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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을 보십니다.
1절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그래 네 설교 잘 들었다 하고 나옵니다.
2절 “진실로 내가 이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소발의 고발성 말을 듣고 나서 그래 그런 건 나도 안다는 겁니다. 근데
인간이 어떻게 해서 하나님 앞에 완전하냐 하고 멍군하고 나오는 겁니다.
3절 “사람이 하나님께 변론하기를 좋아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지 못하리라”
4절 “그는 마음이 지혜로우시고 힘이 강하시니 그를
거슬러 스스로 완악하게 행하고도 형통할 자가 누구이랴”
14절 “하물며 내가 감히 대답하겠으며 그 앞에서 무슨 말을 택하랴”
15절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대답하지 못하겠고
나를 심판하실 그에게 간구할 뿐이며”
16절 “가령 내가 그를 부르므로 그가 내게 대답하셨을지라도
내 음성을 들으셨다고는 내가 믿지 아니하리라”
감히 우리는 하나님과 상대할 수 없다 하나님은 언제나 일방통행이라는
뜻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욥도 하나님을 잘 못 알고 있는 건 일반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주권이 일방적으로 하나님 마음대로 하신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러나 성경 사1:18절은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고 말씀하십니다.
와서 나랑 한 번 따져보자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네 죄가 그만큼이냐
그러면 내 죄 사함의 실력은 이 정도다 서로 한 번 따져보자 하시는
주님 앞에 고무알매주알 고백하기 까지는 긴 시간이 지나야 합니다.
17절 “그가 폭풍으로 나를 치시고 까닭 없이 내 상처를 깊게 하시며”
18절 “나를 숨 쉬지 못하게 하시며 괴로움을 내게 채우시는구나”
19절 “힘으로 말하면 그가 강하시고 심판으로 말하면 누가 그를 소환하겠느냐”
감히 누가 하나님을 법정에 세울 수가 있는가 하는 말입니다. 말은 맞습니다.
20절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니
가령 내가 온전할지라도 나를 정죄하시리라“
무조건 하나님 앞에 잘못했다고 고백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이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죄의식 곧 원죄의 채무의식을 말하는 겁니다.
21절 “나는 온전하다마는 내가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내 생명을 천히 여기는구나”
욥기는 인간이 인간을 뭐라고 말하고 있는가에 대한 설명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생사화복에 전혀 상관하지 않으실까요? 그러나 실제로는 우리의
머리카락 하나하나 번호를 매겨 세고 계십니다. 오늘 아침에 우리가 머리를 감다가
1001번 머리카락이 빠졌다는 사실까지 알고 계시며 우리의 앉고 일어섬도 아십니다.
참새 한 마리가 죽는 것까지 하나님이 결재하시지 않으면 떨어지지 않는다고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지금 하나님은 꿈쩍도 않으시는데 사단의 공격을 받아 서로 난리입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결국 하나님을 원망하고 맙니다. 이게 인간이 말하는 인문학입니다.
그 다음 건너뛰어서 13장은 욥의 변명입니다
3절 “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말씀하려 하며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노라”
나는 이제 전능자와 상대하겠다고 나옵니다.
4절 “너희는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요 다 쓸모없는 의원이니라”
말은 맞습니다. 거짓말을 지어내는 겁니다. 사람의 의는 헝겊으로 덧붙이듯이
덕지덕지 덧대는 헛수고 일뿐입니다. 쓸데없는 의원 곧 영적 돌팔이들입니다.
5절 “너희가 참으로 잠잠하면 그것이 너희의 지혜일 것이니라”
6절 “너희는 나의 변론을 들으며 내 입술의 변명을 들어 보라”
7절 “너희가 하나님을 위하여 불의를 말하려느냐 그를 위하여 속임을 말하려느냐“
8절 “너희가 하나님의 낯을 따르려느냐 그를 위하여 변론하려느냐”
너희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해 준다고 떠들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15절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하뢰리라”
이렇게 욥과 같이 자기 의를 내세우면 회개가 없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산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로 사는 새로운 피조물일
뿐입니다 회개를 하고 날마다 그 회개한 마음으로 주 앞으로 나아가야만 성령이
끊임없이 내주 역사하시고 감동과 감화를 주십니다. 우리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은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고 복창할 때에 역사히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아니라 주님이신 그리스도라고 자신을 부인할 때마다 우리 속에 나타나십니다.
그러나 욥은 지금 하나님께 보상 받을 것이 있다는 말을 합니다. 사실 죽을 때까지
이런 소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중병이 들었음에도 하나님께 채권자 노릇합니다.
16절 “경건하지 않은 자는 그 앞에 이르지 못하나니 이것이 나의 구원이 되리라”
나는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다 하나님께 한 마디 할 자격이 있다는 말입니다.
17절 “너희들은 내 말을 분명히 들으라 내가 너희 귀에 알려 줄 것이 있느니라”
18절 “보라 내가 내 사정을 진술하였거니와 내가 정의롭다 함을 얻을 줄 아노라”
욥은 여기까지 왔음에도 나는 정당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욥을 의인으로 보는 것은 그들이 다 동급의 수준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19절 “나와 변론할 자가 누구이랴 그러면 내가 잠잠하고 기운이 끊어지리라”
누구든지 좋다 한 번 덤벼 보라는 식입니다. 기운이 입에 달라붙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교만한 사람들이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욥과 같이 자기 의에 빠져 있는 것이 바로 구원받을 인간성입니다.
20절 이하는 ‘이제 더 이상 나를 고문하지 마옵소서’ 하는 내용입니다.
