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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면 마치 제가 북에서 남으로 내려온 피난민 같지만 그 건 아닙니다.
60 여년 전 고향마을을 그리워하며.. 타향살이를 한 사람이기에 그리워서 한 말입니다.
비록 저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등지고 객지살이를 하기에 수구초심이란 말이 있듯이..
어린시절 뛰놀던 고향땅이 눈에 선하고..시간나면 달려가고픈 심정은 모두가 같을 것입니다.
오늘은 그 고향마을을 그림대신 글씨로 그려보지요.
내 고향은 순천김씨 집성촌으로 대략80 여호 500 여명이 촌락을 이루고 560 여년을 살아온 마을..
입향조님 당시엔 인구나 가구수가 얼마며,,또 농사는 어떻게 지으며 살았는지 궁금하나..
기록으로 남은 건 하나도 없기에 짐작만 한거지요.
입향조께서 마을을 이루고 사신지가 어느때인지는 간접기록으로 짐작해서 560년 전이란 걸 알았습니다.
즉 계유정난(1453년) 4년 후 2차 단종복위운동(1457년)이 일어났는데(1차는 사육신들이 연유된 사건:1456년))...
당시 금성대군의 유배지 순흥(경상도)도호부사(이보흠)가 연유되어..많은 사람들이 수양대군으로부터 죽임을 당했습니다.
바로 그 사건 직 후 담양도호부사인 우리 효우할아버님도 신변의 위협을 직접적으로 느끼시어..
요즘 말로 사표를 내고 형제가 남쪽으로 피신 하신 것입니다.(2018년-1457년=561년)
형은 해남 계곡면 방축리로...동생은 산이면 구성리로...거리가 먼 것 같지만..
계곡면 방축리와 산이면 구성리는 눈으로 뻔히 서로 볼 수 있습니다. 영암호 바다 건너서 북창 꼭대기가 방축리...
어쩔땐 영암호 북창까지 여객선이 다닌적도 있었지요.구성리서 보면 여객선이 가는게 보였습니다.
두 분은 의(意) 좋은 형제였다고 순김대동보(족보)에도 나옵니다.
그러하기에 아마도 형제는 바다건너 저 편에 있는 아우를...형을...매일 서로 그리워하며...
이런 내력이 있는 고향 땅..
60년 전엔 앞서 말한 80여호, 500 여명이 사는 마을.. 기와집은 단 한채도 없고 모두가 초가집 뿐...
그러나 대문 달리고 아래채까지 있는 번듯한 집이 10여호도 넘었습니다.
농사를 많이 지은 사람들은 일꾼(머슴)을 둘이나 둔집도 너댓집은 되었고..
주로 논농사로 벼를 경작하고... 밭농사는 보리와 조 콩 고구마 유채등...
남쪽 지방 여타 마을과 같았지요.땅은 비교적 넓은 마을이었기에 가구 당 농사는 많은 편..
논(畓)은 많으면 30마지기(6000평)..적어도 열 마지기(2000평)정도는 지었습니다.
마지기 당(200평) 벼는 양섬(벼4가마)을 먹으면 농사 잘 지었다고 했습니다. 쌀로는 두가마...(160킬로그램)
밭(田)은 가구당 면적이 더욱 많아 20마지기가 보통...(한마지기100평.충청도는200평)
따라서 여자들은 밭농사 짓기에 다 늙어버리고... 특히 여름철 김매기에 고생을 많이 하셨지요.
밭작물 지어봐야 돈도 별로 안되고..고추 마늘 콩 참깨 유채가 그래도 효자 노릇을..
그 돈으로 학비도 내고 가용도 쓰고..하지만 목돈은 역시 벼와 보리를 팔아서 쓰고...
아들 딸 시집 장가 보내고...중,고,대학 학비는 주로 벼와 보리를 목포에 내다 팔아서 돈을 썻습니다.
그러다보니 잠시 가을철 쌀밥 좀 먹다가 일년 내내 보리밥 신세..조밥신세...보리와 조가 주식...
환금작물이나 특용작물재배를 많이해야 생활이 나아지는데 구성리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논밭은 그렇고..임야(산과들)는? 산에 있는거라고는 소나무 뿐..해송...임야 용도는 오직 땔감 조달하는 곳..
그리고 사람 사망시 묘지 조성에 쓰일 뿐..그 많고 넓은 산과 들이 무용지물로 내팽겨쳐 있었습니다.
이용하는 방법 자체를 생각치 않았지요.그래서 굶은 자도 없었지만 부자도 없는 마을....
