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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독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쓴 문학작품의 총체.
최초의 기록은
고트어로 된, 주교 울필라스가 번역한 성서의 단편(369경)이다.
서(西)게르만족의 기록은 8세기 후반에 처음으로 나타났고,
중고(中高) 독일어 시대에는 기사계급이 시인으로 등장했다.
이때의 문학은 대부분 연가와 서사시였다.
15세기는 궁
정문학의 시대라 할 수 있고,
1450년 이후에는
인문주의 운동이 등장했다.
종교개혁가 루터는
이후 독일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7세기 독일의 바로크 문학은
소재나 형식에서 양극성을 나타내고 있다.
계몽주의 시대에는
영국문학의 영향이 강했고,
합리주의를 벗어나려는 질풍노도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로부터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가
독일 문학에 있어서는 전성기라 할 수 있다.
19세기 이후 '시적 사실주의'가 등장했다.
20세기의 문학경향 가운데
독일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표현주의 운동이었다.
이후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을 바탕으로 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등장했다.
18세기 낭만주의와 독일문학
바이마르 고전주의가
내용과 형식이 조화된 인간성의 완성을 추구했다면,
낭만주의는
환상과 몽상 속에서 무한성을 꿈꾸었다.
특히 초기에는 고대문학에 대한 동경이 강하게 나타났다.
이는 문학사에서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과도기 시인으로 여겨지는
프리드리히 횔덜린에게서도 확인된다.
그는 독일 최대의 서정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며
소설 〈히페리온 Hyperion〉(1797~99)의 작가인데,
고대 그리스의 이상이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절망에 빠졌다.
이 과도기에 속한 또 한 사람의 재능있는 작가는 장 파울(요한 파울 프리드리히 리히터)로,
〈티탄 Titan〉(1800~03)과
〈한창 장난할 나이 Die Flegeljahre〉(1804~05)를 비롯하여
예리한 해학과 풍부한 상상력을 내보이는 많은 작품을 썼다.
18세기 계몽주의 시대 독일문학
합리주의
이전 세기를 종교가 지배하던 시대라고 한다면
라이프니츠의 합리주의적 세계관으로 본질이 규정되는 계몽주의 시대는
이에 대한 반동의 시대였다.
교조적 종교는 이신론(理神論)에 자리를 양보했고
우주는 신의 섭리가 아니라
인과율의 법칙에 의해 지배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개인의 영적 체험을 강조한 경건주의가 독일 종교계에 되살아난다.
문학 역시 교육으로써 인간의 이성을 계발하고 인류가 진보할 수 있다는
낙관적인 믿음을 바탕으로 현저하게 교훈적인 성격을 띠었다.
특히 영국문학의 영향이 점차 강해졌는데,
스위프트·디포·밀턴 등의 작품이 번역되었고,
영국의 선례에 따라 많은 도덕적 주보(週報)들이 발간되었으며
맥퍼슨의 〈오시안 Ossian〉이나
셰익스피어 등은
후에 독일문학의 새로운 시대, 즉 질풍노도 시대를 여는
기폭제가 되었다.
1724~40년 독일의 비평가 요한 크리스토프 고체트는
프랑스 고전주의에 입각한 문학개혁에 성공했다.
그는 〈독일의 비평적 시론에 관한 소론 Versuch einer kritischen Dichtkunst vor die Deutschen〉(1730)에서
보다 나은 문학을 생산하고 평가하는 데 기준이 되는 원칙들을 규정했는데,
스위스의 요한 야코프 보드머와
요한 야코프 브라이팅거는
그의 경직된 이론에 강한 반론을 제기했다.
그들은 밀턴의 〈실락원 Paradise Lost〉을 바탕으로
상상력은 이성의 지배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 논쟁의 여파가
고체트파 자체에도 영향을 미쳐서
브레멘 기고파 가 형성되었고,
1748년 프리드리히 고틀리프 클롭슈토크의 〈구세주 Der Messias〉(1773)가
일부 그들 기관지에 발표되자 굉장한 파문을 일으켰다.
그의 천재성은 서정시에서 더 유감없이 발휘되어
감상적이고 애국적인 주제가 주종을 이룬 그의 송가들은 대단한 예찬을 받았다.
