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은 자식을 품에 두고 나무는 자식을 멀리 보낸다
李 淸 자유기고가
나무의 삶은 동물보다 치열하다
의식이 없고 신체적 기능이 정지된 채로 식물적 代謝(대사) 기능만 하는 인간을 「식물인간」이라 부른다. 최근에는 한나라당이 철수해 버려 사실상 기능이 정지된 국회를 「식물국회」라 부르기도 했다. 어느 것이나 「생명이 있으나 마나 한」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식물에는 명예훼손(?)에 해당하는 잘못된 표현들이다.
동물은 이동 능력이 있어 유해한 환경을 이리저리 피하고 선택할 수 있으나, 식물은 그런 능력을 타고 나지 못했기 때문에 선 자리에서 온갖 生存의 조건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동물은 이동하면서 먹이를 밖에서 구하지만 식물은 스스로 먹이를 만들어야 한다. 즉, 그 자체가 「화학공장」이다. 그 때문에 식물, 특히 나무의 삶이야말로 동물보다 더 치열하다는 것이 나무를 제대로 아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과학문명이 발달하고 콘크리트 그늘이 짙어질수록 나무와 숲에 대한 인간의 의존도 역시 상승하는 법이다. 우리 옆에는 어떤 나무들이 우리들 삶의 절반을 떠맡으며 함께 살고 있는지, 나무의 세계를 나무 박사 李惟美(이유미·42)씨에게 들어보았다.
광릉 숲 속, 국립수목원內 식물표본관 2층에 있는 李씨의 연구실을 찾은 것은 지난 11월 하순 주말 오후였다.
李씨는 14년 전 서울大 산림자원학과 81학번 동기동창인 서민환(42·국립환경연구원 연구관)씨와 결혼한 일명 「숲박사」 부부다. 두 사람의 일은 얼핏 같아 보이지만 전혀 다른 영역이다.
光陵-世祖의 선견지명과 후세의 합작품
전공이 식물분류학인 아내가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를 하나하나 관찰한다면, 산림생태학을 전공한 남편은 숲의 전체적인 시스템을 연구한다. 최근 나온 「우리가 알아야 할 우리 풀 백과사전」을 비롯해 「한국의 천연기념물」, 「숲으로 가는 길」 등 네댓 권의 共著(공저)를 낼 수 있었던 건 이 때문이다.
─광릉에 올 때마다 당혹스러운 느낌을 갖는데, 거대 도시 서울의 바로 등 뒤에 이런 울창한 숲이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서울의 지척에, 深山幽谷(심산유곡)도 아닌 얕은 산에 이런 호사스런 숲이 존재하게 된 내력은, 아무래도 건너편에 잠들어 있는 世祖(세조) 대왕의 큰 욕심 때문이겠지요.
『큰 욕심, 맞아요. 格外(격외)의 욕심을 부린 거예요. 광릉은 세조와 그의 妃(비) 貞熹王后(정희왕후) 능의 명칭인데 陵林(능림)을 포함한 이 일대 숲 전체를 일컫는 말이기도 합니다.
세조는 곳곳에 나무와 관련된 일화를 남기고 있는 것을 보면 나무를 무척 사랑했고, 그 이상으로 나무에 대해 박식했던 분이었던 것 같아요. 오대산의 전나무, 속리산의 정2품송 등 나무와 관련된 이야기가 곳곳에 남아 있거든요. 세조는 風水에도 밝았다고 해요. 생전에 이곳을 명당으로 꼽고 자신의 능지로 지정했는데 500년이 지난 지금 돌아보면 先見之明이 있었다고 봅니다』
─陵林으로 지정되었다고 해서 다 울창한 숲으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니지요.
『물론입니다. 광릉이 지금 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게 된 것은 세조의 선견지명과 후세의 노력이 보태진 결과입니다. 15세기에 陵林으로 지정된 이후 조선조 말기 산림 收奪(수탈)이 대대적으로 행해질 때 그 재난을 피할 수 있었고, 일제 때는 1913년 총독부가 이곳을 苗圃場(묘포장)으로 지정해 시험림으로 활용하면서 역시 황폐화되는 것을 막았습니다. 6·25 전쟁 때도 불타거나 초토작전으로 말살되는 비운에서 비껴 났어요.
