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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가톨릭대학교산악회
#등반경력
1992년 로부제·임자체 등정
1993년 에베레스트 등정
1997년 매킨리 등정
초모랑마 등반
킬리만자로 등정
2004년 엘브루즈 등정
#상훈경력
1993년 기린장 수상
김순주씨(金順珠·36)는 요즘 매일 저녁 포항 북부 해수욕장 부근 해맞이공원 뒷산을 오른다. 20여 분간 도로를 달리고나서다. 가능한 한 빨리 걷는다. 그러면 어느 순간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헉헉대면서도 고지를 향해 더욱 밀어붙인다. 능선에 올라선 순간 불어오는 맞바람은 희열 그 자체다. 살아있음을 이렇게 절실히 느낄 수 있는 순간이 얼마나 될까.
“친구들이 왜 그렇게 가시밭길을 걸으려 하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런 열정을 조금만 다른 쪽으로 돌리면 편하게 살 수 있을 텐데 하면서 말이죠. 그 친구들은 잘 모를 겁니다. 왜 햇살이 아름다운지 말이죠. 힘든 과정을 겪고 나서 보는 햇살은 정말 따스하답니다. 고맙고요. 극기 후에나 느낄 수 있는 쾌감인 것 같아요.”
8,000m 캠프 세 차례 오르며 등정 시도
▲ 93년 5월10일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김순주씨.
당시 김순주는 대학을 갓 졸업한 24세의 앳된 아가씨였다. 하지만 강했다. 대구가톨릭여대 산악부 시절 그녀는 남자로 치면 황우장사급 체력을 보여주었다. 주말산행은 한 번도 빼먹는 일이 없고, 방학이면 20일치 식량과 취사야영장비를 짊어지곤 설악산 곳곳을 훑고 다녔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집에 돌아가자마자 다시 배낭을 꾸려 설악의 암릉 곳곳을 쑤시고 다녔다.
대학 2학년 때는 암벽을 배우고픈 마음에 홀로 대구등산학교에 이어 클라이밍스쿨에 들어가기도 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선배들 눈에 띌 수밖에 없었고, 그 덕에 선배들 추천으로 대한산악연맹 여성 에베레스트 훈련대에 낄 수 있었던 것이다.
“에베레스트와 K2 같은 큰 산을 등정한 김창선 선배 같은 산악인들이 좇아다니면서 점수를 매겼답니다. 참 답답했을 거예요. 걷는다고 걷는데 눈만 마주치면 딱하다는 표정을 지으셨으니까요. 그래도 아무튼 50명쯤 지원했는데, 그중 14명 안에 들게 되었답니다. 1차 선발에서 합격한 덕분에 6,000m급 트레킹 봉인 임자체(6,189m)와 로부체(6,145m) 전지훈련 기회도 얻었고요.”
▲ 매킨리 베이스캠프에서 식사중인 김순주씨(앞줄 왼쪽).
“지현옥 대장과 함께 나선 1차 공격은 날씨가 나빠 포기하고, 2차 공격은 셰르파와 둘이서 시도했어요. 날씨가 조금 안 좋기는 했지만 셰르파는 그냥 밀어붙이자고 하더군요. 그렇지만 밑에서는 궂은 날씨가 걱정되었던지 철수 명령을 내렸답니다. 다 막내인 저의 안전을 걱정해서였죠.”
지현옥 대장, 최오순 대원과 세계 최고봉 정상을 오르던 날에도 김순주는 컨디션이 좋았다. 마지막 캠프에서 새벽 1시 출발, 9시간45분만인 10시45분에 정상에 올라섰으니 평균치보다는 빠른 속도였다. 정상에서 1시간 반이나 머물렀다. 한데 흥분했던 탓인지 그녀는 산소마스크와 고글을 벗어버렸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마지막 캠프로 내려서는 사이 눈이 점점 아파왔다. 설맹이었다. 캠프까지는 무사히 내려섰지만 앞을 제대로 볼 수 없는 상태에서 그 날 C2(7,200m)까지 내려서자는 셰르파의 충고를 따를 수 없었다. 결국 눈이 어느 정도 회복되기까지 마지막 캠프에서 이틀간 머문 뒤 밑에서 올라온 셰르파의 도움을 받으며 하산해야 했다.