이 시기 서정시는
아나크레온풍의 서정시가 우세했는데,
바르톨트 하인리히 브로케스의 자연시,
요한 빌헬름 루트비히 글라임의 애국시,
프리드리히 폰 하게도른의 사교시,
알프레히트 폰 할러와 잘로몬 게스너의 전원시,
에발트 크리스티안 폰 클라이스트의 감상적 자연시 등이
이 계열에 속한다.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은
유럽 전역에 알려진 최초의 독일 비평가였다.
그 역시 고전주의를 신봉했지만
프랑스 고전주의가 아니라
동시대의 요한 요아힘 빈켈만과 같이 고대 그리스 예술과 문학을 모범으로 받아들였다.
또한 프랑스 고전 극작가들보다는 셰익스피어를 우위에 놓았으며
〈최근 문학동향에 관한 서한들 Briefe, die neueste Literatur betafend〉(1759~65)·
〈함부르크 연극론 Hamburgische Dramaturgie〉(1767~69),
빈켈만을 연상시키는 비평 〈라오콘 Laokoon〉(1766)에서는
조형예술과 시문학의 경계를 명확히 했다.
레싱에 의해 독일문학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그는 이론 작업뿐만 아니라
〈사라 삼프손 양 Miss Sara Sampson〉(1755)·
〈미나 폰 바른헬름 Minna von Barnhelm〉(1767)·
〈에밀리아 갈로티 Emilia Galotti〉(1772) 같은 작품을 써냄으로써
〈현자 나탄 Nathan der Weise〉(1779) 같은
바이마르의 독일 고전주의 관념극의 선구적 작품을 낳았다.
그는 프랑스 문학의 권위를 거부하면서
영국 문학에 관심을 가졌고
독일 본연의 창조성을 추구하는 길을 튼 사람이었다.
또 크리스토프 마르틴 빌란트는
이국적인 문학을 소개함으로써
독일인의 상상력을 확대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운문 로망스 〈오베론 Oberon〉(1780) 외에는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심리소설 〈아가톤의 이야기 Die Geschichte des Agathon〉(1766~67)와
풍자소설 〈아프데라의 사람들 Die Abderiten〉(1774)은
독일 산문소설을 진일보시킨 작품이었다.
18세기 괴테 시대 독일문학
독일문학에서 가장 위대한 시기인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시대는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살았던 시기와 일치한다.
이 시대는 계몽주의의 이성 만능적 태도에 한계를 느끼고
감정의 가치를 주장하기 시작했으며
충동·본능·감정·상상·직관을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수단으로 여겼다.
괴테는 질풍노도운동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합리주의를 벗어나려는 목적으로 시작된 이 운동의 핵심사상은
이미 클롭슈토크를 비롯한 경건주의에서 찾을 수 있으며,
영국의 에드워드 영과 셰익스피어,
프랑스의 루소에게서 큰 자극을 받아
자연성·천재성·독창성이 이 운동의 표어가 되었다.
이른바 문명화된 세계에 실망한 이 새로운 세대는
세계고(世界苦 Weltschmerz)라는 염세적 세계관 아래 자연을 신격화시켰고
개인의 양심 이상의 어떠한 법도 인정하지 않았으며
곳곳에서 긴장·저항·반항·열망·환멸의 태도를 드러냈다.
문학과 사상에서는 자기중심적 이기주의가 주된 특징으로 나타났다.
비평계에서는 하인리히 빌헬름 폰 게르스텐베르크가
취미 문제에서 개인의 감정을 강조했고,
요한 게오르크 하만은
언어가 지닌 영감과 상징의 기능을 역설했다.
그는 시를 인류의 모어(母語)라고 하며
인간 내면의 영혼 세계를 언제나 새로운 표상 속에 표현하는데 문학의 과제가 있다고 보았다.
그의 제자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는
진화의 개념을 역사에 도입하여,
문학에서 역사적 연속성의 중요성을 갈파하고
민요·발라드와 중세 로망스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그의 비평은
질풍노도 운동의 기본방향이 되었으며
특히 헤르더와 괴테의 논문이 수록된
〈독일 예술과 미술에 관하여 Von deutscher Art und Kunst〉(1773)는
이 운동의 선언문과 같은 것이었다.
괴테는 질풍노도 운동 최초의 중요한 희곡
〈괴츠 폰 베를리힝겐 Götz von Berlichingen〉(1773)을 썼고
최초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1774)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가 쓴 여러 형식의 문학은
시대적 유행이 되어
야코프 미하엘 라인홀트 렌츠, 프리드리히 막시밀리안 폰 클링거, 요한 안톤 라이제비츠,
하인리히 레오폴트 바그너, 프리드리히 뮐러 등 많은 극작가들이
그의 〈괴츠 폰 베를리힝겐〉을 모방한 작품을 썼다.
