화의 과정에는 모종의 유사성이 있고 그것을 보편타당한 의식상태 변화패턴으로 환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의식상태의 변화패턴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영적 구도자들은 비슷한 상황을 경험하게 되면 그것으로부터 새로운 의식 상태를 얻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매번 동일한 의식상태를 겪는 것은 어리석고 무의미한 행위일지 모릅니다. 게임을 할 경우, 게임이 매번 동일한 전략을 쓰고나 동일한 패턴을 지니고 있으면 재미가 없을 것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을 슬기롭게 살기위해서는 다양한 삶의 양상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다양한 삶으로부터 다양한 의식상태의 변화패턴을 배워야 합니다. 이러한 학습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영적인 진화와 상승은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영적 구도자들 중에 초발심자의 경우 의식변화라는 것은 복잡하게 느껴지고 어렵게 들릴지 모릅니다. 하지만 자신의 의식을 잘 관조하고 살펴보면 언젠가는 지극히 미묘한 변화에 대해서도 그것을 간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리(Truth)라는 것은 변화하지 않는 실재(Reality)입니다. 자신의 의식상태가 불안정하고 변화하고 있다면 아직 진리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의식상태가 명료하고 안정되고 평안할 때 진리가 현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다양한 의식상태, 즉 참는 순간을 경험하는 의식상태, 용기있게 말할 수 있는 의식상태, 자비를 베풀고 연민을 느끼는 의식상태 등을 경험해서 자신의 불성(佛性), 즉 아트만(Atman)을 성장시켜야할 것입니다. 사실, 불성(佛性), 즉 아트만(Atman)이라는 것은 가리어진 우리의 본면목, 본자성, 참성품이지 결코 새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새로 만들어진다고 해야 하는데 그것은 신(God)의 은총을 받게 되서 꽃피우기 때문입니다. 개오(開悟)라는 것은 신의 에너지가 케테르(Kether)를 타고 영혼에 법우(法雨)처럼 쏟아져 내려온 후에 얻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깨달음의 에너지인 감로수와 법우(法雨)는 한 번에 이루어지기 보다는 점진적으로 시간과 노력이 경주될 때 일어나는 일(Work)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현상계에서 사실, 정보, 사건, 상황, 현상 등을 통해서 경험하는 의식상태는 수많은 영혼들의 변전과도 함께합니다. 즉 영적 구도자가 깨달음을 얻기 전까지는 무수히 많은 다른 영혼들이 자신의 의식에 들어오고 나가곤 합니다. 그것을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것일 뿐 실제로 이러한 현상을 많이 경험하는 것을 언젠가는 깨닫게 됩니다. 탁한 에너지와 저급 에너지에 연관되면 자신의 의식이 퇴화되고 청정한 에너지와 고급 에너지에 인연을 맺게 되면 자신의 의식은 진화하게 됩니다. 자신이 계율을 잘 지키지 못해 발생하는 의식적 불안과 번뇌에 대해서는 스스로 성찰과 반성을 통해서 새로운 긍정적 의식상태로의 변화로 진행시키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영적 구도자들은 사색과 성찰 그리고 많은 성현들의 가르침을 위해서는 다양한 언어적 개념이 지닌 함축적 의미와 은유적 의미를 통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적 구도자들을 다양한 명상 어휘를 많이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는 영적 구도자들을 위한 명상어휘(The Meditative Vocabulary for the Spiritual Seekers)에 대해서 간략하게 논고하고자 합니다.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고도의 명상체계와 의식세계를 탐구하기 위해서는 언어라는 툴(도구)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명상이라고 해서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유수(思惟修)”라고 하여 생각을 닦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는 정려(靜慮)라고 하여 고요히 생각함을 의미합니다. 잡념으로서의 망상적 생각들과 고요하게 지켜보는 지혜에서 나오는 생각하고는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망념이나 잡념에 의해서 일어나는 사념들은 중생심에 기인한 것이며 깨끗하고 맑고 고요한 곳에 일어나는 사념들은 청정심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명상을 잘 하기 위해서는 생각을 잘 다듬고 생각을 잘 정리하고 생각을 잘 컨트롤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현들의 가르침을 많이 읽고 그것을 삶 속에서 경험하고 배워 깨우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깨우침의 근저에는 언어에 대한 통찰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는 그 언어적 사유에 대한 통찰을 내면을 탐구하고 지혜를 기르는데 초점을 두고자 합니다. 생각이 정지되어 완전한 대자유에 이르기까지는 언어와 사유는 우리의 정신을 구름처럼 맴돌기 때문에 우리는 올바른 언어와 올바른 사유로서 그러한 구름같은 잡념과 망상들을 제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침묵으로 제거가 안 되고 내면의 관조로서 제거가 안 되는 망상들은 올바른 사유를 통해서 제거해야할 것입니다. 올바른 사유를 형성하는데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은 어휘입니다. 어휘에 대한 이해가 바로 자신의 사유체계를 정교하게 하며 또한 의식체계를 매우 조화롭고 명료하게 해줍니다.
여기서는 명상에서 사용되는 어휘를 하나 해석해 가면서 명상(Meditation)과 언어의 관계에 대해서 사유해 보고자 합니다. 이러한 사유의 형태가 새로운 의식을 얻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나의 어휘가 의식세계를 비추는 하나의 별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얼마나 많은 어휘들이 정교하게 서로를 비추고 있는지를 이해하면 의식이라는 우주 속에서 별들의 빛남을 황홀하게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무작위로 요가 영문 서적의 한 페이지를 펼치니 Fundamental 이라는 어휘가 시야에 들어옵니다. 필자는 이 Fundamental이란 어휘를 매우 좋게 생각합니다. 이 Fundamental의 의미는 “기초의” 또는 “기초적인”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사전적 의미로 Fundamental 은 기초의, 근본적인, 토대가 되는, 필수적인, 근원적인의 다양한 뜻으로 변화되면서 사용됩니다. 특히 우리의 내면에 존재하는 심법(心法)은 외부세계를 지배하는 근원적인 법칙(Fundamental Law)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심원이 있을 때 가장 안쪽의 동심원이 파워가 가장 셉니다. 그 파워가 밖으로 펼쳐져 나감으로써 힘이 현현되는 것이지요. Fundamental이란 은유적으로(Metaphorically) 바로 동심원의 가장 안쪽 원을 의미합니다. 이 가장 내면의 원이 존재하지 않으면 근원이 없는 것으로 모든 다른 동심원이 존재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원이 되는 것입니다. 특히 근원의식이라고 할 때 이 근원의식은 Fundamental Consciousness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즉 내면에 존재하는 심층의식을 의미합니다. 이 심층의식을 불성(佛性) 또는 아트만(Atman)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학문과 수행은 근본적이고 기본적인 곳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이 근본적이고 기본적인 토대를 의미하는 영적 어휘가 바로 Fundamental입니다. 자신의 영적 구도과정을 하나의 과정(Process)로서 생각한다면 그 과정의 기초에는 보편타당한 정신이 내재해 있습니다. 우리는 수행을 통해서 그 보편타당한 정신, 즉 헤겔이 말한 절대정신을 깨워내는데 있습니다. 여기서 명상에서 자주 사용되는 “합일(Union)”이라는 어휘가 등장합니다. 즉, 자신이 삶과 사유 그리고 중생심의 근저에 자리하고 있는 무의식적인 청정심과 하나가 되는 일(Work)가 어찌보면 수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명상을 통해서 자신의 “개아적 나(Individual Self)”와 지고한 청정의식으로서의 본래의 참나(Real Self)와의 합일이 바로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바로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근원의 자리에는 청정심이 있습니다. 즉 불성(佛性)이 있고 아트만(Atman)이 있습니다. 합일이라는 것은 개아적 자아를 청정한 자아에 녹여서 하나로 일체화시키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영혼으로 거듭나는 것이 바로 수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근원적인”이란 어휘와 “합일”이라는 어휘 등을 통해서 어떻게 수행에 연관하여 사유를 전개해나가는 지를 고찰해 봤습니다. 무수히 많은 영적인 어휘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계율”에 대해서도 많은 사유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유들은 현상계에서 실재로 경험을 통해서 얻어져야 합니다. 현실과 괴리된 사유는 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영혼의 정화를 위해서 언어적 개념을 정립하는 것은 좋지만 지나친 사변적 사유는 오히려 잡념과 망상을 일으킬 소지가 있어 피해야 한다는 사실을 영적 구도자들은 알아야 할 것입니다.
명상에 관련된 어휘가 중요한 것은 언어의 키워드를 형성하고 있고 심법(心法)을 전하는데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현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청년들과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사용했던 산파술도 결국 언어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산파술은 영혼의 자각을 얻게 해주며 청년들에게 진리(Truth)의 아들을 낳도록 소크라테스가 사용한 방법입니다. 즉, 얼마나 올바른 사유를 하느냐가 철학의 길이며 이는 영적 구도자가 명상을 통해서 걷는길과 어떤 면에서 일치합니다. 즉, 언어적 사변이 얼마나 영성에 부합하느냐가 오늘날과 같은 통합적 사유로 흘러가고 있는 문명사회에서 더욱 소중한 사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지인(知人)으로부터 들은 이야기 인데 어느 고등학교 선생은 고등학교 교과서의 내용을 공부할 때 마치 성경(Bible)책을 읽는 것과 같은 경건한 마음과 절실한 마음, 즉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으라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이를 듣고 필자의 고개를 끄덕이게 했습니다. 실제로 이 세상 어디에나 진리(Truth)가 가득차있습니다. 풀 한 포기에도 진리가 존재한다고 이야기한 어느 스님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삼라만상이 설법하고 있다는 고승(高僧)의 가르침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명상어휘를 통해서 진리(Truth)에 접근해 들어가고 진리(Truth)를 사유해 나가다 보면 세상의 이치가 매우 선명하게 드러날 때도 있습니다. 물론 배움은 끝이 없기 때문에 깨달음 이후에도 세상의 이치와 마음의 심오한 모습을 꾸준히 성찰하고 사유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영적구도자의 길(The Tao of Spiritual Seekers) - 4
구도자들은 무엇보다도 열정(Passion)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과 삶을 유기체적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유기체적 관점이란 바로 세상과 삶이 자기 혼자 만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많은 주변 사람과 인연들에 의해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깨달음이란 바로 유기체적 사회구조에 대한 통찰(Insight)이며 시스템적인 사유를 통해서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삶과 사회 그리고 세상을 구조적이고 시스템(체계)적인 측면에서 거시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열정이란 내면에 타오르는 불길이며 이러한 내면의 힘이 외면에 발현될 때 세상을 적극적으로 바라보며 더 주도면밀하게 통찰하게 됩니다. 세계에 대한 상(象, Image)과 비전(Vision)을 가슴에 담아두고 열정을 통해서 실현시키는 것이 구도자의 여로(旅路)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지구상에서의 삶이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이든 RPG이든 또는 연극이든 소풍이든 그것이 어찌되었든 간에 그 속에서 우리는 진실성(authenticity)을 추구하고 염원하며 갈구해야 합니다. 이 세상은 마야(Maya)라는 환영(Illusion)의 구름에 가려져 있습니다. 이 환영의 구름을 걷어치우기 위해서는 마구니들을 타파하고 망상을 타파하고 잡념을 길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야생마를 길들이듯 자신의 두뇌 속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사유들을 심오한 청정심으로 잘 컨트롤해야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마야는 걷히고 진실성이 드럽니다. 물론 게임은 지속됩니다. 하지만 영혼의 차원에서는 무아(無我)가 되기 때문에 잡녑과 망상 그리고 번뇌는 소멸됩니다.
