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드릴테니, 부디 기쁘게만 살아라, - 옮긴이 김재인
<천 개의 고원> 마지막 장을 읽고 고개를 드니 창밖에 노을이 찬란하다. 열락이다. 너무 아름다운 것은 때론 속절없이 슬프기조차 하다. 어디선가 부모를 잃고 자지러지게 우는 아이가 있을 것이고, 어디선가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공원을 달려가는 아이가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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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끈한 공간과 홈이 패인 공간, 유목적 공간과 정주적 공간, 전쟁 기계가 전개되는 공간과 국가 장치에 의해 설정되는 공간- 이 두 공간의 본성은 전혀 다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두 공간을 단순하게 대립시킬 수도 있다. 지만 이보다 휠씬 더 복잡한 차이, 즉 잇달아 나타나게 될 대립항들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게 만들어보이는 차이를 학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게다가 이 두 공간은 사실상 서로 혼합된 채로만 존재한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매끈한 공간은 끊임없이 홈이 패인 공간 속으로 번역되고 이 공간을 가로지르는 한편 홈이 패인 공간을 부단히 매끈한 공간으로 반전되고 되돌려 보내진다.
- 질 들뢰즈 & 펠릭스 가타리, 김재인 옮김, <쳔 개의 고원- 자본주의와 분열증 2>, 새물결, 2001, p.907,
R 리좀 지층뿐 아니라 배치물도 선들의 복합체이다. 선의 첫번째 상태, 첫번째 종류는 다음과 같이 정해 질수 있다. 선은 점에, 사선은 수평선과 수직선에 종속되어 있다. 선은 구체적이건 아니건 윤곽을 만든다. 선이 그리는 공간은 홈이 패인 공간이다. 선이 구성하는 수많은 다양체는 언제나 우월하거나 보충적인 차원에서 <하나>에 종속되어 있다. 이런 유형의 선들은 그램분자적이며, 나무 형태의, 이항적, 원형적, 절편적 체계를 형성한다.
선의 두 번째 종류는 이와 전혀 다른 것으로, 분자적이면 "리좀" 유형을 하고 있다. 사선은 해방되거나 끊어지거나 비틀린다. 이 선은 이제 윤곽을 만들지 않으며, 대신 사물들 사이를, 점들 사이를 지나간다. 이 선은 매끈한 공간에 속해 있다. 이 선은 자신이 주파하는 차원만을 갖는 하나의 판(=면)을 그린다. 따라서 이 선이 구성하는 다양체도 이제 <하나>에 종속되지 않으며, 그 자체로 고름을 획득한다. 이것은 계급들의 다양체가 아니라 군중이나 무리의 다양체이다. 그것은 유목적이고 특이한 다양체이지 정상적거나 합법적인 다양체가 아니다. 그것은 생성의 다양체 또는 변형되는 다양체이지 요소들의 샐 수 있고 관계들이 질서 잡힌 다양체가 아니며, 퍼지 집합이지 정확한 집합이 아니다-----. 파토스의 관점에서 이 다양체들은 정신병, 특히 분열증에 의해 표현된다. 실천의 관점에서 이 다양체들은 마법에서 이용된다. 이론의 관잠에서 다양체들의 지위는 공간의 지위와 상호관련이 있으며, 그 역도 마찬가지다. 사막이나 초원이나 바다 유형을 한 매끈한 공간에는 서식지가 없거나 근절되지 않으며, 오히려 두번째 종류의 다양체가 서식한다.