극문학은
질풍노도 운동에서 가장 특색있는 성과로
실제 이 운동의 명칭은 클링거의 동명 희곡에서 따온 것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이후 주목할 만한 소설가로는
요한 야코프 빌헬름 하인제와
카를 필리프 모리츠가 있는데,
모리츠의 〈안톤 라이저 Anton Reiser〉(4권, 1785~90)는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를 예고하는 작품이었다.
프리드리히 폰 실러의
〈군도 Die Räuber〉(1781)와 더불어
이 시대의 희곡은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다.
무대에 올려질 수 있기 위해서는
보다 기술적으로 각색되어야 했던 실러의 비극은
그밖에도
〈제노바에서 일어난 피에스코의 모반 Die Verschwörung des Fiesko zu Genua〉(1784)·
〈간계와 사랑 Kabale und Liebe〉(1783),
그리고 고전주의를 예고하는 무운시의 형식을 사용한 〈돈 카를로스 Don Carlos〉(1787) 같은
걸작이 있다. 이
질풍노도시대에
독일 여러 곳에서 국민극장이 설립된 것은 특기할 사항이다.
조화된 인간성과 자기규율을 등한시한 질풍노도운동은 곧 쇠잔해졌고,
지성과 감성의 조화를 주장한 헤르더의 '인간성' 사상을 기초로
신고전주의가 시작되었다.
독일 고전주의는
계몽주의와 그 후속인 질풍노도, 그리고 경건주의의 종합이라 할 수 있다.
즉 계몽주의에서는
지성적이며 합리주의적인 요소를,
질풍노도와 경건주의에서는
정감적이며 비합리주의적인 요소를 계승했다.
하나의 유기적인 자연관, 일종의 관념론이라 요약할 수 있는 고전주의는
문학에서도 객관적이 아닌 주관적 내면생활의 표현으로 나타나며
조화와 통일, 내용과 형식의 일치를 미적 이상으로 했다.
이 시대의 독일 사상과 문학의 토대는
이마누엘 칸트의 비판철학이었다.
실러는 칸트의 영향을 받아 미학 연구에 몰두했고,
그의 미학이론은 독일 고전주의의 절정기인 1794~1805년의 이론적 기초가 되었다.
괴테는 〈파우스트 Faust〉(1부 1808, 2부 1832)로
세계문학에 최대의 공헌을 했다.
그는 노년에 들어와서도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 Wilhelm Meisters Wanderjahre〉(1821~29)를 비롯하여
체념을 주제로 한 〈친화력 Wahlverwandtschaften〉(1809) 같은 소설과
숱한 서정시, 자서전적인 〈시와 진실 Dichtung und Wahrheit〉(1811~33),
자연과학에 대한 연구 등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19세기 독일문학
괴테의 죽음으로 한 시대는 끝이 났다.
정치적·종교적 보수주의가 개혁을 원하는 자유주의를 탄압하는 가운데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갈등과 환멸이 창작계를 지배하게 되었고
고전적·낭만적 사고에서 벗어나려는 여러 가지 시도가 나타나게 된다.
19세기초를 대표하는 극작가는
오스트리아인 프란츠 그릴파르처와
독일인 게오르크 뷔히너였다.
그릴파르처는
독일 고전주의 극을 빈의 무대위에 실현해보려는 소망에서
〈사포 Sappho〉(1818)·
〈황금양털 Das goldene Vliess〉(1820) 등의 비극을 써냈는데,
이러한 작품들은
자신의 비극적 좌절을 힘차게 표현함으로써
오히려 위대성에 접근하고 있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그의 음울한 비극적 염세주의는
희극작가 페르디난트 라이문트와 네포무크 네스트로이의 통속적이고 낭만적인 연극에서도
엿볼 수 있는 작품 경향이다.
정치적으로 보수적이었던 그릴파르처와는 달리
사회비판적 의식을 드러낸 뷔히너는
그의 대표작 〈당통의 죽음 Dantons Tod〉(1835)에서
프랑스 혁명의 실패를 다루었고
〈보이체크 Woyzeck〉(작가 사후 1879년 출판)에서는
처음으로 하층민을 주인공으로 하여 현실에 대한 저항정신을 사실적 수법으로 그려냄으로써
독일 사실주의 연극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의 두 희곡은 현재도 그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이 시대의 독일 시인들은
일반적으로 전시대의 고전·낭만주의 시의 전통을 이어받아,
프리드리히 뤼케르트와
아우구스트 폰 플라텐의 경우처럼
형식적인 면에서는 세련되었지만
독창적인 면에서는 조금 부족한 면모를 보였다.