“그래도 에베레스트는 제겐 가장 유(柔)했던 산 같아요. 복도 많이 받은 셈이고요. 언니들은 도(道)나 산악회의 명예에 대한 부담 때문에 오히려 등반이 잘 풀리지 않았던 것 같아요. 반면 저는 편안한 마음에서 등반했어요. 세계 최고봉을 오르겠다는 생각보다는 다른 세상을 보고픈 마음에 원정대에 지원했으니까요.”
히말라야 데뷔작은 화려했지만, 이후 내로라할 만큼 두각을 보이지는 못했다. 아니 한동안 고산을 멀리 하며 지냈다. 에베레스트 등반을 위해 1년 반이 넘는 긴 기간을 투자해야했던 그녀는 사회생활에도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95년에도 고산에 갈 기회가 있었답니다. 초오유-시샤팡마 원정이었죠. 그런데 산악부를 맡고 계셨던 강명구 교수님이 시내 레스토랑으로 불러내시더니 간곡하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산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말이죠. 선생님 추천으로 취직한 철강회사를 다니던 때이기도 했지만, 매사에 생각이 깊으신 분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고집부릴 수가 없었죠. 지난해 암으로 세상을 떠나시기 며칠 전 찾아뵈었더니 몸을 가누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엘브루즈 갔다온 얘기를 해달라시더군요. 정말 산을 좋아하시던 분이셨어요. 선생님 말씀을 따르지 않았다면 지금쯤 후회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곤 한답니다.”
▲ 매킨리 정상에 오른 김순주씨.(왼쪽) - 킬리만자로 산행중 김수정(왼쪽)씨와 함께.
에베레스트를 다녀온 뒤 4년 동안 직장생활에 열중했다. 그런 가운데 서른 살이 되기 전에 세상을 실컷 돌아다녀 봐야겠다는 생각만큼은 버리지 않았다. 97년 봄, 스물아홉 나이에 과감하게 직장에 사표를 던졌다. 주머니를 탈탈 털었다. 1천만 원이라는 적잖은 돈이 있었다. 마침 경북산악회 5대륙 최고봉 원정이 실시되는 해였다. 그중 북미 최고봉인 매킨리(6,194m)가 마음에 들었다. 에베레스트 등반은 포터와 셰르파의 역할이 절대적이라는 게 늘 아쉬웠다. 반면 매킨리는 높이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짐 수송에서부터 취사야영, 러셀에 이르기까지 등반에 수반되는 모든 일을 등반자 스스로 해결해야한다는 게 무엇보다 큰 매력이었다.
▲ 엘브루즈 등반중 최오순씨(왼쪽)와 함께.
김순주는 “너무나도 즐거운 산행”이었다고 매킨리 원정을 기억하고 있다.
“대학시절에는 그렇게 산에 다니는 것을 못마땅해 하시던 아버지께서 회비를 내주셨어요. 4년 동안 꾹 참고 일만 하면서 지낸 게 기특해 보였던가 봐요. 한편으론 ‘둘째 딸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게 등산’이란 걸 인정하신 거죠. 아무튼 등반에 나섰을 때 후배들은 높이를 올릴수록 힘들어하고 불안해하는데 저는 그렇지 않았어요. 산이 위험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고, 늘 그래왔듯이 한 발 한 발 걷다보면 정상에 올라서리라 생각했으니까요. 후배들의 불안함은 두려움 때문인 것 같아요. 에베레스트 등반 때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저는 산이 두렵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습니다. 그래도 대원 6명 전원이 정상에 올랐으니 성적이 좋았지요.”
