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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国哲学史大纲》·第四章 正名主义
저자 文 | 孟琢
北京师范大学章太炎黄侃研究中心
원문 출처
https://gx.httpcn.com/book/read/MEILRNTB/CQMEUYMEILPW.shtml
孔子哲学的根本观念,依我看来,只是上篇所说的三个观念:
第一,一切变迁都是由微变显,由简易变繁赜。所以说:臣弑其君,子弑其父,非一朝一夕之故,其所由来者渐矣,由辨之不早辨也。
《易》曰:“履霜坚冰至”,盖言顺也。
내가 볼 때, 공자 철학의 기본 개념은 단지 상편에서 언급한 세 개의 개념이다.
첫째, 일체의 변화는 미약한 것으로부터 현저한 것으로, 간단하고 쉬운 것으로부터 복잡하고 심오한 것으로 변화한다. 그러므로 말한다: 신하가 임금을 시해하고,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것은, 하루 아침 저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원인은 점차 축적된 것이고, 이를 변별하는 것을 빨리 하지 못한 것에 기인한다. 주역에서 말하기를 " 서리를 밟으면 견고한 얼음이 어는 때가 곧 온다."라고 한 것은 (도리의) 순응을 말한 것이다.
知道一切变迁都起于极微极细极简易的,故我们研
究变迁,应该从这里下手。
所以说:
夫易,圣人之所以极深而研几也(韩注:“极未形之理曰深,适动微之会曰几”)。唯深也,故能通天下之志;唯几也,故能成天下之务。
“深”是隐藏未现的。“几”字《易系辞》说得最好:
几者动之微吉凶之先见者也(旧无凶字,义不可
通。今按孔颖达《正义》云:
“诸本或有凶字者,其定本则无也。”是唐时尚有有
凶字之本。今据增)。
孔子哲学的根本观念,只是要“知几”,要“见几”,要“防微杜渐”。大凡人生哲学(即伦理学),论人生行为的善恶,约分两大派:一派注重“居心”,注重“动机”;一派注重行为的效果影响。孔子的人生哲学,属于“动机”一派。
모든 변화는 지극히 작고 가늘고, 지극히 간단하고 쉬운 것으로부터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변화를 연구하면서 마땅히 여기로부터 착수한다.
그래서 말한다. 역은 성인이 심을 궁구하고 기를 연구하는 원리이다. (한주: "형태로 드러나기 전의 이치를 궁구함에 심이고, 정미한 것을 통찰하는 이해를 얻는 것을 기라 한다. " 심하기 때문에 천하의 뜻에 통하고, 기하기 때문에 천하의 일을 이룰 수 있다. "심"은 숨어서 드러나지 않은 것이다. "기"자는 주역 계사에서 가장 잘 설명하고 있다. : 기라는 것은 움직임이 미미한 것으로 길흉이 먼저 드러나 보이는 것이다.(구본에는 흉자가 없어 뜻이 통하지 않는다. 지금 공영달의 정의를 보니, "여러 판본 중에는 간혹 흉자가 있는 데, 정본에는 없다." 라고 한다. 지금 이에 근거하여 흉자를 넣었다.)
공자 철학의 근본 관념은 반드시 "지기' 하고, "견기"하고, "방미두점(싹을 잘라 성장을 방지함)"하는 것이다. 모든 인생철학(즉 윤리학)은 행위의 선악을 논함에 대략 양대 진영으로 나뉜다. 일 파는 "거심"과 "동기"를 중시하고, 다른 한 파는 행위의 효과와 영향을 중시한다. 공자의 인생철학은 "동기"파에 속한다.
第二,人类的一切器物制度礼法,都起于种种“象”。换言之,“象”便是一切制度文物的“几”。这个观念,极为重要。因为“象”的应用,在心理和人生哲学一方面就是“意”,就是“居心”(孟子所谓“以仁存心,以礼存心”之存心)。就是俗话说的“念头”。在实际一方面,就是“名”,就是一切“名字”(郑玄说,古曰名,今曰字)。“象”的学说,于孔子的哲学上,有三层效果:
(一)因为象事物的“动机”,故孔子的人生哲学,极注重行为的“居心”和“动机”。(二)因为“象”在实际上,即是名号名字,故孔子的政治哲学主张一种“正名”主义。(三)因为象有仿效模范的意思,故孔子的教育哲学和政治哲学,又注重标准的榜样行为,注重正已以正人,注重以德化人。
둘 째, 인류의 일체의 기물, 제도와 예법은 모두 각종 "상"에서 비롯된다. 바꾸어 말하면, "상"은 곧 일체 문물제도의 "기"인 것이다. 이러한 관념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상"의 응용은 심리와 인생철학 방면에서는 곧 "의"이고, "거심"이기 때문이다. (맹자의 이른 바 "이인존심 이례존심"의 존심) 속 칭 "생각" 이다. 실제상으로 "명"이고 일체의 '명자"이다. (정현은 예전의 명이라하고 오늘 날은 자라 한다고 말한다)
"상"의 학설은 공자 철학에서 삼층의 효과를 갖는다:
(1)사물의 동기를 표상하기 때문에, 공자의 인생철학은 행위의 "거심"(마음가짐)과 "동기"를 매우 중요시 한다. (2)상은 실제에 있어 명호와 명자이기 때문에 공자의 정치철학은 "정명"주의를 주장한다. (3)상은 모범을 본받는다는 뜻이 있기 때문에, 공자의 교육철학과 정치철학은 표준적 모범행위를 중시하고, 자신을 바르게 함으로써 남을 바르게 함을 중시하고, 덕으로써 타인을 교화하는 것을 중시한다.
