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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이야기 스크랩 천 개의 고원과 천 하나의 고원
김정화 추천 0 조회 83 09.02.23 15:3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당신에게 드릴테니,  부디 기쁘게만 살아라, - 옮긴이 김재인

 

<천 개의 고원> 마지막 장을 읽고 고개를 드니 창밖에 노을이 찬란하다. 열락이다.

너무 아름다운 것은 때론 속절없이 슬프기조차 하다.

어디선가 부모를 잃고 자지러지게 우는 아이가 있을 것이고,  어디선가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공원을 달려가는 아이가 있으리라...

 

---------------

 

 

매끈한 공간과 홈이 패인 공간, 유목적 공간과 정주적 공간, 전쟁 기계가 전개되는 공간과 국가 장치에 의해 설정되는 공간- 이 두 공간의 본성은 전혀 다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두 공간을 단순하게 대립시킬 수도 있다. 지만 이보다 휠씬 더 복잡한 차이, 즉 잇달아 나타나게 될 대립항들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게 만들어보이는 차이를 학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게다가 이 두 공간은 사실상 서로 혼합된   채로만 존재한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매끈한 공간은 끊임없이 홈이 패인 공간 속으로 번역되고 이 공간을 가로지르는 한편 홈이 패인 공간을 부단히 매끈한 공간으로 반전되고 되돌려 보내진다.

 

- 질 들뢰즈 & 펠릭스 가타리, 김재인 옮김, <쳔 개의 고원- 자본주의와 분열증 2>, 새물결, 2001, p.907,

 

R

리좀

지층뿐 아니라 배치물도 선들의 복합체이다. 선의 첫번째 상태, 첫번째 종류는 다음과 같이 정해 질수 있다. 선은 점에, 사선은  수평선과 수직선에 종속되어 있다. 선은 구체적이건 아니건 윤곽을 만든다. 선이 그리는 공간은 홈이 패인 공간이다. 선이 구성하는 수많은 다양체는 언제나 우월하거나 보충적인 차원에서 <하나>에 종속되어 있다. 이런 유형의 선들은 그램분자적이며, 나무 형태의, 이항적, 원형적, 절편적 체계를 형성한다.

 

선의 두 번째 종류는 이와 전혀 다른 것으로, 분자적이면 "리좀" 유형을 하고 있다. 사선은 해방되거나 끊어지거나 비틀린다. 이 선은 이제 윤곽을 만들지 않으며, 대신 사물들 사이를, 점들 사이를 지나간다. 이 선은 매끈한 공간에 속해 있다. 이 선은 자신이 주파하는 차원만을 갖는 하나의 판(=면)을 그린다. 따라서 이 선이 구성하는 다양체도 이제 <하나>에 종속되지 않으며, 그 자체로 고름을 획득한다. 이것은 계급들의 다양체가 아니라 군중이나 무리의 다양체이다. 그것은 유목적이고 특이한 다양체이지 정상적거나 합법적인 다양체가 아니다. 그것은 생성의 다양체 또는 변형되는 다양체이지 요소들의 샐 수 있고 관계들이 질서 잡힌 다양체가 아니며, 퍼지 집합이지 정확한 집합이 아니다-----. 파토스의 관점에서 이 다양체들은 정신병, 특히 분열증에 의해 표현된다. 실천의 관점에서 이 다양체들은 마법에서 이용된다. 이론의 관잠에서 다양체들의 지위는 공간의 지위와 상호관련이 있으며, 그 역도 마찬가지다. 사막이나 초원이나 바다 유형을 한 매끈한 공간에는 서식지가 없거나 근절되지 않으며, 오히려 두번째 종류의 다양체가 서식한다. 

 

- 위의 책, pp. 962~964

 

 

천개의 고원

 

