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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기행] 용산구
글 윤재석(언론인)
남산과 한강 사이를 걸어 본다.
한양 도성의 내사산(內四山) 중 안산(案山) 겸 주작(朱雀)격인 남산(일명 목멱산․木覓山)은 동․서․북향이 모두
공원이지만, 유독 남쪽 기슭만 다양한 주택과 건물들이 아기자기하게 펼쳐 있다. 이곳이 용산의 시작이다.
좌측으로 한남동, 이태원동을 뻗어 내려가 보광동 동․서빙고동을 끝으로 한강에 닿는가하면, 우측으론 해방촌과
후암동을 안고 있다. 서쪽으로 더 가다보면 청파동과 효창동, 이어 원효로와 서부이촌동으로 뻗어가 역시 한강에 이른다.
어두운 역사가 점철된 땅
남산을 등에 지고 한강을 품에 안은 채 외국인 1만2천600여명을 포함, 24만7천명이 오순도순 살아가는 작은 지구촌!
용산의 핵엔 거대한 이방 지대가 있다. 이름 하여 용산 미군기지. 260만㎡(약 80만평) 규모의 이곳은 우리에게 애증의
공간이다. 해방공간과 6․25전쟁 당시 대한민국의 건국과 북한의 남침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주둔해온 주한미군사령부(물론 유엔군사령부 및 한미연합사령부)가 있는 곳. 하지만 일부 주한미군들이 저지르는 범죄행위에 분노한 군중이 국가적 자존심을 걸고 “양키 고 홈!”을 외치는 바로 그 대상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용산은 예부터 외국군이 주둔하기에 천혜의 조건을 갖춘 곳이었다. 이태원(梨泰院)의 이명(異名)인 이태원(異胎院)에서도 알 수 있듯, 용산 일대는 외국군의 단골 주둔지였다. 이태원(異胎院)은 임진왜란 때 왜군이 이곳 여승들을 겁탈하여 잉태하게 했다고 하여 속되게 부른 이름. 그런가 하면 구한말 1880년대 군대가 폭동을 일으키자 무능했던 조선 조정은 청나라에 진압을 요청한다. 제물포를 통해 상륙한 청나라 군사들은 이태원 일대에 주둔하며 대원군을 납치, 중국으로 압송했다. 1910년 한일병탄(韓日倂呑) 후 이태원 일대에 일본군 조선주둔군 사령부가 있었고 해방 후, 지금껏 주한미군사령부가 주둔하고 있다. 멀리 고려 중기 때 몽고군이 용산 일대에 주둔했다는 기록도 있다.
외국과 관련해 어두운 역사가 점철된 용산이지만, 요즘 와서 용산은 또다른 차원에서 글로벌 빌리지로서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서울 시내에서 외국 대사관(대사관저 포함)이 가장 많이 분포한 곳이 용산이다. 무려 50여 곳이나 된다.
그러다보니 주한 외국대사관 직원 및 지상사(支商社) 요원들도 많이 거주하고 있다. 광복 이후부터 ‘서울속 외국’으로
자리매김해온 용산은 자연스레 외국 문물의 유입처가 되었다. 외국인들의 유입 또한 빈번해졌고, 외국 문물을 접하려는 이들까지 합세하면서 하나의 글로벌 커뮤니티를 형성하게 됐다.
‘이태원 패션’으로 통칭되는 이태원 시장 일대는 연간 160만명의 관광객이 찾는 관광특구가 됐고, 이태원 일대에 산재한 다양한 국적의 레스토랑과 바는 어스름녘 가슴 훵하게 뚫려 있는 길손을 유혹하느라 조금은 유치한 네온을 깜빡깜빡.
생경스런 레스토랑이나 바보다는 낮 익은 곳이 편하다는 느낌. 해밀턴호텔 뒤 올댓째즈엘 들어간다. 초저녁인데도 얼추 좌석이 찬 가운데, 앨토 색소폰, 콘트라베이스, 드럼 등 3인조 앙상블이 몇 곡 연주한다. 이곳에도 외국인 손님들이 적지 않다. 하긴 서울하고도 이태원 아닌가!