第三,积名成“辞”,可以表示意象动作的趋向,可以指出动作行为的吉凶利害,因此可以作为人生动作的向导。故说:
理则正辞,禁民为非,曰义。
“正辞”与“正名”只是一事。孔子主张“正名”、“正辞”,只是一方面要鼓天下之动,一方面要禁民为非。
셋째, 명이 쌓여 "사"가 된다. 그러므로 의상(image?) 동작의 추향을 표시할 수 있고, 행위의 길흉과 이해를 지적해낼 수 있다. 때문에 인간 행동의 향도가 될 수 있다. 고로 말하기를: 다스려진 즉 말이 바르게 되고 백성이 잘 못을 저지르는 것을 금하니 곧 의이다. "정사"와 "정명"은 동일한 것이다. 공자가 "정명"과 "정사"를 주장하는 것은 다만 한편으로는 천하의 움직임을 부추기고, 다른 한편으로는 백성이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다.
以上所说,是孔子哲学的重要大旨。如今且先说“正名主义”。正名主义,乃是孔子学说的中心问题。这个问题的重要,见于《论语?子路篇》:
子路曰:“卫君待子而为政,子将奚先?”子曰:“必也正名乎!”(马融注,正百事之名)子路曰:“有是哉,子之迂也!奚其正?”子曰:“野哉由也!君子于其所不知,盖阙如也。名不正,则言不顺。言不顺,则事不成。事不成,则礼乐不兴。礼乐不兴,则刑罚不中。刑罚不中,则民无所措手足。故君子名之必可言也,言之必可行也。君子于其言,无所苟而已矣。
이상의 설명은 공자철학의 중요 대지이다. 지금은 우선 "정명주의"를 설명하겠다. 정명주의는 공자 학설의 중심문제이다. 이 문제의 중요성은 논어 자로 편에서 나타난다.
자로가 물었다. 위나라 임금이 선생님을 모시고 정치를 부탁드리면. 선생님께선. 무엇부터 하시겠습니까?
이에 공자는. 반드시 이름부터 바로 잡겠다고 하셨다. 자로가 말하길, 그렇습니까? 선생님의 생각은 지나치게 우원하십니다. 어찌 이를 바로잡겠단 말씀입니까? 하였다.
공자가 말했다. 유야 너는 참 거칠구나. 군자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바에 대해서는 빠져야 하는 법이다.
명이 바로 서지 않으면 말이 순조롭게 전달되지 못하고, 말이 순조롭게 전달되지 못하면 일이 성취되지 못하고, 일이 성취되지 못하면, 예악이 흥하지 못한다. 예악이 흥성하지 못하면 형벌이 적중하지 못한다. 형벌이 적중하게 시행되지 못하면 백성들은 손발 둘 곳을 없게 된다.
그러므로 군자가 사물에 이름을 붙일 때에는
반드시 말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하고, 말을 하면 반드시 실행할 수 있어야 한다.
군자는 말에 있어 조금이라도 구차한 바가 있어서는 안된다.
”请看名不正的害处,竟可致礼乐不兴,刑罚不中,百姓无所措手足。这是何等重大的问题!如今且把这一段仔细研究一番:
怎么说“名不正,则言不顺”呢?“言”是“名”组合成的。名字的意义若没有正当的标准,便连话都说不通了。孔子说:
觚不觚,觚哉?觚哉?“觚”是有角之形。(《汉书?律历志》:“成六觚”。苏林曰:“六觚,六角也。”又《郊祀志》:“八觚宣通,象八方”。师古曰:“觚,角也。”班固《西都赋》:“上觚棱而楼金爵。”注云:“觚,八觚,有隅者也。”可证。)故有角的酒器叫做“觚”。后来把觚字用泛了,凡酒器可盛三升的,都叫做“觚”,不问他有角无角。所以孔子
说:“现在觚没有角了。这也是觚吗?这也是觚吗?”不是觚的都叫做“觚”,这就是言不顺。
이름이 바르지 못한 폐해는 끝내 예악이 흥할 수 없게 하고, 형벌이 적중하지 않고, 백성들이 손과 발을 둘 곳을 없게 한다는 것을 살펴보자. 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가! 지금 이 구절을 한번 자세하게 연구해 보기로 합시다. 이름이 바르지 못하면 말이 순조롭지 못하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
말은 명의 조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만약 명자의 의미가 정당한 표준이 없다면, 곧 말조차 소통하지 못하게 된다. 공자는 말한다.
