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살 난 딸과 함께 사는 콩고 여성 이야기
"12년 전 한국에서 태어난 제 딸은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한 채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습니다. 다행히 중학교까지의 교육은 보장되어 있지만 그 이후의 삶은 불투명합니다." -알트루사 난민 초청 미팅, 그레이스 인터뷰 중
한국에서 한국인으로 태어나 아무리 어렵게 살아간다고 해도 난민과는 처지가 다릅니다. 국민으로 인정조차 되지 않는다는 것은 아무런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직업을 구할 방법, 의료 혜택, 그리고 교육이 차단되어 있습니다. 대부분 난민은 정치적인 박해나 종교적인 이유로 어쩔 수 없이 고국을 떠나오지만, 이곳에서 또 다른 시련을 겪게 됩니다. 그나마 난민으로 허가받으면 다행입니다. 우리와 다름없이 같은 땅에서 살지만 불법체류자(미등록자) 신분으로 평생을 숨어 지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어려움을 견디게 하는 그들의 힘은 무엇일까요. 그들과 함께하는 이웃은 누구일까요. 고국에서 정치적인 이유로 한국으로 오게 된 콩고민주공화국인 그레이스(가명) 씨의 이야기를 들어 보겠습니다. -필자 주 |
저는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온 그레이스입니다. 38살이고 12살 된 초등학생 딸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남편과 한국 비자를 받아 한국에 왔고, 2010년 남편이 미국으로 공부하러 떠났습니다. 지금까지 남편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연락할 길이 없습니다. 저와 딸 둘이서만 여기에서 사는 것은 쉽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딸을 보호해 주시길 기도하며 하루하루 지내고 있습니다. 간혹 주변에서 외국인 머리를 땋는 일을 알선해 줘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친구 집 방 한 칸을 빌려 함께 살고 있습니다.
1년 전 어느 날 건강에 적신호가 왔지만, 의료보험이 없는 상태로 병원에 갈 형편이 되지 않아 차일피일 미루다 약국에서 약을 구해 먹고 지내고 있었습니다. 돈이 없다고 다른 이들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구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현기증과 함께 앞이 보이지 않고 심장이 빨리 요동치는 증상이 발생했습니다. 친구의 충고로 급히 평택에 있는 한 병원에서 혈액을 검사하고 큰 대학 병원으로 가라는 의사의 말을 들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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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트루사 '난민과함께살기' 운동은 3월 21일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온 그레이스를 초청해 한국에서의 삶을 나눴다. 사진 제공 알트루사 |
의사의 말을 듣지 않고 집으로 가려는 제게, 의사는 제가 백혈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제가 걸린 백혈병의 경우, 평생 약을 먹어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고요. 보험이 없는 저는 비싼 약값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감사하게도 '피난처'라는 NGO단체, 알트루사 그리고 예람교회에서 약값을 후원받게 되었습니다. 기도하는 중에 이런 귀한 도움을 만나게 된 것에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한국에 살면서 다른 인종인, 가난한 우리를 무시하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지만 이렇게 많은 도움을 주고, 저희를 이웃으로 그리고 가족으로 여겨 주시는 분들께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특히 알트루사에서 여성들에게 상담을 제공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런 기회가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알트루사에서 만나자고 했을 때, 처음에는 낯선 사람들이 저를 낮게 보고 불쌍한 대상으로만 보지 않을까 싶어 만나기가 주저되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보내 주신 초대글에 "가족, 친구로 생각해 함께 이야기 나누고 싶다"는 말이 있어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콩고를 떠나오게 된 것은 부모님, 아버지의 정치 활동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가장 빨리 비자를 얻을 수 있는 나라가 한국이었기에 한국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2005년 난민 신청을 하였으나 2013년 불인정 결과를 받고, 지금은 여권도 비자도 없이 불법체류자로 지내고 있습니다. 난민 인정 재신청을 하고 싶었으나 재신청 기간이 이미 몇 년 지나 버렸고, 첫 심사보다 조건이 더 까다롭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난민 인정 신청을 한 사람들 중 난민으로 받아들여진 확률이 5% 미만이라는 이야기도 들었고요.
