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근대 민족운동은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에 맞선 독립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즉, 1894년부터 시작된 동학농민의 혁명전쟁과 그 이후의 의병전쟁이 모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국권을 지키고자 했던 민족운동의 출발이었다. 이후 20여 년 간 계속된 의병 전쟁은 흔히 4시기로 나누어 진다. 1895∼1896년의 전기(乙未) 의병과 1904∼1907년 7월의 중기(乙巳) 의병, 1907년 8월∼1909년 10월의 후기(丁未) 의병, 그리고 1909년 11월∼1915년의 전환기(의병에서 독립군으로 전환) 의병이 그것이다.
의병의 정신은 의로운 길을 가기 위해 일신의 안위를 모두 내놓았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대한제국 정부가 존재할 때에도 정부군과 일본군으로부터 쫓기는 폭도(暴徒)였고, 국권이 일제에게 늑탈(勒奪)당한 후에는 망국민으로써 떳떳이 죽기 위해 모진 탄압을 헤쳐나간 힘찬 발걸음이 의병의 길이요 정신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정신은 의병전쟁이 종료된 후에도 30여 년 간 지속된 독립운동의 사상적 흐름으로 도도히 작용할 수 있었다. 이들의 맥을 이은 것이 1920년대의 독립군(獨立軍)이었고, 의열투쟁의 의열사(義烈士)들이었으며, 1940년대의 광복군(光復軍)이었다. 물론 독립운동의 사상적 배경이 의병전쟁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쓰러져 가는 나라를 개혁하기 위해 애썼던 구국계몽운동(救國啓蒙運動)도 국치(國恥) 이후 독립운동 노선의 확대에 큰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일신의 안위(安危)를 뒤로 한 채 국권을 침탈해 오는 강력한 적, 일제(日帝)에 맞서 보잘 것 없는 무기로 항쟁하였던 의병의 정신이야말로 독립운동의 큰 줄기를 이루었던 것이다.
○ 1. 전기의병전쟁과 과천
○ 2. 후기의병전쟁과 과천
▣ 1. 전기의병전쟁(前期義兵戰爭)과 과천(果川)
전기 의병전쟁의 시점을 1895년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 시각이다. 갑오농민전쟁(1894)을 구실로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킨 일제가 친러파(親露派)의 득세를 꺽고 한반도에서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명성왕후 민씨(明成王后閔氏)를 시해(弑害)하자, 그 해 음력 10월(양력 11월) 충청도 보은(報恩)의 문석봉(文錫鳳)이 기의(起義)하여 보은 장터에 ‘토왜창의(討倭倡義)’의 격문을 붙이고, 회덕(懷德)으로 진격하여 관아를 습격, 무장하고 의병전쟁에 돌입한 것이 그 시초가 된다.【주】1) 이 밖에도 김이언(金利彦)·김규진(金奎鎭)·김창수(金昌洙: 金九)의 압록강(鴨綠江) 남북연안 의병이 1895년 11월에 국모시해의 원수를 갚기 위해 강계(江界)읍으로 진공하여 관군과 접전하였으며, 서울에서는 음력 8월말 경부터 토왜창의의 격문이 거리곳곳에 나붙는 등 전국 각지의 유생(儒生)과 농민들의 일제를 타도하기 위한 의논이 분분하였다.
이와 같이 시작된 전기 의병의 특징은, 첫째 1894년의 갑오농민전쟁 실패 후 농민군으로 참전하였던 잔존세력들이 의병에 다수 가담하였던 것과 둘째 존왕양이(尊王攘夷)와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전통적 유교사상으로 무장한 유림(儒林) 출신들이 의병 진영을 주도하였다는 점이다.