고(고대 술잔의 일종)가 고 답지 못하면 어찌 고이겠는가? 고는 각이 있는 형태이다.(한서 율려지 : “成六觚” 방림은 "육고는 육각이다"라고 하였다. 또 교사지: “八觚宣通,象八方.” 사고는 "고는 각이다."라고 했다. 반고 서도부: “上觚棱而楼金爵”
각주에서 고는 팔고인데 모서리가 있는 것이다. 라고 하였으니 이로써 증명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각이 있는 술잔을 “觚”라 칭한다. 훗날 고자의 사용이 일반화되어, 삼 등을 담을 수 있는 주기는 각이 있고 없고를 막론하고 고라 부르게 되었다. 공자가 "현재 고는 각지지 않았다. 이것 또한 고인가? 이것 또한 고인가? " "고가 아닌 것을 모두 고로 부르는 것"은 곧 말이 순조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且再举一例。孔子说:
政者,正也。子率以正,孰敢不正?政字从正,本有正意。现今那些昏君贪官的政府,也居然叫做“政”,这也是“言不顺”了。
这种现象,是一种学识思想界昏乱“无政府”的怪现象。语言文字(名)是代表思想的符号。语言文字没有正确的意义,还有什么来做是非真假的标准呢?没有角的东西可叫做“觚”,一班暴君污吏可叫做“政”,怪不得少正卯、邓析一般人,要“以非为是,以是为非,是非无度,而可与不可日变”(用《吕氏春秋》语)了。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공자는 말한다. 정치라는 것은 바름이다. 그대가 바름으로 통솔한다면 누가 감히 바르지 않겠는가? 政은 正에서 파생된 것이니, 본래 바름의 뜻을 가지고 있다. 현재 어리석은 임금과 탐욕스런 관리의 정부 또한 “政”으로 부르는 것은 이 또한 “言不顺”이다. 이러한 현상은 학문사상계의 일종의 혼란, 무정부적인 기괴한 현상이다. 언어문자 (名)은 사상적 부호를 나타낸다. 언어 문자가 정확한 의미가 없다면, 또한 어떻게 진실과 거짓의 표준을 만들까? 각이 없는 물건을 “觚”라 부를 수 있다면, 일반적인 폭군과 오리도 “政”이라 부를 수 있다. 少正卯、邓析 따위의 사람들이 반드시 "그른 것을 옳다 하고 옳은 것을 그르다 하여, 옳고 그름에 법도가 없으니 되고 안 되고의 (기준이) 날마다 변한다. (여씨춘추의 말을 인용함)
孔子当日眼见那些“邪说暴行”(说见本篇第二章),以为天下的病根在于思想界没有公认的是非真伪的标准。所以他说:
天下有道,则庶人不议。
他的中心问题,只是要建设一种公认的是非真伪的标准。建设下手的方法便是“正名”。这是儒家公有的中心问题。试引荀卿的话为证:
今圣王没,名守慢,奇辞起,名实乱,是非之形不明,则虽守法之吏,诵数之儒,亦皆乱也。……异形离心交喻,异物名实互纽;贵贱不明,同类不别:如是,则志必有不喻之患,而事必有困废之祸”(《荀子?正名篇》。说解见第十一篇第三章)。
不正名则“志必有不喻之患,而事必有困废之祸”,这两句可作孔子“名不正则言不顺,言不顺则事不成”两句的正确注脚。
不同的人如果用不同的意念来互相晓喻,不同的事物如果让名称和实际内容混乱地缠结在一起,那么社会地位的高贵和卑贱就不能彰明,事物的相同和相异就不能分别。像这样,那么意思就一定会有不能被了解的忧患,而事情就一定会有陷入困境而被废弃的灾祸。
공자는 당시 그러한 “邪说暴行”(거짓 주장과 난폭한 행위)를 눈으로 보고 천하가 병든 근원이 사상계에 공인된 옳음과 그릇, 참과 거짓의 표준이 존재하지 않는 것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천하에 도가 있으면 일반 사람들이 의론하지 않는다.
그의 중심문제는 오르지 일종의 공인된 시비진위의 표준을 세우려는 것이다. 그 건설에 착수하는 방법이 곧 “正名”이었다. 이것은 유가가 공유하는 중심문제였다. 순경의 말을 인용하여 이를 증명해 보기로 하자.
오늘 날 성왕이 죽고, 명을 지킴을 태만하니, 궤변이 일어나. 명과 실이 어지럽게 되고, 시비의 지형이 불명하게 되었다. 비록 법을 지키는 관리와 (경전을) 반복 송독하는 유자라도 또한 모두 혼란을 겪고 있다. …..이형과 이심이 서로 가르치고, 이물과 명실이 서로 엉키게 되어, 귀천이 불명하고 동류가 불명하게 된다. 이와 같은 즉 뜻은 반드시 이해받지 못하는 우환이 있게 되고, 일은 곤란에 처해 폐기되는 재앙이 있게 된다. (《荀子?正名篇》。说解见第十一篇第三章)。
명이 바르지 않으면, "뜻은 반드시 이해받지 못하는 우환이 있게 되고, 일은 곤란에 처해 폐기되는 재앙이 있게 된다. " 이 양구절은 공자의 "명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불순하게 되고, 말이 불순하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양 구절의 정확한 주석이 될 수 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만약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서로 정보를 주고받게 되면, 서로 다른 사물이 만약 명칭과 실제 내용이 혼란스럽게 함께 얽히게 되면, 그런 사회에서 사회적 지위의 고귀함과 비천함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못하고, 사물의 상동성과 상이성이 분별될 수 없다. 이와 같이 그 뜻이 이해받지 못하는 우환이 있게 마련이고, 일이 곤경에 빠져 폐기되는 재앙이 있게 마련이다.
怎么说“事不成则礼乐不兴,礼乐不兴则刑罚不中”呢?这是说是非真伪善恶若没有公认的标准,则一切别的种种标准如礼乐刑罚之类,都不能成立。正如荀卿说的:“名守慢,奇辞起,名实乱,是非之形不明,则虽守法之吏,诵数之儒,亦皆乱也。”“正名”的宗旨,只要建设是非善恶的标准,已如上文所说。这是孔门政治哲学的根本理想。
《论语》说:齐景公问政于孔子,孔子对曰:“君君臣臣,父父子子。”公曰:“善哉!信如君不君,臣不臣,父不父,子不子,虽有粟,吾得而食诸?”“君君臣臣父父子子”,也只是正名主义。正名的宗旨,不但要使觚的是“觚”,方的是“方”,还须要使君真是君,臣真是臣,父真是父,子真是子。不君的君,不臣的臣,不子的子和不觚的觚,有角的圆是同样的错谬。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예악이 흥하지 않고, 예악이 흥하지 않으면 형벌이 적중하지 않는다" 는 것은 무슨 말일까? 이것은 옳음과 그름, 진실과 거짓, 선과악이 만약 공인된 표준이 없다면, 일체의 다른 종류의 표준 가령 예악과 형벌 따위도 모두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순경이 말하는 바와 같다 : "명을 지킴을 태만하니, 궤변이 일어나. 명과 실이 어지럽게 되고, 시비의 지형이 불명하게 되었다. 비록 법을 지키는 관리와 (경전을) 반복 송독하는 유자라도 또한 모두 혼란을 겪고 있다." 정명의 종지는 이미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다만 시비선악의 표준을 세우려는 것이다. 이것은 공문 정치철학의 기본 이상이다.
