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이미지를 넘어서
아랍인이라 추정되는 테러리스트들의 세계무역센터와 펜타곤에 대한 카미가제 공격은 세계 테러리즘의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을 연출했다. 솔직히 고백한다면, 나는 CNN이 송출하는 그 이미지의 연극성에 압도되었다. 이 사건의 역사적 의미는 고사하고 테러의 불길 속에서 고통받고 죽어간 죄 없는 사람들의 고통과 비명을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난데없는 재앙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과 그들의 주위를 덮고 있는 숨길 수 없는 공포를 읽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그 이미지의 연극성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많은 동료들을 무너진 건물더미 속에 묻어야만 했던 뉴욕의 노동자계급 출신 아일랜드系 소방관들의 인터뷰는 사건의 비극성을 다시 한번 확인해주었다.
그러나 비극에 대한 공감도 잠시뿐이었다. 펜타곤의 한 벽면을 대형 휘장처럼 뒤덮고 있는 성조기가 상징하는 미국의 천박한 민족주의와 '복수'를 다짐하는 부시의 그 단호한 감상주의가 문제의 해결을 어렵게 만들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어두웠다. 그리고는 이슬람에 대한 다양한 이미지들이 역사적 근거와 합리적 분석의 외양을 띠고 세계 각국의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했다.
보도의 주 내용은 사우디의 백만장자 '오사마 빈 라덴'과 '무자헤딘'이라 불리는 이슬람 전사들, 이슬람 근본주의와 '하마스', '헤즈볼라', '지하드' 등 무장집단의 전투성 등에 대한 것이었다. 아랍系 미국인에 대한 테러가 발생하고 한국에 와있는 무슬림들이 테러의 위협을 느끼고 있다는 가십성 기사들이 그 뒤를 이었다.
나로서는 이들 세계의 언론이 전하는 이슬람에 대한 구체적인 보도들이 사실인지의 여부를 가릴 만큼 전문적인 지식이 없다. 또 중요한 것은 이들 단편적인 정보들의 사실 여부가 아니다. 사실 여부를 떠나, 그것들은 서구 언론이 만들고 싶은 이슬람의 이미지를 구성하는 '그림 맞추기' 조각이라는 데 의미가 있을 뿐이다. 하나 하나의 퍼즐 조각이 무엇이든 간에 이미 이슬람의 이미지가 어떻게 드러나야 한다는 밑그림이 먼저 그려져 있는 것이다.
사이드Edward W. Said의 용어를 빌어 말한다면, 서구 언론의 텍스트 속에서 이슬람이 차지하고 있는 '전략적 위치'는 이미 테러리즘인 것이다. 서구 언론의 담론체계에서 이슬람이 갖는 이 독특한 '전략적 위치'는 다시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코란' 또는 '파괴적이고 잔인한 교리를 지닌 위험한 종교'라는 서구사회의 편견을 확대 재생산한다.
물론 다른 한편에서는 서구가 만들어낸 이슬람의 전투적 이미지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특히 이 반론에도 적지 않은 지면을 할애한 한국 언론들의 일반적인 보도태도는 세계를 이해하려는 한층 성숙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슬람이 '평화'와 '순종'을 의미한다는 뜻풀이에서부터 '聖戰(지하드, Jihad)' 참전을 모든 무슬림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이며, 따라서 모든 이슬람권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테러범으로 의심해서는 안 된다는 서구에 대한 충고, 다른 종교와 문화에 대한 이슬람의 관용적 전통을 지적하고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은 이슬람 권내에서도 평화의 방해자로 인식되는 소외된 세력에 불과하다는 주장,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분쟁에 대한 미국의 편파적 개입이 아랍권의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는 분석 등은 서구가 만들어낸 이슬람의 이미지와는 또 다른 이미지를 독자들에게 제공해 주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서구가 만들어낸 호전적인 이미지와 그에 대한 대항담론이 만들어낸 평화적인 이미지 중 어느 것이 더 이슬람의 본질에 가까운지를 묻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러나 이 이미지 전쟁에서 어느 한 편을 드는 것이 사이드의 방식은 아니다. '동양'에 대한 서구의 담론인 '오리엔탈리즘'이 거짓 임을 드러내고 '동양'의 실체에 대한 진실이 밝혀진다고 해서 오리엔탈리즘이 사라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사이드에 따르면, 오리엔탈리즘은 단지 "유럽-대서양 세력이 동양에 대해 행사하는 권력의 표식"일 뿐이다. 즉 서구의 문화적 헤게모니가 지속되는 한, 형식과 내용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오리엔탈리즘의 재생산구조는 지속된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때그때 만들어지는 이미지가 아니라 그 이미지를 생산하는 구조와 힘인 것이다. 단순한 이미지의 집합이 아닌, 특정한 방식으로 사유과정에 질서를 부여하고 사물을 인식하게 만드는 담론, 즉 '지식권력'으로서의 오리엔탈리즘에 주목하자는 것이다.