그중에도 깊은 감정을 담은 우울한 서정시로 유명한
니콜라우스 레나우,
뛰어난 형식으로 목가적 자연을 그려낸 에두아르트 뫼리케,
역시 자연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으며
생의 비합리적인 힘에 대한 불안을 힘찬 리듬과 음산한 언어로 표현한
아네테 폰 드로스테 휠스호프(〈영적인 해 Das geistliche Jahr〉, 1851)가
주목할 만한 시인이다.
그러나 이 시대 최대의 시인은
하인리히 하이네로서,
그의 〈노래책 Buch der Lieder〉(1827)은
섬세한 형식, 극적 구성, 감동적 열정 등으로 전세계에 알려진 서정시집이다.
그는 또한 반어적 산문의 대가이기도 한데,
개인적인 적과 당대의 정치상황을 가차없이 공격한
〈독일:겨울동화 Deutschland:Ein Wintermarchen〉(1844)는
큰 효과를 거둔 정치풍자이다.
1835년 독일 연방의회는
하이네와 함께,
루돌프 빈바르크,
카를 구츠코,
하인리히 라우베,
테오도어 문트의 저술에 금서령을 내렸다.
'청년독일파'로 지칭되는 이 현실 참여문학의 작가들로는
그밖에도 루트비히 뵈르네,
게오르크 헤르베크,
페르디난트 프라일리그라트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 대부분은 국외로 망명하여
독일의 사회와 정치를 비판하는 글을 썼다.
그 중 뵈르네의 〈파리에서 온 편지 Briefe aus Paris〉(1830~33)는
당시의 사회기록으로서 귀중한 작품이다.
정치적·사회적 개혁을 뜻하는 청년독일파와는 달리
보수주의적인 성향을 보인
에마누엘 가이벨,
파울 하이제,
빅토르 폰 셰펠 등은
당시에는 독자의 인기를 끌었으나
지금은 대다수 잊혀진 작가들이다.
정치적으로는 복고주의가 주도권을 다투었고
사회적으로는 이른바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여러 사회문제들이 나타남에 따라
카를 마르크스와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같은 사회비평가가 출현했으며
문학도 같은 맥락에서 객관적인 사실의 묘사에서 아름다움을 찾았는데,
이런 사실주의야말로 이 시대 독창성의 원천이었다.
삶이 예술적인 의미와 내적인 가치를 지닌 경우에만
문학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일명 '시적 사실주의'라고도 부르며,
종종 지방주의와 겹치기도 하지만,
일상생활의 긍정적인 가치를 발견하려는 객관적 목표를 지닌다는 점에서
주로 생의 어두운 측면을 부각시키는 자연주의와 구별된다.
사실주의의 가장 탁월한 대표자로는
아달베르트 슈티프터,
고트프리트 켈러,
테오도어 폰타네를 꼽을 수 있다.
소설에서는
정확한 현실묘사에 집중하면서 소박한 삶을 고향의 풍경과 결합시키는 작품들이 나왔다.
카를 이머만의 농민소설 〈언덕 위의 농가 Der Oberhof〉(1839)와
베르톨트 아우어바흐의
〈슈바르츠발트 숲속 마을의 이야기 Schwarzwalder Dorfgeschichten〉(1843~54),
예레미아스 고트헬프(알베르트 비치우스)의
스위스 농민 생활과 문제를 깊은 통찰력으로 담아낸 〈하인 울리 Uli der Knecht〉(1846)와
〈소작인 울리 Uli der Pachter〉(1849) 등이 그 예이다.
그밖에 클라우스 그로트는
서정시집 〈샘물 Quickborn〉(1853)로서 독일 지방주의 작가의 전형처럼 되었다.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를 연상시키는 교양소설
〈늦여름 Nachsommer〉(1857)을 쓴
아달베르트 슈티프터 역시
〈다채로운 돌 Bunte Steine〉(1853)에서 고향 보헤미아의 풍물을 차분하게 묘사함으로써
독일문학에 색다른 기여를 했다.
산문 서사문학에서
시적 사실주의의 최고봉은
스위스 작가 고트프리트 켈러였다.