후세의 노력이라는 것은 지난 몇십 년 동안 일부 황폐화된 부분에 대한 복원노력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 500년 전의 古木들과 새로운 나무들이 어울려 오늘의 광릉 숲을 만들고 있다는 뜻입니다』
極上林
─天災地變(천재지변)이나 인간의 濫伐(남벌) 등 외부로부터의 충격이 없으면 숲은 오랜 세월 같은 모습을 유지합니까.
『숲은 끊임없이 변해 가는 살아 있는 생명체입니다. 생명의 본질은 변화입니다. 숲은 먼저 草本類(초본류)나 灌木(관목)에서 시작하여 다음에는 소나무와 같은 陽樹(양수)가 들어가고, 그 다음에는 소나무의 바늘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에도 잘 자라는, 즉 음지에서도 잘 견디는 陰樹(음수)가 양수의 아래쪽에 들어섭니다.
음수가 양수보다 커지면 양수는 점차 사라지고 숲 전체는 수분과 광선의 조건이 변화하면서 점차 안정된 숲, 極上林(극상림)으로 변화해 갑니다.
이런 과정을 숲의 遷移(천이)라 해요. 우리나라 숲의 경우, 극상림을 이루는 나무를 서어나무류로 보는데 광릉 숲에는 주봉인 「소리봉」을 중심으로 바로 이 서어나무 群落(군락)이 있습니다. 이 군락은 서울을 중심으로 한 중부지방에서는 유일한 것입니다』
李씨에 따르면 광릉 숲은 극상림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극상림에 가장 가까운 숲이다. 李씨는 극상림을 다른 말로 「안정된 숲」이라고 했다.
─안정된 숲이란 어떤 상태의 숲을 말합니까.
『안정되어 편안한 숲에는 갖가지 식물은 물론이고 곤충과 새를 포함한 모든 숲의 생명체들이 조화롭게 살아갑니다. 광릉 숲을 예로 들면 이곳에 사는 식물의 종류만 900여 종에 달해요. 우리나라 전체의 식물이 4000여 종인데 그중 남쪽에서만 사는 暖帶(난대)식물을 제외하면 참으로 다양한 식물이 살고 있는 편입니다.
종류만으로는 설악산이나 지리산 같은 대형 산악에 미치지 못하지만 밀도로 보아서는 단연 으뜸인 셈이지요. 먹이 피라미드의 가장 아랫부분을 차지하는 식물이 이토록 다양하고 풍부하니 여기서 이어지는 모든 생물상이 풍부하여 광릉 숲은 이름 그대로 생물 다양성의 寶庫(보고)입니다』
『當代에도 좋은 숲을 만들 수 있다』
─광릉과 같은 숲을 가지려면 얼마나 많은 세월이 필요합니까.
『광릉 숲은 세조의 陵林 지정 때부터 잡아도 500년은 넘었어요. 그러나 광릉 숲이 온전히 500년 연륜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에요. 광릉 숲의 白眉(백미)인 소리봉과 길 건너편 죽엽산을 중심으로는 오래된 천연림이 펼쳐진 반면 소리봉의 북쪽, 즉 국립수목원이 자리 잡은 지역을 둘러싼 지역은 사람들이 가꾼 인공림이 중심을 이루고 있어요. 이 인공림은 우리 나라 임업의 역사를 말해 주는 산 증거이기도 한데,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중요한 樹種은 모두 이곳에서 자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척박한 곳에 잘 심어 한때는 덕을 보았으나 지금은 구박을 받기 시작하는 리기다소나무나 방크스소나무도 이곳에서는 나이가 들고 굵어져 훌륭한 숲을 이루고 있거든요. 한마디로 광릉 숲은 20세기 초반부터 지금까지 여러 종류의 나무들을 들여와 植栽(식재)하고 실험한 장소이기 때문에 전국 산림자원의 産室이자 標本이고 산 역사인 셈이지요.