사이드의 저서 《오리엔탈리즘》이 이미지를 넘어서 담론적 분석의 준거틀로 작동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이다.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사이드의 문제제기가 옥시덴탈리즘에 대한 문제제기로 이어지는 것도 바로 이 담론의 차원에서이다. 옥시덴탈리즘은 분명히 서구의 헤게모니가 만들어낸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대항 이미지를 생산한다. 오리엔탈리즘이 '동양'을 타자화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구하고자 했던 '서양'의 담론이라면, 옥시덴탈리즘은 '서양'을 타자화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세우고자 했던 '동양'의 담론이다.
'서양'과 '동양'의 이미지가 서로 자리바꿈을 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는 한 동전의 양면이다. 그것은 옥시덴탈리즘이 '동양(the Orient)'과 '서양(the Occident)'의 존재론적/인식론적 구분이라는 오리엔탈리즘의 사유방식을 모방하기 때문이다. 옥시덴탈리즘과 오리엔탈리즘이 담론 행위에서는 역설적인 관계를 구성하지만 이데올로기적 전략과 기술을 공유한다는, 《옥시덴탈리즘》의 저자 샤오메이 천의 지적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서구에 맞서 자신의 독자적 정체성을 구하고자 했던 제3세계 민족주의의 시도가 오리엔탈리즘의 덫에 걸려 고도화된 '유럽중심주의'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민족주의의 슬픈 역설을 이해하는 열쇠도 여기에 있다. "동양을 지배하고 재구성하며 그리고 위압하기 위한 서양의 스타일"이라는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정의가 서구의 제국주의 또는 문화적 식민주의에 대한 단선적 비판을 넘어서, 서구의 역사적 경험을 모델로 재구성된 민족주의적 발전전략에 대한 비판의 중요한 준거 틀로 작동하는 것이다. 이 글이 목표하는 바는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해설이 아니다.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을 양 축으로 형성되어 있는 한국의 담론질서에 대한 도전적 문제제기를 위해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전유하는 것이 이 글의 의도이다.
II. 오리엔탈리즘: '서양'의 '동양' 만들기
19세기 말 한국을 방문한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 여사의 기행문은 여러 모로 흥미롭다. 역자가 한국어판 후기에서 잘 밝히고 있듯이, 식생활, 요리, 양념, 한국식 빨래방식, 결혼식과 장례식의 습속, 기생과 무당 등의 일상생활에서부터 정치와 경제에 이르기까지 구한말의 한반도에 대해 이처럼 세세하고 치밀하게 기록한 자료는 거의 전무한 편이다.