과천과 관련이 되는 전기 의병의 활동으로는 1895년 음력11월 15일(양력 12월 30일)에 재차 집권한 김홍집(金弘集) 내각에 의해 발표된 단발령(斷髮令)에 자극되어 기의한 광주(廣州)의 남한산성(南漢山城) 의진(義陣)이 있다. 이 의진은, 단발령이 발표된 다음날 김하락(金河洛)·구연영(具然英)·신용희(申龍熙) 등의 청년 유생들이 토왜와 위정척사를 기치로 한 의병전쟁을 계획하고 서울을 떠나 경기도 이천(利川)을 중심으로 경기 각 군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조직한 의병단체였다. 의진에 참여한 유생·농민들은 주로 이천·여주(驪州)·광주·용인(龍仁)·시흥(始興)·과천·안산(安山)·남양(南陽)·수원(水原) 등지에서 각 군별로 기의하여, 이듬해인 1896년 1월 중순(양력)에 이천과 여주로 집결하여 도창의소(都倡義所)를 설치하였다.
이들은 김하락(이천)·민승천(閔承天: 안성)·심상희(沈相禧: 여주) 등의 지도 하에 연합전선을 형성하였고, 이천의 백현(魄峴)과 광주의 장항(獐項)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차례로 격파한 후 2월 하순에는 남한산성에 입성하여 서울 진공작전을 준비하게 된다. 이 광주의진에 참여한 과천 출신 의병이 어느 정도 규모였으며, 그 참여자가 누구였는지는 밝혀지지 않아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광주의진의 전체 군세가 2,000여 명에 달하였다고 하니 그 중에 과천 출신 의병도 상당수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남한산성을 점령한 광주의진은 이후 약 20여 일 간 일본군의 지원을 받은 관군의 공격을 격퇴하며 항전을 계속하였으나, 총대장으로 추대되었던 박준영(朴準永)의 배신으로 관군에게 산성을 빼앗기고(3월 22일), 뿔뿔이 흩어져 김하락·구연영 등은 경상도로 내려가 안동(安東)의진에 참여하였으며, 심상희는 여주를 중심으로 부하를 모아 계속 항전하다가 유인석(柳麟錫)의 제천(堤川)의진에 참여하게 된다.
이 광주의진은 서울에서 가까운 거리에서 기의하였고 실질적인 군사력도 강하여 친일적 정부가 위치한 서울을 직접 위협할 수 있는 세력이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데, 이들의 활동 이후로 서울 부근에서의 대규모 의병전쟁은 1907년 12월부터 시작된 13도연합의병의 서울 진공전(進攻戰) 때까지는 그 유무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과천에서의 의병전쟁도 큰 부대활동은 이 기간 동안 확인되지 않는데, 따라서 의병전쟁의 시기구분상 중기에 해당하는 의병의 과천 지역내 활동은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 2. 후기의병전쟁(後期義兵戰爭)과 과천(果川)
○ 1) 후기의병전쟁의 전개
○ 2) 과천의 후기의병전쟁
▣ 1) 후기의병전쟁(後期義兵戰爭)의 전개(展開)
1907년 8월부터 시작된 후기 의병전쟁은 1909년 9월 일제의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南韓大討伐作戰)’으로 사실상 의병의 전력이 크게 약화되기 이전까지 계속된다. 이 시기는 의병의 활동이 가장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기간으로 전기(1895∼1896년) 및 중기(1904∼1907년 7월)의 의병전쟁과는 그 성격이 크게 달랐다.
먼저 의병참여계층에 있어서 전기에는 주로 유생들이 중심이 되고 농민이나 산포수들이 유생의 지도하에 병사조직으로 참여하였는데 비해, 후기 의병에서는 주로 농민·산포수·해산 군인 등 민중층에서 의병의 지도자가 나오고 있어 이들이 의병 전투력의 주축으로 자리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은 구성원의 변화는 당연히 전술상의 변화도 가져 왔다. 즉 전기 의병이 대규모로 구성되어 인적인 위세에 치우친 반면, 후기 의병은 소규모 유격전으로 장기 항전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정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양반유생 출신의 전기 의병장들은 의진 해산 후 문중(門中)집단이나 거주지의 전장(田庄) 등 돌아갈 곳이 있었지만, 이에 참여하였던 농민 등 민중계층은 의병 해산 후에 돌아가 의지할 곳이 없어 다시 방황해야 했던 경험(전기 의병 해산 이후 전국 각지에서 나타났던 英學黨·活貧黨 등의 활동)에서 그 한 원인을 찾을 수 있겠다. 또한 군대해산 이후 참여한 군인 출신 의병의 가세도 하나의 원인이 된다.