그럼 바다는? 고향마을은 삼면이 바다고..갯펄이 많고 질이 좋아 천혜의 자산이었지만 그 걸 이용한다는 건 별로...
왜? 양반 행세하느라고..본래 양반들은 바다일을 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아다시피 조선사회에서 상민은 무당,백정(푸주간),사공(배),그릇만든사람들 등...
갯것은 상민들이 하는 일로 치부하고 남자들은 아예 바다에 가지 않고...
부녀자들이 그나마 갯펄에 가서 기제사나 명절용으로 석화를 깨오고 낙지를 잡아올 정도...
그 결과 넓은 구성리 갯펄은 바다 건너 영암사람들 차지거나.. 산이면 사람들 좋은 일 시키고....
낙지 감태는 많이 생산 된 곳임에도 구성리 사람들은 먹지도 못하고, 타 부락 사람들 차지...
그들은 먹기도 하고 목포에 내다 팔아 용돈을 만들었고.. 구성리 사람들은 구경꾼들...
제가 중학교때인가.. 완도 사람들 몇 가구가 구성리로 이주하여 시리섬 부근 바다에 김양식을 했지만..
마을 사람들은 한동안 김양식 기술을 몰라 구경만 하다가 나중에야 기술을 배워 김양식을 했습니다.
이런 걸 보면 바다를 이용한다는 것은 꿈도 못꾸었지요.
당시엔 양모씨 가족을 서당집과 토지를 주어서 마을 종으로 부려먹으며 양반행세만 했으니 말입니다.
수박 참외 같은 특용작물은 몇 집이 노지에서 재배했으나 그것도 별로 시원찮고...돈 대신 보리와 물물교환..
특별히 먹을 만한 것을 심지도 않아서 아이들은 군것질도 못하고 그저 보리개떡이나 해 먹는 정도..
그 흔한 과수나무도 집안에 별로 없어 감나무 배나무 있는 집은 불과 몇 집 뿐...
정말이지 아이들께는 먹을 게 없는...매력 없는 빈촌 마을 구성리..엿장수 가위소리가 들리면 헌병 헌고무신짝이 최고..
가용이나 목돈마련은 가축이 최고지만..
소 돼지는 집집마다 한 두마리 정도고.... 닭은 2~30마리도 기르지만..
그 걸로 큰 일 치루고 때에 따라서는 팔아서 요긴하게 사용도 하고..큰 돈은 어림 없지만..
얼마전에 고향 가보니 소를 수 십마리 동네에서 기르던데 매우 잘 한 일..냄새야 좀 나겠지만 고생 않고 돈 벌겠습니까?
그럼 60년 전 당시에 마을 사람들 문화생활은 어떻했을까요?
5~60년대 우리나라 시골은 대개 비슷하겠지만 문화생활이란 말도 부끄러울 정도로 열악한 환경...
어쩌다 이동식 극장이 해남읍에서 산이서교 운동장에 간이포장을 치고 영화를 상영하는 정도..
처음엔 연사가 열나게 울리고 웃기다가 나주엔 연사가 없어졌지만...
동네 처녀 총각들은 야밤이라 단체로 이동하는데..영화값이 없어서 영화보로 못가는 사람도...
짓궂은 꼬마들은 몰래 포장 믿으로 기어들어가다 기도(문지기)한테 잡혀서 혼나기도 하고...
때로는 맘씨 좋은 기도는 영화가 절반 정도했다 하면 극장안에 못들어고 밖에서 기다리던 불쌍한 사람들 다 들어보내고..
기도가 선심을 배풀기도 했는데 아마도 그 기도님은 천당에 가셨을 것입니다.
동네에서 신문 보는 식자는 고작 다섯 손가락 안에 들고..
붓글씨 연습용 종이로 신문지가 필요해서 몇 장 달라고 얻으러 가면...신문지 용도가 너무도 소중해..
겨우 서너장 얻으면 성공한 셈..화장지로 인기고.. 벽지로도 인기고.. 물건을 신문지로 싸가지고 들고 다니면...
식자집안으로 여기고 사람들이 홀겨보던 시대였습니다.
라디오는 동네 전체 열대도 안되어 라디오 있는 집은 오가는사람.. 이웃 사람... 들으라고 일부러 크게 틀어놓았지요.
일종의 선심을 써 준 셈...우리집엔 라디오가 있다 없다 했기에 없을 땐 옆집 당숙댁이나 종형님댁에 가서...
뉴스에 관심 깊은 본(本) 식자(?)는..필히 하루에 정오 뉴스는 들으러 방문하곤 했습니다.