그러나 비숍 여사의 기행문이 일체의 편견을 배제한 채 구한말 한반도 주민들의 삶을 실증적으로 엄밀하게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여사는 이미 이 기행문 서론의, "한국인들은 대단히 영민하고 똑똑하다"고 언급한 바로 그 단락에서 "한국인들은 외국인에 대해 의심, 교활함, 진실성 없음 등의 동양적 악덕을 보여준다"고 거리낌없이 쓰고 있다. 문명 對 야만이라는 '서양'과 '동양'의 이분법이 비숍의 시각에도 어김없이 관철되고 있는 것이다.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은 특히 그녀가 직접 만난 살아 움직이는 하나 하나의 구체적인 사람들이 아니라, '한국인' '한국사람' '한국남자' '한국여자' 등의 집합명사에 이르러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한국인' 또는 '한국남자'라는 집합명사로 획일화되는 운명에서, '키가 크고 강인하고 멋있고 귀족적인 풍모의 노인인' 마포 나루터의 뱃사공 김씨 또한 예외는 아닌 것이다. 유럽의 기준으로 구한말 한반도 주민들의 삶을 재단하려는 유혹에 완강히 저항하고 따듯한 눈길로 날카롭게 사람 사는 모습들을 그려내고 있지만, 또 조선을 둘러싼 서구 열강의 염치없는 제국주의적 각축에 대해 비판의 눈길을 던지고 있지만, '서양'과 '동양'을 나누고 '동양'을 타자화하는 오리엔탈리즘의 시선에서 비숍도 자유롭지는 못했던 것이다.
'서양'과 '동양'을 나누고 서구우월주의의 시각에서 '동양'을 타자화한 예는 고대 그리스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즐겨 사용한 '바르바로스barbaros'라는 용어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뜻하는 것이었다. 기원전 5세기 이전까지 그것은 순전히 언어의 문제였지, 非그리스 세계를 의미하는 말은 아니었다. 호머의 詩세계에서 트로이인들을 타자화하는 방식은 결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바르바로스'가 非그리스 종족을 뜻하는 용어로 전화된 것은 기원전 472년 아이스킬로스Aeschylus의 희곡 《페르시아Persae》에 이르러서였다.
페르시아 전쟁을 거치면서 페르시아에 대항하는 全그리스의 단결과 델로스 동맹을 이끄는 아테네의 헤게모니를 정당화하기 위해 '바르바로스'의 의미가 새롭게 발명된 것이다. 아이스킬로스는 아테네 민주정의 가치에 대립되는 타자성을 페르시아적 성격으로 규정했다는 점에서 오리엔탈리스트의 원조였다. 이것은 흔히 자연스러운 것처럼 생각되는 종족적 정체성조차 이미 고대에서부터 정치적 필요에 따라 발명되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즉, 가치판단이 배제된 자연적 '차이'가 이데올로기적 가공을 통해 정치적 의미를 지닌 '차별'의 담론으로 전화한 것이다.
차별의 담론에 기초하여 '동양'과 '서양'을 나누고, '상상의 지리'로서의 '동양'의 본질적인 모티브는 중세 기독교 성직자들과 대학의 교육과정을 통해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유럽은 강하고 명석하며, '동양'은 공포와 황폐, 악마적인 야만인의 무리로 상정되는 뿌리깊은 전통이 있었던 것이다. 18세기말~19세기초에 형성된 근대 오리엔탈리즘 또한 같은 맥락에 서 있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침공에서 시작된 그것은 '상상의 지리'로서의 '동양'에 대한 관행적 편견을 근대 학문의 방법론과 개념 틀을 활용하여 체계화하고 학문적 '진리'로 승화시켰다는 점이다.
사이드가 열거하는, 버젓이 '진리'로 행사해 온 공인된 착각의 목록, 즉 '동양'의 '표상'은 지리할 정도로 길다. "유럽인이 타고난 논리학자라면, 동양인은 정확성을 결여하고 있다. 둔감하고 의심이 많으며 상습적 거짓말쟁이인 동양인의 심성은 앵글로-색슨 인종의 명석함, 솔직함, 고귀함과 대조된다. 비합리적이고 열등하며 유치한 동양인은 합리적이고 도덕적이며 성숙한 정상적 유럽인에 비하면 비정상이다" 등등. 이것은 자연히 '동양'을 현재의 야만상태에서 구출하고, 근대 '서양'이 '동양'의 이익을 위해 '동양'을 가르쳐야 한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편견과 착각이 진리로 공인 받을 수 있었는가? 이 마술을 가능케 해준 것은 무엇보다도 帝國의 권력이다. 제국은 군대의 무력 사용이나 억압적인 행정기구와 조세제도만으로 유지되기 어렵다. 유지비용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이다. 문화적 헤게모니를 행사하는 제국은 식민지인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현명하다. 식민지인들이 문화적 헤게모니에 종속될 때, 그것은 제국에 대한 자발적 복종으로 이어지며 통치비용을 절감한다. 즉 '상상의 지리'로서의 '동양' 만들기는 식민지 민중의 길들이기와 동전의 양면인 것이다.