이들은 전문적인 군사지식을 소유한 계층으로 이미 대한제국을 거의 점령한 강력한 일본군과 대규모 접전을 전개한다는 것은 전략상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후기 의병에 참여한 일부 유생 출신 의병도 이제는 위력시위 후에 다시 원상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당시의 모든 상황으로 볼 때 포기할 수밖에는 없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제는 국모시해의 원수를 갚는다든지, 도(道: 유교 혹은 성인의 도덕)를 지킨다든지 하는 거창한 명분은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거의 다 망한 나라를 구할 수 있는 길은 척사(斥邪)니, 명분(名分)이니가 아니고 오직 하나의 적이라도 더 처단하는 방법 뿐이었다. 따라서 명분과 도의를 내세우던 유림적(儒林的) 성격은 퇴색하게 되고 실질적인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는 능력과 조직만이 우선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의병전쟁은 소규모의 유격전과 유생·농민·해산 군인 그리고 계몽운동 종사자까지 포함된 전 국민의 구국항전(救國抗戰)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후기 의병전쟁의 전개는 1907년 8월의 군대해산(軍隊解散)에서 비롯되었다. 일제는 헤이그(海牙)특사사건을 계기로 광무제(光武帝)를 강제로 퇴위시킨 후 이른바 ‘한일신협약’(1907. 7. 24)을 체결하여 한국 정부를 무력화시킨 다음, 신문지법(新聞紙法: 7. 27)·보안법(保安法: 7. 29)을 공포하여 한국민의 반발을 사전에 예방하고 군대해산에 착수하였다. 즉, 8월 1일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시위대(侍衛隊)의 5개 대대를 해산시킨 것을 시발로 8월 3일부터 9월 3일까지 순차적으로 각 지방에 주둔하고 있던 8개 진위대대(鎭衛大隊)를 해산시켰던 것이다. 이같은 일제의 계획적 해산에 대한 대한제국군의 항쟁은 집단적 혹은 개별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집단적인 항거를 살펴보면, 우선 8월 1일의 시위대 해산에 항거하여 제1연대 제1대대의 대대장 박승환(朴昇煥)이 자결하자, 이에 충격을 받은 제 1대대와 제2연대 제1대대가 일본군의 무장해제에 맞서 무기고를 부수고 재무장하여 시내로 진출, 남대문과 서소문 일대에서 약 3시간 동안 일본군에 맞서 접전하였다. 이들은 이날 17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600여 명이 포로로 잡혔으나, 이들 중 400여 명의 병사들은 이미 적도(賊都)가 된 서울을 탈출하여 각지의 의병진영에 합류하였다.
지방 진위대의 경우에는 시위대 해산의 충격에 따라 보다 조직적인 항쟁이 가능하였는데, 원주(原州)진위대의 경우 8월 5일에 김덕제(金悳濟) 정위와 특무정교 민긍호(閔肯鎬)가 중심이 되어 일제에 항전할 것을 계획하고 지방 의병에게 무기와 탄약을 보급하여 연합전선을 구축한 후 봉기하였다. 이들은 원주를 일시 점령한 후 현지의 일본인과 친일주구들을 처단하였으며, 좁은 원주내에서는 적에 대항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부대를 나누어 강원도와 경기도의 산악지역에 거점을 구축하였다. 이들은 이후 일본군에 맞서 조직적인 항전을 계속하였는데, 해산 군인 중심의 의병이었기에 일제에게 강력한 위협이 되었다.