들뢰즈와 가타리의 이 책은 안티-오이디푸스와 함께 현대 서구 철학의 이정표를 세운 명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최근 국내에 널리 소개되고 있는 두 사람의 사상은 지난 90년대 한국 지성계를 풍미한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의 극단적인 모습과 함께 그것의 한계와 탈출구를 동시에 보여주는 점에서 철학사적으로 독창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특히 안티-오이디푸스가 아직도 '안티', 즉 반(反)의 '부정적 비판'의 위치에 머물러 있다면 생물학과 지질학, 분자생물학, 위상 기하학부터 시작해 인류학과 고고학의 최신 연구 성과까지 인간의 지성이 구축할 수 있는 모든 지식과 경험을 새롭게 '긍정적으로 종합'하고 있는 이 ?천 개의 고원?은 지난 20세기의 인문학의 온갖 모험이 서로 소통하고 접속하고 교통하는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철학이나 인문학 하면 언뜻 떠올리기 쉬운 방법론(methodology)이나 이데올로기(ideology) 비판 또는 어떤 이론을 구축하는 것을 겨냥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저자들의 말에 따르면 이 책은 우리의 모든 사유의 이면에 자리잡고 있는 사유하는 방법에 대한 사유(noology)를 겨냥하고 있다. 즉 방법을 정교하게 구축하는 대신 그러한 방법론이 어떤 근거에 기반하고 있는지를 질문하며, 이념의 논리(즉 ideo-logy)를 찾거나 이를 비판하는 대신 그러한 이념이 어떤 근거에서 발생하는 지를 고고학적으로 탐사하는 것이다. 이처럼 전부 15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각 장마다 음악, 미술, 국가론, 문학론, 정신분석비판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일관되게 저자들은 새로운 사유의 길을 여는 것을 최종 목적으로 하고 있다. 아마 이 책의 서론으로 두 저자의 이론적 전망을 제시하고 있는 1장의 '리좀'부터 읽기 시작하면 이들이 얼마나 흥미진진한 전인미답의 사유의 길을 열어나가고 있는지를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저자들의 비유를 빌리자면 이제까지의 서양의 사유는 일종의 장기 게임과 비슷한 것이었다. 즉 각각의 개체는 특정한 이름이 부여되어 '주체'가 되지만 이 주체는 실제로는 가는 길과 역할이 고정되어 있는 노예와 비슷했으며, 게다가 장기의 모든 게임은 국가의 왕을 지키는 것을 중심으로 짜여져 있다. 저자들은 이러한 논리를 '나무형 사유'라고도 부르는데, 뿌리와 줄기가 가지와 잎이 일직선으로 연결되어 있는 이러한 국가형 사유 모델이 지난 2000년 동안 서구의 현실과 사유를 동시에 지배해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철학은 항상 감성-오성-이성으로 연결되어 일직선으로 상승되어야 하며, 이것은 정치에서도 그대로 복제되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리스 철학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는 현인 왕(또는 철학자=왕이라는 이미지)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서양의 사유 방식은 항상 기호학을 법칙으로 하는 위계적이고 중심적이며, 천상적인 성격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궁정의 게임인 장기와 달리 동양의 재야 선비들의 게임인 바둑은 모든 돌=주체가 평등하며, 따라서 왕도 신하도, 주체도 객체도, 또 이미 정해져 있는 길도 없는 유목적 사유의 전형을 보여준다. 즉 최근의 인터넷처럼 모든 돌이 동일한 주체로서 다양한 연결로와 교통망을 통해 평등하게, 또 계속 새로운 사유를 함께 만들 나가며 여기저기서 즐거움을 창조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중심도, 주체도, 위계도 없는 사유의 전형인 셈이다. 그리고 장기가 기호학의 법칙을 추구한다면 바둑은 다양한 연결선들의 봉쇄와 차단과 연결과 접속(저자들은 조금 어렵지만 이것을 영토화, 탈용토화, 재영토화 등의 개념으로 부르고 있다)으로 짜여지는 거대한 네트(net)적 사유의 창조 행의 자체인 것이다.

최근 우리는 중심과 질서가 없어져 간다는 비탄조의 이야기를 자주 듣고있지만 두 사람은 이러한 상황을 새로운 창조와 변신의 기회로 멋지게 전환시켜 보여주고 있다. 두 사람의 생각은 질서냐 아니면 무질서냐, 또는 국가냐 아니면 아나키냐 하는 대립축으로 문제가 설정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비질서들'의 접속들이 새로운 시대의 모럴이 되어야 한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얼마나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는지를 금방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말은 1장의 리좀 대 나무부터 시작해 주체와 다양체, 매끈한 것과 홈이 패인 것, 국가의 포획 장치 대 유목민의 전쟁 기계 등의 새로운 대립쌍으로 변주되면서 기존의 모든 인문학과 사회과학, 고고학, 생물학의 성과들을 재검토하는 멋진 시험지가 되고 있다.

프랑스 철학자인 푸코는 "언젠가 21세기는 들뢰즈의 시대가 될 것이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이 책은 푸코의 그러한 평가가 결코 허언이 아니었음을 반증해주고도 남음이 있다. 게다가 다양한 반체계적, 반-시대적 사유들의 접속을 추구하고 있는 이 책은 인터넷과 함께 네티즌의 시대가 열린 지금 우리에게 우리가 열어나가야 할 정신적 지도를 너무나 정확하게, 또 흥미진진하게 그려주는 점에서 바로 시대의 철학을 정확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20세기의 지적 모험을 이렇게 요약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자본주의라는 질서에 대해 저항이 또 다른 질서에 대한 꿈을 낳았으나 또 다른 질서는 전혀 불가능하다는 절망이 무질서로의 급경사(예를 들어 68 운동과 모든 '질서'를 거부하는 '안티 오이디푸스')로 이어졌으나 저자들의 말대로 자본주의의 성벽은 워낙 강고한 것이었다(70-90년대 서구의 저항 운동의 침체).

