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그 너머의 세계
올 봄, 『경남문학』 130호에는 놀랍게도 회원의 소설이 3편이나 실렸다.
끈질기게 원고를 잡고 오랜 산고를 견디고 나온 소설이 이처럼 3편이나 실리게 된 것은 경남 문단으로서는 매우 뜻 있는 일이 된다. 이번에는 재독 삼독을 거치는 동안 곱씹어 보는 소설 미학의 극치를 보는 듯한 김임순의 「문신클럽」을 집중적으로 보기로 한다.
「문신클럽」은 제목부터가 호기심을 끈다. 웬 조폭들의 모임인가 하다가 아니면 마산 산호동에 문신이 있으니 조각하는 이들의 모임을 지칭한 것인가도 생각해본다. 한참 만에 「문신클럽」은 문신(文身) 이야기이지만, 문신한 사람들 이야기라기보다는 비-문신과 문신의 세계, 일상과 비-일상의 세계, 곧 현실과 탈현실의 이야기임을 눈치 챈다. 그리고는 주인공 ‘나’/그의 탈, 현실 하는 이야기가 핵심이 됨을 안다. 아니면 요샛말로 ‘되기’나 ‘탈영토’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결론을 말하자면 고사리 문신 되기이다. 화자는 독자에게 주인공이 탈현실이라는 의례(儀禮), 일종의 통과과정을 통하여 그 비의(秘儀)를 엿보이면서 탈현실을, 진부하지 않는 방식으로, 또 다르게 보면 탈영토라는 말로 전하고 있다.
동시에 이 소설, 「문신클럽」은 독자로 하여금 문신하기의 과정이자 여정을 근간으로 하여 여기에 은닉해 놓은 소설 시학의 여러 문제를 찾아내게 하는 퍼즐 게임과 또 ‘어떻게’라는 소설의 서술 미학의 진면목을 찾아보게 해준다.
예나 제나 소설 이해의 첫걸음은 줄거리의 파악이다. 화자이자 주인공인 ‘나’/그는 미국 관광 중에 자신의 턱에다 작은 고사리 문신을 새기게 된 사건을 회상하여 전하는 이야기다. 얼굴에다 고사리 그림을 새겨 받는 시술 행위는 스스로의 뇌리에 얼마나 많은 의식을 변주케 할 것인가. 그런데 그의 문신 시술 체험이 줄곧 현재 진행형으로 느껴지는 것은 또 무슨 까닭일까. 뼈바늘이 살갗을 파고드는 시술(施術)의 시작이 서술의 기점이 된 여정/담론은, 동시에 그가 회상하는 과거의 사건들이 끊임없이 현재(허구적 현재)와 병렬되면서 서술되고 있기 때문이다.
줄을 비운 6개의 단락들은 상호 교직되면서 두 개의 큰 흐름을 이룬다. 첫 번째의 흐름은 문신을 하는 시간 내내 그의 유산된 아이며, 늘 마권이며 로또를 사는 남편, 어머니와 아버지의 비루한 삶, 세 번이나 만나게 된 백인 남자, 야외공연장의 사람들, 마오리 부족의 문신…… 가까운 과거나 먼 과거의 사건들의 회상이다. 두 번째 흐름은 “노인이 (침상에 누운) 그에게 다가 서”서, (문신의) “모형을 잡고 범위를 넓히며 뜸을 뜨”는 등 소설의 끝 단락에 이르기까지의 진행되는 시술 시간의 흐름이다. “드디어 고사리 문신이 턱에 새겨졌다”는 끝 단락의 시작은, 마침내는 시술도 끝나고 ‘나’의 문신 이야기도 끝이 남을 보여준다. ‘나’의 의식의 흐름은 과거와 현재를 분리하면서도 이를 동시화하여 전체를 하나로 얽어 마무리한다. 침상에 누워 있는 그의 몸과 의식에 떠오르는 모든 사건들이 하나로 되는 소설의 끝에서 한 줄기 고사리를 파랗게 피어나게 하는 새로운 삶으로 되는 것이라니.
그가 떠났던 미지의 시공간, 재영토화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한국에서의 그의 존재 현실은 어떠한가? 서른일곱의 그는 아래층 여자가 층간 소음으로 따져드는 열 세평 원룸에서 마권이며 로또를 꿈꾸며 출산보조금에 전전긍긍하는 남편 J와 살고 있다. 국회의원 선거로 말미암아 실직을 하고 고단한 삶을 사는 아버지, 집 귀신이 되어가는 남편과 손(孫)도 가지지 못한 딸, 이들에 에워싸인 채 숨 막혀하며 사는 히스테리컬한 어머니. 유산(流産)의 비애가 의식 깊이에 자리하고, 중국 발(發) 스모그 현상과 자동차들이 뿜어내는 매연과 이 모든 부정적 현실 더불어 사는 그의 세계. 그는 이 속에서 서른일곱의 나이로 살아가고 있다. 남루하거나 비루한 현실은 그에게는 없는 순산의 경험과 수유의 기쁨과 아이들과 오리들이 한가롭게 노니는 푸른 풀밭과 그 푸른 풀밭이 주는 여유로운 세계의 다른 한 끝에서도 그의 의식에 짙게 배어 내재적 힘으로 그를 변화하게 한다. 가난, 돈, 이 모든 것들이 밀치며 당기며 와글거리며 계열체를 이루어 의미의 덩이를 생성한다. 문신을 하는 마리오족의 노인의 임상은 온몸에 문신을 한 조폭들을 떠올리게 하고, 도로 위를 느릿느릿 기어가는 새끼를 배었을지도 모르는 커다란 도마뱀은 출산보조금마저 놓치게 된 유산(流産)과 실직을, 인디안 무리 속에 외톨 씨앗으로 살아남은 백인 남자를 관계지우며, 유산의 외상이 도마뱀을, 공원의 파란 눈의 아이와 백인 남자가 한순간 자궁에만 있었던 생명의 그의 씨를 관계 짓는다.