20절 “오직 내게 이 두 가지 일을 행하지 마옵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얼굴을 피하여 숨지 아니하오리니”
21절 “곧 주의 손을 내게 대지 마시오며 주의 의엄으로 나를
두렵게 하지 마실 것이나이다”
22절 “그리하시고 주는 나를 부르소서 내가 대답하리이다 혹 내가
말씀하게 하옵시고 주는 내게 대답하옵소서”
23절 “나의 죄악이 얼마나 많으니이까 나의 허물과 죄를 내가 알게 하옵소서”
그리고
26절 “주께서 나를 대적하사 괴로운 일들을 기록하시며 내가
젊었을 때에 지은 죄를 내가 받게 하시오며”
어렸을 적의 죄를 들추시는 하나님으로 봅니다. 자연인은 꼭 이런 소리를 합니다.
지금도 하나님에 대한 기초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이런 회개를 하고 있습니다.
욥기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진지한 토론입니다. 결론은 인간은 끈질기게 악하고
고집이 세다는 걸 말해 주고 있습니다. 아담 안에 있는 인간의 이와 같은
고질병은 오직 하나님만이 손을 쓰실 수 있다는 것으로 욥기는 끝이 납니다.
욥기서는 미움을 가진 인간이라는 뜻(恨) 곧 분과 탄식, 원망 불평의 대명사입니다.
줄곧 욥의 보상 심리가 드러납니다. 그런데 21세기의 욥이 상상외로 많습니다.
욥의 세 친구는 욥을 비난하고 비웃고 조롱하면서 회개를 촉구합니다. 하나님을
빙자하여 말로만 욥을 위로하고 그를 권면합니다. 우리가 많이 보는 유형입니다.
결국 속의 사람을 노출시켜 참 자아를 얻게 하는 분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곧 구원의 책입니다.
욥기는 철학적입니다. 인간의 내면적인 문제를 말로 논쟁합니다.
철학에는 존재철학과 역사철학이 있습니다. 사실은 우리가 욥과 같은 철학적인
고민을 안고 신학 공부를 해야 합니다. 결국 욥은 철학적인 고민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롬7장이 지금의 합리와 불합리의 철학에서 해방되는 길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뿐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변증학을 바울은 롬7장 한 장으로 정리를 했습니다.
신학에 있어서 자신을 모르고 하나님만 알면 숭배적인 신앙이 됩니다
현재의 신학의 맹점입니다. 그야말로 사상누각이죠. 마7장의 모래위에 세운 집입니다.
허무한 데 굴복하면서 아주 복잡하고 번거로운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행할 두 가지의 사역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알게 하는 전도의 사역입니다. 다른 하나는 욥과 같이 자신을
모르고 있는 고난을 당하고 있는 자들 곧 인생의 수고와 무거운 짐을 진자를 깨우치는
전도입니다. 스스로도 지긋지긋하게 싫은 자신이 안에 있다는 게 바로 롬7장입니다.
자신의 부조리를 다 알지만 다른 사람이 이를 건드리면 욥처럼 열을 받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치욕으로 배를 불리라고 까지 말씀하십니다.(애3:30)
해 아래에 새 것이 없는 이유는 인생은 항상 그대로입니다. 온 지구상 어디에 가도
인간은 다 똑 같습니다. 흑백 남녀노소 다 같습니다.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존재가 달라야 합니다. 확실한 정체감이 확립이 되어야 합니다.
욥기는 하나님이 쥐어짜십니다. 에노스는 연약하여 부숴지기 쉬운 그릇이란
뜻입니다. 욥과 같은 고난으로 치욕에 배부른 사람은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사람의
성격에 대해 기다릴 수 있으며 구원받아야 할 대상이 보입니다. 더 이상 연약하지 않습니다.
욥기는 찬양이 없습니다 오직 무고와 선과 악, 죄와 벌, 자백하라 뿐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선하게 보이면 그 사람의 상황이 좋구나 생각하면 됩니다.
사람이 싱글벙글하고 유들유들하면 뭔가 좋은 일이 있는가 보다 생각하면 됩니다.
그래서 사람을 부려먹으려면 무조건 칭찬해 주는 겁니다. 기분을 좋게 하는 거죠.
그러나 그 사람을 구원하려면 너를 좀 알아라 그 다음에 하나님을 알아라 하고
잔소리를 하게 됩니다. 사망을 짊어진 사형수 앞에 진수성찬이 무슨 소용입니까?
오직 십자가의 도뿐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외에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고전1:18, 24) 십자가의 도는 컴퓨터의 포맷과 같습니다. 죽여 버리고
새로 깔아버려라 내분이 될 소지가 있는 것들을 싹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히2장은 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하십니다. 모든 들은 것을 삼가라.
말씀을 듣고 믿음의 화합을 시켜라 그렇게 되면 살아있는 말씀이 된다고 하십니다.
모세의 40세 때와 80세 때는 완전히 다릅니다. 완전히 포맷이 된 겁니다.
욥38장에서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2절)고 하시는데
너는 그 때 어디에 있었느냐? 너는 뭐냐? 는 질문입니다. 네 근본이 무엇이냐?
하는 질문입니다. 이를 알게 하는 것은 많은 책 속에 성경 밖에 없습니다
창2:7절은 네페쉬 하야입니다. 셈할 가치도 없는 코로 숨 쉬는 존재일 뿐입니다(사2:22)
이와 같은 자기 발견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문제를 보고 자기의
문제를 알고도 견딜 만하니 다들 버티고 있습니다. 병도 견딜 만하면 병원에 안 갑니다.
이 싸움이 욥37장 까지 계속 됩니다. 이게 바로 아담 안에 죄 가운데 태어난 인간입니다.
욥38장부터는 고뇌 밖에 없는 철학으로 부터 회복이 되기 시작합니다.
결국 욥기는 구원의 노래 곧 감격으로 끝이 납니다. 그리고 시편으로 승격이 됩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진리를 알게하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