예를 들면 광릉 숲에 있는 계수나무는 전국에 퍼져 있는 계수나무의 「부모 나무」입니다. 불과 몇십 년 전부터 심기 시작한 나무들도 이렇게 훌륭한 숲을 이루고 있다는 산 증거를 여기서 볼 수 있어요. 즉 마음만 먹으면 우리는 當代에 나무를 심어 숲을 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나무를 비롯한 식물을 사랑하고 싶어도 그 이름이 외우기 어렵고 식별하기 어려워 친해지지 않습니다. 도대체 나무와 식물의 이름은 누가 어떻게 짓는 겁니까.
『식물은 두 종류의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學名(학명)이고 하나는 國名(국명)인데, 학명은 세계 공통적인 것으로 새로운 품종이 발견되면 복잡하고 엄밀한 과정을 거쳐 命名(명명)됩니다. 반면에 국명은 각 나라에서 관습과 편의에 따라 지어서 부르는 이름으로 싸리나무, 민들레 등 우리 귀에 익은 이름들이 그것입니다.
문제는 한 식물에 여러 이름이 붙어 있어 혼동하기 쉽다는 점인데, 이런 혼동을 없애기 위하여 국내 식물분류학자들과 함께 표준식물명을 확정하고 이를 DB(Data Base)化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은 곧 마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식물명 표준화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보편적으로 부르는 이름, 알기 쉽고 부르기 쉬운 이름을 우선으로 하고 있어요. 식물 이름 중에는 개똥쥐바퀴라든지, 개불알꽃 등 천한 이름들이 많은데 예부터 귀한 자식에게 「개똥이」라는 천한 이름을 붙여 長壽(장수)를 기원했던 심리가 작용했던 것 같고, 일부 해학적인 작명도 없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예부터 부르던 이름을 인위적으로 변경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어떤 평론가가 한국의 작가들이 걸핏하면 「이름 없는 꽃이 피었다」고 묘사하는 것을 무식하다고 신랄하게 비판한 일이 있은 뒤로 문학작품 속에서 「이름 없는 풀」이니 「이름 없는 꽃」이니 하는 표현은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실제로 「이름 없는 들풀」이 있기는 합니까.
『어딘가에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을 발견하는 것은 大사건입니다. 이름을 안다는 것은 관계의 출발입니다. 같은 이름으로 다른 식물을 떠올리는 것도 곤란한 일이지만, 식물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정작 이름을 모르거나 반대로 이름은 알면서도 이름의 대상인 식물에 대해서 모르는 것도 답답한 일이지요.
나무와 사람의 「관계」를 가깝게 하기 위해서 산림청이나 국립수목원 같은 기관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글쓰는 분들의 역할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문학 작품 속에 등장한 나무와 꽃, 들풀의 이름이 평생 머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거든요. 그래서 시인 金后蘭(김후란)씨가 하는 「문학의 집」 행사에 산림청이 공식·非공식으로 많은 지원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대부분 사람들이 진달래와 철쭉을 구분하지 못하는데 詩 「진달래꽃」을 쓴 시인 金素月은 진달래와 철쭉의 특징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만약 素月이 산철쭉을 보고 진달래로 착각했다면 그런 詩가 나오지 못했을 텐데, 건조한 산길에 떨어져 쌓이는 진달래의 모습을 정확하게 포착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식물이 인간에 주는 것에 비하면 인간은 식물을 너무 모른다
─나무와의 「관계」를 좀더 진전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람들은 나무나 꽃을 보면 아름답다, 신선하다 등 자연이 주는 감동을 받습니다. 숲에 들어오면 공기가 맑다, 멋지다 하고 느낍니다. 그 다음엔, 말이 끊어져요. 더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이지요. 「저 전나무는 오대산의 전나무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성탄절 장식용으로 쓰이는 호랑가시나무는 왜 변산반도 이남의 따뜻한 곳에서만 자랄까」 이런 식의 의문을 가지고 구체적인 대상을 보면서 파고 들어가야 합니다.
이름을 안다는 것이 「관계」의 시작인 것은 맞지만 그것만으로 사랑과 교감에 이르지는 못하거든요. 물론 이름만 가지고도 식물의 특성을 대충 짐작할 수 있는 것이 많아요.