그 해 8월 말에는 초모랑마에 도전했다. 역시 경북산악회 원정대였다. 초모랑마는 에베레스트의 티벳 이름. 따라서 당시 루트는 93년 때 네팔쪽 남동릉이 아닌 티벳쪽 북릉~북동릉 루트였다. 그 원정에서 그녀는 난생 처음으로 고산의 비정함을 겪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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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 군대얘기 나오면 밤을 새죠? 저희도 그래요”
▲ 아프리카 킬라만자로 정상.
▲ 대구가톨릭대 학창시절 지리산 정상에서. 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김순주씨, 그 왼쪽이 김씨의 젊은 날을 이끌어준 고 강명구 교수.
“어느 날 갑자기 수정이가 ‘언니 1년간 돈 모아놓았으니까 인도 좀 데려가 줘요’ 하지 뭐예요. 당시 수정이는 해외여행 경험이 전혀 없었어요. 그래서 나는 아프리카를 가고 싶다고 했더니, 수정이 왈 그러면 아프리카 갔다가 인도에 가자는 거예요. 그러자고 했죠.”
50일간의 긴 여행이었다. 그 여행 동안 김순주씨는 후배와 둘이서 킬리만자로(5,865m)도 오르고, 케냐와 탄자니아 곳곳을 돌아다녔다. 그리곤 25일째 되는 날 아프리카를 떠나 인도로 향했다. 그렇게 97년 한 해동안 매킨리, 초모랑마, 킬리만자로를 등반한 그녀는 이후 한동안 고산을 찾지 않았다. 특히 99년 7월, 매킨리와 초모랑마를 함께 등반했던 선배 하찬수씨(38·계명대 OB)와 결혼한 이후로는 가정주부 역할에 충실하려고 했다.
▲ 제주도 가족나들이.
결혼 이후 가정생활에 충실하다 보니 4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2004년 봄이 되자 몸이 근질거렸다. 운동을 제대로 하지 않고 지내던 터라 엘브루즈(5,642m) 정도면 적당히 즐기면서 오를 수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에베레스트 대원이던 곽명옥, 최오순 선배가 동행하겠다 하여 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되어 가는데 아이들이 마음에 걸렸다.
“그 고민을 아버지께서 흔쾌히 해결해주시지 뭐예요. ‘돌아다니기 좋아하는 네가 그 동안 참고 지내느라 고생했다’면서 말이죠. 정말 즐거운 산행이었어요. 비행기 예약 외에는 모든 것을 현지에서 해결했답니다. 그 바람에 여행 스케줄은 우리 마음대로 바꿀 수 있었고, 나이든 가이드와 대학생 통역과 정상까지 오르는 사이 에피소드가 정말 많았답니다.”
▲ 엘브루즈 등정을 마치고. 맨 오른쪽부터 곽명옥,최오순, 가이드, 김순주,통역.
“자정쯤 되어서 젊은 친구가 올라오지 뭐예요. 헐렁한 스노보드 복장을 하고 말이죠. 그 친구가 올라온 지 3시간 뒤 정상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가이드 할아버지가 저희들을 처음 보았을 때 황당하다 싶었다면, 저희에게 통역은 황당한 친구였답니다. 스노보드용 신발에 아이젠을 끈으로 동여매고, 스노보드까지 짊어지고 올랐으니까요. 고산이란 데를 처음 올라보는 친구니 당연히 헤맬 수밖에 없죠. 그런데 안부에서 토하기까지 하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거예요, 스노보드도 짊어지고 말이죠. 그렇게 해서 정상에 올라섰으니 그 기쁨이야말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겠죠. 우리보다 오히려 더 기뻐했으니까요.”
러시아 통역은 안부까지 30분쯤 늦게 내려오더니 그 다음에는 스노보드를 신곤 휑하니 내려가 버렸다. 다시 만난 것은 두어 시간쯤 지나 프리웃산장에서였다.