하지만 이제 이들은 네트워크의 시대를 맞이하며 질서도, 그렇다고 또 다른 질서도, 또 무질서도 아닌 무수한 비질서들의 공존과 접속이라는 새로운 사유를 극한까지 밀고 나가고 있다. 예를 들어 과학에서도 이들은 '비정확한 것'의 제거를 위한 기준과 공리론을 중심으로 하는 다수자 과학, 또는 왕립 과학이 아니라 '비정확하지만 엄밀한 과학'을 추구하는 유목 과학, 또는 소수자 과학을 추구한다. 앞의 과학은 모든 것을 질서지우고, 서열화하지만 후자의 과학은 다양한 근접한 사유들의 공존과 접속을 겨냥한다. 아마 이만큼 우리 시대의 사유의 풍경과 나아갈 길을 흥미있게 제시하고 있는 철학책도 드물 것이다. 비정확하지만 엄밀한 것에 기반한 비질서의 유목적 사유들과 표준, 기준, 공리를 기반으로 한 왕립 과학의 대결이라는 틀.

'인문학의 위기' 운운하는 이 부박한 시대에 두 사람의 이 책은 인문학적 사유가 얼마나 아름답게, 저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우주에 까지 울려 퍼질 수 있는 멋진 방법들을 보여주는 점에서도 우리에게 신선한 자극과 충격을 던져주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특징을 한가지 더 들자면 그 동안 각 번역본마다 다르게 번역되어온 두 사람의 주요한 개념어들을 완벽하게 한글화시켜 놓았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역자는 plan de consistence라는 핵심적인 개념을 '고른판'이라는 말로 하부지층, 상부지충, 메타지층 등으로 추상적으로 번역되어온 개념들을 밑지층, 윗지층, 사이지층 등으로 완전히 한글화시켜 놓았다. 아마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은 지난 90년대 동안 꾸준히 소개되어 왔지만 막상 좋은 한국어 번역은 만들어내지 못한 우리의 번역 작업에 좋은 본보기가 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서평)

 

  

  

 

 

 

 

 

 정주민이 아니라 유목민으로 살아라!(장석주)

 

나는 책을 읽는 사람이다. 끊임없이, 쉬지 않고 읽는다. 나는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책을 먹고 산다. 책의 성분 요소인 질료들과 날짜와 속도들을 먹고 산다. 그렇게 함으로써 책이라는 다양체를 내화(內化)한다. 나는 하나의 이성, 하나의 주체가 아니라 다양한 이성, 여러 개의 주체다. 차라리 흩뿌려진 점들, 차이의 유목민들이다. 책은 하나의 점이며, 점들로 이루어진 선이다. 나는 그 점과 점들을 잇는다. 유목민은 오아시스라는 사막에 찍힌 점들을 찾아 움직이지만 실은 움직이지 않는 자다. 정주민들은 정착하기 위해서 이동하지만 유목민들은 떠도는 도중에 멈춘다. 유목민의 길은 정주민들이 만든 길과는 근본에서 다르다. 정주민의 길은 고속도로와 같이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며 사회 공간과 접속하는 길이다. 유목민의 길은 실존의 경로들이고, 불확정적이고 무규정적인 영역을 가로지르며 개체와 집단 들을 잘게 쪼갠다. 정주민들의 길은 울타리와 울타리 간의 경로이고 홈이 패인 도로인 까닭에 경로를 벗어날 수 없으며 오로지 그 길을 따라서만 갈 수 있다. 그러나 유목민의 길들은 언제라도 샛길로 빠지고 지나간 곳은 다 길이 되니, 그 길은 하나의 경로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사방으로 열린 길이다.

 

세계는 거대한 사막이고 책은 사막 위에 있는 오아시스다. 나는 오아시스를 찾아 사막을 횡단하는 여행자다. "책에는 대상도 주체도 없다. 책은 갖가지 형식을 부여받은 질료들과 매우 다양한 날짜와 속도들로 이루어져 있다. 책이 어떤 주체의 것이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이 질료의 구실과 이 질료의 관계들의 외부성을 무시하게 된다. 지질학적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사람들은 선한 신을 꾸며낸다. 다른 모든 것처럼 책에도 분절선, 분할선, 지층, 영토성 등이 있다. 하지만 책에는 도주선, 탈영토화 운동, 지각 변동 운동들도 있다. 이 선들을 좇는 흐름이 갖는 서로 다른 속도들 때문에, 책은 상대적으로 느려지고 엉겨붙거나 아니면 반대로 가속되거나 단절된다. 이 모든 것, 즉 선과 측정 가능한 속도 들이 하나의 배치물을 구성한다. 책은 그러한 배치물이며, 그렇기에 특정한 누군가의 것이 될 수 없다. 책은 하나의 다양체다." 책은 동일성이 아니라 차이의 들판으로 나가게 만들며, 있음을 넘어서서 생성으로 나를 내몬다. 책은 혈통 모델이 아니라 이질성의 집합체인 반(反)계보로 나를 이끈다. 책은 나의 내면 형질을 바꾸고 나는 책을 통해 새로운 세계와 접속하고 끊임없이 재배치된다. "책은 세계의 탈영토화를 확실하게 해주지만 세계는 책을 재영토화하며, 다시 책은 스스로 세계 안에서 탈영토화한다." 나는 하나의 지층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책과 더불어 탈영토화하고, 세계에 의해 재영토화했다가, 다시 책과 더불어 탈영토화하는 존재다.