구도자는 끊임없는 인내와 각고의 노력을 통해서 의식 상승의 계단을 밟아 올라갑니다. 즉 내적 성찰과 내적 투쟁 그리고 외적 통찰을 통해서 생명의 파운데이션(분수)을 뿜어냅니다. 이 생명의 분수는 바로 인생의 윤활유이며 역동하는 힘(Dynamic Power)입니다. 인체의 시스템은 우주 시스템을 모사(模寫)하고 있으며 인도에서는 요가 시스템이라는 형태를 통해서 인체의 비밀을 파헤쳤습니다. 그 중에서 쿤달리니 요가는 인체의 꼬리뼈에서 시작하여 척주를 통해서 에너지를 상승시켜 두뇌를 각성시키는 고도의 정묘한 요가 체계의 하나입니다. 이러한 꼬리뼈에 잠재된 에너지를 서펀트 파워, 즉 독사의 힘이라고 하며 그것은 역동적인 힘을 가지고 있고 생명의 에너지를 이룹니다. 만약 이 서펀트 파워가 깨어나면 요가 수행자는 급진적인 육체적 정신적 그리고 영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쿤달리니가 폭팔하게 되면 생명의 분수가 터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쿤달리니 각성은 요가 수행자의 카르마에 따라 악업이 많느냐 적느냐에 따라 고통과 황홀감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실, 인도의 요가뿐만 아니라 불가(佛家)의 위빠사나 그리고 도가(道家)의 선도내공 모두가 체계적인 수행체제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가(儒家)의 정려법 또한 나름대로의 수행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수행체계를 통해서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불안과 고통 그리고 공포감을 일소(제거)하는 것이 바로 구도자의 당면 목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둠의 기운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수행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진실로 가치있는 수행은 어둠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체계적인 수행법이 요구되는 것은 바로 어둠의 기운과 상실감, 희로애락, 공포감, 두려움, 번뇌, 잡념, 망상 등을 제거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안좋은 감정들과 불안정한 의식들을 정화하여 맑고 깨끗하며 밝은 의식체계를 내면에 구비하는 것이 바로 영적 구도자의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도자는 자신의 환경을 통해서 자신을 일신하고 쇄신해 나갑니다. 그러므로 환경이라는 것, 즉 생태적인 차원에서의 자신의 삶은 넥서스(nexus: 집단[계열]내의 개인[개체]끼리의) 연계(連繫), 관련, 유대; 관계; 연결[결합]체.)라고 하여 존재계의 전 영역을 포괄하는 그물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자아(Self)라는 존재와 타아(Other Self)라는 존재들은 모두 하나의 생명그물로 얽기섥기 조화롭게 엉켜있으며 상호 연관되어 있고 궁극적으로 상호 의존적입니다. 깨달음의 세계에 있어서는 물론 무아(無我)가 되기 때문에 의존성이 없어지나 지구상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상 육체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인과의 흐름 속에 놓이게 됩니다. 우리는 삶을 통해서 세상을 이해하고 세상에게 좋은 에너지를 제공하며 세상에 대해서 많은 가르침을 주고 받으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물과 같이 넥서스 조직체로 구성되어 있는 인간의 삶입니다. 또한 이 지구는 가이아라고 불리우며, 이 가이아는 정교하게 균형을 유지하는 힘들의 시스템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구도자들은 힘들의 세계를 뚫고 지나가면서 경험을 쌓고 배움을 얻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부조화시키거나 자신에게 중압적 영향을 가하는 세력들에 대해서 그들을 극복하고 헤쳐나감으로써 성취를 얻게 됩니다. 자신에게 압력을 가하는 세력적 존재가 있는가 하며 자신을 돕는 세력적 존재가 있습니다. 이러한 수행의 통과 의례와 같은 터널을 무사히 통과하게 되면 그 터널의 끝에는 깨달음의 빛이 비추고 있습니다.
과학문명이 발달하고 도시문화가 펼쳐짐으로써 생태계에 균형을 가져오는 두가지 보이지 않는 음/양의 세력들 간에 조화가 깨어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과거보다 더 힘들고 어렵게 정신문명과 정신문화를 배우기 위해서 노력해야합니다. 배움이라는 것은 시간의 흐름과 공간상의 위상을 통해서 사건과 상황 그리고 현상의 이치를 꿰뚫어 보는 통찰력과 삶의 양상으로 나타나는 다양한 패턴들을 이해하고 깨우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발생하는 문제가 왜 발생하는가에서부터 어떠한 패턴적 사유 처리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가를 이해해야 합니다. 인체의 생명 구조는 생태적으로 친환경인 성향을 지니고 있으며 자연에 큰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그리고 요가라는 것은 바가바드기타에서 말하기를 “균형”이라고 하였습니다. 균형은 “Balance”, 즉 샨스크리트어로 사마트바(Samatva)라고 말합니다. 악의 세력과 선의 세력에 의해서 자신의 영향을 최소화시키고 자신을 공(空)처럼 무화시켜 자아(Self)를 제거하는 것이 바로 영적 구도자의 수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균형이라는 것은 자연과의 조화로움을 의미합니다. 자연은 무위로서의 생태계이며 영적 구도자가 무화되지 않으면 친자연적 삶을 영위하기 어렵습니다. 자신의 영혼과 자연의 기운과 조화를 이루고 서로 교류가 이루어질 때 삶의 생명력이 솟아나게 됩니다.
영적 구도자들도 어느정도는 철학을 공부해야 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철학적 사유의 중요성을 이야기하셨습니다. 무의미한 사변적 사유가 아니라 논리적이고 정합적인 사유는 중요합니다. 특히 영적 구도자가 동서양 철학과 사상을 통관(通貫:Penetration)하는 사유를 함양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제가 아는 서양 철학자로서는 국내에서는 김형효 교수님(하이데거와 화엄의 사유 서적이 유명함)하고 김상일 교수님(화이트헤드와 동양철학 서적이 유명함)을 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조용헌 교수님의 구분에 의하면 이 두 분은 강단학파이십니다. 도올 선생이 강호학파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이 김형효 교수님, 김상일 교수님, 그리고 도올 선생 모두가 영적 구도자가 수행을 하는데 요긴한 철학적 사유를 제공해 줍니다.
특히 도올 선생의 의식수준이 단순히 철학적 사유가 아니라 에너지(氣)에 의한 시스템적인 사유를 이루고 있어 언설력과 논변력이 탁월하며 파워풀합니다. 김상일 교수님이 화이트헤드와 동양철학에서 언급한 쿤달리니 각성에 대한 이야기를 실제로 체험한 분이 도올 선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노자 사상에 있어서 새로운 각도에서 제시한 "노자를 웃긴 남자"의 저자 구름 이경숙님의 글들을 읽어보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게 합니다. 하지만 이경숙님의 글을 읽어보면 너무나 현상계에 치우친 해석으로 보입니다. 노자의 가르침은 정신계에 대한 일필휘지(一筆揮之)의 천필(天筆)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해석상 어색함이 있더라도 정신적인 측면에서 논파한 도올 선생님의 해석이 오히려 났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또한 글을 쓰는데 있어서 남을 비하하여 자신을 높이려는 의도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옳지 못할 것입니다. 21세기 정신문화는 서로를 위하고 서로를 돕는 상부상조, 상생(相生)과 공생(共生)의 길로 나아가야할 것입니다. 헤겔의 변증법에는 선과 악이 상호 대결하고 교류하면서 서로에게서 새로운 것을 배워 더 높은 합의 세계로 나아감을 말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의식의 발전이 가족, 지역, 국가, 세계 그리고 우주적 의식세계의 진화를 의미하며 역으로 이러한 가족, 지역, 국가, 세계 그리고 우주적 의식세계의 발전은 개인의 의식을 진화시킨다는 점을 인식해야하지 않을까 합니다. 즉, 타아(Other Self)를 적으로 보아서는 안되고 자신의 영적 성숙을 돕는 인새의 조교내지 훈련소대장으로 보시면 좋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어느 종족이나(그것이 우주종족이 되었든) 자신의 종족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양들이 되려면 자신의 종족(우주종족)도 사랑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예수님의 선량한 양들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면서 영적인 성장을 하는 것이 영적 구도자에게는 무엇보다도 소중한 마음가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도올 선생의 강의를 잘 들어보면 동양철학적 사유와 서양철학적 사유를 넘나들면서 강의하고 있어, 그 해박함과 시대상에 대한 통렬한 갈파와 일침에 시원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승속(僧俗)을 오고가며 현실적 테마에서부터 고답(高踏)적 준론(峻論)에 이르기까지 박식합니다. 도올 선생의 유(儒), 불(佛), 선(仙)적인 통합적 사유 그리고 서양철학을 아우르는 거시적 시각과 유기적 사유체계는 많은 학인들에게 새로운 의식의 지평을 열어놓았으며 참신하고 다양한 의식적 사상모델과 사유의 패턴을 구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다만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좀 더 포용력 있게 이해하고 그들의 학문적 기풍과 사상적 체계를 섭렵하고 반추함으로써 보다 새로운 의식의 다변화된 양태를 학습하고 의식의 진화(Evolution of Consiousness)에 눈길을 돌리지 않는 것이 아쉽습니다. 우리는 도올 선생의 가르침을 배우고 더 나아가 김형효 교수님의 가르침, 그리고 김상일 교수님의 가르침 등등 다양한 철학적 에토스(Ethos:기풍)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특히 훗설, 하이데거와 야스퍼스 그리고 화이트헤드의 철학적 사유구조는 모든 영적 구도자들이 한번쯤 읽어보아야할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봤을때는 김형효 교수님도 어떤 면에서는 지성적으로 매우 심오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생각합니다. 김형효 교수님의 “하이데거와 화엄의 사유”를 읽어보면 진지하고 심오한 의식세계를 접할 수 있습니다. 서양철학을 전공하시고 이후에 동양철학을 회통시켜 가면서 연구하시고 책도 쓰시고 있습니다. 불교 TV에 가시면 김형효 교수님의 동영상 강의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김형효 교수님도 아쉽게 광활한 지식의 대지에 어떤 한계의 막을 두고 계십니다. 세계적 문호들과 사상가들에게는 자신의 한계를 규정하는 막이 있습니다. 그것을 뛰어넘어야 선지자(Seer:보는자를 뜻하며, 자신의 성품과 세계를 꿰뚫어 보는 사람, 샨스크리트어로는 Rishi라고 함)가 되며 개척자(Pioneer)가 됩니다. 그리고 철학적 담론을 초월하여 지고(至高)한 의식적 파로라마를 동경하는 학인이라면 가르치는 것보다는 함께 연구하고 함께 더 연구하는 자세를 가져야할 것입니다. 물론 김형효 교수님의 강의나 도올 선생의 강의를 통해서 저도 여러 가지로 배우고 있습니다. 특히 도올 선생의 언어구사력은 매우 수려하고 출중함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김형효 교수님이 시도하는 나름대로의 고전 독파 방법과 사유체계 구축 방법에 대해서도 배울 점이 있습니다.
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을 지으신 신영복 교수님의 책을 읽고 나름대로 제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유(儒), 불(佛), 선(仙)을 회통시키려면 그 중추에 역학(易學)을 두어야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동양사상체계를 정립하거나 나름대로 확립하려면 주역(周易)에 달통, 즉 마스터링해야 합니다. 컴퓨터의 비트(Bit:0과 1)체계와 인간의 DNA 구조가 모두 주역(周易) 시스템과 비슷한 맥락을 하고 있으며 상대성이론을 주창한 아인슈타인과 양자역학의 효시가 된 상보성 이론을 제기한 닐스 보어 모두가 주역(周易)에 심취했다고 합니다.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The most beautiful thing we can experience is the mysterious. It is the source of all true art and all science. He to whom this emotion is a stranger, who can no longer pause to wonder and stand rapt in awe, is as good as dead: his eyes are closed." - Albert Einstein
“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아름다움은 신비로움입니다. 신비로움은 모든 진실된 기예(技藝)와 모든 과학의 근원입니다. 감성이 더 이상 경탄하거나 경외로움으로 황홀해 할 수 없는 이방인인 사람은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습니다. 즉, 그의 눈은 닫혀있는 것입니다.” - 알버트 아인슈타인
어느 철학자분들은 지나친 신비주의는 경계했는데 그 점에서는 저도 어느 정도 동의를 합니다. 하지만 깨달음 자체가 다분히 신비주의적 성향이 없지 않기 때문에, 즉 유대 신비주의인 카발라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기독교 신비주의, 인도의 탄트라, 티벳의 밀교 등 다양한 종교와 영성 분야에서 신비주의가 그 근저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일반 사람들은 단전호흡이나 고요하게 혼자서 수도하시는 수도사들을 어리석은 자로서 생각할 수 있는데 물론 어느 정도 그 수도자분들의 소요유(逍遙游)정신에 대해서 좀 탐탁치 않게 생각하시고 걱정스러운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수도사들이 다 외도, 사도, 마도를 걷는 것은 아니라 훌륭한 고명대덕(高明大德)을 지닌 훌륭한 분들도 계시다는 것을 인식해야할 것입니다.