如今且看孔子的正名主义如何实行。孟子说:
世衰道微,邪说暴行有作。臣弑其君者有之,子弑其父者有之。孔子惧,作《春秋》。《春秋》,天子之事也。是故孔子曰:“知我者,其惟《春秋》乎!罪我者,其惟《春秋》乎!”又说:
昔者禹抑洪水而天下平。周公兼夷狄,驱猛兽,而百姓宁。孔子成《春秋》而乱臣贼子惧。
一部《春秋》便是孔子实行正名的方法。《春秋》这部书,一定是有深意“大义”的,所以孟子如此说法。
孟子又说:
王者之迹熄而诗亡,诗亡,然后《春秋》作。晋之《乘》,楚之《杌》,鲁之《春秋》,一也。其事则齐桓晋文,其文则史。孔子曰:“其义则丘窃取之矣。”庄子《天下篇》也说:“春秋以道名分。”这都是论《春秋》最早的话,该可相信。
이제 공자의 정명주의를 어떻게 실행할 것인가를 살펴보자. 맹자는 말한다: 세도가 쇠미해지고 거짓 학설과 난폭한 행위가 일어나, 신하가 군주를 시해하는 경우가 있고, 자식이 그 아비를 시해하는 경우도 있다. 공자를 (이를) 우려하여 춘추를 저술하였다. 춘추는 천자의 일이다. 그러므로 공자가 말하기를 : "나를 알아주는 것은 오직 춘추일 뿐이다. 나를 죄주는 것도 오직 춘추일 뿐이다. " 라 하고, 또 "옛날 우 임금이 홍수를 억제하니 천하가 태평해 졌고, 주공이 이적 오랑캐를 겸병하고 맹수를 몰아내자 백성이 편안하게 되고, 공자가 춘추를 완성하니 나라를 어지럽히는 신하들과 역적들이 두려워하였다. 춘추라는 한권의 책은 곧 공자가 정명을 실행하는 방법이다. 춘추라는 책에는 명백히 "대의"의 깊은 뜻이 담겨있기 때문에 맹자는 이와 같이 말한 것이다. 그는 또 말한다. 왕자의 흔적이 소멸하니 시가 망했고 그 연후에 춘추가 제작되었다.진나라의《乘》,초나라의 《杌》,노나라의 《春秋》는 모두 하나이다. 그 역사는 제나라 환공, 진나라 문공의 일이고, 그 문장은 史이다. 공자는 말한다. "그 취지는 내가 몰래 취하였다. " 庄子《天下篇》 또한 말한다. "춘추로써 명분을 말하였다," 이것들은 모두 춘추를 논한 가장 이른 언급이니 믿을 만하다.
若《春秋》没有什么“微言大义”,单是一部史书,那真不如“断烂朝报”了。
孔子不是一个全无意识的人,似乎不至于做出这样极不可读的史书。
论《春秋》的真意,应该研究《公羊传》和《梁传》,晚出的《左传》最没有用。我不主张“今文”,也不主张“古文”,单就《春秋》而论,似乎应该如此主张。
만약 춘추가 어떤 "미언대의(정미한 말 속에 품고 있는 큰 뜻)" 없이 단순히 한권의 역사책이라면, 그렇다면 진실로 문장이 끊기고 난삽한 조보 만도 못했을 것이다. 공자는 전혀 무의식적인 사람이 아니어서 이렇게 극도로 읽을 수 없는 역사책을 만들 정도는 아닌 것 같다. 춘추의 참 뜻을 논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공양전과 곡량전을 연구해야 하고, 가장 늦게 저술된 좌전이 가장 쓸모가 없다. 나는 금문을 주장하는 것도, 또한 고문을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단순히 춘추에 즉해서 논하자면, 마땅히 이와 같이 주장해야 할 듯하다.
《春秋》正名的方法,可分三层说:
第一,正名字。《春秋》的第一方法,是要订正一切名字的意义。这是言语学文法学的事业。今举一例,
춘추 정명의 방법은 세 층위의 주장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이름 바로잡기. 춘추의 첫 째 방법은 모든 이름의 의미를 정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언어학, 문법학의 사업이다. 일예를 들어 보자.