이 밖에도 수원진위대의 강화(江華)분견대 등이 부대 단위로 의병으로 전환하였으며, 해산 군인이 개별적으로 의병으로 전환한 사례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경기도 내에서 활동한 해산 군인 출신 의병장만 해도 이경한(李京漢: 정교)·정용대(鄭用大: 정교)·연기우(延起羽: 부교)·하상태(河相泰: 하사)·김운선(金雲仙: 병사)·지홍일(池弘一: 하사) 등 20여 명에 달하며, 전국적으로는 계급이 밝혀진 해산 군인 출신 의병장만도 80여 명에 이른다.
이들의 대거 참전으로 전투역량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던 의병전선은 각 지역에 분산되었던 전투력을 하나로 집결시키려는 노력을 경주하였다. 즉, 1907년 11월 경기도 양주(楊州)에 집결한 의병부대들은 13도창의대(13道倡義隊)를 조직하는데, 그 대장에 이인영(李麟榮), 군사장에는 허위(許蔿)를 추대하는 한편, 각 지역별 창의대장도 선정하였다. 물론 이 13도창의대에 전국 각지에 흩어져 항쟁하던 모든 의병진영이 참여할 수는 없었다. 이인영이 중심이 된 관동(關東)창의대와 허위가 중심이 된 임진강(臨津江) 의병부대들의 합동전선적 성격이 강하였고, 관동 의병대장 민긍호와 호서 의병대장 이강년(李康?)의 의진이 가세하겠다는 연락이 올 정도였다. 이들은 12월부터 이미 적의 수중에 함락되었다고 간주한 서울을 탈환하기 위해 진격하였고, 한편으로는 서울 주재 각국 영사관에 의병을 정식교전단체(定式交戰團體)로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 13도창의대의 서울진격작전은 의병진영내의 변동(이인영 총대장의 부친상에 따른 하향)과 작전참여부대의 불참(일본군에 의해 민긍호와 이강년 부대의 서울 접근이 저지됨)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이듬해 1월까지 계속되었다. 당시 신문에 실린 서울 근교의 전투만 해도 전후 21차례에 달하고 있으니, 이들의 서울진격전투가 얼마나 치열한 것이었나 짐작할 수 있겠다. 그러나 13도창의대의 서울진격전은 우세한 일제의 전투력에 의해 저지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대규모 전투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고 판단한 각 의진은 부대별로 분산하게 되었으며, 이후 의병전쟁의 양상은 소규모 게릴라전으로 전환하게 된다.
▣ 2) 과천(果川)의 후기 의병전쟁(後期義兵戰爭)
과천지역에서 활동한 의병들의 항전도 앞에서 살펴본 것과 같은 소규모 게릴라전으로 전개된 것이었다. 그러나 과천에서의 의병전쟁은 과천이 서울에 인접한 지역인 데다가 지형상으로도 관악산(冠岳山)을 제외하면 큰 산지가 없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 비해 활발한 것은 아니었다. 1908년에 과천군의 연초(煙草)산업에 대해 조사한 보고서에 의하면, 과천 지역내에서 당시 의병이 활동하였던 지역은 광주군과 경계한 동면(東面)에 국한되어 여타 지역에서는 일본인의 단독여행도 가능하다고 적고 있다.【주】2) 이러한 사실은 이를 반영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1908년 5월부터 일제의 육군 보병 제23연대(연대장 橋本三郞대좌: 수원 주둔) 예하의 병력이 과천에 상주하는 한편, 수원경찰서의 순사대와 경성(京城)헌병대의 분견대도 주둔하는 등 의병의 활동은 확인할 수 없었고 다만 인접한 광주와 수원지역의 의병부대가 지역내로 들어와 활동한 사례를 몇 건 발견할 수 있었다. 이것을 중심으로 과천과 인접한 지역의 후기의병전쟁 양상을 살펴보겠다. 이를 위해 찾아 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간행한 『韓國獨立運動史資料集』중 의병전쟁에 관한 부분들이었는데, 과천과 관련되 기사는 여기에 인용한 것 외에는 아직 발견하지 못하였다.