반자전적 교양소설 〈녹색의 하인리히 Der grüne Heinrich〉(1854~74)와
노벨라 연작 〈젤트빌라의 사람들 Die Leute von Seldwyla〉(1856~74)이 대표작이며
하층계급의 사실적 묘사와 자연현상의 정밀한 관찰이 뛰어났다.
또 다른 중요한 사실주의 작가 테오도어 슈토름은
북독일 출신으로 서정적 정취가 넘치는 노벨라를 주로 썼다.
〈임멘 호수 Immensee〉(1850) 같은 슈토름의 초기작에는
현실에 환멸을 느껴 과거를 돌아보는 낭만적·감상적 분위기가 강하게 나타났는데,
이런 경향은 역사를 배경으로 한 사회소설에서도 볼 수 있다.
콘라트 페르디난트 마이어,
빌헬름 하우프,
프라이타크의 소설 〈차변(借邊)과 대변(貸邊) Soll und Haben〉(1855)과
희극 〈기자들 Die Journalisten〉(1854)은
당대의 사회적·경제적 변화를 성공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예리한 사회분석으로 유명한 빌헬름 라베는
〈배고픈 목사 Der Hungerpastor〉(1864)를 비롯하여
부르주아의 속물 근성과 비스마르크의 국가주의를 해학적인 문체로 다루었다.
1800년대 후반 오스트리아에서도
당대 부르주아 및 농민들의 생활을 사실적으로 그린 작품들이 우세했는데
그런 작가로는
페르디난트 폰 자르,
마리 에브너 에셴바흐,
페터 로제거,
루트비히 안첸그루버 등이 있다.
19세기 중엽 근대 희곡 발전에 큰 공헌을 한 2명의 작가로는
프리드리히 헤벨과
오토 루트비히가 있다.
헤벨은
시적 사실주의를 힘차게 표출한 독창적인 극작가로서
〈유디트 Judith〉(1840)·〈마리아 마크달레나 Maria Magdalena〉(1844)·
〈니벨룽겐 Die Nibelungen〉(1861) 등
심리분석과 형이상학적 신념의 종합을 이룬 작품세계를 펼쳤다.
루트비히는
작품보다는 이론으로 극문학에 기여했는데
시민비극 〈세습산림관 Der Erbförster〉(1850)이
그 중 문학적 의미를 지닌 희곡이다.
시적 사실주의의 특성으로 나타나는 해학(Humor)과 반어(Ironie)가 뛰어난 작가인
테오도어 폰타네는
독일에서 최초로 진정한 사회소설을 쓴 작가로,
〈뒤죽박죽 Irrungen Wirrungen〉(1888)·
〈예니 트라이벨 부인 Frau Jenny Treibel〉(1892)·
〈에피 브리스트 Effi Briest〉(1895) 등
심리적 통찰과 사회조건에 대한 이해를 결합시킨 작품을 남겼다.
그밖에 작가는 아니지만 독일문학에 큰 영향을 준 사람으로
리하르트 바그너와
프리드리히 니체를 들 수 있다.
〈니벨룽겐의 반지 Der Ring des Nibelungen〉(1848~74) 같은 음악극으로
독일예술의 전형을 보여주었고,
〈음악의 정신에서 비극의 탄생 Die Geburt der Tragödie〉(1872)·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Also sprach Zarathustra〉(1892) 등의 저술에서
니체가 피력한 예술론·초인론 및 그의 허무주의·회의주의는
독일 근대 사상 및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프랑스의 에밀 졸라에게서 영향을 받은
독일 자연주의 운동은 단명한 문학운동이었다.
〈시대의 책 Buch der Zeit〉(1886)으로
독일 자연주의 최초의 중요 시인으로 등장한
아르노 홀츠는
요한네스 슐라프와 함께
〈파파 함렛 Papa Hamlet〉(1889) 이라는 3편의 이야기에서
이른바 초간(抄間) 양식(Sekun-denstil)을 내세워
삶의 한순간을 세세하게 묘사하는 방법을 선전했다.
자연주의에서 중요한 극작가는
입센과 스트린드베리의 영향을 받은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인데,
〈해뜨기 전 Vor Sonnenaufgang〉(1889)·
〈직조공들 Die Weber〉(1892) 같은 작품들을 통해
산업화로 야기된 여러 사회문제들을 고발했다.
그의 영향을 받아 헤르만 주더만은
부르주아 계급의 도덕성을 비판한
〈명예 Ehre〉(1889)·〈고향 Heimat〉(1893)을,
막스 할베는
젊은이들의 사랑을 다룬 〈청춘 Jugend〉(1893)을 썼다.