《春秋》说:僖公十有六年,春王正月,戊申朔,陨石于宋,五。是月,六鹢退飞,过宋都。(《公羊传》)
曷为先言“陨”而后言“石”?陨石记闻。闻其陨磌然,视之则“石”,察之则“五”。是月者何?仅逮是月也。……曷为先言“六”而后言“鹢”?六鹢退飞,记见也。视之则“六”,察之则“鹢”,徐而察之,则退飞。……(《穀梁传》)
“陨石于宋,五。”先“陨”而后“石”,何也?“陨”而后“石”也。于宋四境之内曰“宋”。后数,散辞也,耳治也。“是月也,六鹢退飞,过宋都。”“是月也”,决不日而月也。“六鹢退飞过宋都”,先数, 聚辞也。目治也。……君子之于物,无所苟而已。石陨且犹尽其辞,而况于人乎?故五石六鹢之辞不设,则王道不亢矣。(董仲舒《春秋繁露?深察名号篇》)
《春秋》辨物之理以正其名,名物如其真,不失秋毫之末,故名陨石则后其“五”,言退鹢则先其“六”。圣人之谨于正名如此。“君子于其言,无所苟而已矣。”五石六鹢之辞是也。
춘추는 말한다. 희공 16년, 춘 정월, 갑신 삭일, 송에 운석이 떨어졌는데, 다섯 차례였다. 이 달 여섯 마리의 익조가 바람에 밀려 후진(退飞)하다 송의 도읍을 지나갔다. (《公羊传》)
왜 陨을 먼저 말하고 石을 나중에 언급했을까? 운석은 소문을 기록한 것이다. 운석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살펴보니 돌이 였고, 관찰한 즉 다섯 개였다. 是月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단지 是月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왜 六을 먼저 말하고 후에 “鹢”을 언급했을까? 여섯 마리의 익새가 퇴비한 것은 본 것을 기록한 것이다. 본 즉 “六”이고, 관찰하니 “鹢” 이고 , 천천히 관찰하니 퇴비였다. (《穀梁传》)
송에 운석이 떨어지기를 다섯 번인데, “陨”이 먼저고 “石”이 후인 것은 왜인가? “陨”이후에 “石”이 되기 때문이다. 송의 사방 경계 안 쪽을 “宋”이라 하였다. 수를 후에 둔 것은 흩어졌다는 말이니, 귀로 들은 것이다. "“是月也,六鹢退飞,过宋都。”에서 “是月也"는 결단코 날이 아니라 월로 셈한 것이다. “六鹢退飞过宋都”에서 수를 앞에 둔 것은 모여 있다는 말이다. 눈으로 본 것이다. ….군자는 물에 대해 구차한 바가 없을 따름이다. 돌이 떨어지는 데에도 오히려 그 말씀의 도를 다하는데 하물며 사람의 경우에 있으서랴? 그러므로 五石六鹢의 말씀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왕도가 드날리지 못했을 것이다. (董仲舒《春秋繁露?深察名号篇》
춘추는 사물의 이치를 변별해서 그 이름을 바로잡는다. 명과 물이 만약 진실이면 추호지말의 실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운석을 이름함에 있어 “五”를 뒤에 두었고, 퇴비하는 익새를 언급함에 있어서는 “六”을 앞에 두었다. 성인이 정명에 삼가함은 이와 같다. " 군자는 그 말에 대해 구차한 바가 없을 따름이다"라고 했으니, 오석 육익의 말씀이 여기에 해당된다.
《春秋》辨物之理以正其名,名物如其真”,这是正名的第一义。古书辨文法上词性之区别,莫如《公羊》、《梁》两传。《公羊传》讲词性更精。不但名词(如车马曰,货财曰赙,衣服曰衤遂之类),动词(如春曰苗,秋曰,冬曰狩,春曰祠,夏曰礻勺,秋曰尝,冬曰,直来曰来,大归曰来归等),分别得详细,并且把状词(如既者何,尽也)、介词(如及者何,累也)、连词(如遂者何,生事也,乃者何,难之也,之类)之类,都仔细研究方法上的作用。
所以我说《春秋》的第一义,是文法学、言语学的事业。
第二,定名分。上一条是“别同异”,这一条是“辨上下”。那时的周天子久已不算什么东西。楚吴都已称王,此外各国,也多拓地灭国,各自称雄。孔子眼见那纷争无主的现象,回想那封建制度最盛时代,井井有条的阶级社会,真有去古日远的感慨。所以《论语》说:
孔子谓季氏八佾舞于庭,是可忍也,孰不可忍也!读这两句,可见他老人家气得胡子수염发拌的神
气!《论语》又说:
三家者,以《雍彻》。子曰:“相维辟公,天子穆穆”,奚取于三家之堂?
孔子虽明知一时做不到那“天下有道,礼乐征伐自天子出”的制度,他却处处要保存那纸上的封建阶级。所以《春秋》于吴楚之君,只称“子”,齐晋只称“侯”,宋虽弱小,却称“公”。践土之会,明是晋文公把周天子叫来,《春秋》却说是“天王狩于河阳”。周天子的号令,久不行了,《春秋》每年仍旧大收“春王正月”。这都是“正名分”的微旨。《论语》说:
子贡欲去告朔之饣气羊,子曰:“赐也,尔爱其羊,我爱其礼。”这便是《春秋》大书“春王正月”一类的用意。
둘째, 명분을 정한다. 위의 조항이 동이를 구별하는 것이라면 이 조항은 상하를 변별하는 것이다. 그 당시 주나라 천자는 하잘것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 지가 오래되었다. 초와 오는 모두 이미 왕을 칭했고, 이외 각국도 또한 영토를 개척하고 다른 나라를 멸망시키고 각자 패왕으로 자처하였다.
공자는 그 분쟁의 주인이 없는 현상을 보고, 봉건제도가 가장 성했던 시대, 정연하고 질서정연한 계급사회를 회상하니, 참으로 먼 옛날의 감회가 들었다. 그래서 논어에서 말한다: 공자는 계씨가 집 안에서 팔일무 공연을 하는 것을 보고 이르기를 이를 참을 수 있다면 무엇인들 참지 못하랴?고 하였다. 이 양 구절을 읽으면, 그 노인네가 화가 나서 수염이 덜덜 떨리는 기색을 볼 수 있다.