- 위의 책, pp. 962~964
들뢰즈와 가타리의 이 책은 안티-오이디푸스와 함께 현대 서구 철학의 이정표를 세운 명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최근 국내에 널리 소개되고 있는 두 사람의 사상은 지난 90년대 한국 지성계를 풍미한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의 극단적인 모습과 함께 그것의 한계와 탈출구를 동시에 보여주는 점에서 철학사적으로 독창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특히 안티-오이디푸스가 아직도 '안티', 즉 반(反)의 '부정적 비판'의 위치에 머물러 있다면 생물학과 지질학, 분자생물학, 위상 기하학부터 시작해 인류학과 고고학의 최신 연구 성과까지 인간의 지성이 구축할 수 있는 모든 지식과 경험을 새롭게 '긍정적으로 종합'하고 있는 이 ?천 개의 고원?은 지난 20세기의 인문학의 온갖 모험이 서로 소통하고 접속하고 교통하는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정주민이 아니라 유목민으로 살아라!(장석주)
나는 책을 읽는 사람이다. 끊임없이, 쉬지 않고 읽는다. 나는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책을 먹고 산다. 책의 성분 요소인 질료들과 날짜와 속도들을 먹고 산다. 그렇게 함으로써 책이라는 다양체를 내화(內化)한다. 나는 하나의 이성, 하나의 주체가 아니라 다양한 이성, 여러 개의 주체다. 차라리 흩뿌려진 점들, 차이의 유목민들이다. 책은 하나의 점이며, 점들로 이루어진 선이다. 나는 그 점과 점들을 잇는다. 유목민은 오아시스라는 사막에 찍힌 점들을 찾아 움직이지만 실은 움직이지 않는 자다. 정주민들은 정착하기 위해서 이동하지만 유목민들은 떠도는 도중에 멈춘다. 유목민의 길은 정주민들이 만든 길과는 근본에서 다르다. 정주민의 길은 고속도로와 같이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며 사회 공간과 접속하는 길이다. 유목민의 길은 실존의 경로들이고, 불확정적이고 무규정적인 영역을 가로지르며 개체와 집단 들을 잘게 쪼갠다. 정주민들의 길은 울타리와 울타리 간의 경로이고 홈이 패인 도로인 까닭에 경로를 벗어날 수 없으며 오로지 그 길을 따라서만 갈 수 있다. 그러나 유목민의 길들은 언제라도 샛길로 빠지고 지나간 곳은 다 길이 되니, 그 길은 하나의 경로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사방으로 열린 길이다.
세계는 거대한 사막이고 책은 사막 위에 있는 오아시스다. 나는 오아시스를 찾아 사막을 횡단하는 여행자다. "책에는 대상도 주체도 없다. 책은 갖가지 형식을 부여받은 질료들과 매우 다양한 날짜와 속도들로 이루어져 있다. 책이 어떤 주체의 것이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이 질료의 구실과 이 질료의 관계들의 외부성을 무시하게 된다. 지질학적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사람들은 선한 신을 꾸며낸다. 다른 모든 것처럼 책에도 분절선, 분할선, 지층, 영토성 등이 있다. 하지만 책에는 도주선, 탈영토화 운동, 지각 변동 운동들도 있다. 이 선들을 좇는 흐름이 갖는 서로 다른 속도들 때문에, 책은 상대적으로 느려지고 엉겨붙거나 아니면 반대로 가속되거나 단절된다. 이 모든 것, 즉 선과 측정 가능한 속도 들이 하나의 배치물을 구성한다. 책은 그러한 배치물이며, 그렇기에 특정한 누군가의 것이 될 수 없다. 책은 하나의 다양체다." 책은 동일성이 아니라 차이의 들판으로 나가게 만들며, 있음을 넘어서서 생성으로 나를 내몬다. 책은 혈통 모델이 아니라 이질성의 집합체인 반(反)계보로 나를 이끈다. 책은 나의 내면 형질을 바꾸고 나는 책을 통해 새로운 세계와 접속하고 끊임없이 재배치된다. "책은 세계의 탈영토화를 확실하게 해주지만 세계는 책을 재영토화하며, 다시 책은 스스로 세계 안에서 탈영토화한다." 나는 하나의 지층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책과 더불어 탈영토화하고, 세계에 의해 재영토화했다가, 다시 책과 더불어 탈영토화하는 존재다.