영적 구도자의 수행 경지가 마하 쿤달라니(Maha Kudnalini)의 각성과 대주천(大周天) 이상의 경지일지라도 차크라 완전 통합의 경지 그리고 깨달음(Enlightenment) 및 도교(道敎)의 양신(陽神)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면 많이 얻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도교(道敎)의 양신(陽神)의 경지에 이른 사람은 병렬적 의식(Parallel Consciousness)을 갖게 되므로 엄청난 내공과 공력을 구비하게 됩니다. 그런 분들은 재미가 없어서 세상에 안나온다고 합니다. 자신의 세계를 통해서 발견된 깨달음을 공간계를 타고 퍼주기 때문에 굳이 TV라는 물질적 매개를 통해서 정보와 에너지를 제공하기 보다는 직접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산속이나 세상에 은거해 지내시는 기인이사(奇人異士)들을 폄하하거나 비하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세상의 이치를 비전(Vision)과 통찰로 꿰뚫어 봤던 스승에게 하루는 그 문하에서 공부하던 제자가 물었습니다.
“스승님과 같이 깨달음과 박학다식을 겸비하신 분이 왜 세상에 안나가시는 겁니까?”라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그 스승께서 하신 말씀이
“너가 만약 동일한 TV 프로 한두 번 반복해서 보면 재미가 없겠지? 마찬가지란다. 전생에 그런 행위를 많이 한 사람은 어떻겠니?”
무엇인가 느끼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물론 지금 많은 선생들이 좋은 가르침을 계속 무궁무진하게 베푸셔서 국내의 정신문화와 의식계몽에 큰 기여를 해주셨으면 하는 것이 저의 바램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신(God)께서 인류의 의식정화와 의식진화를 돕는 것처럼 기인이사(奇人異士)분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인류의 보편타당한 정신 획득과 사상적 조류를 형성시키는데 각고의 노력을 하고 계신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기인이사(奇人異士)라고 해서 모든 분들이 다 훌륭한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참고로, 동양철학을 공부하신 분들 중에서 제가 아는 몇몇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거의 대부분 잘 알려진 분들이십니다. 저는 다석 류영모 선생의 제자인 김흥호 선생, 함석현 선생들의 책을 읽어봤는데 그 분들의 사상에서도 배울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야산 이달 선생의 제자이시며 주역(周易)을 주로 강의하시는 대산 김석진 선생의 책들에서 여러 가지 배우고 있습니다. 대만의 남회근 선생의 책들도 괜찮습니다. 번역본이 10여권 한글로 되어나왔는데 읽어볼만 합니다. 남회근 선생도 100여세가 다되도록 지금까지 살아계십니다. 남회근 선생도 주역(周易)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한의학과 관련하여 동양철학에 대해서는 김홍경 선생의 강의가 좋다고 합니다.
여기서부터는 컴퓨터 소프트웨어 이론에서 사용되는 어휘들(특수화, 공유, 이질적, 참조, 스캐닝, 패턴, 위임, 대리자 등등)을 사용해서 영적인 다이어그램을 여러분의 의식세계에 투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즉, 영적인 세계는 어떤 면에서 지극히 기술적인(테크니컬 한) 부분을 지니고 있어 컴퓨터 소프트웨어 이론을 접목시키면 매우 유용합니다. 인도의 요가시스템의 경우 인체시스템에 대해서 7개의 차크라라는 에너지 센터를 상정하여 매우 테크니컬 한 부분을 섬세하게 다룹니다. 또한 유대 신비주의인 카발라에서는 생명의 나무에 10개의 세피라를 상정하여 매우 기교적으로 다룹니다. 우주의 원시 모델은 매우 단순하고 간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즉 무(無) 또는 공(空)이라고 하여 어떠한 분화 또는 특수화(specialization)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 무(無) 또는 공(空)의 상태에서 태극, 사상, 오행 그리고 개체들이 분화되고 세분화되어 탄생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인류의 시원이 되는 아담과 이브는 매우 단순한 우리의 인류모델의 원형(Archetype)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아담과 이브를 통해서 역사를 거쳐 많은 인류가 도래하고 태동하여 현재의 60억이 넘어 70억이 다 되어가는 인류의 구성원을 낳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볼 때 인류의 시간역사(Time History)는 바로 특수화의 과정(Process of Sepcialization)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체는 누구나가 고유한 정체성을 부여받고 나름대로 목적의식과 존재에 대한 사명의식을 갖고 살아갑니다. 이러한 개체들은 인류의 원시적 조상에게 비교하면 급격히 진화하고 분화된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발달하지 않은 단순하고 간단한 원시 조상에서부터 시작해서 현재에 이르러 심신 양면에 있어서 고도로 발달한 종(Species)을 오늘날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런 것을 보아 유추해 보면 고대 조상들보다 오늘날의 우리는 수련을 통해서 득도하기가 더 어려워졌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무(無) 또는 공(空)이라는 단순성으로 귀일하는 것이 바로 수련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는 너무나 멀리 이 단순성에서 분화되어 진화해 왔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간의 인간관계도 무엇보다 이질적(Heterogeneous)이 되버려서 수련을 통해서 개체들의 의식 간의 간극을 줄여서 의식의 공동화와 공유화(Sharing)를 얻기가 힘듭니다. 사실 수련의 궁극적 종착력은 모든 개체들의 의식의 총합이라고 할 수 있는 전체의식, 즉 의식군(Group of Consciousness)을 심득(心得)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모든 의식들의 세계를 훤히 꿰뚫어 아는 것이며 결국 역사이래로 분화되온 개체들의 의식들을 종합해서 하나로 무화하고 그것을 깨어있는 마음으로 공유하는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깨달음은 의식의 공유(Sharing of Conciousness)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체의식을 얻는다는 것은 의식의 망, 즉 의식의 네트워크를 지혜로서 장악함을 의미합니다.
특수화라는 Specialization의 의미는 도(道)와 덕(德)에 대해서도 적용가능합니다. 즉 근원의식으로서의 도(道)에서 발현되어 전개되는 에너지의 분사형태가 덕(德)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가(儒家)에서는 구체적으로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상정하여 덕(德)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불가(佛家)에서는 체(體)와 용(用)을 상정하여 체용철학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체란 바로 부처님의 법신(法身), 즉 우리의 청정심의 본체를 의미하며 용이란 이 체의 현현을 의미합니다. 체가 도라면 덕은 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도에서 덕에 이르는 발현과정과 체에서 용으로의 현현과정을 특수화(Specialization)으로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시간구조에서 과거, 현재, 미래가 있다고 할때 과거에서 미래로 갈수록 개체의 특수화 현상이 뚜렷하게 발생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즉, 과거의 고대문명의 단순함보다도 오늘날의 현대문명은 보다 특수화되고 분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산업혁명과 더불어 도래한 분업화 개념이 나타나고 인류의 종(Species)이 무수히 많은 분화를 통해서 특수화 과정을 겪게 됨으로 인간으로서의 개체는 매우 독특한 특질을 고유하게 갖게 되었습니다.
각설하고, 과거로부터 요가수행자가 의식의 확장을 위해서 차크라를 계발하는 것처럼, 오늘날의 영적 추구자들도 자신의 의식을 확장하여 깨달음에 도달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의식 향상의 과정(Process)을 통해서 자신과 인연이 된 개체의식들의 세계를 폭넓고 자세하게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깨어있는 의식은 항시 무(無) 또는 공(空)의 니르바나(Nirvana) 세계를 참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참조”란 바로 Reference를 의미하며 이 Reference는 “관계”라는 의미도 함유하고 있습니다. 즉 깨어있는 자는 항시 무(無) 또는 공(空)의 니르바나(Nirvana) 세계와 관련되어 있고 이러한 세계를 지혜의 눈으로 역력하게 목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참조의 기능은 영적 하이어아키에서도 적용됩니다.
영적 하이어아키(Spiritual Hierarchy)에서 상단에 위치한 고수의 영혼은 하위 영혼들을 스캐닝(Scanning)합니다. 즉 스캐닝이란 “동태를 관찰하여 이상 징후를 파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상위 영혼은 자신의 영적 하이어아키에서 하위에 위치한 영혼들을 스캐닝함으로써 그들의 정상/비정상 유무를 확인합니다. 이 스캐닝 방법은 상위 영혼이 하위영혼들의 파장(Wave)과 진동(Vibration)을 흩어보고 그 심각함에 따라 해당 메시지(Message)를 발생시킵니다. 그러면 그 영혼에 해당하는 사람은 의식에 생각이 들어오게 됩니다. 이 생각은 상위 영혼이 신선(神仙)일 경우 선기(仙氣)로서 제공됩니다. 여하튼, 상위영혼은 일방적으로 하위 영혼을 간섭하고 괴롭히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하위영혼의 온전한 진화를 위해서 여러모로 돕습니다. 그리고 그 돕는 방법이 대표적으로 생각을 통해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른 생각을 하는 것이 영적 구도자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입니다. 상위영혼 중에서 악한 영혼의 경우는 하위영혼의 의식을 잠식할 수도 있기 때문에 영적 추구자들은 항시 강호를 주유했던 기인이사(奇人異士)들과 훌륭한 선지식을 존경하고 그들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위기의 순간에 자신을 구원해 주는 것은 자신의 의식을 타고 들어오는 메시지(생각)이며, 자신이 배웠던 가르침에서 떠오른 하나의 구절이 될 수 있습니다.
참조(Reference) 개념은 영적 구도자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요가에서는 보는자 Seer를 선지자로서 간주합니다. 달마대사께서 견성이면 성불이라고 하셨는데, 그 견성이 바로 見性으로서 “성품을 봄”을 의미합니다. 성품이란 바로 무(無) 또는 공(空)을 뜻하며 영적 구도자가 이 무(無) 또는 공(空)을 “봄으로써” 니르바나(Nirvana) 세계에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무(無) 또는 공(空)을 참조한다는 것은 바로 “봄으로써 관계를 맺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이 무(無) 또는 공(空)을 정밀하게 관조하게 되면 현묘(玄妙)함이 일어나고 니르바나(Nirvana) 세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영적 구도자는 깨달음을 지향해야 하는데, 그 깨달음을 지향한다는 것은 바로 개체의식으로서의 영적 구도자의 영혼을 전체의식으로 지향시켜 나감을 의미합니다. 즉 전체의식으로 확장시키도록 자신의 구도 여정을 걸어가는 것이 바로 영적 구도자의 길입니다. 어느 일(Work)을 하던 그리고 어떤 사건에 있고 어떤 상황에 있던 영적 구도자는 깨달음 지향적 사유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언어의 사변적 에토스와 정신적 관념들을 깨달음에 맞추어야할 것입니다. 이러한 깨달음 지향적 사유를 Realization-Oriented Thought라고 할 수 있으며, 밥을 먹거나 일을 하거나 대화를 하거나 공부를 하거나 항시 깨달음을 지향하면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100% 깨달음에 초점을 둔 상태의 의식을 가동할 경우 그동안 열심히 노력했다면 3년 정도가 되면 초견성(初見性)에 이른다고 어느 선지식은 말합니다.
초견성(初見性) 상태에서 출발하여 확고한 견성(見性) 상태에 도달하며 무(無) 또는 공(空)을 관(觀)하는 것 자체로서 황홀감이 일어나고 하복부의 대맥과 기맥이 돌기도 합니다. 그리고 아나하타(가슴) 차크라에 에너지가 모여 황홀감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달마대사처럼 공(空)의 벽(壁)을 무심의 상태에서 지켜보는 것은 자신의 영혼이 무(無)/공(空)과 같은 성질을 갖도록 해주며 동화시켜 줍니다. 그리고 무(無)/공(空)의 에너지들을 끊임없이 자신의 영혼에 재충전시킵니다. 사실 영혼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무아(無我)가 되어 무(無)/공(空)과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삼라만상이 자신의 품안에서 춤을 출 뿐 자신은 여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무아된 상태의 의식과 무(無)/공(空)의 세계는 유사성(Similarity)을 향해 나아갑니다.
