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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의 뱃길
한반도의 중심이자 서해안에서도 내륙으로 깊숙이 노를 저어 배가 들어올수있었던 우리 아산은
1979년 삽교천 방조제가 완공되면서 더 이상의 뱃사공은 볼수가 없게 되었다.
삽교천과 아산만의 방조제는 농업용수의 저장및 가뭄과 홍수의 조절을 하면서
농업 사회엔 커다란 발전을 가져오고 교통의 편리성에서도 큰 역활을 하였으나
한때 전국 6대 시장이며 조선시대 보부상의 본거지였던 예산장이 대폭 축소되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인 아산의 특산물로 이름을 떨치던...
웅어 뱅어 숭어 조기 새우등의 바닷고기는 남의 고장 이야기처럼 생소하고 낮설게되었다
또한 곡창지대로써 인근지방의 세금인 세곡미를 창고 80칸에 보관하고
15척의 배를 이용해 한양등으로 싣어보내던 인주면 공세리의 곶창지도
역사의 한부분으로 기억될 뿐이다 ㅡ
1894년 근대 격변기엔 청일 전쟁의 발발로 한반도 지배권 획득을 노린 주변 강대국들의
싸움터가 우리 고장이었다니 이어찌된 노릇인가 ?
시간이흐르며 발전속에서 잊혀지고 없어지는것이 있으니
지난날이 우리의 추억속에서 멀어지고있다
음력으로 백중사리때는 현충사앞 뱃터거리까지 어지간이 큰 나룻배가 해산물을 쏟아놓고
쌀이며 과일 채소등을 담아 한양으로 향하였을 뱃사공의 노래가락이 들리는듯하다
일제 강점기 기초공사만 하였던 실옥동 곡교천 아래까지는 사리때(대조)
수시로 배가 드나들고 인주면 주민들과 염치읍 산양리 주민 일부는
바다를 터전으로 살아가는 분들이 많았다고한다
또한 해암리 인근의 바닷가에선 차진 갯벌 흙으로 옹기를 굽던 가마터가 있어서
배를 이용해 외지로 판매에 나섰던 흔적도 얼마전에 발견되었다.............!
흘러간 지난날은 그시절데로 살아왔고
지금은 현실에 맞추며 살아가지만.......
모두가 부족하고 어렵게 살아왔던 과거의 날들이 왜자꾸만 그리워지는 것일까?
2010년 . 아산 문화유적 답사회 강 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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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곳 부여에도 군산에서 강경 구두레 곰나루까지이어지던뱃길이 하구뚝완공과함께 모든 상선도사라졌지요
요즘들어 4 대강정비한다고 하구뚝을 여니 안여니 심난하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