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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년대 초반 울산에 최초로 카바레가 들어서 울산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옥교동의 월광카바레 자리에 지금은 신동아백화점이 들어서 카바레의 옛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 ||
미나리 카바레가 자리잡은 옥교동은 60~70년대까지만 해도 울산의 중심지였으나 지금은 도심 속 섬이다. 중앙호텔 동편에 있는 이 카바레는 건물 주위 길이 좁아 겨우 한 두 사람이 빠져 나갈 정도이고 노란색의 시멘트 건물도 춤과는 거리가 멀어보인다.
울산이 공업도시가 된 후 도심의 상가와 상점들이 모두 현대화되었는데 유독 이 카바레는 아직 옛 모습 그대로다.
울산에 사교춤을 처음 도입한 사람은 미나리 카바레 바로 곁에 살았던 박지중씨다. 일제강점기 일본 동경농대를 졸업했던 박씨는 해방 후 울산에 머물 때 일본에서 배운 사교춤을 친구들에게 가르쳤다. 당시 울산의 최고 멋쟁이였던 그는 이미 그 때 집에 차실을 마련해 놓고 친구들에게 차를 대접했다.
해방 후 울산에서 서양 사교춤을 본격적으로 가르친 사람은 오흥조씨다. 그는 50년대 중반 울산중학교 서무계에서 일했다. 당시 그는 울산초등학교 앞 적산가옥에서 살았는데 지금은 이곳에 개나리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그는 당구를 잘 쳤고 운동신경이 발달되어 축구, 배구 등을 잘 하는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또 후배들을 잘 챙기는 의리파이기도 했다.
후배들은 “오 선배가 언제 어디서 춤을 배웠는지 모르지만 아마 뛰어난 그의 운동신경이 까다로운 서양춤을 배우고 가르치는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울산중학교에서 일할 수 있었던 것은 형님의 도움이 컸다.
그의 형 흥세씨는 해방 전 울산농고 교감을 지냈는데 울산의 참된 교육자로 칭찬을 받았다. 그는 일제강점기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후 일본 부인을 데리고 울산으로 와 울산농고 사택에 살았다. 울산교육계의 기대주였던 그는 일찍 타계하는 바람에 청운의 꿈을 펴지 못했다.
오흥조씨는 처음 고기업과 박진년씨 등 울산 유지들을 상대로 춤을 가르쳤다. 고씨는 당시 울산양조장을 운영해 경제적으로 탄탄했을 뿐 아니라 울산읍장까지 지내 울산의 정·재계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일제강점기 동래고보를 졸업했던 박진년씨 역시 울산에서는 가장 큰 잡화상인 신화상회를 운영하고 있었다.
오씨가 춤을 가르칠 때만 해도 레코드가 LP판이 아닌 SP판으로 요즘처럼 음질이 좋지 않았다. 축음기도 노래를 시작할 때마다 판을 돌리기 위해 태엽을 감아야 했고 새 음반을 축음기에 올릴 때 마다 바늘을 뾰족하게 갈아야 했다.
오씨는 이 때만 해도 서양춤에 대한 울산사람들의 인식이 좋지 않아 공개적으로 춤을 가르칠 수 없어 몰래 개인교습을 했다. 이 무렵 이들과 함께 오씨로부터 춤을 배웠던 김창식옹(87)은 “당시만 해도 울산의 유지들 중에는 사교춤을 서양의 건전한 풍습으로 보고 건강과 사교를 위해 접근했지만 울산 군민들의 서양춤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아 춤을 배울 때는 흡사 죄라도 짓는 기분으로 숨어 추어야 했다”고 회상한다.
이무렵 우리나라 사람들이 서양 사교춤을 좋게 보지 않았던 이유는 소위 말하는 ‘자유부인’과 ‘박인수 사건’ 때문이었다.
‘자유부인’은 정비석씨가 쓴 소설로 1954년부터 6개월 동안 서울신문에 연재되었다. 이 소설은 대학교수 부인이 춤바람이 나는 바람에 남편의 제자와 사랑에 빠져 가정을 외면하고 외도를 하는 비윤리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작품은 연재 도중 작품 속의 성윤리와 도덕성을 놓고 작가였던 정비석과 당시 성균관대학 황산덕 교수가 지상 논쟁을 뜨겁게 벌이는 바람에 독자들의 열광적인 호응을 받았지만 결과적으로 춤이 사회악으로 폄하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두 번 째는 1955년 일어난 ‘박인수 사건’으로 당시 해병대 대위로 제대했던 박인수씨가 서양춤을 미끼로 일류 대학 여대생 수 십 명을 상대로 엽색행각을 벌인 사건이다. 이 사건은 나중에 박씨로부터 농락을 당했던 여대생들의 부모들이 박씨를 결혼을 빙자한 간음죄로 고소하는 바람에 박씨가 재판정에 서게 된다.
