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작곡가, 편곡가, 프로듀서…. 재일동포, 의사 출신 음악가로 올해 한국 데뷔 11년을 맞이한 양방언(50) 씨는 음악에 관련된 일이라면 안 해본 것이 없다. 그는 30년 전 ‘음악으로 먹고 살겠다’는 굳은 각오로 의사의 길을 포기했기에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는 그 어느 것도 소홀하지 않았다. 이런 그가 올해 봄 즈음부터 석 달 동안 일본 가루이자와에 위치한 자택에서 어린 시절 일기장을 들추듯 에세이를 썼다. 그동안의 음악 인생을 되돌아보고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고 싶어서다.
꽹과리와 장구, 북이 흥겹게 어우러져 장단을 맞추면, 이어 구성진 음색의 태평소가 힘껏 우리 음악의 멋을 뿜어낸다. 국악인가 싶어 계속 듣고 있으면 현악기와 피아노의 화음이 합세해 연주는 독특하면서도 정겹다. 국악기와 서양 악기의 편성으로 우리나라의 멋을 유쾌하게 표현한 〈프런티어!〉는 ‘양방언’ 이라는 이름을 우리에게 각인시킨 대표 작품. kbs 다큐멘터리 〈차마고도〉 〈도자기〉, 영화 〈천년학〉, 게임음악 〈아이온〉, 애니메이션 〈십이국기〉와 각종 CF 음악 등 그가 우리나라에서 해온 작업은 대부분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1년에 두어 번 한국을 찾아 공연하고, 정기적으로 솔로 앨범을 발매한 덕에 그의 음악은 우리에게 꽤 친숙하다. 하지만 그는 “‘사람 양방언’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은 별로 없어 책을 쓰고 싶었다”고 한다. 그가 《프런티어, 상상력을 연주하다》를 쓰게 된 가장 큰 이유다. 도쿄에서 나고 자란 양방언 씨는 현재 도쿄에서 신칸센으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가루이자와에서 아내와 개 ‘러브’와 함께 살고 있다. 그가 이번 에세이 발간으로 서울에서 1주일간 머문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인터뷰하기 위해 만났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양방언입니다”라며 인사를 건네는 그의 말투는 우리의 어감과는 조금 달랐다. 그러더니 “아직은 한국말이 서툽니다. 이해 부탁합니다”라고 했다. 그는 무려 400쪽이나 되는 에세이집을 어떻게 쓴 걸까. “제가 일본어로 쓴 원고를 한국어로 번역했습니다. 처음에는 제 인터뷰를 바탕으로 다른 사람이 책을 쓰는 방법도 생각했었는데, 제 이야기니까 제가 직접 쓰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죠. 저는 음악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책을 쓴다고 해서 하루 종일 원고에만 매달릴 수는 없었어요. 에세이를 쓴 석 달동안 평소처럼 작품을 만들거나 음악 관련 일을 하면서 틈틈이 원고를 썼습니다.” 그의 에세이는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그의 가족 이야기를 포함해 그가 처음 음악을 배운 어린 시절부터 의사와 음악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던 갈림길, 가라오케용 ‘엔카’의 반주를 녹음하던 어렵던 시기, 세계를 누비며 활동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삶을 담백하게 담았다. 누군가와 소통하는 일만큼 가치 있는 일은 없다
“보통 스튜디오에는 창문을 만들지 않습니다. 꼭 음향 때문만은 아니고 음악 하는 사람들이 만든 일종의 규칙이에요. 밤낮 없이 음악에만 몰두하려는 거죠. 하지만 가루이자와의 제 스튜디오는 1층에 있고, 심지어 커다란 창문도 만들었습니다. 우거진 숲과 산을 바라보며 자연의 이치대로 일하고 싶었거든요. 밝을 때 일하고 어두워지면 쉬려고요.” 도쿄에서 30년 이상 살다가 가루이자와로 이사한 까닭도 ‘녹음과 더 가까이 지내고 싶어서’라고 한다. 자신이 기르는 개 ‘러브’와 동네 한 바퀴를 돌고 풀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일상이 그가 원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이런 취향은 그의 음악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기계음을 섞든 민속악기와 관현악을 편성하든 어떤 조합의 음악을 만들어도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흐름을 들려준다. 이것이 그의 음악을 대표하는 특징이자 매력이다. “가끔 도시가 그리울 때면 도쿄에서 친구를 만나 미술관이나 공연장에 갑니다. 그리고 술 한잔하면서 사는 이야기를 나누죠. 무언가를 창조하는 사람은 자신의 세계도 잘 일궈야 하지만 다른 사람과 교류하는 것도 중요하니까요.”