생강나무는 생강 냄새가 나고, 소태나무는 맛이 쓰고, 오리나무는 옛날 사람들이 이정표로 삼았던 것이 분명하고, 오갈피나무는 잎이 다섯 갈래이고, 눈잣나무나 눈향나무는 누워서 자라고, 버즘나무는 줄기에 버즘이 핀 듯한 얼룩이 있고, 매발톱나무에는 매의 발톱 같은 날카로운 가시가 있고….
그러나 나무를 비롯한 식물이 인간에게 끼치는 고마운 노력에 비하면 우리 인간이 식물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너무나 빈약합니다. 숲을 파헤치고 불태우고, 황폐화시키는 일들이 모두 이런 무지에서 비롯되거든요』
─반대로 도시 생활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숲을 동경하고 가꾸려는 노력도 왕성하게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그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자연에 대한 막연한 동경일 뿐이지요. 보통 사람들의 나무에 대한 상식이 얼마나 피상적이고 막연한 것인지 단적인 예로 우리가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하는 소나무와 은행나무를 예로 들어보지요.
우선 소나무와 잣나무의 잎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아요. 그리고 은행나무의 꽃만 보여 주면 이 꽃이 무슨 꽃인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은행나무는 風媒花(풍매화)라서 꽃이 화려하지는 않지만 암수가 모두 꽃을 피웁니다.
우리나라 山野의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소나무 잎과 잣나무 잎을 구분하지 못하고, 서울 길거리를 몇 걸음만 걸어도 만나는 은행나무의 꽃을 보고도 모르며 살아갈 정도로 사람들은 나무에 대해 무심합니다』
이야기가 마침 여기에 이르렀으므로 소나무에 대해 집중적으로 물어보기로 했다. 욕심 같아서는 중요한 나무를 모두 거론하여 특성을 들어보고 싶었으나 여건상 「한국의 대표 나무」로 소나무를 선택키로 한 것이다.
소나무, 「솔」·「赤松」·「女松」·「陸松」
─소나무를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나무로 꼽는 데는 무리가 없겠지요.
『대표적인 나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에요. 우리말로는 「솔」이라고도 하는데 漢字(한자) 이름으로는 줄기가 붉다고 「赤松(적송)」, 여인의 자태처럼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고 해서 「女松(여송)」, 육지에 자라기 때문에 「陸松(육송)」이라고 하는 등 여러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소나무가 한반도에서 자라기 시작한 연대를 학자들은 6000년 전으로 보는데 3000년 전부터는 한반도 전역에 널리 퍼져 많이 자라고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 선조들의 역사와 궤를 같이해 온 셈입니다. 소나무의 종류는 全세계에 100여 종이 있으나 우리나라에서 보는 소나무는 중국에도 없고 오직 우리나라와 일본에만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남쪽으로 제주도에서, 동쪽으로 울릉도, 북쪽으로 백두산까지 우리 국토의 全지역에 분포하고 있으나, 일본에는 4개의 큰 섬 중 남쪽 규슈에서는 自生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소나무는 명백하게 한국의 대표 樹種인데 우리가 현대적 의미의 식물학에 눈뜨기 전에 일본인들이 나무의 이름을 세계에 먼저 소개했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재패니즈 레드 파인(Japanese red pine)」으로 통용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한국 소나무가 굽게 된 사연
─그런 일이 어디 소나무에 국한된 일이겠습니까. 일본에는 곧은 소나무가 많고 우리나라에는 굽은 소나무가 많다고 하는데 종류가 다른 것 아닐까요.
『종류는 같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일본인은 좋은 나무는 남겨 두고 굽어서 쓸모 없는 나무는 먼저 베어 쓰는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곧고 좋은 나무는 베어 쓰고 쓸모 없는 굽은 나무만 남겨 둔 결과 우리 山野의 소나무들이 굽은 모양만 남게 되었다고 하는데 불행하게도 이 말이 사실입니다.
본디부터 우리나라 소나무의 형질이 나쁜 것은 아니었는데, 곧은 것은 먼저 베어 써 버리고 굽은 것만 남겨 두었는데다 이마저도 다른 나무들이 살지 못하는 척박한 산성 토양에서 살아남다 보니 굽어서 쓸모없는 나무처럼 돼 버린 것입니다. 한때 「소나무는 굽어서 쓸모가 없다」 하여 배척당하게 된 것도 소나무로서는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소나무가 우리나라 山野의 대표적인 수종이 된 내력은 뭡니까.