외국 문물이 들고 나는 관광특구
이태원관광특구라고 하지만, 이렇다 할 콘텐츠가 없으면 관광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쉽지 않다. 그 대안으로 용산구는 영국 에든버러 프린지 축제를 모델로 축제특구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태원을 중심으로 축제를 진행하되, 우리의 문화와 전통을 알릴뿐 아니라,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방식, 즉 그들과 함께하는 다양한 행사를 기획하고 진행하고 있다. 작년에도 매주 토요일 이태원 주말문화축제와 이태원지구촌축제, 세계문화축제를 개최하는 등 외국인들과 함께 하는
‘축제의 거리’로 만들었다. 올해도 4~6월 주말마다 이태원 주말문화축제를, 10월 중 수많은 외국인과 방문객들이 소통
하는 축제가 될 이태원 지구촌축제를 개최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거리 축제로 만들어갈 계획이란다.
용산하면 이국적인 분위기와 미군기지의 이미지가 다른 캐릭터를 가려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 중에서도 순국선열의 흔적이 용산에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쉽게 지나친다. 일제 강점기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김구 선생을 비롯해서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이동녕, 차이석, 조성환 선생의 영정을 모신 의열사가 효창공원에 자리하고 있다. 어느 따사로운 오후
효창공원엘 가보라. 고즈넉한 속에서 독립을 향한 선열들의 사자후를 들을 수 있을런지도 모르리.
용산에는 한강변을 따라 한남동, 보광동을 중심으로 마을의 수호신을 모신 부군당 7곳과 사당 3곳이 밀집되어 있다.
그 이유는 오늘의 용산구를 이르는 그 시절 용산방(龍山坊)이 세곡(稅穀)이 모이는 물길의 요지였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용산 근교에서 유달리 많이 기우제를 드렸다는 내용이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라 하겠다.
박물관 미술관 즐비한 거리
한강 르네상스 프로젝트의 핵심이라 할 ‘서울항’ 건설을 놓고 논란이 일고 있는 서부이촌동엘 가본다. 천주교 새남터성당. 이곳은 조선 군인들의 연무장(鍊武場)으로 쓰이다 후에 국사범(國事犯) 등 중죄인의 처형장으로 사용되었다. 이른바 새남터처형장. 1456년(세조 2년) 성삼문(成三問) 등 사육신을 처형한 것을 비롯,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처형됐다. 특히 1801년(순조 원년) 신유박해(辛酉迫害) 이후 많은 천주교도이 처형당했다. 1956년 천주교도 순교자 기념탑이 세워졌고, 1983년 한국 순교복자 성직수도회에 의해 지하 1층, 지상 3층, 종탑 3층으로 된 순한국식 기념성당을 세웠다. 천주교인들의 피 위에 세운 성당인 셈이다.
교회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용산은 종교 백화점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다양한 종교의 본산이 자리하고
있다. 통일교 본부와 대한천리교 본부가 청파동이 있다. 국내 유일의 이슬람사원도 한남동에 있다. 원불교 서울본당과
우리나라의 대표적 대형교회인 온누리교회, 충신교회 역시 용산에 있다.
용산에 오면 고급문화에 대한 향수(享受)도 손쉽게 할 수 있다. 우선 국립중앙박물관. 철수한 미군 헬기장 30만㎡ 부지에 건축면적 5만㎡(연면적 14만㎡) 규모로 2005년 완공된 국립중앙박물관은, 그동안 경복궁 내와 옛 중앙청 청사 등을 전전하던 시절을 지나 명실 공히 국제규모의 박물관으로 거듭났다.
