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년간 묵은 짐을 싸들고 옮겨온 아들집, 넓기는 하지만 원래 아들집도 짐이 많은 편인데 우리 짐을 합치니 온 집안에 짐 투성이로 혼잡한데 호주로 가지고 갈 짐까지 세 집 살림을 한곳에 모아놓으니 어디 몸 하나 움찔할 틈도 없고 온통 짐에 놀려서 답답한 상황으로 약 2주를 보내고 2월28일 대형 컨테이너에 짐을 실어 호주로 보내고 나니 갑자기 집안이 텅 빈 듯 허전할 정도가 되고 말았다. 그렇게 닷새를 보낸 3월5일 12시경 손주는 아빠, 엄마와 함께 인천공항으로 먼저 떠나고 바로 뒤이어 사위 차를 타고 우리 내외와 딸 내외도 인천공항으로 가니 1시경이다. 우리가 조금 먼저 도착하여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아들 가족은 아들 숙소가 있는 송도에 들러서 오느라 우리보다 조금 늦게 도착하여 3층 출국장 앞에서 다시 만나 호주로 가는 케리어를 보내는데 줄을 서서 한참을 기다리며 멀리 대구에서 배웅을 나온 손주 친척 외삼촌과 외숙모, 외사촌을 만나서 이야기하며 기다리는 동안 짐을 보내고 손주 가족은 늦은 점심을 먹으러 들어가고 우리는 집으로 오는 길에 오이도에 가서 해물칼국수(1인분에 15,000원)와 파전(18,000원)을 시켜서 점심 겸 저녁을 먹고 바다를 보며 잠시 산책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오니 5시경이다. 집에 와서 사위가 도어록에 건전지를 끼워주고 돌아가고 넓은 집에는 아내와 단 둘이, 늙은이 둘만 댕그러니 남게 되니 넓은 응접실과 5개의 방, 응접실과 방에 꽉 찼던 짐도 나가도 아들네 짐도 많이 줄인데다가 우리 짐도 거의 절반으로 줄이고 보니 온 집안이 빈집인양 휑하고 넓어서 더 썰렁한 느낌이 드는 것 같다. 틈만 나면 할아버지, 할머니와 게임을 하자듣가, 어제는 몇 시에 잤으며 아침에는 몇 시에 일어났는지 묻는 귀여운 손주, 할머니에게 믹서기로 마늘 안 가느냐고 묻는 손주는 어릴 적에 믹서기 돌아가는 것을 보고 겁을 먹으며 한편 궁금하기도 하여 멀리서 할아버지나 고모의 손을 잡고 지켜보던 손주는 믹서기에 대한 트라우마가 남아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은 믹서기 안 돌려요? 마늘 안 갈아요? 하고 묻기도 하고 유쾌하게 웃고 떠들던 손주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리며 가슴이 텅 빈 것 같은 허전함이 몰려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사람이 살다보면 만남과 헤어짐은 피할 수 없는 통과의례와 같은 삶의 한 과정이겠지만 그냥 어디 며칠 간 여행을 하거나 잠시 나들이를 하는 것이 아니고 멀고 먼 이국 땅, 그것도 앞으로 평생 살기 위해서 떠나니 자주 만날 수도 없고 지금부터는 한국 사람이 아니라 호주 사람이 된다고 생각하니 아쉬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말처럼 만나면 헤어지는 것이 당연한 것이겠지만 이별이란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으며 때로는 아프게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인지상정이라 할 것이다.
손주와 지내던 8년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2014년 11월24일 평촌의 한 산부인과에서 제왕절개로 세상에 처음 빛을 본 순간에 아직 눈도 제대로 못 뜨며 여린 손을 오므린 채 입을 꼭 다물고 있는, 새까만 머리칼에 둥근 얼굴의 손주 모습을 지울 수가 없다. 그렇게 세상의 빛을 본 손주를 산후 휴가를 얻어서 6개월간 엄마가 돌보다가 다시 복직을 하면서 오전에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보고 오후에는 엄마가 보면서 어렵게 3년을 지나고 세 살이 되면서 오전에는 어린이 집에서 지내다가 다시 유치원에 가게 되고 오후에는 우리 집에서 지내며 8살이 되어 초등학교 입학을 하면서 지난 5년간 승우를 매일 보던 것이 일주에 한 번 목요일 저녁에만 보게 되니 우리도 많이 여유가 생기게 되었다. 그렇게 약 5년간 승우를 보면서 어리고 귀한 생명의 위생을 위해서 매일 같이 청소를 하고 힘들기는 하지만 손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여 보살피며 육체적으로는 힘이 들어도 정신적으로는 즐겁고 보람스러우며 우리 집안의 대를 이을 귀중한 생명이라는 생각에 크게 의무감을 가지고 손주를 보았다.