이런 사건들이 서술의 시공간에서 또 서술 시간의 이동을 따라서 접속과 일탈을 반복하면서 몇 개의 계열체를 이루고 변화, 변용되어 ‘새로운 의미의 다른 세계를 만든다. 이것이 리좀이든가? 시술의 시간에 호명된 사건들의 상호작용은 일탈과 반복을 계속하며 그것이 다시 현재의 시간 속에서 새롭고 파란 문신의 세계를 생성한다.
‘나’는 왜 거리화된 이국에서 과거에는 늘 혐오스럽게 여겨오던 문신을 자신의 몸에다 시술하게 되는가? 어머니의 문신을 줄곧 질시(嫉視)해오던 ‘나’가 왜 문신을 하게 된 것일까? 그리고 그 문신을 한 세계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나’에게 문신은 네거티브한 모든 것을 내비치게 하는 조악하고도 정체된 삶의 표상이었다. 청룡과 백호가 꿈틀거리는 조폭의 몸, 저승사자 같아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만드는 문신한 엄마의 눈썹, 일곱 개의 검은 점이 새겨진 아버지의 팔목. 혐오스럽게만 보아오던 문신을 ‘나’가 급격히 시술키로 결심한 것은 왜, 무슨 까닭이 있었기 때문일까. 불운은 그냥 오는 것인가. 무엇보다 강렬한 유산(流産)의 비애는 가난과 고통과 불안에서 소생 가능한 미래를 뒤엎어 놓는다. 유산을 하고 누웠던 날 텔레비전에서는 세계 여행지를 소개하고 있었고 ‘나’는 호스트의 팔목에 살짝 내비친 나비 문신을 보았다. 가난이며, 구차한 “삶의 현장”으로부터 소격(疏隔)된 이국의 “여행지”는 이렇게 선택되어지는 일이다. 주어진 일상이 된 삶의 현장에서 돌연한 여행이며 급격한 문신은 이제 ‘나’에게 주어진 “존재에 대한 반항”이다. 그 탈주는 ‘나’를 얽어매는 모든 관습과 제도와 법으로부터의 탈주이다. 그것은 평화로운 풀밭과 ‘나’의 자궁 속에서 피지 못한 한 톨 씨앗을 살아낸 아이와 한 백인 남자와의 만남이다. 원주민의 문신은 세상을 향해 무장해야 할 무엇이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턱에다 새기게 한, 파랗게 살아나는 고사리 문신이다. 존재에 대한 반항으로서의 문신하기는 곧 탈주의 욕망을 키우는 재영토화이자 존재 전환이다. 존재의 전환은 존재의 소멸에 대한 강도 높은 생성의 행위이다.
소설 「문신클럽」이 흥미로운 것은 실로 그 소설 미학에 있다. 작가가 언어 기호를 부려서 이뤄낸 소설 담론은 작가와 독자가 공유하는 또 다른 즐거움의 장이 된다. 소설, 「문신클럽」은 문신하기의 과정을 근간으로 하여 은닉해 놓은 문제들을 찾아내는 퍼즐이다. 계속되는 여행의 시간에도 변주되면서 삽입되는 서로 다른 시간의 개별적 사건들은 동시적 공간에서 화해와 긴장, 병렬과 대립, 배제와 결속, 은유와 환유의 계열체로 맞추어 보며 이를 귀결, 추상화하여 총체적 의미를 읽어내도록 이끄는, 강렬하고도 비밀한 힘, 그것이 이 소설의 즐거움이다.
작가와 화자가 함께 도착한 문신의 세계, 문신이라는 탈영토는 어떠한가. 화자는 말을 아낀다. ‘나’가 찾아간, 모두가 함께 찾아간 이국은 매혹적인 문신과 공연이 있고 맑은 공기와 푸른 풀밭이 있다. 그러니 풍요로움이 없는 ‘나’에게 대기는 맑고 풀밭은 더욱 폭신하다. 그러나 작가/화자는 그에게 새로운 다른 세계가 어떠한지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독자의 상상이며 독자 모두가 찾아야 할 독자의 몫이라 말한다. 그냥 “… 고사리 문신이 파랗게 살아났다”고만 말하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