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강. 고려의 흥망성쇠
1. 고려는 어떤 꿈을 가진 나라였는가?
1) 해상세력의 꿈. 백제의 꿈.
고려는 해상세력이 세운 나라 - 개성지역의 작제건, 황해도 연안지방의 유상희, 개성부근 풍덕의 유천궁, 의령과 진주의 왕봉규,
나주의 다인군, 울산의 박윤웅, 영암의 최지몽 가문, 복지겸, 박술희도 아산만 지역 해상세력 출신.
해상세력이 평산지역의 고구려 유민세력과 결합해 고려 건국
고려건국 신화
6대조 호경 – 성골장군, 백두산에서 부소산 골짜기로 이주
5대조 강충 - 송악에 자리 잡음
4대조 보육 - 지리산에서 도를 닦음
3대조 진의 - 바다 건너온 당나라 숙종과 동침 작제건 낳음
2대조 작제전 – 16세에 부친을 찾아 당나라로 가다가, 섬에서 여우를 물리치고 용녀를 아내로 맞이함. 용궁에서 온 돼지를 따라 집터를 잡음
부친 용건 - 몽부인과 만나 왕건을 낳음
신화의 고구려 요소 - 백두산, 돼지가 집을 잡아줌
신라 요소 - 성골장군, 보육과 진의가 오줌을 싼 꿈을 꾸고, 산 것,
해양(백제) 요소 – 해민(당나라 숙종은 조작)이 조상, 여우 물리친 거타지 신화
고려는 고구려 부활을 꿈꾼 고구려유민의 절대적 지지를 건국했지만,
당나라 신라방 사람들(용녀)의 도움을 받은 세력인 해상세력인 왕건이 건국. 왕건은 고구려계와 백제계 모두의 후예이다.
2) 고구려의 꿈
궁예는 건국 후 고구려 유민들, 특히 패강진 일대 호족세력을 의식해 국호를 고려로 지었다.
왕건 역시 패강진 세력의 지지를 받고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국호를 고려라고 했다.
고려는 고구려 옛터를 회복하기 위한 북진 정책을 실시하고, 발해 유민을 적극 받아들여 다시 고구려를 부활하자는 꿈을 꾸었다.
고려는 신라가 방치해둔 평양을 개척하여 그곳에 관리를 파견하고 군대를 주둔시켰다.
고려 초기 최고 명장 유금필은 발해에서 분리된 부족민들을 제압해, 그들을 중심으로 기병대를 육성, 고려 통일에 기여한다.
또한 대광현을 비롯한 발해 유민 5만은 왕건의 강력한 지지기반이 된다.
왕건은 훈요십조에 5조에서 서경을 중시할 것을 당부했다.
하지만 훈요십조는 최지원의 사촌 아우인 최언위의 손자인 최항의 집에서 나온 것이라서, 원본인지 의심스럽다.
북진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이 되어 없고, 차현이남을 배척하라는 등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고려가 서경을 중시한 것은 왕건의 친척인 왕식렴으로 하여금 서경을 관리하게 한 곳에서도 드러난다.
고려는 942년 거란 사신을 귀양 보내고 선물로 보내온 낙타를 굶겨 죽이는 등, 거란에 대한 배척감정을 드러냈다.
고려는 947년 광군 40만을 육성하며 거란침략에 대비하기도 했다. 고려의 북진정책을 잘 보여준 것이 윤관의 9성이며,
묘청의 난 역시 북진정책을 수행하고자 함이다. 북진정책은 왕실과 고구려계 사람들의 지지를 받으며 실행되었지만,
국제정세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3) 신라의 꿈
935년 신라 경순왕은 나라를 바쳐 고려에 투항했다. 경순왕은 경주를 식읍으로 하사받았고,
신라의 귀족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고구려, 백제계에 비해 상층부 귀족들이 가장 많이 남았던 신라계 사람들은 8대 현종이 경주김시의 외손이 되면서 권력의 전면부에 등장한다.
이들의 꿈은 평화로운 가운데 경제적 부를 누리는 것이었으며, 국제관계에서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고 안정을 바라는 것이었다.