난민 인정 기준에 따르면, 정치적 핍박을 직접 받았고 그 때문에 본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고 합니다. 서류 절차가 너무나 까다롭고 어렵습니다. 난민 신청을 해도 거부되는 경우가 훨씬 많지만, 신청 기간 동안 체류 비자를 받아 그동안은 합법적으로 살 수 있기에 난민 신청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희의 경우 난민 신청을 하고 결과가 나오기까지 기간이 상당히 길었으나, 합법적으로 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직장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다행히도 한국에서는 모든 어린이들에게 교육의 문이 열려 있어서 딸은 초등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학교에 잘 적응하고 많은 친구는 아니지만 친한 친구 몇몇과 잘 지내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저의 딸은 한국인과 다름없이 한국어를 아주 잘합니다. 오히려 제가 그 아이에게서 한국어를 배우곤 합니다. 방과 후 지역아동센터에서 교육의 도움을 더 받게 하고 싶지만 외국인 등록증이 없어서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불법체류 신분이다 보니 딸에게 아무래도 바깥 활동을 조심시키게 됩니다.
저와 딸은 자주 이런 대화를 합니다. 한국에서 태어난 이상 그들의 문화와 고유의 생각 방식을 이해하려 노력해야 한다고요. 여기 알트루사에 계신 어머님들도 그러하듯, 저도 엄마로서 딸을 어떻게 교육해야 하는지 항상 고민하게 됩니다. 딸을 교육하면서 어머니께서 저를 어떻게 교육하셨는지 되돌아보게 되죠. 우리는 다른 나라에서 왔지만 우리를 하나로 묶어 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이들을 존중하고, 소중히 대하라고 어린 딸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어렸을 때, 부모님은 저희를 다른 친척이나 할머니 댁에 맡기지 않고 본인들이 직접 키웠습니다. 여기에서도 그분들의 교육 방식을 따르려 노력하고 있지요.
가끔 한국에서 저희 피부색을 보고 '깜둥이'라고 말할 때도 있지만, 악한 감정으로 말하는 거라고 보지 않습니다. 아이에게도 그렇게 이해시킵니다. "우리를 처음 봐서 놀라서 그러는 거야." 역으로 보면, 한국인이 아프리카에 갔을 때 중국인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웃음) 전 이런 일들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아요. 어떤 나쁜 영향도 받지 않습니다. 저희가 차별받는 심정이 되어 괴로울 거라 짐작하는 한국인이 많지만, 저희는 그들을 이해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두 다 다르게 만드신 걸요.
인정받지 못한 난민으로 살면서 많은 어려움들을 만나지만, 어떻게 하든 가급적 문제를 만들지 않으려 조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불법체류자로서 저희에게 가장 급히 필요한 것은 의료와 법률 혜택이라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난민 혹은 난민 인정을 받지 못한 저희 같은 사람들은 목소리를 내고 싶지만 투표권도 없으니 쉽지 않습니다.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다른 한국인들이 저희의 인권을 위해 국회에 청원도 하고 알리는 일을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피난처 그리고 알트루사 '난민과 함께 살기 운동'과 같은 한국 자국민들의 목소리를 빌어 저희의 상황과 바람을 알리고자 하는 마음이 커서, 이렇게 저희 상황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낯선 여성들과의 만남이 긴장되었지만 저의 이야기를 잘 들어 주고 공감해 주고 궁금해해 주시니 마음이 많이 편안해졌습니다. 딸아이와 이곳 '재미있는학교' 아이들과 만날 수 있는 시간도 기대해봅니다.
*알트루사 '난민과함께살기' 운동이란? (사)한국알트루사는 여성들의 자원봉사 단체로 "마음이 건강한 여성들이 만드는 착한 사회"를 지향합니다. 무료 여성상담소와 주말 대안학교 '재미있는학교'를 운영하며, 정신 건강 계간지 <니>를 발행하고, 오케스트라 모임, 뜨개 모임, 노래 모임을 합니다. '핵없는세상', '난민과함께살기' 모임도 하고 있습니다. 알트루사 난민과함께살기 운동은 난민을 불쌍한 대상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협력해 마음을 나누는 친구로 지내고자 합니다. 알트루사 홈페이지와 소식지를 통해 난민의 상황을 알리며 함께 공유합니다. 매월 정기 모임에 난민을 초대해 깊이 있게 대화합니다. (문의: 02-762-3977~8, http://www.altrusa.or.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