영적 구도자에게는 경험(Experience)이 매우 중요합니다. 경험이라는 것은 바로 체험이고 몸소 체득한 신비적 현상을 포괄합니다. 영적 구도자가 고수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경험을 먹고 자라야 합니다. 과거 경험이 새로운 경험을 낳고 계속해서 미래의 경험을 낳게 됩니다. 고수라는 것은 경험을 많이 쌓은 영혼을 의미합니다. 경험은 다양한 지혜를 제공하며 올바른 정합적 사유를 하는데 큰 도움을 줍니다. 특히 경험은 현재의 문제들과 과거의 문제들에 대해서 축적된 지혜를 얻게 해주며 무궁무진한 것처럼 보이는 사건과 상황에 대해서 패턴적 사유를 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패턴적 사유라는 것은 자신이 영적 구도과정을 통해서 체험한 경지와 깨달음에 대한 보편적인 이해를 내면으로 범주화시켜 감을 의미합니다. 밀려오는 사념의 덩어리들을 하나하나 잘게 쪼개서 하나하나 무시하거나 해결해 내는 능력이 영적 구도자들에게 필요합니다. 그러한 사념들과 상념들이 지닌 문제해결을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 지혜중의 하나가 바로 패턴적 사유를 하는 것입니다. 문제들의 종류가 아무리 다양하다고 해도 실세계에서 발견되는 문제들은 어떤 형식과 고정된 틀이 있습니다. 그것을 캐치하고 파악하는 것이 영적 구도자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패턴적 사유는 의식화되기 보다는 무의식적으로 구축되며, 의식상에서 이루어지는 패턴적 사유란 예를 들어 섹스를 하고 싶은 생각이 수시로 들거나 원수에 대해서 미운감정이 자꾸 일어나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과 감정은 영적 구도자들에게 흔히 발생하는 사유와 감정 패턴으로서 해결방법도 모종의 패턴을 지니고 있습니다. 인내로서 넘어가는 방법, 호흡을 통해서 성욕과 미운감정을 제거하는 방법,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 주시자가 명료하게 깨어있음으로서 성욕과 미운감정에 휘말리지 않고 이를 있는 그대로 지켜보는 경우 등 여러 가지 방법이 존재합니다.
정신계에서 영혼들의 협력(Cooperation) 관계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합니다. 만약 자신이 성욕에 물들어 있거나 하면 자신의 본질적 자아(Essential Self)가 성욕에 물들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성욕을 좋아하는 정신계의 또 다른 영혼에 의해 감염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폭력, 두려움, 성욕 등등은 모두 각각의 고유한 정신계를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은 그러한 정신계가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을 얻기 전까지는 윤회(Transmigration:인도어로는 샴사라, Samsara)를 겪기 때문에 다양한 영혼들의 자신의 몸속에 들어왔다 나갔다가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생각, 어떤 행동, 어떤 말을 하느냐가 영적 구도자에게는 매우 중요합니다. 자신의 영적 구도여정에 치명적인 손상을 가하는 생각, 말, 행위를 하지 않아야할 것입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정신계의 또 다른 종족과의 교류이기도 합니다. 물론 착한 행위를 하게 되면 좋은 정신계와 교류하고 협력하게 됩니다. 하지만, 선한 일만 해서는 결코 깨달음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선한 것보다 올바른 사유, 올바른 말, 올바른 행위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선악에 초연하고 물들지 않는 맑고 명료한 정신세계를 점유하는 것이 중요한데 바로 이러한 맑고 명료한 정신세계가 신(God)의 세계로 이입해 가는 과정(Process)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정신계의 작용 중에 “위임(Delegation)”이라는 형태를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혼들이 윤회를 하게 되고 정신계에 각각의 영혼들이 위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육체라는 곳을 하나 이상의 수많은 영혼들이 점유하고 있어 그 몸을 퇴화시키거나 진화시키곤 합니다.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 의식의 진화라는 것은 보다 고급의 영혼이 저급의 영혼을 물리치고 자신의 몸에 들어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변화 앞에는 진화가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선지식의 이야기는 지고한 영적 환골탈태를 경험하게 되면 그러한 변화 속에는 영혼들이 모두 자신의 몸에 들어설 수 없게 되고 오직 성스러운 마음(Holy Mind), 즉 깨달음의 무아(無我)적 무심즉심(無心卽心)만이 현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위임이라는 개념은 수많은 영혼들이 자신의 몸속에 들어왔다 나갔다하면서 윤회(Transmigration)를 할 때 주로 사용하는 개념으로서 영혼의 하이어아키에서 상위의 영혼이 하위의 영혼에게 일을 맡기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영혼들은 협력과 경쟁을 하면서 성장하고 진화를 이루어가지만 이러한 협력과 경쟁이면에는 영혼들의 서열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영적 하이어아키에서 상위 영혼들이 있을 경우, 그 영혼들에 의해서 하위 영혼들이 공부도 배우고 가르침도 얻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위 영혼들이 상위 영혼들의 위임을 받아 일(Work)의 대리자(Agent:에이전트)가 되거나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위임은 기도(Prayer)를 통해서도 잘 작용합니다. 예를 들어, 영적 구도자가 기도를 하게 되면 자신의 영적 하이어아키나 전생의 인연을 통해서 상위 영혼들과 교류하게 되는데, 만약 간절히 염원하면 상위 영혼을 지닌 사람을 만나거나 깨달음을 얻은 사람을 만나기도 합니다. 세간에 인기를 끄는 사람들의 경우도 그 사람들의 정신계를 주관하는 상위 영혼들이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 상위 영혼들은 바로 위임(Delegation)을 통해서 세상의 사람들의 몸을 빌리고 있는 것이며 그 사람들의 영혼은 바로 상위 영적 존재들의 영적 대리자(Agent) 역할을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다른 상위 영혼이나 상위 영혼들의 일(Work)를 대신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런 의미로 해석해 보면 고수 영혼들은 자신이 직접 몸을 나타내어 세상에 나타나기 보다는 이와 같이 대리자(Agent)에게 위임을 하여 일을 처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탐탁치 않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한 사람의 몸에는 여러 가지 상위, 중위, 하위 영혼들이 들어왔다 나갔다하면서 협력과 경쟁, 그리고 협조와 방해를 하기 때문에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성숙하게 됩니다. 길을 모르는 사람이나 영적 구도자들에게는 고급의 영혼들이 많이 들어오는 것이 수련에 큰 도움이 됩니다. 물론 자신의 내면 깊이 존재하는 심층적 자아(Deep Self)로서의 본면목이 깨어나면 이러한 영혼들이 들어왔다 나갔다하는 것을 주시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타인들의 몸속으로 영혼들이 들어왔다가 나갔다하는 것을 타인의 눈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위임을 통한 대리자 개념은 영적으로 특정한 능력, 예를 들어서 수학에 정통한 영혼이 있을 경우, 자신을 돕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몸을 빌려 들어오기도 합니다. 이것은 어느 정도 다른 영혼이 정신적으로 수학능력을 구비하여야 하기 때문이고 그 사람의 영적인 하이어아키의 고수 영혼이 들어오게 됩니다. 만약 자신이 어느 정도 수학을 잘하면 자신보다 수학을 잘 하는 고수 영혼이 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인생이라는 연극이나 게임과 같은 삶은 얼마나 고수 영혼으로 진화하느냐 아니면 신(God)과 같은 무아적 개체로서 사느냐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고수 영혼으로 진화하면 행복할테지만 그만큼 임무도 막중하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깨달음을 얻어 신(God)과 같은 상태로 살아가게 되면 세속적 재미가 별로 없으며 세속에 초연하고 고답적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물론, 하수의 저급 영혼이 몸에 들어오면 자신의 영혼도 타락하거나 퇴화되게 됩니다. 따라서 계율을 잘 지키고 바르게 살아가는 것이 영적 구도자들에게는 절실히 요망됩니다.
감사합니다.
평안과 건강이 함께하길 기원합니다.
picnic 두손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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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구도자의 길(The Tao of Spiritual Seekers) - 5
사람들이 점유한 하나의 몸에 대해서도 상위자아, 중위자아, 하위자아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각각의 자아들은 에너지체에 해당합니다. 즉, 깨달음을 얻어 자아의 통폐합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많은 에너지체들이 자신의 몸에 존재하게 됩니다. 자신의 에너지체를 항상 명료하고 올바르게 지향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영적인 모델을 상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영적인 모델을 통해서 자신을 “적응시키고 부합시켜”(Confirming) 나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부처님, 예수님, 공자님 등을 하나의 자기구현 모델로 설정하고 이 분들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도록 노력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합니다. 자신의 사유, 말, 행동이 이 분들의 사유, 말씀, 행동과 일치하는지 그렇지 못한지를 “점검해 나가면서”(Verifying) 삶을 전개시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Confirming 기능이나 Verifying 개념은 실제로 우리의 행동양식을 변경시키는데 중요한 역할(Role)을 해줍니다.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초점에 두고 지향하게 되면 그렇게 되어지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성현(聖賢)들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면서 살아가게 되면 그 분의 힘(Power, Consciousness)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들과 자신의 영적 경향성(Tendency)이 비슷한 모델을 이루게 됩니다. 즉, 영적인 동기화가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간절하고 절실하게 구도의 길을 걷느냐가 바로 세상의 이치를 파악하고 성현들의 가르침을 터득하는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구도자는 영적인 초점을 숭고한 도덕성과 고귀하고 거룩하신 성현들께 맞추어야 합니다. 성현들의 가르침이나 부처님의 실재(Reality)는 “변화하지 않기”(Immutable) 때문에 항상 영적 구도자가 부단히 이 분들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고 정진해 나가면 이 분들과 같은 위없는 경지에 도달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영적 구도자들은 의존성(Dependency) 개념에 대해서 명료한 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구도자가 스승(Guru)을 만나게 되면 마음과 정성을 다해 스승을 모셔야 합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스승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설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해야할 것입니다. 즉, 스승과의 의존성도 깨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타인들에게 의존하는 것은 영적구도자가 피해야할 사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절대로 타인에게 빚을 지거나 의존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중생심이라는 탁한(똥물과 같은) 에너지를 빚지게 되면 그에 대한 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래서 구도의 길은 힘들고 어려우며 때로는 위험하기까지 합니다. 사악한 에너지와 의식에 휘말리거나 하면 자신의 정체성과 주관을 잃어버리고 이러한 에너지를 지닌 존재자들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결국 이는 그러한 악한 에너지의 존재자들에게 의존(Dependent)하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적 구도의 길은 바로 모든 세상사와 세상인연과의 의존성을 제거하는 데 있습니다. 물론 중생심이 펼쳐놓는 인연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중생심과 삿된 에너지의 인연이 소멸되게 될 때 청정심이 자리하고 영적 구도자는 새로운 인연이 전개되며 청정한 의식의 지평을 열개됩니다.
물론 중생심을 자신의 몸과 의식에서 탈각(脫却: 잘못된 생각이나 나쁜 상황에서 벗어남)시키기 위해서는 영적 구도자는 구도의 과정을 통해서 중생들과 올바른 상호작용(Interaction)을 해야 합니다. 그러한 상호작용을 위해서는 선택(Selection)이 매우 중요합니다. 어느 인연과 잘 사귀고 오래 지속해야할지를 지혜의 눈으로 통찰하는 것이 무엇보다 영적 구도자에게 중요한 것입니다. 또한 인연들과의 상호작용 스타일을 선택하는 것이 무엇보다 영적 구도자에게는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 그리고 도반의 관계, 원수와의 관계 등 인연을 맺기 위해서 다양한 상호작용 스타일을 선택할 필요가 있습니다. 좋은 인연을 잘 선택하는 것이 영적 구도자에게는 절실히 요구됩니다. 스승이 없이는 배움을 얻을 수 없고 도반이 없이는 배움을 무르익게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영적 구도자의 개인적 의지를 넘어서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원수에 대해서도 올바른 상호작용 스타일을 유지해야 합니다. 원수라고 무작정 미워하게 되면 안 되고 공자님 말씀대로 “진솔”하게 대답하고 말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자신이 왜 억울한지를 진솔하게 말하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합니다.