각 기사의 내용을 우선 살펴보도록 하자.
(1) 1908년 4월 4일
이날 오전 3시 경 약 30명 정도의 의병이 상북면 동작리(上北面 銅雀里: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의 포촌(浦村)에 들어와 군량미 조달에 관한 명령서를 게시하고 약 1시간 동안 주둔한 후 반포리(盤浦里) 방면으로 퇴각하였다.【주】3)
(2) 1908년 4월 20일
일본군 기병 제3중대의 보고에 의하면, 이 달 20일 오전 10시 경 6명의 척후병을 파견하여 의병과 관련이 있는 마을로 지목된 상북면의 잠실(蠶室: 서초구 잠원동)을 수색하였는데, 의병에 관여한 것으로 판단된 서연식(徐連植)·박성실(朴聖實)·윤덕화(尹德和)·김영순(金永順) 등은 가족과 재산을 이미 어디론가 옮겨 놓아 체포하는 데 실패하고 다만 서연식의 집에서 화승총 1정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날 동민들을 모아 놓고 의병의 행적을 취조하던 중 성명 미상의 한 촌민이 도주하였는데, 일본군의 추격으로 체포당한 그는 의병으로 지목되어 현장에서 사살당하였다. 이같은 만행을 저지른 일본군은 그날 계속하여 말죽거리[馬粥巨里]의 최학인(崔學仁)의 집을 수색하여 화승총 1정과 탄약 및 무기류를 탈취하였다.【주】4)
(3) 1908년 4월 27일
일본군의 의병토벌작전명령으로 일본군 제13사단의 병력운용계획(제13사단 참모부 제424호)의 의하면 일본군은 경기도내의 의병토벌을 위해 경성에 주둔한 보병 제1중대를 5월 5일부터 광주·과천 방면으로 파견하는 한편, 이천수비대의 주력을 광주·과천 방면으로 이동시켜 이 지역을 포위 압축하여 의병을 소멸시키려고 하였다.【주】5)
(4) 1908년 5월 16일
경성헌병대 과천분견소 소속의 헌병 4명이 지역을 순찰하던 중 과천 남쪽 20리 지점에서 의병 10여 명과 조우하여 총격전이 벌어졌는데, 이 때 의병 2명이 일본 헌병의 총탄에 전사하였다.【주】6)
(5) 1908년 6월 22일
광주군 낙생면 판교동(廣州郡 樂生面 板橋洞: 현 성남시 분당구 판교동)에 출현한 의병 수 명이 군자금 모집활동을 한 후 이동하다가 광주 주재 일본 순사와 접전하여 이 중 2명이 체포되었다. 이들은 이익삼(李益三) 의진의 의병으로 광주·과천 일대에서 활동하였으며, 같은 달 16일에 낙생면 상사리(上四里)의 동장 및 소임(所任)이 군자금 모집에 비협조적이자 이들을 처단하였다고 한다.【주】7)
(6) 1908년 10월 17일
의병의 토벌을 위해 별동대의 임무를 부여 받은 일본군 제13사단 기병 제3중대(중대장 林八郞)는 10월 20일부터 29일까지 경기도 가평(加平)·양근(楊根)·광주·과천·안양 일대를 수색 정찰하겠다고 보고하였다.【주】8)
(7) 1909년 9월 30일
오후 10시 경 과천군 동면 주암리(住岩里: 주암동)에 거주하는 김용건(金容健)의 집에 권총 및 곤봉을 휴대한 5명의 의병이 출현하여 10원 50전의 돈과 백포(白布)·주의(周衣) 등 보급품을 조달한 후 이동하였다.【주】9)
이상의 사례를 통해 당시 과천 지역에서 전개된 의병활동의 성격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전국적인 후기 의병전쟁의 양상과 동일하게 일본군과의 대규모 접전보다는 게릴라전 양상의 전투 및 소규모 활동을 하였다는 점이다. 우선 부대의 규모가 많아야 약 30명 정도였고 나머지는 10여 명 혹은 5명 정도로 소수 인원이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1), (4), (7)참조)