20세기 독일문학
유럽에서 독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쓴 문학작품의 총체.
전통적인 문학형식으로는 복잡해진 이념이나 사회상을 표현할 수 없다고 생각한
20세기 작가들은 수많은 실험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최초의 시도는
사물을 보고 받은 인상을 강조하여
마음의 상태를 환기시키려는 인상주의였다.
데틀레프 폰 릴리에크론,
리하르트 데멜 등이 이런 경향의 서정시를 썼다.
상징주의에 영향을 받은 시인들도
인상주의적 요소를 내보이는데,
프랑스 상징주의의 계승자인
슈테판 게오르게가 대표적이다.
그는 엄격한 형식을 중시하고 일상적인 것이나 평범한 것들을 멀리하며
품위 있는 언어를 골라 썼다.
그를 중심으로 한 시파(詩派)가 형성되었고,
게오르게는
1892년 〈예술 회보 Blätter für die Kunst〉를 창간하여
추종자들이 시를 발표할 수 있게 했다.
오스트리아의 후고 폰 호프만스탈은
낭만주의에 뿌리를 둔 예술지상주의자로서
극히 음악적인 언어로 섬세한 감수성을 분석해냈고,
아르투르 슈니츨러는
세기말 문화 중심지였던 빈의 분위기를 인상주의적인 수법으로 포착했다.
카를 크라우스가
단독으로 풍자지 〈횃불 Die Fackel〉(1899 1936)을 발행하여
부르주아 언론의 도덕성을 비판하는 동안,
로베르트 무질은
〈특성 없는 사나이 Der Mann Ohne Eige nschaft〉(1930~43)에서,
헤르만 브로흐는
〈몽유병자들 Die Schlafwandler〉(1931~32)에서
더욱 냉정하고 깊은 시대분석을 보여주었고,
같은 오스트리아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전기와 역사소설 분야에 업적을 남겼다.
새로운 문학의 실험적인 유파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상징주의였다.
예술이란
대상을 객관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진상을 알리거나 이론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
상징의 힘을 통해
보다 심오한 현실을 밝혀야 한다고 본 상징주의자들의 작품은
강한 주관성과 신비성이 깃들어 있다.
하이네 이후 가장 잘 알려진 시인이자 프란츠 카프카와 더불어
오스트리아·독일을 대표하는 작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 역시
상징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시도시집 Das Stunden-Buch〉(1905)에서
〈말테 라우리츠 브리게의 수기 Die Aufzeich nungen des Malte Laurids Brigge〉(1910)·
〈두이노의 비가 Duineser Elegien〉(1923)에 이르는 그의 작품세계는
신과 인간, 자연, 시인의 소명에 관한 내적 성찰로 가득하다.
상징주의는 산문작가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20세기 독일 최대의 소설가 중 하나인 토마스 만도 예외는 아니어서
〈부덴브로크가 Die Buddenbrooks〉(1900)·
〈마의 산 Der Zauberberg〉(1924)·
〈요셉과 그의 형제들 Josef und seine Bruder〉(1933~43)·
〈파우스투스 박사 Dr. Faustus〉(1947) 등의 대작과
〈토니오 크뢰거 Tonio Kröger〉(1903)·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Der Tod in Venedig〉(1912) 등의 중단편에 이르기까지
상징과 신화를 이용하여
현대 인간의 정신상태를 조명하고
현대 서구문명을 상징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그의 형 하인리히 만도 탁월한 소설가로서
〈운라트 교수 Professor Unrat〉(1905)와
〈충복 Der Untertan〉(1918)같은
독일의 정치와 사회를 풍자적으로 비판한 작품들을 남겼다.
이와 대조적으로 또 한 사람의 거장 헤르만 헤세는
신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며
〈데미안 Demian〉(1919)·
〈황야의 이리 Der Steppenwolf〉(1927)·
〈유리알 유희 Das Glasperlenspiel〉(1943) 등에서
서구문명에 의문을 던지고
인간의 육체와 정신 사이의 균형을 추구했다.
독일에서 핵심이 되는 문학운동은 표현주의 운동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간과 그 직후에 일어난 이 운동은
본질적으로는 전통적인 여러 가치에 대한 저항에서 비롯되었으며
사물의 외적 형식보다는 내적 의미를 강조했다.