또한 영적 구도자는 자신의 내면을 탐구하는 것(Exploring)에 지대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사실, 요가나 불가(佛家) 그리고 도가(道家)의 가르침들은 인간의 영혼에 대한 탐구공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카를 융의 말대로 페르소나라고 하는 가면(마스크:Mask)를 쓰고 다닙니다. 그리고 이러한 페르소나를 통해서 인연이 되는 존재자들과 상호작용을 합니다. 그렇게 페르소나를 쓰고 살다가 보면 세속적 삶만이 영위되고 본질적인 자아성찰의 삶을 도외시되게 됩니다. 우리는 헤르만 헤세가 말한 것처럼 “알을 깨고 나와야 합니다.” 알이라는 것은 세계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감옥과 같은 관념의 세계를 탈피해야 영원성을 향해 비상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듯이 영혼을 탐구해야 합니다. 영원성은 영혼에 내재해 있습니다. 물론 잡념과 망상으로서의 미혹된 혼(Soul)이 아니라 해맑고 밝은 영(Spirit)을 되살려야 합니다. 페르소나를 벗어버리면 인간은 무한한 자유를 느끼고 해방감, 즉 해탈(Liberation, 샨스크리트어로 Moksha)를 얻게 됩니다. 이러한 해탈의 종국에 이르기까지는 수많은 고행의 시간과 세계를 뚫고 지나가야 합니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영적 구도자는 정신세계와 의식세계를 탐구하게 됩니다. 사실, 중생이라는 존재는 다중의식(Multiple Consciousness)를 지니고 있으며 마조 선사(Zen Master)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제 정신이 아닌 Madness”의 상태, 즉 정신분열증에 걸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정신이 분열되지 않고서는 정신통합이라는 깨달음의 경지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잡념과 망상의 구름이 청정심을 혼란케하는 것은 바로 중생심에 일반 사람들이 취해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빠져나오게 되면 내면의 빛이 훤히 비추게 됩니다. 영적 구도자가 탐구해야할 의식세계, 즉 정신세계라는 것은 바로 다중의식으로서의 중생심이 아니라 통합된 의식으로서의 청정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청정심의 세계는 조화와 균형 그리고 질서로 이루어진 하이어아키(Hierarchy)와 네트워크(Network) 및 관계구조(Relational Structure)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올바른 마음과 깨끗한 마음을 지닌 존재자들을 만나게 되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정직하고 바른 마음을 가진 조직이나 기업 그리고 가정에서는 질서가 있고 조화가 있으며 서로에 대한 배려와 서로 간에 맡아서 해야 할 일에 대한 분담과 균형이 존재합니다. 다중의식으로부터 해탈하여 통합의식(Unified Consciousness)을 얻는 것이 영적 구도자의 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안좋은 의식과의 의존성을 타파하고 분리(Seperation)를 얻기 위해서는 좋은 의식과 좋은 인연에 초점을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좋은 의식과 건전한 양식을 지닌 사람들을 많이 만날수록 자신의 정신세계가 맑아지고 밝아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적인 독립적 자아의 탄생입니다. 물론 깨달으면 자아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무아열반(無我涅槃)으로서 삼라만상을 유기적으로 포용하게 됩니다. 자신의 몸에 존재하는 안좋은 에너지들과 탁기(濁氣)를 제거하고 분리시키는 것이 무아열반에 이르는 길이요 깨달음의 빛으로 나아가는 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음양합일에 의한 깨달음은 외도(外道)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진실된 정도(正道)의 길은 음양분리를 통한 음양조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육체적으로는 음양이 분리되나 불성(佛性) 자체는 음양을 두루 포함하고 있으며 동시에 초월해 있기 때문에 이성에 대한 애착을 갖지 않습니다. 특히 음양에너지와 불성(佛性)의 에너지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성(佛性)의 에너지를 몸에 갖게 되면 자연히 중생심이나 탁한 음양에너지로부터 초연해 질 수 있습니다.
철학적으로 사유하면 유한한 현상세계의 초월자이자 무한자가 바로 불성(佛性)입니다. 불성(佛性)은 인식의 대전환을 통해서 얻어집니다. 여기서 인식은 매우 중요한 어휘인데 “사물을 분별하고 판단하여 앎”을 의미합니다. 길을 가다가 만약 자신의 시야에 개미가 발길 앞을 지나가고 있다면 영적 구도자는 발밑의 개미를 살생하지 말고 주의하라는 인식을 얻게 됩니다. 이러한 인식이 삼라만상의 전체로 확대되어 우주라는 전체성을 얻게 되면 그것이 바로 불성(佛性)의 체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체득은 한꺼번에 이루어지기 보다는 점진적인(Incremental)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선가(禪家)에서 말하는 돈오(頓悟)의 깨달음 경지도 아무 수련 없이 순간적으로 확철대오(確徹大悟)하는 것이 아니라 뜸이 무르익은 후에 순간적인 폭발에 의해서 대오각성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점수(漸修)의 깨달음과정은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신성(神性)인 불성(佛性)과 삼라만상을 초월해 있는 우주의 시원(始原)적 하느님(God)와의 감통(感通)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양철학의 태두라고 할 수 있는 주역(周易)에서는 감통(感通)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합니다. 감통(感通)이란 바로 내면의 순수한 마음(청정심)이 하늘의 마음과 감응하여 서로 통함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과정이 무르익었을 때 가아(False Self)들이 사라지고 명료한 의식으로서의 참자아(Real Self)가 우주적으로 확장되어 신(God)과 하나가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필자의 이야기에서 깨달음이라는 것은 아라한의 경지를 말합니다. 즉, 일반적으로 화두타파를 통해서 얻게 되는 경지는 아라한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더 정진해야 진공묘유의 세계를 얻게 되고 거기서 더 정진해야 적멸(寂滅)의 세계를 얻게 되며 그곳에서 더 정진해야 무량광(無量光)의 세계, 즉 부처님의 세계를 친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 것은 아라한의 경지이지 결코 부처님의 경지와 같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경지는 상당한 경지이며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필설불가하다고 하겠습니다.
깨달음에 대한 영어 어휘로서 Realization이라는 어휘가 있습니다. 이 Realization이란 어휘는 실현(實現), 사실로 깨달음, 실상을 앎, 이해, 실감을 뜻합니다. 실현(實現)이란 바로 본질(Essence)이 명료하게 법안(法眼)의 앞에 현전(現前)됨을 의미합니다. 실상이란 한자어로 實狀을 그리고 영어로는 the actual circumstances; the real state of things; a real condition을 의미합니다. 실재의 상황, 만유의 실재 상태 그리고 실재 조건을 뜻합니다. Realization에는 이러한 실상을 꿰뚫어 봄을 의미합니다. 또한 실상을 안다는 것은 형이상학적 실체(Metaphysical Reality), 즉 불성(佛性)의 현전을 의미합니다. 깨달음이란 막막하고 힘든 형이상학적인 미로(Maze)를 지나야 합니다. 이 형이상학적인 미로는 무수히 많은 상징(Symbolism)과 은유(Metaphor)로 가득차있습니다. 그 상징과 은유(메타포)는 꿈과 무의식에 나타나기도 하고 현실적 개체들과 삶의 양태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영적 구도자는 이러한 꿈과 무의식의 상징과 메타포를 타파하고 뚫고 넘어서야 합니다. 이러한 상징과 메타포는 물론 결국 구도자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한 안내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좋은 상징과 메타포만이 꿈과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전, 현생의 악업들에 의해 정신계가 마계(魔界)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면 꿈과 무의식도 나쁜 꿈이 그리고 현실적으로도 안 좋은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영적 구도자는 부단한 내면적 성찰과 외면적 통찰을 통해서 깨어있는 상태로 삶을 주시해야할 것입니다. 물론 현상계는 상징과 메타포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데 대표적인 예가 벤젠을 발명한 과학자가 꿈속에 “뱀들이 서로 꼬리를 물고 원을 이루고 있는 형상”을 보고 벤젠의 화학적 구조를 발견해 냈다고 합니다. 필자가 알기에 개인의 개체적 현상계를 좌우하는 개체적 정신계는 다차원(Multi-Level, 또는 Multi-Dimension)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5감각, 6차의 중생심으로서 마음 그리고 7차의 ‘나’라는 주관자로서의 마나스 마지막으로 8차의 아뢰야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승기신론에서 말하는 바로는 아뢰야식의 외각은 꿈과 무의식 차원을 주관하는 의식층이 있고 아뢰야식의 심층부에는 보다 심오한 불성(佛性)이라는 것이 함장(含藏)되어 있다고 전해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개체적 영혼의 구조(Structure of Spirit)를 의미합니다.
상징과 메타포는 우주모형을 표현하는데 매우 유용한 도구이며 주역(周易)이라는 우주적 도식(Cosmological Schema)구조의 뼈대를 이루는 64괘를 음양이라는 부호로 나타냅니다. 존슨 얀 박사가 지은 DNA周易이라는 서적을 읽어보면 인간의 육체구조의 본질에는 DNA가 있고 인간의 정신구조의 본질에는 周易의 섭리가 내재되어 있는데 이 DNA와 周易의 형상구조(Configuration Structure)는 심미(審美:aesthetics)적인 예술성의 멋이 깃들어 있어 바라보는 이가 그 아름다움과 조화로움에 감탄할 정도입니다. 형이상학적 기술(테크놀로지)과 형이하학적 기술의 묘한 조화는 거룩한 신(God)의 창조정신을 해득(解得)하고 엿볼 수 있는 것 같아 자못 경건합니다. 즉 신성함(Sacredness, Holiness)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물론 DNA와 周易은 깨달음의 현현이요 신이 투사하는 우주적 세계의 상징체계(Symbolism)이자 기술체계(Technical System)입니다.
현대 과학적 사유에 의하면 삼라만상으로 구성된 현상적 물질세계가 홀로그램(Hologram)에 의해 만들어진 가상현실(Virutal Reality)이자 가상세계(Virtual Space)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오래전부터 이 물질세계에 연극을 하는 배우로서 이야기되어왔습니다. 그리고 연극의 시나리오가 있는 것처럼 인류는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깨달음(Realizaton)도 어느 고승(高僧)께서 말씀하신 바대로 시절의 인연 따라 이루어진다고 하신 점을 봤을 때 지구의 역사나 우주의 역사라는 것 자체도 사사물물과 존재자들의 인연의 흐름에 의해서 형성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구나 우주는 하나의 거대한 시나리오가 존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서양의 고대 신인 헤르메스로부터 전해져 온 타로(Tarot)나 동양의 고대 황제인 복희씨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주역(周易) 양자가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다는 점은 특이할 만합니다. 사람이 개인의 시간역사와 이력이 있는 것처럼 타로와 주역에도 시나리오가 있다는 점은 주목해 보아야할 사항이 아닐 수 없습니다. 즉, 깨달음이 존재계의 이면에 거룩하게 여여한 상태로 존재하는 백그라운드라면, 즉 화폭의 백지를 의미한다면 인간의 삶이라는 것은 모종의 시나리오에 의해 연출되어 존재계의 현상에 드러난다고 할 수 있으며 이는 화폭의 그림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양이 현란한 물질문명을 앞세우고 있다면 동양은 고색창연한 정신문명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현상계와 정신계가 어떻게 영적 구도자에게 현전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제 21세기는 물질적 현상계와 정신적 영성계가 조화와 합일을 이루어 양자의 세계의 부조화로 발생한 정신분열증적인 개인적 가족적 사회적 국가적 국제적 문제들이 사라지고 우주적인 대통합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각설하고, 여기서부터는 영적 구도자들에게 있어서 도움이 될만한 마음가짐에 대해서 논고하고자 합니다. 구도자가 가장 중요한 것이 초발심(初發心)입니다. 즉 인생에 대해서 회환과 불만족을 느끼고 성현들의 가르침을 듣고 처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보다 높은 차원을 향하여 수행을 하고자 마음을 냈던 그 초발심이 중요합니다. 이 초발심이 불종자(佛種子)를 지니고 있어 수행이 무르익게 되면 불종자가 깨달음의 열매로 변화되게 됩니다. 그래서 처음에 얼마나 순수한 마음으로 수행에 전념하기 시작했느냐가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의도가 좋지 못하면 나중에 피게 되는 꽃이 아름답지 못한 법입니다. 마음가짐은 구도자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제가 아는 초발심의 자세로서 중요한 것은 중생의 아픔을 이해하는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 존재계의 상위존재, 즉 영적인 존재들의 슬픔까지도 이해해야 합니다. 신(God)께서 만약 존재하신다면 얼마나 고독하실까 등등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과 신은 일체이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을 얻은 빛의 존재는 약간이나마 인식하게 됩니다. 물론 깨달았다고 무조건 빛의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좌탈입망해서 완벽한 빛으로 승천했던 과거 김가기 선사(Zen Master)와 같이 그러한 심오한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아라한 과정을 경험한 후 보다 열심히 정진해야할 것입니다. 공부는 끊임이 없다고 합니다. 아라한 위의경지가 보살의 경지이고 그 다음이 붓다의 경지이며 붓다 다음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법신(法身)의 경지라고 이야기 합니다. 여하튼, 초발심에서 시작해서 초견성, 견성 등의 과정을 겪어 나가 꾸준히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매사에 겸손하고 시험을 잘 통과해야할 것입니다. 마음가짐이 순수하지 못하면 깨달음을 이룰 수도 없으며 이루었다고 해도 그것은 사이비입니다. 깨달음과 자비이타행 그리고 순수성과 하심(下心)은 병행합니다. 즉, 깨달음을 얻고서 남을 비방하거나 비난하는 것은 깨달은자가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에 자신과 의견이 다르다고 남을 비방하거나 하지 말라고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필자의 경험상 세상을 전체적으로 보고 중도(中道)의 길을 걸어야 그것이 불제자나 아라한의 경지지 그렇지 않고 자신이 깨달았다고 남을 비난하고 남의 흠을 잡고 하는 것은 옳다고 할 수 없습니다. 잘못된 명예와 권위가 사이비를 낳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라한이 되면 올바른 명예만이 있을 뿐 권위적인 행세나 목에 힘을 주는 발언은 하지 않습니다. 항상 하심으로 자신의 배움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려고 하되 그 배품을 아까와 하거나 아쉬워하지 않습니다. 금강경(金剛經)에서 불제자가 남들에게 보시했다는 마음을 내지 말아야 참다운 불제자라고 말씀하신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불제자가 걸어가야 할 길, 그리고 영적구도자가 걸어가야할 길은 동일합니다. 즉 자신의 에너지 시스템을 환골탈태하여 청정한 공심(空心)을 증득해야 합니다. 공심(空心)을 증득하면 그것이 바로 아라한의 경지요 선가(禪家)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증험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후 보임(保任)을 잘하면 무아적인 청정심이 더욱 맑고 깨끗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특히 영적 하이어아키에서 청정심을 갖는 것이 중요한 것은 하위영혼이 상위영혼에게 자신의 에너지를 바쳐서 자신은 보다 높은 영적 하이어아키의 서열을 차지하기 위해 진화를 하게 됩니다. 즉, 하수 영혼이 고수 영혼이 되기 위해서는 강렬한 구도심과 함께 청정한 마음의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정신계에서는 에너지 쟁탈전이 심하기 때문에, 좋은 에너지를 많이 제공해 주는 자가 바로 고수로 도약할 수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섹스 등의 행위로 자신의 에너지 시스템을 똥물로 더럽혀서는 안 됩니다. 자재 만현 스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청정한 물이 담긴 컵에 똥물이 한 방울 떨어지면 마실 수 없는 것처럼, 구도자는 계율을 엄격하게 지켜야하며 음계(婬戒)는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라한의 공과는 이룰 수 없으며 보임을 제대로 할 수도 없습니다. 보임은 육체를 벗어버리고 마음이 육체를 떠날 때까지 지속됩니다.
