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바람(風)이다. 마주 서면 다가오고, 돌아서면 등 떠민다. 좋든, 싫든 불어와 온갖 것 흔든다. 잡으려면 빠져나가고, 품으려면 스쳐 지나간다. 제멋대로 와서 덧없이 가버리는 바람. 바람으로 왔다가 가는 시간….
바람은 대기의 온도 차나 나비효과 등에 의해서 일어난단다. 하지만, 시간은 도대체 어찌하여 생긴 것일까. 시간 속에서 태어나 시간 안에서 살다가 시간 저편으로 사라지는 뭇 생명, 나아가 온갖 존재. 바람 같은 시간, 시간을 품어 둘 묘책은 없을까.
시간이야말로 사람이 풀어야 할 숙제 중의 숙제이리라. 발 없이 걸어가고, 바퀴 없이 굴러가며, 날개 없이 떠 가고, 추진 동력 없이 로켓보다 빨리 가는 시간. 대체 시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냄새 없고, 색깔 없고, 보이지 않고, 들리지도 않는 존재인 시간. 그 시간이 나와 너, 우리, 지구별, 그리고 온 우주를 품어 안고 가고 있다. 또, 오고 있다.
미풍보다 약하게도 태풍보다 강하게도 가고 오는 시간. 시간이 지나는 자리는 온갖 것 다 있으면서도, 가고 나면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마당이 된다. 텅 빈 들녘에 홀로 서 본다. 떠난 시간의 뒷모습을 보고 싶어서다. 뭇 생명이 자기 삶을 살고 떠난 자리가 횅댕그렁하다. 그 많던 오곡백과는 다 어디로 갔나. 정말 아카샤Akasha 기록으로 변해버리기라도 한 걸까. 텅 빈 들녘 너머로 계절이 오가고, 새해가 뒤따라온다고 마음은 속삭인다.
풍경이 사뭇 다르다. 청동기 새말나라다. 상상의 나래로 날아왔다. 선돌은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에 초로의 사내가 혼자 서 있다. 차림으로 보아 군장君長인가 보다. 가을 해가 시나브로 서산에 머리를 기댄다. 군장은 상념에 잠겨있다. 지난 세월이, 주마등으로 가슴속을 훑는 표정이다. 그가 손을 들어 이마에 댄다. 주름이 더 늘어났다. 논엔 나락이 황금이니 풍년이다. 하지만, 그의 가슴에는 하늬바람 한줄기 분다.
군장의 동공에 생각의 여울이 인다. 그의 혼잣말이 들린다.
“나도 이젠 늙었나 보다!”
“더 늙기 전에 무엇인가 남기고 싶은데, 이 나라를 자자손손 지켜줄 수호신으로. 어찌할까…. 그래, 며칠 후 고을대표회의 날이지. 그때 의논하여 결정하자.”
송골송골한 얼굴 땀을 손으로 훔친다. 주인공 찾아 오르는 동산 길이다. 한 애국지사의 재실을 돌아선다. 발걸음이 뚝 멈춘다. 범접할 수 없는 서기瑞氣로 에워싸인 주인공에게 압도당하고 만다. 화들짝 놀란 뒤에야 비로소 찬찬히 살핀다. 저만치 우뚝 선 그가 동공을 파고든다. 첫 느낌과 달리, 퍼져오는 아우라aura가 포근하다. 주인공이 어서 오라고 손짓한다. 손길 따라간다. 안내판이 ‘선사시대의 거석기념물’이라고 그를 소개한다.
조심스레 주인공에게 다가간다. 위엄 서린 그를 처음 가까이 마주한다. 바로, ‘신동입석新洞立石’이다. 순우리말로는 ‘새말나라선돌’이 되겠다. 하늘 향해 우뚝 선 크고 뾰족한 선돌. 모습이 만군을 지휘하는 위풍당당한 대장군의 검劍이다. 어찌 보면, 새말나라가 휘어잡은 보검寶劍이기도 하다. 요충지 동산에 보검을 쥔 새말나라를, 뉘 감히 넘볼 수 있으랴. 삼천 년 넘을 세월 동안 위용 떨치며, 꿋꿋이 임무를 다하고 있는 새말나라선돌. 늠름한 모습이 자랑스럽다.
