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KBS가 처음으로 모집한 전속가수
송민도가 방송국에서 이 노래를 부르자 이 노래는
순식간에 퍼져 나갔고 여기에 편승해서 레코드가 제작되었
습니다. 노래 작사자는 조명암으로 본명은 조영출이고 이밖에도
여러 예명을 썼습니다. 보수를 받던 직장이 있어서 그 외의 다른
곳으로부터 의뢰 받아 쓴 글은 예명으로 발표되는 것이 관례였던
시절이라 글 쓰는 분, 노래 부르는 분등, 연예활동을
하시던 분들은 여러 예명을 썼었습니다.
송민도 고향초, 해방공간의 방송 히트곡
이 노래는 김다인이라는 예명으로 발표된
노래였습니다. 조명암은 일제강점기 일본유학을 마치고
많은 방송 드라마와 노래 가사를 썼지만 불행히도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분이었습니다. 이 땅에서 공산당이 불법화 되기 전까지는
그의 활동이 자유로웠지만 정판사 사건을 계기로 공산당 활동이
불법화 되고 또 1948년 8월 15일 건국정부가 들어서면서
공산당은 발붙일 수가 없어 월북하고 말았습니다.
그로부터 그가 작사한 노래들은 오랜 기간
방송전파나 레코드를 제작 할 수가 없어서 입으로만
불려 왔습니다. 이 노래 역시 그 중의 한곡이고 1989년 월복지의
노래가 마지막으로 해금 되면서 자유롭게 불린 노래입니다. 1980년대까지도
북한에서 이면상 등과 더불어 핵심적인 문예 활동을 했던 조명암의 작품은
금기시되어 이면상 등 북한의 핵심적인 문예 활동을 한 사람들의 노래가
해금 되었을 때도 조명암의 노래는 묶여 있었습니다.
1989년 마지막으로 해금 된 것이지요.
방송국에서 송민도의 노래로 전파를 탄 이 노래는
송민숙이라는 이름으로 레코드가 제작되었습니다. 저작권이
별로 신경 쓰이지 않던 시절 송민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레코드가
제작되어 송민도 자신도 그 레코드를 접하고서야 본인이 부른 노래가
송민숙이라는 이름으로 보급도고 있음을 알고 깜짝 놀랐다고 했습니다.
송민도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아버지가 「하늘나라에 가는 길」
이라는 뜻으로 작명한 것이어서 개명이 용납되지 않았
으나 그대로 넘어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즈음 같으면 큰 일 날일이지요.
이런 노래들이 방송국에서 제작하고
방송 전파를 타면서 널리 퍼진 노래들이지만
생방송만을 했던 그 시절의 노래들은 레코드를 통해서만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땅에 방송이 출현한 이래 오랜 세월
방송은 생방송으로 이루어져서 기록이 없습니다. 또 녹음이나
녹화를 하던 시절에도 사용한 테잎을 지워서 다음 프로그램을 녹음,
녹화 해야 했던 시절의 자료들은 거의 없습니다. 이것이 오랜 세월 방송의
최대 단점으로 지적되기도 했습니다. 방송은 전파에 실려 날려 버리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특별한 경우에 간혹
녹음을 한 경우도 있었지만 6.25전란으로 모두 사라졌습니다.
그 많은 노래를 전파에 실려 보냈어도 방송국의 기록은
인용되지 않고 남아있는 레코드회사에서 취입한
그때의 노래들이 남아 있어서 그
노래를 사용합니다.
송민도 글 더 보기 - 영문자 클릭
나 하나의 사랑
http://blog.daum.net/jc21th/17780584
송민도와 안다성이 함께 부른 청실홍실주제곡
고 향 초
작사 조명암(김다인)
작곡 박시춘
노래 송민도
남쪽나라 바다멀리 물새가 날으면
뒷동산에 동백꽃도 곱게 피는데
뽕을 따던 아가씨들 서울로 가네
정든 사람 정든 고향 잊었단 말인가
장미꽃이 한잎 두잎 물위에 나리면
내 고향에 봄은 가고 서리도 찬데
이 바닥에 정든 사람 어디로 가나
전해오는 흙냄새를 잊었단 말인가
기러기가 울고 가는 고요한 밤에
이슬 맞은 들국화가 고이 잠들 때
별을 따는 아가씨들 서울로 가네
정든 산천 정든 땅을 잊었단 말인가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송민도 고향초-1.w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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