993년 1차 거란 침략을 받았을 때 할지론이 나온 배경도 신라 이래의 안정을 원하던 세력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서희의 고구려-고려 계승 주장과 달리, 신라계 후손인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고려 현종이 신라 왕실의 피가 섞였다는 사실을
강조하기도 하기도 했다.
2. 고려의 통일과 안정의 배경
1) 고려의 포용정책과 호족 제압
왕건은 소수파 – 일리천 전투(936.9)에서 전체 고려군 8만 6,800명 중 왕건직속은 2만여 명에 불과함.
왕건의 혼인정책은 당시 상황에서 불가피했다.
고려는 호족을 적극 포섭하는 한편, 반대로 호족을 억압하는 정책도 동시에 실시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호족을 억압하면 고려의 국력이 약해지는 문제가 있다.
그때 고려 왕실이 택한 방법이 고려에 뿌리가 없는 발해유민을 포용하고, 송나라 사람들은 적극 등용하는 것이었다.
특히 송나라의 종법제도는 고려 왕실이 선호할 만한 계층적인 것이었다.
또한 호족간의 투쟁으로 광종 즉위 시에는 해상호족들이 몰락하기 시작했다.
이심력을 가진 해상호족들의 사적 무역을 견제하기도 했다.
919년 오월인 추언규의 래투를 시작, 45회 158명 한인 귀화 사례 등장하지만, 실제로는 더 많은 이들이 고려에 왔다.
문종은 송나라 장정이 귀화하자, ‘타산의 돌이라도 나에게는 쓸모가 있다’며 기뻐했다.
하지만 재주와 기예를 갖지 않는 사람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후주출신 쌍기를 등용해 958년 과거를 실시한 것은 왕권 강화 목적이었다.
14세기 이제현은 호족 억압책을 쓴 광종을 옹호한 쌍기를 비판하기도 했다.
2) 토풍과 당풍의 조화
왕건은 훈요십조에서 신라 이래로 중국의 풍습을 받아들였지만, 꼭 다르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고려는 천신신앙, 산악신앙, 풍수지리 등 토풍을 중시했다. 그러면서도 당풍, 즉 중국식 문화를 적극 수용하기도 했고,
고려 초기에는 이것이 조화로운 가운데 존속했다.
성종이 연등회와 팔관회를 정지하고, 사직단을 설치하는 등, 유교적 통치술을 발휘하며 호족을 억압한 반면,
993년 거란 1차 침략이 닥치자, 이지백은 연등, 팔관, 선랑 등의 일 부활할 것을 제기했다. 1010년 현종이 나주로 몽진.
나주에서 팔관회를 개경에 버금가는 지위 누리게 허락한 것 역시 호족, 토풍이 고려를 유지하는 힘이었기 때문이다.
3) 3가지 천하관의 공존
다원론적 천하관 – 外王內帝, 전략적 사대. 강온양면책, 중국문화 이해 및 전통문화 중시
고려시대 주류 천하관. 화이론적 천하관 – 제후국 분수 지켜야, 사대는 명분적 예법. 전통문화 경시
자국중심적 천하관 – 고려 군주만이 천자, 황제. 토속신앙과 연결. 비기류 신봉, 전통문화 강조.
고려는 다원론적 천하관을 중심으로 3가지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었다. 다원론적 천하관은 전통문화를 중시하면서도
중국문화를 수용하는 현실적인 정세인식이었다. 문제는 전쟁이었다.
몽골과 전쟁에서 패하면서, 고려는 화이론적 천하관이 중심 천하관이 될 수밖에 없었다.
원-명 교체기에 고려의 자국중심적 천하관은 다시 부할하지 못한 것은 현실적 힘에 의거했기 때문이다.
4) 다양한 공동체 의식
자위(自衛)공동체 – 특수행정구역 900여곳. 외적과 전쟁에서 지역공동체가 성 방어전 전개.
고려 사회의 벌집구조가 존속한 이유
삼국유민의식 – 무신집권기까지 존재, 차츰 사라짐
삼한일통의식 – 차츰 강해지며, 몽골간섭기에 더욱 분명해짐.