모든 일에는 고비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일을 해내는 데에는 반듯이 고비가 있습니다. 이 고비를 슬기롭고 용기있게 넘기지 못하면 포기하게 됩니다. 그리고 쉬운 길이 있습니다. 너무 어려운 길로 갈 필요가 없습니다. 고비라는 것을 넘기 위해서는 쉬운 길을 찾을 줄 알아야 합니다. 쉬운 길을 찾아 그 고비를 넘길 때 우리는 성취감을 느끼게 됩니다. 항상 마음을 비우고 열성과 성의를 다해 도전하십시오. 아무리 어려운 고비라도 노력하고 정성을 기울인다면 분명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비를 넘지 않고서는 큰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큰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고비를 넘어야 합니다. 일(Work)에 있어서도 공부에 있어서도 고비는 항상 있게 마련입니다. 유혹을 넘기고 힘든 고비를 넘겨야 우리는 전문과가 될 수 있고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항상 일과 공부 그리고 마음수련에는 고비가 있음을 명료하게 인지하고 그 고비를 지혜롭고 용기 있게 넘길 수 있도록 힘을 키워두시길 바랍니다.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많은 노력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목숨을 거는 것과 인내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도여정은 참으로 힘들고 힘듭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루지 못할 과업은 아닙니다. 얼마나 치열하고 지성스럽게 구도의 길을 걷느냐가 중요하며 그러한 과정 속에서 항상 불보살의 가피를 기원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자신의 내면에 잠재하는 모든 에센셜 포르테(Essential Forte:본질적 장점)을 끌어내서 모든 것을 바쳐야 합니다. 명예, 지식, 재능, 재산, 목숨 등 모든 것을 걸어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라한의 경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아라한이 끝이 아닙니다. 여기서 보다 험난한 길을 더 걸어야 보살위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리고 더 험난한 길을 걸어야 붓다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마십시오. 인생을 통해서 경험하고 배우고 진지하게 마음을 탐구하고 치열하게 성찰하고 세상을 명민하게 통찰하다보면 어느새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경지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부단한 과정을 통해서 어렵게 얻었을 때 그 깨달음은 가치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염불 수행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자재만현 스님의 가르침인데 도움이 될까해서요. 정갈한 마음으로 금강경을 일독하고 비로자나 총귀진언을 암송합니다. 15번이나 50번 정도 염송하십니다.
비로자나 총귀진언
나무시방삼세 일체제불
나무시방삼세 일체존법
나무시방삼세 일체보살
나무시방삼세 일체현성
오호지리 바라지리 리제미제기사은제지 바라타니 옴불나지리익 오공사진사타해 바라달마사타해 아라바좌나 원각승좌도진나 사공사진사타해 나무항하사 아승지불 무량삼매 보문삼매 옴 바마나사타바 탁타니아나 나무아심타아심타 자심도류사바하 나무 옴 아밀리다다바베사바하 나무이바이바제 구하구하제 다라니제 니하라제 비니마니제 사바하
그 다음으로 석가모니불을 1시간 정도 염송합니다.
염불은 만트라(진언)와 같은 효과가 있어서 자신의 마음을 보호해 줍니다. 또한 염불을 통해서 발성하는 말은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석가모니불이라는 발성자체에 강력한 힘이 있기 때문에 오래할 수록 내면의 힘이 강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양에서는 로고스라고 하여 신의 말씀을 이야기합니다. 바로 염불도 석가모니불의 에너지와 링크시키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석가모니불을 많이 염송하게 되면 자신의 내면체에 석가모니 불과 같은 파장과 에너지를 얻게 된다고 믿습니다.
참고로, 인간의 의식은 문화를 형성하고 다시 문화는 정신문명을 이룹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루어진 정신문명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가 바로 언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고스(Logos)라는 말이 있습니다. 로고스는 이성, (신의 )말씀, 우주법칙 등을 의미합니다. 중요한 것은 로고스가 정신의 핵(核)인 이성(Reason)을 뜻하면서 동시에 신(God)의 말씀을 의미한다는 점입니다. 즉, 이성이라는 것은 신의 영적 투영인 말씀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문화를 지배하는 정신적 힘은 주로 이성과 감성에 기인하는데 그 이성과 감성은 언어(말씀)를 매개로 한다는 점입니다. 쉽게 말해서 언어는 문화를 지배하는 강력한 도구이자 힘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언어(말씀)은 염불을 통해서 효과적으로 힘을 얻습니다. 염불을 할 때 발성되는 언어와 말씀(석가모니불이라는 성호-聖呼)은 강력한 힘을 가지며 구도자의 정신세계를 정화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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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구도자의 길(The Tao of Spiritual Seekers) - 6
사실, 인간은 오감의 바디체, 에텔체, 아스트럴체(감성체), 정신체(멘탈체), 영성체, 붓디체 등 다양한 에너지체(Energy Body)를 가지고 있어, 초심자가 수련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에너지체를 골고루 마스터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견성(見性)을 얻기 전에 오감의 쾌락을 어느정도 맛보는 것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견성(見性)을 하였다면 그 후에는 절대로 감각적 쾌락을 추구해서는 안됩니다. 탈무드에도 어리석은 자는 감각적 쾌락에 한 번빠져서 영영 헤어나오지 못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으며, 보통 사람은 감각적 쾌락을 즐기지 않고 항상 감각적 쾌락에 대해 관심을 놓치 않고 정신에너지를 낭비해 간다고 비유적으로 말합니다. 가장 현명한 사람은 처음에 어느 정도 감각적 쾌락을 맛본 후 그 후에는 감각적 쾌락의 문을 꽉 잠그고 청정한 삶을 살아간다고 비유적으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청정한 마음의 소중함을 알기 위해서는 무릇 중생심의 허망함을 확실하게 꿰뚫어 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중생심이 삼독심, 즉 탐, 진, 치를 일으키기 때문에 중생심은 똥물이나 다름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하지만 중생심의 삼독이 가져다주는 괴로움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결코 청정심의 소중함을 모릅니다. 따라서, 영적 구도자들은 처음에는 반드시 중생심의 허망함을 통렬하게 실감해야 할 것입니다. 그 후 영적 추구의 길을 밟아 나가시면 높은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봅니다. 참고로 요가가 지금 전세계적으로 열풍을 일고 있는 것은 매우 과학적이기 때문입니다. 판탄잘리의 8가지 요가행법은 매우 체계적(시스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컴퓨터 시스템처럼 정확하고 정묘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유기적 메카니즘과 화이트헤드의 유기철학적 사상이 서양문명에 스며들어있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 요가철학과 요가수행체계가 매우 서양사회구조에 적합하게 들어맞게 된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요가시스템과 같은 체계적인 수행법을 지향해야 합니다. 체계적이란 분류와 범주를 잘 나누어서 이해하는데 있습니다. 에너지체에 대한 분류에 따라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소중합니다.