논어에서 또 말한다. 맹손씨, 수손씨, 지손씨는 조상에게 제사를 지낼 때 주나라 황제가 제사를 치우듯 시를 읊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시 《雍》에는 천하의 제후들이 제사를 도우러 오는데, 제사를 주관하는 황제는 조용하고 엄숙하며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그런 싯구를 어찌 삼가에서 조상 사당에 제사를 지내며 사용할 수 있습니까? 공자는 비록 갑자기 "천하에 도리가 있고, 예악 정벌은 천자에서 나온다"는 제도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도처에서 그 종이 위의 봉건계급을 보존하려 하였다. 그래서 《춘추》는 오초(吳之)의 군주에 대해서는 '자(子)'라고만 부르고, 제진(齊晋)은 '후(侯)'라고 부르며, 송은 비록 약하지만 '공(公)'이라고 부른다.
천토지회는 분명히 진문공이 주천자를 불렀는데, '춘추'는 '천왕이 하양에서 사냥했다'고 기술했다. 주나라 천자의 호령은 오랫동안 시행되지 못하였다. 《춘추》는 매년 예전의 관행대로 “春王正月”을 고수하였다. 이는 모두 “正名分”을 위한 은미한 뜻이다. 논어에서 말한다.
자공이 태묘에서 초하룻날 고하며 바치는 희생양을 없애려고 했다.
공자께서 “사야. 너는 그 양이 아깝느냐, 나는 그 예(禮)가 아깝단다.”고 했다. 이것은 곧 춘추에서 “春王正月”을 대서한 것과 같은 류의 뜻이다.
第三,寓褒贬。《春秋》的方法,最重要的,在于把褒贬的判断寄托在记事之中。司马迁《史记?自序》引董仲舒的话道:
夫《春秋》上明三王之道,下辨人事之纪,别嫌疑,明是非,定犹豫,善善恶恶,贤贤贱不肖,……王道之大者也。
善善恶恶,贤贤贱不肖,便是褒贬之意。上章说“辞”字本有判断之意。故“正辞”可以“禁民为非”。
셋째, 논평을 암시하다. 춘추의 방법은, 가장 중요한 것으로, 칭찬과 징계(포폄)의 판단이 기사 가운데 기탁되어 있댜는 점에 있다. 사마천 사기의 자서에서 동중서의 말을 인용하여 쓰고 있다. : 춘추는 위로는 삼왕의 도를 밝히고 아래로는 인사의 기강을 가리고, 혐의를 변별하고, 시비를 분명히 하고, 유예를 결정하고, 선을 포상하고 악을 징계하고, 현자를 존숭하고 불초자를 배척하고…. 왕도의 대강이 되는 것들이다.
선을 포상하고 악을 징계하고, 현자를 존숭하고 불초자를 배척함은 곧 칭찬과 폄하의 의미이다. 위 장에서 “辞”라는 글자는 원래 판단의 뜻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때문에 “正辞”는 백성들이 비리를 저지르는 것을 금지할 수 있다.
《春秋》的“书法”,只是要人看见了生畏惧之心,因此趋善去恶。即如《春秋》书弑君三十六次,中间很有个分别,都寓有“记者”褒贬的判断。如下举的例:
(例一)(隐四年三月戊申)卫州吁弑其君完。
(例二)(隐四年九月)卫人杀州吁于濮。
(例三)(桓二年春王正月戊申)宋督弑其君与夷及其大夫孔父。
(例四)(文元年冬十月丁未)楚世子商臣弑其君(公皆作髡)。
(例五)(六十六年)宋人弑其君杵臼。
(例六)(文十八年冬)莒弑其君庶其。
(例七)(宣二年秋九月乙丑)晋赵盾弑其君夷皋。
(例八)(成十八年春天正月庚申)晋弑其君州蒲。
춘추 필법은 단지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운 마음이 생기는 것을 보고, 선을 쫓고 악을 버리도록 합니다. 춘추의 경우 군주를 시해했다고 36차례 기록하고 있는데, 중간에 많은 차이가 있지만, 모두 기록자의 포폄의 판단을 포함하고 있다. 이하 그 예를 들어보자.:
(예1)(隐왕 四年 三月 戊申)卫나라 州吁가 그 임금 完을 시해하였다。
(예2)(隐왕 四年 九月)卫人이 州吁를 濮에서 살해하였다.
(예3)(桓왕 二年 春王正月 戊申)宋督이 그 임금 与夷와 그 대부 孔父를 시해하였다.
(예4)(文왕 元年 冬十月 丁未)楚나라 世子인 商臣이 그 임금을 시해하였다.
(예5)(六十六年)宋人이 그 임금인 杵臼를 시해하였다。
(예6)(文十八年冬)莒이 그 임금 庶其를 시해하였다。
(예7)(宣왕 二年 秋九月 乙丑)晋나라 赵盾이 그 임금 夷皋를 시해하였다.