 

다시 자본주의가 미쳐 날뛰는 계절이 돌아왔다. 자본주의는 그 본질에서 분열증 자체이기 때문에 이상한 일이 아니다. 주기적으로 위기는 돌아오고 증식하고 소멸하며 다시 그 과정을 반복한다. 환투기와 주식 투매의 미친 바람이 불고, 자본은 이익이 있는 곳으로 순간 휘몰아쳤다가 자양분을 빨아먹고 다시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자본의 유동적 흐름은 포식자처럼 취약한 외환시장과 주식 거래를 삼켜버린 뒤 소화할 수 없는 뼈들만 뱉어낸다. 전 지구적 규모의 자본주의라는 정글에 방목된 사자들은 신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운용되는 토끼들을 사냥하기에 여념이 없다. 사자들에게 도덕과 인의를 가지라고 말할 수는 없다. 사자는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사자는 이성을 가진 주체가 아니라 차라리 자본주의적 욕망이라는 유령이다. 우리는 날마다 그 유령과 싸운다. 최근에 다시 <천 개의 고원>을 읽는다. 이미 여러 번 통독한 책을 다시 읽고 또 읽는다. 이 책은 유령에 대처하는 방법, 그것과 싸우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점유하고, 거주하며, 보존하는 영토에서 끊임없이 달아나라! 늑대 한 마리가 아니라 늑대 무리로 달아나라! 무리로 달아나야만 하나의 도주로가 아니라 천 개의 도주로를 만들 수 있다. 하나는 붙잡히지만 천 개는 붙잡히지 않는다. 경로를 따르지 말고 그것을 자주 이탈하라! 내가 어디로 움직일지 그들이 알 수 없게 하라! 정주민들이 아니라 유목민으로 살아라! "유목민들은 사막을 만들고 동시에 사막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들은 탈영토화의 벡터들이다." <천 개의 고원>은 화폐와 노동의 흐름을 장악하고 있는 국가-기계의 포획에서 도망가도록 부추긴다. 국가-기계는 수많은 금기의 거미줄을 만든다. 제도들과 정책, 법과 치안의 그물로 국민을 포획하고 국가라는 지층에 편입시킨다. 지층화. 그 금기들은 위반의 욕망을 도발하고, 지층화에 저항하도록 한다. 나는 항상 붙잡아두려는 일체의 포획 장치에서 탈주 중이다. 조세와 병역 의무를 지우는 국가의 다양한 포획 장치로부터, 자본주의의 기계들, 이를테면 미국 정부, 중앙은행, 연방준비제도이사회로부터. 나는 소수-되기를 원한다. 나는 울타리도 척도도 없는 유목민적 노모스다.

 

지난 10년간 내가 읽은 책들 중에서 가장 문제적인 책은 <천 개의 고원>이다. 무수한 책 중에서 이 책은 단 한 권의 책이다. 리좀-나무, 탈영토화-재영토화, 무리-군중, 사본-지도, 분자-그램분자, 소수-다수, 유목성-정주성, 전쟁 기계-국가 장치, 매끈한 판-홈이 팬 판과 같은 무수한 이항 대립의 쌍을 변주하며, 사유의 방식, 기능, 양태 들에 대해 설명한다. 이 책은 내가 읽은 책 중에서 가장 난삽하면서도 가장 흥미로운 지적 자극을 준 책이다. 이 책은 장들이 아니라 열 다섯 개의 고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내 관심과 흥미의 대상이 된 고원들은 첫째 고원 '서론: 리좀', 2장 '1914―늑대는 한 마리인가 여러 마리인가?', 일곱 번 째 고원 '0년―얼굴성', 10장 '1730―강렬하게-되기, 동물-되기, 지각 불가능하게-되기', 열두번 째 고원 '1227―유목론 또는 전쟁 기계' 등이다. 들뢰즈·가타리는 차이의 철학, 혹은 욕망의 미시정치학에 대해 말하기 위해 생물학과 언어학과 음악학과 경제학과 정치학을 가로질러간다. "우리가 말하고 있는 건 다름 아니라 다양체, 선, 지층과 절편성, 도주선과 강렬함, 기계적 배치물과 그 상이한 유형들, 기관 없는 몸체와 그것의 구성 및 선별, 고른판, 그 각 경우에 있어서의 측정 단위들이다." 이것이 들뢰즈·가타리가 요약한 이 책의 주제다. 리좀, 동물-되기, 소수-되기, 영토화와 탈영토화, 포획, 탈주선, 지층과 지층화, 기관 없는 신체, 얼굴성, 추상기계, 배치, 매끈한 공간과 홈이 팬 공간, 공리계의 접합접속… 등등 끝도 없이 이어지는 무수의 자의적 개념이 춤추기 때문에 쉽게 해독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여러 번 읽는 수밖에 없다. 이해할 수 없다면 친밀해져라! 이것이 내가 취한 방식이다.

 

서구 자본주의는 리좀과 풀을 잃어버렸다. 풀은 유일한 출구인데, 그것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에서 위기는 주기적으로 반복된다. 위기는 자본의 생리와 그 한계에 갇힌 자본주의에 내재된 불가항력적인 형질이다. 자본주의는 도박판에서 판돈이 움직이는 원리와 마찬가지로 움직인다. 거기에는 피도 눈물도 없다. 오로지 강자 독식의 원리만 작동할 뿐이다.