“산장에서 만나 라면에 햇반을 내놓으니까 정말 맛있게 먹더군요. 너무도 귀여운 젊은이였어요. 러시아 젊은이들은 늘 자연 속에서 살다 보니 자연을 그야말로 자연스럽게 이겨내는 법을 깨우친 것 같아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내는 인내심과 강인함 말이죠. 정말 부럽더군요. 저희 애들도 저렇게 키워야겠다고 다짐했으니까요. 아무튼 결혼 전까지는 왜 산에서 숨이 차서 헐떡이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이번에 가보니까 힘들더군요. 명옥 언니는 ‘너 옛날에 그 빠릿빠릿함이 다 어디 갔냐’ 하고, 귀국 후 후배들한테 그 얘기를 하니까 그러더군요. ‘학창시절 언니가 뭐가 힘드냐며 그냥 퍽퍽 걸으면 되는데 하고 말할 땐 정말 미웠다’고 말이죠.”
김순주씨는 엘브루즈에서 돌아오는 길에 최오순씨와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이번에는 아콩카구아가 솟아있는 남미를 여행하자고. 하지만 2004년 12월 남미를 향해 출국하는 날 새벽에 최오순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 93년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서 곽명옥씨(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와 함께. 앞줄 맨왼쪽이 김순주씨.
남자들은 만나기만 하면 군대 얘기하죠? 저희들도 몇날 며칠 동안 에베레스트 얘기를 나누곤 해요. 할 얘기가 좀 많겠어요? 1년 반 동안 훈련하는 사이 거의 매주 서울에서 만나고, 1주일 넘는 훈련등반도 여러 차례 했고, 히말라야 전지훈련도 했죠, 막판엔 넉 달간 합숙훈련까지 했으니 말이에요. 명옥 언니와 그런 얘기 사흘간 나눈 다음 집으로 돌아갔죠.”
“현재를 살자는 게 생활철학”
지난 1월에도 아콩카구아 원정을 나설 계획이었으나 또다시 무산되었다. 지난해 연말 부친께서 대장암 진단을 받고 1월 초 수술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산에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암 진단을 받자 자포자기하신 부친을 설득하고, 또 수술을 마치고 퇴원할 때까지 둘째 딸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 계획을 내년 1월 다시 시도할 생각이다.
“엊그제 남편한테 물었어요, 가도 되겠냐고요. 고맙게도 흔쾌히 갔다 오라고 하더군요. 사실 지난해 남편과 함께 가고 싶었어요. 나보다 실력이 나은 남편 등에 업혀 올라가고 싶은 생각이었으니까요. 올해는 꼭 갈 거예요.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은 생각도 들고요. 현재를 충실히 살자는 게 제 생활철학이에요. 미루다 보면 마음은 그대로일지 몰라도 몸은 변해갈 테니까요.”
김순주씨가 아콩카구아를 오르려는 것은 흔히 말하는 5대륙 최고봉 등정이 목적여서가 결코 아니다. 또 다른 대륙을 밟아보고, 그곳의 산뿐 아니라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나 그녀의 두 눈으로 직접 보고 느끼고 싶은 마음에서다.
“저희 집은 딸 셋 내리 태어난 다음에 아들 둘이 태어났어요. 그러다 보니 제가 남자 역할을 도맡아하게 되었어요. 살면서 그게 가장 큰 부담이었어요. 에베레스트 등정자란 딱지도 부담스러웠고요. 모든 걸 업으로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그래도 좋잖아요, 제가 좋아하는 일을 지금까지 해오고 있다는 게.”
남미를 다녀온 다음 김순주씨의 목표는 유럽이다. 유럽은 꼭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갈 생각이란다.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큰 세상을 보고 큰 꿈을 갖게 하고 싶기 때문이란다.
“아이들까지도 그래요. 엄마는 어디 가기만 하면 걷기만 하냐고 말이죠. 고향인 합천 덕곡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닐 때 육상부 생활을 하고, 옆 마을 가려해도 산을 넘어야 했고, 나무하러 산을 오르내린 게 결국 지금의 저를 만든 것 같아요. 산을 오르는 거든 사는 거든 모든 게 어려움을 이겨내는 과정인 것 같아요. 그 기쁨이 가장 잘 느껴지는 게 능선에 올라 바람을 맞는 순간이에요. 정말 기뻐요. 날아갈 것만 같아요.”
글 한필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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