사실상 만들어진 '동양'에 대한 편견은 제국주의자들만이 공유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지식권력의 메커니즘을 통해 식민지 피지배자들에게도 자연스럽게 침투하여, 제국의 지배를 매끄럽게 해준다. 알제리 식민지 민중의 심성에 대한 프란츠 파농Franz Fanon의 정교한 정신분석과 포스트 콜로니얼리즘Postcolonialism에서 이야기하는 '의식의 식민화' 과정이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과 만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에서이다. 그것은 곧 만들어진 '동양'에 대한 담론이 식민지 민중의 길들이기로 전화하는 메커니즘에 대한 분석인 것이다.
식민지 동양에 대한 제국의 담론을 구성하는 오리엔탈리즘은 이처럼 제국의 문화적 헤게모니를 구성하는 주요한 축이다. 제국의 지배체제는 물리적 억압 기제뿐만 아니라, 자신을 유연하게 재생산하는 문화적 기제를 갖는다.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은 제국의 헤게모니 시스템의 후자에 주목한다. 이것은 그람시Antonio Gramsci의 헤게모니論, 푸코Michel Foucault의 지식권력, 레이몬드 윌리엄즈Raymond Williams의 문화적 마르크스주의에서 사이드가 이끌어 낸 통찰이다.
오리엔탈리즘의 문화적 헤게모니에 대한 사이드의 통찰은 다시 그것이 식민지 지배를 사후적으로 합리화하고 추인하는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앞서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함으로써 식민주의를 추동하는 힘이었다는 문제의식과 조우한다. 《문화와 제국》에서 사이드는 "제국이 예술을 따르는 것이지, 예술이 제국을 따르는 것은 아니다"라는 레이놀즈Joshua Reynolds의 말을 인용함으로써, 실재의 반영이 아니라 실재를 규정하는 지식권력으로서의 오리엔탈리즘 담론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에 대한 言述들에 질서를 부여하고 조직하는 규칙인 '담론구성체'의 차원으로 격상된다. '서양'의 문화적 헤게모니는 결국 제국의 상부구조에서 제국의 질서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것을 만들어내는 현실적 힘인 것이다.
《오리엔탈리즘》에서 사이드가 꾀하는 것은 결국 근대 서양이 구축한 진리에 대한 반란이다. 학문적 진리라고 주장해 온 오리엔탈리즘이 실은 편견과 착각의 산물임을 드러내자는 것이다. 그것은 서양이 독점한 학문적 헤게모니를 거부하려는 몸짓이며, 서양이 주도한 근대 문명에 대한 거역이다. 사이드에게는 '동양'에 대한 마르크스의 담론 또한 가차없는 부정의 대상이다.
식민지 지배에 고통받는 인도 민중의 참상에 대한 따듯한 시선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의 경제분석은 표준적인 오리엔탈리즘의 시도와 완전히 합치된다는 것이 사이드의 분석이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인도의 민족주의자들이나 자유주의자들의 공격이 영국의 인도지배에 대한 마르크스의 글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동양'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전이 낭만적 오리엔탈리즘에 불과하다는 사이드의 지적은 쉽게 반박하기 어렵다.
《Journal of Asian Studies》가 조직한 사이드에 대한 심포지엄에서 데이빗 콥프David Kopf 같은 서양의 동양학 연구자들이 서양의 동양학 연구를 왜곡하고 오염시키는 선동적인 책이라고 반발한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이들은 〈벵갈 아시아학회Asiatic Society of Bengal〉(1784)의 활동 등을 예로 들면서, 영국의 오리엔탈리즘이 인도인들에게 토착적 정체성을 되찾게 함으로써 오히려 벵갈 르네상스에 기여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요컨대 벵갈 르네상스로 대변되는 인도인들의 민족적 자각은 영국의 식민지 경험을 통해서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이드가 다루는 오리엔탈리스트들은 서양우월주의의 편견에 가득 찬 매콜리Thomas Babington Macaulay 같은 反오리엔탈리스트이지, 진정한 오리엔탈리스트는 아니라는 것이다.