 

리좀은 무엇인가? "위계적인 방식으로 소통하며 미리 연결되어 있으며 중앙집중화되어 있는 체계와 달리, 리좀은 중앙집중화되어 있지 않고, 위계도 없으며, 기표작용을 하지도 않고, '장군'도 없고, 조직화하는 기억이나 중앙 자동장치도 없으며, 오로지 상태들이 순환하고 있을 뿐인 하나의 체계이다." 풀과 리좀을 잃어버린 그것은 자꾸 경직되고 지층화한다. 황폐화한 그 영토는 조만간 잡초에 의해 뒤덮일 것이다. "결국 잡초가 승리자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잡초는 중국, 바로 동양적 성분들을 가진 그 무엇이다. 서구 자본주의를 모방하고 따라가서는 그 아류밖에 될 수가 없다. "자본주의는 모든 종류의 구성체의 교차점에 있으며 언제나 본성상 새로운 자본주의이며, 동양적인 얼굴과 서양적인 얼굴을 발명하고 그 둘을 개조해감으로써 최악의 자본주의를 만들어간다." 그 최악의 자본주의를 따라가야 하는가? 저 제국들이 강제하는 그 경로를 버려야 산다. 시작도 끝도 없고 언제나 중간을 취하며 중간에서 자라고 넘치는 리좀을 찾아야 한다. 리좀의 차원들 혹은 움직이는 방향들, 다양체로, 소수-되기로 살아야 한다. 우리 안에 있는 잡초의 성분들을 연구하고 잡초-되기라는 독자적인 길을 가야 한다. 잡초만이 무성해지고, 무성해진 잡초들이 마침내 들을 덮어버린다. <천 개의 고원>은 우리에게 음악을 들려준다. 미네르바의 부엉이처럼 외치면서 노래한다. 귀를 기울여보라. "풀을 따라가라. 물길을 따라가라"는 노래가 들리지 않는가. <장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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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국인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언어와 한국어를 대립시킬 때, 그들의 언어는 소수의 소수자 언어로 존재한다. 반면 외국인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한국어-되기를 통해 다수저로서의 한국어를 흔들 때, 이들의 한국어-되기는 능동적으로 새로운 한국어를 창조해나간다. 소수자-되기가 결코 소수자-이기여서는 안 되는 이유, 문자 그대로 소수인 소수자-이기들이 아무리 많이 생겨나도 생성의 능동성을 취할 수 없는 이유, 소수자 문학이 소수어로부터가 아니라 다수어로부터 출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수자-되기의 윤리학이 보편적인 소수자 운동의 선험적 조건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227쪽)

 

   <천하나의 고원-소수자 윤리학을 위하여>는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사진)와 펠릭스 가타리의 공저 <천 개의 고원>(1980)의 해설이자 보충이다. 책의 제목이 '천하나의 고원'인 것은 <천 개의 고원>의 주요 개념을 그의 관점에 따라 충실하게 설명하는 데서 한발 더 나아가 그 책의 미흡한 부분을 보완함으로써 하나의 고원을 덧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새로 배치된 고원이 이 책의 부제에 담긴 '소수자 윤리학'이다. 윤리학(에티카)의 관점에서 <천 개의 고원>을 다시 읽은 것이 이 책인 셈이다.

 

들뢰즈의 관심은 <차이와 반복> <의미의 논리>와 같은 전기의 순수 이론철학에서 가타리와 함께 작업한 <안티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과 같은 후기의 실천적 사회철학으로 옮겨갔다. 특히 <천 개의 고원>은 들뢰즈 사유의 물줄기가 모두 모여들어 넘실대는 저수지와 같은 저작이다. 전기의 존재론적 사유가 저류를 이루고 그 위에 사회철학적 사상이 난만하게 꽃핀 연못이라고도 할 수 있다. <천하나의 고원>은 <천 개의 고원>의 이런 특성을 고려해 존재론에서 윤리학으로 설명을 진전시킨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들뢰즈의 존재론과 윤리학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음이 드러난다.

 

지은이가 <천하나의 고원>에서 가장 먼저 해명하는 것이 '배치'라는 개념이다. '배치'는 <천 개의 고원>을 떠받치고 있는 개념적 토대이자 전략적 거점이다. 이 배치 개념을 이해하려면, 배치의 요소라 할 '기계'라는 독특한 개념에 먼저 익숙해져야 한다. 들뢰즈는 각종 생명체들을 포함해 모든 개체들을 두고 '기계'라고 부른다. 왜 기계인가. 다른 것들과 접속함으로써 그 자신의 속성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개체들은 각자 변치 않는 단일한 속성을 지닌 단독체가 아니라 다른 것들과 어떤 식으로 연결되느냐에 따라 성격이 달라지는 존재다. 가령 '혀'를 예로 들어보면, 혀-기계는 관계의 성격에 따라 '거짓말하는 혀'가 되기도 하고 '맛보는 혀'가 되기도 하고 '사랑하는 혀'가 되기도 한다. 기계는 접속을 통해 기능이 규정되는 존재인 셈이다.