그런데 놀랍게도 재판장은 “국가는 사회적 이익을 위해 지켜야 할 가치가 있는 여성의 정조만 보호해 줄 의무가 있지 자신의 정조를 헌신짝처럼 생각하고 놀아난 여인의 정조는 지켜 줄 의무가 없다”면서 박씨에게 무죄를 선고하는 바람에 세상을 놀라게 하면서 서양 춤이 또 한번 가정 파괴의 요인으로 인식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울산에 처음 카바레가 문을 연 것이 1960년대 초다. 이 무렵 최흥만씨가 운영했던 옥교동 중앙시장 인근 블록 공장이 헐리면서 이곳에 월광카바레가 들어서게 된다. 최씨는 당시 울산의 재력가로 나중에 아들 봉길씨가 성남동에 그랜드호텔을 건립해 울산에 호텔시대를 열게 된다.
카바레 건물은 2층으로 일층은 카바레였고 2층은 식당 겸 술집이었다. 당시만 해도 카바레는 단순히 춤만 추었던 곳이 아니었고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카바레 안에 있는 스탠드바에서 술을 마시기도 했다. 당시 성남동에 살았던 서진익씨(82)는 “옥교동에 월광카바레가 들어설 때만 해도 나는 춤이라고는 몰랐지만 친구들과 함께 그곳에 가 다른 사람들이 춤을 추는 것을 보면서 술을 마신적이 있다”고 회상한다.
아무튼 월광카바레는 울산에서 처음으로 여성댄서까지 등장해 울산의 많은 사람들이 댄서들을 구경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당시 울산의 한량들 중에는 댄서들을 술집 작부 정도로 생각하고 접근하다가 낭패를 당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실제로 당시 울산 보안대 소속의 모 군인이 이 카바레를 자주 드나들다가 댄서와 친하게 되었는데 이 댄서가 자신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면서 백주에 카바레 앞에서 권총으로 공포탄을 쏘기도 했다는 얘기가 지금까지 전해 오기도 한다.
월광 카바레에는 울산 출신의 댄서들이 많았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들이 비록 돈을 받고 춤을 추지만 술집 작부와는 달리 건전한 사교춤을 가르친다는 자긍심이 대단했다. 따라서 예의없는 손님들의 요청을 호락호락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 자신들이 손님을 골라가면서 춤을 추기도 했다.
실제로 월광카바레 출신 댄서들 중에는 나중에 울산에서 술집을 열어 성공했던 여인들도 많았다. 예로 80~90년대 울산의 대표적인 룸살롱이었던 코리아나호텔 옆 ‘호랑나비’도 한때는 월광카바레 댄서 출신이 주인이었다.
60년대 초반 울산의 젊은이들 중에는 부산에 가 서양춤을 배운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 대부분은 당시 유행했던 트위스트 춤의 일인자 ‘트위스트 김’으로부터 배웠다. 본명이 김한섭인 트위스트 김은 당시 부산 영주동에 사무실을 두고 춤을 가르쳤다. 그는 60년대 중반이 되면 뛰어나 춤 실력을 인정받아 서울 충무로 영화계로 진출해 ‘맨발의 청춘’에서 신성일과 함께 열연했는데 이 영화가 공전의 히트를 하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일류 스타가 되기도 했다.
오흥조씨 외에도 반구동 내황의 김학규씨와 군 의장대에서 서양 춤을 배웠던 김학출씨도 울산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서양춤의 달인이었다.
이후 70년대가 되면 울산에는 현대카바레가 중앙시장에 들어서고 남구 신정동에 남남카바레가 문을 열기도 했다. 또 80년대에는 옥교동에 미나리카바레가 들어선다. 하지만 울산이 공업도시로 번창하면서 호텔이 세워지고 이들 호텔에서 나이트 클럽을 운영하는 바람에 카바레는 자연히 쇠퇴기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서양춤이 울산에 드리운 그림자도 많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울산의 저명 인사들이 태화동 사설 춤방에서 몰래 춤을 배우던 중 경찰의 추격을 피해 도망을 가다가 다리뼈가 부러지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춤 바람으로 패가망신한 사람들도 적지 않다. 7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춤바람이 난 울산의 젊은이들이 울산에서 무와 배추 등 농산물을 싣고 부산과 대구 청과시장에서 판 후 집으로 오지 않고 젊은 카바레 댄서에 미쳐 이 돈을 카바레에서 모두 날리는 바람에 오도가도 못하고 있다는 얘기가 신문에 자주 등장한다.
다음은 1966년 경향신문에 실린 울산 풍속이다.
‘4년 전만 해도 울산에는 술집이 57개, 음식점이 500여개밖에 되지 않았지만 요즘은 거리와 골목마다 술집이요 또 카바레가 나타나 울산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다. 유흥세 징수도 4년 전에 비해 11배로 늘어나 연 1백15만원이나 된다. 여관도 15개였던 것이 지금은 2개의 호텔을 비롯해 57개로 늘어났지만 손님들이 많아 예약 없이는 술도 마실 수 없는 형편이다. 이것은 울산에 모여드는 토목회사와 일군들 때문이라고 하지만 울산사회가 이렇게 흥청거려도 되는지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주 이 글을 쓰면서 필자가 취재차 미나리카바레에 들렸더니 홀에서 춤을 추던 사람들이 마침 이 시간 국회에서 논의 중인 이석기 의원의 체포동의안의 생중계를 보기 위해 홀로 몰려 나와 있었다. 대신 홀 입구에 걸려 있는 ‘오늘 하루도 삶의 선물입니다. 하루를 즐겁게 보냅시다’라는 글귀가 눈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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