<벵갈 아시아학회〉의 초대회장을 지낸 존즈William Jones를 비롯한 초기의 영국 오리엔탈리스트들은 사실상 인도의 토착문화를 사랑하고 그에 동화된 식민지 관리였다는 점에서, 콥프의 지적은 일정한 타당성을 지닌다. 그러나 존즈 등으로 대변되는 진정한 오리엔탈리즘이 유럽중심적 제국주의와 대척점에 서있다는 주장은 지나치게 피상적이다.
인도의 토착적 정체성을 찾으려는 오리엔탈리스트들의 노력이 인도의 근대화 운동에 기여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유럽중심주의의 혐의에서 벗어나는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근대성'을 낳은 유럽의 역사적 경험을 보편적인 '대문자 역사'로 설정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나머지' 사회의 발전 여부를 판단한다는 점에서 자신이 여전히 유럽중심주의의 인식론적 틀에 갇혀 있음을 스스로 고백한 것일 뿐이다.
그것은 다시 서양의 지배를 벗어나고자 하면서도 서양을 따라야 할 모델로 간주하는 식민지인들의 이중성이 배태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주변부 지식인들이 유럽의 '근대성'을 합리성, 과학, 이성, 진보 등의 개념과 등치시키고 또 따라야 할 典範으로 간주하는 한, 이 이중성은 불가피한 결과이다. 정치적으로는 서양을 철저하게 배격하면서도 인식론적으로는 유럽중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식민지 민족주의의 이중성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투쟁이 정치권력의 차원을 넘어서 문화권력과 지식권력의 차원에서 동시에 전개되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세계사의 관점에서 보면, 사이드의 문제의식은 결국 주변부 지식인들이 '근대성'을 어떻게 전유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이어진다. 오리엔탈리즘의 '동양' 만들기에 대한 저항담론으로서 옥시덴탈리즘의 '서양' 만들기도 실은 '근대성'을 전유하는 주변부의 독특한 전유방식으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III. 옥시덴탈리즘: '동양'의 '서양'만들기
"동양을 지배하고 재구성하며 그리고 위압하기 위한 서양의 스타일"이라는 사이드 자신의 정의에도 불구하고, 오리엔탈리즘이 타자화하는 것은 비단 식민지 민중만이 아니다. 자기 사회의 자본주의 근대문명에 적응하지 못하고 배제된 서양의 민중들 또한 오리엔탈리즘이 겨냥하는 또 다른 '타자화'의 대상이다.
예컨대 농업의 전통적 생활리듬 때문에 자본주의의 시간이나 공장노동의 규율에 적응하지 못하는 '게으르고 무능한' 노동자들, 근대 국가의 '국민화 전략'에서 배제된 여성들, 근대 자본주의 국가권력이 '비정상'이라고 못박은 모든 주변인들 또한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유럽의 시민들과 구분되는 유럽의 '타자들'이었다. '동양적 정체성'은 자본주의에 적응하지 못하여 근대 권력에 버림받은 서양의 주변인들에게 부여된 속성이었던 것이다. '상상의 지리'로서의 동양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다발은 이처럼 서양의 근대권력이 배제하고자 했던 내외의 요소들이었다.
오리엔탈리즘은 요컨대 식민지뿐만 아니라 본국을 규율하기 위한 제국의 권력담론이었던 것이다. 오리엔탈리즘이 이처럼 식민지와 본국의 주민들을 동시에 규율하는 제국의 권력담론이었다면, 옥시덴탈리즘은 주변부의 권력담론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제국 서양의 주민들을 사실상 배제한 채 주변부 자기 사회의 주민 길들이기라는 점에서, 옥시덴탈리즘의 '서양' 만들기는 오리엔탈리즘의 '동양'만들기와 차원을 달리 한다.