런던 애비 로드 스튜디오에서 그의 녹음 파트너인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작업 중인 모습.
‘음악’을 위해 의사로서의 안정된 미래와 가족도 포기하고 단돈 5만 엔(약 60만 원)을 든 채 야반도주했던 20대 중반의 양방언 씨. 당시 그의 아버지는 조총련계 학교의 주요 후원자일 정도로 성공한 의사, 형과 누나들은 일본 대형 병원의 의사와 약사로 활동하고 있었고, 그 역시 일본의과대학 졸업 후 마취과 의사로 1년간 근무하다 도쿄대학병원 정형외과에 취직한 상태였다. 그에게 “대체 음악이 당신에게 어떤 의미이기에 그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는가?”라고 묻자 그는 “아직도 모른다”라며 웃는다. “그저 음악이 저를 끌어당겼을 뿐이에요. 전 음악이 좋아요. 정말 좋고, 또 좋아요. 의사 생활을 계속했다면 지금 교수가 되어 있지 않을까요?.(웃음) 제 성격상 개원해서 바쁘게 지내는 일은 못했을 것 같고, 학교 어디선가 조용히 무언가 일을 벌이고 있었겠죠. 주말이면 술집에서 ‘난 예전에 음악을 할 수 있었는데’라는 옛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요. 그게 싫었어요. 음악을 하고 싶었지만 못했다는 변명을요.”
양방언 씨가 1년 중 가장 바쁜 달은 8~9월이다. 일본에서는 NHK와 영상음악 작업을 주로 하는데, 방송국 개편이 보통 10월이라 여름휴가는 늘 놓치는 편이다. 하지만 중화권과 미국, 유럽 등지를 돌면서 작업하기에 특별히 여행에 대한 갈망은 없다. 집을 비우는 시간이 많아 아내에게 잔소리를 듣기는 하지만…. 10년 연애 끝에 결혼한 그의 아내는 그에게 없어서는 안 될 음악 멘토다. 가령 그가 작곡한 선율을 들려주면 “좋다” “별로다”라는 식으로 의견을 말하는데 이것이 양방언 씨에게는 큰 도움이 된다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가족회의를 통해 북한 국적을 대한민국으로 바꾸었습니다. 가장 처음 가본 곳은 제주도예요.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고향, 제주도 이야기를 하도 들어서인지 낯설지 않더라고요. 무엇보다 내 민족을 만나 소통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행복합니다.” 올해 한국 데뷔 11년을 맞는 양방언 씨. 처음에는 걱정도 많았다고 했다. 자신의 음악을 한국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조바심도 있었고, 조총련계 학교를 다녀 북한말에 익숙한데 사람들과 어색하지 않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지도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그는 한국에서 첫 데뷔 무대에 올라간 순간, 모든 것이 기우였음을 깨달았단다. “우리나라 관객과 음악으로 소통할 수 있었다”는 그에게 그걸 어떻게 확신하는지 물었다. 그는 “음악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재주를 갖고 있다”며 웃는다. 그렇게 소원하던 한국에서의 활동은 솔로 앨범이나 공연뿐 아니라 다큐멘터리, 게임음악,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분야로 확대됐다. 요즘은 대형 뮤지컬음악 작업을 맡아 진행 중이다. “〈차마고도〉 영상을 보고 전율을 느꼈어요. 각 장면에 어울리는 선율을 상상하면서 하나하나 설명을 들었죠. 전 작곡할 때 메모하지 않아요. 그저 순간의 영감을 이미지로 기억해요. 그래서 까먹을 때도 많지만요.(웃음) 실제로 작업할 때는 사진을 보듯 당시를 떠올리며 작업하곤 해요.” 그는 의대에 진학한 후 아마추어 밴드에서 활동하고, 의사를 그만둔 후에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엔카’ 반주 녹음도 했다. 또 그의 실력을 인정한 일본 대형 기획사의 주선으로 홍콩 유명 밴드 ‘비욘드’와 성룡의 영화음악 등 세계를 무대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해보지 않은 일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모든 악기를 잘 다루거나 전문가라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음악으로 누군가를 설득시키고 감동을 주려면 제가 음악 경험이 많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뿐입니다.” 그는 “지금 세상에 필요한 음악은 창문을 열어 환기하듯, 누군가의 마음과 영혼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어주는 것”이라고 한다. 그는 오는 10월 23일 다시 서울을 찾아 <그랜드 민트 페스티벌 2010>의 무대에 선다. 누군가의 마음에 신선한 공기를 불어넣어주기 위해, 또 그토록 음악을 좋아하는 자신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