『예부터 국가가 정책적으로 소나무를 보존한 것도 한 원인이었습니다. 궁궐이나 지방 관아를 짓는 데 主재목으로 사용하기 위해서였어요. 최근의 景福宮(경복궁) 복원공사의 主재료도 소나무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소나무 숲에서 시작하여 소나무 숲으로 돌아간다」고 할 정도로 삶 자체가 소나무와 밀착해 있었습니다.
서민들은 소나무로 만든 집에서 소나무로 만든 家具를 놓고, 소나무로 된 기구를 쓰며 살다가, 죽어서는 소나무 관에 들어가 소나무 숲에 묻힙니다.
20~30년 전까지만 해도 농촌에서는 산에 가서 소나무 밑에 쌓여 있는 갈비(낙엽으로 떨어진 솔잎)를 갈퀴로 긁어다가 땔감으로 사용했어요.
그러니 소나무 밑에 유기물이 축적 안 되어 숲에 다양한 식물이 자랄 수 없었고, 소나무 혼자 살 수밖에요.
우리나라 山野의 토양이 좋지 않다는 것도 원인의 하나로 꼽을 수 있습니다. 소나무 밑에 기껏 진달래 정도나 자라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둘 다 척박한 토양에서 자라는 식물이거든요』
─우리나라 소나무라고 해서 굽고 쓸모 없는 나무들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 소나무의 자존심을 살려 주는 나무들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강송 또는 금강송이나 春陽木(춘양목) 등이 그런 나무들입니다.
금강송은 금강산을 중심으로 해서 강원도 일대에 자라는 곧게 뻗은 소나무들을 말하는데 강송이라고도 합니다.
춘양목은 엄격하게 말하면 금강송에 포함되는데, 삼척·울진·봉화 등지에서 나는 강송들을 일단 경북 봉화군 춘양驛(역)에 모아서 기차로 실어나른 데서 이 이름이 붙었어요. 춘양목은 나무의 결이 곱고 부드러우며 켜고 나서도 굽거나 트지 않고, 속이 붉은빛이 돌고, 다듬고 나면 윤기가 흐르는 등 워낙 품질이 뛰어나 최고의 재목으로 쳤습니다』
식물은 자식을 멀리 보내려고 애쓴다
─식물도 性(성)이 분화돼 있고, 이를 통하여 번식을 하는 것은 자연계의 공통된 법칙입니다만, 이동하는 능력을 지닌 동물과는 달리 움직이지 못하는 식물로서는 분명 다른 장치를 가지고 있겠지요.
『꽃의 존재 이유는 효율적으로 씨앗을 만들기 위함입니다. 식물은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에 적극적인 求愛를 할 수 없어 바람이나 곤충의 매개를 통해서만 구애가 가능합니다. 바람을 매개로 하는 風媒花(풍매화)는 꽃가루를 바람에 날려보내어 우연히 결실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으므로 가능하면 많은 꽃가루를 날려 보내려고 애를 씁니다.
특별히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을 만들 필요는 없지요. 반대로 蟲媒花(충매화)는 벌이나 나비를 끌어들이기 위해 저마다 곤충의 접근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모양, 곤충의 후각을 자극하는 향기, 곤충의 양식을 제공하는 꿀 등 다양한 장치들을 마련해 놓고 기다립니다. 곤충의 꿀을 빠는 구조와 꽃의 구조가 서로 맞춰 발달해 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風媒花, 蟲媒花로 兩分하지만 식물마다 전략은 모두 달라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어요. 결국 효율의 문제지요. 예를 들어 사람은 아이를 품 안에서 기르지만 식물은 씨앗을 가능한 한 멀리 보내려고 애를 씁니다.
「부모 나무」 밑에 「자식 나무」의 씨앗이 떨어져 발아하면 두 나무는 경쟁관계가 되고 「자식 나무」는 「부모 나무」의 그늘에 가려 햇빛을 보지 못하고 영양분을 흡수하지 못하므로 결국은 잘 자라지 못합니다. 이건 「부모 나무」의 원하는 바가 아니지요. 그래서 웬만하면 씨앗을 멀리 보내려고 온갖 장치들을 마련해 두고 있어요』
─나무에도 감각이 있습니까.