특히 현재 신축 중인 한글박물관이 완공되고, 국립민속박물관 이전에 대한 문화체육관광부와의 협의가 성공적으로 타결될 경우, 인접한 용산가족공원과 함께 쾌적한 환경이 조성된 박물관 3총사가 용산에 등장하게 될 것이다. 용산구는 여기에 더해 용산역사박물관을 건립한다는 계획도 세워놓고 있다. 용산전쟁기념관 역시 용산이 자랑하는 역사관. 6․25전쟁, 월남전 등 현대사의 치열했던 전쟁을 중심으로 당시 사용됐던 무기와 전투, 민초들의 삶 등을 형상화한 장면들을 보게 되면 우리의 평화로운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새삼 깨닫게 된다. 이밖에도 삼성그룹이 운영하는 리움미술관, 삼각지 갤러리 거리, 용산아트홀, 한남동 블루스퀘어와 같은 다양한 문화 인프라가 밀집해 문화에 대한 갈증을 느낄 겨를이 없을 정도다.
빈부의 격차가 극심한 곳
용산은 최고갑부과 극빈층이 공존한다는 측면에서도 흥미로운 자치구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을 비롯, 구본무 LG그룹 회장,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 신춘호 농심그룹 회장,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 박삼구 금호아시아나 명예회장,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 류진 풍산그룹 회장 등 내로라하는 재벌 총수들이 한남동을 중심으로 한 용산에 살고 있다.
그런가하면 동자동과 서울역 근처엔 독거노인과 노숙인들이 하루하루 어렵사리 신산스런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따금
심야급식을 나가서 노숙인들에게 급식을 하면서 생각하는바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는 불가능한가’하는 밑도 끝도
없는 화두를 붙잡곤 한다. 물론 답은 이미 나와 있다. 반세기 전 이곳 해방촌을 배경으로 찍은 영화 ‘혈맥’(감독 김수용)을 보라.
용산은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다. 최초의 철교(한강철교, 1900년 건설)와 최초의 인도교(한강대교, 1907년 건설)가 모두 용산을 통과한다는 사실. 서울역신청사는 경부선 KTX과 공항철도의 시발점이고, 용산역은 호남선의 시발점이다. 지하철도 1호선, 4호선 6호선, 국철 중앙선이 지나고 있다. 가히 사통팔달이라고 할 수 있다. 용산역은 예전 육군에 입소하는
장정들이 집결해 입영열차를 탔던 곳이다. 1975년 개봉한 영화 ‘바보들의 행진’에서 입영하는 병태(윤문섭 분)에게 영자(이영옥 분)가 헌병의 도움으로 이별의 뽀뽀를 하던 장면도 이곳에서 찍었다.
용산역을 나와 한강초등학교 남쪽을 바라보면 잠시 노스탤지어에 잠긴다. 지금의 남부터미날로 옮겨가기 전까지 저 곳엔 용산 시외버스정거장이 있었다. 주로 충남과 호남 지역으로 가는 시외버스 노선이었다. 공군 장교 제대를 1년 앞두고 집사람과 대천으로 겨울여행을 이곳에서 떠났다. 을씨년스런 겨울 바다 뭐 볼게 있을까마는 연인과 떠난다는 사실 그 하나로 설?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같이 산지도 어언 33년! 올핸 저 멀리 어디라도 함께 다녀와야겠다.
기왕에 개인적인 얘기가 나왔으니 하나 더하자. 요즘 필자는 용산에 자주 출몰한다. 국방부를 출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 늙어서 무슨 국방부 출입이냐고 의아해 하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최근만 해도 ‘국방개혁 11-30’, ‘강정해군기지’ 등 대형 현안이 계속 불거지고 있기에 이에 대한 팔로업이 필요하다. 국방부를 출입할 때마다 드는 생각. 1979년 10월 26일 밤, 그리고 그해 12월 12일 밤. 국가원수가 중앙정보부장에게 시해되고 난 후 비상국무회의가 열린 육군본부 벙커와 국방부, 그리고 12․12사태가 발생한 육군참모총장 공관. 모두 용산에 위치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고 보면 용산은 현대사의
극적인 변화를 목격한 역사의 증인이라고 할 수 있다.