즉 그것은 '서양'에 대한 '동양'의 우위를 주장하기는 하지만, '서양'에 대한 '동양'의 문화적 헤게모니를 뒷받침할 만한 물적 토대가 없는 허약한 담론에 불과한 것이다. 제국식민지 관계가 역전되지 않는 한, 서양에 대한 '동양'의 문화적 헤게모니는 불가능한 꿈이다. 따라서 옥시덴탈리즘이 만들어낸 '서양'은 궁극적으로 타자화된 '서양'을 반면교사로 자기 사회내부의 민중을 규율화하고 지배하려는 주변부 엘리트들의 상상력에 의해 연역된 것이다.
서양 문명의 기원을 아프리카의 독창성에서 찾는 '아프리카 중심주의'나 '세계의 시골'을 구성하는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가 서양 제국주의 도시들을 포위하여 승리한다는 도식의 '마오쩌둥주의' 등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그러나 문제는 '서양'에 대한 '동양'의 우위를 주장하기 위해 고안된 옥시덴탈리즘이 그 출발에서부터 이미 오리엔탈리즘의 유럽중심적 담론의 헤게모니에 포섭되어 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다. '주어'와 '술어'만 바뀌었을 뿐, 옥시덴탈리즘의 이데올로기적 기술이나 담론전략은 오리엔탈리즘과 지나치게 닮은 꼴이다. 이 점에서 옥시덴탈리즘은 오리엔탈리즘의 의붓자식이다.
버널Martin Bernal의 《검은 아테네: 고전문명의 아시아적 뿌리Black Athena》(1987)에서 보듯이, 고대 그리스 문명이 아프리카에서 비롯되었다는 식의 아프리카 중심주의는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진정한 거부나 대안이라기보다는 단순한 반작용일 뿐이다. 우선 고대 이집트 문명이 현대 아프리카와 연결될 지도 의문이지만, 더 큰 문제는 유럽중심주의의 큰 틀 속에 갇혀있는 아프리카 중심주의라는 것이다. 즉 그것은 단지 유럽의 역사적 기억을 아프리카의 역사적 기억으로 탈바꿈했을 뿐, 이미 '서양'의 고전․고대를 하나의 보편적 문명으로 설정한다는 점에서 유럽중심주의와 결을 같이 하는 것이다.
한반도 문명의 시원을 바이칼호에서 내몽골에 이르는 중앙아시아로 잡고 고대 그리스문명도 바로 이 한반도 문명의 시원에서 비롯되었다는 독특한 민족주의적 역사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그 역사관은 한민족의 뿌리를 찾아 멀리 몽골이나 중앙아시아의 奧地로 원정을 가거나 낙후된 후진 사회를 이그조티즘exotism의 시각에서 타자화함으로써 전형적인 서구 제국주의의 전략을 모방한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를 통해 대중화된 바 있다. 우선 카자흐스탄이나 몽골 등에 대한 한국의 '亞오리엔탈리즘suborientalism'을 드러낸다는 점이 지적되어야겠지만, 이 호전적 민족주의 역사관이 안고 있는 '서양' 콤플렉스라는 역설도 흥미롭다.
"시골에 혁명기지를 구축해 농촌으로 도시를 포위한다"는 마오쩌둥의 反도시주의도 서양의 담론에 의지한다는 점에서 예외는 아니다. 일차적으로 그것은 전원적 이상에 대한 뿌리깊은 애착과 서양 제국주의자들 및 그 하수인인 도시 지식인들의 공간인 도시에 대한 깊은 불신을 담고 있다. 그러나 마오이즘에 대한 마이즈너Maurice Meisner의 분석이 잘 보여주듯이, 마오쩌둥의 반도시주의도 부분적으로는 루소Jean Jacque Rousseau의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그것은 도시를 모든 사회적 사악함과 도덕적 타락의 상징으로 간주하는 서양의 지적 흐름과 맞닿아 있는 것이다. 마오주의자들의 옥시덴탈리즘 또한 '서양'에 대한 완강한 부정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지적 전통에 기대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아닌가 한다.