사실, 구도자가 수행을 계속해 나가면 에너지체들이 모두 사라지고 하나의 청정한 마음으로 통폐합됩니다. 그 메카니즘은 구도자가 목숨을 걸고 정진하면 자신의 내면에서 본성이 터져나와 하늘을 뒤집어엎습니다. 그리하여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악업을 타파하게 됩니다. 물론 이렇게 본성의 자리를 찾아들어 청정심을 얻게 되었는데 만약 계율을 어기게 되면 엄청 위험한 사태가 발생하게 됩니다. 정신분열증의 현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견성(見性)을 한 후에는 반드시 계율을 지키는 것을 철두철미하게 수지(守持)해야 할 것입니다. 구도자가 구도의 길을 걷기 전에는 계율의 문제는 그리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으나 일단 구도의 길을 걷게 되면 계율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견성을 한 후에는 엄청 계율이 소중합니다. 따라서, 계율을 얼마나 청정하게 잘 지키느냐가 수행의 관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계율에 대해서는 이정도로 하고 일관성(Consistency)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컴퓨터에서 프로그램이 메모리상에 로딩되었을때를 프로세스라고 말합니다. 즉, 운영체제 위에 프로세스들이 여러 개 실행되어 함께 동작하는 시스템이 바로 현대식 컴퓨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프로세스가 하나의 개별적인 인간 존재이며 운영체제가 바로 청청한 비로자나불(석가모니불)의 법신(法身)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영성체가 망언을 하게 되면 운영체제에 해당하는 석가모니불의 법신과 일관성(Consistency)이 깨지게 됩니다. 즉, 프로세스가 바이러스에 걸리거나 버그가 있다면 운영체제가 즉시 프로세스를 종료시키는 것처럼 이와 같은 작용이 구도자에게도 발생합니다. 즉,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거나 망언으로 구업을 짓게 되면 자신을 돕는 청정심과의 일관성(Consistency)을 갖지 못하게 되어 죄업이 쌓이게 되면 견성(見性)한 사람이라도 계율을 안지킨다면 석가모니부처님의 법신(法身)과 일관성(Consistency)을 갖지 못해 다시 중생계로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중생들은 죄를 짓고 일관성(Consistency)을 어기게 되면 마음이 괴롭고 병이 들기도 하며 다양한 망상과 정신분열증적인 정신질환을 겪게 되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청정심과의 일관성(Consistency)이 중요하고 견성(見性)을 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 석가모니불의 법신(法身)과의 일관성(Consistency)을 유지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자신의 에너지체를 거룩하신 부처님의 청정한 에너지체로 동화시켜 나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컴퓨터 시스템에서 클라이언트/서버 개념이 있습니다. 서버는 바로 석가모니부처님의 법신(法身)에 해당하며 클라이언트는 육체속의 영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클라이언트는 항상 서버로부터 도움을 받으며 위기의 상황에 서버로부터 구원을 받습니다. 클라이언트가 간절하게 염불 등을 통한 기도(메시지)를 서버에게 올리면 서버는 그 요청을 잘 감지하여 클라이언트의 공과와 카르마를 잘 살펴서 처리해 줍니다. 이와 같은 시스템 구조가 매우 정교하게 부처님과 구도자에게 맞물려 있음을 필자는 몇몇 선지식으로부터 그리고 미약하나마 필자의 경험을 통해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끝내 이기는 자에게는 새벽별을 준다고 하신 점과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새벽별을 보고 깨우치신 것과 우연의 일치치고는 너무나 합치된 내용입니다. 물론 성서와 불경의 다른 부분도 비슷한 내용이 많이 있습니다. 여하튼, 성불(成佛)을 하게 되면 공간계에 무량광(無量光), 미묘음을 발하는 진신(眞身)을 얻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원불사의 몸으로 육체밖의 빛의 몸, 체외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될 때 생사를 초월하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견성(見性:성품을 봄)하기 전까지는 견성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하지만 견성을 얻은 후에는 더욱 분발하여 보살지에 이르도록 하고 그 후 붓다를 증득해야 할 것입니다. 클라이언트/서버 개념에서 클라이언트는 육신 속의 빛의 에너지라면 서버는 체외신으로 영원불사의 에너지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체외신은 희열체로서 그 기쁨이 이루말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죽을 때는 몸을 버리고 몸속의 빛이 체외신인 불신(佛身)과 계합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 견성하기 전까지는 열심히 계율을 지키려고 노력하되 너무 계율 때문에 고민하고 괴로워하지는 마세요. 처음부터 모든 계율을 다 지킬 수 없으므로 열심히 지키려고 노력하되 잘 안되면 부처님께 참회하고 발원해 나가도록 해야 합니다. 다섯가지 계율이 있습니다. 첫째, 개미라도 죽이지 않는 살생금지입니다. 둘째, 음욕(淫慾)을 참는 것입니다. 셋째, 망어(앞뒤가 안맞는말, 꾸며낸 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넷째, 도둑질 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섯째, 술을 지나치게 먹어 제정신을 차리지 않고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이들을 다 지키기가 어려우시면 점진적으로(Incrementally) 지켜나가도록 하십시오. 이 다섯가지 계율을 오계(五戒)라고 하는데 왜 오계를 지켜야 하면 자신의 마음과 몸을 청정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마음과 몸이 청정하지 않으면 마음과 몸이 탐(탐욕), 진(분노), 치(어리석음)에 물들어서 세속적으로 자꾸 욕망과 갈애, 집착을 일으켜 생노병사의 윤회 속에서 헤메이게 됩니다. 이러한 생노병사의 매트릭스에서 해탈하는 길이 바로 견성(見性) 공부입니다. 견성(見性) 전까지는 가능한한 계율을 지키도록 하되, 만약 계율을 어기면 그 즉시 부처님께 참회하도록 하세요. 처음에 1개월을 잘 지키고, 그 다음 3개월을 잘 지키고 그 다음 6개월을 잘 지키고 계속해서 1년 3년 5년 지켜나가면 문뜩 허공이 뒤집어지고 공간계가 바뀌는 소식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를 견성(見性)이라고 합니다. 참된 내면의 본성이 터저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어휘와 선도내공(仙道內功)의 어휘를 합종시켜 조어를 만들면 영적 환골탈태, 즉 Spiritual Metamorphosis로서 표현됩니다. 구도자가 견성을 했다는 것은 영적 환골탈태를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일단 견성(見性)을 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필사적으로 목숨을 걸고 계율을 지켜가면서 보임(保任:깨달음을 지킴)을 해야 합니다. 만약 견성(見性)을 한 후 계율을 파하면 양쪽 공간계(중생심과 청정심)를 왔다갔다하게 되어 정신분열증(깨달음은 정신통합을 의미함) 현상을 겪게 될 것입니다. 필자의 경험이므로 주의에 주의를 기울였으면 합니다. 수행은 위험한 것이므로 반드시 훌륭한 선지식으로부터 공부를 배우도록 하셨으면 합니다. 필자도 스승이 계시고 지금은 현지사의 만현 큰스님의 가르침을 주로 공부하고 있습니다. 21세기 초과학문명시대에 현대 불가에서 말하는 견성(見性)으로서의 깨달음 가지고는 서양의 신(God:하느님)께서 창조해낸 물질문명을 해득하는데는 경쟁이 안됩니다. 즉, 우리는 견성 너머의 더 높은 깨달음을 향해 나가야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오계(五戒)를 잘 지켜 견성(見性)을 이루고 더 정진하여 성불(成佛)을 이루기 바랍니다. 달마대사가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고 한 것은 견성을 하게 되면 성불을 할 수 있는 기초가 된다고 해석하시면 됩니다. 견성이 성불이라고 하는 것은 수행자들에게 방향을 제시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견성이 바로 바둑에서 말하면 1단 자격증 받은 상태입니다. 불제자들은 만현 큰스님의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서적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무량광(無量光)의 법신(法身)을 얻어 자신의 영원불멸의 ‘참나’를 창조해 내기 전까지는 끊임없이 공부해야 합니다. 불제자(佛弟子)로서 불가의 수행자들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열반경(涅槃經)에 이르시기를 끝없이 정진하라고 하셨다는 말씀을 상기해야할 것입니다. 그 끝없이 정진하라는 것은 우주를 이해하고 우주를 배우기 위해서는 견성(見性)에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보아야할 것입니다. 오계를 지키고 참선을 하여 견성(見性)을 이루는 것은 바로 마음의 치유와 탐, 진, 치 삼독에서 벗어난 상태에 불과합니다. 이를 아라한과를 증득했다고 하는데 이 정도도 힘들지만 더 정진해야 합니다. 도가(道家)에서는 양신(陽神)이라고 하여 체외신(體外神)을 이야기합니다. 즉, 몸 밖의 몸을 만들어 수련하는 것이 도가의 최상승 묘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필자는 불가에 뜻을 둔 사람이므로 도가(道家)의 최상승 묘법만큼 불가(佛家)에도 최상승의 묘법이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밀장(密藏)이어서 최상승 근기들간에 구전심수되어왔습니다. 하지만 21세기 과학물질문명의 급격히 부상함으로써 정신계의 일대 전환, 아니 일대 정신적 대혁명(精神的 大革命: Spiritual Great Revolution)이 요구됩니다. 즉, 불가에서도 체외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으나 붓다의 경지에 도달하신 현지사의 만현 큰스님께서 말씀하셨고, 필자는 인도의 요가에서도 희열체(Bliss Body)를 이야기했고 도가에서도 양신(陽神)을 이야기했으므로 불가에서도 상락아정(常樂我淨:대승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의 네 가지 덕. 열반의 세계는 절대 영원하고 즐겁고 자재(自在)한 참된 자아가 확립되어 있으며 청정함을 이른다)의 경지가 분명 있음을 말하고자 합니다. 지금 수행자들 간에는 우주인(Celestial Body)이니 우주컴퓨터(Cosmic Computer)니 채널링(Channelling)이니 하는 식으로 의식을 우주권으로 확장하고 있습니다. 견성(見性)으로는 이들에 대한 의미를 해득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어려운 선문답을 떠나서 알기 쉽게 컴퓨터가 동작하는 기초 원리를 하나하나 공부해 나가서 증명해 내듯 과학적 사유가 필요합니다. 그 과학적 사유는 바로 노자가 설파한 신비의 중묘지문(衆妙之門)을 꿰뚫고 이를 초월하여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생각됩니다. 특히 5000여전 동양의 주역(周易)은 고도로 과학적이며 신비적입니다. 아인슈타인과 양자역학의 닐스보어가 주역에 심취했다는 점에 과학적인 사유가 농축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불가(佛家)의 가르침들도 주역처럼 체계적으로 정리되고 단순히 견성(見性) 정도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더 나아가야 합니다. 몇 년 전 대산 김석진 선생님의 제자분께서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과 주역체계에 대해서 합종시켜 연구한 책도 나왔습니다. 우리는 이제 불교의 가르침을 단순히 외롭게 홀로 세워서 공부해야할 시대가 지났습니다. 서양의 문명과 동양의 문명이 교류하고 회통해야합니다. 헤겔이 말한 정과 반을 거쳐 합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선사(Zen Master)가 말한대로 정말로 전체를 보는 눈을 갖게 됩니다. 하이젠베르그가 말한대로 전체를 볼 줄 알아야 하며, 에셔의 작품대로 관찰자까지 포함한 전체를 직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우주를 훤히 꿰뚫어 보기 전까지는 언어분석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말대로 우리는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합니다. 그리고 겸허하게 만현 큰스님이나 기타 정신세계의 파이오니어(Pioneer)들에게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노자의 도덕경은 지상사람에게 맞추어진 경전이며, 하늘나라 신선(神仙)들은 황정경을 공부한다고 합니다. 즉, 인간의 인식 능력으로 모든 것을 제단하려고 하는 것은 우치입니다. 우주는 광대하고 기라성같은 초절정 고수들은 우주에 가득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불가에서 말하는 견성(見性)에 상주해서는 안됩니다. 더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컴퓨터, 인터넷, 모바일, 유비쿼터스, 노마딕 등등 수없이 많이 배태해서 태동하는 신인류과학문명과 쌍립하고 상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도올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동양정신문명은 서양과학문명보다 더 진귀한 보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견성(見性) 넘어의 세계입니다. 물론 대만의 남회근 선생이나 기타 여러 선지식들처럼 견성(見性)의 자리를 확실히 깨우쳐서 글과 말로 표현하는 작업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만현 큰스님처럼 붓다의 경지에 이르는 분이 있어야 하고 도올 선생님처럼 쿤달리니 각성을 통해서 박학다식한 천재성을 기른 분도 우리나라에 나오셔야 합니다. 다만, 모든 분들이 서로 상생(相生)하고 공생(共生)하여 협력 사이클을 이루어 대한민국을 증흥시키고 더 나아가 인류의 사표가 되도록 경주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 세계를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마구니라고 하는 것은 21세기 신인류문명에서는 좀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는 헤르만 헤세가 말한 것처럼 “알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알은 바로 우리가 갇혀있는 관념적 세계라는 것을 세존께서 설파하신대로 “철견”해야할 것입니다.
구도자가 향상심(向上心) 또는 상향심(上向心)을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즉, 보다 풍요로운 의식세계와 맑고 명료한 정신세계를 추구하는 것은 구도자로서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 향상심과 함께 하심(下心)을 가져야 합니다. 즉 겸허한 마음으로 끊임없이 의식의 상향에 맞추어 배우고 정진해야 합니다. 많은 깨달음을 얻은 분들에게 우주의 실재(Reality)에 대해 물어봐도 정확하게 말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직 더 공부해야할 것이 남아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라한의 경지에서는 아라한 수준 이하만 이해하는 것이지 더 이상 얻을게 없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에 도달해야 비로소 우주에 대한 전체상(全體象)을 그릴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구도자는 끊임없이 하심과 함께 상향심을 가지고 정진해야할 것입니다.
필자도 아직 견성(見性) 정도에 불과한지라 부처님의 거룩하신 상락아정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고 공부할게 많아서 더 많은 언급은 삼가고 여기서 줄입니다. 아무쪼록 계율을 잘 지켜 견성을 이루고 아라한을 넘어서 더 나아가 보살에 이르고 거기서 더나아가 성불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과학물질문명과 도덕정신문명을 합일시켜 부처님의 섭리(攝理)가 우주에 더 널리 가득차여 우주의 평화와 우주질서 확립을 지향해 나갔으면 합니다.