표현주의 희곡의 선구자는
프랑크 베데킨트였지만
최초의 완전한 표현주의 극작품은
요하네스 라인하르트 조르게의 〈걸인 Der Bettler〉(1912)을 꼽는다.
이 작품은
발터 하젠클레버, 파울 코른펠트, 프리츠 폰 운루, 에른스트 바를라흐, 오스카 코코슈카 등의
작품과 더불어
사물의 본질, 개인의 배후 이념, 삶의 정신적 의미들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에른스트 톨러는
표현주의 기법을 써서
정치극 〈기계 파괴자 Die Maschinenstürmer〉(1922)를 썼고,
주도적인 표현주의 극작가 게오르크 카이저는
후에 성숙한 전통적 양식으로까지 발전했으며
카를 슈테른하임은
날카로운 풍자로 부르주아의 위선을 폭로했다.
표현주의 시인으로는
아인스트 슈타들러,
게오르크 하임,
게오르크 트라클,
아우구스트 슈트람,
고트프리트 벤,
엘제 라스커 쉴러 등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주로 현대 도시생활과 기계문명에 대한 공포와 혐오에서 출발하여
인간 존재의 무의미성을 드러내는 이들의 관점은 나중에는 다다주의로 확대되었다.
프란츠 카프카 역시
그런 부정적 관점으로 현대 사회를 본 작가로서,
〈성 Das Schloss〉(1926)을 비롯한 여러 장·단편, 우화들에서
인간 존재의 부조리성·불확실성을 그로테스크한 방법으로 그려주고 있다.
그밖에 알프레트 되블린의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Berlin Alexanderplatz〉(1929)이
표현주의 소설의 훌륭한 예로 꼽힌다.
제1차 세계대전 후 표현주의는
이른바 객관성을 획득하려는 신즉물주의와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길을 양보했다.
아르놀트 츠바이크(〈그리샤 상사에 관한 논쟁 Streit um den Sergeanten Grischa〉, 1927),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서부전선 이상없다 Im Westen nichts Neues〉, 1929)가
한스 팔라다, 에리히 케스트너와 함께 전쟁을 소재로 한
즉물적인 고발문학의 대표자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새로운 객관성은 안나 제거스, 카를 추크마이어, 에른스트 윙거 등의 작품에도
계속되어 나타난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주창자이자 서구 희곡계의 거장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이른바 '서사극' 형식을 통해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을 바탕으로 한 사회 비판을 시도했다.
그의 사회 개혁을 위한 교육의지는 〈서푼짜리 오페라 Die Dreigroschenoper〉(1928)·
〈억척 어멈과 그 자식들 Mutter Courage und ihre Kinder〉(1941)·
〈갈릴레이의 생애 Leben des Galilei〉(1943)·
〈코카사스의 백묵원 Der kaukasische Kreidekreis〉(1948) 같은 많은 서사극과
교훈극을 낳았다.
나치 정권은 문학활동의 연속성을 파괴시켰다.
그 결과 많은 재능있는 작가들이 추방되거나 스스로 망명했으며
독일에 남아 있던 작가들 중에도 출판금지 처분을 받은 사람이 허다했다.
나치 작가로는 에르빈 구이도 콜벤하이어나 한스 그림 등이 있고,
나치 이념에 전적으로 동조하지 않고 국내에 남아 있던 작가 가운데
한스 카로사 등이 나치시대의 정신적 공백을 메꾸는 데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독일문학
유럽에서 독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쓴 문학작품의 총체.
1945년의 패전으로 독일은 완전히 황폐해졌다.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볼프강 보르헤르트의 〈문밖에서 Draussen vor der Tür〉(1947)에 잘 포착되어 있듯이,
이 피폐한 분위기 속에서 문학 역시 다시 힘을 가다듬어야 했다.
서독에서는 47그룹이 결성되어
하인리히 뵐에서
귄터 그라스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작가들을 망라하여 향후 20년간 문학 기후대를 조성했고,
동독에서는 시인이며 문화상이었던 요하네스 베허의 주도하에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지향하는 문학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 동독 지역에서 활동한 작가들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들은 브레히트를 비롯하여
제거스, 아르놀트 츠바이크, 헤르만 칸트, 하이너 뮐러 등을 들수 있으며,
크리스타 볼프는 독일 통일 이후에도 각광을 받고 있다.
전후 독일시는 아주 풍부하고 다양한 양상을 보였다.