다시 자본주의가 미쳐 날뛰는 계절이 돌아왔다. 자본주의는 그 본질에서 분열증 자체이기 때문에 이상한 일이 아니다. 주기적으로 위기는 돌아오고 증식하고 소멸하며 다시 그 과정을 반복한다. 환투기와 주식 투매의 미친 바람이 불고, 자본은 이익이 있는 곳으로 순간 휘몰아쳤다가 자양분을 빨아먹고 다시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자본의 유동적 흐름은 포식자처럼 취약한 외환시장과 주식 거래를 삼켜버린 뒤 소화할 수 없는 뼈들만 뱉어낸다. 전 지구적 규모의 자본주의라는 정글에 방목된 사자들은 신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운용되는 토끼들을 사냥하기에 여념이 없다. 사자들에게 도덕과 인의를 가지라고 말할 수는 없다. 사자는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사자는 이성을 가진 주체가 아니라 차라리 자본주의적 욕망이라는 유령이다. 우리는 날마다 그 유령과 싸운다. 최근에 다시 <천 개의 고원>을 읽는다. 이미 여러 번 통독한 책을 다시 읽고 또 읽는다. 이 책은 유령에 대처하는 방법, 그것과 싸우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점유하고, 거주하며, 보존하는 영토에서 끊임없이 달아나라! 늑대 한 마리가 아니라 늑대 무리로 달아나라! 무리로 달아나야만 하나의 도주로가 아니라 천 개의 도주로를 만들 수 있다. 하나는 붙잡히지만 천 개는 붙잡히지 않는다. 경로를 따르지 말고 그것을 자주 이탈하라! 내가 어디로 움직일지 그들이 알 수 없게 하라! 정주민들이 아니라 유목민으로 살아라! "유목민들은 사막을 만들고 동시에 사막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들은 탈영토화의 벡터들이다." <천 개의 고원>은 화폐와 노동의 흐름을 장악하고 있는 국가-기계의 포획에서 도망가도록 부추긴다. 국가-기계는 수많은 금기의 거미줄을 만든다. 제도들과 정책, 법과 치안의 그물로 국민을 포획하고 국가라는 지층에 편입시킨다. 지층화. 그 금기들은 위반의 욕망을 도발하고, 지층화에 저항하도록 한다. 나는 항상 붙잡아두려는 일체의 포획 장치에서 탈주 중이다. 조세와 병역 의무를 지우는 국가의 다양한 포획 장치로부터, 자본주의의 기계들, 이를테면 미국 정부, 중앙은행, 연방준비제도이사회로부터. 나는 소수-되기를 원한다. 나는 울타리도 척도도 없는 유목민적 노모스다.
지난 10년간 내가 읽은 책들 중에서 가장 문제적인 책은 <천 개의 고원>이다. 무수한 책 중에서 이 책은 단 한 권의 책이다. 리좀-나무, 탈영토화-재영토화, 무리-군중, 사본-지도, 분자-그램분자, 소수-다수, 유목성-정주성, 전쟁 기계-국가 장치, 매끈한 판-홈이 팬 판과 같은 무수한 이항 대립의 쌍을 변주하며, 사유의 방식, 기능, 양태 들에 대해 설명한다. 이 책은 내가 읽은 책 중에서 가장 난삽하면서도 가장 흥미로운 지적 자극을 준 책이다. 이 책은 장들이 아니라 열 다섯 개의 고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내 관심과 흥미의 대상이 된 고원들은 첫째 고원 '서론: 리좀', 2장 '1914―늑대는 한 마리인가 여러 마리인가?', 일곱 번 째 고원 '0년―얼굴성', 10장 '1730―강렬하게-되기, 동물-되기, 지각 불가능하게-되기', 열두번 째 고원 '1227―유목론 또는 전쟁 기계' 등이다. 들뢰즈·가타리는 차이의 철학, 혹은 욕망의 미시정치학에 대해 말하기 위해 생물학과 언어학과 음악학과 경제학과 정치학을 가로질러간다. "우리가 말하고 있는 건 다름 아니라 다양체, 선, 지층과 절편성, 도주선과 강렬함, 기계적 배치물과 그 상이한 유형들, 기관 없는 몸체와 그것의 구성 및 선별, 고른판, 그 각 경우에 있어서의 측정 단위들이다." 이것이 들뢰즈·가타리가 요약한 이 책의 주제다. 리좀, 동물-되기, 소수-되기, 영토화와 탈영토화, 포획, 탈주선, 지층과 지층화, 기관 없는 신체, 얼굴성, 추상기계, 배치, 매끈한 공간과 홈이 팬 공간, 공리계의 접합접속… 등등 끝도 없이 이어지는 무수의 자의적 개념이 춤추기 때문에 쉽게 해독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여러 번 읽는 수밖에 없다. 이해할 수 없다면 친밀해져라! 이것이 내가 취한 방식이다.
서구 자본주의는 리좀과 풀을 잃어버렸다. 풀은 유일한 출구인데, 그것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에서 위기는 주기적으로 반복된다. 위기는 자본의 생리와 그 한계에 갇힌 자본주의에 내재된 불가항력적인 형질이다. 자본주의는 도박판에서 판돈이 움직이는 원리와 마찬가지로 움직인다. 거기에는 피도 눈물도 없다. 오로지 강자 독식의 원리만 작동할 뿐이다.