 

이 기계들이 접속하여 선을 이루고 나아가 면을 이루면, 그 장을 가리켜 '배치'라고 한다. 기계들의 배치가 말하자면 '기계적 배치'다. 그러나 배치에는 '기계적 배치' 외에 '언표적 배치'도 있다. 야구경기를 예로 들어보자. 야구는 야구장에 심판과 선수가 모여 공과 글러브와 방망이를 들고 하는 경기다. 이 배치가 바로 기계적 배치다. 동시에 야구가 성립하려면, 규칙이 있어야 한다. 그 규칙이 바로 '언표적 배치'다. 이 기계적 배치와 언표적 배치가 합쳐져 야구경기를 성립시킨다. 세계란 기계적 배치와 언표적 배치가 합쳐진 장이다.

 

들뢰즈는 배치를 이루는 모든 기계를 가리켜 '욕망하는 기계'라고 말한다. 이때의 욕망은 '차이를 생성하는 의욕'을 뜻한다. 들뢰즈는 모든 개체에 이런 의욕이 있다고 본다. 그러니까 모든 개체의 존재양식은 '차이생성'이다. 스스로 변화하고 달라지는 종결 없는 과정이 개체들의 운명인데, 이 차이생성의 일시적 응결 형태가 존재이고 동일성이다. "동일성의 섬들은 차이생성의 바다 위에 구성되고 해체된다."

 

이 욕망하는 기계들의 배치는 그 욕망 때문에 끝없이 변화할 수밖에 없다. 배치가 만들어지는 것을 '영토화'라고 하면, 그 배치가 풀리는 것이 '탈영토화'이고, 그 배치에서 벗어나는 것이 '탈주'다. 욕망이 있는 한 기존의 배치를 뛰어넘으려는 움직임은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다른 삶, 다른 존재방식, 지금의 나를 규정하고 있는 울타리 바깥을 꿈꾸게 된다." 이때 "그 배치를 바꾸고 싶은 욕망, 그 욕망은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는 생명의 불꽃과도 같은 것이다." 이렇게 다른 삶으로, 바깥으로 이행하는 것을 두고 들뢰즈는 '되기'(becoming)라고 부른다.

 

이 '되기'의 존재론적 지평 위에서 이제 윤리학적 사유가 펼쳐진다. '되기'는 차이를 가로지르는 실천적 활동이다. 흑인과 백인의 차이, 남자와 여자의 차이에서 볼 수 있듯 차이가 차이로 남아 그 차이들의 관계가 굳어질 때, 이 차이를 뚫는 저항과 창조의 행위가 '되기'이다. "되기론은 동일성의 고착, 그리고 그렇게 고착된 동일성들 사이에 성립하는 차이의 윤리를 극복하기 위한 사유다." '흑인 되기' '여성 되기' '아이 되기' '장애인 되기'가 되기의 구체적인 모습이다. '하루 감옥 체험'이나 '시각장애인 체험'은 이 되기의 극히 작은 사례라고도 할 수 있다. 여기서 지은이는 되기가 진정한 윤리적 내용을 획득하려면 언제나 '소수자 되기'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소수자 되기'는 모든 되기의 보편적 지평이며, 정치적 실천의 윤리적 토대다. 소수자 되기를 통해, 자기 내부의 '다수자'를 극복하고 기존의 지배질서를 바꿔 새로운 배치를 창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명섭)

 

『천의 고원』(번역본 제목은 '천개의 고원')은 들뢰즈/가타리의 『안티오이디푸스』로 시작된 자본주의와 분열증 시리즈의 속편이자 들뢰즈의 대표저작이다. "21세기는 들뢰즈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푸코의 예언은 『 천의 고원』을 통해 실현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에서도 들뢰즈에 대한 관심은 199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이어져오고 있으며, 수많은 포스트모던 담론이 유행처럼 소개되었다 잊혀져간 지금도 『천의 고원』과 관련된 논쟁만큼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이 책은 1990년대부터 들뢰즈의 텍스트를 비롯한 탈근대적 사유에 대해 깊고 넓게 연구해온 저자 이정우가 『천의 고원』에 대해 해설하고 새로운 독해를 제안하는 책이다. 저자는 철학아카데미를 설립한 초창기부터 『천의 고원』에 대한 독해를 계속해왔으며 이 저작의 집필을 위해 오랜 시간 준비해왔다. "한국에서 이 텍스트만큼 희화화되고 속화된 텍스트도 찾기 힘들 것"이라 단언하는 저자는 꼼꼼하게 『천의 고원』 기본 개념들(배치, 다양체, 탈기관체, 리좀, 탈주선, 되기 등)에 대한 기존 해석의 오류들을 지적하고 들뢰즈 사유의 전체를 아우르는 대안적 해석을 제시한다. 이런 지적들이 그간 간헐적으로 발표된 글들에 실리기도 했지만, 최종적으로 정리해내는 것은 이 책이 최초이다.