젖병을 소독하고 우유를 비롯하여 먹는 것이나 수건과 옷, 기저귀를 갈아주고 세탁하는 것은 할머니가 하고 나는 청소를 전담하였는데 매일 같이 쓸고 물걸레를 빨아 힘을 주어 꼭 짜서 닦으며 청소를 하다 보니 내 손의 지문이 사라지고 말았다. 어느 날 주민센터에서 인감증명서를 떼려고 지문 확인을 하는데 지문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매일 같이 물걸레를 빨아서 힘껏 짜다보니 그렇게 된 것 같았다. 하지만 청소는 피할 수 없는 나의 작은 의무여서 매일 같이 기쁘고 즐겁게 맡은 바를 충실히 이행하였다. 그렇게 보낸 세월이 어언 만8년. 손주가 우리 나이로 10살이 되어 3학년으로 진급을 하는 3월2일과 3일 이틀간 그동안 다니던 안양남초등학교로 등교를 하고 손주의 1학년 때 담임을 맡아서 손주를 아끼고 잘 보살펴 주었던 분이 다시 3학년 담임이 되어서 좋아했는데 하필이면 담임선생님은 몸이 편찮으셔서 출근을 하지 못하는 바람에 손주가 3월3일 마지막 등교를 하고 헤어지게 되는 날 담임선생님을 뵙지도 못하고 마지막 작별을 하였다. 아쉬운 마음으로 한국에서의 마지막 등교를 하고 손주는 엄마의 근무지가 호주로 발령이 나면서 가족이 모두 이주를 하게 되었고 아빠는 직장에서 맡은 프로젝트를 마무리하고 일 년 후에 호주로 갈 예정으로 손주와 엄마는 3월5일 먼저 출국을 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아들 가족이 모두 한국을 떠나게 되니까 집을 비워둘 수가 없어서 내가 살던 집은 전세로 주고 우리 내외가 아들집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처음 3주간을 식구도 많고 온 집안에 짐이 가득 찬데다가 갑자기 생활공간이 바뀌니 어색하고 안식구는 손에 선데다 바쁜 부엌일 하느라 정신없이 지내고 나는 틈나는 대로 청소를 하는데 구석구석 쌓인 먼지를 쓸고 닦느라고 여간 힘 드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던 작은 집도 제대로 치우며 살기가 힘들었는데 61평의 넓은 집을 관리하며 청소를 하려고 하니 시간은 배가 더 걸리고 힘은 세배가 더 드는 것 같다. 그렇게 정신없이 몇 주를 보내고 손주와 며느리가 호주로 떠난 지도 한 주가 지나가니 조금씩 생활도, 정신도 원래 자리로 돌아오는 기분이다.
하루 종일 안식구와 단 둘이서 넓은 집을 지키며 별 할 일도 없이 지내다 보니 때론 무료하고 재잘거리며 끊임없이 말을 하고 같이 놀자고 귀찮을 정도로 나대던 손주가 그리워지는 것이 사실이다.
손주가 긴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기내식을 한 상 받아서 먹는 모습과 안대를 끼고 의자에 누워서 잠을 자는 사진을 보면서 위로를 받고 다음 날 무사히 호주의 브리즈번에 도착하였다는 소식과 사진을 보니 안도의 마음과 함께 그리움이 밀려드는 것이 가족이요, 손주와 며느리를 사랑하는 할아버지의 마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참 좋은 세상이다. 만 리 밖 호주에서도 옆에 있는 것처럼 바로 카톡을 주고받을 수 있고 동영상으로 생생한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영상통화를 하면 거리감을 느낄 수가 없다. 한 번 멀리 떠나면 볼 수도 없고 쉽게 소식을 전할 수도 없던 옛날을 생각하니 세상이 불과 몇 십 년 동안에 얼마나 변화와 발전이 되었는지 새롭게 실감하는 순간이다.
집 근처의 태평양 바다
우선 미리 인터넷을 통해서 예약한 임시 숙소에서 며칠을 지내는 중에 적당한 집이 있어서 예약을 한 상황에서 손주 학교도 호주로 가기 전에 화상 인터뷰를 하고 입학 허락이 떨어져서 3월13일부터 학교에 가게 되었고 교복과 모자를 쓴 손주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의 위로를 받고 응원도 하며 기분이 좋은 날이었다. 체육복도 귀엽고 놀이터도 잘 조성이 되어서 첫 등교하는 날부터 교복을 입은 당당한 모습과 다음날 체육복을 입고 노는 모습을 보니 손주에 대한 애틋함과 사랑하는 마음이 더욱 솟구쳐 오르는 것 같다.
호주는 9월에 방학을 한다고 한다. 방학을 하면 한국으로 다니러 온다니 이제는 그 때를 기다릴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빨리 9월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호주의 맑은 하늘
사람은 사람과 어울리며 또 할 일이 있을 때 그 참 가치와 의미를 갖게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고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고 말한 성현의 말씀이 삶의 현장에서 바로 체득하는 순간이다.
계획상으로는 일 년 뒤에 아들도 회사를 명퇴하고 사랑하는 가족을 찾아 호주로 갈 예정인데 바라기는 모든 것이 뜻대로 잘 되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리고 호주에 간 손주와 며느리는 하루 속히 새로운 거처에서 안정이 되기를 바라며 4월부터 회사에 출근을 할 며느리는 회사에 잘 적응하여 맡은 업무를 잘 감당하고 이미 학교에 들어간 손주는 빨리 말을 익혀서 자유롭게 듣고 말을 할 수 있게 되며 잘 적응하여 안전하고 건강하게 그리고 즐겁고 행복한 미래를 키워가기를 기도하는 바이다. 멀리 떨어진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기도 외에는 다른 유가 없음을 믿고 열심히 기도하면서 훗날을 기대하리라.
그런데 전에 살던 집에서 청소를 할 때는 많이 걸려봐야 한 시간이면 족했는데 넓은 집에 오니 청소하는 것이 장난이 아니다. 부직포로 미는 데만 한 시간 삼십 분이 족히 걸리고 베란다까지 하다보면 두 시간이 후딱 지나간다. 넓고 좋은 집에 사는 만큼 청소에 대한 부담은 내가 감당할 몫이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쓸고 닦아야 할 것 같다.
오늘도 적적한 집안을 두 노인이 지키며 저물어 가는 저녁놀을 받은 모락산 정경을 바라보며 쓸쓸함을 달래고 있다.
역시 집안에는 식구들이 들락거리고 아이들이 뛰놀며 시끄러운 것도 다 사는 맛이 아닐까 하고 지난 일들을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