삼국유민+ 만주에 남은 발해유민(여진) 포함한 요하이동천하의식 – 국가 단위를 넘는 집단의식,
번신(藩臣) 개념으로 여진, 우산, 탐라를 이해한 광위의 집단의식이다.
이런 의식과 더불어 자국중심적, 다원론적 천하관, 그리고 현실적인 동아시아 3~4강국의 병존이 결부되어
북조, 서조, 해동천자 3자 공존의 현실인식이 성립되기도 했다.
5) 고려의 현실 - 중위국
대제국 주변에 위치한 中位국의 특성 – 외왕내제적 특성 – 대외교섭은 쇼군(왕), 안에는 천황.
고려 – 탐라, 우산, 여진 등 제후로 삼는 것을 요, 금, 송이 간섭 못함.
대제국의 변화는 곧 중위국의 변화 초래
대제국에 맞설 이익선 보호가 과제, 자국내 단결이 중요.
- 고려의 이익선은 여진족, 요하이동을 확보하는 것이 현실적 과제가 되었어야 했다.
조선시대 홍경모는 봉황산을 조선의 문호(門戶)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이곳을 거란에 빼앗기고 압록강을 국경으로 삼은 고려는
이빨을 버리고 목구멍을 드러낸 것이라 다름없으니, 누가 두려워했겠느냐며,
고려가 고구려에 미치지 못한 원인이 봉황성을 갖지 못한 탓이라고 했다.
3. 고려사의 변곡점
1) 윤관 9성의 회부
고려는 수렵민의 특성과 농민의 특성, 해민의 특성을 고루 갖춘 나라.
윤관 9성 회부는 고려의 한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
동북지역의 특성을 고려하지 못한 고려의 조급함과 농업중심 사회의 단점
제국적 기질을 상실한 고려의 약점
왕실과 귀족의 갈등이 원인 – 강력한 추진세력이 미약했다. 리더십 부재.
윤관 9성 회부 이후, 고려는 이익선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
여진(금)이 상경회령부(하얼빈)에서 요양을 지나 중도대흥부(북경)으로 이동하며, 제국으로 성장한 반면, 고려는 서경천도를 못함.
2) 묘청의 난 실패
단재 신채호가 주장한 1천년래 제일의 사건
고려의 정체성이 변한 사건
3) 무신의 난
고려의 총체적 문제점이 드러난 사건
현실 안주 문신들의 문약함.
무신은 전략도 없이 권력 쟁취에만 몰두, 국방력 약화 초래
신분 변동 초래, 새로운 국가적 에너지를 만들어내지 못함.
4) 몽골 침략과 삼별초의 난 실패
몽골군에 패한 것은 어쩔 수 없는 국력의 열세 탓.
무능한 정부가 가져온 불신의 확대가 더 문제
고려사회의 총체적 변화. 고려 벌집구조의 붕괴 시작
고려의 경제적 약화 초래
삼별초의 난 실패는 특히 고려의 해군력 약화와, 호족세력 몰락의 원인
반국가 행위자의 급증 초래
5) 고려의 발목을 잡은 왜구
고려의 지방 세력 몰락시킨 원인
고려의 경제적 몰락, 상업세력, 인프라 몰락 초래
새로운 세력 성장 - 신흥 무장세력 성장(최영, 이성계 등),
공민왕 개혁 정치의 무산시킨 원인
신돈의 급진 개혁(전민변정도감)에 대한 권문세족의 반대도 원인
원-명 교체기에 고려의 북진을 막은 원인
6) 명나라의 압박.
철령 이북 차지하려 압력 가중 요동 정벌론 위화도 회군(1388년)
이성계 권력 장악, 조선 건국으로
신진사대부 성장의 배경. 화이론적 세계관이 정착하게 된 배경
4. 보다 근본적인 고려 멸망의 원인
사라진 북진의 꿈 – 이익선 확보 못함. 중위권 국가의 비극
사라진 해상왕국의 꿈.
안주의 결과물 – 제후국은 부패한다.
지배층과 민의 분리 – 축제가 사라짐
지방세력의 몰락 – 군사력의 약화. 지방문화와 경제 몰락.
몽골의 침략과 극복과정의 실패에서 고려는 멸망의 길에 들어감