리좀은 무엇인가? "위계적인 방식으로 소통하며 미리 연결되어 있으며 중앙집중화되어 있는 체계와 달리, 리좀은 중앙집중화되어 있지 않고, 위계도 없으며, 기표작용을 하지도 않고, '장군'도 없고, 조직화하는 기억이나 중앙 자동장치도 없으며, 오로지 상태들이 순환하고 있을 뿐인 하나의 체계이다." 풀과 리좀을 잃어버린 그것은 자꾸 경직되고 지층화한다. 황폐화한 그 영토는 조만간 잡초에 의해 뒤덮일 것이다. "결국 잡초가 승리자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잡초는 중국, 바로 동양적 성분들을 가진 그 무엇이다. 서구 자본주의를 모방하고 따라가서는 그 아류밖에 될 수가 없다. "자본주의는 모든 종류의 구성체의 교차점에 있으며 언제나 본성상 새로운 자본주의이며, 동양적인 얼굴과 서양적인 얼굴을 발명하고 그 둘을 개조해감으로써 최악의 자본주의를 만들어간다." 그 최악의 자본주의를 따라가야 하는가? 저 제국들이 강제하는 그 경로를 버려야 산다. 시작도 끝도 없고 언제나 중간을 취하며 중간에서 자라고 넘치는 리좀을 찾아야 한다. 리좀의 차원들 혹은 움직이는 방향들, 다양체로, 소수-되기로 살아야 한다. 우리 안에 있는 잡초의 성분들을 연구하고 잡초-되기라는 독자적인 길을 가야 한다. 잡초만이 무성해지고, 무성해진 잡초들이 마침내 들을 덮어버린다. <천 개의 고원>은 우리에게 음악을 들려준다. 미네르바의 부엉이처럼 외치면서 노래한다. 귀를 기울여보라. "풀을 따라가라. 물길을 따라가라"는 노래가 들리지 않는가. <장석주>
"외국인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언어와 한국어를 대립시킬 때, 그들의 언어는 소수의 소수자 언어로 존재한다. 반면 외국인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한국어-되기를 통해 다수저로서의 한국어를 흔들 때, 이들의 한국어-되기는 능동적으로 새로운 한국어를 창조해나간다. 소수자-되기가 결코 소수자-이기여서는 안 되는 이유, 문자 그대로 소수인 소수자-이기들이 아무리 많이 생겨나도 생성의 능동성을 취할 수 없는 이유, 소수자 문학이 소수어로부터가 아니라 다수어로부터 출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수자-되기의 윤리학이 보편적인 소수자 운동의 선험적 조건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227쪽)
<천하나의 고원-소수자 윤리학을 위하여>는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사진)와 펠릭스 가타리의 공저 <천 개의 고원>(1980)의 해설이자 보충이다. 책의 제목이 '천하나의 고원'인 것은 <천 개의 고원>의 주요 개념을 그의 관점에 따라 충실하게 설명하는 데서 한발 더 나아가 그 책의 미흡한 부분을 보완함으로써 하나의 고원을 덧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새로 배치된 고원이 이 책의 부제에 담긴 '소수자 윤리학'이다. 윤리학(에티카)의 관점에서 <천 개의 고원>을 다시 읽은 것이 이 책인 셈이다.
들뢰즈의 관심은 <차이와 반복> <의미의 논리>와 같은 전기의 순수 이론철학에서 가타리와 함께 작업한 <안티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과 같은 후기의 실천적 사회철학으로 옮겨갔다. 특히 <천 개의 고원>은 들뢰즈 사유의 물줄기가 모두 모여들어 넘실대는 저수지와 같은 저작이다. 전기의 존재론적 사유가 저류를 이루고 그 위에 사회철학적 사상이 난만하게 꽃핀 연못이라고도 할 수 있다. <천하나의 고원>은 <천 개의 고원>의 이런 특성을 고려해 존재론에서 윤리학으로 설명을 진전시킨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들뢰즈의 존재론과 윤리학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음이 드러난다.
지은이가 <천하나의 고원>에서 가장 먼저 해명하는 것이 '배치'라는 개념이다. '배치'는 <천 개의 고원>을 떠받치고 있는 개념적 토대이자 전략적 거점이다. 이 배치 개념을 이해하려면, 배치의 요소라 할 '기계'라는 독특한 개념에 먼저 익숙해져야 한다. 들뢰즈는 각종 생명체들을 포함해 모든 개체들을 두고 '기계'라고 부른다. 왜 기계인가. 다른 것들과 접속함으로써 그 자신의 속성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개체들은 각자 변치 않는 단일한 속성을 지닌 단독체가 아니라 다른 것들과 어떤 식으로 연결되느냐에 따라 성격이 달라지는 존재다. 가령 '혀'를 예로 들어보면, 혀-기계는 관계의 성격에 따라 '거짓말하는 혀'가 되기도 하고 '맛보는 혀'가 되기도 하고 '사랑하는 혀'가 되기도 한다. 기계는 접속을 통해 기능이 규정되는 존재인 셈이다.