둘째, 의병의 활동이 주로 보급을 위한 것에 머물고 있었다. 즉, 군량미 조달을 호소하거나((1)) 군자금조달((5), (7)) 활동을 주로 하였다. 이것은 전국적 양상과 동일한 것으로 점차 좁혀지는 일본군의 포위망 속에서 의병의 활동영역이 좁아들어간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의병에 협조하기를 거부한 친일적 부호나 동임(洞任) 등을 처단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당시 의병의 타도대상이 일본 뿐만 아니라 일본에 협조적인 친일인사까지 포함하였던 것을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셋째, 일본군의 조직화된 의병에 대한 포위 섬멸작전의 한 예를 과천 지역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즉, 사례 (2)에서 보듯 의병으로 지목된 서연식 등의 집을 수색한다는 명분으로 동네사람을 모아놓고 의병의 행방을 추궁하였으며, 동네 주민 중 1명을 무단히 사살하였고, 조직적인 가택수색으로 의병의 무기를 색출해 내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서울과 인천에 주둔한 병력을 동시에 진군시켜 광주·과천 일대를 남북에서 휩쓰는 섬멸전을 전개하였고(3), 경기도를 동에서 서로 횡단하는 기병부대를 운용하여 위력적인 수색정찰을 실시하기도 하였다(6).
넷째, 당시 과천 지역내에서 활동하던 의병부대의 대장이 누구였나를 확인하여보면, 현재까지 밝혀진 과천 지역내 활동 의병장의 성명은 이익삼(광주군 安面 거주) 뿐이다. 그는 김윤복(金允福)과 함께 1907년에 기의하여 각기 약 30∼40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활동하였으며, 1909년 6월 2일 오후 10시 경 용인군 신원리(龍仁郡 新院里)에서 일본군 수원수비대 정찰병에게 피체당하였다.【주】10) 그의 부대는 주로 광주·과천 일대에서 활동하였다고 한다(5). 이익삼 이외에 성명이 알려진 의병은 사례 (2)에 보이는 서연식 등 4명과 1908년 1월말 경에 과천 죽암리(竹岩里)에서 일경에 피체된 어윤성(魚允星)·유모(兪某) 등이 있다.【주】11) 그러나, 이들은 의병의 소모장(어윤성·유모)이거나 의병의 병사(서연식 등 4명)였던 것 같다. 그러므로 이들은 의진의 대표자는 아니었던 것이다.
이외에 과천이 주 활동지역으로 나타나는 의병부대는 아직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과천에 인접한 지역에서 활동하였던 수원의 유원선(劉元善)·김군일(金君一), 광주의 서가(徐可)·윤전(尹琠)·임문순(林文淳) 등의 부대가 수시로 과천 관내로 이동해 왔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일제의 조직적인 병력운용과 의병활동에 유리한 산악지역이 적은 과천의 지형으로 인해 장기적이고 조직적인 의병의 항일전은 매우 어려운 것이었다고 판단된다.
이상으로 살펴본 과천 지역내 항일의병전쟁의 전개양상은 크게 주목받을 것은 아니다. 다만, 의병들이 모든 불리한 여건을 극복하고 일제에 항전하는 가운데 과천 지역에서도 수 차의 접전과 활동이 있었음을 확인하는 데 만족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몇 건 안되는 의병의 행적이지만, 이를 통해 우리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는 자기희생의 의병정신이 과천 지역에도 전해지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