정오 뉴스만 들으면 세상사를 전부 짐작할 수 있는 영감이 나에게 있었음은 확실했나봅니다.
자전거는 요즘 자동차보다 더 인기 있는 품목.. 하기야 요즘도 자전거가 이륜차에 끼지만.....
당시엔 자전거 있는 집이 서너 집 뿐.. 탈지도 모르지만 빌려달라해도 고장 났다고 안빌려 주지요.
고장나면 자기만 손해란 걸 잘 알기에..면사무소 출퇴근 하는 당숙님이 자건거로 이십리길을 출퇴근...
학교 오다가다 공교롭게 만나면 올라가는 길에서 밀어드리면 내려가는 길은 좀 태워주는게 인지상정 일텐데..
입 싹 닦고 패달을 더 빨리 밟아버리니 닭 쫓던 개 지붕 처다보는 꼴...당숙이 야속했고..좀 태워주면 어디가 덧납니까?
해시계 물시계 모래시계시대가 아님에도..동네에 벽시계 있는 집은 고작 한 자리 숫자..
시간 맞춰 목포 배타러 간 사람들은 간혹 가던 길초에 우리집이 있기에 시간 물어보러 일부로 집에 들어 오십니다.
우리집 시계로 말하자면 번등 모씨가 고물 취급도 했던 사람인데 아버지와 내가 그 집에 직접 가서...
그 중고품 벽시계를 감정한 후 사온 시계지요.
시계는 우리집에서 10년 이상 자기 수명을 다 하고 고물로 처리되었고...태엽감을땐 4자에 있는 구멍은 키를 우로 돌리고..
8자에 있는 구멍은 키를 좌로 돌려야 태엽이 빡빡하게 감기는데 너무 지나치면 태엽이 끊어지니 조심해야 합니다.
병의원은 죽기 직전에 가는 곳으로 알았기에 생에 한반도 못가보고 저 세상으로 가신분들이 많습니다.
번등이나 면사무소에 한약 사러 몇 번 가 보았는데 약방이 없어 허탕치곤 했구요.
아픈곳 치료는 마을 상주 당골래(무당) 몫이고...저희 모친도 내가 좀 아프면(어려서 잔병치레 많이 함)...
꼭 그 무당을 불러 푸닥거리를 하고 마당에 식칼 꼽고 바가지 씌워놓고 상황 종결...
그 덕에 병은 곧바로 나았지만...어린 맘에도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곤했습니다.
그럼 생사문제는?
아이를 낳으면 아들은 외로꼰 세끼줄에 빨갛게 익은 고추를 띄엄띄엄 매달아 사립문 위에 걸쳐놓았습니다.
일종의 알림줄이자 경고줄.... 아들을 낳았으니 부정한 사람은 출입금지하시오!!
그러나 정작 산모는 일주일도 채 몸을 풀지못하고 논 밭으로 일을 나갔고...
때로는 바로 출산한 그 날 일을 하시고...... 저희 어머님도 그랬습니다.
연로하신 분들이 사망시엔 꽃상여를 필히 사용했고..장례는 보통 3일장인데 호상일땐 초상집은 잔치집 같았으며..
밤에는 마당에 모닥불 피워놓고 노래도 부르고 화토도 치고 밤새내 돼지고기 안주에 막걸리나 소주를 마시며..
때로는 술에 취해 문상객들 끼리 쌈박질도 하고..하지만 상주네 가족들의 곡소리는 빠지지않고 시간 맞춰 울려퍼졌습니다.
아이고! 아이고~우리어머니!!~~이제 가시면 언제 오시나??!!~~그 게 상주를 위로한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꽃상여 보관 장소는 구성리 사람들은 다 아실 것.. 난 그 근방엔 무서워서 얼씬도 안했고..
꽃상여를 타신 망자는 마즈막으로 들리는 곳이 있는 데 그 곳이 사장터...망자는 그 곳에서..
그동안 살며 정들었던 모든 인연을 정리하고.. 북망산천 멀고도 험난한 길을 떠났지요.
상여꾼들의 구슬픈 상여소리를 뒤로하고..손에든 종을 흔들며 매김꾼이 선창하고 상여꾼들(10여명)이 후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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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소리가 슬프면서도 현실적인데 그건 아무나 못하고 그걸 할 수 있는 구성리 인재(?)가 따로 계셨습니다.
모씨 ...또 모씨....등은 도맡아서 상여꾼들이 힘들지 않게 구경꾼들이 재미(?)있게 매김소리를 하신 기억이 납니다.
언제 준비했는지 꽤 많은 만장(輓章)들도 상여 뒤를 따르고..이건 주로 아이들이 들고 갔지요.