이 기계들이 접속하여 선을 이루고 나아가 면을 이루면, 그 장을 가리켜 '배치'라고 한다. 기계들의 배치가 말하자면 '기계적 배치'다. 그러나 배치에는 '기계적 배치' 외에 '언표적 배치'도 있다. 야구경기를 예로 들어보자. 야구는 야구장에 심판과 선수가 모여 공과 글러브와 방망이를 들고 하는 경기다. 이 배치가 바로 기계적 배치다. 동시에 야구가 성립하려면, 규칙이 있어야 한다. 그 규칙이 바로 '언표적 배치'다. 이 기계적 배치와 언표적 배치가 합쳐져 야구경기를 성립시킨다. 세계란 기계적 배치와 언표적 배치가 합쳐진 장이다.
들뢰즈는 배치를 이루는 모든 기계를 가리켜 '욕망하는 기계'라고 말한다. 이때의 욕망은 '차이를 생성하는 의욕'을 뜻한다. 들뢰즈는 모든 개체에 이런 의욕이 있다고 본다. 그러니까 모든 개체의 존재양식은 '차이생성'이다. 스스로 변화하고 달라지는 종결 없는 과정이 개체들의 운명인데, 이 차이생성의 일시적 응결 형태가 존재이고 동일성이다. "동일성의 섬들은 차이생성의 바다 위에 구성되고 해체된다."
이 욕망하는 기계들의 배치는 그 욕망 때문에 끝없이 변화할 수밖에 없다. 배치가 만들어지는 것을 '영토화'라고 하면, 그 배치가 풀리는 것이 '탈영토화'이고, 그 배치에서 벗어나는 것이 '탈주'다. 욕망이 있는 한 기존의 배치를 뛰어넘으려는 움직임은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다른 삶, 다른 존재방식, 지금의 나를 규정하고 있는 울타리 바깥을 꿈꾸게 된다." 이때 "그 배치를 바꾸고 싶은 욕망, 그 욕망은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는 생명의 불꽃과도 같은 것이다." 이렇게 다른 삶으로, 바깥으로 이행하는 것을 두고 들뢰즈는 '되기'(becoming)라고 부른다.
이 '되기'의 존재론적 지평 위에서 이제 윤리학적 사유가 펼쳐진다. '되기'는 차이를 가로지르는 실천적 활동이다. 흑인과 백인의 차이, 남자와 여자의 차이에서 볼 수 있듯 차이가 차이로 남아 그 차이들의 관계가 굳어질 때, 이 차이를 뚫는 저항과 창조의 행위가 '되기'이다. "되기론은 동일성의 고착, 그리고 그렇게 고착된 동일성들 사이에 성립하는 차이의 윤리를 극복하기 위한 사유다." '흑인 되기' '여성 되기' '아이 되기' '장애인 되기'가 되기의 구체적인 모습이다. '하루 감옥 체험'이나 '시각장애인 체험'은 이 되기의 극히 작은 사례라고도 할 수 있다. 여기서 지은이는 되기가 진정한 윤리적 내용을 획득하려면 언제나 '소수자 되기'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소수자 되기'는 모든 되기의 보편적 지평이며, 정치적 실천의 윤리적 토대다. 소수자 되기를 통해, 자기 내부의 '다수자'를 극복하고 기존의 지배질서를 바꿔 새로운 배치를 창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명섭)
『천의 고원』(번역본 제목은 '천개의 고원')은 들뢰즈/가타리의 『안티오이디푸스』로 시작된 자본주의와 분열증 시리즈의 속편이자 들뢰즈의 대표저작이다. "21세기는 들뢰즈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푸코의 예언은 『 천의 고원』을 통해 실현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에서도 들뢰즈에 대한 관심은 199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이어져오고 있으며, 수많은 포스트모던 담론이 유행처럼 소개되었다 잊혀져간 지금도 『천의 고원』과 관련된 논쟁만큼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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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계를 읽어주는 나뭇잎숨결 원문보기 글쓴이: 나뭇잎숨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