저자는 이 과정에서 기존 번역의 오류들도 꼼꼼하게 지적하고 있으며, 나름의 번역어들을 제안하기도 한다. 가령 흔히 '기관 없는 신체'로 번역되는 'Corps sans Organes, CoS'를 저자는 ' 탈기관체'로 번역하는데, 이는 '기관 없는 신체'라는 번역어가 '바깥의'/'탈'의 의미를 간과함으로써 들뢰즈의 사유에서 '재구축'과 '재구성'이라는 측면을 보지 못하고 단순한 '해체'로 읽어내는 중요하고 근본적인 오독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는 『안티오이디푸스』와 『천의 고원』에서 이 용어가 사용된 방식의 차이를 보지 못하고, '얼굴 없는 카오스'로 가는 과정이 아닌 새로운/창조적 삶의 방식들을 구성해내고자 한 들뢰즈의 핵심적인 문제의식을 읽어내지 못하는 것이다.

한국 지식계에서 『천의 고원』에 대한 오해와 오독이 절정에 이른 것은 이른바 '노마디즘 논쟁'을 통해서라고 할 수 있다. 『천의 고원』 번역 이후에도 여러 논쟁이 있었지만, 특히 이 논쟁은 천규석의 『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의 출간 이후 『녹색평론』과 『교수신문』, 『한겨레신문』 등의 지면을 통해 이진경, 홍윤기 등의 철학자들이 참여하며 이루어졌는데, 개념적 합의에도 이르지 못한 채 학술 논쟁이라 부르기 어려울 정도로 거친 이야기들만을 쏟아내며 허망하게 중단된 바 있다. 이 책은 이 논쟁을 비롯한 한국 사회에서 들뢰즈에 관한 다양한 오독과 오해에 대한 최종적인 답변으로 읽히기도 한다.


특히 저자는 『천의 고원』의 개념적 구분들을 형식논리적 대립으로 이해하거나 처음부터 가치론적으로 실체화하는 태도를 강하게 문제 삼는다. 가령 "정주적인 것은 나쁜 것이고 유목적인 것은 좋은 것", " 층화는 나쁜 것이고 탈기관체는 좋은 것", "지표공간(홈 패인 공간)은 나쁜 것이고 특질공간(매끄러운 공간)은 좋은 것"이라는 식의 형식논리적 대립과 가치론적 실체화가, 비생산적인 논쟁들이 발 디딜 수 있는 '속류' 노마디즘의 유행을 조장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런 개념적 구분을 현실에 적용하고자 할 때 우선은 그것을 이미지/인상이 아닌 '개념'으로 정확히 이해하는 것과 지역적?시대적?집단적인 무수한 맥락들을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들뢰즈/가타리의 사유를 '노마디즘'으로서 단순화하고 낭만화하는 것, 기업가들을 매혹시키는 이른바 '디지털 유목주의', 또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유목론(예컨대 몽골 초원에 대한 향수), 자크 아탈리식의 미래학적 노마디즘 등등과 분명하게 구분해야 할 것이다. 'communism'/'socialism'이라는 말이 무수한 맥락을 가지듯이(극좌적 공산주의로부터 극우적 공동체주의 또는 국가사회주의=나치즘까지) 'n omadisme'(이것을 굳이 하나의 용어로서 받아들인다면) 또한 무수한 맥락들을 가진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초보적인 구분조차 하지 않을 때, 천규석의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 같은 '책'이 더 이상 조악할 수 없는 방식으로 보여주었듯이, 들뢰즈/가타리 사유에 대한 성실한 이애 없이 엉뚱하게 다른 형태의 '노마디즘/유목주의'들을 이들의 사유에 덮어씌우는 우를 범하게 된다."(43쪽)

이러한 비판적 지적은 들뢰즈의 사유를 더 적극적으로 읽기 위한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특히 2장에서는 들뢰즈의 철학이 극복하고자 했던 곳으로 텍스트를 되돌이키며, 이들의 사유를 시대착오적으로 퇴행시키는 다양한 종류의 오독들이 하나하나 비판된다. 들뢰즈의 사유는 근대적 주체론(『천의 고원』에서 말하는 주체는 수동성과 능동성이 겹쳐진 이중적 존재로서의 주체, 근대 이후의 배치들에서 성립하는 주체이다, 149쪽 참조), '속류' 유물론(『천의 고원』에서 말하는 신체는, 속류 유물론이나 생물학적 환원주의를 극복한 것이다. 이들의 신체[기계]는 언표적 배치와 관계 맺으며 새로운 사건/의미를 창출해가는 존재이다, 119쪽, 105쪽 참조), 단순한 구조주의를 넘어서고자 했으며, 이러한 차원으로 논의를 환원시키는 독해들은 무엇보다 텍스트 자체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결여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제도를 거부하는 것과는 관계없다. 요점은 새로운 제도를 창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본질도 없는 무규정의 상태와는 관계없다. 그것은 유목적인, 비정확한 본질을 창조해내는 문제이다. 창조를 거부로 오인할 때, 가로지르기의 사유, '노마디즘'의 사유는 할리우드 청춘영화 같은 것으로 오해된다. 문제가 되는 것은 기성의 수목형 체제를 거부하는 데 있지 않다. 문제는 매개를 통해 수목형을 이루는 특수성들의 체계에서 탈주해 어떻게 특이존재='이-것'을 창조하는가이다. [....] 상징계를 초월하는 실재계의 기과함과의 마주침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미학, 그것도 좀 징그러운 미학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런 마주침(그런 것이 있다면)을 새로운 윤리와 정치를 구성하는 동력으로 바꾸어나가는 일이다."(51쪽)