『五感(오감)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설혹 감각이 있다고 해도 사람이 생각하는 형태의 감각은 아닐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자극이 주어지면 「아프다」거나 「간지럽다」거나 하는 식의 동물적인 감각과는 다르겠지만 식물 나름의 반응 방식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농부가 아침 일찍 들판에 나가 벼나 보리와 대화를 하고 사랑을 표시하면 그 벼와 보리가 잘 자란다는 얘기도 있고, 비닐 하우스에 모차르트의 음악을 틀어 주면 토마토나 오이의 성장이 좋고 맛도 좋아진다는 이야기들은 아직도 학문적 연구 대상이 되고 있는 문제들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덩굴식물이 감고 올라갈 대상을 찾아가는 것을 보면 분명 식물 나름의 감각이 있다고 봐야지요.
바람에 흔들리다가 대상과 닿으면 호르몬의 일종인 오옥신 같은 물질을 배출하면서 가던 방향을 순간적으로 바꾸어 대상을 휘감는 것을 보면 제법 발달된 감각을 지니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다만 인간이 지닌 감각과 감정을 지닌 생물체로 擬人化(의인화)하는 것은 인간들의 편의적인 생각일 뿐이고, 나무에 氣(기)가 있다거나 靈性(영성)이 있다 하여 신비화하는 일도 유한한 인간의 상상력일 뿐이라고 봅니다. 종교적인 문제로 접어들면 이미 학문의 세계가 아니므로 누구나 상상력을 발휘하여 이런저런 말들을 할 수 있겠지요』
朱木의 수명은 1000년
─집 둘레에 자라는 과실나무들도 그렇고, 숲을 이루고 있는 잣나무·밤나무들도 해거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해거리는 나무가 다른 동식물의 생태를 조절하기 위한 것입니까.
『참나무는 다람쥐의 먹이인 도토리를 제공합니다. 그렇다면 수요자인 다람쥐가 참나무의 크기와 도토리의 생산을 조절하느냐, 참나무가 다람쥐 집단의 크기를 결정하느냐 하는 의문이 제기되어 왔는데, 얼른 보기에는 다람쥐가 참나무에 영향을 끼칠 것 같은데 사실은 참나무가 다람쥐 집단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나무는 열매를 맺기 위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합니다. 그 때문에 해거리는 우선 休息(휴식)과 備蓄(비축)의 필요에 의해 일어나는 현상으로, 결과적으로 다람쥐 집단의 규모를 조절하는 역할을 하고 있어요. 참나무가 해거리로 도토리의 생산량을 줄이면 그 때문에 다람쥐 수가 줄어듭니다. 이듬해 많은 도토리를 생산하면 다람쥐가 먹고도 남기 때문에 참나무는 종족 번식의 기회를 얻게 되는 거지요. 자연이 만들어 놓은 이 시스템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어요.
자연이 참나무라면 인간은 다람쥐인 셈이지요. 과학문명을 믿고 자연이라는 이름의 참나무를 제거할 경우, 도토리를 잃은 다람쥐 꼴이 될 것이라는 경고는 무수하게 나오고 있습니다』
─나무는 마음 먹은 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부자유스런 면은 있으나, 어떤 동물도 따르지 못할 정도로 장수하는 것들도 많은데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朱木(주목)은 1000년을 견딥니다. 마을 입구의 느티나무들을 비롯하여 몇백 년 된 나무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나무들 중에도 몇십 년밖에 못 사는 것들도 많고, 짧게는 한 계절만 살다가 가는 短命(단명)의 나무들도 많이 있습니다. 같은 나무에서 떨어진 씨앗도 외형적으로는 모두 비슷해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인간의 개성이 저마다 다른 것처럼 개체마다 모두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고, 운명 또한 달라요.