19세기 전통과 관련되어 인간 정신의 평화와 조화를 추구하는 시를 쓴 베르너 베르겐그루엔,
루돌프 알렉산더 슈뢰더 등이 있는가 하면, 시어를 전통에서 해방시키고
형식실험을 통해 자신들이 겪은 혼돈의 체험을 표현하려는 잉게보르크 바흐만,
귄터 아이히, 한스 마그누스 엔첸스베르거, 카를 크롤로브, 하인츠 피온테크 등이 있었다.
특히 파울 첼란은 환상적인 언어로 미적·도덕적 가치를 독특하게 잡아냈고
넬리 작스는 난해한 언어로 유대 민족의 운명을 그렸다.
희곡에서는 막스 프리슈와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등 스위스 작가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뒤렌마트의 〈노부인의 방문 Besuch der alten Dame〉(1955)·
〈물리학자들 Die Physiker〉(1961),
프리슈의 〈이제 그들이 다시 노래하니 Nun singen sie wieder〉(1961)는
현대의 도덕극이다.
프리슈는 희곡뿐만 아니라 〈슈틸러 Stiller〉(1954)·
〈호모 파버 Homo Faber〉(1954) 등의 소설을 써서
현대 지식인의 위상을 탐색하기도 했다.
1960년대 이후에는 정치극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롤프 호흐후트의 〈대리인 Der Stellvertreter〉(1963)·
〈병정들 Die Soldaten〉(1967),
페터 바이스의 〈수사(搜査) Die Ermittlung〉(1965)·
〈사드 후작의 연출 지도 아래 샤랑통 정신병원의 극단에 의해 상연된
장 폴 마라의 박해와 암살
Die Verfolgung und Ermordung Jean Paul Marats, dargestellt durch die Schauspielgruppe des Hospizes zu Charenton unter Anleitung des Herrn de Sade〉(1964, 흔히 〈마라/사드 Marat/Sade〉로 약칭)은
이른바 기록극으로 국제적인 주목을 끌었다(사실극).
오스트리아의 극문학은 볼프강 바우어와 페터 한트케로 대표되는데,
특히 한트케의 〈관객모독 Publikumsbeschimpfung〉(1966)·〈카스파어 Kaspar〉(1968)는
극단적인 언어실험극이다.
그밖에 특기할 현상은 귄터 아이히, 바흐만, 뵐, 뒤렌마트 등 많은 작가들이
방송극이라는 새 장르가 형성될 정도로 라디오를 통한 드라마를 시도했다는 점이다.
그라스는
특히 단치히 3부작인 〈양철북 Die Blechtrommel〉(1959)·
〈고양이와 쥐 Katz und Maus〉(1961)·
〈개 같은 시절 Hundejahre〉(1963)에서
활력이 넘치는 문장과 풍부하고 그로테스크한 풍자로써
독일 역사를 그려냈고,
현대 부르주아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본 전후 독일의 대표적 소설가 뵐은
〈지키는 사람 없는 집 Haus ohne Huter〉(1954)·
〈아홉시 반의 당구 Billiard um halb zehn〉(1959)·
〈어느 어릿광대의 견해 Ansichten eines Clowns〉(1963) 등의 작품으로
1972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밖에 주목할 만한 소설가로는 볼프강 쾨펜, 알프레트 안더슈, 지크프리트 렌츠, 마르틴 발저, 페터 바이스, 크리스타 볼프를 들 수 있다.
20세기 독일 문예학에서는
19세기 실증주의를 대신하여 사상사의 측면에서 문학을 조명해보려는
다양한 접근 방식이 나타난다( 문학비평).
빌헬름 딜타이,
프리츠 슈트리히,
헤르만 아우구스트 코르프로 대표되는 이 방법론은
이른바 독일정신을 강조하는
나치 시대의 경험과 신비평의 영향을 받아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에밀 슈타이거를 대표로 하는
작품 내재분석 방법에 길을 양보하고 만다.
그러나 이 방법론은
1960년대 발터 벤야민을 비롯한 마르크스주의 비평이 재발견되면서
힘이 약화되었고,
이후 독일 문예학은 크게 보다 사회정치적 시각과 형식적·이론적인 시각으로 나뉘지만,
현재 문학 연구방법의 상호보완성·다원성에 미루어 볼 때
그 경계를 명확히 구분하기는 어렵다.
문예학이 과학적인 지위를 확보할 수 있는 방법론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발전해 나온
독일 현대 문예비평은
한마디로 문학에 대한 합리적 접근방법을 찾으려는 노력과
시도라고 요약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