간짓대 꼭대기에 매달린 만장이 바람에 펄럭이는 것을 보면 한자를 몰라서 뜻은 모르지만..
아마도 인생무상을 말해주는 경구(警句)이자..극락세계를 인도하는 안내문 일것입니다.
조선시대는 시묘(侍墓)라고 해서 돌아가신 부모님 묘소 곁에 움박을 치고 거주하며..
살아생전과 꼭같이 조석으로 따뜻한 식사를 올리며..부모 죽인 죄인을 용서해달라고..
곡을 했지만..시대가 점점 바뀌어 편리한 방법으로 자기집 마당이나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작은방에 부모님 상방을 마련하고 무덤곁에서 한 것처럼 했습니다. 무려 3년 동안을.....
어린시절 제 형님댁 상방을 몰래 들여다 보면 먹음직스런 사과,배, 감, 곶감,대추 밤이 언제나 목기에 가득 있었기에..
슬쩍 한개를 먹었던 기억도 납니다. 물론 망자가 절도죄인을 용서해줘서 지금껏 아무 탈이 없지만..
요즘은 삼우제(三虞祭)를 모시면 끝...
죽은 사람은 꽃상여를 타고 갔는데..마을 모든 짐은 뭐가 운반했을까요?
육상에선 오직 지게와 우마차..지게야 집집마다 사람 수에 맞춰 있고 소달구지는 동네 전체 두개?..
해상운송은?(좀 거창하네요)...돛대 세개짜리 범선 한 척과, 두개 짜리 범선 한척..요놈들이 싣고 나르고..
그 배를 나도 학창시절 목포 오갈때 이용했던 기억이...
이렇게 간단히 문화생활 아닌 문화생활 실태를 적어보았습니다.
이 묵화(?)에 꼭 찍고 싶은 점 한 개가 있는 데...
그건.. 적어도 제가 알기로는..우리 마을에서는 소위 풍기문란 사건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
그밖에도 민사상 송사사건이나 형사사건으로 고소고발한 건 단 한 건도 없었습니다.
적어도 제가 고향에서 살았던 1969년 5월까지는....
우리마을은 모두가 아저씨요(아제), 아줌마(아짐)요,당숙이고 숙모,조카,할아부지...
따라서 자작일촌(自作一村)...말하자면 한 집안...하기야 요즘엔 집안에서도 문제가 발생하지만..
정말로 도덕적으로 완벽한 공동체였습니다. 이 얼마나 당당하고 자랑스러운 일입니까?
이건 15대조(나에게) 망미당 할아버님의 유언인지 어쩐지 모르겠지만..
요즘은 시골 마을도 머리만 잘 쓰면 몇 천만원, 몇 억을 버는 곳이 많습니다.
선생으로 퇴직한 친구집에 가보니 콩으로 매주 간장을 엄청나게 만들어 인터넷으로 팔고 있더군요.
우리 구성리는 마을 자체가 곧 소멸될것 같은 말 때문에 투자를 안해서 지금 큰 일입니다.
일이 빨리 끝나던지 아니면 그만 두던지 해야 할텐데 말만 된다된다하면서 수 십년 째...
주민들 골탕만 먹고 있으니 이 책임은 누가 지고 이 손해는 누가 변상하려는지..고향분들 생각하면 답답합니다.
60년전 그래도 살만하던 마을 구성리...
얼마전 산이면 안쪽 산이서교 관내 부락을 모두 다 돌아본 저의 소감은..
상공리,황조리,부동리,원황리,대진리 등은 상당히 발전했으나 구성리는 퇴보만 했다고 느꼈습니다.
고향이 부유한 마을이 되고 거기 사는 사람들이...여유 있고 행복한 삶을 영유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지금도 제 눈엔 60년 전 고향땅이 선하기만 합니다.
어서,어서 활기찬 마을.. 돈 잘 버는 마을... 기와집이 즐비한 마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추신:대부분 A-4 한 장으로 끝내는 데, 이 건 좀 길어서 두 장 반 쯤...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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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글을 읽는 동안 마을곳곳이 그림을 그리듯 그려져 내려갑니다. 잘 읽고 갑니다.
기가 막히게도 가난했던 구성리 ᆢ
그래도 그 때가 그립내요
그래도 숭조상문하고 인의예지하신 어른들이많이 계서서 산이면의 여타 동리들보다
훌륭한분들이 많이 배출된 순김의 자자일촌(自家一村)아닙니까?
항상 양보하고 명예나 금전보다 학문을 소중하게 여기신 처사로 사신 어른들을 많이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