같은 나무에서 떨어진 씨앗도 환경에 따라 어떤 씨앗은 당장 싹을 틔우지만, 어떤 씨앗은 썩어 버리고, 또 어떤 씨앗은 땅 속 깊이 묻혔다가 100년 뒤에 싹을 틔우기도 합니다. 숲의 遷移를 말씀드렸습니다만, 옛날에 소나무 숲이던 것이 오늘날 참나무 숲으로 바뀐 것이 많아요. 나무 개체의 수명도 수명이지만 숲 차원의 순환 사이클이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소요되는 시간도 몇십 년에서 몇백 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지요』
─생물들 중에서, 특히 나무의 일생을 보면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일생」인지 아리송할 때가 많아요.
『인간의 경우 어머니 뱃속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가기까지를 일생이라 하듯이 나무의 경우도 씨앗에서 發芽(발아)하여 시들어 버리는 순간까지를 나무의 일생으로 보아야지요』
한국의 自然林을 부러워하는 유럽인들
─우리나라는 광복 이후 계획적인 造林 덕분에 어느 정도 푸른 산을 가지게 되었는데, 산림의 가치나 수준에서 유럽 등 선진국에 비해 부족하다는 반성도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대표적인 산림은 아마존의 열대雨林이 아니고 독일의 黑林(흑림)입니다. 유럽의 대표적인 숲이지요. 그런데 독일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감탄을 합니다. 유럽의 산림은 대개 人工林이지만 우리나라의 산림은 自然林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黑林은 어느 곳을 가더라도 다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한국의 山野는 사람의 얼굴처럼 모두 다른 모습을 하고 있고, 그 내용 또한 울긋불긋 자연의 다양성과 조화의 아름다움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물론 그 숲 속에 있는 나무의 효용과 경제적 가치를 놓고 볼 때는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요. 유럽 선진국들이 우리가 부러워하는 산림을 가지게 된 것은, 저들 또한 옛적에 숲을 베어 버리고 산이 황폐해지자 홍수 등 절박한 위기를 느낀 나머지 서둘러 조림을 한 탓입니다. 우리보다 일찍 산업화가 시작되었고, 위기 또한 일찍 느꼈기 때문에 조림도 앞섰던 것뿐입니다. 우리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해야 할 때입니다』
李惟美 박사의 나무에 대한 연구 영역은 아주 기초적인 분야이다. 그의 연구실이 광릉의 국립수목원 산림생물표본관에 속해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나무 또는 식물에 대한 연구의 영역은 기초적인 분류학에서 시작하여 실용적인 산림자원학 분야, 그리고 첨단의 생화학에 이르기까지 무한하게 펼쳐져 있다. 그 모든 학문을 가능케 하는 기초가 바로 식물분류학이다. 李씨는 나무에 관한 학문의 주춧돌을 놓고 있는 셈이다. 그가 놓은 주춧돌의 크기와 深度(심도)에 따라 장차 나무에 관한 우리나라 학문 건축의 규모와 질적인 수준이 정해질지도 모른다.●
◈ 李惟美 박사 1962년 서울 출생. 서울大 산림자원학과, 同대학원 산림자원학과 졸업. 식물분류학으로 박사학위. 現 국립수목원 식물보존과 임업연구사, 문화재전문위원. 저서 「이유미의 우리 꽃 사랑 - 한국의 야생화」,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나무 백 가지」, 「한국의 천연기념물」, 「희귀 및 멸종위기 식물」, 「우린 숲으로 간다」 등. | |
첫댓글 필독이라 하여 눈 부릅뜨고 읽었습니다. 전 이런 글을 읽으면 그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 삶이 더 부럽습니다. 어찌 하면 저렇게 살아 올 수 있었을까. 뜻을 세우고 그 뜻에서 벗어나지 않은...........사실 옆에서 용기를 북돋아준 이는 더욱 부럽구요. ^^
6월 마지막 휴일 오후, 창밖에는 몇날며칠 찌푸리고 있던 하늘에서 시원스레 빗줄기가 쏟아 집니다.비를 기다리던 산야의 식물들이 이 비를 맞아 하늘거리며 춤을 추고 있을거 같네요. 긴 글 기쁘게 읽었습니다. 몇년전 우연한 기회에 만났던 이유미 박사님은 숲을 닮은, 조용하고 참 아름다운 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