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1248년, 극락에서 상품상생 얻어 세상 제도하러 간 백련사 2대 천인(天因)
고종 35년(1248)
『동문선 권』 111, 『정명국사 후집(靜明國師後集)』
임계일(林桂一) 「만덕산 백련사 정명국사 시집 머리말(萬德山白蓮社靜明國師詩集序)」
문장을 만드는 것은 실로 불교에서는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당 · 송 때부터 고승 40여 명의 시집이 세상에 유행하였으니, 이 역시 숭상할 만한 일이다. 간혹 불교를 제대로 배우지 못한 자가 도리어 문장의 흐름에 기대어 스스로 제멋대로 사는 일도 있으나 유 · 불을 아울러 갖추고 도행이 고결한 경지에 이른 자는 지난 옛날에도 들어보기 힘들다.
(정명) 국사의 이름은 천인天因이요 성은 박씨니 연산군燕山郡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영리하고 널리 듣고 많이 기억하였으며, 글도 잘 써 칭송을 받았다. 뛰어난 선비로 천거되어, 성균관(賢關)에 들어가 곧장 과거를 보았으나 일생을 두고 춘관春官에 실패하니 유학하는 선비들이 다 아까워했다. 곧 세상을 떠나 동사생同舍生 허적許迪과 전 진사 신극정申克貞과 더불어 옷을 털고 먼 길을 떠나 만덕산에 이르러 원묘국사를 찾아뵈었다. 여기서 세상 인연을 끊을 수 있게 되자 송광산 심諶 화상을 찾아가 참선(曺溪) 요령을 터득하고, 다시 만덕산으로 돌아와 스승의 가르침을 쫓아 묘법연화경을 외며 비로소 보현도량(普賢道場)을 열었다. 두 해가 지나자 지리산에 돌아가 은거하였고, 또 석장錫杖을 비슬산毗瑟山에 옮겨 종적을 감춘 채 참(眞)을 닦고, 여러 해 만에 돌아왔다가, 나중에 원묘국사가 천태교관天台敎觀을 전수하여 과연 혜식慧識이 발달하고 기변機辨이 바람처럼 일어났다.
(원묘) 국사가 이미 늙게 되자 자기 자리를 물려주려고 하니, 스님은 곧 몸을 빼서 상락上洛 공덕산功德山으로 피하였다. 그즈음 현 상국相國 최자崔滋 공이 상락 태수로 있으면서 미면사米麵社를 세우고 맞아들이므로 스님은 거기서 늙을 작정이었는데, (원묘) 구사가 다시 사람을 보내어 압박하고 또 꾸짖기를, “어찌 의리를 저버리고 그렇게 가볍게 돌아서느냐” 하므로, 마지못하여 와서 원문院門을 주장하게 되었으니 중망衆望에 따른 것이다. 정미년(1247) 겨울에 몽골의 4차 침략(胡賊)을 피하여 상왕산 象王山 법화사法華社에 들어갔는데 가벼운 병을 앓으니, 임금이 내사를 보내어 편지를 전하고 약을 보내주었다.
이듬해(1248) 7월 칠석에 제다 원환圓皖에게 법통을 넘겨주고 따라서 부탁하기를, “내가 죽거든 후한 장사나 탑 같은 것을 세우지 말고, 지위 있는 이에게 찾아가서 비명碑銘도 받지 말고, 다만 버려둔 땅에 가서 화장하도록 하라” 하였다. 그날로 산 남쪽 용혈암龍穴庵으로 물러가 문을 닫고 일을 끊으며 담담하게 있었다. 8월 4일에 제자를 불러서 말하기를, “나는 떠나게 되었다” 하고, 편지를 만들어 최상국崔相國 · 정참정鄭叅政과 법제자 천길天吉에게 부쳤다.
5일이 되자,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 좌석에 올라 말소리를 가다듬고 말하기를, “하늘로 솟구치는 대장부의 기염氣焰을 어디에 쓰겠는가?” 하였다. 모신 자가 묻기를, “사방 맑은 경지가 앞에 있는데, 어느 곳에 노닐려고 하시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오로지 성품 경계(惟一性境)이니라” 하였다. 또 여러 중에게 말하기를, “병든 중이 10여 일 되도록 곡기를 끊으면 다리가 몹시 함이 없다. 그러나 법신이 넌지시 도와주면 다리 힘이 차츰 건강해진다. 그 다리 힘을 가지면 천당에도 갈 수 있고, 붇다 나라에도 갈 수 있으며, 5가지 기본 요소(五蘊)가 통하여 개운하고 삼계에 흔적이 없어진다” 하고, 게偈로 설하였다.
반 바퀴 밝은 달과 흰 구름,
가을바람 샘물 소리 보내는데,
거기는 어딘가.
시방 많은 붇다 나라 미래 불사 다 했구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죽으니 나이 44세요, 출가/붇다 나이(佛臘) 23세였다. 제자 정관正觀이 꿈에 어느 지방을 가니 사람이 크게 외치기를, “천인화상(因和尙)이 이미 상품上品을 얻어 (중생 제도하러) 세상으로 내려갔다(下世)고 했다” 하였고, 그밖에도 특이한 상서가 많이 행장行狀에 실려 있는데 여기서는 생략한다. 스님이 출가함으로부터 저술을 기뻐하지 아니하여, 사람과 주고받은 시문이 자못 많았으나, 제자가 기록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 10중 8, 9는 잃어버렸다. 그러나 말년의 유고를 여러 편 수습하여 3권으로 나누었는데, 내가 다행히 향사香社에 제명題名 하였으니, 평소의 분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스님이 죽은 뒤로 국가에 사고가 많아서 미처 비석을 세워 공덕을 찬양하지 못하였으나, 또한 스님의 본뜻이기도 하다. 다만 그 행적이 없어져 버리면 뒷사람이 어떻게 쓸 수 있을까 염려하던 차에 마침 도인이 있어 행장과 시집을 가지고 와서 보여주므로, 나는 감히 서툴다고 자처하지 않고 스님의 발자취를 대략 서술하였으나, 이는 다만 태산의 한 터럭을 전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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