"들뢰즈의 주체론은 그의 최초의 저작인 『경험주의와 주체성』에서 시작해 '시간의 세 가지 종합'에 근거한 주체론(『차이와 반복』 2장), 사건론 및 관점론과 연계되어 전개된 주체론(『의미의 논리』), (가타리와 더불어) '욕망' 개념과 '기계' 개념을 매개해 새롭게 정식화한 주체론(『안티오이디푸스』), '배치'와 연계되어 좀더 구체화된 주체론(『천의 고원』)으로 극히 긴 세월에 걸쳐서 복잡하게 '진화'해간 주체론이다. 들뢰즈의 사유에는 주체가 없다(이것은 구조주의를 극복하고 나온 그의 사유를 오히려 구조주의로 회귀시켜 이해하는 것이다)라든가 주체를 절대화한다(이것은 들뢰즈의 주체를 상징계를 떠난 어떤 추상적인 존재로 오인하는 것이다. 그러한 주체론은 낭만적인, 비현실적인 주체론에 불과하다. 모든 주체는 상징계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진정한 '주체'는 상징계와 투쟁을 시작할 때 비로소 탄생하며, 그것을 변형시켜나가면서 스스로도 변형시켜가는 존재이다)는 식의 생각은 피상적인 관찰일 뿐이다."(52쪽)


그렇다면 왜 오늘날 우리가 하필 『천의 고원』을 읽어야 하는가? 왜 제대로 읽어야 하는가? 그것은 이 텍스트가 오늘날 지배의 방식을 이해하고 그에 따른 실천의 방식을 정초할 윤리학(에티카)의 출발점인 ' 생성존재론'이기 때문이다.

"개체도, 유기적 조직체도, 추상적 존재도, 언어적 구성물도, 항구적 실체도 아닌, 즉 기존의 존재론으로는 포착하기 힘든 이런 존재, 그럼에도 강의, 야구 경기, 시위, 결혼식, 선거 등등 너무나도 일상적인 존재, 우리의 매일의 삶을 구성하는, 너무나도 일상적이고 당연한 것들을 그러나 전혀 새로운 눈길로, 참신한 존재론으로 포착하기. 사유한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34쪽)

"가장 가까운 것을 가장 깊은 시선으로 바라보기. 우리의 삶을 가득 채우고 있는 배치들, 사건들에 더 적절하고 참신한 존재론을 부여하기. 그리고 그런 존재론으로 파악된 삶으로부터 윤리학적-정치학적 귀결들을 이끌어내기. 요컨대 배치의 존재론을 수립하고 그에 근거해 새로운 실천철학='에티카'를 끌어내기, 이것이 『천의 고원』의 목적이다."(33쪽)

저자는 이 '생성존재론'을 이해하기 위해 배치와 리좀의 개념에서 시작해 기호체제와 탈주의 개념을 거쳐 드디어 '되기'의 고원으로 들어선다. 이 고원은 윤리학과 정치학이 만나는 지점이며, 이러한 독해를 통해 들뢰즈의 사유는 '소수자 윤리학/정치학'이라는 문제의식으로 재정립된다. 그래서 이 책은 단순한 해설서나 소개서가 아니라 저자 이정우의 문제의식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참고문헌이 된다. 이 책의 3장에서는 ' 소수자', '다양체', '몰적 주체와 대비되는 분자적 주체'에 대한 개념적 이해를 바탕으로 한국 사회에도 적용될 수 있는 수많은 비판적 사유의 단초들이 제시된다.


저자에 따르면 '소수자-되기', '여성-되기', '분자-되기'는 니체, 베르그송, 화이트헤드, 하이데거의 생성존재론, 즉 동일성에서 차이로 이행하는 사유를 넘어서기 위한 어떤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 개인'의 차원에서 논의되는 '정체성의 정치', '차이의 정치'를 넘어선 어떤 것이기도 하다.(그것을 말하자면, 노동 운동에서 소수자 운동으로 넘어가는 차원의 문제의식이 아니라 소수자 운동에서 노동 운동으로 넘어가는 차원의 문제의식인 것이다. 이것이 단순한 회귀나 퇴행이 아님은 말할 필요도 없다. 228~231쪽 참조) '소수자'란 생물학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천의 고원』을 경유한 이정우의 사유에서, 탈정치화한 포스트[脫]모더니즘을 새롭게('다시'가 아니라) 탈피하여 정치화하기 위한 방향, 탈근대의 비판적 사유를 새롭게 탈피하여 창조적 사유로 거듭나게 하기 위한 방향을 그 단초나마 일별할 수 있다.(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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