여기서부터는 차크라 계발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합니다. 차크라 계발이라는 것은 차크라의 의미부터 명철(明徹)하게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차크라는 연꽃(Lotus Flower)이라는 뜻으로 몸에 존재하는 미묘체(Suble Body)에서 피어납니다. 어느 시기에 내면에서 연꽃이 피느냐 하면 명상과 호흡을 통해 집중하게 되고 의식의 광도(光度)가 높아지게 되면 자연히 전압에 의해서 차크라가 열립니다. 차크라가 열릴때는 내면의 눈(지혜의 눈)으로 차크라가 열리는 것이 보입니다. 그리고 차크라가 열릴때 황홀경이 일어나고 아름다운 연꽃이 개화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차크라는 매듭이라고 하여 악업에 따라 단단히 매여있거나 선업에 따라 느슨히 매여있을 수 있습니다. 차크라를 열기 위해서는 차크라를 구성하는 나디(Nadi)를 각성시켜야 할 것입니다. 수행은 호흡과 집중명상을 하게 되면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인체에는 7개의 차크라가 있는데, 각각의 차크라는 고유의 기능을 부여되어 있습니다. 인체의 순서에 따르면 물라드하라 차크라, 스와디히스타나 차크라, 마니퓨라 차크라, 아나하타 차크라, 비슈다 차크라, 아즈나 차크라, 사하스하라가 있습니다. 요가명상과 호흡을 하게되면 반드이 마니퓨라부터 각성해야 합니다. 즉, 호흡을 단전에 이르게 하여 마니퓨라 차크라의 연꽃을 개화시키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도가(道家)에서는 응신입기혈이라고 하여 아즈나 차크라의 신(神) 에너지를 사용해서 단전을 지키면 단전이 차츰 숙성되고 그렇게 될 때 무르익으면 단전(차크라)이 연꽃을 피우게 됩니다. 이렇게 차크라가 각성되고 계발되어 꽃을 피우게 되면 악업이 하나씩 소멸되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의 과정이므로 결코 이것에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신비로운 현상을 경험하는 것은 좋지만 집착하면 마경(魔境)에 빠질 수 있으므로 항상 내면의 마음, 즉 청정심에 집중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스승(Guru)없이 혼자서 수행하면 위험하오니 나름대로 내공과 공력을 지닌 스승의 지도 하에서 수행을 하셔야 합니다. 에너지나 기(氣)를 타인으로부터 받는 것은 가급적 삼가야 합니다. 단, 눈 밝고 충분한 내공과 깨어있는 마음을 지닌 스승으로부터 받는 것은 괜찮습니다. 스승으로부터 에너지를 받는 것을 요가에서는 샥티파티(Shakti-Pati)라고 합니다. 샥티파티는 주로 아즈나 차크라를 통해서 받게 됩니다. 물론 몸 전체로 에너지를 받기도 합니다. 여하튼, 의식의 각성을 위해서 스승으로부터 에너지를 받는 것은 좋은데, 일반 외부인이나 기타 믿을 만하지 못한 선생으로부터 기를 받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탁기가 있을 수 있어 오히려 몸을 해롭게 합니다. 어느 선지식께서는 몸에 존재하는 기운이 모두 정갈하게 다듬어져야 수승한 경지에 이른다고 하셨습니다. 즉, 기운을 무조건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운을 정신일도로 모아서 응결하여 내신(內神)을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선생 저선생에게 기를 받으면 기가 엉키어 에너지 정화(Energy Purification)라는 수행의 요체를 깨뜨리게 됩니다.
21세기 수행문화는 통합수행을 지향합니다. 즉 선(仙), 불(佛), 요가(Yoga) 모두가 합종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상호 수행체계를 명료하게 인식하고 각각의 수행체계로부터 장점을 얻어야 합니다. 선(仙)에서 말하는 주화입마, 응신입기혈, 내시반청(內視反聽), 회광반조, 반로환동, 환정보뇌, 환골탈태 등 중요한 용어에 대해서 잘 이해하시고, 불도의 염불을 하루에 한시간정도 하시면 좋습니다. 염불은 마구니를 제압하는데 매우 효과가 좋으므로 요가명상과 호흡수행을 할때 병행해서 하시면 좋습니다. 정법(正法)이므로 잘 습득하여 수지하시길 기원합니다. 그리고 요가명상은 쿤달리니와 차크라에 관련된 공부를 먼저하셔야 합니다. 이론적으로 책을 통해서 쿤달리니와 차크라에 대한 공부를 해 두시면 매우 좋습니다. 원래, 공부는 수행만 해서는 안되고 어느정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앎을 그리스도교에서는 영지(靈智:Gnosis:그노시스)라고 합니다. 이 영지를 깨워내기 위해서는 다양한 종교와 수행체계를 꿰뚫어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계율을 철두철미하게 지켜야 합니다. 음계(婬戒)는 생명을 걸고 지켜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부터는 잠시 명상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명상이란 정의부터 시작합시다. 명상은 영어로는 Meditation 으로서 묵상, 명상; 숙고, 고찰 등을 의미합니다. 한자로는 명상(瞑想·冥想) “고요히 눈을 감고 깊이 생각함”을 의미합니다. 결국 생각함이라는 것으로 귀착되는데, 여기서 생각함이란 바로 사유수(思惟修)를 의미합니다. 다시말해서 생각을 닦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흔히 요가명상이라고 많이 말합니다. 여기서 요가명상이란 아사나(Asana)등의 행법인 요가체조가 아니라 가부좌를 틀고 앉아 조용히 사유를 닦는 것, 즉 생각을 가다듬고 차분하게 정리하는 것을 말합니다.
명상을 잘하기 위해서는 호흡수련과 위빠사나 관법을 두루 수행해 봐야 합니다. 단, 둘다 스승(Guru)의 도움이 없이는 위험함으로 스승을 만나기 전까지 요가명상에 대한 자료와 서적을 많이 참고하여 의식세계에 앎을 확장해 두어야 합니다. 앎이 바르게 정립되지 않고서는 올바른 수행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명상은 사유수로서 지혜를 기르는 것입니다. 생각을 다듬고 정리하고 닦다보면 결국 맑고 영롱한 지혜가 드러납니다. 이러한 영롱한 지혜가 생겨야 비로소 명상의 맛을 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명상을 하게 되면 마구니(마왕)들이 색욕과 수면욕 그리고 명예욕 등 물질욕을 일으키기 때문에 주의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따라서, 마구니를 타파하는 방법이나 앎을 많이 익혀두고 부처님 경전(아함경, 원각경, 금강경)이나 요가 경전(판탄잘리의 요가슈트라) 및 바가바드기타라는 인도 경전을 두루 익혀두셔야 합니다. 필자가 목도하는 바로서는 21세기 신인류문명은 감성, 지성, 신성의 통합을 향해 전개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종교간의 벽과 괴리감을 해소 및 일소하고 상호 참조하고 회통하면서 서로 간에 배울 것은 배워야 하며 종교의 껍데기가 아닌 종교의 알맹이인 명상수련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 이야기는 종교를 믿는 것도 좋지만 종교를 넘어서서 종교의 중심에는 수행이라는 축이 있다는 점을 각별히 주의해야할 것입니다.
추천하고 싶은 명상서적은 라마나 마하리쉬의 “나는 누구인가?” 서적과 마하리지의 “아이앰댓 (I Am That) (슈리 니사르가닷따 마하라지와의 대담)” 서적입니다. 도서관에가서 보면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추가로 함석헌 선생이 번역하신 바가바드기타 서적을 추천합니다. 판탄잘리의 요가수트라 번역글은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부처님 경전(아함경, 숫타니파타, 법구경, 원각경, 금강경)도 인터넷에서 검색해서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법구경이나 숫타니파타는 구입하실 생각이 있으면 법정스님책도 괜찮습니다.
제 글이 에세이 형식으로 물흐르듯 전지구적인 공부와 수행에 대한 내용을 무한 포섭하여 전개하므로 다소 어색할지라도 자꾸 읽어보시면 눈에 익으실 것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영적 구도자의 길을 정리했는데, 이것은 아라한 수준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보살, 붓다의 경지는 넘볼 수 없었음을 인정합니다. 만약 지금까지 소개한 내용 중에서 잘못된 내용이 있다면 부디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고 제가 얻지 못한 경지에 대해서 논했다고 하여도 그 점 너그러운 용서를 구합니다. 분명 잘못된 내용과 오류가 존재함을 인정합니다. 독자제현님들의 밝은 지혜의 눈으로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다음의 내용을 끝으로 본 연재 “영적구도자의 길”을 마치고자 합니다. 그동안 읽어주신 모든 벗님께 감사드립니다.
여기서는 붓다가 되기위한 필수조건인 생사경(生死境)에 대한 내용입니다. 인터넷을 주유하는 어느 강호 고수 네티즌께서 좋은 글을 올려주셔서 이렇게 인용합니다. 제가 네티즌님의 대의(大意)는 그대로 하되 내용을 약간 각색하여 정리를 해봤습니다. “무협지에도 신검합일, 화경, 현경, 생사경 단계로 나눈다고 합니다. 신검합일은 검과 몸이 하나다 되는 단계이고, 화경은 검기를 다루는 것이며 이때 육체적인 뼈와 살이 바뀌는 환골탈태가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으며 현경은 검과 마음이 하나가되어 어검술(검을 심기-心氣로 날려서 적을 공격하는 검술)을 부릴 수 있다고 하며 이때도 환골탈태가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물론 이때는 영적인 환골탈태가 이루어지겠죠. 그리고 생사경은 몸이 사라진다해도 정신만 살아있다면 언제든지 부활이 가능한 단계라고 하는 군요. 부처님과 예수님은 생사경에 도달하신 분이라고 합니다.”
생사를 초월하는 경지, 즉 붓다의 경지에 대한 생사관 내용은 자재만현 큰스님이 최상위 존재계에 거주하시는 석가모니불의 가르침을 전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라는 서적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 책 별 다섯 개에 별 다섯 개 드립니다. 제가 지금까지 태어나면서 읽었던 모든 종교, 영성 서적들 중에서는 최고의 가르침이 들어있음을 인정합니다. 서점에서 한번쯤 읽어보십시오 한 권 소장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무궁한 영광일 것입니다. 특히 이 책을 통해서 불가의 위계(영적 하이어아키) 또한 체계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수다원, 수다함, 아라함, 아라한, 대아라한, 보살(하품, 중품, 상품), 붓다, 석가모니 부처님 등으로 위계가 정해져 있습니다. 책을 참고하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영적 추구자의 길”의 요체는 바로 생사를 초월한 경지를 얻는 것입니다. 몸 밖의 허공에 법신을 얻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엄청난 인내와 각고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제가 봤을 때 올바른 초발심으로 정진하고 부단히 노력하면 부처님이 도와주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지시고 정진하세요. 힘들 때는 다른 수행자들의 삶을 읽어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모든 벗님들의 성불을 기원합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picnic 합장
첫댓글 존경하는 법우님들께. 본 글은 제가 경험하고 배우고 알게 된 내용을 정리한 것이며 지금까지 경험한 가르침이 만현 큰스님의 가르침과 상치되는 부분이 조금은 있으나 법우님의 지혜의 눈으로 걸러내시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쪼록 제 글을 너무 믿지 마시고, 시간나는대로 읽어보시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 만현 큰스님께 삼배드리면서...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좋은글 감사합니다. 나무석가모불........................
대충읽는것만도 사흘입니다.저의수준으론 어려운글이지만 수행에 큰 도움이 되는 글입니다. 정말 존경하고 앞으로도 좋은글 많이부탁드립니다.두고두고 읽으면서 수행하는 참고서로 삼겠읍니다. 감사합니다, 합장.
제 글은 그냥 참고만 하시구요. 자재만현큰스님의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여러번 정독하셨으면 합니다. 제 수준은 아라한에 못미치는 수준으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제 글중에서 다소나마 잘못된 내용이 있을 거에요. 그러므로, 꼭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열독하시고 자재만현큰스님의 서적을 기준으로 해서 제 글을 잘 살펴서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아무쪼록 중도님, 제행님, 그리고 많은 우리 법우님들의 수행정진에 행운이 함께 하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picnic 합장.
힘겹게 수행 정진하여 체득하시고 알아낸 세계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알려주시니 큰 도움이 됩니다. 진리의 세계를 증득 하고자 공부하는 불자들은 이러한 증명을 뒷받침하는 이론을 갈망합니다. 만현 큰스님께서는 남김없이 증명해주셨기에 귀의합니다 읽고 또 읽겠습니다.
법인행님 저의 부족한 글 고맙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글은 참고만하시구요. 아무쪼록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많이 읽으셨으면 합니다. 정법수호및 치열한 구도정신으로 법인행님의 성불을 기원합니다. 저두 더욱 분발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석가모니불 picnic 합장
비슷한 세계를 가고 있는 친구를 만나 실컷 얘기를 하며 내가 읽어 보지못한 책과 들어보지 못한 세계까지 들었습니다. 한동한 소식 없었던 옛친구를 만나 한없이 반가운 느낌이었습니다.내자신도 정확히 표현할 수 없었던 내자신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도 있었고...감사합니다.
너무나 좋은 글이라 퍼 가서 내 블로그에 올려 놓았습니다. 많은 도움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