더 중요하게는 서양에 대한 안티테제로 제시된 마오이즘의 '제3세계' 혁명론 자체가 유럽중심주의의 인식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서양/비서양'이라는 二項대립에 의거한 '제3세계'에 대한 본질주의적 접근은, 사실상 근대 유럽이 만들어낸 진보와 근대화라는 잣대에 따라 '서양제1세계'가 더 발전된 단계에 위치하고 있다는 인식을 밑에 깔고 있다. 타락한 물질문명의 '서양'에 대항하여 건강한 정신적 공동체로서의 '제3세계'를 내세우는 논리 자체가 이미 유럽의 역사적 경험을 보편적 기준으로 삼는 유럽중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그것은 아프리카 중심주의와도 닮은꼴이다.
'서양' 만들기를 통해 옥시덴탈리즘이 강조하는 '동양'의 전통은 사실상 역사에서 객관적 실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적인 해석작업의 결과였다. 기든스Anthony Giddens의 표현을 빌면, "전통은 여러 세대에 걸쳐 지속된다는 단순한 사실에서가 아니라, 현재를 과거에 얽어매는 끈을 확인하기 위해 수행되는 끊임없는 해석 작업으로부터 도출된다"는 것이다. 근대성과 전통이 제휴하는 것도 바로 이 해석 작업 안에서이다. 19세기 말 이래 주변부․식민지에서 정비된 전통 양식의 음악이나 무용, 가극 그리고 민족사national history 등은 서양과의 접촉이 없었다면 사실상 확립되지 않았을 발명된 전통이다.
그것은 요컨대 서양의 룰에 따라 재단된 자기 문화의 독자성과 고유성을 서양인에게 보여주기 위해 촉발된 측면이 적지 않다. 서양의 논리를 모방하여 제국의 논리를 부정하고자 했던 것이다. 즉 서양에 대한 모방과 반발의 묘한 力學 속에서 서양의 담론체계에 기대어 고유한 역사상과 전통문화가 창출된 것이다. 전통은 모더니스트의 담론 구조 속에서 재구성된 이미지이며, 그래서 근대성이 배제된 전통은 있을 수 없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에서이다. '동양'의 전통은 어디까지 '서양'이 낳은 근대적 사고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이 역설은 민족적 전통과 독자성을 강조하는 한국의 민족주의 역사학에서도 잘 나타난다. 자본주의적 근대사회로 나아가는 동력이 조선 사회 내부에서 준비되고 있었다는 자본주의 내재적 발전론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正體性論과 他律性論이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타자화하는 일본식 오리엔탈리즘 담론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조선의 자본주의적 맹아를 강조한 내재적 발전론은 그에 대한 대항담론이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식민주의가 이식한 이성과 진보의 담론 틀에 갇힌 것이었다. 즉 그것은 자본주의적 근대를 따라가야 할 준거로 설정함으로써 식민주의의 인식틀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주변부의 민족주의 역사학 일반이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다. 인도의 민족주의 사학 또한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도사의 발전 과정을 자본주의에 기초한 근대 민족국가로 나아가는 기획으로 간주한다. 인도의 민족주의 역사학이 결과적으로는 오리엔탈리즘의 시각을 공유한다는 프라카쉬Gyan Prakash의 지적은 이 점에서 타당하다. 주변부의 민족주의 역사학은 피식민자의 전통과 기원을 활용하여 식민주의에 저항하고자 했지만, 근대를 모방하려는 욕망의 포로가 됨으로써 서구중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오리엔탈리즘과 마찬가지로 옥시덴탈리즘도 서구중심주의의 자식인 것이다.
그러나 옥시덴탈리즘이 갖는 인식론적 한계를 드러내거나 '진실'과 '허구'를 가늠하는 데 그친다면, 그 논의는 지나치게 일면적이다.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옥시덴탈리즘의 담론이 누구를 위해서 어떻게 사용되는가 하는 한반도의 정치적 문맥에 대한 이해이다. 예컨대 '공산주의=서구사상=북한=전통 말살'이라는 등식으로 요약되면서 반공주의와 결합된 남한의 옥시덴탈리즘이 反共규율사회를 뒷받침하는 지식권력이었다는 점은 누구의 눈에도 자명하다. '美제국주의=서구문명=남한=매국노'라는 등식으로 이어지는 북한의 옥시덴탈리즘 또한 주체사상과 결합되면서 상시적인 전시동원체제를 가동하는 권력담론이었다.