(예8)(成왕 十八年 春天正月 庚申)晋이 그 임금 州蒲를 시해하였다。
即举此八例,可以代表《春秋》书弑君的义例。(例一)与(例三、四、七)同是书明弑者之名,却有个分别。(例一)是指州吁有罪。(例三)带着褒奖与君同死的大夫。(例四)写“世子商臣”以见不但是弑君,又是弑父,又是世子弑父。(例七)虽与(例一)同式,但弑君的人,并不是赵盾,乃是赵穿。因为赵盾不讨贼,故把弑君之罪责他。这四条是称臣弑君之例。
(例二、五、六、八)都是称君不称弑者之例,却也有个分别。(例二)称“卫人”,又不称州吁为君,是讨贼的意思,故不称弑,只称杀。又明说“于濮”。濮是陈地,不是卫地,这是说卫人力不能讨贼,却要借助于外国人。(例五)也称“宋人”,是责备被弑的君有该死之罪,但他究竟是正式的君主,故称“其君”。(例六)与(例八)都称是“国”弑君之例,称“人”还只说“有些人”,称“国”便含有“全国”的意思。故称国弑君,那被弑之君,一定是罪大恶极的了。(例六)是太子仆弑君,又是弑父(据《左传》)。因为死者罪该死,故不著太子仆弑君弑父之罪。
(例八)是栾书中行偃使程滑去弑君的。因为君罪恶太甚,故不罪弑君的人,却说这是国民的公意。
즉 이 여덟 가지 예를 들면, 《춘추》에서 임금을 시해한 의례를 대표할 수 있다. (예1)과 (예3,4,7)은 하나같이 시해자의 이름을 밝히고 있지만, 각기 차이가 있다. 예1은 州吁가 유죄임을 가르킨다. 예3은 임금과 함께 죽은 대부를 기리고 장려하고 있다. 예4는 “世子商臣”으로 서술함으로써, 단순한 임금 시해가 아닌 아비를 시해한 것이고, 세자가 아버지를 시해한 것임을 드러내고 있다. 예7은 비록 예1과 같은 형식이지만, 다만 임금을 시해한 자가 결코 조순이 아니라 조천이다. 조순이 반란자들을 토벌하지 않았기 때문에 임금을 시해한 죄목으로 그를 문책한 것이다. 이 네가지 조항은 신하로서 임금을 시해한 사례이다.
(예 2,5,6,8)은 모두 (자신을) 임금으로 칭하며, (기존 임금을 죽인 것을) 弑라 칭하지 않는 사례이지만, 또한 차이가 있다. 예2는 (자신들을) “卫人”으로 칭하며, 州吁를 임금으로 부르지 않는다.
이것은 도적을 토벌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시해했다 하지 않고 단지 살해했다고 한 것이다. 또한 “濮” 땅에서 라고 분명하게 설명하지만, “濮” 은 진나라 땅이지, 위 나라 땅이 아니다. 이것은 위나라 사람들이 힘으로 토적할 수가 없어 도리어 외국인에게 도움을 빌리려 했음을 말한다. (예5) 역시 “宋人”이라 칭한 것은, 시해를 당한 임금 역시 죽어 마땅한 죄가 있음을 책망하는 것이다. 다만 그는 마지막까지 정식 군주였기 때문에 “其君”으로 칭한다. (예6)과 (예8)은 모두 이 "나라"로 불리는 것이 군주를 시해한 사례이다. 칭“人” 할 때는 일군의 사람들을 말하지만, 칭“国”은 곧 "전국"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라가 군주를 시해했다고 칭하면, 저 피해 당한 군주는 반드시 죄가 크고 지극히 흉악한 경우이다. (예6)은 태자 仆이 군주를 시해한 것이고, 또 아버지를 시해한 것이다.(좌전에 의거). 죽은 자의 죄가 죽어 마땅하므로, 태자 복이 군주와 아비를 시해한 죄를 드러내지 않았다. (예8)은 혁서와 중행언이 정활로 하여금 군주를 시해한 경우이다. 군주의 죄악이 너무 심해서 군주를 시해한 사람을 죄주지 않고 도리어 이것이 국민적 공론이라고 설명한다.
这种褒贬的评判,如果真能始终一致,本也很有价值。为什么呢?因为这种书法,不单是要使“乱臣贼子”知所畏惧,并且教人知道君罪该死,弑君不为罪;父罪该死,弑父不为罪,(如上所举的例六是)。
这是何等精神!只可惜《春秋》一书,有许多自相矛盾的书法。如鲁国几次弑君,却不敢直书。于是后人便生出许多“为尊者讳,为亲者讳,为贤者讳”,等等文过的话,便把《春秋》的书法弄得没有价值了。这种矛盾之处,或者不是孔子的原文,后来被“权门”干涉,方才改了的。我想当日孔子那样称赞晋国的董狐(宣二年《左传》),岂有破坏自己的书法?但我这话,也没有旁的证据,只可算一种假设的猜想罢了。
이런 종류의 포폄적 평가는, 만약 진실로 처음부터 끝까지 일치할 수 있다면
근본 또한 매우 가치 있다. 왜 일까? 이러한 필법은 “乱臣贼子”로 하여금 두려워할 바를 알게 할 뿐 아니라, 아울러 사람들을 교육하여 죄가 죽어 마땅한 군주는 그를 시해해도 죄가 되지 않고, 죄가 죽어 마땅한 아비는 그를 시해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한다.(위에서 열거한 예6이 그러하다)
이 얼마나 정신적인가! 다만 춘추라는 한 권의 책에는 허다한 상호 모순적인 필법이 존재한다는 점이 애석하다. 가령, 노나라는 수차례 군주를 시해하지만, 도리어 감히 이를 직서하지 못한다. 이에 후인들이 곧 허다한 “존자, 친자, 현자의 해당 이름이 든 글자의 사용을 기피한다 为尊者讳,为亲者讳,为贤者讳” 등등 과문한 말을 만들어 내어 춘추 필법을 가치가 없는 것으로 농락하고 말았다. 이런 모순점은 혹자는 공자의 원문이 아니라, 훗날 "권문"의 간섭을 받아 바야흐로 고쳐진 것이라고 한다. 당시 공자가 진나라의 董狐를 그토록 칭찬했다는 점(선왕 2년 좌전)을 생각해 볼 때, 어찌 자기 파괴적 필법이 있겠는가?