용산 맛집 빼놓을 수 없다
국방부를 나온다. 마침 점심시간 직전. 자연스레 발길이 향하는 곳. 삼각지 로터리 근처 명화원(明華苑)이다. 매너라고는 찾아보려야 볼 수 없는 퉁명스런 주인장과 그 가족이 대를 물려 운영하는 그야말로 짱께집. 영업시간도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 완전 배짱이다. 묘한 것은 오전 11시부터 손님이 몰려들기 시작해, 11시50분쯤 되면 가게 앞에 줄이 10여m 정도 길게 늘어서는 것이다. 왜일까?
결론은 이 집 음식의 중독성 때문이다. 6․25 직후부터 한 자리를 지켜왔다는 이 집. 반세기 넘은 세월의 더께를 자랑이라도 하듯 꾀죄죄한 주방에서 볼품없는 그릇에 성의 없이 담겨 나오는 짜장면, 짬뽕. 하지만 불상한 고객들은 거의 왕의 하사품 받아들듯 감지덕지 코를 박고 먹어댄다. 갈 때마다 “이집 다시 오나 봐라!” 결심하면서 문을 나서지만, 용산 근처 갈일이 있거나 중국음식이 먹고 싶을 때 파블로프의 조건반사처럼 또 다시 그곳을 향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면서, 이 집 정말 내공 하나는 알아줘야 한다고 인정하곤 한다.
옛 태평양화학 본사 맞은편의 삼각정도 30년 단골. 이 집은 항정살, 가브리살, 이겹 등 돼지 부위가 일품. 그런데 최근
주인장이 아프다며 딸을 내보내 예전만 못하다. 용산고등학교 근처 양재기동태탕집도 가끔씩 가는 맛집이다.
용산참사는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
다시 용산역 근방으로 가본다. 2009년 1월 20일 참사가 발생한 곳은 아직도 을씨년스럽다. 다시는 그러한 불행이 없어야겠지만, 관내 80%가 재개발․재건축 구역이라고 할 정도로 지역 개발이 왕성한 곳 아닌가. 이를 둘러싼 갈등과 대립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없을까? 성장현 용산구청장은 이 문제를 가장 긴요한 숙제의 하나로 인식하고 있다고 말했다. 결국 대화를 통해 접점을 찾을 수 있었다고 술회했다. “갈등의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재개발구역 철거민의 오랜 농성도 지속적인 대화, 긴급 주거 지원으로 마무리될 수 있었고, 조합과 세입자 간 중재로 원만한 합의에 이르도록 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부유층보다 훨씬 많은 관내 소외계층에 대한 대책은 무얼까? 용산구는 저소득층 치매, 중풍환자들이 안심하고 편안하게 치료와 요양을 할 수 있도록 노인요양원을 신설하고, 저소득층과 노인, 장애인들이 안정적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배려하겠단다.아울러 많은 구민들로 하여금 소외계층에 다가갈 수 있도록 다양한 봉사활동 프로그램을 발굴하고 기부문화를 활성화하겠다고 밝혔다.
이제 한강에 나간다. 바다처럼 유장한 한강, 급할 것 없다는 듯 느릿느릿 흘러간다. 예전 한 겨울엔 전국 빙상대회가 열리기도 했고, 여름엔 강수욕의 메카였던 한강. 세월의 흐름 속에 이젠 그 역할을 다른 곳에 맡긴 채 잘 정비된 둔치 공원으로 나그네를 맞이한다. 세계 여러 곳의 수도를 가봤지만, 한강처럼 푸근하고 넉넉하며 정겨운 강은 보지 못했다. 태고적부터 그랬듯, 지금도 그렇듯, 앞으로도 그렇게 차분히 흘러가기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