즉 남․북한의 옥시덴탈리즘은 각각 '레드 콤플렉스'와 '양키 콤플렉스'를 확대 재생산함으로써 사회의 심층에서 권력 엘리트의 지지기반을 만들어내는 담론체제였던 것이다.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한 남한 민중의 요구는 서구의 小兒病的 개인주의의 발로라고 且置차치되었으며, 脫스탈린주의와 개인우상화를 비판하는 북한 반체제 지식인들 또한 비주체적인 사대주의자로 간단하게 매도되었다. 또 남과 북의 옥시덴탈리즘은 서구식의 갈등과 투쟁 대신에 덕과 관용, 지도자에 대한 情과 존경, 충성과 효도 등을 요구하고 민족을 영원한 생명체로 보는 유기체적 민족관을 공유하였다. 이는 大我에 대한 小我의 헌신이라는 명분으로 당당하게 민중의 자기희생을 요구하는 권력의 논리로 이어졌다.
옥시덴탈리즘의 담론이 이처럼 누구를 위해서 어떠한 방식으로 행사되었는가 하는 구성주의적 문제제기에 이르면, 옥시덴탈리즘은 서양을 겨냥하기보다는 자기 사회의 내부를 겨냥하고 있다는 점이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즉 옥시덴탈리즘의 '서양' 만들기는 타자화된 서양을 반면교사로 하여 '동양' 내부의 구성원들을 길들이려는 정치적 목적에서 촉발되었던 것이다. 사이드의 문제제기가 제국의 문화적 헤게모니에 대한 저항 담론뿐만 아니라, 주변부 사회 내부에서 토착 권력엘리트들이 행사하는 지식권력에 대한 저항 담론의 형식과 내용을 다시 생각하게 해주는 것도 바로 이 지점에서이다.
IV. 본질주의에서 구성주의로
오리엔탈리즘이 제국주의적 목적을 위해 '동양'을 타자화했다면, 옥시덴탈리즘은 근대국가를 향한 동원체제를 합리화하기 위해 '서양'을 타자화했다. 만들어진 '동양'과 만들어진 '서양'을 고정불변의 실재인 양 경계짓는 이분법은, '동양'과 '서양'에 대한 본질주의적 정의를 고착시키고 또 그렇게 고착된 본질주의적 정의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동양'과 '서양'에 대한 개념의 고정화는 결국 하나의 추상으로 전락하여 살아서 생동하며 끊임없이 변모하는 사회적 실재를 그 추상 속에 가두어버린다.
'동양이란 무엇인가?' 또는 '서양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주의적 질문은 사실상 덧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본질주의적 질문에 시선이 고착되면, 그러한 개념이 사용되는 구체적인 역사적 맥락이나 상황들 또 그 속에서 작동하는 복잡다단한 정치적․문화적 함수들을 놓치기 십상이다. 더 중요하게는 '동양'과 '서양'의 만들어진 그 본질 밑에 숨어있는 지식권력의 작동방식을 간과하게 된다는 점이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동양'과 '서양'의 개념이 어떠한 역사적 맥락에서 누구에 의해서 만들어졌으며, 또 그것은 시민사회에서 어떻게 소비되고 있는가 하는 구성주의적 시각이 요구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자명하다고 생각하는 '동양'과 '서양'이 누구에 의해서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파악할 때, 비로소 세계사와 지역사의 차원에서 진리의 이름으로 은밀하게 규율을 강요해온 동․서양 지식권력의 작동방식이 수면 위로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진리란 그것이 착각임을 망각하게 된 착각"이라는 명제는 오리엔탈리즘에도 또 옥시덴탈리즘에도 망각하지 않고 적용되어야 할 '진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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