안내판과 지자체 홈페이지는 새말나라선돌을, ‘지역 간의 경계를 나타내거나 신앙의 대상물로 세워진 것’이라고 쓰고 있다. 하지만 새말나라선돌과 처음 만난 마음은, 이런 소개와 설명이 중요한 무엇을 빠트린 느낌이다. 까닭이 뭘까. 선돌을 두 손으로 만져본다. 따사하다.
선돌이 세워진 청동기시대는, 군장국가君長國家 chief-dom란 강한 권력이 수립된 사회이지 않은가. 군장은 지도력 강화와 사회 발전을 위해, 나라를 하나로 모을 상징물이 필요했을 터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상상의 나래가 저절로 펴졌다. 나래는 훨훨 날아 선돌 세우던 때로 시간여행을 떠난다. 순식간에 삼십 세기를 거슬러 올랐다.
고을대표회의 날이다. 백성들의 신임 두터운 군장의 제안은 고을 대표들에 의해 흔쾌히 채택되었다. 나라의 수호신은 세형검細形劍 모양의 선돌로 정했다. 군장은 백성들이 함께 좋은 돌을 고르고, 함께 다듬고, 함께 세우게 하였다. 이 사업으로 군장과 백성들의 사이는 더욱 돈독해졌다. ‘나도 나라의 한 백성’이란 공동체 의식이 활짝 꽃피웠다. 준공식 날, 군장과 백성들의 마음은 하나 되어 선돌에 깃들었다. 선돌이 새말나라를 품어 안아 수호신으로 등극하는 순간이다,
모진 세파에도 불구하고, 새말나라선돌은 모든 시대를 품는 지킴이가 되었다. 청동기시대는 물론, 철기시대를 거쳐 역사시대까지 끌어안았다. 고대 원삼국, 삼국, 남북국, 후삼국 시대와 고려 및 발해 부흥 운동기도 보듬었다. 중세, 근세, 근대, 현대를 아우르는 긴 세월 동안 꿋꿋이 서서, 새말나라를 지켜냈다.
새말나라 백성들은 선돌 앞에서, 저마다 사연을 털어놓으며 울고 웃었다. 의지하고 빌었다. 힘과 용기도 얻었다. 그 사연들은 선돌 몸에 하나씩 쌓여갔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선돌은 나라의 역사 기록물도 겸하게 된 것이다. 백성들은 새말나라 선돌 앞에서 자기 마음의 문을 열기만 하면, 지난 사연들을 듣고 볼 수 있었다.
조선왕조 시대다. 불교의 명호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도 몸에 새겨 품게 된 새말나라선돌. 전과는 달리 숭유억불崇儒抑佛정책하에서 고난 겪는 백성과 불자들의 슬픔과 아픔, 희망과 사랑을 함께 나누는 부처님 역할도 기꺼이 맡았다.
북한 공산집단이 일으킨 6.25 동족상잔 전쟁 때다. 선돌은 적 포탄을 맞아, 몸이 세 동강으로 쪼개지는 비운을 당했다. 그 희생이 남쪽 논에 주둔했던 아군 장병들의 생명을 구했으리라. 목숨 걸고 우방을 위해 싸우는 유엔군 장병들은, 진지에 떨어질 포탄을 온몸으로 막아준 선돌이 고마워 그 품에 자기들 이름을 새겼을 테다. 상상의 나래가 날아, 함께한 슬프고도 아름다운 새말나라선돌의 시간여행은 여기서 멈췄다.
삶은, 역사는 시간여행이다. 사람들은 바람으로 스쳐 지나가는 시간을 품기 위해 일기를 쓴다. 사진과 동영상도 찍는다. 웹과 컴퓨터, 휴대폰의 메모리도 이용한다. 선사시대부터 오늘까지, 기나긴 시간 홀로 서서 새말나라를 지켜낸 수호신 선돌…. 새말나라의 시간여행을 품어낸 보검. 그리하여 배달겨레의 희비 애환 담긴 오랜 역사를 자기 몸에 간직한 기억장치 곧, 새말나라 시간 메모리가 되었으리라.
한줄기 솔솔바람이 새말나라선돌을 휘감으며 지나간다.
- 2024. 3. 1. <수필미학> 2024. 봄호 발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