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이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했다는 기사가 오르고 그 책의 제목이 <채식주의자>라는 것을 들었을 때, 나는 맨처음 그 이미지를 떠올렸다. 빽빽한 아파트 단지의 좁은 아파트 베란다에 놓인 화분에 식물로 변해가는 몸을 심는 여자...
늘 막내 동생의 아파트를 방문할 때면 그 이미지가 오버랩 되곤 했다.
그 이미지는 아주 오래 전 읽었던 한 단편소설에서 길어진 것이다.
언제였던가? 20대 후반 쯤 . 아마도 <창작과 비평>의 단편선에서 우연히 읽었던 소설로 기억한다.
작가의 이름을 주목하고 간직하던 시절이 아니었다. 제목도 잊혀졌다. 출판사를 보고 책을 고르던 시절... 그렇게 작품들은 우연한 인연으로 내게 흘러왔다 흘러갔다. 그런데... 유독 하고 많은 소설들 중에서 그 이미지는 내 뇌리에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불쑥불쑥 어떤 현실 속에서 떠오르고 오버랩되곤 했다.
여자와 남자는 아파트에서 함께 산다. 부부였을 것이다. 아이는 없다. 어느날부터 여자의 몸이 변하기 시작한다. 긴 출장을 다녀오면 점점 더 변신한다. 나무가 되어가는 여자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는 남자. 여자는 말이 없다. 작가도 말이 별로 없었다. 남자의 관점에서 서술하니 여자의 변신의 이유를 알지 못했다. 급기야 여자의 거처는 배란다 화분으로 옮겨진다.
디테일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여자의 내리깐 눈매와 끝없는 갈증, 남자의 당혹 사이의 소통불능의 거리.. 그 거리를 부조리하게 수용하는 둘의 묘한 동거. 그런 감정들이 뭐랄까... 퍽퍽했다. 황량하고 스산하고...
식물이 되어가는 여인이라는 환상적인 설정, 혹은 상징은 신비로우면서도 낯설지 않았다. 나도 나무가 되고 싶을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다시 태어나면 나무가 되거나 아니면 고래가 되고 싶었으니까...하지만 확산에 대한 동경이었던 내 환상과 달리 소설은 극단적 유폐와 거부의 기운을 음산하게 풍기고 있었다.
지인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나 아무도 이 이야기에 쫑긋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10년 뒤 쯤, 대학로 소극장 '혜화동 1번지'에서 연극원 연출과 교수님이었던 윤영선 선생님 극작, 연출 공연으로 오른 연극, <나무는 신발가게에 가지 않는다>에서 이 이미지와 재회했다. 역시 여주인공이 나무가 되어 가는 이야기다. 연극 속 여주인공은 강원도 어느 산에 심겨졌었던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첫장면이 밥통에 관한 에피소드였다. 의미심장하다. 다시 한번 희곡을 읽어보고 싶어진다. 윤영선 선생님은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지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셨다.
왜 막내동생의 아파트에서 유독 그 이미지를 회상하게 되는 것일까?
내 아파트는 뒷 베란다는 뒷산을, 앞 베란다는 탁 트인 시야 건너 북한산을 조망하고 있다. 하지만 동생은 평촌의 밀집된 아파트 단지의 소형 아파트를 전전하고 있다. 동생의 아파트의 앞, 뒤는 닭장 같이 조밀한 아파트에 시야가 봉쇄되어 있다. 그 속에서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을 비슷한 패턴으로 출산하고 양육하고 관리하고 돈을 벌고... 노란 버스가 제 시간에 오고가고 아이들은 노란 가방을 들고 학원을 전전한다. 바깥이 없다. 어쩐지 숨이 막히고 뭐랄까 치열한 삶의 현장이지만 어쩐지 회색의 먼지 냄새가 떠도는 대기... 그 먼지가 퍽퍽하게 쌓인 실내를 연상시키는 것이다.
그 건조함은 내겐 늘 어떤 갈증을 일으키곤 했다. 그 갈증의 기억이 그 소설의 이미지를 불러들이고 있는지 모르겠다. 갈증을 꿀떡꿀떡 삼키며 탈출구 없는 일상을, 몸을 유지하고 몸을 낳고 몸을 양육하는 삶을 견뎌내는 이들...
...
<채식주의자>의 말미, '작가의 말'의 첫문장에서 나는 왜 이 제목에서 오래된 식물이 되는 여인의 이미지를 떠올렸는지 알게 되었다. 내가 읽었던 단편소설이 오래전 한강의 단편 소설, <내 여자의 열매>였기 때문이다. 한강은 언제가 그 변주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이 연작소설이 출발한 것은 그 곳이었다고 작가의 말을 시작한다.
그러고 보면 한강의 작품은 힘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무가 되고픈 여인이라는 설정은 여성들의 무의식 깊숙한 곳에서 공명하고 있는 갈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폭력으로 점철된 세상...
먹기 위해 치루어야 하는 생명의 비루함, 돈을 버는 일 속에 스며드는 폭력에 대해서...
그 먹이사슬, 약육강식의 연쇄고리 속에서 이제 그만이라 외치고 빠져나와 나무가 되고픈 여인들의 갈망, 아니 자족적인 존재가 되고픈 모든 존재들의 슬픔과 갈망.
...
트리안을 생각한다.
내 직장, 4층 남향의 창을 등지고 있는 내 자리 덕에 창턱에 화분들을 키우고 있다. 트리안이란 여리디 여리고 습한 식물이 있다. 유독 매일 물을 듬뿍 먹어야 하는 이 여린 것을 위해 출근하자마자 싱크대로 데려가길 어언 3개월...
무성하게 자랐다. 실처럼 가는 가지가 허공을 향해 뻗어 오른다. 중력을 이기고 수평으로 내 뒤통수를 향해 팽팽하게 버티고 선 그 여린 것의 당당함을 보면서... 부러웠다. 물만 먹고 오후의 햇살만 먹고...
트리안이 고고하게 뻗어가는 그 공간에서 우리는 오늘 비루했다. 무리지어 패거리를 만들고 약한 친구들을 위협하는 여학생들의 폭력성... 그것을 어찌해보겠다고 나선 우리는 무럭무럭 커져가는 생명력에 기생해 무성하게 자라나는 그 위협적 기운을 어찌할 수 없어 타협한다. 저 어린 것들과 씨름하느라 더 이상 망가지고 싶지 않다. 평생... 계속 태어나고 이 세계에 던져져 길들여져야만 하는 무성한 동물적 생명체들을 가지치기 하느라 지쳤다. 이젠 내 존엄을 지키고 싶다... 그렇게 고개를 돌린다. 세상의 한 구석에서 먹이를 구하기 위해서 치루어내야 하는 이 끝도 없는 고역.
오늘 나는 비루한 하루를 살고 돌아와 채식주의자를 읽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끄덕이고 또 끄덕인다.
아마도 이제 그만!!!이라고 외치고 싶은 날이 온다면 나도 나무가 되고 싶어질지 모르겠다고...
달리 어떤 바깥이 있을 수 있겠는가? 먹고 먹혀야 하는 존재의 조건, 폭력성이라는 숙명에서 놓여나고 싶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