하지만 내 말은, 별다른 증거도 없고, 단지 가설적인 추측일 뿐이다.
总论《春秋》的三种方法--正名字,定名分,寓褒贬--都是孔子实行“正名”、“正辞”的方法。这种学说,初看去觉得是很幼稚的。但是我们要知道这种学说,在中国学术思想上,有绝大的影响。
총론 춘추의 세가지 방법-정명학, 정명분, 우포폄-은 모두 공자가 “正名”과 “正辞”를 실행하는 방법이다. 이 학설은 처음보면 매우 유치하다고 느낄 수 있다. 다만 우리들은 이 학설이 중국학술사상상 절대적 영향력을 갖는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我且把这些效果,略说一二,作为孔子正名主义的评判。
(1)语言文字上的影响
孔子的“君子于其言,无所苟而已矣”一句话,实是一切训诂书的根本观念。故《公羊》、《梁》,都含有字典气味。董仲舒的书更多声音通假的诂训
(如“名”训“鸣以出命”,民训瞑,性训生之类)。也有从字形上着想的训诂(如说王字为三画而连其中。《说文解字》引之)。大概孔子的正名说,无形之中,含有提倡训诂书的影响。
나는 이러한 효과를, 간단히 말해서, 공자의 정명주의적 평가라고 하겠다.
(1)언어 문자상의 영향
공자의 "군자는 그 말에 대해 구차한 바가 없을 따름이다"라는 구절은 모든 훈고서의 근본 관념이다. 그러므로 공양전과 곡양전은 자전의 성격을 함유하고 있다. 동중서의 책은 성음과 通假(한자의 通用과假借)의 훈고가 더욱 많다.(가령 “名”训“鸣以出命”, 民训瞑,性训生 따위) 또한 글자의 형상으로부터 착상한 훈고도 있다.(가령 王자를 삼획의 중앙을 연결한 것으로 한다. 설문회자 인용) 대체로 공자의 정명설은 ,무형 가운데, 훈고서를 제창한 영향을 가지고 있다.
(2)名学上的影响
自从孔子提出“正名”的问题之后,古代哲学家都受了这种学说的影响。以后如荀子的“正名论”(看第十一篇第三章),法家的“正名论”(看第十二篇),不用说了。即如墨子的名学(看第六篇第三、四章),便是正名论的反响。杨朱的“名无实,实无名”(看第七篇),也是这种学说的反动。我们简直可以说孔子的正名主义,实是中国名学的始祖。正如希腊梭格拉底的“概念说”,是希腊名学的始祖(参观上篇老子论名一节)。
(2)명학 상의 영향
공자가 “正名”의 문제를 제출한 후, 고대 철학가들은 모두 이런 학설적 영향을 받았다. 이 후 가령 순자의 “正名论”, 법가의 “正名论”은 언급할 필요가 없다. 즉 묵자의 명학은 정명론의 반향이고, 양주의 “名无实,实无名”은 또한 이 학설에 대한 반동이다. 우리들은 실로 공자의 정명주의는 중국 명학의 시조라고 말할 수 있다. 희랍 철학에서 소쿠라테스의 “概念说”이 희랍 명학의 시종인 것과 같이. (상편 노자의 논명 절을 참조)
(3)历史上的影响
中国的历史学几千年来,很受了《春秋》的影响。试读司马迁《史记?自序》及司马光《资治通鉴》论“初命三晋为诸侯”一段,及朱熹《通鉴纲目》的正统书法各段,便可知《春秋》的势力了。《春秋》那部书,只可当作孔门正名主义的参考书看,却不可当作一部模范的史书看。后来的史家把《春秋》当作作史的模范,便大错了。为什么呢?
因为历史的宗旨在于“说真话,记实事”。《春秋》的宗旨,不在记实事,只在写个人心中对于实事的评判。
明的赵穿弑君,却说是赵盾弑君。明是晋文公召周天子,却说是“天王狩于河阳”。
这都是个人的私见,不是历史的实事。后来的史家崇拜《春秋》太过了,所以他们作史,不去讨论史料的真伪,只顾讲那“书法”和“正统”,种种谬说。《春秋》的余毒就使中历史。国只有主观的历史,没有物观的历史。
(3)역사상의 영향
중국 역사학 수천년 이래 춘추의 영향을 매우 많이 받았다. 사마천 사기의 자서와 사마광 자치통감에서 “初命三晋为诸侯” 단락과 주희의 동감절목의 정통필법 단락을 읽어보면, 춘추의 영향력을 알 수 있다. 《春秋》라는 책은 공문의 정명주의적 참고서로 보아야 하지, 모범적인 역사서로 보는 것은 가당하지 않다. 후래의 역사가들이 춘추를 역사 서술의 모범으로 간주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왜 그런가?
역사의 취지가 "진실을 말하고 사실을 기억하라"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춘추》의 취지는 사실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개인의 마음속에서 사실에 대한 평판을 쓰는 것에 있을 뿐이다.
분명한 것은 조천이 임금을 시해했지만, 오히려 조순이 임금을 시해했다고 설명한다. 진나라 문공이 주나라 천자를 부른 것이 명백함에도, 오히려 "천왕이 하양 땅으로 사냥을 갔다"라고 설명한다.
이것은 모두 개인적 사견이지 역사적 사실은 아니다. 후래의 역사가들이 춘추를 지나치게 숭배한 나머지, 그들이 역사를 기술하면서 사료적 진위를 따지지 않고 저“书法”과 “正统”만을 고려해서 여러 오류를 빚었다. 춘추의 여독이 역사를 중독시켰다. 국가는 주관적인 역사만 있을 뿐 객관적 역사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